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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5) 1170년~1270년 무신정권 / 1172년~1198년 농민과 노비의 봉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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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5) 1170년~1270년 무신정권 / 1172년~1198년 농민과 노비의 봉기

대야발 2023. 11. 16. 13:39

 

 

 

 

 

100년에 이르는 무신집권기의 특징은 왕권의 '유명무실'(有名無實)과 집권한 무신이 중방(최고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도방(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이자 숙위기관), 교정도감(최충헌이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 정방(최우가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 등과 같은 기구를 통해 모든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들이 자주 교체됐다.

 

 

 

■ [역사줌인] 고려 문신들의 씨를 말리다 '무신정변'

파이낸셜뉴스 최경식기자 2021. 6. 19. 01:20

 
 

 

<정변의 역사 ⑦>
100년 무신집권기의 서막
이의방, 정중부의 무신정변 전말

 
 
경남 거제 둔덕기성. 무신정변 때 의종이 유폐돼 이곳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지에서는 '폐왕성'이라고도 불린다.
 
 
 
 

"...(중략)...이에 승선 이세통, 내시 이당주, 어사 잡단 김기신, 사천감 김자기, 태사령 허자단 등 모든 호종(扈從)한 문관(文官) 및 대소신료(大小臣僚) 환시(宦寺)가 모두 해(害)를 만나매, 쌓인 시체가 산(山)과 같았다. 처음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頭)를 벗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자는 다 죽여라라고 하였으므로 무인(武人)으로서 복두를 벗지 않은 자 또한 많이 피살(被殺)되었다.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제장(諸將)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武臣)들이 더욱 교만해져서 횡포하였다" -고려사절요 中

 

 
 

10세기 이후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근간으로 하는 고려 사회를 뿌리채 뒤흔드는 정변이 발생했다. 당시 정3품 상장군(上將軍)인 정중부와 견룡행수(牽龍行首) 이의방, 이고 등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조정의 문무(文武) 요직을 장악하고 경제력마저 독점하고 있던 문신들을 왕 앞에서 대거 척살(刺殺)했다. 그동안 중앙정치 무대에서 소외되고 문신들의 등쌀에 온갖 수모를 당했던 무신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정변을 단행한 것이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 사회는 100년에 이르는 엄혹한 '무신집권기'에 들어갔다. 정제되지 못하고 거칠었던 무신 세력들은 힘으로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고 왕권을 유린(蹂躪)했으며 상호 간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이에 따라 무신집권기 동안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최고 권력자는 계속 바뀌면서 고려 사회는 좀처럼 혼란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문신들의 씨를 말리며 고려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무신정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고려 사회의 문치주의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 할 때 그 주변에는 건국에 일조한 수많은 무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 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심지어 2대 왕 혜종(惠宗)과 3대 왕 정종(定宗) 교체기에 무신들이 대거 동원돼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4대 왕인 광종(光宗)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진출 통로인 '과거제'(科擧制)도 이 때 처음 시행됐다. 이로써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문신들은 비단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닌 무신들의 영역도 잠식(蠶食)했다. 고려 시대 군사를 맡아보던 관청인 병부(兵符)의 고위직도 문신들이 차지했다. 기실 외침이나 내란을 평정하면서 유명해진 강감찬, 윤관, 서희 등도 모두 무신이 아닌 문신들이었다. 문무의 양권을 손에 쥔 문신들은 경제력도 독점해나갔다. 문신들은 대외 무역 등을 통해 부를 계속 축적했고, 심지어 백성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갈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토지를 빼앗겨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백성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무신들의 수모와 거사 모의


문신들의 전성기는 무신들에게는 '재앙'(災殃)과도 같았다. 우선 문무를 넘나들며 요직을 꿰찼던 문신들과 달리 무신들은 정2품 이상의 관직은 감히 넘볼 수도 없었다. 정3품 상장군이 무신들이 올라갈 수 있었던 관직의 최대치였다. 더욱이 과거제인 문과(文科)를 통해 정식으로 등용되는 문신들과 달리 무신들은 이와 비슷한 무과(武科)도 없어 태생적인 한계를 노정(露呈)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 문신들과 연회를 할 때, 무신들은 여기에 결코 참여하지 못했고 그저 호위병의 역할만 수행해야 했다. 그나마 최고 관직이었던 상장군도 이 역할에 그쳤다. 특히, 당시 고려의 18대 왕이었던 의종(毅宗)은 주색(酒色)을 밝혀 시도 때도 없이 연회를 열며 무신들을 호위병으로 부렸다.

 

 

상황이 이렇자 당시 무신들과 그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상장군 정중부, 견룡행수(牽龍行首) 이의방, 이고 등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결국 이들은 거사를 모의하기에 이른다. 1170년 4월, 의종이 화평재(和平齋)로 행차했을 때 경치 좋은 곳에 다다르자 문신들과 또 다시 연회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도 무신들은 상장군부터 일개 병사 할 것 없이 호위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중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이의방과 이고는 뒤쫓아가 정중부에게 거사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피력했다. 문신들은 밤새 마시고 배불리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굶주리고 피곤한 세월이 계속되고 있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중부도 이 주장에 적지 않게 공감했다. 정중부 본인도 이전에 문신인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으로부터 수염이 촛불로 태워지는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중부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숙고(熟考)하자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신정변


화평재 행차 이후에도 의종의 사치스러운 연회는 자주 열렸고, 문신들의 오만함과 무신들의 수모는 계속됐다. 이전과 비교해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의종의 총애에 기대 함부로 나대는 환관 한뢰와 임종식 등의 '안하무인'(眼下無人)적인 행태는 더욱 심화됐다.

 

 

결국, 1170년 8월에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을 불러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거사 당일 의종은 개경의 덕적산 남쪽에 있는 흥왕사(興王寺)로 행차했다.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의종이 흥왕사에서 궁궐로 바로 환궁한다면 일단 거사를 미루겠지만, 만약 보현원(普賢院)으로 이동한다면 그 곳에서 거사를 단행하기로 합의했다.

 

 

고려의 운명의 여신은 후자를 택했다. 의종은 보현원으로 이동하기로 했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갑자기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라고 명했다. 오병수박희는 무신들 간에 무예를 겨루는 대회였다. 물론 문신들은 의종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를 즐겁게 관전할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이 자리에서 사실상 무신정변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장군이었던 이소응이 오병수박희에 참가했는데, 이소응이 대회 도중 힘에 부쳐 뒤돌아섰을 때 환관인 한뢰가 그 앞에 나와 패기가 없다며 노장군의 뺨을 후려쳤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이소응은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의종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선 무신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정중부는 일단 눈짓으로 말리고 한뢰 앞으로 가서 "정3품 벼슬인 이소응에게 너 같은 사람이 모욕을 주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이에 놀란 의종이 직접 정중부를 진정시키며 오병수박희에서의 상황은 종료됐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 진 셈이었다. 저녁 무렵 의종이 보현원에 이르자 마침내 이의방과 이고는 행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우선 왕명이라고 기만하며 순검군(巡檢軍)을 집합시켰다. 의종이 보현원 내부로 들어간 후 나머지 신료들이 각자의 처소로 물러나려 할 때, 순검군을 동원한 이의방과 이고는 그 자리에서 임종식과 이복기 등 신료들을 대거 척살했다. 이를 본 한뢰는 곧바로 보현원 내부의 의종에게 달려가 왕의 침상 아래로 숨었다.

 

 

의종이 보현원 내부로 진입한 무신들을 막으려 했지만, 무신들은 한뢰를 내놓을 것을 의종에게 요구했다. 의종의 용포(龍袍)를 잡고 버티던 한뢰는 이고가 휘두른 칼에 즉사했다. 이에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이 감히 왕 앞에서 무력을 행사한다며 책망하자, 더욱 격분한 무신들은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며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을 모조리 척살했다.

 

 

보현원에서의 거사가 성공하자 이의방, 이고 등은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무신들은 죄인 등을 다스리는 관청인 가구소(街衢所)에 있던 별감(別監) 김수장을 죽였고, 궁궐에 있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양순정,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를 비롯해 수많은 관료들을 척살했다.

 

 

뒤이어 의종과 태자를 폐위했고 의종의 둘째 동생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즉위시켰는데, 이가 바로 고려의 제19대 왕인 명종(明宗)이다. 이로써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이 중심이 된 무신정변은 성공했고, 약 100년에 이르는 엄혹한 무신집권기가 시작됐다.

 

 

 

■100년 무신집권기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왕정(王政)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반(反) 무신 항쟁이 일어났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과 그 이듬해에 서경유수 조위총이 일으킨 항쟁이 그것이다. 또한 사찰 승려들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항쟁들은 이의방의 부하인 이의민 등의 활약으로 진압됐다.

 

 

100년에 이르는 무신집권기의 특징은 왕권의 '유명무실'(有名無實)과 집권한 무신이 중방(최고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도방(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이자 숙위기관), 교정도감(최충헌이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 정방(최우가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 등과 같은 기구를 통해 모든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들이 자주 교체됐다.

 

 

무신집권기 초반의 최고 권력자는 정변 당시 견룡행수였던 이의방이다. (참고로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은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6대 조였다.) 이의방은 정변 동지였던 이고 등을 죽이고 정중부를 밀어낸 후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명종에게 시집 보내는 등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하지만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의 계략에 걸려들어 피살됐고, 이후 정중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방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정중부 시대에도 정중부 자신과 그 아들들의 국정 농단 등이 횡행했다. 이에 청년 장군이었던 경대승이 등장해 정중부와 정균 등을 기습해 척살한 후 권력을 잡았다.

 

 

다만, 경대승의 경우는 이의방, 정중부와 달랐다. 경대승의 거사 이유는 왕권을 유린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권력을 잡은 후 경대승은 왕권을 어느 정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끝까지 찾아내 척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대승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끝내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했다.

 

 

경대승이 죽자 이번에는 변방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의민이 나타나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민 역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이의방처럼 '전횡'(專橫)을 일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의민과 그 아들들의 전횡을 참지 못한 최충헌, 최충수가 거사를 일으켰고, 이의민 등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최충헌은 이전 권력자들과 달리 무려 4대(최충헌-최우-최항-최의) 62년(1196년~1258년)에 걸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른바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를 연 것이다. 최충헌은 비단 무신 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고루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또한 명종과 희종(熙宗) 등 왕을 마음대로 '폐립'(廢立)하기도 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아들 최우 등은 강화도에서 대몽(對蒙) 항쟁을 주도했다.

 

 

최씨 무신정권은 최의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했고, 이후 김준과 임연, 임유무 부자가 잇따라 권력을 잡았다. 임유무는 대몽 항쟁 당시 친몽파인 원종(元宗)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다 원종에 의해 제거됐다. 임유무를 끝으로 비로소 길고 엄혹했던 무신집권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1270년 드디어 왕정이 복고됐다.(1)

 

 
 
 

출처; 무신정권 - 나무위키 (namu.wiki)

 

 

 

 


1198년 우리 역사상 첫 신분 해방 운동이 일어난다. 천민 중에 천민인 노비 만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노비도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될 수 있다"며 일어선 만적과 노비들. 신분의 벽을 뛰어넘으려는 민초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 '민중은 개돼지' 망언의 시대.."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2016. 7. 16. 10:49

 
 
 

KBS '역사저널 그날' 고려 만적의 난 다뤄..비참한 삶에 저항·투쟁

 

(사진=KBS 제공)

 

 

 

1198년 우리 역사상 첫 신분 해방 운동이 일어난다. 천민 중에 천민인 노비 만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노비도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될 수 있다"며 일어선 만적과 노비들. 신분의 벽을 뛰어넘으려는 민초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오는 17일(일) 밤 9시 4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일어선 만적, 망이, 망소이의 삶을 들여다본다.

 

'경인년(1170)과 계사년(1173) 이래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게서 많이 나왔으니 장수와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 고려사

 

 

1198년 5월 개경의 북산에 노비들이 모인다. 당시 고려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을 제거하고 각자의 주인을 죽인 뒤, 천민이라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반란의 주동자인 만적과 노비들은 '정(丁)'자가 적힌 누런 종이를 표식으로 삼아 나눠가지고 치밀하게 난을 계획한다.

 

 

앞서 만적의 난이 일어나기 22년 전, 공주의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와 망소이가 난을 일으킨다. 이들은 무리를 모아 공주를 함락시키고 난을 진압하러 온 3000명의 토벌대를 궤멸시킨다.

 

 

이들의 난은 고려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진다. 고려 행정 구역의 최하층인 '소(所)'에서 일어난 민란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행정 구역은 주현, 속현, 향·부곡·소까지 3등급으로 나뉘고 향·부곡·소의 주민들은 국가에 더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다.

 

 

열악한 삶 속에서 이사조차 가지 못하고 지역 차별에 신음하던 공주 명학소 주민들은 결국 난을 일으켰고, 항쟁의 불씨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훗날 만적의 난까지 영향을 미친다.

 

 

만적은 치밀하게 난을 준비해 온다. 하지만 거사 당일 모인 노비들의 숫자는 수백 명뿐. 만적과 노비들은 일이 실패할 것을 염려해 후일을 기약하고 해산한다. 그러나 동료 노비 순정의 밀고로 반란 계획이 최충헌에게 알려진다.

 

'마침내 만적 등 1백여 명이 체포되어 강물에 던져졌다.' - 고려사

 

결국 만적과 노비들은 체포되고, 산 채로 강물에 수장 당한다. 처절하게 끝나버린 만적의 난. 그러나 자신들만의 힘으로 신분 해방과 정권 쟁취를 외치고,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노비들의 의지와 노력은 우리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다.

 

 

노비들도 장수와 재상이 될 수 있다고 외치며 신분 해방을 꿈꾼 만적과 노비들.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던 고려 노비들의 삶과,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노비들의 저항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주 역사저널 그날에서 펼쳐진다.(2)

 

 

 

 

가난이 서러울까, 차별이 서러울까? 절대 빈곤을 경험한 세대는 가난이 서럽다고 하겠지만, 긴 역사 속에서는 차별이 더 서럽다. 따지고 보면 가난이란 것도 반대편에 부자가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고, 배고픔도 실은 가난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전, 신석기시대에는 모두가 가난했지만 누구도 가난을 서럽게 여기지 않았을 터이다. 우리 역사에서 차별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청동기시대부터로 알려져 있다. 경제력이 상승함에 따라 잉여가 생기고, 사유 재산이 생기고, 빈부 차이가 생기고, 그로부터 신분이 발생했다. 이후의 역사는 신분 차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의 궤적이기도 하다.

 

 

 

■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900개 부곡 등에 200년 넘는 차별, 민중 봉기로 분출

2025. 3. 28. 00:26

 
 

부곡 차별

 

 

「 공주 명학소 망이·망소이 봉기 현으로 승격시켜 주자 진정

신라 골품제 대체 새로운 차별 의무 많고 결혼·이주 자유 없어

신분 차별 적은 군현 500개뿐 조선의 부곡 폐지는 역사 발전」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에 있는 명학소 민중봉기 기념탑. [사진 대전광역시]

 

 

 

신분은 귀속적(歸屬的)인 속성이 있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양반이면 태어나면서부터 양반이고, 천민이면 천민이 된다. 나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정해지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굴레가 된다. 억지로 굴레에 갇힌 마소가 살아서는 빠져나올 수 없듯이 여간해서는 자기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 눈떠 보니 천민이라면 얼마나 억울할까. 내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부모를 그렇게 만났을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그 억울함이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진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신분은 크게 자유민인 양인(良人)과 비자유민인 천민(賤民)으로 나뉜다. 양·천의 구분은 신분제도가 소멸하는 19세기 말까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양인 내부의 구성은 시대마다 달랐다. 우리가 잘 아는 신라 골품제는 서울 사는 양인만을 대상으로 한 신분제였다. 천민은 물론 서울 이외 지역에 사는 양인은 어떤 골품에도 속하지 못했다. 골품 안에서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 사이의 차별이 엄격했다. 제2신분인 6두품조차 관리가 되어서는 승진에 제한이 있었고, 중앙 관청의 장관은 될 수 없었다. 집을 지어도 방의 크기가 사방 21척을 넘지 못하고, 담장 높이가 8척을 넘지 못했으며, 집에서 금그릇과 은그릇을 사용하면 안 되었다. 6두품이 그랬으니 5두품 이하는 더 차별받았고, 골품 밖에 있던 지방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신라는 진골의 나라였다.

 

 

골품 들지 못한 지방민이 세운 나라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에 있는 고려 말 정도전의 유배지. 당시 이 일대는 거평부곡이었다. [사진 이익주]

 

 

 

고려는 골품에 들지 못하던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다. 이들은 건국하자마자 골품제를 없애버렸다. 골품제 폐지는 고려 건국의 역사적 의미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중대 사건이었다. 이로써 지배층 내의 촘촘한 차별이 사라졌다. 하지만 신분제가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고 새로운 신분제가 만들어졌다.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가담한 지방의 세력가들은 모두 지배층으로서 ‘정호(丁戶)’라는 이름을 받았고,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피지배층은 ‘백정(白丁)’이라고 불렸다. 정호와 백정은 모두 양인이고, 그 아래에 천민이 있었다. 정호 가운데는 고향에 남아 향리가 된 사람도 있고, 서울로 올라가 관리가 된 사람도 있었다. 관리가 된 뒤 자손 대대로 고위 관직에 올라 문벌귀족이 되기도 했다. 향리에서 출발해서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다. 향리와 관리·귀족이 모두 정호 신분에 속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백정이라고 불렸다. 조선에서는 소나 개, 돼지를 잡는 사람을 백정이라고 하고 천대했지만, 고려에서는 달랐다. 대신, 조선에서 보통 사람을 가리키던 백성(百姓)은 고려에서는 정호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려는 확실히 조선과 다른 500년이었다.

 

 

고려의 신분제는 정호-백정-천민의 차별로 끝나지 않았다. 고려에는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이 있었고, 부곡의 정호는 정호대로, 백정은 백정대로 일반 군현의 정호·백정에 비해 차별받았다. 전에는 부곡 주민을 집단천민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부곡에도 정호와 백정이 있고 천민도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모두가 천민일 수 없다. 또 부곡에 살아도 세금 내고 군대에 가는 의무를 졌다. 일반 군현 사람들보다 낮은 대우를 받으면 천민이라는 상대적 정의가 아니라, 국가에 의무를 지면 양인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따르면 부곡의 정호·백정은 엄연한 양인이었다. 다만 차별받은 양인이었다.

 

 

부곡 출신 유청신 특혜 거듭 정승 올라

 

천안 광덕사의 호두나무. 고려 후기에 고이부곡 출신의 역관 유청신이 원에서 호두나무를 들여와 이 절에 심었다고 전한다. [사진 국가유산청]

 

 

 

고려시대에 부곡 출신의 유명인으로 유청신(柳淸臣)이 있다. 원 간섭기에 몽골어를 잘해서 역관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그의 고향은 고이부곡(高伊部曲)으로, 조상들은 대대로 그곳의 부곡리(部曲吏·부곡의 향리)를 지냈다. 부곡리는 관리가 되어도 5품 이상 승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유청신은 3품까지 승진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뒤에 또 한 번 승진 제한이 풀려 정승까지 올랐고, 부곡 출신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그의 출세는 거꾸로 부곡 정호에 대한 차별의 존재를 증명한다. 두 번씩이나 예외적인 특혜를 받아야만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부곡의 정호는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그럼 부곡의 백정은 어땠을까?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처인성 승첩 기념비. 1232년 몽골군 지휘관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전투 현장이다. 처인성은 당시 처인부곡이었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곡과 동급의 행정구역으로 향(鄕)·소(所)·진(津)·역(驛)·장(莊)·처(處)가 있었다. 이 가운데 ‘처’가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다소 생소하지만, 지금의 서울 용산이 고려시대에 용산처(龍山處)였다. 1284년(충렬왕 10년) 과주(지금 과천)에 딸려 있던 용산처를 부원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고려사』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부곡 등에 사는 백정은 일반 군현의 백정보다 더 많은 의무를 졌다. 한 예로 ‘소’는 특정 물품의 생산지에 설치되었는데, 철소(鐵所) 주민은 철 생산, 염소(鹽所)는 소금 생산, 도자소(陶磁所)는 도자기 만들기, 탄소(炭所)는 숯 만들기에 동원되었다. 향과 부곡 주민은 국유지를 경작했고, 진과 역은 주요 교통로 상의 나루와 역을 관리했으며, 장과 처에서는 왕실과 사원의 토지를 경작했다. 모두 백정 신분으로서 세금 내고 군대 가는 의무를 다하면서 추가로 이 일을 했으니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사회적으로 천시되어 부르는 이름조차 백정과 차별해서 잡척(雜尺)이라고 했다.

 

 

고려에는 약 1400개의 행정구역이 있었다. 조선의 군현(郡縣)이 330개 정도이고, 그 후신이랄 수 있는 현재의 시·군·구가 남한에만 226개인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많은 수였다. 그 1400개 가운데 500개 정도가 군현이고 900개는 부곡·향·소·진·역·장·처였다. 이쯤 되면 부곡에 대한 차별은 일부 소수에 국한되지 않고 백정 신분 내부의 광범한 차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주지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면 이사를 하면 되지 않나? 고려는 이주가 자유롭지 않은 나라였다.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부곡에서 일반 군현으로의 상승 이주는 불가능했다.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도 금지되었다. 군현민과 부곡민의 결혼을 막지는 못하지만 혼인 후 부곡에 살게 하고 자식들을 부곡민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금지했다.

 

 

정도전 부곡으로 유배, 위민정치가로

 

고려 초에 부곡이 생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정호, 같은 백정인데 200년 넘게 차별을 받는다면 마냥 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침 무신정변이 일어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민란이 전국으로 번지는 가운데 부곡민들의 불만도 폭발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대표 사례이다.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자 민란이 잦아든 것을 보면 소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12세기 후반 민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부곡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려 말까지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아서 1375년 정도전이 유배 간 곳도 전라도 나주에 속한 거평부곡이었다. 그곳에서 부곡민들과 어울리면서 ‘위민(爲民)’의 정치사상가로 거듭났다.

 

부곡이 급격히 준 것은 조선이 건국된 뒤였다. 조선 왕조는 행정제도를 개편해서 부곡을 없애 갔고, 15세기가 되면 13개 정도만 남았다. 한창때 900개나 되던 부곡의 소멸은 부곡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골품제 폐지에 이어 차별을 없앤 또 하나의 발전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천천히 한 걸음씩, 그러나 반드시 발전한다. 짧은 사람의 생애로는 목격할 수 없지만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3)

 

 

 

https://youtu.be/zxBsmX3xEXU

 

 

 

 

 

 

KBS HD역사스페셜 – 무인시대 10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 / KBS 2006.2.3 방송

https://youtu.be/9WdT7GrITTw?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자료출처>

 

 

(1) [역사줌인] 고려 문신들의 씨를 말리다 '무신정변' (daum.net) 파이낸셜뉴스 2021. 6. 19.

 

 

(2) '민중은 개돼지' 망언의 시대.."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daum.net) 노컷뉴스 2016. 7. 16.

 

 

(3)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900개 부곡 등에 200년 넘는 차별, 민중 봉기로 분출 (daum.net) 중앙일보 2025. 3. 28.

 

 

 

<참고자료>

 

 

무신정권 - 나무위키 (namu.wiki)

 

 

망이·망소이의 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문인 이규보는 왜 '동명왕편'을 썼을까? (daum.net) 동아일보 2021. 5. 12.

 

 

고려시대 계급‧신분에 저항한 '최초의 민중봉기' (daum.net) 프레시안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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