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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고려

4. 고려 문화유산 (1) 세계문화유산 : 개성역사유적지구

대야발 2023. 11. 1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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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역사유적지구]

 

 

개성역사유적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개성 역사유적 지구(開城歷史遺蹟地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개성 일대에 집중된 고려 시대 유적이다. 2013년 6월 23일,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프놈펜 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1]

개요[편집]

개성 역사유적 지구는 개성성벽 5개 구역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고려 성균관숭양서원선죽교와 표충사왕건릉과 7개 왕릉과 명릉, 공민왕릉을 포함한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북한이 2007년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으나 2008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보류 판정을 받은 뒤 2012년 재신청한 유산이다. 북한의 세계유산은 2004년에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두 번째이다.

등재 목록[편집]

고려 왕조의 개창자 왕건은 자신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송악(松嶽), 즉 지금의 개성을 새로운 왕조의 도읍지로 삼았고, 이후 공양왕(恭讓王) 4년(1392년)에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을 폐위시킨 이성계(李成桂)가 3년 뒤 조선(朝鮮)을 선포하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때까지 국가의 수도로써 기능하였던 곳이다. 고려 멸망 이후에는 왕궁을 비롯한 유적들이 거의 대부분 재건되지 못했기 때문에 폐허로 남아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고려의 정치, 문화를 전하는 다음과 같은 12곳이다.

 

만월대와 개성 첨성대

만월대는 태조(太祖) 2년(919년)에 세워진 고려 왕조의 대궐터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공민왕 10년(1361년) 중국 본토에서 (元)의 토벌에 쫓겨 고려까지 도망쳐 들어온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키고 불살라 버린 뒤로 다시는 재건되지 못한 채, 장대했던 왕궁의 주춧돌만이 남게 되었다.
개성 첨성대는 만월대 가까운 곳에 있으며, 이곳에서 천체의 움직임과 기상현상 관측이 이루어졌다. 이 관측기록은 만월대가 건설된 시기와 같은 919년부터 고려 전 시대를 통틀어 이어졌다.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등록 면적은 만월대와 개성 첨성대 합쳐 43.5ha이다.

 

개성 성벽(開城城壁)

고려 왕조가 아직 세워지기 전, 개창자 왕건이 아직 송악의 호족으로써 아버지 왕륭을 따라 궁예에게 귀부해 후고구려(태봉)의 장수 가운데 한 명이 된 해인 896년에 송악에 지어진 발어참성(拔禦塹城)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려 왕조 전 시대는 물론 조선 왕조가 세워지는 1391년~1393년까지 내성(内城, Inner Wall)이 세워지는 등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내성의 성벽 다섯 곳 175.8ha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개성 남대문(開城南大門)

고려 왕조 말기인 공양왕 3년(1391년)부터 왕조가 멸망한 이듬해인 조선 태조 2년(1393년)에 수축된 내성(内城)의 남문으로, 개성의 건축 가운데서도 당대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등록 범위 면적은 0.5ha.

 

고려성균관(高麗成均館)

만월대 서쪽 약 2.5km에 고려성균관이 위치해 있다. 원래 이름은 국자감(國子監)으로, 고려 국가의 유교 소양을 갖춘 관리 양성을 위한 최고기관이었다. 현재는 고려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등록 면적은 3.5ha이다.

 

숭양서원(崇陽書院)

고려 말기의 유학자 정몽주(鄭夢周)의 집 위에 세워진 조선 시대의 서원으로 현재의 건물은 선조(宣祖) 6년(1573년)에 세워진 것이다. 조선 시대의 반가의 자제를 위한 유교 교육 공간으로써, 동시에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써의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조선 시대의 서원이다. 세계유산으로써의 등록 면적은 2.9ha.

 

선죽교와 표충비

정몽주의 집(훗날의 숭양서원)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화강암 돌다리로 폭 3.36m、길이 8.35m이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자객에게 최후를 맞이한 장소로 유명하다. 선죽교 가까운 곳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 표충비(表忠碑)로, 두 개의 표충비 가운데 북쪽 것은 영조(英祖) 16년(1740년)、남쪽 것은 고종(高宗) 9년(1872년)에 세워졌다. 세계유산으로써의 등록 범위는 모두 합쳐 1.8ha.

 

태조현릉(왕건릉)、칠릉군(七陵群)、명릉군(明陵群)

만월대 서쪽 3km 되는 위치에 고려 왕조의 개창자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神惠王后) 류씨(柳氏)의 합장 능묘가 있다. 정식 명칭은 현릉(顯陵)으로 현재의 왕릉은 북한 정부에 의해 1994년에 개건된 것이다. 현릉 북서쪽에 위치한 일곱 기의 왕릉을 묶어 칠릉군(七陵群)으로 통칭하는데,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능묘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시 현릉 남서쪽 1km에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의 능묘인 명릉(明陵)을 위시한 세 개의 무덤떼를 명릉군이라고 부르는데, 명릉을 제외하고 남은 2기의 피장자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릉 능역(陵域)과 칠릉군, 명릉군을 합친 면적 214.6 ha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릉(공민왕릉)

고려 제31대 군주이자 개혁군주로 알려진 공민왕(恭愍王)이 생전에 조성한 자신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합장무덤이다. 개성 시가지의 중심에서 남서쪽으로 14km 떨어진 개풍군(開豊郡) 해선리(解線里)에 위치해 있으며 정식 명칭은 현릉(玄陵)이다. 공민왕이 사망하기 2년 전인 공민왕 21년(1372년)에 완성되었다. 모두 3단으로 구성되어 왕과 왕후, 두 봉분이 서로 근접해 있고, 석인(石人) 등의 석물로 장식되어 있다. 세계 유산 등록 면적은 51.6 ha이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개성 숭양서원

 

만월대

 

선죽교

 

개성 남대문

 

개성 성균관

 

왕건 왕릉

 

공민왕릉

 

 

공민왕릉 벽화

 

공민왕릉 문인상

 

북한 개성역사지구 세계유산 등재(종합)

입력2013.06.23. 오후 2:21 
 
수정2013.06.23. 오후 7:38

개성역사유적지구의선죽교 <<연합뉴스DB>>

프놈펜 세계유산위원회 결정..북한 두 번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북한의 개성 일대에 집중한 고려시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23일 캄보디아 프놈펜 평화궁전에서 계속된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북한이 등재 신청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심사한 결과 세계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앞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실사보고서에서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고려 왕조의 지배 근거지를 대표하는 유산들로 구성된다"면서 "유산은 통일된 고려왕조가 사상적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가는 시기의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 정신적인 가치를 내포하며 이는 도시의 풍수적 입지, 궁궐과 고분군, 성벽과 대문으로 구성된 도심 방어 시스템, 그리고 교육기관을 통해 볼 수 있다"고 평가면서 등재 권고를 했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개성성벽 5개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7개 왕릉과 명릉, 공민왕릉을 포함한다.

2004년 '고구려 고분군'을 처음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한 북한으로는 이번이 두 번째 세계유산이다.

한국사 전체로 범위를 넓혀 세계유산 현황을 보면 한국이 등재한 10건과 북한 2건, 그리고 중국이 등재한 고구려 유적을 합쳐 모두 13건이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북한이 2007년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으나 이듬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보류 판정을 받은 뒤 지난해에 재신청한 유산이다.

우리가 흔히 개성역사유적지구라고 칭하는 이 유산을 북한은 이번 이코모스 실사 과정에서 '개성의 역사적 기념물과 유적(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이라는 명칭으로 등재 신청했다.

<그래픽> 남·북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현황 (서울=연합뉴스) 반종빈 기자 = 유네스코는 23일 캄보디아 프놈펜 평화궁전에서 계속된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북한이 등재 신청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심사한 결과 세계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bjbin@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하지만 이코모스가 권장한 명칭은 '개성의 기념물과 유적'(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이다.(1)

 

 

개성시, 선죽교 등 민족문화유산 보호사업 진행

  • 기자명 안윤석 대기자 
  •  입력 2023.05.31 16:13
  •  수정 2023.05.31 16:28
개성시에서 민족유산보호관리사업을 하는 모습(사진=조선의 오늘)

 

개성시에서 민족문화유산 보호사업을 펴고 있다고 북한 매체가 31일 보도했다.

북한 국영미디어인 '조선의 오늘'은 "개성시 민족유산보호관리소에서 숭양서원과 목청전 등의 보수작업이 역사주의 원칙에서 진행되도록 기술적 지도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또 "선죽교와 표충비, 경효왕릉 등 국보적 의의를 가지는 유적구역의 녹지관리와 화단조성, 돌구조물과 축대보수 등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고려박물관과 왕건왕릉유적관리소에서는 옛 건물의 보존관리에서 기본인 목부재와 기초관리에 품을 들이고 있으며, 개성금송, 만월대느티나무 등 주변 풍치조성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연폭포명승지관리소에서는 대흥산성 북문과 범사정, 고모담 등이 손상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매체는 덧붙였다.(2)

 

 

北 '민족유산애호월간' 맞아 역사유적보수 등 보호사업 진행

  • 기자명 안윤석 대기자 
  •  입력 2021.04.24 04:32
개성 왕건 왕릉(사진=노동신문)

 

북한에서는 해마다 4월과 11월을 민족유산애호월간으로 정하고 민족유산보호사업을 전국가적전인민적인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통신은 "이달에 각 도에서는 역사유적보수와 명승지, 천연기념물을 보호관리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해 고려(918~1392)시기에 쌓은 천리장성의 함경남도구간과 영변철옹성, 태백산성, 정방산성, 풍천읍성 ,장연토성 등 여러 성곽유적의 성벽을 보수했다고 전했다.

고려시조왕의 무덤인 개성의 왕건왕릉과 숭양서원, 고구려벽화무덤인 강서세무덤, 덕흥리벽화무덤과 안국사 대웅보전, 강계아사, 희천원명사 등 수 십개 대상에 대한 보수와 보색을 하고 주변들에 많은 나무들을 심었다.

이밖에 약산동대명승지, 백운산명승지, 수풍호명승지의 참관도로를 복구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풍치를 돋구었으며 천연기념물들인 마양사향노루, 마양열묵어를 보호하는 시설물들을 보수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3)

 

 

北 매체, "개성시 '세계문화유산' 등록된 역사유적만 10여개"

  • 기자명 안윤석 대기자 
  •  입력 2020.05.25 07:11
왕건왕릉 전경(사진=조선중앙통신)

 

북한 개성시는 우리의 민족문화유산 뿐아니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역사유적만 10여개가 된다고 북한 매체가 소개했다.

북한 대외용 매체인 ‘조선의 오늘’은 25일 개성은 약 500년 동안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수도로 역사유적과 유물이 특별히 많다“고 전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역사유적도 왕건왕릉, 경효왕릉, 개성남대문, 개성성, 숭양서원, 선죽교, 만월대, 표충비 등 10여개나 된다.

특히 개성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교육기관의 하나였던 고려성균관과 고려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가치 있는 역사유물들이 전시된 고려박물관도 있다.

경효왕릉(사진=조선중앙통신)

 

개성에는 자연관광자원 많아 박연폭포는 개성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승지로서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예로부터 북한의 3대명폭포의 하나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개성에는 또한 화창한 봄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팔선녀가 내려와 놀고갔다는 송악산, 기묘한 경치를 자랑하는 자남산 등의 명승지들과 개성금송, 성균관은행나무, 성균관느티나무를 비롯한 천연기념물들도 많다.

개성의 명산물인 인삼을 원료로 인삼술, 수삼인삼술, 삼로술 등을 생산하는 개성고려인삼술공장도 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4)

 

 

北, "개성 역사 유적, 왕건왕릉 등 12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 기자명 안윤석 대기자 
  •  입력 2020.05.01 06:07
개성만월대 유적지(사진=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북한 개성의 역사적 유적 가운데 왕건왕릉 등 모두 12개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다고 북한 매체가 보도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30일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개성의 역사유적 가운데 왕건왕릉과 경효왕릉, 개성성, 개성남대문, 선죽교, 표충비, 숭양서원, 고려성균관, 만월대, 개성첨성대, 칠릉떼, 명릉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고 전했다.

왕건왕릉과 경효왕릉은 고려의 태조왕인 왕건(918년-943년)과 31대 경효왕(1352년-1374년)의 무덤이다.

개성성은 고려의 수도성(외성)으로 1009년-1029년에 쌓았으며, 개성남대문은 1391년-1393년에 내성을 쌓으면서 세워졌다. 개성남대문 문루에는 유명한 연복사종이 있다.

선죽교는 고려말기의 고위관리였고 유능한 군사가, 외교가였던 정몽주(1337년-1392년)가 피살된 돌다리이며 표충비는 그의 충절을 찬양하여 세운 비라고 통신은 설명했다.

숭양서원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처음 세웠던 건물을 헐고 1573년에 고쳐 지은 서원으로 당시 교육과 함께 유교를 선전보급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고려성균관은 고려시기 국가의 최고교육기관으로서 992년에 세워졌으며 동재, 서재, 명륜당, 동무, 서무, 대성전, 존경각 등 건물이 있다.

만월대는 고려시기의 왕궁터이며 개성첨성대는 천문기상관측시설물이다.

칠릉떼는 만수산기슭에 떼지어 있는 7기의 고려시기 무덤으로 무덤의 규모와 짜임새, 유물 등으로 미뤄 고려말기 왕실과 관련된 사람들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명릉떼는 3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운데 이 가운데 1기는 고려 29대 현효왕(1345년-1348년)의 무덤으로 인정되고 있다고 통신은 소개했다.@(5)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북 개성 고려왕릉 40여 기 능주도 모른다

등록 2020.01.04 06:00:00수정 2020.02.24 11:12:56

수백여 년 방치·도굴… 18곳만 왕릉주인 확인

김정은 왕릉 대대적 정비에도 곳곳 황폐화

평화경제연구소 사진 500여 장 단독입수 공개



1. 연재를 시작하며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2016년 북한은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소릉군으로 부르는 5기의 왕릉을 대대적으로 보수 정비했다. 사진 오른쪽 상단에 ‘소릉군 제3릉’을 정비하는 대원들 모습이 보이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이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문화재 발굴과 정비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특히 지난 5년간 북한 당국이 개성시와 개성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려 왕릉과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대대적으로 발굴, 정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고려 9대 왕 덕종(숙릉, 肅陵)과 10대 왕 정종(주릉, 周凌)의 무덤을 새로 찾아냈고, 2017년에는 15대 숙종(영릉, 英陵)의 묘를 발굴했다. 또한 남북이 공동 발굴해온 고려궁궐 만월대(滿月臺)를 독자적으로 발굴 조사해 금속활자 1점을 찾았고, 지난해에는 화곡릉을 발굴해 2대 혜종의 묘라고 확정 발표했다.

분단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개성지역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보수가 이뤄지고 있던 셈이다. 개성의 고려 왕릉들은 195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공민왕릉을 발굴하면서 조사가 시작됐고, 총 20여 기의 왕릉과 왕릉급 고분들이 간헐적으로 조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 이후 북한은 1994년 태조 왕건이 묻힌 현릉(顯陵)을 대대적으로 개건하고 공민왕릉을 보수했지만, 나머지 왕릉들은 거의 방치되어 세월의 풍상을 견뎌야 했다. 1990년대 중반 최악의 경제난을 겪으면서 문화재 관리에 신경을 쓸 여력도 부족했다.

[서울=뉴시스]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 북쪽에 있는 7릉군의 제1릉 앞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는 표식비가 세워져 있다. 고려 왕릉 중에서는 7층군을 비롯해 태조 현릉(顯陵), 공민왕 현릉(玄陵), 명릉군이 포함됐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2004년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는데 성공하면서 북한은 민족문화유산의 보존과 세계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까지 직접 나서 2014년 ‘민족유산보호사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빛내는 애국사업이다’ 제목의 담화를 통해 “우리나라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문화재 관리 법제도 개정해 2015년 ‘민족유산보호법’을 새로 제정했다.

이후 북한은 내각 민족 유산 보호국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사, 송도사범대학 교원 주도로 고려의 도성인 개성성 안의 여러 유적과 도성 밖 고려 왕릉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활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 왕릉의 현재와 과거 비교 위해 수천장 사진DB 대조

[서울=뉴시스]일제는 고적조사 명목으로 고려 왕릉을 조사한 후 출토된 유물을 약탈해 갔다. 사진은 1916년 고적조사 후 촬영한 명종의 지릉 전경. 당시도 퇴락한 모습이었고, 현재는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1.0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려 인종의 능에서 발견된 시책. 아들 의종이 선왕인 인종의 생전의 여러 업적과 인품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말미에 시호와 묘호를 기록하였다. 명문이 새겨진 책엽(冊葉) 41개(33.0×3.0×2.5cm)와 천부상(天部像)이 새겨진 다소 넓은 책엽 2개(33.0×8.5×2.5cm)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1.04.photo@newsis.com



머니투데이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는 개성지역에 대한 북한의 조사와 발굴 작업이 활발해진 것에 주목해 지난 1년 동안 고려 왕릉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진과 동영상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중국, 일본, 미국 등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해외교포를 통해 고려 왕릉 사진 5백여 장을 단독 입수했다. 이를 과거 고려 왕릉의 모습과 비교 분석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리 원판 사진을, 분단 이후 시기는 ㈜미디어한국학이 소장한 수천 장의 개성지역 역사유적 사진 DB를 활용했다.

현재 개성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 중에서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거나 추론이 가능한 것은 모두 18기다. 태조 왕건을 비롯해 혜종(2대), 정종(3대), 광종(4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덕종(9대), 정종(10대), 문종(11대), 순종(12대), 숙종(15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공민왕(31대) 등이다.

개성지역 18기 왕릉은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에 모두 소재한다. 그중 태조 현릉(顯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은 국보급 유적으로, 나머지는 보존급 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어 왔다. 이번에 입수된 사진을 통해 2017년 발굴한 숙종 영릉이 국보 유적 36호로 새로 지정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뉴시스]

 

- 쇠락한 고령 왕릉 처참한 모습 드러나

[서울=뉴시스]2016년 북한이 황해도 개풍군 해선리에서 발굴한 9대 덕종의 숙릉으로 비정한 무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왕릉의 모습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 상태가 엉망이고,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최근 사진을 통해 확인된 고려 왕릉은 북한 당국의 대대적인 정비에도 600년 넘게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석물의 상당수가 사라지고 왕릉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리가 잘된 신라나 조선 시대의 왕릉과 비교하면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몰락한 왕조의 비애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현재 파악된 고려 시대 재위 국왕, 추존된 국왕, 그리고 왕비와 공주를 포함한 왕릉은 모두 61기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은 현재 20여 기에 불과하다. 제17대 인종 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59기의 왕릉에 위숙군(圍宿軍)을 배치해 철저히 관리하였으나 무인집권기와 몽골 침입기 등을 거치면서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게 되면서 많은 왕릉이 도굴 피해를 당하였고, 그에 따른 보수가 여러 차례 있었다.

- 고려 왕릉은 왜 이렇게 방치됐나

[서울=뉴시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왕릉마저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은 고려의 태조를 비롯한 전조 8왕의 능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었고, 세종은 태조·현종·문종·원종의 능에만 수호인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의 관(官)이 관리케 하였다. 따라서 4명의 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은 관리가 소홀해지게 되었고, 구전으로 왕릉의 위치 등이 전승되는 수준이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려 왕릉은 다시 방치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왕릉의 능주는 양난 이후 대부분 실전됐다가, 조선 현종 때 다시 고려 왕릉을 찾아서 비정한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현종은 1662년부터 고려 왕릉의 보수와 관리 등을 실시해 고려 왕릉 61기 가운데 43기까지 파악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능주를 알 수 없는 왕릉에 대해서는 번호를 매겨 통칭했다.

1867년(고종4) 고종은 고려 왕릉을 일제히 정비하여 57기에 대해 ‘고려 왕릉’이라고 표석을 세웠다. 이들 명칭은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왕릉조사 사업 때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물이 1916년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표기된 53기 고려 왕릉의 위치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늘날에도 그대로 불리고 있지만 불확실한 능주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관리와 연구 위해 남북 공동 노력 필요

[서울=뉴시스]1994년 개건을 마친 태조 왕건의 현릉. 다른 고려 왕릉에 비해 잘 관리되어 있다. 2013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표지석이 앞에 서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대다수 고려 왕릉의 능주를 알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왕릉 안에 여러 부장품과 함께 묻은 시책(諡冊)이 도굴되거나 없어졌기 때문이다. 시책이란 왕의 시호와 묘호, 생전의 업적 등을 돌에 새긴 것이다. 글을 새긴 각 돌의 옆면 위아래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 금실 같은 끈을 넣어 연결해 놓았다. 현재 발견된 시책은 두 개로 고려 17대 인종(仁宗)과 20대 신종(神宗)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인종 시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렇게 된 사연이 기구하다. 이 시책은 1916년 9월 25일 총독부 박물관에서 일본 육군대학 교수이자 일본어 학자로서 한국도자기 컬렉터로도 유명한 구로다 다쿠마(黑田太久馬)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고려청자 등 인종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도굴된 여러 점의 유물과 함께 입수됐다. 구로다가 어떻게 이것을 구했는지, 경술국치 직전 통감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한 그가 개성 왕릉 도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부터 1910년대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한 개성 주변의 분묘 도굴과 고려청자의 유통이 성행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역시 개성의 인종 장릉에서 도굴되어 도쿄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총독부 박물관이 구매해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게 된 것이 다행이다. 다른 고려 왕릉의 시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릉은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당하였고, 한국전쟁 때도 많은 석물이 파괴·분실돼 대다수 왕릉의 원형은 크게 훼손됐다. 휴전 이후에도 개성이 군사도시로 되면서 고려 왕릉은 제대로 관리되기 어려웠다. 해방 후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굴레에서 고려 왕릉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2013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당시 제외된 고려 왕릉(태조릉, 공민왕릉 명릉군, 7릉군만 포함)을 추가로 포함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남한에서는 강화도 소재 고려 왕릉까지 포함해 남북이 공동으로 확장 올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려 왕릉은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묘제를 잘 보여준다. 왕릉의 크기 변화, 출토 유물 등은 당대의 권력 관계와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가장 최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으로나마 고려 왕릉 연구에서 남과 북이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6)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②풍수따라 초기 4대왕릉 동서남북 고루 배치

등록 2020.01.11 06:00:00수정 2020.02.24 11:13:15

도성 남쪽 왕릉 전쟁·개발로 많이 훼손

왕과 비는 화장하지 않고 목관에 매장

학문 뛰어나 文宗, 어진 임금이라 仁宗

[서울=뉴시스] 북한은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을 개건하면서 능 앞쪽에 홍살문 대신 삼문(三門)을 세웠다. 삼문은 사당이나 제실에 쓰는 문의 형식으로 세 칸 중 어칸(가운데 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출입하지 않았다. ‘동입서출’이라 하여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온다. 고려 왕릉은 홍살문이나 삼문이 세워져 있지 않고 정자각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왕권 강화로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4대 광종(光宗)까지 초기 4대왕 중 태조는 서쪽에, 혜종은 동쪽에, 정종은 남쪽에, 광종은 북쪽에 분산해 안장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치라고 판단된다. 사방에 초기 왕릉을 각각 배치해 그들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도성을 보호하려는 풍수적 관념이 적용된 것이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융성하고, 국가 운영에서 유교가 본격 수용된 시기지만 풍수지리설 또한 크게 유행했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속에 흐르는 기운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 산천의 형세를 살펴 도읍이나 사찰, 주거, 분묘 등의 위치를 정할 때 많이 활용됐다. 풍수지리로 보면 개경은 힘찬 기상이 솟아나는 송악산을 진산(鎭山)으로, 자남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오공산(지네산)을 우백호(右白虎)로, 남쪽의 용수산을 사신사(四神砂)로 한 장풍국(藏風局, 주변을 둘러쌓은 산세)의 도읍지다. 개경은 송악산이 진산이기 때문에 송도(松都)라고도 불렸다.

[서울=뉴시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은 당대 시대이념인인 유교, 불교적 이념과 풍수지리를 적절히 활용해 새로운 왕조 건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고려는 진산인 송악산(490m) 남쪽에 궁궐(황궁)을 짓고, 그 주변으로 황성과 내성을 쌓았으며, 외곽에 서쪽의 오공산(지네산, 203m)과 남쪽의 용수산(178m), 동쪽의 부흥산(156m)을 잇는 능선을 이용해 외성을 쌓았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아 대단하구나. 도성안의 수 만 채 집들은 잉잉거리는 벌떼들이 모인 것 같고 큰길 내왕하는 수 천여 사람들은 개미떼 굼질거리는 것 같구나”라며 도성 안 사람들을 묘사했다.

[서울=뉴시스]북한 개성시 자남산 관덕정에서 바라다 본 개성의 민속거리와 개성학생소년궁전. 오른쪽이 주산인 송악산이고, 왼쪽의 낮은 구릉이 오공산이고, 그 뒤로 만수산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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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외곽 서쪽에 태조 현릉 조성

고려 왕릉은 궁궐(만월대)을 기준으로 도성 밖 동서남북에 고르게 분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왕릉도 대부분 도읍지였던 한양 외곽에 터를 잡았는데, 왕릉을 도읍지의 4대문 10리(당시 10리는 4km가 아니고 5.2km)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거리 설정은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왕릉의 배치로 봤을 때 고려 때도 왕릉을 잡는 기준이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뉴시스]1872년 작성된 개성 전도. 북쪽으로 송악산·응봉·천마산, 서쪽으로 오공산· 만수산·봉명산, 남쪽으로 자남산과 용수산, 동쪽으로 부흥산 등이 표시돼 있고, 만월대를 중심으로 황성, 내성, 외성(라성)의 위치와 경계가 잘 나타나 있다. (사진=서울대 규장각)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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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릉은 도성 서쪽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왕릉들의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은 편이다. 도성 서쪽에 가장 숭배대상이던 태조 현릉이 조성되어 있고, 왕족들의 생활근거지인 궁성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만수산과 봉명산 등에서 뻗어 내린 얕은 야산과 구릉이 풍수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고, 불교의 서방 정토사상과도 방향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릉 등 송악산 북쪽 응봉(鷹峯, 매봉) 자락에 위치한 왕릉들도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울=뉴시스]고려 도성의 서쪽 송악산 능선에서 바라다본 개성 시내. 도성 서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고, 그 안쪽으로 고려 궁궐(만월대)터가 보인다. 왼쪽 멀리 송악산 능선이 보이고, 그 능선 끝 너머로 응봉(매봉) 능선이 살짝 보인다. 오른쪽으로 개성 남쪽에 있는 용수산이 뚜렷하게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진봉산(310m)이다. 용수산 남쪽과 진봉산 서쪽 사이에는 정종의 안릉, 신종의 양릉, 충정왕 총릉, 예종 유릉, 성종 강릉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반면 최근 촬영된 사진을 보면 고려 도성 남쪽 용수산과 진봉산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왕릉들은 자연재해, 전란(戰亂), 개발 등으로 훼손이 많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도성의 동남쪽에 자리 잡은 왕릉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려는 왕릉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철저히 고려했다. 우선 고려의 왕릉은 산 중턱 경사면에 터를 잡았고, 능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그 사이에 천(川)이 흘러가는 지형을 선호했다. 그리고 터의 앞쪽에는 조산이 솟아 있는 곳으로 정했다. 이러한 여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곳에는 인공적으로 곡장(曲墻, 무덤 뒤의 주위로 쌓은 나지막한 담)을 세워 주산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거나, 바람을 갈무리하게 하여 풍수적 여건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평지 또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는 통일신라시대 왕릉과 능선 끝자락에 조성된 조선 왕릉과 다른 점이다.

능역은 남북 길이 30∼40m, 동서너비 20∼25m 내외로 조성됐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3~4단의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계단식 구조는 산지의 지형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 능의 위엄을 높일 수 있었다.

[서울=뉴시스] 고려시대 태조가 창건하여 거처하던 궁궐터인 만월대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만월대 뒷쪽으로 보이는 산이 송악산이고, 그 뒤로 매봉이 보인다. 송악산과 매봉 사이 능선에는 혜종의 숙릉, 원종의 소릉 등의 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조선 왕릉과 비슷한 구조

왕이 죽으면 종묘를 신주에 모시는 과정에서 왕의 업적을 한 글자로 표현하고, ‘조(祖)’와 ‘종(宗)을 붙이고 묘호(廟號)라 했다. 예를 들어 학문에 뛰어났다는 뜻의 문종(文宗), 어질었다는 뜻의 인종(仁宗) 등이다.

원칙적으로 ‘조’는 창업한 왕에 대해서만 쓰는 호칭이었다. 즉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왕을 ‘종’이라” 했다. 고려의 경우 첫 왕인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몽골 간섭 시기에는 왕의 호칭이 강등되어 ‘충’(忠)을 앞에 붙이고, ‘종’ 대신에 제후국을 상징하는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고려시대 왕과 비는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매장하는 게 원칙이었다. 단 왕위쟁탈전에서 패해 살해당한 뒤 화장된 목종(997~1009)만이 유일한 예외이다. 장례의식은 일차적으로 국왕의 시신을 묻는 매장의식으로 일단락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망 후 5개월 만에 장례를 지냈다. 왕릉터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후 그곳에서의 제례, 왕릉 형식, 장례 후의 관리까지 자세한 내용이 『국조오례의』 흉례 치장 편에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절차는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고려왕조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했을 것이다. 태조부터 7대 목종(穆宗)까지는 왕과 왕비를 합장했고, 그 뒤부터는 따로 능을 조성했다.

[서울=뉴시스]고려 2대 혜종 무덤인 순릉(順陵)의 무덤칸(묘실) 모습. 사진 가운데 목관을 올려놓는 관대(棺臺)가 있고, 그 양쪽으로 유물 부장대가 마련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태조 때부터 왕의 무덤은 (반)지하식의 평면 (장)방형 횡구식단실묘(橫口式單室墓 · 무덤방이 1개로 3면의 벽을 먼저 쌓고 나머지 1면으로 드난든 후 밖에서 벽을 쌓아 막는 무덤 양식 )로 조성됐다. 일반적으로 묘실의 동·서·북 3면의 벽석은 모두 수직으로 쌓았고, 벽석 위쪽에 3∼4매의 대형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묘실 내부 바닥 중앙에는 관대(棺臺)를 놓고 그 좌우에 유물 부장대를 마련하였으며 나머지 바닥에는 전이나 박석을 깔았다. 왕릉에는 고급 자기와 도기, 청동제품이 부장된다. 목관의 겉을 장식했던 금동장식이나 못 등도 확인되어 왕릉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개성을 다녀온 후 남긴 유송도록(遊松都錄)에서 유학자 유호인(兪好仁, 1445-1494년)은 “(공민왕릉을) 처음 만들 때에 구슬과 비단, 옥으로 된 상자, 금으로 만든 오리, 은으로 만든 기러기 등 많은 보물로 장식하여서 여산에 있다는 진시황의 무덤과도 비견할 만하였단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계속된 도굴로 고려 왕릉의 부장품은 태조 현릉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형태로 출토된 것이 거의 없다.

[서울=뉴시스]북한 개성 고려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태조 현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의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소나무 그림.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무덤칸의 크기는 능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략 남북 3~3.5m, 동서 2.5~3m이며 높이 2m 내외로 사람이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묘실의 벽면과 천장에는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벽면에는 12지신, 사신(四神), 건물, 매화, 소나무, 대나무를 그리고 천장에는 천체도(성좌도)를 그렸다. 이렇게 마련된 묘실에 목관과 유물을 넣은 후 나무문과 1장의 대형판석(문비석)으로 입구를 2중으로 폐쇄했다.

그리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1단), 그 아래쪽으로 2-3층 단을 쌓아 2단에 장명등(석등)과 문·무인석, 3단에 정자각(제향각)을 배치했다. 현재 정자각은 태조와 공민왕의 무덤에만 복원돼 남아 있고, 다른 왕릉에서는 터만 확인된다.

[서울=뉴시스]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공민왕과 왕비의 무덤인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공민왕릉은 한국 왕릉의 전형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조선 왕릉 조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신라시대의 능에 없던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 새로운 요소들은 조선시대 왕릉으로 계승된다. 전체적으로 고려 왕릉은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왕릉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릉이 기본적으로 고려 말 공민왕릉을 모태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왕릉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봉분을 조성했지만, 조선 왕릉은 둥그스름한 토단(土斷 · 흙으로 쌓은 단) 상부에 봉분을 조성한 점이 다르다.(7)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③고려 왕건이 잠든 무덤에 들어가다

등록 2020.01.18 06:00:00수정 2020.02.24 11:13:35

드론으로 촬영한 최초 사진 공개

뚜렷하게 남아 있는 벽화 인상적

1994년 대대적 개건돼 원형 사라져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3회 – 조선과 북녘에서 ‘특별대우’ 받은 고려 태조 현릉(顯陵)

2003년 2월 23일 3시경, 1994년 북한이 대대적으로 개건해 새로 조성한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에 도착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려 궁궐(만월대) 서쪽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다. 현릉은 태조 왕건이 죽은 943년 5월에 만들어졌으며,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 씨와 함께 묻힌 합장묘다.


[서울=뉴시스]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 태조 현릉(顯陵)의 전경. 평양-개성 고속도로 서쪽에 인접해 있다. 현릉이 자리 잡은 고려 도성 서쪽에는 현종 선릉, 충목왕의 명릉, 공민왕릉,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서구릉, 선릉군 등 가장 많은 왕릉이 분포돼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주차장에 내리니 홍살문 대신 자주색 기와를 덮은 커다란 삼문이 서 있다. 삼문 앞 동쪽에는 1993년 김일성 주석이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세워져 있고, 정면에 커다란 규모의 왕건릉이 보인다. 삼문에서 봉분까지에 이르는 완만한 비탈길에는 돌을 깔고, 그 좌우에는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세웠다. 서쪽의 정자각 안벽에는 왕건 화상(像, 초상화)을 비롯해 왕건 생애도가 전시돼 있다.

[서울=뉴시스] 드론으로 촬영한 태조 현릉의 부감.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아쉽게도 왕건의 화상은 당대의 진본이 아니다. 이 화상은 1918년에 재판한 왕 씨 족보에 그려진 화상을 토대로 새로 그린 것이다. 고려 때도 왕의 진영(眞影)이 그려져 사찰 등에 봉안됐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 정자각 안에는 북한이 왕 씨 족보(오른쪽)에 그려진 초상화을 토대로 그린 왕건의 진영이 전시돼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태조 현릉의 정자각 안에는 북한이 1990년대 초에 그린 왕건의 진영과 생애도가 전시돼 있다. 왕건의 진영은 1918년에 재판된 왕 씨 족보에 그려진 화상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 )와 개수기실비가 들어 있다. 비석은 1867년 현릉을 중수하고 세운 것이고, 비각은 개선할 때 새로 지었다. 새로 만든 왕건릉은 잘 다듬어진 봉분을 비롯한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석등, 4마리의 돌 호랑이,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고 있는데, 모두 새로 만든 것이어서 사진에서 보던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서울=뉴시스] 최근 드론으로 촬영된 태조 현릉의 전경. 1994년 개건되기 전의 원형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원래 봉분의 직경은 11.56m, 높이 6.25m였지만 현재는 직경이 19m, 높이 8m로 커졌고, 고려 왕릉의 양식에 맞게 3단으로 분리해 석수와 망주석, 문인상, 무인상을 모두 새로 배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데 뜻밖에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한다. 능의 서쪽에 무덤 칸(묘실)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석문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워진 비가 옮겨져 있었다.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의 서쪽에는 무덤 칸(묘실)으로 들어가는 돌문(왼쪽 사진)이 있고, 돌문 앞에는 조선 시대 때 세워진 ‘고려 시조 현릉’ 비가 옮겨져 있다. 태조 현릉의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의 좌우에는 원래 왕건릉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을 옮겨 전시해 놓았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의 무덤 칸(묘실) 중앙 유리벽 안에 전시된 관대(위)와 고려청자, 벽화.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무덤 칸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 벽에 원래 왕건릉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이 전시돼 있다. 북한이 왕건릉을 개건하면서 병풍석을 새로 만들고, 진품은 이곳에 옮겨놓았다.

무덤 칸으로 들어가자 왼쪽에 왕건이 사용했다는 고려청자 등 일부 출토 유물이 놓여 있다. 무덤 칸은 화강암의 판석을 이용하여 사방의 벽을 만들었는데 상부는 단을 두어 좁힌 뒤 천장돌을 올렸다. 무덤 칸 바닥의 중앙에는 관대가 있고, 관대의 좌우로 벽과 맞닿게 설치한 부장을 위한 단이 마련되어 있다.

무덤 칸의 네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러져 있었다, 동서벽의 벽화만이 뚜렷하게 확인될 정도였다. 동벽에는 매화나무, 참대, 청룡의 꼬리 부분이 남아 있으며, 서벽에는 소나무(老松圖), 매화나무가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으며 백호의 모습도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북벽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무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천장에는 별자리 그림이 그려졌다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대나무·매화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진 이 벽화는 한국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된다.

왕건릉이 몇 차례 이장됐기 때문에 벽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북측 해설 강사는 벽화에 네 차례 덧칠한 흔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무덤 훼손이 걱정됐지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 2013년 세계문화유산 지정뒤 완건릉 새로 정비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2013년 개성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왕건릉도 여기에 포함됐다. 최근 입수된 사진을 보면 북한은 삼문 앞에 세계문화유산 표식비를 세우고, 봉분 뒤쪽에 곡장(曲墻)을 새로 조성했으며, 묘역 왼쪽에 있는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표지석을 새로 세워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 2013년 세계문화유산 지정(왼쪽 빨간 원) 이후 삼 문 앞에 표식비가 세워진 태조 현릉의 입구 모습. 오른쪽에 1993년 김일성 주석이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photo@newsis.com


- 현재 왕건릉 원형 사라져

현릉은 외적의 침입으로 몇 차례 이장의 아픔을 겪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현릉은 부아산 향림사로 잠시 옮겨졌으며, 1217년(고종 4)에 거란 유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다시 태조의 재궁은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한 1232년(고종19)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환도한 1270년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현릉이 송악산 서쪽 파지동 남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 시대 때도 파지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원래의 자리로 이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성종 때 유학자인 유호인(兪好仁, 1445~1494년)은 성종 8년(1477년)에 개성을 다녀온 후 기행문인 유송도록(遊松都錄)을 남겼다. 여기에 태조 현릉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갈 길을 재촉하여 저물녘에 보현원에 도착하였다. 보현원 서쪽으로 돌아서 파지동(巴只洞)에 들어가서 고려 시대 왕릉의 소재를 물었다. 촌 할머니 한 분이 저쪽에 있는 산모퉁이를 가리킨다. 과연 그쪽에 조그만 구릉(丘陵)이 우거진 잡초 사이로 바라보인다. 그 곁에 한 자쯤 되는 비석이 하나 서 있고 거기에는 고려 시조 현릉(顯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 앞의 석상(石牀) 밑에는 풀들이 이리저리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치성 드린 흔적이 있었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왼쪽)와 1980년대 촬영된 태조 현릉 전경. 원래 봉분의 직경은 11.56m, 높이 6.25m였지만 현재는 직경이 19m, 높이 8m로 커졌고, 고려 왕릉의 양식에 맞게 3단으로 분리해 석수와 망주석, 문인상, 무인상을 모두 새로 배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이 기행문을 통해 조선 성종 때 2명의 능지기가 있었고, 세시(歲時, 명절)와 복납(伏臘, 삼복 날과 섣달그믐)에는 짐승을 잡고 술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관리가 썩 잘 된 것은 아니었다. 현릉은 또한 1906년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파괴되었다가 1954년에 복구됐다. 1910년대 일제가 찍은 사진이나 전쟁 후 복구된 현릉은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의 왕건릉은 1992년 발굴조사 후 공민왕릉의 조각수법 등을 본 따 새로 조성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6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원형 난간석, 장명등, 문인석 등의 석물들이 삼문 왼쪽에 전시해 놓은 것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서울=뉴시스] 태조 왕건의 현릉의 원형 봉분의 직경은 11.56m, 높이 6.25m였지만 1994년 개건 후 직경이 19m, 높이 8m로 커졌다. 또한 고려 왕릉 양식에 맞게 3단으로 분리해 석수와 망주석, 문인상, 무인상을 모두 새로 배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에 있던 석물들. 1994년 북한은 태조 현릉을 고쳐서 세우면서 원래 무덤의 병풍석은 묘실 안으로 옮겼고, 무덤 주위에 있던 장명등, 석수, 석인상 등은 묘역 한쪽에 모아 놓았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 왕건, 미완의 민족통합 최종 해결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877년 송악군의 사찬인 왕융(王融)의 아들로 태어나 한반도 중부지역을 석권한 궁예(弓裔)의 부하가 되어 서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경상남도까지 공략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나 궁예의 폭정과 위협에 반기를 들어 휘하 장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다음 해인 919년에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가 있는 지금의 개성인 송악으로 옮겼으며 궁성을 송악산 아래에 정했다.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에 있는 석물. 1994년 북한은 태조 현릉을 고쳐서 세우면서 원래 무덤의 병풍석은 묘실 안으로 옮겼고, 무덤 주위에 있던 장명등, 석수, 석인상 등은 묘역 한쪽에 모아 놓았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이후 왕건은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935년에는 신라를 흡수하였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 시켜 ‘삼한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936년 거란에게 멸망하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10만에 달하는 발해의 유민을 포용하여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로 불렸던 미완의 민족통합을 최종적으로 해결하였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고려에는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할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고려의 영역으로 통일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서울=뉴시스] 태조 현릉을 찾은 북한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photo@newsis.com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룬 후 7년을 더 살다가 사망하였다(943년). 후대에 벌어진 거란과의 전쟁에서 개경이 점령되면서 국초의 기록이 상당수 사라져, 통일 후 7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왕건은 즉위 이후부터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후대의 왕들을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통치의 주요 방향을 제시했다. 왕건이 내린 여러 가르침은 ‘태조의 유훈(遺訓)’으로 고려 왕조 내내 존중되었다.

북한은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해 높이 평가하고 있고, 왕건릉을 역사 교양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왕건릉을 찾는 개성 시민들의 달라진 모습이다. 이곳을 찾은 많은 방문객이 해설 강사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북한 전역에 600만대 이상의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풍속도다.(8)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고려 역대 왕 계보도>

[서울=뉴시스]

 

 

 

 

<주>

 

 

(1) 북한 개성역사지구 세계유산 등재(종합) (naver.com)2013.06.23.

 

 

 

(2) 개성시, 선죽교 등 민족문화유산 보호사업 진행  - SPN 서울평양뉴스 (spnews.co.kr)

 

 

(3) 北 '민족유산애호월간' 맞아 역사유적보수 등 보호사업 진행  - SPN 서울평양뉴스 (spnews.co.kr)

 

 

(4) 北 매체, "개성시 '세계문화유산' 등록된 역사유적만 10여개"  - SPN 서울평양뉴스 (spnews.co.kr)

 

 

(5) 北, "개성 역사 유적, 왕건왕릉 등 12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 SPN 서울평양뉴스 (spnews.co.kr)

 

 

(6)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북 개성 고려왕릉 40여 기 능주도 모른다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7)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②풍수따라 초기 4대왕릉 동서남북 고루 배치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8)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③고려 왕건이 잠든 무덤에 들어가다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참고자료>

 

 

 

만월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개성 성균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선죽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현릉 (고려 태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공민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④ 2019년 마침내 혜종의 무덤을 찾다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⑤'닮은 꼴' 조선·고려 정종, 왕릉 보존상태는 판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⑥광종이 묻힌 헌릉, 원형 사라져 초라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⑦사촌사이 5대 경종·6대 성종 능도 인접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⑧수차례 도굴 ‘선릉’은 현종의 무덤일까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⑨북, 2016년 고려 덕종·정종 능 발굴 발표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⑩새 단장 박지원·황진이 묘 부근 문종묘도 '깔끔'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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