력사를 찾아서
청(만주) (5) 淸 제국 역대 황제의 성씨는 '新羅金氏' 본문

■ 淸 제국 역대 황제의 성씨는 '新羅金氏'
김운회 교수 2007-08-24
강희황제, 본명: 김현엽(金玄燁)
중국에는 지금 강희제의 일대기를 다룬 <康熙王朝>, 강희황제의 민간 암행기를 다룬 <康熙微服私訪記>, 강희황제가 즉위하기까지의 청나라 초기 궁중비사를 다룬 <孝庄皇后秘史> 등 청조와 강희황제를 조명하는 TV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중이다. 특히 <강희왕조>는 근년에 제작된 것을 재방하는 것인데 극중 대만을 통일한 강희제의 업적을 통하여 최근 독립기도를 보이고 있는 대만에 대해 중국통일의 당위성을 강변하는 중국 관방의 의지가 그 배경에 깔려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중국작가 二月河의 <강희황제>, <옹정황제>, <건륭황제>의 제왕삼부곡 대하역사소설은 중국에서 공전의 판매량을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중국 역사상 한 무제, 당 태종이 걸출한 명군으로 꼽히지만 이들은 먼 역사 속의 인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청조 강희제와 그의 뒤를 이어 백여년간 중국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태평성대를 이룩한 옹정, 건륭 삼대 황제의 치적만큼 현대 중국인들에게 실감을 주지는 못한다.
오늘날 중국이 인구대국이 된 배경에는 이 시대의 안정과 번영이 바탕이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대만, 내몽골, 외몽골, 신장(투르키스탄), 서장(티베트)을 정벌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여 역대 어느 왕조보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국가를 이룩하였다. 말하자면 영토와 민족 구성 등에서 현대 중국의 모양을 결정한 왕조가 바로 淸朝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근대사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가 이민족의 통치에 의해 이룩된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조가 한국인에게 주는 인상은 매우 착잡하고 왜곡된 측면이 있다. 우선은 두 차례의 胡亂을 통해 조선왕조와 백성들에게 씻기 어려운 치욕을 안긴 역사적인 사실이 몽고의 元朝와 함께 淸朝를 우리 민족사의 침략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점이다. 또한 중화문명의 정통에서 벗어나 중원에 오랑캐풍의 변발과 호복을 잔혹하게 강요하고 결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양문명의 동점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약하고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종이 호랑이의 형상으로 비쳐지고 있는 편이다. 明을 멸하고 등장한 청조를 일찍이 조선시대에도 내심 멸시하고 중화의 대를 이을 정통은 오히려 동방의 조선에 있음을 상정하는 사조가 형성된 적이 있었다.
봉건시대가 종말을 고한 이후 중국에는 청조를 포함한 이민족 왕조들을 역사기술에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큰 무공을 세운 사람들을 중화영웅으로 찬양하고 이민족 정권에 영합한 한족을 한간(漢奸)으로 격하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는 홍콩, 마카오를 접수한 이후 대만문제와 소수민족 분리주의자들을 의식하여 중화민족의 단결과 화합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렬하게 일고 있다..‘중화민족’이란 한족을 포함하여 오늘날 중국 영토내에 거주하는 56개 민족을 통칭하는 정치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다. 관련하여 역사교육에서도 한족과 이민족 정권을 구분하는 기술이 줄어들고 역사적인 영웅의 상정도 한족 중심의 시각을 탈피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근대사 절정의 盛世를 이룩한 강희제 등 청조 세 황제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또한 최근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는 중국 관방학계의 東北工程도 멀리는 이러한 중국사회의 분위기와 맥이 닿아 있다.
중국 최대의 자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으로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강희제는 여덟 살에 제위에 올라 60년을 넘게 대륙을 통치했다. 유사이래 어떤 황제도 이렇게 오랜 기간 재위했던 적이 없었다. 부친인 선제 순치제가 젊은 나이에 병사함으로써 어린 나이에 황위를 물려받은 愛新覺羅 玄燁( 강희제의 실명 )은 조모 효장황태후에 의해 철저하게 제왕학을 교육받으며 자랐다. 선제의 유지에 따라 네 명의 보정대신이 그를 보필하였으나 마침내 14세의 나이에 친정에 임하여 중국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영명한 군주가 되었다.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의 이민족을 제압한 황제, 중국역사상 유일한 학자풍의 제왕, 문치와 무공의 재능을 겸한 군주, 중화문명을 문화적으로 집대성한 황제 등이 강희제를 묘사하는 서술들이다. 강희제는 어려서부터 제왕의 길을 교육받은 준비된 제왕이었지만 선천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외에도 결단력이 뛰어난 제왕이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에 밴 학문의 대한 소양은 평생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게 했고 이즈음 선교사와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활발하게 도입되기 시작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했다.
무엇보다 강희제를 성군이 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으로 중원의 대통을 이은 이민족 제왕으로서의 무한한 책임감이었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한시도 변함없이 선조가 남긴 敬天法祖(경천법조), 勤政愛民(근정애민)의 유훈을 받들어 집정에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황제가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상주문의 수는 50건 정도였는데 그는 하루에 500건의 업무를 처리했다. 물론 직접 그가 붓을 잡거나 서류를 작성하지는 않았음에도 거의 매일 자정을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러한 집정자세는 아들과 손자인 옹정, 건륭황제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는데, 특히 옹정제는 재위 10여 년간 집정의 책임감 때문에 한번도 북경성을 벗어나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강희황제의 영명한 統治術과 用人術은 오늘날 중국집정자들의 전범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강희제는 이상적인 제왕의 자질을 모두 갖춘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제왕이란 관건이 되는 중요한 일과 원칙만 챙기고 세세한 일은 관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일에 성실하지 않으면 온 세상에 근심이 쌓이고, 시기를 놓치면 장기간의 우환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만사에 철저하려 했다. 또 康熙帝는 재위 중 治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엄청난 열의를 가졌다. 그는 거의 30여 년을 치수에 직접 참여하고 지휘했는데 치수에 능한 장인들을 정규 과거를 통해서는 발탁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유지를 내려 治水, 천문, 지리, 數術(산술), 역법, 詩詞, 機械 등 한 가지 학문이나 재능에만 능통하면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康熙帝는 탁월한 用人術을 가졌다. 그는 신하들을 발탁함에 있어 正道란 君子와 小人의 장단점을 정확히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자는 모함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소인에게서는 군자가 가지지 않은 재주를 발견하여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康熙帝는 황제로서 많은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백성을 위하지 않는 일에는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로서의 본분과 책임에 성실했고 포용력 있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대신들의 귀감이 되었다. 청말의 대신 曾國藩은 강희제를 다시 보기 어려운 성군으로 심지어 周文王과 같은 반열에 올릴만하다고 상찬했다.
강희제는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있어 설사 불가피하게 국법을 거스르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江南省 淸江 縣令 于成龍이 황하 및 회하와 운하가 합쳐지는 淸江으로 홍수의 위협을 피해 사방에서 이재민들이 몰려들어 1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순식간에 10만명으로 불어나자 直隸(직예)로 보낼 皇糧(황궁의 식량)을 독단으로 풀어 이재민들에게 배급한 사건이 있었다. 총독이 상주문을 올려 우성룡을 탄핵했다. 물론 우성룡을 비호하는 순무 方皓之의 탄원서도 있었다. 康熙帝는 이 사건에 대해 양측의 의견을 수렴한 후 국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성룡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는 우성룡을 조정의 명령 없이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황량일지라도 감히 빼내 백성을 구휼한 자상하고 인간미있는 충성스런 관리로 보았다. 청백리 우성룡의 일대기는 연전 중국 중앙기율위원회와 감찰원의 후원하에 별도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된 적이 있다. 날로 늘어나는 독직사건을 줄이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중앙당의 기도로 이루어진 일이다.
강희제의 생애와 통치술이 영화와 드라마 외에도 역사소설 그리고 成功學(처세술에 해당하는 중국어) 관련서 등 출판의 빈번한 소재가 되는 것은 그의 일생과 통치기가 그만큼 비범하고 드라마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소년황제로서 친정에 임했을 때 보정대신으로 당시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고 황권을 유린하던 오보이(鰲拜)를 기지로 제거한 일이며, 개국공신 吳三桂 등이 일으킨 ‘三藩의 난’을 평정한 일,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고 몽골, 티벳, 신강, 대만을 제압한 일 등 정치적인 풍상이 허다한 외에도 겨우 몇 십만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건립한 청조가 1억이 넘는 다수 한족을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강희제가 평생을 통해 다진 왕조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강희제는 평생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완벽한 군주였던 강희제를 평생 번뇌하고 고민하게 했던 한가지 문제는 후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황위 계승을 둘러싼 골육상쟁, 조정대신들간의 반목은 그가 장장 61년을 재위한 후 병사하고 넷째아들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그 막을 내린다. 순치제도 황타이지로부터 어린 나이에 제위를 물려받고 섭정왕 도르곤에 의해 황위찬탈의 위기를 맞았으나 모친 효장황태후의 기지와 노력으로 제위를 보존하고 마침내 강희제의 등장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옹정제의 등장도 우여곡절 속에 이루어지게 되는데 청조 초기의 궁중사는 드라마적인 상황이 많아 관련서를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옹정제는 황위 계승상의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후에 太子密建法(태자밀건법)을 제도화하게 된다.(태자밀건법이란 후계자를 미리 공표하지 않고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밀봉하여 황제 집무실의 ‘正大光明’이라 쓴 편액 뒤에 두었다가 황제의 사망 후 대신들의 입회하에 개봉하여 후계자를 공표하는 제도를 말한다)
淸을 건국한 만주족은 예로부터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의 만주 땅을 생활터전으로 살아온 민족으로 肅愼(숙신), 邑婁(읍루), 말갈, 女眞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왔으며 우리 민족과 같은 퉁구스 계열로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말갈족이었는데 오늘날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키면서 말갈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세운 淸을 민족사에서 배제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므로 우리 민족사의 外史로라도 다루어야 한다는 학계 일부의 주장이 있을 정도다. 더구나 청조의 황실인 愛新覺羅(애신각라)氏가 멀리는 新羅金氏와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만주어에서 애신은 金, 각라는 族을 뜻하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황족의 다수가 자신들의 성을 金씨로 삼았다고 한다.(12세기 만주와 중국 화북지방을 차지한 金나라 개국자 아골타阿骨打)의 조상이 황해도에서 여진지역으로 건너간 新羅金氏라는 역사기록이 있다. 청조의 전신인 누르하치의 金나라를 역사상 아골타의 金과 구별하여 後金으로 기술하고 있다.)
소수민족 정권으로서 중원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역사상 유례없는 성세를 이룩한 淸朝 康雍乾 삼대 황제의 치적과 지혜, 인생 이야기는 오늘날 가히 국내의 중국붐을 맞아 대륙경영의 제대로 된 지침서와 안내서가 궁핍한 한국과 한국인들을 위하여 우리 출판계의 신선하고 훌륭한 또 하나의 기획 소재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관련자료1]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의 실록인 『금사(金史)』에서는 “금나라 시조는 그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 『金史』本紀第一「世紀」)”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이 남송(南宋) 때 저술된 북방사(北方史)인 서몽신(徐夢莘)의『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에도 있고 남송 때 금나라 견문록인 홍호(洪皓)의『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 측의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합니다.
1778년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황명(皇命)으로 펴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 또는 힘보(函普)]께서는 원래 고려에서 오셨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께서는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遼)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 初從高麗來[按通考及大金國志 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 往二國呼稱不爲分別 : 『欽定滿洲源流考』卷7, 部族 7 完顔)”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금(金)일까요? 물론 쥬신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금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죠. 일단 당사자이신 금나라 태조(아골타)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遼)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애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아이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2卷 太祖紀).”
즉 금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국가(만주의 ‘영원한 신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로시터(Rossiter)나 포콕(Pocock)의 지적처럼 미국인들이 ‘영원한 영국(England)’을 건설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듯이 말입니다.
금ㆍ후금의 황실이 신라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신라왕의 성을 족성(族姓)으로 삼은 데에는 천년왕국 신라의 부활을 꿈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록에는 때로는 고려, 때로는 신라로 나타나있는데 그것은 신라는 이미 망해 없어졌고 고려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혼동일 뿐입니다. 따라서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의 망국민(亡國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문이 생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가 세워지면 대체로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같은 민족이 건국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요. 신라에서 고려로 바뀐들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함보라는 분은 굳이 고려를 떠나고 그 후손들은 나라 이름을 또 금(경주 김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분이 신라의 왕성(王姓)과 그 원형을 지켜야만 한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진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엔 이 분이 신라의 왕족이었거나 아니면 신라의 귀족계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분의 일대기에 나타난 것으로 봐서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인 듯한데 당시의 상황에서 본다면 귀족 이상의 계급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죠.
만약 귀족이라면 왜 고려를 떠나야 했겠는가 하는 문제도 남아있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고려의 호족화(豪族化)되는 과정에서도 굳이 고려를 떠나야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 분의 형님은 중이 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김함보의 신분이 높고 고려에는 적응하여 살아가기 힘든 상태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비슷한 시대의 기록인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김함보가 신라 왕족이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만주 쥬신은 반도 쥬신과도 강한 형제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금나라의 태조가 고려에 보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있습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과거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고려사(高麗史)』).”
여기서 말하는 여진(女眞)이 바로 쥬신에 가까운 발음이 나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만주 쥬신은 ‘영원한 신라의 꿈(Millennium Shilla)’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즉 처음에 천년의 제국 신라가 망할 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들은 영원한 신라를 꿈꾸었겠지요. 마치 스사노오가 ‘영원한 가야(Millennium Kaya)’의 꿈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만주 쥬신들은 유달리 자기들은 신라와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거부하고 중국만을 짝사랑하는 반도 쥬신이 문제지요. 일단 계속 신화를 봅시다.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은 99일의 표류를 거쳐 삼성 지방에 도착했다. 뿌꾸리융순은 마을사람들에게 ‘나는 선녀가 낳은 천동(天童)인데 당신들을 다스리러 왔소’ 하고 자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물 긷던 처녀와 결혼하였다. 몇 명의 목곤달(穆昆達 : 만주어로 족장)의 주도로 그날로 혼례를 치르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예를 올리고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때 이후로 다시는 싸우지 않았다. 뿌꾸리융순은 삼성 지방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씨족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그를 통해 화해하여 모두들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여 부락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다. 뿌꾸리융순은 삼성지방의 사람들을 인솔하여 어뚜리성(鄂多哩城)을 건설했다.”
바로 이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이란 분은 만주족의 조상이 되는 분입니다. 먼 훗날 청나라를 건설한 태조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이 분의 직계 후손이라고 합니다. 즉 『청조실록』에는 뿌구리융순이 “너희는 내게 복종하라. 나는 천녀의 아들이고 성은 아이씬자오뤄, 이름은 뿌꾸리융순이다. 하늘이 나를 낳게 한 것은 그대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족들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만주라 했고 누루하치는 바로 그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이지요[『청실록(淸實錄 : 中華書局 影印本)』태조실록(太祖實錄)].
이 내용은 『청사고(淸史稿)』의 내용(姓愛新覺羅氏,諱努爾哈齊.其先蓋金遺部.始祖布庫里雍順母曰佛庫倫相傳感朱果而孕.稍長,定三姓之亂,衆奉爲貝勒,居長白山東俄漠惠之野俄染里城,號其部族曰滿洲.滿洲自此始)과도 대동소이합니다. 즉 이들 기록들이 청 태조의 선조들은 모두 금나라가 남긴 부족이라는 것이지요. 만주 쥬신들에게 있어서 장백산(백두산)은 야루(鴨綠 : 압록강), 훈퉁(混同), 아이후(愛滹) 등 세 무렌(江 : 강)의 근원이며 만주 구룬(國 : 나라)의 선조는 장백산(백두산) 동쪽 보구리의 볼후리 호수가에서 나셨다고 합니다. 뿌구런 이라는 이름의 압캐 살간(하늘의 여인 : 天女)의 자손들이죠.
만주 쥬신의 시조는 특이하게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다기보다는 부족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화합을 도모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화는 단지 신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건국 시조이신 김함보의 일대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시죠.
“금나라 시조는 휘(황제, 또는 왕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가 함보(函普)이고 원래는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세였다. 시조(함보)의 형님인 아고내(阿古迺)는 불교에 심취하여 고려에 남으려고 하면서 ‘먼 훗날 자손들이 다시 만나는 자리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기가 어렵겠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조는 아우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갔다. 시조는 혼돈강[混同江 : 지금의 헤이룽강(黑龍江)]의 완안부(完顔府)로 들어가 복간수(僕幹水)에 자리를 잡으시고 보활리는 야라에서 살았다. 그 후 호십문(쥬신의 10여 부족)이 갈소관으로써 태조(아골타)에게 귀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 선조 세 분이 서로 이별하여 떠났는데 자신은 대략 아고내의 후손이고 석토문(부족명)과 적고내(부족명)는 보활리의 후손’이라고 하였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 后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 其后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盖自謂阿古乃之后 石土門迪古乃 保活里之裔也 : 『金史』本紀第一 世紀).”
여기서 보면 금나라의 시조이신 김함보의 형제가 세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화에서는 하늘로 올라갔던 세 선녀들이 다시 내려왔다가 두 언니는 그대로 올라가고 막내 선녀만 아이신자오뤄 뿌꾸리융순을 낳는 장면만 나오지요. 이것은 김함보의 형제들 가운데 김함보만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삼성(三姓)의 땅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신화라는 것이 현실을 자로 잰 듯이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신화에서는 시간의 압축이나 변형도 자주 일어나죠.
여기서 다시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은 자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물 긷던 처녀와 결혼하였다.”는 대목을 봅시다. 이것은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혼돈강[混同江 : 지금의 黑龍江]의 완안부(完顔府)로 들어가 그 지역의 현녀와 결혼한 것과 부합됩니다. 물론 신화에서 결혼한 사람은 물 긷는 처녀인데 역사서에 나타난 실제의 사실은 환갑(60세)이 넘은 노처녀와 결혼합니다. 『금사』에는 “부족에 한 현숙한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로 배필을 삼아서 같은 부족이 되겠다고 하니 시조가 좋다고 허락하였다(部有賢女 年六十而未嫁 嘗以相配 仍爲同部 始祖曰諾 : 『金史』本紀第一 世紀).”라고 되어있죠.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면이 있긴 합니다.
과거에 민족적 영웅의 그릇을 가진 사람은 어린 처녀와 결혼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미 60이 넘은 노파와 결혼을 하다니요? 그래서 제가 보기엔 여기서 말하는 현녀(賢女)라는 것은 샤먼이자 강력한 정치세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김함보는 이 세력을 발판으로 하여 흩어진 부족을 통합해내는 힘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녀와의 결혼 후 김함보는 드디어 여러 부족들의 염원대로 부족들의 현안 문제인 부족간의 갈등을 수습하기 시작합니다. 삼성의 사람들이 비록 용감하지만 화목하지 못하여 그 전쟁이 매우 처절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전투력이 강하여 어느 한 부족이 압도적으로 이겨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피해가 날로 커갈 수밖에요. 이 과정에서 부족 통합의 분위기가 일어나있게 되고 이 시기에 김함보가 송화강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신화에서는 같은 형제들 간의 싸움을 안타까이 여긴 만주 쥬신의 성모(聖母) 뿌구런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자 천손인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을 보내어 이 문제를 수습하려 합니다.
실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사(金史)』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상세히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상세히 보도록 하죠.
“시조가 완안부에 이르러 거처한 지 오래되었는데 그 부족 사람이 서로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이 서로 미워하여 싸움이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부족에 한 현숙한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로 배필을 삼아서 같은 부족이 되겠다고 하니 시조가 좋다고 허락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깨우쳐 말하기를 ‘한 사람을 죽여서 싸움이 풀리지 않는다면 손상이 더욱 클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 한 사람을 죽이는데 그치고 부내에 있는 재물로서 보상을 하면 싸움도 없이 득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설득하니 피해자 집에서도 이에 따랐다. 그래서 ‘무릇 사람을 살상한 자는 그 집에서 사람 1명, 말과 소 각 10마리씩 황금 6량을 징발하여 피해자 집에다 보상하면 이내 양측은 화해해야 하고 사사로이 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여진의 풍속에서 살인하면 말 30마리로 보상하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始祖至完顔部,居久之,其部人嘗殺它族之人,由是兩族交惡,哄斗不能解。完顔部人謂始祖曰 若能爲部人解此怨,使兩族不相殺,部有賢女,年六十而未嫁,嘗以相配,仍爲同部。始祖曰諾 乃自往諭之曰 殺一人而斗不解,損傷益多。曷若止誅首亂者一人,部內以物納償汝,可以无斗 而且獲利焉怨家從之。乃爲約曰 凡有殺傷人者,徵其家人口一、馬十偶、牸牛十、黃金六兩,與所殺傷之家,卽兩解,不得私鬪。曰謹如約。女直之俗,殺人償馬牛三十,自此始 : 『金史』本紀第一 世紀).”
그래서 금나라 시조가 살인 사건으로 깊어진 부족간의 갈등을 물질적인 보상을 통하여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부족 통합의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금나라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쥬신의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평화(平和)의 중재자로서 부족 통합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위대하고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신(男性神)보다는 부드러운 여성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과정은 신화에서 말하는 “뿌꾸리융순은 삼성 지방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씨족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그를 통해 화해하여 모두들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여 부락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다.”라는 말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에서 만주 쥬신은 매우 신라적(新羅的)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대적으로 익숙한 편인 데다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신라의 신화나 역사를 보거나 각기 다른 성의 왕들이 평화롭게 정권교체를 한다든가 가야 세력과 쉽게 융합하는 등의 과정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합니다. 일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차별이 거의 없어집니다(이것은 유목민의 특성이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그 근본은 가야세력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 장군은 백제 정벌군ㆍ고구려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합니다(참고로 청나라 황제들은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로 삼고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 왕공의 자제들과 결혼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 장군의 조카(김법민 : 문무왕 -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명왕후의 소생)가 바로 신라왕이 되지요.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이와 같이 외부에서 온 사람을 이만큼 출세시켜주는 왕조가 달리 있겠습니까? 이런 점들은 한마디로 유목민적인 특성입니다. 물론 같은 천손족(天孫族)이라는 의식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이 같은 현상이 농경민인 중국에서는 결코 나타나기 힘듭니다. 오히려 오랑캐로 찍혀서 경계 대상 1호가 될 뿐만 아니라 고선지 장군과 같이 여차하면 모함하여 죽여 버릴 것입니다. 뒤에 몽골 쥬신이나 만주 쥬신, 환국(桓國)과 한국(韓國 : 汗國) 등을 분석할 때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죠.
그러므로 북위 - 금나라 - 후금(청) 의 신화에 이르는 과정이 쥬신이라는 민족적 특성을 가지면서 확장ㆍ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와 후금의 황제들은 영원한 금의 제국, 즉‘영원한 신라(Millennium Shilla)’를 꿈꾸고 있었고 그것이 금나라·청나라의 건국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금나라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중시하는 유목민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죠[사실 당시 삼국(고구려ㆍ백제ㆍ신라) 가운데 여왕(女王)이 나라를 다스린 곳은 신라뿐이죠].
(3) 신라인 김함보에서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까지
만주 쥬신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금나라 태조(阿骨打)의 조상으로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김함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주 김씨이자 안동(安東) 김씨의 시조인 경순왕(敬順王 : 김부)의 후예라고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후손들이 일부는 금강산으로(마의태자 이야기), 또는 강원도 철원 땅으로, 일부는 장백산(백두산)으로 들어가서 후일을 기약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시기적으로 봐서는 신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잔여세력들이 장백산으로 만주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요.
결국 금나라와 후금(청)의 건국신화는 신라에서 장백산을 거쳐 만주로 들어간 김함보라는 신라의 왕손(?), 또는 신라 귀족(?)의 일대기와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세 선녀는 결국 김함보의 형제분들을 말하고 아이신자오뤄뿌꾸리융순이 만난 물 긷는 처녀는 바로 환갑(60)이 넘은 현녀(賢女)였던 것이지요.
신화에 따르면 이 처녀는 김함보의 배(작은 뗏목)가 좌초된 것을 가장 먼저 보고 마을로 달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던 분입니다. 그리고 김함보는 무력(武力)이나 카리스마보다는 깊은 학식으로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합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삼성 지역의 만주 쥬신들은 김함보를 부족장으로 모시게 됩니다(衆奉爲貝勒 : 『淸史稿』本紀一). 이러한 화합의 힘이 이 분을 만주 쥬신의 시조로 만든 것이지요.
즉 이 김함보라는 분은 12세기 초 금나라를 건국(1115)하신 금나라 태조[아골타(阿骨打)]의 직계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금나라 태조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만주 쥬신을 규합하여 금(金)나라를 세웠고 세력을 확장하여 한족(漢族)과 가까웠던 요(遼)나라와 북송(北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南宋)과 대치합니다. 13세기 초에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키지만 그들의 풍속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15세기 초에는 명나라가 만주쥬신의 분포지역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합니다. 금나라가 멸망(1234)한 이후 청나라가 건국(1616)될 때까지 상당한 시련이 이들 만주 쥬신을 엄습합니다. 명나라 때 만주 쥬신은 크게 건주(建州 - 건주여진), 해서(海西 - 해서여진), 동해(東海 - 동해여진) 등의 3부로 나누어졌고 이 가운데서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삼은 건주여진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까지도 이들 사이에는 참혹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만주 쥬신들 사이에는 또 다시 민족 통합의 염원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을 신화는 어떻게 묘사할까요? 계속해서 만주 쥬신의 신화를 보시죠. 이마니시 하루아끼(今西春秋)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뿌꾸리융순은 장백산 동쪽 밝은 벌판의 어뚜리(鄂多理)라는 성을 서울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대가 지나자 한[王]들이 백성을 학대하므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족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오직 반차라는 한 아이만이 까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 때 이후 만주 구룬의 한[王]은 까치를 수호신이라고 보호하여 죽이지 않는다. 그 후 반차의 후손인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가 한[王]이 되어 구룬(나라)의 이름을 아이신(금)이라고 했다[今西春秋『滿和對譯滿洲實錄』(최학근 대역)(서울 : 1975) 1권].” 여기서 말하는 금나라는 흔히 뒤에 나왔다고 해서 후금(後金)이라고 합니다.
즉 후금을 건국(1616)하신 청나라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금나라의 멸망(1234) 이후 4백여 년간의 민족 분열과 한족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이겨내고 마침내 통일 대업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쥬신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청나라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쥬신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은 ① 땅의 지배자와 하늘과의 연계, 즉 천손사상(天孫思想)과 ② 새 토템 사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손사상은 다만 남성과 여성이 역할이 바뀌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분석해 드린 천녀(선녀) 신화로 충분히 이해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새 토템 사상으로 나타나는 까치는 만주와 한국 어느 곳에서도 길조(吉鳥)입니다.
청나라(만주 쥬신 : 만주족)의 건국신화는 여러 면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동호계열의 몽골과 숙신계열인 만주족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민족으로 배우고 가르쳐왔는데 신화를 보면 북위(동호계)의 신화와 몽골의 신화가 융합하여 만주 쥬신의 신화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달리 만주쥬신의 신화가 통합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 만큼 통합하기 힘든 것이 유목민족이기 때문이겠지요. 유목민들은 (삶 자체가 훈련이라고 하듯이) 농경민과는 달리 바로 무장군인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물리력으로 복종시킨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한족(漢族)의 시각에서 보면 여러 개의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라가 되었다가 이내 해체되기도 하고 또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되풀이하기도 하니 이해가 될 리 없겠죠.
유목민들이 통합을 강조하는 측면은 만주 쥬신의 창세신화(創世神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만주 쥬신의 창세기를 한번 요약해봅시다.
“태초에 물거품 속에서 아부카허허가 탄생한 후, 그의 몸으로부터 땅의 신 바나무허허와 태양의 신 와러두허허가 생겨났다. 두 번에 걸쳐 인간 세상에 대홍수가 일어나고 이어 남신인 아부카언두리가 등장하는데 그는 사람을 만들어 지상(地上)에 가서 살도록 보내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기에 인간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카언두리는 그 도제들에게 4개의 태양을 만들게 했으나 그들이 9개를 만들어 대지가 메마르게 되었다. 이 때 와지부(窩集部)의 산인베이지가 있었다. 그는 장백산 주인(長白山主)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아브카언두리가 하늘제사 때에 아름다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지상의 인간과 관계하여 난 아들이다. 산인베이지는 9개의 태양에게 1개만 남고 가라고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장백산 부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산인베이지는 부왕이 일러 준대로 물의 신(河神)과 땅의 신의 도움을 얻어 드디어 여러 태양을 없앤다.”[傅英仁 搜集整理, 滿族神話故事(北方文藝出版社 : 1985) 95~99족]
이 신화는 천신(天神) 예(羿)의 신화와 동이족의 조상으로 알려지고 있는 유궁국(有窮國) 군주 활의 명인 후예(后羿)의 신화와 대부분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태양을 활로 떨어뜨린다는 내용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주 쥬신의 창세 신화에 나타난 여러 개의 태양으로 인하여 서로 다친다는 말은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난립하여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산인베이지가 이들을 통일한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늘과 닿아있는 장백산신(長白山神)의 도움, 물의 신, 즉 하백(河伯)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만주쥬신은 하늘 - 장백산 - 하백의 도움 - 여러 부족이 통합과 화합 등의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늘과 장백산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로 선녀(천녀)입니다. 그 선녀(천녀)의 후손이 바로 아이신자오뤄, 즉 경주 김씨 집안입니다. 이 경주 김씨는 후에 금태조(아골타) - 후금태조(누루하치)로 이어져서 중국을 정벌하여 쥬신 천하를 열게 됩니다.
금나라와 청나라 황실은 유난히도 정신적으로 신라와 가까웠습니다. 마치 금나라 시조이신 김함보가 꿈꾸던 ‘신라(新羅) 영생(永生)의 꿈[Millennium Shilla]’을 끝없이 현실에서 이루려했다는 하나의 뚜렷한 증거로 볼 수 있죠(자손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성장하잖아요). 마치 일본의 스사노오가 ‘영원한 가야(伽倻)[Millennium Kaya]’를 꿈꾸고 아마테라스가 ‘영원한 부여(夫餘)의 꿈[Millennium Puyou]’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주 지역에서는 한족과 만주족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의 호적을 봐야만 ‘만인(滿人)’이라는 표시가 있을 뿐이지요. 만주 말과 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만주의 말이나 글은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배울 수도 없지요.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외부적으로는 만주어를 보존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만주어를 가르치는 곳은 단 한 곳뿐입니다. 그것도 만주 시골 벽촌에 낡고 초라한 초등학교에서 너덜너덜한 시험지 교재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수준입니다[2004 KBS 특별기획『위대한 여정 한국어』(2004)]. 그러면서 중국정부는 만주 문화를 보존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쥬신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 전체를 말살하려는 이 같은 만행(蠻行)은 세상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해야 합니까? 만주 쥬신이 꿈꾸어 온 찬란한 ‘천년 신라’의 꿈도 사라져갑니다. 수천 년을 지켜온 전통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져갑니까? 현대의 황제(黃帝) 모택동과 그가 이끈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역사학을 공부한다는 작자들은 침묵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 같은 역사의 문외한(門外漢)들이 전공 공부는 안 하고 역사 문제에 대해 핏대를 높이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잠시, 거란(契丹)의 시조 신화도 한번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옛날에 한 신인(神人)이 백마(白馬)를 타고 마우산(馬盂山)에서 토하(土河)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고 아가씨 하나는 청우차(靑牛車)를 타고 황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木葉山) 아래,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신인과 아가씨는 만나서 부부가 되었고 이들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이 자손들이 번성하여 거란의 8부가 되었다. 거란 사람들이 전쟁이나 봄과 가을의 제사 때 백마와 청우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간직하기 위함이다(『遼史』37卷「地理志」)”
이상이 거란의 시조신화인데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결혼 이야기 같지만 백마(白馬)와 청우(靑牛)라는 코드(code)가 숨어있습니다. 알타이와 우리 민족의 시원에 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에 따르면, 백마와 청우는 오랜 옛날부터 알타이 어족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마는 신남(神男), 청우차(靑牛車)는 천녀(天女)가 탔다는 것이지요(박시인, 『알타이 신화』344쪽).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거란(契丹)이란 이 분야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바로 쇠[철(鐵)]를 의미한다고 합니다[愛宕松男,『契丹古代史の硏究』(京都大 : 1959)].
이상의 신화들을 보면 고구려ㆍ몽골 - 북위ㆍ거란 - 금ㆍ후금 등의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분리하기조차도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들의 신화를 보더라도 숙신(만주) - 예맥(요동 만주) - 동호(몽골)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연계성을 가진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위의 신화와 몽골의 신화가 융합하여 만주 쥬신의 신화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바탕에는 고구려ㆍ부여ㆍ신라는 물론이고 단군신화가 흐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리국 -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 거란 - 일본 등에 이르는 여러 쥬신들의 신화가 결국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으며 신화를 통해서 봐도 이들(몽골쥬신ㆍ만주쥬신ㆍ반도쥬신ㆍ열도쥬신)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화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민족(쥬신)이라는 범주로 끌어들이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족(漢族)이 중심이 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종족을 범쥬신(Pan-Jüsin)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하는 데 무리는 없는 것이지요.
이제 기나긴 쥬신 신화의 분석도 끝이 났습니다. 원래 이 부분은 역사학계나 국문학계 모두에서 다루고 있지만 제가 보기엔 사학계는 신화적인 특성에 대한 분석이 불충분하고 국문학계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신화의 참모습과 묘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새로이 분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쥬신 신화에 대한 많은 이해가 있으셨기를 기대해봅니다.
<자료출처>
淸 제국 역대 황제의 성씨는 '新羅金氏' (chogabje.com) [ 2007-0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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