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12-03 04:02
① 정치·외교 분야
입력 : 2018-12-09 19:50
[건국 1100주년, 고려를 돌아보다] “세계가 환호한 고려청자·나전칠기… 문화 한류 원조는 고려”-국민일보 (kmib.co.kr)
③ 문화분야
송고시간2018-01-02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다문화 국가' 고려 건국 110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2015년 10월 15일 북한 개성 고려성균관에서 열린 '개성 만월대 출토유물 남북 공동 전시회'에 고려 태조 왕건의 좌상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북한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릉에서 '만월대 출토유물 남북 공동 전시회'에 참여한 관계자들이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충남 태안과 전남 진도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려청자 향로. [연합뉴스 자료 사진]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다. 원나라 황제의 딸들이 결혼이주여성으로 들어와 왕비가 되다 보니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잇따라 왕으로 등극한다. 원종의 맏아들인 25대 충렬왕은 부인과 장성한 아들을 두었으나 38세의 나이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해 쿠빌라이 황제의 사위가 됐다. 둘 사이에 태어난 '혼혈왕자'가 충선왕이다. 몽골계 혈통의 비율을 따지면 충선왕 50%, 충숙왕 75%, 충혜왕 37.5%, 충목왕 68.75%, 충정왕 18.75%, 공민왕 37.5%, 우왕 18.75%이다.
몽골은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유럽과 중동에 이르는 인류 초유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동서양 물자와 인력의 교류가 활발해 우리나라에도 서역인이 적지 않게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중국에 명나라가 들어서고 한반도에는 조선으로 교체되면서 우리나라 외교와 무역은 중국과의 사대 외교와 조공 무역으로 축소된다.
국립제주박물관이 고려 건국 1천100주년 기념으로 지난해 12월 5일부터 열고 있는 '삼별초와 동아시아' 기획 특별전 포스터.
이창우입력 2021. 2. 25. 08:51수정 2021. 2. 25. 10:11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나주 흥룡사(興龍寺) 터' 600년 만에 발견 (daum.net)
흥룡사 부속 유물 '석등' 확인..서성문 석등 표기는 오류
[나주=뉴시스] 이창우 기자 = 고려 태조 왕건이 혜종(고려 2대왕)을 낳은 나주 오씨 장화왕후(莊和王后)를 위해 나주 영산포 산기슭에 지어준 '흥룡사(興龍寺)' 터가 60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났다.
600여년이란 추정 근거는 1428년 8월 세종실록에 따르면 '나주에 소장한 혜종(고려 2대왕)의 진영과 소상(흙으로 빚은 인물이나 신불상)을 개성 '유후사'로 옮겨서 각릉 곁에 묻으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 때문이다.
혜종의 진영과 소상 이전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숭불 정책을 폈던 고려(왕실)에 반해 유교를 장려하기 위해 펼친 '숭유억불정책'에서 비롯됐다.
25일 전남 나주시에 따르면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이 지난 20여년 간 노력을 기울인 결과 구전으로 만 전해져 온 흥룡사 터가 나주 삼영동 전남운전면허시험장 뒤 산길에 위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윤 부원장은 그간 흥룡사와 해당 사찰 안에 존재한 고려 2대 왕인 혜종(장화왕후의 아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혜종사(惠宗祠)'를 찾기 위해 각종 역사기록물을 찾아서 고증을 거듭해 왔었다.
혜종사 터를 찾아 나선 그는 우연히 나주 출신 일본인이 쓴 책에서 흥룡사 위치가 그려진 도면을 찾아낸 후 긴 여정의 끝을 맺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이 처음에 흥룡사를 흥륭사로 표기했다가 다시 흥룡사로 정정한 부분을 확인했고,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 중인 '서성문 석등(보물 제364호)'이 '흥룡사 석등'이었다는 점까지 함께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조선철도여행안내 책자.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출판한 자료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안내서에는 경부선, 마산선, 경인선, 경의선, 겸이포선, 평남선, 호남선, 군산선, 경원선, 함경선 10개 철도노선과 175곳의 역 정보를 담고 있다. 호남선 첫 면에 목포와 나주 고아주 전경사진과 나주 영산포, 구진포 터널과 영산강 사진 등 4장이 실려 있다. 호남선 각 역마다 역의 현황, 지역에 대한 설명, 승지(勝地)라고 해서 역이 소재한 지역의 관광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에 흥룡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진=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
◇일제와 일본인 기록물에서 흥룡사 위치 확인
윤 부원장은 자료를 찾다가 1918년 조선급만주사출판부에서 발행한 '최신조선지지(地誌)'에서 '흥룡사는 영산포역 앞 작은 언덕너머에 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혜종사 찿기에 나선 그가 연구 방향을 흥룡사 찾기로 방향을 튼 순간이었다.
그 뒤 그는 또 한 번의 놀라운 기록물과 만난다. 일제강점기 1931년 영산포에서 태어나 영산포를 잊지 않고 지내던 일본인 좌굴신삼(左堀伸三·사호리 신조오)씨가 1992년 5월 출간한 '영산강하류역의 문화(전편)·광주항일학생사건'에서 흥룡사 터에 관한 내용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 일본인 사호리 신조오씨가 쓴 영산강하류역의 문화(전편) 표지. (사진=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
윤 부원장은 그간 문헌이나 일기, 시문 자료에만 나오던 흥룡사 터의 위치를 조선철도여행안내 책자에서 발견하고 비로소 정확한 흥룡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이 쓴 책에 담긴 도면이 가리키는 위치의 산자락을 찾아 나선 결과 전남운전면허시험장 뒤 산자락에서 도면 표시와 일치한 '흥룡사 터'를 발견하게 됐다.
윤 부원장은 "흥룡사 관련 자료 가운데 무명씨(無名氏)가 쓴 시문(時文) 중 '앙암의 동쪽'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이는 흥룡사에서 바라본 나주 영산포 가야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시문과 일치했다"고 말했다.
◇흥룡사 유물 '석등 존재' 확인…서성문 석등 표기는 오류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 중인 '나주 서성문 석등(보물 제364호)'으로 불리는 문화재가 조선총독부 기록물에 흥룡사의 부속물로 고증·기록된 사실도 확인했다.
[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 조선총독부 '고적 및 유물대장'에 게재된 나주 서문 석등. 1916년(대정5) 11월17일 전남도장관이 총독부 정무총감에 보낸 문서 '전남도 고적 및 유물조사서'에는 자주군 서부면 삼층석탑과 동문의 석간, 서문의 석등(사진) 등이 첨부돼 있다. 이 석등 조사내용에 '석등이 흥룡사의 것이었다'는 유래를 담고 있다. 이 석등은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로비 앞에 세워져 있다. (사진=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 = 국립나주박물관은 2일 보물 제364호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石燈)이 8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향품으로 영구히 돌아와 오는 11일 오후 3시 박물관에서 점등식을 갖고 일반에 전시된다고 밝혔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석등 모습. 2017.05.02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lcw@newsis.com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서문외 석등 조사내용에 따르면 '석등은 흥룡사의 것이었다'고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서성문 안에 있던 이 석등은 조선총독부가 1929년께 경복궁에서 열리는 제1회 조선박람회를 위해 그해 9월5일 서울로 옮겼다. 그렇게 서울로 간 석등은 해방 후까지 경복궁 내에 존치해 있다가 지난 2017년 고향 땅인 국립나주박물관으로 88년 만에 귀향했다.
흥룡사 석등이 서성문 석등으로 명칭이 바뀐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지은 흥룡사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로 추정되는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윤 부원장은 "흥룡사 내 혜종을 모신 사당인 '혜종사'에서 고려시대 내내 나주 주민들이 제사를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며 "하지만 1428년 8월 세종실록에 '나주에 소장한 혜종의 진영과 소상(흙으로 빚은 인물이나 신불상)을 개성 '유후사'로 옮겨서 각릉 곁에 묻으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에서 흥룡사 석등(서성문 석등)의 존재를 확인한 만큼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흥룡사 터 일대는 나주오씨 종친회에서 매입해 관리하고 있다.
오종순 나주오씨 종친회장은 "그간 전설과 설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흥룡사 터가 확인됐다는 데 의미가 깊다"며 "나주의 역사가 재정립 될 수 있도록 시굴·발굴, 개발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lcw@newsis.com
2004년 소목장인 윤재술씨가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고려 초기의 선박인 ‘고려 나주선’. 이를 복원하면 길이 최대 42m에 200t이 넘는 대형선박일 가능성이 높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저거 심상치않은 나무인데….” 2004년 3월31일 전남 나주의 윤재술씨(당시 62세)는 갈수기에 강바닥이 훤히 노출된 영산강변을 산책하다가 이상한 나무를 발견했다. 윤재술씨는 5년 뒤인 2009년 제30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에서 공예부문 대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장롱·반닫이·문갑 등을 만드는 장인(소목장)이다.
대번에 심상치않은 나무임을 알아차린 윤씨는 이 사실을 나주시문화원에 알렸다. 당시 수중발굴 전문가인 안재철 남도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의 조사결과 이 나무는 고려 전기의 선박 부재인 ‘배 왼쪽 뒷부분 만곡부(배의 밑바닥판과 외판을 연결해주는 ㄴ자 부재)’ 편과 외판 편으로 확인됐다. 이후 긴급조사 끝에 ‘배 오른쪽 앞부분의 만곡부’ 편과 저판재까지 추가로 찾아냈다.
길이 9m가 넘는 배 밑바닥 판재.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실어나르는 조운선일 수도, 태조 왕건이 나주 공략에 나설 때 탔던 지휘선일 수도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데 찾아낸 부재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배 왼쪽 뒷부분의 만곡부’ 편은 길이가 466㎝, ‘배 오른쪽 앞부분 만곡부’편은 560㎝나 됐다. 추가로 찾아낸 저판재(배 밑바닥 판)의 크기는 920㎝에 이르렀다. 이 배에는 ‘고려 나주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찾아낸 부재 등을 토대로 복원할 경우 ‘고려 나주선’의 원 크기는 길이가 최대 42m에 200t에 달하는 대형선박으로 추정됐다. 이 배는 군산 십이동파선(2003년 발견·11세기 후반~12세기 초반)과 완도선(1984년 발견·12세기초), 목포 달리도선(1995년 발견·14세기)등과 유사한 구조와 형태로 보인다.
몇가지 추정이 가능했다. 먼저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개경까지 실어나르는 조운선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고려사> ‘식화지·조운조’는 “각 조창(漕倉·세금으로 거둔 현물을 모아둔 창고)에는 6척의 조운선이 있는데 아울러 1척에 1000석의 곡식을 싣는 초마선(哨馬船)을 두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200t에 이르는 ‘고려 나주선’은 초마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태조 왕건이 탔던 군선일 가능성에 모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궁예의 휘하 장수였던 왕건은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후백제 배후인 금성 등 10여 군현을 함락시킨 뒤 금성을 나주로 고쳐 불렀다. 왕건은 인근인 진도까지 차지했고(909년), 나주 재탈환을 위해 공격해온 견훤군을 계속 물리쳤다(914년). 태조 왕건은 후백제 배후인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고려 건국의 기틀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길이가 4m66~5m60에 달하는 배의 부재. 확인된 부재의 크기로 추정하면 태조 왕건이 나주지역을 경영할 때 타고 온 군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려사>가 기록한 왕건의 군선 규모는 대단했다.
“태조가 군선 100여 척을 더 건조했는데, 그 중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步)이고, 망루를 세우고 말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태조는 군사 3000여명을 지휘하여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고려사> ‘세가·태조’)
16보를 미터로 환산하면 29m 정도이다. 그렇다면 2004년에 발견된 ‘고려 나주선’(추정 길이 최대 42m)은 태조 왕건이 수군을 지휘하면서 탔던 대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려사> 기록처럼 망루는 세울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말도 달릴 수 있었다’는 <고려사> 기록은 과장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배가 컸다는 비유의 표현일 것이다. 물론 ‘고려 나주선’은 고려말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선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2009년 나주시가 용역을 주어 20분의 1로 축소 복원한 ‘고려 나주선’. 그러나 정확한 고증에 따른 복원은 아니었다.
아무튼 유명 소목장에 의해 우연히 1000년 만에 발견된 이 ‘고려 나주선’은 나주의 한 폐교(영산포 서초등학교)로 옮겨져 그곳에서 보존처리 작업을 벌였다. 남은 밑바닥 판재만 9m가 넘는 대형선박의 부재였기에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공기 중 노출된 배의 부재는 갈라짐과 터짐 현상이 생겼지만 워낙 크기가 컸기 때문에 그나마 원형은 유지됐다. 선체의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나무못은 상수리나무를 사용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보존처리를 마친 ‘고려 나주선’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로 옮겨왔고, 10월31일부터 나주 연구소 전시홍보관에서 전시한다. 전시장에는 길이 5~6m, 너비 30~50㎝ 정도의 배 만곡부재 2점과 길이 약 9m, 너비 약 60㎝의 저판재 1점 등 나주선 일부였던 조각 3점이 선보인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전용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1000년 만에 빛을 본 영산강의 나주선을 보면서 그 배에 담긴 고려초기 역사를 더듬어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北, 태조왕건 조모 무덤 전면 발굴…국보유적 등록
송고시간2019-07-21 08:33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기자 = 북한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877∼943)의 조모인 원창왕후의 무덤을 최근 전면적으로 조사·발굴해 국보유적으로 등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1일 보도했다.
통신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와 조선민족유산보존사, 송도사범대학의 교원·연구사·학생들이 고려시기의 왕릉급 무덤인 온혜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발굴을 진행하여 국보유적으로 등록하였다"고 전했다.
통신에 따르면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온혜릉은 태조 왕건의 할머니인 원창왕후의 무덤으로, 돌칸흙무덤 형식으로 돼 있다.
통신은 "능의 외부 시설들에서 12지신을 형상한 병풍돌 10개와 그 위에 놓인 씌움돌 4개, 모서리돌 8개, 난간기둥돌 10개, 난간받침돌 9개, 돌짐승 3개를 찾아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 12각형으로 정연하게 만든 병풍돌 시설의 모서리 부분이 무덤칸 남쪽 중심에 놓인 것을 확인함으로써 무덤이 고려 초기에 축조된 것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였다"고 설명했다.
쇠로 만든 관고리, 회색 도기와 검은색 도기, 연녹색 자기 등 유물도 출토됐다.
통신은 "조사 발굴을 통하여 무덤의 규모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능이 고려 봉건국가가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상당히 품을 들인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이 확증되었다"고 전했다.
조선중앙방송은 조선민족유산보존사가 고려 건국 1천100주년을 맞아 온혜릉 발굴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고 지난해 10월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방송은 "온혜릉이 고려의 역사와 문화의 역사적 뿌리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서 고고학적으로보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북한 민족유산보호지도국과 프랑스 국립극동연구원이 지난 2014년 평양민속공원 조선민속박물관에서 개성성 공동조사발굴 전시회를 개최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자료사진]
kimhyoj@yna.co.kr
공민왕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자전거로 떠나는 안동 문화 여행 6] 낙동강 영호루와 6.25 전쟁 안동 전투▲ 안동 영호루(映湖樓) 안동 영호루 정자 입구. 한글 현판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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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인 유교 고장 중 한 곳인 안동은 조선시대 못지 않게 고려 왕조와도 인연이 깊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물리친 당시 고창군(안동)과 주민을 위해 '나라를 편안하게 한 동쪽 마을'이란 뜻으로 안동(安東) 지명을 하사했다.
또 고려 말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당시 복주(안동)로 왕비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피난 왔다. 공민왕의 몽진으로 이곳 안동은 잠시 고려 수도가 되었고, 공민왕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공민왕은 이곳 낙동강 영호루 정자에 올라 피난길의 고단함과 적적함을 달랬다고 한다. 왕은 누각 밑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모래사장에서 활쏘기 경기 등도 했다고 한다. 전설이 서린 당시 영호루는 사라지고 없지만 1970년 다시 만든 영호루가 현재 안동시 정하동에 남아 있다.
▲ 영호루 현판 낙동강쪽으로 걸려있는 영호루 현판, 공민왕 친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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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개성으로 환궁한 뒤 복주(안동)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映湖樓) 친필 금자현판(金字懸板)을 하사했다고 한다. 영호루 한자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고, 한글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현재 영호루 앞 뒤편에 걸려있다. 2층으로 된 영호루에 오르면 북서쪽에 안동의 영봉인 학가산이 우뚝 솟아 있고, 낙동강 건너로는 안동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 영호루에서 바라본 안동시가지 오른쪽 다리가 영호대교, 중간은 안동(인도)교, 왼쪽은 안동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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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정자 내부에는 옛 선인들이 영호루에 올라 읊은 한시 시판이 많다. 현재 걸린 시판만도 47개로 퇴계 이황과 삼봉 정도전 등 유명인들의 시판이 남아 있다.
▲ 퇴계 이황 영호루 시판 영호루에 올라 읊은 퇴계 시 客中愁思雨中多(객중수사우중다) / 나그네 시름이 비만나 더한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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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이 누각을 중수하고 '낙동상류 洛東上流 영좌명루 嶺左名樓'라는 대형 편액을 걸었다. 이 편액은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누각의 위용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 영호루 내부 편액 "낙동상류" 洛東上流 1820년 안동 부사 김학순이 쓴 글씨로 만든 편액 "낙동상류 洛東上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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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호루 정자 내부 편액 "영좌명루,嶺左名樓" 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이 쓴 글씨로 만든 대형 편액 "영좌명루,嶺左名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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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 전북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200년대 고려 김방경 장군이 일본 원정길에 영호루를 찾아 읊은 한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어 영호루의 건립 연대를 짐작하게 한다.
▲ 영호루에 걸린 김방경 시판 고려 장군 김방경이 일본 원정길에 영호루에 올라 읊은 시 東征日本過次福州登映湖樓(동정일본과차복주등 영호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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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묵객들이 오른 영호루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547년 조선 명종 2년 대홍수로 누각이 유실됐고, 1775년 영조 51년에 다시 홍수를 만나 누각이 사라졌다.
영호루 금자현판도 1547년 명종 때 대홍수로 떠내려갔다가 경남 김해에서 발견됐고, 1934년 대홍수 때도 수개월 후 선산군(지금 구미시) 구미리 부근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 전란을 피해 몽진할 정도로 안동은 '편안한 동쪽 마을'이었지만 6.25 전란은 피하지 못했다. 영호루 바로 옆에는 6.25 전쟁과 월남 전쟁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 영령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건립돼 있다.
충혼탑은 해마다 6.25 전쟁이나 현충일, 그리고 새해 등 각종 기념일 때 추모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 안동시 정하동 충혼탑 6.25전쟁, 월남전쟁 등 호국 영령을 모신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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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호루 바로 앞 낙동강은 6.25 전쟁 때 북한국과 국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남하하려는 북한군을 맞아 낙동강 남단을 사수하려던 국군 8사단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교전을 펼쳐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영호대교 옆에 작은 다리인 안동(인도)교는 1934년에 설치한 교량으로 6.25 당시 안동 북쪽과 남쪽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으려던 국군은 안동교 다리 남단에 폭탄을 설치해 다리를 폭파시켰다. 다리를 폭파한 자리는 지금도 동판으로 표시돼 있어 급박했던 당시의 전투 상황을 느끼게 한다(안동교 북단에서 32, 33, 34번 교각 폭파).
▲ 안동(인도)교에 남아있는 폭파 자리 6.25 전쟁 때 북한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폭탄을 설치해 다리를 폭파한 자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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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인도)교에서 바라본 안동철교 6.25 전쟁 때 안동(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됐다가 복구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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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 다리와 함께 그 옆에 있던 안동철교도 함께 폭파됐다. 안동철교는 중앙선 철도 이전으로 지금은 열차가 다니지 않지만 철교 교각 곳곳에는 당시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6.25 당시 국군은 '안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며칠 동안 저지함으로써 대구 인근의 다부동 전투와 낙동강 전투 교두보를 마련할 시간을 벌어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6.25 전쟁 때 안동시가지와 낙동강 6.25 전쟁 때 폐허가 된 안동시가지와 폭파된 안동(인도)교와 안동철교 출처:(구)안동역사 사진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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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 안동은 폐허가 됐지만 굳건히 일어나 새로운 발전을 이루며 '평화로운 동쪽 마을'의 명성을 다시 잇고 있다. 안동 영호루는 낙동강 자전거길을 따라 정하동 영호대교 남단으로 올라가면 작은 언덕 위에 있으며, 안동(인도)교, 안동철교, 안동시가지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안동 영호루 : 안동시 강남로 187-5 (정하동 338-1번지)
안동(인도)교 : 영호루 바로 앞
안동철교 : 영호로 바로 앞
▲ 안동 영호루, 충혼탑, 영호대교, 안동교 지도 지도 좌편 안동 영호루, 충혼탑, 영호대교, 안동교가 보인다. 안동철교는 지도에 나타있지 않지만 안동교 바로 옆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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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군벌' 이성계, '친명 사대' 노선 택한 까닭 (pressian.com)
[기고] 한국사 왜곡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
고려판 한류붐을 일으킨 기황후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110914161&code=960201
박경만입력 2019. 10. 12. 05:06수정 2019. 10. 14. 15:17
폐허가 된 한반도 중심..궁예와 서태지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daum.net)
입력 2018-05-09 03:00업데이트 2018-05-09 03:00
군사분계선에 있는 ‘궁예도성’… 남북 공동발굴조사 이뤄질까|동아일보 (donga.com)
- 입력 2007.11.19
‘궁예 꿈’ 60년 침묵 깨다 < 학술 < 문화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kado.net)
KBS 한국사전 – 고려 여걸 천추태후
최초 공개: 2020. 2. 26.
https://youtu.be/2lvmYi1Fm10?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KBS HD역사스페셜–천 년 전의 역사전쟁, 고려거란전쟁
최초 공개: 2020.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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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세기의 전쟁 2편, 강감찬의 귀주대첩
최초 공개: 2020. 3. 11.
https://youtu.be/dUNKAOREROI?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KBS HD역사스페셜 – 무인시대 10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 / KBS 2006.2.3 방송
최초 공개: 2020. 8. 31.
https://youtu.be/9WdT7GrITTw?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최초 공개: 2020. 2. 7.
https://youtu.be/yTya5JcM1kA?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고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000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