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1. 고려 (3)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본문

남국/고려

1. 고려 (3)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대야발 2021. 1. 30. 12:24
SMALL

 

 

 

 

 

여진정벌 큰 공 세우고 벌 받은 윤관

김삼웅2024. 2. 27. 08:12
 
[겨레의 인물 100선 100]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윤관장군 묘 웅장한 왕실의 무덤 같다
ⓒ 김수종
 
윤관(尹瓘)은 우리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만큼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이다.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수백 리에 고토를 회복하여 고려의 영토를 북쪽으로 크게 확장시킨 영웅이다. 국사책에서 배운 '9성(九城)을 축성'한 장본인이 바로 윤관 장군이다.

우리 역사는 이 출중한 명장의 태어난 연대도 알지 못한다.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로서, 예종이 전공을 높이 사서 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의 벼슬을 제수하며 위업을 포상하였던 인물인데도 말이다.

다만 문종 때에 등과하여 습유, 보궐의 벼슬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그의 출생 시기를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윤관의 인물됨은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특사로서 요나라에 파견되어 신왕의 즉위를 알리고, 1098년에는 다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 사실을 통고한 점으로 미루어 그 인품과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윤관의 인물됨은 문관의 역량뿐이 아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역대 왕들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을 국시로 내걸고 북진정책을 추진한 결과 서쪽으로는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도련포에 이르는 선까지 국토를 확장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함경남도 정평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여진족과 대치하게 되었다. 원래 여진족은 고대에 말갈 혹은 숙신이라고 불리던 종족으로서 뒷날 금(金)나라와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조상이다.

여진족은 오래 전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 또는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조공하여 왔으며,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이나 물품을 주어 달래왔다. 고려에 귀화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우야소(鳥雅束)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고려의 국경 요새인 정주관 문 밖에까지 병력을 주둔하면서 두 나라는 잦은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는 두 차례의 출병에서 참패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고려에서는 여진정벌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전패를 거울삼아 전투력을 증강하고 특수부대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거국적인 전쟁준비에 놀란 여진족은 사신을 보내 앞으로 일체의 도발을 중지하고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을 할 것을 다짐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여진족의 거듭되는 화전 양면의 사술에 단호한 결전으로 맞섰다. 예종 2년 11월 여진족이 국경을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은 예종은 여진정벌을 명령했다. 

총사령관에는 윤관이 임명되었다. 행영대원수가 된 윤관은 오연총을 부관으로 삼아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했다. 인구 2백만 명도 안 되는 고려가 17만의 대군으로 여진정벌에 나선 것은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윤관은 파죽지세로 적을 공격하여 승전을 거듭하였다. 고려군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여진군은 패주 끝에 주력부대가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고려군은 적의 전략적인 거점 135개를 무찌르고 살상 4,940명, 생포 130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윤관은 평정한 땅을 고려 강역으로 편입시켰다. 동쪽으로 화곶령, 북은 백두산, 서쪽은 정주일대에 접하여 사방 3백리의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역내 중요한 곳에 성을 쌓고 남쪽지역 주민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살도록 하였다. 이렇게 축성된 9성의 위치는 영주(길주 부근), 웅주(길주  부근), 복주(서천 부근), 길주, 함주(함흥 부근), 공험진(경흥 부근), 통태, 진양, 숭녕 등이다. 이밖에도 의주, 평융, 선화 등에도 성을 쌓았고, 공험진에는 '고려지경'(高麗地境)이란 비를 세워 경계를 표하였다.

왕은 윤관의 공적을 기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훈호를 내렸다. 우리 역사상 흔치 않는 고토회복의 전승장군에 대한 당연한 예우였다. 그러나 윤관은 이후 그 명예와 업적에 비해 결코 겪어서는 안 되는 변을 당하게 된다. 

여진족을 물리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개선한 윤관은 백성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권력에 눈이 먼 조정 대신들에게는 크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막강한 군병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그가 두렵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이 없던 조정 소인배들이 윤관과 오연총 등 출정파를 시기하여 그들을 배척하는 여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도 잇따랐다.
 
▲ 윤관장군 묘 파주시
ⓒ 김수종
 
이 무렵 생활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은 고려에 9성의 환부를 애원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고려 조정을 움직이려 들었다. 

여진족은 고려 조야에 화친과 9성 환부를 요청하는 한편 수시로 기습공격을 자행하여 많은 고려군과 민간의 희생을 가져왔다. 윤관이 다시 출병하였지만 적병의 기습에 적잖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여진족의 간특한 화친애걸과 기습전략에 조정대신들은 우선 윤관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9성 환부에 동조하고 나섰다. 윤관이 개척한 9성의 넓은 땅을 여진족에게 돌려주면 자동적으로 윤관 등의 공은 사라지게 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관의 공적을 시기하는 신료들은 이 기회에 출정파를 제거하고자 음모하여 최홍사·김경용 등이 주동이 되어 "윤관 등이 명분 없는 군대를 공연히 일으켜 싸움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들에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예종은 처음에는 자기의 명을 받고 출전한 까닭에 이들을 벌 주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반대하다가 중신들에 이어 대간들까지 나서 상소하고 간관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집무를 거부하는 등 조신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자 마음을 바꾸었다.

예종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조정의 3품 이상의 문무관을 소집하였다. 이 때 몇 명의 신진 선비들만이 반대할 뿐 대부분의 신료들이 이에 찬동하고 나섰다. 

고려는 수많은 인명의 피해와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회복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조정의 결정이 나자 중신들은 다시 윤관을 모해하고 나섰다. 당초 9성환부 문제보다 윤관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윤관의 탄핵에 동조하였다.

그토록 힘들게 확보한 9성을 돌려주고 윤관과 오연총 등 승전장수들은 삭탈관직되고 공신의 칭호를 삭제당하였다. 

간신배들은 두 장수의 목을 벨 것을 거듭 주청하였지만 예종은 간신히 이를 묵살하고 죽이는 것만은 막아 주었다. 몇 해 후 이들에게 복직의 어명이 내렸지만 두 장수는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윤관은 예종 6년(1111) 5월 8일, 천추에 씻기지 않을 한을 안고 눈을 감았다. 출생연도가 명확치 않아 몰년의 나이 또한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다 주어도 땅은 내줄 수 없다

2007. 5. 29. 18:13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달라는 것은 다 주어라, 막 퍼주어라

잔치외교와 기생외교가 개막된 이래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은 싱글벙글했다. 최상의 대우와 어여쁜 미인을 안겨주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륜이 건의하여 실행하기 시작한 대명외교 전략은 입국하는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달라는 것은 퍼주되 국토를 보존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때맞춰 병조에서 통계보고가 올라왔다. 조선의 총 군사 수가 29만6310명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정예 장졸 이외에 지방 관아에서 관리하는 군졸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하륜의 소신에 설득력을 뒷받침해두는 통계였다. 하륜은 평소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명나라와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말(馬) 1만 마리를 보내라 하는 것도 보내주었고 소 1만 마리를 보내라 하는 것도 10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 당시 말은 전략적 군수물자였고 소는 대표적인 생산 산업 농사의 기둥이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농업을 마비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주었다.

'달라는 것은 주되 국토는 지키자'는 것이 대명 외교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을 조심스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명나라에서 얄궂은 첨보가 들어왔다. 조선을 확실하게 묶어두기 위하여 통혼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조선의 왕실과 혼인하기 위하여 공주를 차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극복의 대상이다

태종 이방원은 다른 것은 다 주어도 이 문제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극복의 대상인데 딸을 보내거나 받으면 영원한 사위국이 아닌가? 고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이에 깜짝 놀란 태종 이방원은 경정궁주를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하가 시키고 아직 나이 어린 경안궁주마저 권근의 아들 권규에게 출가시켰다.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서 명나라 황실과 통혼은 가문 이상의 혼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명나라 황실과 혼인하면 한민족(韓民族)의 피와 한민족(漢民族)의 피가 섞이지 않은가? 피가 섞이면 현실에 순응해야 하지 않은가? 피가 섞이고 어떻게 요동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방원의 뇌리에는 두 차례 사신 길에 목격한 요동의 고구려 유적과 유민들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두 딸을 서둘러 혼인시킨 태종 이방원에게 불길한 정보가 날아들었다.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할 체재로 다스리겠다는 정책이었다. 그동안 여진족은 조선에 조공했고 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을 넘나들며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조선은 묵인해주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겠다면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국토와 연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은 철령위(鐵嶺衛)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한민족을 한반도에 묶어두려는 대륙세(勢)와 대륙으로 뻗어나가려는 한민족이 부딪치는 분기점이 철령(鐵嶺)이다.

 

"삼부(三府)가 모여서 여진의 일을 의논하였다. 황제가 여진에게 칙유(勅諭)하여 오도리(吾都里),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 등을 초무(招撫)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는데 여진은 본래 우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삼부가 회의한 것이었다." - <태종실록>

역사에 기록된 근거 자료를 찾아라

의정부와 사헌부 그리고 사간원 대신들을 모아 회의를 마친 태종은 하륜을 불렀다.

"사고(史庫)를 열어 윤관이 동여진(東女眞)을 치고 변경에다 비(碑)를 세운 것을 면밀히 조사하여 보고 하시오." - <태종실록>"전조(前朝)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살펴보니 시중(侍中) 윤관이 동여진(東女眞)을 치고 변경에다 비(碑)를 세웠다는 것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지체 없이 동북면에 나아가 그 비를 확인토록 하시오."

하륜이 동북면으로 떠났다.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에 역사적인 자료를 들이대며 명나라의 요구가 불가함을 논박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다.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전략이다. 동북면을 다녀온 하륜이 그 비(碑)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명나라와 외교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여진족은 우리나라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이민족이다. 고려 조정이 강하면 납작 엎드려 조공하고 약하면 국경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로 부임한 윤관이 여진족을 얕잡아보고 정벌하려다 무참히 참패했다.

이에 절치부심 칼을 갈던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 등 9성을 평정하고 비를 세웠다. 이듬해 봄에 개선한 윤관은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때 윤관이 세운 비(碑)를 근거로 '우리나라 영토다'라는 것을 주장하자는 복안이다.

명나라의 여진족 직할통치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요동천호(遼東千戶) 왕가인이 명나라 황제의 칙유(勅諭)를 가지고 입국했다.

"삼산(參散), 독로올(禿魯兀)등 여진지방 관민인 등에게 칙유(勅諭)하여 알린다. 너희에게 인신(印信)을 주어서 스스로 서로 통속케 하고 생업을 편하게 하여 짐과 함께 태평의 복을 누리도록 하라."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겠다는 외교문서다.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외교문서라기보다 일방적인 통보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눈 빤히 뜨고 오늘날의 평안도 일부와 함경도 지방을 내주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김첨을 명나라에 계품사(計稟使)로 파견했다.

"너희 아버지가 인정했으니 딴지 걸지 말라"

"본국의 동북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길주, 단주, 영주, 웅주, 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나라 건통 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예왕이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나라 초년에 이르러 몽고가 여진을 거두어 복속시킬 때 본국의 조휘와 탁청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하여금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이로 말미암아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 지어 길주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를 독로올(禿魯兀)이라 불렀으며 영주를 삼산(參散)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웅주를 홍긍(洪肯)이라 부르고 함주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황제의 칙유(勅諭)에 '삼산(參散)과 독로올(禿魯兀) 등 여진 지역의 관민인(官民人)을 직접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상고하건대, 삼산천호(參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가 비록 여진인에 속하기는 하나 본국 땅(本國地)에 와서 산지가 오래되었고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또 신(臣)의 조상이 일찍이 동북지방에 살았으므로 현조(玄祖) 이안사의 분묘가 현재 공주에 있고 고조(高祖) 행리와 조(祖) 이자춘의 분묘가 모두 함주에 있습니다. 생각건대 소방(小邦)이 고황제의 '왕국유사(王國有辭)'라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인민들을 본국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에 지형도본(地形圖本)을 받들고 경사에 가게 하여 주달(奏達)합니다." - <태종실록>

재반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반론이다. 외교문서이니만큼 정중한 예를 갖췄다. 하지만 내용은 유구한 역사를 상고하고 지도를 첨부하여 '너희 아버지 주원장 홍무제(洪武帝가 인정했으니 딴지 걸지 말라'는 얘기다.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한 태종 이방원은 상호군(上護軍) 박영을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로 임명하고 현장으로 출동하라 명했다.

"동요하는 여진족을 안무하라."

동북면에 도착한 박영은 국경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술렁이는 여진족을 진정시켰다. 명나라와 담판을 짓기 위하여 경사에 들어간 계품사(計稟使) 김첨이 황제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돌아왔다.

"조선 국왕 이휘에게 칙유한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參散)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을 그대가 성찰(省察)하라. 이에 그대의 준청(淮請)을 칙유하노라."

여진족을 간섭하지 않을 테니 조선이 계속 관리하라는 뜻이다. 조선의 승리다. 명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전에서 거둔 작은 성공이었지만 큰 수확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구획 짓는 국경선이다.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40227081200594

 

 

(2) https://v.daum.net/v/20070529181307247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