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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5) 1170년~1270년 무신정권 / 1172년~1198년 농민과 노비의 봉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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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5) 1170년~1270년 무신정권 / 1172년~1198년 농민과 노비의 봉기

대야발 2023. 11. 1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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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정권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7] 당연히 무신정권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지 한참 이후에야, 고려 말기의 각종 인재와 영웅들이 마구 출현한다. 즉 고려는 여전히 잠재력이 남아있는 국가였으나, 무신정권이 새로운 고인 물이 되어서 100년 동안 열심히 고려의 인재 출현을 막았던 셈이다. 본인들이 문신들의 차별 때문에 국가를 점령했다는 프로파간다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기존의 문신들보다 더욱 원칙 없고 지독하게 친목질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앞뒤 논리도 안 맞는 옹졸한 방식이었다.

무신정권은 기존의 쿠데타 정권과는 다르다.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끼리 마피아처럼 권력을 돌려먹기 및 권력 쟁탈을 여러 차례 하면서 군주는 명목상의 국가수반이 되어 필요에 따라 교체와 임명이 되었다. 대대로 세습하는 60년 최씨 정권까지 가면 최씨 가문의 중방으로 변질했다.[8]

결국 무신정권에 끼지 못한 지방 군인들도 국가를 나눠 먹겠다며, 무신정권처럼 군사력을 사유화하면서 이로 인해 무신정권과 똑같은 형식으로 반란이 잦게 되었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중앙의 정치 깡패 집단에 불과했으므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의 한계가 있으니 귀찮으면 지방 통치를 방관했다. 한마디로, 십상시 세도정치의 더욱 무능했던 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기존의 문신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친목질 때문에, 본인들의 파벌에 끼지 못하는 인재들에게는 권력을 나눠주지 않고 군인끼리 차별하는 경향도 더욱더 강했다. 이로 인해 명색이 무신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군들과 지방군들의 내전이라 볼 수 있는 조위총의 난이 발생하였다. 무신정변 이후 모든 관직과 이권을 중앙군들 특히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들만 나눠먹은 결과로 인해 벌어진 사태였다.

무신정권은 초기에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하고 거기에 가담한 중앙군들만이 특혜와 이권을 누리다가 무신정권이 이후 최씨 가문의 독재로 변질되면서 중앙군들마저 이런 특혜와 이권에서 배제당하고 최씨 가문의 사병들인 도방과 삼별초들만이 그것도 최 씨 가문의 집권자들과 그들과 가까운 일부 장교들만 모든 이권을 독차지하는 폐쇄적인 형태로 운영되었다. 결국 도방과 삼별초마저도 폐쇄적으로 운영하다 보니 나중에 도방과 삼별초 집단들 중 이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 집단들은 최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동원되어서 최씨 가문을 멸문지화시켰다.

 

 
 
 

집권 순서대로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그리고 최충헌 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 들었고 이후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 60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과 삼별초 출신의 김준, 임연, 임유무가 연이어 정권을 잡았다. 크게 최충헌까지의 전반부와 최충헌 이후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9]

고려사에서는 무신정권 집권자 중 경대승만 열전에 실려있고, 나머지는 전부 반역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10] 임연과 임유무는 함께 하나의 열전으로 수록했고, 사실상 혼자 집권 못한 이고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몽골과의 전쟁 끝에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고려의 군주 원종 을 등에 업고 친몽주의적인 정책으로 이들을 압박 및 견제한다. 끝내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원종에게 밀명을 받은 배신자 무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다시 개경(개경 환도)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치하에서는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그때부터는 원 간섭기였다.

잔당들이 삼별초의 난으로 저항했지만 관군과 몽골군이 진압에 나서면서 제주도의 저항을 끝으로 모조리 전멸하였고 결국 무신정권은 사라졌다. 다만 이들 세력 일부가 오늘날의 일본 오키나와로 탈출했다는 설이 일부 나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에 갑자기 거성이 나오는 등 발달한 건축 기술이 등장하였으며 오키나와 유적지에서 대규모로 고려 기와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만 삼별초 세력이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에 옮겨간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12세기~1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대규모 유민이 건너갔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관련 기사

 

 

 

 

[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문인 이규보는 왜 '동명왕편'을 썼을까?

2021. 5. 12. 03:06
 
이규보의 생애와 저술활동
관직 얻는데 인맥 중요했던 시기.. 당시 저술한 고구려 왕 일대기
벼슬 얻기 위한 글이라는 해석.. 관직 얻은 후 승승장구 했으나
정권 맞춤 글쓰기로 비판 받기도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동아일보DB
이규보(1168∼1241)는 무신정권 시기에 시인, 수필가, 관료로 활동하며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입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성품이 활달하고 거침없이 술을 마시며, 시문을 짓되 옛사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공부하여 넓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적혀있습니다. 열전은 이규보를 자유분방한 문학인, 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사람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규보의 생애와 저술 활동을 관료 임명 이전과 이후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무인에게 관직 구하는 시를 쓰고 ‘동명왕편’ 저술

 

이규보는 무신정변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 22년) 평범한 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을 전후해 시를 지은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성명재에서 과거를 준비했습니다.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과거는 여러 차례 낙방했습니다. 무신정권 시기에 치른 과거라 합격하기 위해서는 실력보다 집권자와의 연결이 중요했지요. 또 그는 선천적으로 형식에 맞춘 글을 멸시했습니다.

이 시기 이규보는 ‘죽림고회’라고 부르는 문학인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죽림고회’는 무신정권 시기 관직을 떠나 시와 술을 즐기는 문학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과 어울리는 영광을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계속 은둔생활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대 초반이던 1190년에 과거에 합격했지요. 당시에는 이의민이 집권한 시기였고, 과거에 합격했다 할지라도 관직에 임명되기 어려웠습니다. 집권자가 불러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집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를 써서 바치던 시대입니다. 관직을 준비하는 사람, 세상을 등진 초야의 학자 모두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규보는 25세부터 32세까지 관직을 구하는 시를 지으며 집권자가 불러주길 기다렸습니다. 불행하고 막막했던 그는 25세이던 1193년에 ‘동명왕편’을 저술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일대기를 영웅적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했습니다. 그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현재 매우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유교적이고 신라사 중심인 ‘삼국사기’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외적이 침략하는 시기에 민족의 자부심과 침략에 대한 항거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이지요. 세 번째는 집권자와 집권자의 측근 세력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주몽의 일대기는 무인들의 영웅 서사시이고 집권자와 민중 모두 공감하기 좋은 소재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무인들에게 소용 가치가 없으면 등용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에 무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저술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국정 총괄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묘역. 동아일보DB
최충헌은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규보는 1199년 최충헌이 개최한 시 모임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관직은 전주지방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사록겸장서기(7품)였습니다. 관직의 대가로 받는 봉급은 적었고 행정 잡무마저 번거로운 자리였습니다. 또 주변 관리들의 중상모략으로 관직 생활이 고통스러웠고 결국 1년 4개월 만에 동료들의 비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도 관직을 구했건만 초임지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거죠. 이후 끊임없이 최씨 정권과 연결된 인물을 통해 관직에 복직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규보는 1207년 최충헌이 여러 학자를 초빙해 개최한 백일장에서 ‘모정기’라는 글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모정기’의 마지막 구절은 “정자는 날개가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누가 지었겠는가/우리 진강후(최충헌을 일컬음)의 어짐이로다./잔치를 베푸는데 술이 샘같이 나오고 잔을 받들어 권하니 객은 천명이로다./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노니 산천이 변한다 해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였습니다. 최충헌에 대한 노골적인 예찬을 담고 있어 비굴해 보입니다만 최충헌은 이 글을 보고 칭찬하면서 드디어 직한림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규보는 1219년 최우가 집권한 이후 관직 생활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1232년 강화 천도를 찬성하고 몽골과의 전쟁 중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실질적인 국가 업무를 총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몽골 천도에 대해 “천도란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데/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청하(최우 정부를 일컬음)의 계획 그토록 서둘지 않았더라면/고려는 벌써 오랑캐 땅 됐으리”라고 하면서 최우의 강화 천도를 찬양했습니다.

이규보는 몽골과의 전쟁 시기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습니다. 몽골이 쳐들어오면 철수를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했고, 몽골이 그 대가로 수달피나 고려인을 바치라고 하면 그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무신정권 시기 지식인의 유형은 초기부터 도피 유랑한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지방에서 유학자의 삶을 산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개경으로 돌아와 관직을 구했으나 구하지 못한 사람, 무신정권 초기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거나 최씨 무신정권을 위해 관직에서 일한 사람 등으로 나뉩니다. 이규보는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이규보는 60대 중반 이후 강화도에서 관직 생활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언제나 속마음은 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국왕보다 무신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침략 속에서 나라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외교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또 백성의 삶은 비참했으니 고통이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2)

 

 

 

 

■ 농민과 노비의 봉기

 

 

 

농민과 노비의 난

의종 때의 사치와 유락(遊樂)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고, 이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초래했다. 이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 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되어, 신분 해방과 지배층의 압박·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12세기 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1172년(명종 2년) 북계의 창주(昌州, 창성)·성주(成州, 성천)·철주(鐵州, 철산) 등지에서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趙位寵)의 남은 무리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였다.

 

남쪽의 반란은 1176년(명종 7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를 하기에 이르러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에서는 손청(孫淸)과 이광(李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182년(명종 12년)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官奴)들이 관리의 가혹한 조선(造船) 독역(督役)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러한 초기의 반란은 대체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서,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이었으나 아직은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193년(명종 23년) 김사미·효심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펴며, 또 일련의 지속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명주(溟州, 강릉)의 농민 반란군은 동경(東京, 경주)의 반란군과 합세하였고, 진주(晋州)의 노비 반란군은 합주(陜州, 합천)의 부곡 반란군과 연합하여 공동 전선을 폈다. 또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동경의 반란군은 운문(雲門)·울진(蔚珍)·초전(草田) 등 각지의 반란군과 연합하였다. 경상도 일대에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져서 10여 년간 세력을 떨쳤다. 이러한 반란은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일어났다.

 

1198년(신종 1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정권 탈취를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들 반란은 모두 최충헌이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부르짖음은 그 후 정부 시책에도 반영되었다. 고려의 신분 질서의 동요를 말하여 주는 이들 반란은 고대적인 유산을 청산하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KBS HD역사스페셜 – 무인시대 10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 / KBS 2006.2.3 방송

https://youtu.be/9WdT7GrITTw?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https://youtu.be/yTya5JcM1kA?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자료출처>

 

(1) https://namu.wiki/w/%EB%AC%B4%EC%8B%A0%EC%A0%95%EA%B6%8C

 

 

(2) https://v.daum.net/v/2021051203063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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