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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고려

3. 고려 고고학 (1) 왕건릉의 발굴

대야발 2021. 7. 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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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동일성, 역사의 통일성과 문화의 동질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마지막으로 2000년 9월 14일 중추가절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을 실제 답사하고, 왕건의 후삼국 통일의 터전인 만월대(滿)를 답사한 것을 다시 살펴보는 것으로 대단원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려 태조 왕건릉[현릉(顯陵)] 위치도

왕건[876~943]은 개성()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일찍이 혈구진(, 오늘의 강화도)을 거점으로 경기도 일대의 신라 변경에 설치된 군진을 배경으로 한 해상세력을 장악하였다.

그 후 왕건은 궁예() 휘하의 장군에 임명되어 주로 서해안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궁예의 신임을 받아 오늘날의 수상()인 시중()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918년,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때 왕건의 나이 42세였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구려의 계승을 의미하는 ‘고려()’라 하였다.1)

『고려사』 고려 세계()에 보면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을 ‘고려인()’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에서 고려인이란 고구려인을 말한다.

그리고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와서[1123] 견문한 고려의 실정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使)』 제2권 세차()에서 “왕씨[왕건]의 선조는 고려[고구려]의 대족이다[ ]”라고 하였다.2)

고구려가 멸망한 뒤 백두산 방면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왕건의 일족은 발해()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자치통감()』 권285 후진기() 6제왕() 개운() 2년[945]조에 보면, 고려 왕 왕건이 호승() 말라()를 통해 후진 제왕 석씨()에 이르기를, “발해는 우리[고려]와 혼인한 사이로 그[발해]의 국왕이 전란에 포로가 됐을 때 조정에 건의하여 공동으로 거란을 물리쳐 발해 왕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라고 한 기록을 보면3) 고려 왕실과 발해 왕실과의 혼인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은 김부(, 신라 경순왕)를 ‘신라 왕’으로 예우()하여 개성에 있는 왕궁의 동쪽에 넓은 구역을 주고 자신의 장녀인 낙랑공주를 김부에게 주어 아내로 삼도록 하여 위로()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왕건 자신은 김부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김부의 사촌 누이]를 아내[신성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래서 왕건은 신라의 왕통()과 권위를 계승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한편, 견훤()의 후백제는 서남 지방의 넓은 평야 지대를 점령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왕건은 후백제와는 비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토대를 구축해나갔다. 그러나 934년 신라가 후백제와 신라의 변경에서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고려는 후백제에 대한 공격을 강화해나갔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때[935]를 같이하여 후백제 견훤의 장남인 신검()이 정변을 일으키므로 견훤은 고려에 투항해 왔다. 이를 계기로 고려군은 견훤을 앞세워 신검을 토벌하여 마침내 후백제의 투항을 받아냈다. 이때가 936년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후신국인 발해가 936년에 거란(, 요나라)에게 멸망하게 되므로 발해의 유민들은 압록강 일대에 대()씨를 중심으로 신정권을 세워 국호를 ‘후발해()’라 하고, 발해 부흥을 전개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이주해왔다.

936년 발해 태자 대광현()은 발해 유민 10만을 데리고 고려에 망명해 왔다. 왕건은 대광현에게 고려 왕씨와 같은 왕()씨를 하사하고, 황해도 백천태수에 임명하여 계속 발해 왕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대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4)

고려 태조 왕건은 비록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려 한 원래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였지만 왕건의 국토통일과 민족통합의 길고 긴 노정과 과업은 달성되었다.

저자는 2000년 9월 14일, 왕건의 현릉()을 참배할 기회가 있었다. 고려 고종()은 원래 신혜()왕후 유씨와 943년 합장되었으나, 19년[1232]에 몽고란()을 피하여 신도() 강화()로 수도를 옮기면서 태조 현릉도 함께 옮겨 갔다. 『고려사』 권 23 세가()23 고종() 19년[1232]에 “이 해에 세조와 태조의 두 재궁()을 신도[강화]에 이장하였다[  ]”고 하였다.

개성() 왕건릉[현릉] 원경2000년 9월 14일 처음으로 개성을 방문하는 길에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을 방문하였다.

개성 왕건릉[현릉] 전경

원종() 11년[1232]에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오늘날 개성의 현릉에 다시 안장되었다. 『고려사』 권 26 원종 11년[1270]조에 보면, “왕이 구경에 돌아와 사판궁에 기어하시고 비빈도 또한 강화로부터 개경에 돌아왔다. 이 해에 니판동에 건물을 짓고 세조와 태조의 재궁도 천안하였다[       ]”고 하였다.

왕건릉은 1993년의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기슭에 정비사업으로 성역화()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왕건릉의 능침 앞 좌우에 재실인 정자각()과 기념비가 있다. 재실 안에 왕건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기록화 7점이 전시되어 있다.

왕건릉[현릉] 구비()

왕건릉 개건비()

고려 태조 왕건() 초상화[상상도]왕건릉 전시관.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재로 1993년 3월에 태조 왕건[876~943]의 현릉이 발굴·조사되었다.5) 왕릉의 내부 구조는 전면에 무덤으로 들어가는 연도가 설치되어 있고, 연도를 지나면 중앙에 현실()이 있다. 화강암 현실은 판석으로 쌓은 네 벽면의 상부에 머릿돌[일종의 창방()]을 가로질러 올려 놓으면서 천장을 안으로 좁힌 다음 그 위에 넓은 천장돌을 덮었다. 이에 앞서 1992년 10월 왕건릉인 현릉을 확장 개축하기 위하여 공사할 때 봉분의 북쪽 외곽에서 청동제 왕건좌상[나체상, 높이 135.8cm]이 출토되었다고 한다.6)

고려 태조 왕건상개성 현릉의 봉분 북쪽에서 출토된 왕건의 청동제 나체좌상이다. 높이 138.3cm.

왕건릉 내부 관대와 이층대

발굴보고에 의하면 현실에 들어서면 판석으로 깐 바닥의 중앙에 관대()가 놓여 있고, 관대 좌우에는 벽면에 붙여서 부장품을 올려놓은 이층대()가 있다.

현실의 네 벽면과 천장에 원래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동서 벽면의 벽화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고려 왕건릉 현실 동벽의 매죽도(梅竹圖)와 청룡도(靑龍圖)[부분]1993년 발굴된 개성시 해선리(海仙里)에 있는 왕건의 현릉(顯陵) 현실 내부 네 벽에서 사신도(四神圖)와 매화나무·대나무·소나무 그림이 발견되었다. 현릉 벽화는 매우 독특한 벽화로, 우리나라 회화사(繪畫史)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벽에는 매죽도()를 그리고, 매죽도의 오른쪽 매화 가지와 대나무 가지 아래로 청룡()의 꼬리 부분이 남아 있다. 매화의 표현은 곧은 줄기를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붉은 색으로 채색한 이른바 구륵채색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매화 가지는 붉은 색을 한 필치로 일필휘지하였는데, 그 고고하고 청초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대나무는 수묵만으로 그리는 구륵기법으로 처리하였는데, 그 꼿꼿하고 강인한 필치가 천장을 찌를 듯하다. 아마 화가는 가장 정확하게 대나무의 특징을 파악했던 것 같다.

왕건릉 내부 서벽의 소나무와 백호(白虎) 그림 부분

서벽에는 큰 소나무 그림[노송도()]을 한 벽면에 가득하게 그렸는데, 소나무 줄기는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바로 채색으로 농담을 그린 몰골법()을 구사하고 있다. 벽면 좌우에 소나무 가지를 굴절시킨 배치에서 화가의 노련한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노송의 오른쪽 가지 아래로 작은 매화나무 한 그루를 그리고, 노송의 왼쪽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이는 벽면에는 남쪽을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백호()가 가는 몸매를 드러내고 있으나 전체의 자태는 분명하지 않다.

북벽에는 손상이 심해 벽화를 알아볼 수 없으나 아마 현무도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장 고임돌과 천장에는 벽화가 아직 남아있다. 고임돌에는 매화나무 가지가 하나씩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남쪽에 8개의 별이 동서로 길게 배치된 별자리 그림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왕건릉의 벽화는 기본적으로 네 벽에 사신도()를 배치하고, 동서 벽에 송()·죽()·매()를 그린 독특한 고분 벽화이다. 원래의 왕건릉은 왕건이 세상을 떠난 해인 천수() 26년[943]을 전후하여 영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동양화[한국화]의 독특한 한 유파인 사군자()의 매()·난()·국()·죽()에서 비록 국화와 난초 대신 소나무가 들어가긴 했지만 왕건릉 벽화의 발견으로 사군자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를 통해 왕건릉이 처음 영조()된 시기[943]인 10세기 중엽에 이미 사군자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동양화[한국화]에서 송·죽·매는 겨울철에 추위를 이겨내는 청초하고 강인한 식물로 고래로부터 한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대나무·매화나무를 이른바 세한삼우()라 하여 이를 그림으로 그려 선비의 지조와 같이 여겼다. 동양 삼국에서 지금까지 확실한 절대연대를 갖춘 가장 오래된 세한삼우도나 사군자 그림이 발견되기는 왕건릉이 처음이다.

세한삼우가 말해주듯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왕국 500년의 굳건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고려 500년은 몽골을 비롯하여 수많은 외세와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강인하게 버텨 왔다.

그것은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어떤 구심점을 이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 통일의 기틀을 왕건이 마련하였다.(1)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왕건릉의 발굴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참고자료>

 

 

 

북한, 고려시기 '옥불상' 첫 발굴 | 연합뉴스 (yna.co.kr)2023.11.16

 

 

 

영덕 야산서 고려가 쌓은 왜구 방어용 성곽 흔적(종합) | 연합뉴스 (yna.co.kr)2020-03-05 1

둘레 약 400m…목책 시설·건물터 12기·배수시설도 확인

 

 

 

화천 개성리 절터에서 확인된 '육각형' 법당…북한 금강산 정양사와 쌍둥이다 - 경향신문 (khan.co.kr)2019.09.30

 

 

 

 

높이만 1m…국내 최대크기 청자상감매병 부안서 발굴 - 뉴스1 (news1.kr)2016-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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