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6.05.26 10:49 수정 2016.05.30 13:26

고려의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 고려시대사 < 시대별 주제 < 기사본문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고려의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기사최종수정: 서기2016.05.30. 13:25 은 대륙고려를 말한다.“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고 서쪽은 요수(遼水)에 이르고 북쪽은 거란의 옛 땅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금(金)나라에 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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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고려도경>은 대륙고려를 말한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고 서쪽은 요수(遼水)에 이르고 북쪽은 거란의 옛 땅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금(金)나라에 이른다.”

 

고려의 강역을 기술한 이 대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봉경(封境)편에 기술된 내용이다. 흔히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불리는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 인종 1년(1123년)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에 돌아가 고려의 인문과 지리 등을 담아 저술한 40권으로 된 책이다. 자(字)가 명숙(明叔)이며 호(號)가 자신거사(自信居士)인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은 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한 것이나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의 강역을 고찰하기 위하여 위의 권3 봉경(封境)편을 이어서 보자.

 

“고려는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처럼 들쭉날쭉하게 얽혀있다.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나라를 곧게 지키지 못하여 고려에 병합이 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남송의 서울변경)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로 가서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그 강역은 무릇 3,790리이다. 해도(海道)로 가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다. 오늘날 건국된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 옛적의 봉경(封境)은 동서는 2,000여 리, 남북은 1,500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보물 제1537호, 소재지 국립중앙도서관, 제작시기 조선 시대(서기1471년), 붉은 화살표 위치가 고려시대 윤관장군이 북방여진족을 축출하고 비석을 세운 공험진이다. 두만강 넘어 700백리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현재 국사책에서 배우고 있는 신의주-원산만 선 이남의 고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고려의 강역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적혀 있는 고려의 강역을 추론해보자.

먼저 고려는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 지역이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이 네 곳은 현 중국의 산동성 발해 연안을 따라 북쪽과 서북쪽에 늘어선 지명들이다. 이곳에서 마주보고 있는 곳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요녕성이다. 그렇다면 하북성과 요녕성 중의 하나가 고려의 강역이 시작되는 곳인데 어디일까? 당연히 하북성에서 출발한다. 그 이유는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의 위치와 갈석산에 대한 <통전>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거란지리도>에 그려진 요수는 현 요녕성이 아닌 하북성에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서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는 현 하북성 천진을 거쳐 발해로 흘러들어가는 영정하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압록강의 서쪽의 백랑・황암 두 강이 합류된 요수는 영정하였으며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요사(遼史) 권115 고려 편에서 “요 성종 3년(985년) 가을 7월 모든 도(道)에 명을 내려 각각 병장기를 갖추도록 하고 동쪽으로 고려를 쳤다. 8월 요택(遼澤)이 물에 잠기어 출병을 그만두었다”라고 하여 요수가 거란과 고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요수는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대개 예전에는 동북의 모든 물을 일컬어서 압록이라고 칭하였다.”하고 하여 압록이란 말은 고정된 강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이란 지명은 지난 2008년 10월 칼럼에서 수계의식을 갖던 특별한 강을 지칭하였으며 나라가 옮겨질 때마다 이동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갈석산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데 당나라 때 두우(杜佑, 735 ~ 812)가 편찬한 <통전(通典)> 권186 변방 고구려 편에서 “갈석산은 한(漢) 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려에 들어가는데 유적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고려는 물론 고구려이다. 그런데 위 기록의 주(注)에서 “갈석산은 오늘날 하북성 북평군 남쪽 20 리에 있으며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左碣石)이라 한다.”라고 하여 갈석산은 하나가 아니며 여러 곳에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갈석(碣石)이란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석과 같은 것이다. 진시황이 몽념을 시켜 현 하북성 산해관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산해관까지 장성이 연결된 것은 근대의 명나라 때이다. 갈석산을 현재의 산해관 근처에서 찾거나 심지어는 황해도 수안을 한 낙랑군 수성현이라 하여 갈석산이라 우기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며 역사와 영토를 중국에게 통째로 내주는 꼴이다.

▲ 거란지리도 중의 발해인근 지도 -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등주, 래주, 빈주, 체주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고려의 강역이 하북성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통전>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갈석은 현 산서성 상산(常山) 즉 항산(恒山) 주변에 있었던 갈석이었으며 고려경내에 있었던 것은 하북성 갈석으로 보아야 한다. 산서성 지역의 갈석산은 <상서(尙書)>와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협우갈석입우하(夾右碣石入于河)” 즉 “갈석을 오른쪽(서쪽)으로 끼고 황하에 흘러들어간다”고 한 갈석으로서 고구려와의 경계인 갈석이며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후대에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았을 때 <고려도경>의 고려 강역에 대한 기술은 올바른 것이며 하북성에서 두만강 너머까지가 고려의 강역이었다. 결국 <고려도경>에서 말한 요수에서 3,790 리의 출발점이 하북성이 되어야만 서두에 말한 강역과 합치되게 된다. 또한 현재 한반도 남해를 요해(遼海)라고 부른 적이 없고 요(遼)지역에 있던 바다를 요해라 한 것으로 현 발해가 요해였다. 따라서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고려의 강역과,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다는 <고려도경>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고려의 서경이었던 평양이 <원사>에서는 동녕부라 하고 현재의 요동 지역이라 하였으며 원나라에서 고려 말기의 임금들을 심양왕이라 한 것 역시 고려의 강역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큼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신채호(申采浩)는 “고려사지리지에 두만강 건너 7백 리 선춘령 밑에 윤관이 세운 정계비(定界碑)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라고 하여 선춘령이 고려의 동북쪽 경계가 되는 지역임을 말하고 함흥평야 일대로 비정한 역사의 강역을 깎아내린 역사학자들을 질타하였다.

 

고려의 강역은 현 중국 하북성에서 두만강 이북까지 이어진 나라였으며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손색이 없는 나라로 475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현 국사 교과서의 고려부분은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입력 2017.02.14 16:59 수정 2017.03.13 12:16

고려시대까지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역사지리의 위치를 찾는 것은 역사연구의 핵심이다.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작용하는 압록강은 언제 붙여진 이름일까?

중국의 수많은 정사류正史類는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고 한다.

압록강이 요하라면 우리역사 다시써야...

 

중국의 '연산도燕山圖'라는 고지도를 보면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에 그려져 있다. 

 

현재 압록강은 일제식민사관의 잔재...

 

 

압록강 위치를 바로 찾는 것은 중국 동북공정 무력화 시키는 길...

서기2017.2.13. 서울 광화문한국통신(KT)건물에서 유라시안네트워크(이민화 대표)가 주최한 유라시안 역사인문학 특강에서 강원대학교 사학과 남의현 교수가 압록강의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는 연구성과를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고구려시대의 압록강은 어디?’라는 주제로 강의에 나선 남 교수는 역사 연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역사에 나타나는 물줄기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남 교수가 제일 먼저 근거로 내세운 것은 <대명일통지>다. 대명일통지는 명나라 당시 중국의 역사인문지리서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명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 대명일통지에 우리나라 땅이라고 알려진 평양성과 살수 그리고 압록수가 나온다. 그리고 위치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이다. 그 위치는 결코 현재 우리나라 땅이 아니다. 남 교수의 말대로 현재의 요령성 요하일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남 교수가 연구한 결과물을 보면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는 증거가 수없이 나온다. 남 교수는 명나라이전과 이후에 등장하는 사료를 제시하며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는 것을 고증해 나갔다.

 

특히 눈길을 끄는 사료는 <성리대전>과 <주자어류>다. 천하에는 3개의 큰물이 있는데 장강(양자강)과 황하 그리고 압록이라고 한다. 또는 천하에 오직 세 개의 큰물이 있다. 가장 큰 것이 양자강과 황하 그리고 혼돈강이라는 것이다. 역기서 혼돈강은 압록수로 증명된다. 이들 사료들이 말하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라고 한다면 전혀 맞지 않는다. 요하일 때만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요사>태조9년조에는 요태조가 압록강에서 낚시질을 했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현재의 압록강이라면 이해할 수없는 기사다. 적국의 황제가 적을 앞에 두고 낚시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삼국유사>를 보면 요수가 압록이라고 나온다.

"살펴보면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이며(按麗時都安市),

이름 하여 안정홀이라고도 하는데(一名安丁忽),

요수 북쪽에 있다(在遼水之北).

 

요수의 또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遼水一名鴨淥)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今云安民江).

어찌 송경 흥국사의 이름이 여기에 있겠는가(豈有松京之興國寺名)?"

 

남 교수가 근거로 내세운 사료는 중국의 <수서>, <구당서>, <신당서>, <통전>, <자치통감>, <통감>, <송사>, <요사>등이다. 우리 사료로는 <삼국유사>, <대동수경> 등이다. 이들 사료에 나오는 압록강 기사를 현재의 압록강에 갖다 맞춰 보면 맞지 않는 것이 압도적이다. 반면에 요하에 갖다 놓으면 자연스럽게 풀이되는 것이 더 많다.

 

또한 서기1930년대 나온 <성경통지>등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현재의 요하가 고대의 압록강이라고 고증해 나갔다. 요하에는 현재 표지석이 크게 있는데 예전에는 ‘구려하’라고 새겨져 있다고 했다.

 

▲ 남의현 교수가 비정한 고려시대까지의 압록수와 평양성의 위치도.

 

 

 

입력 2017.05.16 15:05 수정 2017.06.15 18:14

 

소중화 조선 고지도 일관되게 반도사관에 입각...

서기2017.5.15. 유라시안넷(회장 이민화)이 광화문 케이티 건물에서 주최한 역사인문학특강에서 남주성 강사가 이 같이 밝혔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이 말하는 고려의 강역은...

그러나 남주성 강사는 이에 대하여 지리적 상황과 거란의 요나라 군대가 기병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더구나 중국 측의 요사 지리지, 무경총요, 성경강역고, 원사, 대원일통지 등의 문헌사료에서 강동6주의 지명들은 요녕성 서쪽에 위치해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료도 제시되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이 대표적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 편찬한 고려의 인문지리서다. 여기에 고려의 강역이 묘사되어 있다. 이 문헌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땅은 현재의 압록강 의주선에서 동해안 원산만 선 이하다. 평안도 일부와 강원도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나라다. 그런데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남쪽은 요해로 막히고 서쪽경계선은 현재의 요수와 맞닿아 있고 북으로는 옛 거란지역과 접경을 이루고 동으로는 금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고 나온다(高麗南隔遼海 西距遼水 北接契丹舊地 東距大金).

 

또한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개원과 철령, 길림까지를 경계로 하는 남만주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신라를 고려가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고려의 강역은 남만주일대까지 된다는 것이 다시 확인된다.

 

서희가 뺏은 땅은 강동8개지역...

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강동6주는 흥화진(의주), 곽주(곽산), 귀주(귀성), 통주(선주), 용주(용천), 철주(철산)다. 이러한 설정은 송사와 속자치통감에서 나왔다. 그러나 고려사와 동사강목에서는 흥화진, 곽주, 귀주, 선주, 장흥진, 귀화진, 안의진, 맹주라고 하여 8개의 지역으로 나온다. 강동6주 보다 더 넓은 지역을 거란으로부터 얻어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8개 지역의 땅 이름을 찾을 수 있다면 서희가 빼앗은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이 가능하다.

 

대표지명으로 흥화진을 보자. 흥화진은 현재 의주라고 국사교과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무경총요에서는 보주라는 행정구역을 말하면서 북쪽으로 2십리지점에 대릉하가 있다고 한다. 대릉하는 중국역사상 단 한곳밖에 없다. 현재 중국의 요서지방이다. 그런데 이 보주 안에 내원성이 있다. 이 내원성의 동쪽으로 신라의 흥화진이 4십리에 있다고 한다. 결국 대릉하 부근에 서희가 거란으로부터 빼앗은 강동6주의 하나인 흥화진이 있었다는 얘기다.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압록강은 익주강이라고 하는데 요나라의 황룡부에 있었고 발해의 황룡부라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요수를 일명 압록이라고 나온다.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미 요사 지리지나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해서 보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현재의 요녕성 요양일대로 나온다. 그 서쪽이나 서북쪽에 있는 강이 압록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요하나 더 서쪽의 대릉하가 당시의 압록강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른바 강동6주는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등록 2017.05.23 10:46:23수정 2017.05.23 10:46:24

 

【서울=뉴시스】한국 역사학계는 고려의 국경을 <왼쪽>처럼 인식하고 있다. <오른쪽>은 일본의 의도적 왜곡을 거둬내고 ‘고려사’, ‘요사’ 등 사서에 기반해 고증한 고려의 국경선이다.

 

중국 랴오닝성 톄링(鐵嶺)시 일대까지가 고려(918~1392)의 땅이었다. 윤관(?~1111)이 설치한 동북 9성의 현 위치는 지린성 옌볜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음모 탓에 우리나라 영토는 축소됐고, 결국 반도가 되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고려사-지리지’는 ‘고려는 서북으로 당 이래 압록을 경계로 했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대개 서북으로는 고구려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동북으로는 그것을 넘어섰다’고 기록했다.


‘고려사-지리지’의 압록(鴨淥)을 일제는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획정, 압록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만 고려의 땅이라고 봤다. 하지만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맞댄 요나라의 역사책 ‘요사’와 대조하면 압록은 압록강이 아니라 랴오허(遼河)의 지류다.  

 
윤한택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압록강(鴨淥江)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을 관통해 흐르는 랴오허, 압록강(鴨綠江)은 북한과 중국 국경선인 압록강”이라고 못 박았다.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압록강이 둘 있었다.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淥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이다. 압록강(鴨淥江)은 보주(保州),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가 거점도시였다. 보주는 의주방어사가 관할했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은 고려 전체시기를 통해 변함없이 압록강(鴨淥江)이었다.”

 
윤 교수는 압록강(鴨淥江)으로 추정되는 현 랴오허 유역에 천리장성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1084년 시점 압록강(鴨淥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부, 1주, 2성, 70보, 8영에 합계 정병 2만2000명이었다’는 고려의 기록이다. 남쪽은 요나라의 동경성에서 시작해 서북으로 황룡부에 이른다. 이 지명들을 보면 요나라의 동경성은 현 랴오닝성 랴오량(遼陽)시, 황룡부는 지린성 중북부다. 즉, 천리장성은 현 압록강변이 아니라 랴오허 유역에 있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인철 교수(경복대학교 기획처장)는 “우리나라와 만주를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조작한 식민사관 중 반도사관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판단했다. 진실은 조선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담겨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협정에서 명나라는 공험진(公嶮鎭) 이남부터는 조선의 관할이므로 해당 지역을 조선으로 귀속하는 데 동의했다. 공험진이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선이 된 것이다.   

이 교수는 “동북9성 위치를 비정하는 주요 지명인 공험진과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다. 오늘날 지린성 옌볜 자치주 북단 어디로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 초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들도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했다고 서술했다”고 제시했다.
 

입력 2017.05.31 02:02 수정 2017.12.24 06:07
 

고려의 동북강역은 고구려 보다 넓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우리역사지리는 일제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든 것...'맑은' 압록강이냐, '푸른' 압록강이냐...요동지역은 고려시대까지 우리의 역사 강역이었다. 서기2017.5.26.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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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경선은 어디까지인가...
 
▲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의 윤학태 연구교수는 자신이 한문에 대해서는 전문가라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1차사료를 분석해 본 결과, 고려의 국경선은 요동이라고 했다.

 

결국 <요사>나 <금사> 등 동이족 계열의 민족이 쓴 사료에서는 이들 나라와 고려의 국경선은 현재의 요하로 나타나는 맑은 압록강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푸른 압록강은 고려의 후방 방어선 역할을 하는 강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서희가 거란 장군, 소손녕과 영토담판을 해서 가져온 강동6주는 요하지역의 동쪽이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이러한 실적은 불과 몇 년 동안 집중 연구함으로써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강당주류사학계에서는 해방 후 71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일제 조선총독부가 남겨 놓은 자료만 되풀이 해온 것이 이해 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인철 경복대학교 교수는 ‘고려중기 동북국경’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특히 고려 예종시기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9개성을 쌓은 곳을 밝혀냄으로써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해 나갔다.

먼저 <고려사> ‘지리지’ 서문을 인용하여 고려 국경선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려의 북방 영토는 서북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구려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 북상했다.”

이 서문을 보면 우리가 알고 이는 고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북의 고려 강역이 고구려 보다 더 넓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관이 개척했다는 9개성이 어디에 있었나이다. 이 교수는 여기에는 세 가지 학설이 있다면서 차례로 소개했다. 함경도 길주 이남설이 그 중 하나인데 이는 소중화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견해라고 했다. 특히 서기17세기의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내 면서 못을 박았다고 했다. 한백겸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을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지도까지 그려 붙여 놓아 중화사대주의 사관의 핵심 인물로 손꼽힌다. 이 교수는 이 학설보다 더 축소된 학설이 함흥평야설이라고 했다. 이 학설은 조선총독부에서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일제가 우리나라와 만주 식민지 정책에 맞게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와 만주를 영구히 식민 지배를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을 함흥평야일대로 비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지명까지 달아 놨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 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고려의 동북강역은 두만강에서 8백여리 떨어진 길림성의 대수분하 지역이라고 했다. 문헌과 현지답사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두만강 이북설이다. 이 학설은 이인철 교수 등 이 주장하는 최근에 대두 된 학설이다. 다른 학설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거의 추정으로 만들어진 학설인데, 두만강 이북설은 철저히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사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교수는 윤관이 개척한 9성이 선춘령과 공험진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이 문헌들의 구체적인 기록을 따라 현지답사를 수차례 했다고 했다. 특히 <용비어천가>에는 선춘령과 공험진에 대하여 거리와 걸린 날수까지 기록해 놓고 있어 현장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현재의 두만강 북쪽의 대수분하 지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오배촌 그리고 홍석립자촌 지역이라고 결론지었다.

강원대학교 윤은숙 교수는 ‘서기13-14세기 고려의 요동인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특히 요심지역, 즉 요양과 심양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역사 변천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논증했다. 윤 교수는 요심지역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지역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평지가 많아 옛날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유목민족과 정주민들이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 살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써 일종의 국제도시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임을 말해주는 것은 고려인 홍복원의 활동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고려의 관리로 있었던 홍복원은 몽골제국이 쳐들어오자 서경, 안주, 귀주 등 이 지역의 40여개 성을 들어서 항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몽골은 홍복원에게 이 지역의 고려군민만호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했다. 몽골의 원나라가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이 지역이 대대로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고려의 충선왕이 제왕의 신분으로 심양로를 분봉지로 받은 것과 이 지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 사는 고려인을 고려정부에서 돌려달라고 원나라에게 요청하는 사건도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다. 더구나 서기1370년 고려 공민왕이 지용수 등과 함께 요양의 요성을 차지하고 이곳은 고려의 땅이며 백성도 고려의 백성이라고 선언한 것은 명백히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 강원대학교 윤은숙 교수는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고려 관련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요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고려의 강역임을 논증해 나갔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 지역이 고려강역임을 밝힌 것은 윤 교수가 처음으로 보인다.

 

남의현 강원대학교 교수는 ‘명대 한중 국경선은 어디였는가’로 주제 발표에 나섰다. 남 교수는 소중화 조선과 명나라와의 국경선을 서기148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파악했다. 서기1480년 이전에는 남만주의 연산관까지가 우리와 명나라와의 국경선이라고 했다. 이 시기는 고려시대인데 원나라와 고려가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원나라가 명나라한테 망하자, 명나라가 고려와 원의 국경선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기1480년대 이후 소중화 조선이 들어서고부터는 조금 후퇴한 봉황성이 국경선이 되었다고 논증했다. 남 교수는 <원사>를 통해서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했고, 소중화 조선의 최부가 남긴 <표해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이어 서기1860년 청나라에서 편찬한 <성경전제비고>의 ‘동변외개간승과설관사의’ 라는 문헌으로 상세하게 고증해 나갔다. 그러면서 서기19세기 초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의 사행기록을 제시하여 소중화 조선 후기까지도 역사의식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패수가 요동의 서쪽에 있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를 통해서 소중화 조선까지 남만주 일부분까지 우리역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강원대학교 남의현 교수는 명나라와 소중화 조선의 국경선을 파악함으로써 고려의 국경선을 밝혀냈다.

 

이날 학술발표회를 인도하며 사회를 맡은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는 각 발제가 발표를 끝내면 다시 한 번 핵심쟁점을 정리해서 설명했다. 이를 통해서 참석한 시민들이 이해를 쉽게 하도록 도왔다. 복 교수는 지금과 같이 우리의 역사지리강역이 정해진 것은 소중화 조선도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특히 일제의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주도하여 펴낸 <조선역사지리지>, <만주역사지리지>를 보면 이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현행 우리 국사책의 역사지리에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우리 국사책은 일본인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것이다. 복기대 교수는 드러내놓고 강단주류사학계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 교수가 이날 한 말을 종합해 보면 강단주류사학이 모든 문제의 뿌리임을 지적한 것으로 나온다.

▲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가 일제의 우리나라 역사 왜곡과 날조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날 학술 발표회에서 복 교수는 특히 우리역사지리는 일제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복 교수는 국경사 문제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님을 강조했다. 고려의 국경사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큰 과제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중국 정부의 동향을 소개하면서 통일이후 중국과의 국경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측에서 최근에 내놓은 국경관련 서적을 하나 소개했다. <說주변역사 話강역변천>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현재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수십 개의 나라와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맨 앞장에서 우리나라와의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중도 상당히 높다고 했다. 그 만큼 중국에서 우리나라와의 국경문제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복 교수는 국경사는 학자들만이 나서서는 안 되고 국가차원에서 철저한 대응을 해야 향후 역사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는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한다고 비판 받은 강단주류사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식민사학의 한 축으로 비판받은 동북아역사재단의 한 연구위원도 참석해 있었다. 교육부의 학술진흥과에서도 학술진흥과장 등 3명의 공무원이 참석해서 학술 발표가 끝날 때 까지 함께 했다. 주최 측에서는 계속해서 바른 역사를 회복하는 학문성과를 쌓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잘 못 된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입력 2018.04.21 23:53 수정 2018.05.10 00:26

'강원도 철령위' 위치는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식민사학계에 반격 2탄>

고려 말,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경은 '요동' 철령

위화도 회군 세력에 의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조작

광복 후,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 왜곡된 주장을 답습하여

'강원도 철령위'로 고착

 

▲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정태만 교수가 밝혀낸 고려말 철령위 위치.

 

 

명태조 주원장은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제안
철령위가 현행 국사교과서가 말하는 강원도가 아니라는 주장이 인하대학 고조선 연구소 정태만 교수에게서 나왔다. 서기2018.03.30.(금)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에서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주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정 교수는 먼저 고려말 서기1387년 12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와 고려간에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통고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고 분명히 했다.

당시 명 태조가 양국간 경계로 삼고자 한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철령과 그 이북의 문주, 함주, 공험진 등이 고려땅"임을 주장한 표문을 명나라에 제출했다. 이에 명태조가 "요동 봉집현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서기1388년 3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려는 옛날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왔으므로, (요동의) 철령과 그 이북땅은 명나라 땅” 이라며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고려는 이러한 명나라 요구를 거부했다. 또 고려가 그 철령이 '강원도 철령'인지 '요동의 철령'인지 명시하지 않고, 고려땅임을 주장한데 대해, 명나라는 철두철미하게 요동에 있는 철령에 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고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같은 사실은 처음부터 주원장이 강원도 북단 철령이 아닌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하여,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강원도 철령 북단의 쌍성총관부 지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정 교수는 이러한 근거로 <명실록>(1387.12.26, 1388.3.27, 4.18)과 <명사>(이원명 전)를 들었다. 이는 야사가 아닌 정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는 만큼, 그 근거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고려 말에 명태조 주원장이 경계로 삼고자 한 철령이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는 것은 최근 인하대학의 복기대교수, 강원대학의 남의현 교수 등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바 있다. 정교수는 이에 더하여 이렇게 잘못 알려지게 된 근본 원인이 <고려사>조작 때문이이라고 지적했다.

▲ 이성계 조선에서 내 놓은 고려역사책,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고려 진면목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부터 누락 왜곡
정교수에 의하면, 서기1388년 4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위의 철령위에 관한 사실들을 고려에 통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요동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되었다(1388년 3월)는 사실'이 누락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 논의가 중단되었다"고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다.

이미 한 달 전에 강원도가 아닌, 중국 요동에 철령위가 설치되어 종료되었는데도 '논의가 중지되었다'고 왜곡시킨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철령위 설치통보에 따른 명나라 토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 반란으로 집권한 세력이 쓴 사료다. 이성계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로써 위화도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락 왜곡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정태만 교수는 추정했다.

 

당시 고려는 요동지방을 고려땅으로 인식
그러면 명나라 토벌은 왜 하려고 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의 무리한 공물 요구, 상호 간의 사신 피살, 자주파와 사대파의 갈등 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고려의 고려 땅, 요동수복전쟁이다. 고려는 공민왕 때에 이르러 현재 요하 동쪽에 위치한 요동성을 수복하고 이곳이 고려 땅임을 선포하는 등 원나라 간섭으로 눌려 있던 고려 땅 수복전쟁에 나섰다.

그런데 요동성 더 동쪽에 있던 철령에 명나라의 위를 설치하여 중국 명나라 땅으로 만들겠다고 하니, 고려에게 이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국토를 빼앗길 수 없으니 명나라를 토벌하겠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현재 중국은 잘못된 설정된 철령위 위치를 역이용하여  "강원도에 철령위가 설치되었고 그 이북 지역은 명나라 땅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정 교수는 우리 세대에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북한의 격변기에 화근이 될 수있다고 내다 봤다.

▲ 중국은 현재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채워진 우리 국사책을 역 이용하여 고려말 명나라가 말한 철령위가 강원도 북단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동북공정이다.

 

명나라 스스로도 '압록강은 고려땅'을 인정하고, 요동의 철령이북은 중국땅 주장
한편 정교수는 이날 고려는 “오래전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 왔다”는 것을 명나라 스스로가 인정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서기1387년 12월 명나라에서 철령을 고려와 명나라간에 경계로 할 것을 알려왔다. 이어 4개월 뒤인 서기1388년 4월, 다시 요동땅 철령에 철령위가 설치되었다고 통보했다. 또 고려가 오래전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 두 개 역사 사실을 연계시키면 서기1388년 당시 ‘명나라와 고려간 국경은 요동땅 철령’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철령위는 5년간만 존속하다가 요양 북쪽 현재의 철령시로 이동
현재 중국 심양시 북쪽에는 철령시가 있다. 이 지명은 과거의 철령위에서 유래 한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명나라 초기 처음 설치된 철령위는 1388년부터 1393년까지 단지 5년간만 존속했다.

(서기2018.03.30.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학술발표 심층취재 2부끝, 3부에서 계속).

 

 

승인 2023.12.08 13:23

[강동 6주를 찾아서 ①] 압록강 남쪽인데 강동 6주?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고려 북계의 서북쪽 국경은 요령성 요양, 심양 인근
 

[강동 6주를 찾아서 ①] 압록강 남쪽인데 강동 6주?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최근 KBS에서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빠르고 간결한 전개와 수준 높은 전투신 그리고 그간 사극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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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북계는 요양, 심양과 접경하고 있었다

 

『명사』 권 41 지리지 2에 철령위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그 기록을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철령위는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에 옛 철령성에 설치했으나 26년(1393년) 4월에 옛 은주(嚚州)의 땅으로 옮겼다.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는 요하가 있으며 남쪽으로 범하(泛河)가 있고 또 남쪽에 소청하(小清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 남쪽에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에 의로천호(懿路千戶)를 이곳에 두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의 남쪽에 있으며 또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한다. 정통(正統) 4년(1439년)에 범하천호(泛河千戶)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곧 옛 철령성이며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기에 현을 설치했으나 폐지했다. 또 함평부(鹹平府)가 있는데 원나라 때의 직예요동행성(直隸遼東行省)이다. 지정(至正) 2년(1342년)에 항복하여 현이 되었으며 홍무 초에 폐지하였고 남쪽으로 도사(都司)와의 거리는 240리이다.”

 

1388년 철령위는 철령성이란 곳에 설치했는데 그 철령성은 봉집현이란 곳에 있었고 그곳이 당시 고려와 명나라 사이의 국경이었다는 뜻이다. 그럼 봉집현의 위치를 알면 대략적으로 고려와 명나라 양국 간 국경이 어디서 형성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봉집현의 기록을 찾으면 이렇다.

 

“봉집현은 당나라 때 발해가 설치했으나 원나라 때 폐지되었고 명나라에서는 봉집보(奉集堡)라 했다. 오늘날 요령성 심양현 동남쪽 45리에 있다.(奉集縣唐時渤海置元廢明爲奉集堡在今遼寧省瀋陽縣東南四十五里)”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철령위의 위치와 실제 철령위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명사』 지리지는 철령위를 설치한 봉집현이 고려-명 양국 간 국경이라 기록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봉집현은 요령성의 성청이 있는 심양시 동남쪽 45리 지점에 있었다는 뜻이다. 명나라 때 이곳은 봉집보란 이름으로 바뀌는데 실제로 심양시 소가둔(蘇家屯)구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심양시 동남쪽 직선거리 28.5km, 본계시 서북쪽 직선거리 13.2km 지점에 있다.

바로 이 부근에서 고려와 명나라 양국 간의 국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건 다른 나라 기록도 아닌 철령위를 설치한 주체인 명나라 측에서 직접 남긴 기록이다. 철령위가 바로 저곳에 있었기 때문에 최영 장군이 요동 정벌을 계획했던 것이다.

만일 철령위가 국사 교과서 속 지도대로 표기된 곳에 있었다면 최영 장군이 요동 정벌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럼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 너머 요령성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사서에서도 교차 검증이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다행히도 교차 검증이 된다.

 

『고려사』 권 135 열전 48에 기록된 우왕(禑王) 9년(서기 1383년)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우왕에게 국경 수비에 대해 건의한 내용이 있다. 해당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두 사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북계(北界)는 여진(女眞), 달달(達達), 요심(遼瀋) 등의 땅과 맞붙어 있어 실로 국가의 요충지이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때라도 반드시 군량을 비축해 두고 군사를 양성해 불의의 사변에 대비해야 합니다.(北界與女眞達達遼瀋之境相連實爲國家要害之地雖於無事之時必當儲糧養兵以備不虞)”

1383년 이성계는 고려의 북계가 요령성 요양, 심양과 맞붙어 있다고 기록했는데 국사 교과서 속 북계의 북쪽 끝 지역인 신의주시와 심양시 간 직선거리는 210km로 서울에서 경북 성주군까지 거리와 비슷하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승인 2023.12.08 19:57

 

[강동 6주를 찾아서 ②] '맑은 압록강'과 '푸른 압록강'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주요 배경인 강동 6주의 실제 위치를 찾기 위해 앞선 기사에서 먼저 가장 큰 고정관념이자 대전제인 “고려는 한반도도 다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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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철령위 사건 당시 고려와 명나라는 위 지도에 표기된 심양시와 본계시 사이에서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앞선 기사에서 확인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려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

 

 

1차 여요전쟁 이전에도 등장하는 압록강

강동 6주는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범위였을까?『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편에 기록된 성종 13년(서기 994년)의 기록을 다시 보면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 성종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엎드려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신하들을 지휘하시어 안북부에서 압강(鴨江)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답사하고 성들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게 하십시오. 아울러 일꾼들을 동원해 우리 측과 함께 축성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분부해주시고 축성할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를 빨리 회신해 주십시오.”

 

 

먼저 『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3년(서기 984년)의 기록이다.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 언덕에 성을 쌓아 보루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로서 저지하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가니 군대가 궤멸되어 성을 쌓지 못했으며 돌아온 자가 1/3에 불과했다.”

 

이 기록은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기 10년 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미 이 때 고려는 압록강 언덕에 성을 쌓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미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소 어긋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문스러운 기록은 성종 10년(서기 991년)에도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다.

 

“압록강 바깥의 여진족들을 쫓아내 백두산 바깥에서 살게 했다.(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

 

 

 

2개의 압록강

보통 압록강을 한자로 쓰면 우리는 아마 ‘鴨綠江’이라고 쓸 것이다. 하지만 옛 사서에는 다른 표기의 압록강이 등장한다. 일일이 다 언급하기엔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지만 우선 강동 6주와 관련된 기록만 살펴보기로 하자. 『요사(遼史)』 권 115 열전 45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조에는 강동 6주가 넘어간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통화(統和) 11년(서기 994년)에 왕치(王治, 고려 성종의 이름)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 표를 올리고 사죄하므로 조서를 내려 여직국(女直國)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백 리의 땅을 주었다.(十一年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위 기록에 나온 여직국이란 여진족을 말하는데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이 야율종진(耶律宗眞)이라 ‘참 진(眞)’자가 겹치기에 이 때부터 요나라에선 여진족을 ‘여직(女直)’이란 이름으로 기록했다. 

 

『요사』는 강동 6주의 기준이 되는 ‘압록강’을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鴨淥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럼 鴨淥江과 鴨綠江은 서로 같은 강일까? ‘淥’과 ‘綠’은 발음은 같은 ‘록’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淥은 ‘맑다’는 뜻이고 綠은 ‘푸르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인하대학교의 윤한택 교수가 이 2개의 압록강을 ‘맑은 압록강’ ‘푸른 압록강’이란 이름을 붙여 구분하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압록강’과 ‘압강’이란 강이 등장하고 『요사』에는 ‘鴨淥江’과 ‘鴨綠江’이란 강이 등장하는 셈이다. 과연 이 두 강이 서로 같은 강인지는 더 따져 봐야 한다. 문맥으로 볼 때 『고려사』의 ‘압강’과 『요사』의 ‘鴨淥江’은 서로 같은 곳이라 봐야 한다.

 

몽골 역사를 기록한 『원사』에서도 2개의 압록강이 나오는데 이 2개의 압록강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한다. 먼저 『원사』 권 208 열전 95 외이(外夷) 1 고려 편에 실린 기록을 보면 이렇다.

 

“강물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하며 이름은 압록강(鴨淥江)이다. 평양성은 그 동남쪽에 있으며 그 강에 의지해 요새로 삼았다.(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因恃以爲險)”

 

이 기록에선 鴨淥江이 등장하고 평양성이 그 강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얼핏보면 지금 북한의 평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같은 책 권 59 지 11 지리 2 요양등처행중서성 동녕로(東寧路) 편에 적힌 기록은 뭔가 심상찮다.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이라고도 했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의 땅이다. 동진(東晉) 의희(義熙) 이후에 그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해 평양성을 함락시키니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는 것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성을 서경이라 했다.”

 

동녕로란 1270년에 고려의 역적 최탄(崔坦) 등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갖다 바치자 몽골이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원사』는 동녕로가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던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지금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는 것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고 못을 박고 있다.

 

즉, 고구려 평양성이자 몽골의 동녕로가 된 곳은 ‘鴨淥江’ 동남쪽에 있던 곳이었지 ‘鴨綠江’ 동남쪽에 있던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鴨淥江’과 ‘鴨綠江’이 다른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鴨綠江’ 동남쪽에 있던 곳은 지금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곳이 옛날의 평양 즉, 고구려 평양성이 아니라고 했으니 실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도 다른 곳일 가능성이 높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역시도 압록강에 대해 묘한 기록을 남겼다. 먼저 『금사』 권 135 열전 73 외국 하 고려 편에 실린 고려의 영토 기록은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의 국왕은 왕해(王楷, 고려 인종의 이름)이다. 그 땅은 압록강(鴨綠江) 이동, 갈라로(曷懶路) 이남이며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이른다.(高麗國王王楷其地鴨綠江以東曷懶路以南東南皆至于海)”

 

압록강의 표기는 우리가 아는 압록강과 같은데 압록강 ‘이남’이 아닌 ‘이동’이라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 기록에 나온 압록강도 지금의 압록강일까? 무신정변 직후인 1174년에 서경유수였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조위총은 서경 예하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바치겠다며 귀순을 청한 바 있다. 당시 사건을 『금사』 권 7 본기 제 7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때엔 개경에서 서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자비령을 넘어야 했는데 조선시대 때부터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서경이 평양일 경우 굳이 자비령을 넘을 필요가 없다. 화살표로 표시한 길목을 따라 지금도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신묘(辛卯)일에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그 임금을 배반하고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鴨淥江) 이동의 40개의 성을 들어 내부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 사이 지역에 조위총의 본진이었던 서경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또 압록강이 ‘鴨淥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보통 우리는 자비령이라면 황해도 황주군의 고개로 알고 있다. 그런데 서경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고 압록강이 지금 북한과 중국 사이의 압록강이라면 큰 문제가 생긴다.

자비령은 평양 남쪽에 있는 고개이고 평양은 압록강 남쪽에 있지 동쪽에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경의 관할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예로 든 압록강 또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고 자비령 또한 황해도가 아닌 다른 곳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의 국경이 되었던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이자 『고려사』에 나온 압강(鴨江)으로 보인다. ‘푸른 압록강’인 ‘鴨綠江’은 지금의 압록강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맑은 압록강’은 어느 강을 지칭하는 말인가? 이 점을 알면 강동 6주의 위치를 더욱 자세히 알게될 것으로 보인다.

 

 

승인 2023.12.09 08:57

 

[강동 6주를 찾아서 ③]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앞선 기사를 통해 고려의 북계(北界)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령성 요양시와 심양시 일대까지 뻗어 있었고 명나라가 설치하려 한 철령위 역시 심양시 부근에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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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는 만주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 더 높아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모두 만주 지역에 소재

 

다시 철령위 사건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 따르면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고려 우왕(禑王)이 표문을 올려 “철령(鐵嶺)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가 지켜왔으니 옛날처럼 해주시길 바랍니다”고 항의했다.

『명사』 지리지에 기록된 요동도지휘사사의 지리적 범위는 서쪽으로 산해관, 동쪽으로 압록강, 남쪽으로 여순, 북쪽으로 개원시로 나와 있다. 즉, 명나라 당시 요동은 오늘날 요령성 전역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고려사』엔 철령위 설치 당시 명나라가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여 개의 참(站)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이는 산해관에서 만주 철령까지 이르는 구간을 가리키는 것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그런데 정작 이에 대한 주원장의 답변이 뭔가 이상하다. 주원장은 고려 우왕의 표문을 받고선 이런 반응을 보였다.

“고려가 옛날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했으면서 이제 와서 철령(鐵嶺)이라고 꾸며서 말하니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서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말게 하라.(高麗舊以鴨綠江爲界今飾辭鐵嶺詐僞昭然其以朕言諭之俾安分毋生釁端)”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먼저 『요사』 권 1 본기 1 태조 상(上)을 보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천복(天復) 9년(서기 909년) 겨울 10월 무신(戊申)일에 압록강(鴨淥江)에서 낚시를 했다.(天復九年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나온 압록강이 과연 지금의 압록강이었을까? 당시는 발해가 아직 버티고 있었고 요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야율아보기가 어떻게 발해 영토 한복판에 있는 지금의 압록강에 가서 낚시를 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이 기록을 통해서도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사』 권 36 지(志) 6 병위지(兵衛志) 하편에 적힌 기록을 보면 압록강(鴨淥江)의 정체가 좀 더 자세히 드러난다.

“동경(東京)은 압록(鴨淥)의 서북쪽 봉우리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삼는다. 황룡부(黃龍府)는 정병(正兵)이 5,000명이고 함주(咸州)는 정병이 1,000명이다. 동경과 여직(女直)의 경계는 압록강(鴨淥江)에 이른다.(東京至鴨淥西北峰為界黃龍府正兵五千咸州正兵一千東京沿女直界至鴨淥江軍堡凡七十各守軍二十人計正兵一千四百)”

 

동경이란 동경 요양부를 말하는데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기록에 나온 동경이란 곳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를 말하고 황룡부는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을 말한다. 함주는 요령성 철령시 일대를 말한다. 과연 위 기록에 나오는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위 기록에서 말하는 압록강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면 동경이 압록강 서북쪽 봉우리~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안에 길림성 장춘의 황룡부와 요령성 철령의 함주가 들어갈 수도 없다. 이 말은 곧 요나라 동경과 관련된 압록강은 한반도의 압록강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이 되었던 ‘맑은 압록강’ 즉, 압록강(鴨淥江)은 동경 요양부 인근에 있는 강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동경 요양부 인근에 있는 큰 강으로서 땅을 동서로 가르는 강은 요하 뿐이다. 이로 볼 때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강동 6주 또한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이 아니라 요하 동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鴨淥江을 요하에 옮겨놓고 설명하면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된다. 909년에 야율아보기가 鴨淥江에서 낚시를 했다고 했는데 요하 상류가 바로 거란족의 발상지인 내몽골자치구의 시라무렌 강이다. 야율아보기가 낚시를 한 鴨淥江은 바로 요하 상류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당서』 《동이열전》과 『원사』 《외국열전》 등은 고구려 평양성이 鴨淥江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요사』 지리지는 바로 동경 요양부가 고구려 평양성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요양시는 요하 동남쪽에 있으니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994년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했을 때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의 옛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요나라가 현재 고구려 옛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요나라가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식으로 발언을 했다. 이에 서희가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실 것이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것이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는 말과 "게다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이란 말이다. 그간 학계에서는 서희가 말한 '우리 땅'의 의미를 고구려의 옛 땅으로 해석했다.

 

송나라 사신 허항종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신라산이란 산 속에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고 『금사』엔 고려의 위치를 '압록강 이동, 갈라로 이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인근을 흐르는 큰 강이면서 땅을 동서로 가르는 강은 요하 뿐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또 1125년에 금 태종의 즉위식 참석을 위해 송나라 사신으로서 금나라를 방문한 허항종(許亢宗)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따르면 고려 국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9일 차 노정 : 함주(鹹州)에서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또 50리를 가면 동주(同州)에 이른다. (중략)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니 금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산(新羅山)이오. 산 속이 깊고 멀어서 갈 수 있는 길이 없소이다. 그 사이에선 인삼과 백부자가 나고 산 깊은 곳에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소.’라고 했다. 산 아래에 이르러 행로가 가히 30리였다.”

 

신라산이란 산이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라는 것인데 허항종 일행이 신라산을 목격한 것은 함주에서 동주로 가는 길목이었다. 먼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함주의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숙주에 대해선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 동북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동주는 요령성 개원시 남쪽 30리에 있다고 설명했다.

위 3곳 모두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를 중심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대로 압록강~원산만이라면 어떻게 요령성 개원시 일대에서 고려의 국경이 보인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령성 개원시에서 평안북도 의주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무려 264km나 떨어져 있고 또 방향도 남쪽이지 동쪽이 아니다. 결국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은 오늘날 압록강 지역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도 고려와 금나라 사이 국경이었다는 신라산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다고 주해했다.

 

그런데 『금사』 《외국열전》 고려 조에는 고려의 영토에 대해 “압록강 이동, 갈라로 이남”이라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압록강’이 과연 지금의 압록강이었겠는가?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는 요하가 있다.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인 신라산의 위치가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었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에 있었다면 결국 고려의 국경인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 강동 6주 또한 요하 인근에서 찾아야 한다.

 

 

  •  승인 2023.12.10 06:18
 

[강동 6주를 찾아서 ④] 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전까지의 기사들을 통해 강동 6주의 대략적인 범위가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강동 6주 중에서 가장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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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구성시는 본래 귀주가 아니라 만년군
 

 

소배압은 왜 산악지대로 퇴각했나?

위에 첨부된 지도는 국사 교과서에 실린 여요전쟁 당시의 지도이다. 빨간색 화살표가 1018년 제3차 여요전쟁 당시 소배압(蕭排押)이 이끌었던 10만 대군의 진격로이다. 언뜻 봐서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바로 아래 지도는 구글 위성 지도를 통해 다시 표시한 지도이다.

『고려사』에 적힌 기록대로 소배압의 진격로를 국사학계의 일반적인 지명 비정에 따라 구글 위성 지도로 옮기면 이렇다. 이상하게 소배압의 거란군은 산악지대를 타넘으며 퇴각하고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려사』 지리지의 이상한 기록

우선 『고려사』 지리지에는 귀주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사』 권 58 지 12 지리 3 북계에 기록된 귀주의 기록은 이렇다.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이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공격해 쫓아내고 축성하여 귀주라 했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방어사를 삼았다. 고종 3년(서기 1216년)에 거란의 병사가 쳐들어오자 주의 사람들이 싸움으로 막아내 참획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이르러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병마사 박서(朴犀)가 힘을 다해 막아내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그 공으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후에 도호부라 했다가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다.”

 

이 기록을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기록은 『고려사』에 적힌 기록인데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다”는 기록은 뭘로 봐도 어색하다. 또한 이 귀주란 곳은 분명히 994년에 서희가 여진을 내쫓고 축성한 곳이라고 했다. 즉, 994년 이전까지 귀주라는 곳은 여진의 영토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다”는 기록은 뭔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평안도 의주목 정주목 편에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인데, 현종(顯宗) 9년 무오에 귀주방어사(龜州防禦使)를 두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와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즉, 『고려사』 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이 같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왜일까?

이런 이상한 기록이 남게된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보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책은 서로 연관성을 주고 받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고려 왕조의 영토 지리를 기록하는데 “본래 고려의 〇〇군이다”는 이상한 기록이 첨가된 것이다.

그리고 귀주의 기록을 보면 1231년 이후의 기록이 부실한데 그 이유는 왜일까? 이런 점을 볼 때 1231년 이전 귀주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후에 평안북도 구성시였던 만년군에 옮겨 설치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이렇게 기존의 행정구역을 다른 지역에 옮겨 설치한 것을 교치(僑治)라고 한다.

다시 말해 평안북도 구성시는 본래 귀주가 아니라 만년군이었고 몽골의 침략 이후부터 이곳에 귀주를 옮겨 설치하면서 귀주라고 불리게 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 실제 귀주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됐던 귀주

『고려사』 지리지에 적힌 귀주의 연혁을 보면 1231년 이후의 기록이 부실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원사』, 『신원사』 지리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두 사서의 지리지에 적힌 기록을 살펴보면 1233년에 고려 역적 홍복원(洪福源)이 귀주를 포함한 서경도호 예하의 4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쳤는데 몽골은 그 지역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심양에서 평안북도 구성시까지 거리를 구글 지도로 측정해 보면 직선거리로만 무려 256.6km라고 나온다. 그리고 두 곳 사이에는 천산산맥,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산악지대들이 있어 그 당시 도로 체계를 고려하면 족히 1,000리는 넘는 먼 거리이다. 귀주를 제외하고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친 40여 성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을 심양로에 편입시켰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 아닐까?

 

그리고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적힌 심양로의 연혁을 살펴보면 심양로가 심양로 → 안무고려군민총관부 → 심주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몽골의 행정구역일진대 왜 유독 ‘고려’를 강조한 것일까? 심지어 고려 26대 국왕인 충선왕(忠宣王)은 고려 국왕과 심양왕(瀋陽王)을 겸직하기도 했다. 심양왕은 말 그대로 심양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이다.

충선왕 때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심양왕은 오직 고려 왕족들만 차지했다. 왜 그럴까? 백과사전에서는 고려 국왕이 심양왕을 겸직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당시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에는 고려의 전쟁포로 · 항속민(降屬民) · 유민(流民) 등의 집단이 많아 고려의 영토와 같은 특수지역”이기 때문이란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의 유민들이 어째서 심양까지 흘러들어간 것인가? 주류 강단사학자들 말대로라면 심양 지역은 1232년 당시엔 금나라나 동진국(東眞國)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심양 지역엔 금나라나 동진국 유민들이 더 많을 것 아닌가? 숫자로 보면 고려인들보다 금나라 사람들이 더 많아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귀주를 비롯한 40여 성이 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되었다면 심양 지역에 있었다는 고려인들은 압록강 이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아니라 본래 그 땅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즉, 본래 고려의 영토가 심양 일대까지 뻗어 있었는데 그 땅을 역적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쳤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 그 지역에 본래 살고 있었던 고려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심양로를 안무고려군민총관부, 심주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고쳤고 그마저도 신통치 않아 고려 국왕에게 심양왕을 겸직하도록 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고려는 자국의 영토가 요양, 심양 지역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걸 여러 차례 주장한 바 있고 『고려사』에 그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승인 2023.12.10 11:51

 

[강동 6주를 찾아서 ⑤] 강동 6주는 요하 동쪽에 있었다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전의 기사들을 통해 고려시대엔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과 ‘푸른 압록강’인 鴨綠江이 있었고 그 중 고려의 국경이 되었던 압록강이자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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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시, 심양시 주변에 있었던 강동 6주

 

 

통주

다음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곳은 1010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강조(康兆) 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 성종 야율융서의 40만 대군을 맞아 분전했으나 끝내 패전했던 통주(通州) 전투가 있었던 통주의 위치이다. 이 통주란 곳은 후에 선주(宣州)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고려사』 지리지에서 선주의 기록을 찾으면 이렇다.

“본래는 안화군(安化郡)으로 고려 초에 통주(通州)로 고쳤다. 현종 21년(서기 1030년)에 선주방어사(宣州防禦使)로 칭했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몽골군을 피해 자연도(紫燕島)에 들어갔다. 원종 2년(서기 1261년)에 육지로 나왔다. 목미도(牧美島)가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는 평안도 의주목 선천군 편에 선주 즉, 통주의 기록을 실었다. 그 때문에 통주는 평안북도 선천군이라는 것이 그간 학계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 강동 6주란 본래 여진의 땅이었으나 서희가 여진족들을 내쫓고 개척한 땅인데 ‘본래 안화군’이란 설명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귀주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후에 평안북도 선천군이었던 안화군에 선주를 교치(僑治)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통주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요사』에는 이곳이 동주(銅州)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주라는 지명은 요나라에서만 부른 지명이니 기록에 나온 동주란 곳은 요나라 사람들이 잘 아는 곳일 것이다.

 

마침 『요사』 《지리지》엔 동주의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은 이렇다.

“동주 광리군(廣利軍)엔 자사를 두었다. 발해가 설치했고 군사 업무는 북병마사(北兵馬司)에 예속시켰다. 거느리는 현은 하나인데 석목현(析木縣)이며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의 땅이었고 발해는 화산현(花山縣)이라 했다. 초기엔 동경에 예속되었으나 후에 내속되었다.”

 

소위 강동 6주란 압록강 동쪽의 땅이며 고려의 안북부와 요나라 동경 요양부 사이에 있었던 곳이다. 그 지역에 있는 곳 중에 동주(銅州)라는 지명을 쓰는 곳은 저 동주 광리군밖에 없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이 동주의 위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나라가 설치했고 금나라가 없앴다. 옛 치소는 오늘날 봉천성 해성현 동남쪽 40리에 있다.(遼置金省故治在今奉天海城縣東南四十里)”

즉, 동주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안산시 해성시 동남쪽 40리 지점에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사』 권 127 열전 40 반역 1에 적힌 《강조열전》을 보면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으며 강조는 통주 서쪽에 진을 치고 세 강의 합류점에 웅거했다고 적혀 있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에 표기된 통주의 위치와 실제 기록 상 통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즉, 통주는 세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구글 지도를 보면 해성시 동남쪽 마풍진(馬風鎭) 부근에서 해성하(海城河)와 그 강의 두 지류가 서로 만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 근처엔 산도 많아서 강조가 군사 한 갈래를 나눠 근처 산에 진을 쳤다는 기록도 설명이 된다.

또 해성시에서 마풍진은 동남쪽에 위치해 있고 직선거리로 20.4km 지점에 있는데 중국에서 1리는 500m이다. 그러므로 40리라는 기록도 일치한다. 고려의 통주는 오늘날 요령성 안산시 해성시 마풍진 일대로 보인다.

 

강동 6주 대부분은 동녕로에 속했다

이후 통주는 몽골에 의해 동녕로(東寧路)로 편입되는데 이곳이 이후엔 동녕부로 이름이 바뀐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는 동녕로가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으며 1269년에 고려 역적 최탄(崔坦) 등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치니 몽골이 그 땅을 동녕로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271년에 동녕부로 이름을 바꿨고 고려와 원나라의 경계를 자비령(慈悲嶺)으로 정했다고 하며 1276년에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그 때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威遠鎮)을 떼어 파사부(婆娑府)에 예속시켰다고 적혀 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따르면 파사부는 요양로(遼陽路)에 속한다고 했으니 동녕로의 일부가 요양로에 편입된 셈이다.

그러다가 1290년에 다시 동녕로를 파하고 그곳에 속했던 성들을 모두 고려로 다시 돌려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없어졌던 동녕부는 다시 1370년에 또 등장한다. 이성계가 고려 장군이었던 시절 제1차 요동정벌을 했을 때 등장하는데 학계에서는 이 때의 동녕부를 요령성 요양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1290년에 원나라가 동녕부를 평양이었던 서경에서 요령성 요양시로 옮겨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사』, 『신원사』 지리지 어디에도 동녕부를 옮겨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1370년에 등장한 ‘동녕부’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재건한 후 참칭한 이름이거나 부산광역시의 ‘서면’ 또는 ‘조방 앞’처럼 관습적으로 부르던 비공식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녕부가 고려 역적 최탄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친 후 설치된 행정구역이니 동녕부의 통치 영역이 곧 서경이 관할하던 범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1174년 조위총의 난 당시 서경유수 조위총이 금나라에 ‘압록강(鴨淥江) 이동과 자비령 이서’의 40여 성을 들어다 바치며 귀순 요청을 한 것을 보았다.

서경의 관할 영역이 곧 압록강 이동과 자비령 이서 지역이고 마침 동녕부 설치 이후에도 고려와 원나라 국경이 자비령이 됐다. 그러므로 『금사』에 등장한 자비령과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등장한 자비령은 같은 곳일 가능성이 높다. 압록강이 요하라고 했으니 자비령 또한 황해도의 자비령이 아닌 다른 곳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천산산맥에 딸린 산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요령성 요양시가 바로 그 압록강과 자비령 사이에 있다. 다른 행정구역도 많은데 굳이 ‘동녕부’란 이름을 참칭했거나 관습적으로 불렀다면 요양시가 오래 전부터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또 한 번 범위를 압축시켜 보면 다른 지역들의 위치도 한결 수월하게 찾아낼 수 있다.

 

철주

귀주와 통주에 이어 찾아볼 곳은 철주(鐵州)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적힌 철주의 기록은 이렇다.

“본래 고려의 장령현(長寧縣)[혹은 동산(銅山)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라 했다.(本高麗長寧縣[一云銅山]顯宗九年稱鐵州防禦使)”

 

이 역시 다소 어색한 기록이다. 서희가 개척한 곳은 994년 이전까지는 고려 영토가 아니었고 여진족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고려의 장령현 혹은 동산현이라는 기록은 뭔가 어색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역시 옮겨진 지명이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지리지엔 평안도 의주목 철산군 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보도록 하자.

“본래 고려의 장령현인데 현종 무오년에 철주방어사로 고쳤다.(本高麗長寧縣顯宗戊午改鐵州防禦使)”

 

조선의 철산군은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이다. 이 때문에 철주가 지금의 철산군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과연 철산군이 지금의 철주군이 맞을까?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는 철주 관할에 정융진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적힌 정융진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현종 20년(서기 1029년)에 유소(柳韶)를 보내 옛 석성을 수리하고 진을 설치했다. 영평성(永平城) 백성들을 옮겨서 실하게 했다. 진은 흥화진의 북쪽에 있다.(顯宗二十年遣柳韶修古石壁置鎭徙永平城民實之鎭在興化鎭北)”

 

정융진은 흥화진의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흥화진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보다 북쪽에 있으면 어떻게 철산군이라는 철주 관할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선 이 점에서 철주가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이라는 기록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원사』 《지리지》엔 철주에 대해 주석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융 1진을 거느리고 있다. 당나라의 안시주(安市州)로 요나라는 동경도에 예속시켰다.(領定戎一鎮唐安市州遼隸東京道)”

 

마침 『요사』 《지리지》엔 동경도 관할에 철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은 이렇다.

“철주 건무군(建武軍)엔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안시현이었는데 고구려가 안시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태종이 이 성을 공격했으나 항복하지 않자 설인귀(薛仁貴)가 흰 옷을 입고 성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했으며 옛 현인 위성현(位城縣), 하단현(河端縣), 창산현(蒼山縣), 용진현(龍珍縣) 4개는 모두 폐지했다. 호수는 1,000호이며 서울 서남쪽 60리에 있다.(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爲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卽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

 

당나라의 안시주는 고구려 안시성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요나라의 철주가 본래 고구려 안시성이었다면 결국 요나라의 철주가 고려의 철주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에 나온 ‘서울’이란 아무래도 동경도 소속이었으니 동경 요양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동경 요양부 서남쪽 60리에 철주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철주의 위치를 찾으면 다음과 같다.

“요나라가 설치했다. 옛 치소는 오늘날 요령성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60리에 있다.(遼置故治在今遼寧蓋平縣東北六十里)”

 

그 밖에 철주에 대한 기록이 하나 더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다.

“원나라가 설치했다. 오늘날 조선 평양 서북쪽에 있다.(元置在今朝鮮平壤西北)”

 

아마 앞의 철주는 요나라 동경도의 철주이고 뒤에 나온 철주는 원나라 동녕로의 철주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요나라 동경도의 철주가 곧 고려의 철주이고 또 그곳이 원나라 동녕로에 속했기 때문에 조선 평양 서북쪽에 있다는 기록은 당연히 틀린 기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에 표기된 철주의 위치와 실제 기록 상 철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상으로 볼 때 철주의 위치는 요령성 개주시에선 동북쪽으로 60리, 요양시에선 서남쪽으로 60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주시와 요양시 사이에 있는 곳은 요령성 안산(鞍山)시이다. 이곳이 철주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용주

다음은 용주(龍州)의 위치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용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래 고려의 안흥군(安興郡)이다. 현종 5년(서기 1014년)에 용주방어사(龍州防禦使)를 칭했다. 후에 용만부(龍灣府)로 고쳤다가 충선왕 2년(서기 1310년)에 다시 용주라 칭했다.(本高麗安興郡顯宗五年稱龍州防禦使後改爲龍灣府忠宣王二年復稱龍州)”

이 역시 상당히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다. 용주라는 곳은 용만부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때 용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용만부로 바뀐 시점은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 1014년~1310년까지 약 300년 간의 설명이 부실한 셈이다. 도대체 이 30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고려의 지명에 대한 설명인데 “본래 고려의 안흥군이다.”는 설명은 상당히 이상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역시 오리지널 용주의 기록이라 보기는 어렵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평안도 의주목 용천군 항목에 용천군이 과거 고려의 안흥군이었다가 용주로 바뀌었고 조선 태종 때 용천군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용주는 평안북도 용천군이라 알려졌다. 그러나 고려의 안흥군이 용천군이었을지는 몰라도 용주가 용천군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1231년 여․몽 전쟁 당시 기록을 보면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이 음력 8월 29일에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로 진격했다고 한다. 함신진은 의주를 말하는데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의주 → 철주로 진격한 것이다.

그리고 9월의 기록을 보면 9월 3일엔 귀주성에서 전투가 발생했고 10일엔 서경, 14일엔 황주와 봉주, 20일엔 용주, 29일엔 선주와 곽주에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몽골군은 최대한 신속하게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고종(高宗)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 진로를 그대로 믿으면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는 중구난방의 진로를 보이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몽골군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서 군사를 움직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살리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의주 → 철주 → 서경 → 황주, 봉주 순으로 진격했고 귀주를 공격한 부대는 또 다른 부대인 것이다.

『고려사』 권 103 열전 16 《박서열전》을 보면 당시 몽골군이 30일 동안 귀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박서(朴犀)가 이끄는 고려군이 잘 방어해 결국 몽골군이 못 견디고 퇴각했고 다시 북계(北界) 여러 성의 군사를 몰고 와, 포차 30문을 벌여두고 성곽 50간(間)을 부수며 공격해 왔다고 한다. 이 사이에 용주와 선주, 곽주 등이 공격을 받은 것이다. 즉, 이 부대는 귀주 → 용주 → 선주, 곽주 순으로 진격한 것이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에 표기된 용주의 위치와 실제 기록 상 용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다시 말해 용주란 곳은 귀주와 선주 즉, 통주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앞서 귀주의 위치를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 통주의 위치를 요령성 해성시의 마풍진 일대로 봤는데 용주는 이 두 곳 사이에 위치해야 한다. 아마도 지금의 요령성 본계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후 1269년에 고려 역적 최탄 등이 서경 부, 주, 현, 진 6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 갖다 바치면서 본래 안흥군이자 용만부였던 평안북도 용천군에 용주를 교치하면서 마치 강동 6주 중 하나인 용주가 평안북도 용천군이었던 것처럼 인식된 것이다.

 

흥화진

다음으로 찾아볼 곳은 흥화진(興化鎭)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흥화진은 1030년에 영주(靈州)로 승격되었으며 정융진의 남쪽, 위원진의 동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융진은 철주 관할의 진이었으니 흥화진은 요령성 안산시 남쪽에 있어야 할 것이다.

제 2차 여․요 전쟁을 보면 요 성종 야율융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 흥화진이었는데 양규(楊規)가 이끄는 고려군의 방어에 막혀 통주로 향했다고 한다. 즉, 흥화진은 결국 압록강과 통주 사이에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또 제 3차 여․요 전쟁 때에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은 흥화진으로 쳐들어왔다. 이 때 강감찬 장군은 기병 1만 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 동아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가 적이 다가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흥화진은 강 하류에 있었던 지역임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는 위원진이 흥화진의 서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으로 말해 흥화진은 위원진의 동남쪽에 있어야 한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따르면 위원진이란 곳은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와 함께 동녕로에 속했다가 후에 파사부(婆娑府) 소속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파사부의 위치는 어디인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사』 지리지에 따르면 파사부는 요양로(遼陽路)에 속했으며 1288년에 폐지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파사부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단동시 봉성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

요양로에 속한 현은 요양현 하나이고 주는 둘인데 개주와 의주(懿州)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위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통해 찾아보면 요양현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이고 의주(懿州)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금주시 흑산현(黑山縣)이라고 하며 개주는 오늘날 요령성 영구시 개주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는 파사부가 요양로 소속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된 요양로의 위치는 붉은 원으로 표시한 지역인데 이상하게 예하 행정구역인 파사부는 생뚱맞은 요령성 단동시 봉성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그런데 파사부의 위치라고 주장하는 요령성 단동시 봉성현은 유난히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은 수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파사부에 대한 기록은 고의적인 왜곡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또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요양로의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가 설치했다. 지금의 요령성 심양시 이서, 북진시 이북의 땅이다. 요양성에서 다스렸다. 치소는 요양이다. 오늘날 요령성 요양현의 치소이다.(元置今遼寧瀋陽以西北鎭以北地遼陽省治焉治遼陽今遼寧遼陽縣治)”

 

요양로의 영역은 오늘날 심양시 서쪽이자 요령성 금주시 북진시 이북이라는 것이다. 요양로 예하에 속한 곳들을 참고하면 대략 지금의 요양시 서쪽 지역과 심양시 요중(遼中)구, 금주시 흑산현과 안산시, 영구시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양로 예하에 있는 파사부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단동시 봉성현에 있다는 건 전혀 납득이 안 된다.

실제 파사부의 위치 또한 요양로가 있었던 그 범위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사부의 위치를 홀로 멀리 단동시에다 떨어뜨려 놓은 것은 아마도 그곳이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1356년에 공민왕이 인당(印璫) 등을 보내 압강(鴨江) 이서 8참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그 때 인당이 파사부 등 3참을 깨뜨렸다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결국 실제 파사부는 압강 서쪽 즉, 요하 서쪽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앞서 『원사』 《지리지》에는 파사부가 1288년에 폐지되었다고 했으니 1356년에 등장한 파사부란 곳은 실제 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앞서 동녕부와 같이 과거 파사부가 있던 지역 일부를 일컫는 말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파사부에 속했다는 위원진은 본래 동녕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파사부가 있었던 곳보다는 더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지에서는 위원진의 위치를 안산시 해성시 북부 지역으로 보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추후 연구가 필요하지만 고타진(高坨鎭), 신대자진(新臺子鎭), 등오진(腾鳌镇) 등이 위원진의 후보지로 꼽힌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에 표기된 흥화진의 위치와 실제 기록 상 흥화진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흥화진은 그 동남쪽에 있어야 하고 기록으로 볼 때 성 동쪽에 큰 냇물과 산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본지가 흥화진의 위치로 유력하게 꼽는 곳은 요령성 안산시 대둔진(大屯鎭)이라는 곳이다. 그곳 동쪽에는 천산산맥이 자리잡고 있고 또 양류하(楊柳河)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곽주

곽주의 기록은 너무 부족해서 제대로 위치를 살펴보기는 힘들다. 우선 『고려사』 《지리지》엔 곽주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래 고려의 장리현(長利縣)이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공격해 쫓아내고 성을 쌓아 곽주라 했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방어사라 했다. 고종 8년(서기 1221년)에 반역을 하여 강등시키고 정양(定襄)이라 했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몽골군을 피해 해도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서기 1261년)에 육지로 나왔고 수주(隨州)에 예속되었다. 공민왕 21년(서기 1372년)에 다시 군호를 회복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곽산군 항목에 위의 기록과 똑같은 기록이 그대로 실려 있다. 곽주가 평안북도 곽산군이라는 주장은 여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곽주는 994년에 여진을 쫓아내고 세운 성인데 ‘본래 고려의 장리현이다.’는 기록은 역시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곽주란 지역이 한 번 옮겨진 지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곽산군은 본래 장리현이란 곳이었고 실제 곽주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에 교치되었고 그것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곽산군이 곽주였던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 모종의 이유란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보이듯이 1269년에 고려 역적 최탄이 서경 부, 주, 현, 진 6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 갖다 바친 사건을 말한다. 이 때 곽주 역시 동녕로에 편입되었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에 표기된 곽주의 위치와 실제 기록 상 곽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다만 다른 곳에 비해선 확실하진 않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곽주의 경우는 위치를 제대로 잡기가 어렵다. 다만 앞서 1231년 여․몽 전쟁 당시 기록을 보면 몽골군이 선주 즉, 통주를 공격하고 난 이후 곽주를 함락시킨 것을 고려할 때 곽주는 선주와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리지》 수주 항목을 보면 창주(昌州)가 함락된 뒤 그 고을 사람들이 자연도란 섬에 들어가 피신했다가 1261년에 출륙한 후 곽주의 바닷가에 임시로 거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곽주란 곳은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아마도 요령성 영구(營口)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동 6주는 요양, 심양 일대

이렇게 강동 6주의 위치를 기록에 따라 상황에 맞게 비정해 보면 대략 요령성 요양과 심양 주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1370년에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했던 당시 고려가 북원(北元)에 요동을 정벌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 글이 있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그 글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요심(遼瀋) 지역은 애초 본국의 옛 영토였으나 사대(事大)한 이래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 행성(行省)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이 지역을 점거해 자신의 소굴로 삼고서 위로는 원나라 조정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아래로는 본국에 공연한 사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난해에 군대를 파견해 그를 뒤쫓아 습격하게 했던 것이다.”

이 기록에 등장한 기샤인테무르란 인물은 기황후(奇皇后)의 조카이자 부원배 기철(奇轍)의 아들이다. 기철이 1356년에 숙청된 후 원나라로 도주해 반란을 일으켰다. “요양, 심양 지역은 애초 본국의 옛 영토였다”는 기록에 대해 이전 학계에선 ‘옛 고구려 영토’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 강동 6주 위치와 본지에서 밝혀낸 강동 6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빨간 원이 기존 국사 교과서 속 주장이고 보라색 원이 본지의 주장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하지만 이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무려 700년이나 지난 시점이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가지고 요심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기엔 너무 무리가 크다. 그리고 요심 지역이 원나라에 편입된 이유에 대해 “사대(事大)한 이래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라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우리가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은 나라는 오직 몽골 뿐이다.

그러므로 ‘본국의 옛 영토’란 고려시대 때 갖고 있다가 잃은 영토를 말하는 것이다. 그 잃게 된 사연은 앞서 보았듯이 홍복원이 귀주 등 40여 성을 몽골에 팔아넘긴 뒤 심양로에 편입된 사연, 최탄 등이 서경 예하 60여 성을 몽골에 팔아넘긴 뒤 동녕로와 요양로에 분할 편입된 사연이다. 강동 6주는 그 지역에 있었다.

 

 

  •  승인 2023.12.10 20:33
 

[강동 6주를 찾아서 ⑥] 고려 천리장성은 어디에?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전 기사를 통해 고려시대엔 ‘압록강’이 2개가 있었고 그걸 『고려사』에선 ‘鴨江’과 ‘鴨綠江’으로 중국 25사에선 ‘鴨淥江’과 ‘鴨綠江’으로 구분해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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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리장성의 위치와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들
 
사서의 기록을 통해 본지에서 밝힌 고려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 천리장성을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려 천리장성

우선 『고려사』에 기록된 천리장성의 기록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려사』 권 82 지 36 병 2 성보 편에 적힌 천리장성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덕종) 2년(서기 1033년)에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비로소 북방에 관방(關防)을 쌓도록 했다. 서해 물가의 옛 국내성(國內城)을 경계로 압록강 하구에서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개의 성을 거쳐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개의 성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 길이가 1,000여 리에 뻗쳤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자였다.”

 

 

고려-요 국경은 어디였나?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를 알기 위해선 먼저 2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강동 6주가 요하 동쪽의 요령성 요양시와 심양시 일대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 사실이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사』 권 38 지8 지리 2에 적힌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의 기록이다.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하등주이며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 월희(越喜)의 옛 성이었으나 발해가 회원부(懷遠府)를 두었고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종이 이 땅이 고려와 이웃해 있다고 하여 개태(開泰) 초에 주를 설치했고 한족 포로들로 채우게 했다.”

 

신주가 고려와 이웃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거란과 고려 양국 간의 국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신주란 곳은 어디인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적힌 신주의 위치는 이렇다.

“본래 월희의 옛 땅이고 발해가 회원부를 설치했다. 치소는 회복현(懷福縣)이다. 요나라가 신주 창성군을 설치했으나 원나라가 폐지했다. 옛 성은 오늘날 봉천성 철령현 동북쪽에 있고 개원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本越喜故地渤海置懷遠府治懷福縣遼置信州彰聖軍元廢故城在今奉天鐵嶺縣東北接開原縣界)”

 

청나라 때 편찬된 『성경강역고』에도 신주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다.

“생각건대 오늘날 창도부(昌圖府) 동북쪽의 팔면성(八面城)이 대개 곧 요나라 신주의 옛 성이다.(按今昌圖府東北之八面城蓋即遼信州故城)”

 

이 팔면성은 현재도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에 팔면성진(八面城鎭)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 위치는 요령성 북쪽 끝으로 오늘날 길림성 사평(四平)시와 접경하고 있다. 요나라 신주의 위치는 바로 이곳이다. 만일 우리의 상식대로 고려의 국경이 오늘날 압록강이라면 아마도 신주가 고려와 이웃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서 고려와 요나라 양국 간 국경이라고 언급한 신주(信州)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성경강역고』는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 팔면성진이 신주라고 기록하고 있다.(출처 : 구글 지도 갈무리/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이 팔면성이란 곳에서 압록강 하류의 평안북도 의주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무려 336.4km로 부산광역시에서 경기도 의정부시까지 직선거리와 맞먹는 거리다. 부산과 의정부가 이웃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기록에 맞게 해석하면 고려의 영토는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북쪽인 길림성 사평시 일대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서 송나라 사신 허항종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따르면 고려와 금나라 간 국경이 신라산(新羅山) 깊은 곳에 있는데 그 신라산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라고 했다. 고려와 이웃해 있다는 요나라의 신주는 그 두 곳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즉,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은 남쪽으로 요양시, 심양시 일대부터 북쪽으로 길림성 사평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쌍성총관부의 위치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갈 곳은 장성의 종점이라는 화주이다. 화주는 이후 1258년 고려 역적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몽골에 팔아넘겼는데 몽골은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했다. 이 쌍성총관부가 어디에 설치됐는지를 알면 자연스럽게 화주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다.

먼저 『고려사』 권 130 열전 43 《반역열전》 조휘(趙暉) 편에 적힌 쌍성총관부 설치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고종 45년(서기 1258년) 몽골군의 병력이 대거 침입하자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장주(長州), 의주(宜州), 문주(文州) 등 15주 사람들이 저도(猪島)로 들어가 보전했다.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저도가 성은 크지만 사람이 적어 지키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여 마침내 15주 사람들을 죽도(竹島)로 옮겼다.”

몽골군이 1258년에 쳐들어왔을 때 고려의 고주, 화주, 정주, 장주, 의주, 문주 등 15개 주 사람들이 저도라는 섬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국사학계에선 고주는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화주는 함경남도 영흥군, 정주와 장주는 함경남도 정평군, 의주는 강원도 원산시, 문주는 함경남도 문천군이라고 한다.

기록으로 본다면 당시 몽골군이 이 지역으로 쳐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사학계의 지명 비정은 모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올바른 지명 비정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상의 지역들은 대개 함흥평야 일대에 위치해 있는데 몽골에서 이곳으로 쳐들어오려면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을 넘어야 한다. 몽골군이 굳이 개마고원이라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어서 쳐들어올 만큼 실익이 있을까? 이 개마고원이란 곳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가 몸소 입증해준다.

화주 일대가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라고 가정할 경우 마침 장진군은 당시 몽골군이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장진군 일대는 지금도 도로가 좁은 산길인데다 현재도 철도 장진선은 강삭철도로 운영하는 곳이다. 산의 경사가 너무 급해서 도저히 철도를 부설할 수가 없어서 케이블로 열차를 감아올려서 다니는 것이다.

현대에도 이 정도로 개마고원은 도로 시설이 열악한 곳인데 13세기 중반이면 더욱더 길이 좁고 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철도도 제대로 못 놓을 정도로 험한 개마고원을 13세기 중반에 몽골 기병이 넘어서 왔다는 건 참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문제지만 화주를 비롯한 15개 주의 주민들이 저도라는 섬으로 대피했는데 그 저도란 섬에 큰 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동해안에는 큰 성을 쌓을 만한 큰 섬이 거의 없다. 서해안이나 남해안이면 몰라도 동해안에는 울릉도, 독도 정도를 빼면 떠오르는 섬이 없다시피 하다.

왜냐하면 동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인 서해안이나 남해안과 달리 단조로운 해안선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울릉도나 독도는 모두 육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전의 지명 비정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봐야 한다.

앞서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국경이 신주(信州)라고 했는데 신주의 위치는 앞서 말했듯이 요령성 철령시 창도현의 팔면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국경은 신라산인데 그 신라산의 위치는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과연 천리장성의 종점인 화주가 함경남도 영흥군이었겠는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는 이후 명나라에서 설치한 철령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고려사』 권 137 열전 50 우왕 5의 기록에 우왕이 주원장에게 철령위 설치에 항의하는 내용의 표문을 보내면서 거기에 주원장(朱元璋)이 한 말이 인용돼 있다. 그 말을 그대로 실어보면 이렇다.

“철령의 이북, 이동, 이서는 원나라 개원로에 속했던 곳이니 소속 군민들은 모두 요동에 속하게 하라.(鐵嶺迆北迆東迆西元屬開元所管軍民仍屬遼東)”

철령위 설치 당시 명나라는 철령의 이북, 이동, 이서가 원나라 개원로(開元路)에 속한 곳이었다는 점을 들어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다. 또 해당 표문에서 우왕은 화주가 쌍성(雙城)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당시 우왕은 조휘와 탁청 등이 금나라 심주로(瀋州路)에 쌍성현(雙城縣)이란 곳이 있는 걸 알고 고려 화주를 그곳이라 속여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주원장에게 설명했다.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의 위치와 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고려 화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조휘와 탁청은 고려 화주를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이라 속였고 그 때문에 화주가 '쌍성'이 됐다고 했는데 과연 속을 만한 위치인가?(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 서쪽 60리라고 한다. 그런데 조휘와 탁청 등이 고려 화주를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이라고 속였다면 두 곳이 비슷한 위치에 있어 헛갈리기 쉬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금나라 심주로 쌍성현은 요령성 철령시 인근에 있는데 고려 화주는 멀리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었다면 오히려 속는 사람이 바보일 것이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 『고려사』에 적힌 우왕의 표문 내용 대부분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분명히 주원장은 철령의 이북, 이동, 이서를 달라고 했는데 우왕은 철령 이북의 땅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볼 때 우왕의 표문 내용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

앞서 이미 철령위의 위치를 언급할 때 보았듯이 주원장이 말한 철령은 만주의 철령인데 우왕이 말한 철령은 한반도의 철령으로 보인다. 『명사』에 적힌 기록과도 상이한 점을 보면 아마도 『고려사』에 적힌 우왕의 표문은 일정 부분 조선시대 사가들에 의해 변조된 것으로 보인다.

철령위의 위치가 봉집현이었던 철령성 즉, 요령성 심양시 소가둔구 봉집보였다고 했으니 쌍성총관부 역시 한반도에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철령의 주변이 옛 개원로 소속이었다면 개원로와 쌍성총관부도 분명히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원로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기록된 개원로의 기록을 살펴보면 본래 금나라의 첫 수도였던 상경 회령부였고 치소(治所) 즉, 중심지는 황룡부(黃龍府)라고 기록돼 있다. 황룡부는 오늘날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을 말한다. 그랬다가 1267년에 현재의 요령성 철령시 개원시로 치소가 옮겨졌다고 한다. 따라서 개원로란 지금의 요령성 철령시와 길림성 장춘시 일대를 아우르는 행정구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편을 보면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1258년에 원나라에 투항할 때 기록을 보면 화주의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기록은 이렇다.

“목조(穆祖)는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식구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동북면의 의주(宜州)에 이르렀다. 백성 170여 호가 같이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 고려는 목조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고 고원(高原)을 지켜 원나라 군사들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 때 쌍성(雙城) 이북이 개원로에 속했다. 원나라 산길대왕이 와서 쌍성에 주둔하여 철령 이북을 취하려 하며 재차 목조에게 사람을 보내 원나라에 투항하도록 청했고 목조는 부득이 김포노(金甫奴) 등 1,000여 호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 기록에 쌍성 이북이 개원로에 속했다고 했는데 역으로 말하면 쌍성 즉, 고려 화주는 개원로 남쪽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주석에는 쌍성이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이라 했지만 만약 그 말대로라면 개원로가 길림성 장춘시부터 함경남도까지 매우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니 현실적으로 맞지 않아 보인다.

국사 교과서에 표시된 쌍성총관부의 위치와 본지에서 밝힌 쌍성총관부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결국 쌍성총관부가 설치됐던 화주는 철령 이동, 이서, 이북 지역 안에 있어야 하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 국경이었던 신주 인근에 있으면서 개원로의 치소가 있던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 남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범위 안에서 찾아본 결과 장춘시 서북쪽에 쌍성보진(雙城堡鎭)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이 실제 쌍성총관부가 설치됐던 고려의 화주로 보인다.

화주 동쪽의 ‘바다’와 천리장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다는 식의 기록은 조선시대 들어 화주의 위치를 함경남도 영흥군으로, 장성의 서쪽 끝을 압록강으로 보면서 덧붙인 기록으로 보인다. 

다만 '바다'에 대해선 海의 의미가 ‘바다’가 아닌 다른 의미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고대 중국에서는 海를 ‘바다’ 외에도 넓은 평원이나 큰 강, 큰 호수 등에도 썼다.

화주로 지목한 길림성의 쌍성보진(雙城堡鎭) 인근에 송화강이 있는데 송화강은 과거 범선을 타고 길림성까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강 폭이 매우 넓었다. 또 하중도(河中島)가 매우 많아 몽골의 침입 당시 화주 인근 백성들을 섬으로 대피시켰다는 기록도 어렵잖게 설명된다.

따라서 실제 고려 천리장성은 요하를 따라 길림성 장춘 서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축조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고구려 천리장성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 천리장성이 실은 고려 천리장성이었을 수도 있고 고구려 천리장성을 고려가 개축(改築)한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점들

이렇게 총 6개의 기사를 통해 고려의 서북쪽 영토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어 학계에서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추려 본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함길도의 북쪽 끝은 두만강 이북인 공험진(公嶮鎭)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북간도 지역은 조선의 영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평안도의 북쪽 끝은 압록강이라고 적혀 있다. 고려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 고려의 영토는 요양, 심양 인근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60년 뒤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엔 압록강 이북의 옛 땅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강동 6주의 위치가 왜곡된 이유 또한 조선이 옛 영토를 잃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안북도로 교치된 지명에 강동 6주의 연혁을 삽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요나라 동경 요양부의 위치다. 강동 6주의 위치를 보면 동경 요양부의 위치가 과연 요령성 요양시일 것인지 의문이 남게 된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동경 요양부가 한 번 옮겨졌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경 요양부의 연혁을 소개하면서 “본래 이곳을 말한다”는 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동경 요양부가 어떤 사연에 의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동경 요양부가 고려의 강동 6주 획득 이후 옮겨졌다면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경 요양부가 요령성 요양시에만 있었다면 “본래 이곳을 말한다”는 말은 나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요․금 교체기에 고려가 획득한 포주성(抱州城)과 내원성(來遠城)의 위치이다. 본래 이 두 성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가 상실했다가 1115년에 수복에 성공한 성이다. 종래엔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알려졌지만 이 또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주성과 내원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도 앞으로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 밖에 중국 25사 지리지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지에서 밝힌 내용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위한 답변이다. 『요사』 지리지에 나온 귀주, 통주, 철주 등은 고려의 강동 6주와 이름만 같은 요나라의 다른 행정구역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25사 지리지의 특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중국 25사 지리지에서 어떤 지명이 거론된다고 해서 그곳이 모두 그 당시 왕조의 땅이었다고 이해하면 절대 안 된다. 중국 25사 지리지는 현재는 그 땅이 자기네 땅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들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모두 지리지에다 기록했다.

한 예로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 지리지엔 이미 오래 전에 고구려에 편입된 요동군도 기록돼 있다. 심지어 북위 자신들이 고구려 장수왕, 문자명왕 등을 '요동군개국공'에 책봉한다고 버젓이 기록했는데도 그렇다. 고구려 태왕들에게 요동군의 지명을 따서 공작 작위를 내린 이유는 당시 요동군이 고구려를 대표하는 지명이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자기네 지리지에 실어 자기들 땅인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25사 지리지에 어떤 지명이 거론된다고 해서 모두 그 당시 왕조 땅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나라나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은 모두 엄밀한 의미에서 북방 민족 왕조이기에 중국 왕조에 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중원에 진출하면서 일정 부분 중화사상을 수용했고 피정복자인 한족 관료들도 많이 등용했다. 그 때문에 『요사』, 『금사』 등의 지리지도 기존 중국 역사서 서술 방법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끝으로 이번 고려 강동 6주와 관련한 6개의 기사를 작성하는데엔 인하대학교 윤한택 교수와 복기대 교수 외 3인의 공동저자가 공저한 『압록과 고려의 북계』가 많은 참고가 됐음을 알린다.

 

고려 국경의 사실ㅣ복기대 소장 인하대 고조선연구소ㅣ대한사랑 학술위원 최신연구발표

https://youtu.be/CAjSuteO-WU

 

 

 

 

<참고자료>

 

한국고대사 | 고려 영토는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도 있었다. - Daum 카페

 

 

대륙고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만주의 지명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고려의 영토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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