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려 (3)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본문
고려에서는 여진정벌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전패를 거울삼아 전투력을 증강하고 특수부대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거국적인 전쟁준비에 놀란 여진족은 사신을 보내 앞으로 일체의 도발을 중지하고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을 할 것을 다짐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여진족의 거듭되는 화전 양면의 사술에 단호한 결전으로 맞섰다. 예종 2년 11월 여진족이 국경을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은 예종은 여진정벌을 명령했다.
■ 여진정벌 큰 공 세우고 벌 받은 윤관
[겨레의 인물 100선 100]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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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관장군 묘 웅장한 왕실의 무덤 같다 |
ⓒ 김수종 |
윤관(尹瓘)은 우리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만큼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이다.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수백 리에 고토를 회복하여 고려의 영토를 북쪽으로 크게 확장시킨 영웅이다. 국사책에서 배운 '9성(九城)을 축성'한 장본인이 바로 윤관 장군이다.
우리 역사는 이 출중한 명장의 태어난 연대도 알지 못한다.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로서, 예종이 전공을 높이 사서 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의 벼슬을 제수하며 위업을 포상하였던 인물인데도 말이다.
다만 문종 때에 등과하여 습유, 보궐의 벼슬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그의 출생 시기를 어림할 수 있을 뿐이다.
윤관의 인물됨은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특사로서 요나라에 파견되어 신왕의 즉위를 알리고, 1098년에는 다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 사실을 통고한 점으로 미루어 그 인품과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윤관의 인물됨은 문관의 역량뿐이 아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역대 왕들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을 국시로 내걸고 북진정책을 추진한 결과 서쪽으로는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도련포에 이르는 선까지 국토를 확장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함경남도 정평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여진족과 대치하게 되었다. 원래 여진족은 고대에 말갈 혹은 숙신이라고 불리던 종족으로서 뒷날 금(金)나라와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조상이다.
여진족은 오래 전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 또는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조공하여 왔으며,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이나 물품을 주어 달래왔다. 고려에 귀화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우야소(鳥雅束)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고려의 국경 요새인 정주관 문 밖에까지 병력을 주둔하면서 두 나라는 잦은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는 두 차례의 출병에서 참패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고려에서는 여진정벌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전패를 거울삼아 전투력을 증강하고 특수부대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거국적인 전쟁준비에 놀란 여진족은 사신을 보내 앞으로 일체의 도발을 중지하고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을 할 것을 다짐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여진족의 거듭되는 화전 양면의 사술에 단호한 결전으로 맞섰다. 예종 2년 11월 여진족이 국경을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은 예종은 여진정벌을 명령했다.
총사령관에는 윤관이 임명되었다. 행영대원수가 된 윤관은 오연총을 부관으로 삼아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했다. 인구 2백만 명도 안 되는 고려가 17만의 대군으로 여진정벌에 나선 것은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윤관은 파죽지세로 적을 공격하여 승전을 거듭하였다. 고려군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여진군은 패주 끝에 주력부대가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고려군은 적의 전략적인 거점 135개를 무찌르고 살상 4,940명, 생포 130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윤관은 평정한 땅을 고려 강역으로 편입시켰다. 동쪽으로 화곶령, 북은 백두산, 서쪽은 정주일대에 접하여 사방 3백리의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역내 중요한 곳에 성을 쌓고 남쪽지역 주민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살도록 하였다. 이렇게 축성된 9성의 위치는 영주(길주 부근), 웅주(길주 부근), 복주(서천 부근), 길주, 함주(함흥 부근), 공험진(경흥 부근), 통태, 진양, 숭녕 등이다. 이밖에도 의주, 평융, 선화 등에도 성을 쌓았고, 공험진에는 '고려지경'(高麗地境)이란 비를 세워 경계를 표하였다.
왕은 윤관의 공적을 기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훈호를 내렸다. 우리 역사상 흔치 않는 고토회복의 전승장군에 대한 당연한 예우였다. 그러나 윤관은 이후 그 명예와 업적에 비해 결코 겪어서는 안 되는 변을 당하게 된다.
여진족을 물리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개선한 윤관은 백성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권력에 눈이 먼 조정 대신들에게는 크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막강한 군병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그가 두렵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이 없던 조정 소인배들이 윤관과 오연총 등 출정파를 시기하여 그들을 배척하는 여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도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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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관장군 묘 파주시 |
ⓒ 김수종 |
이 무렵 생활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은 고려에 9성의 환부를 애원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고려 조정을 움직이려 들었다.
여진족은 고려 조야에 화친과 9성 환부를 요청하는 한편 수시로 기습공격을 자행하여 많은 고려군과 민간의 희생을 가져왔다. 윤관이 다시 출병하였지만 적병의 기습에 적잖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여진족의 간특한 화친애걸과 기습전략에 조정대신들은 우선 윤관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9성 환부에 동조하고 나섰다. 윤관이 개척한 9성의 넓은 땅을 여진족에게 돌려주면 자동적으로 윤관 등의 공은 사라지게 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관의 공적을 시기하는 신료들은 이 기회에 출정파를 제거하고자 음모하여 최홍사·김경용 등이 주동이 되어 "윤관 등이 명분 없는 군대를 공연히 일으켜 싸움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들에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예종은 처음에는 자기의 명을 받고 출전한 까닭에 이들을 벌 주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반대하다가 중신들에 이어 대간들까지 나서 상소하고 간관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집무를 거부하는 등 조신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자 마음을 바꾸었다.
예종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조정의 3품 이상의 문무관을 소집하였다. 이 때 몇 명의 신진 선비들만이 반대할 뿐 대부분의 신료들이 이에 찬동하고 나섰다. 고려는 수많은 인명의 피해와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회복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조정의 결정이 나자 중신들은 다시 윤관을 모해하고 나섰다. 당초 9성환부 문제보다 윤관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윤관의 탄핵에 동조하였다.
그토록 힘들게 확보한 9성을 돌려주고 윤관과 오연총 등 승전장수들은 삭탈관직되고 공신의 칭호를 삭제당하였다.
간신배들은 두 장수의 목을 벨 것을 거듭 주청하였지만 예종은 간신히 이를 묵살하고 죽이는 것만은 막아 주었다. 몇 해 후 이들에게 복직의 어명이 내렸지만 두 장수는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윤관은 예종 6년(1111) 5월 8일, 천추에 씻기지 않을 한을 안고 눈을 감았다. 출생연도가 명확치 않아 몰년의 나이 또한 알 수가 없다.(1)
윤관이 9성을 쌓았다는 학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에서는 9성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서부터 두만강 유역 일대까지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일부 학자나 일본인 학자들은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 함흥평야 일대로 국한했다.
이상태 교수의 논문과 옛 고지도를 보면 9성 위치를 두만강 이북으로 그려놓았고 현재 연길시 왕청현 부근 백초구령 부근의 고려촌(고성촌, 려성촌)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행은 고성촌 고려마을에 들러 옛 촌로들로부터 전해오는 9성의 위치에 대해 청취했다.
■ '사돈'이라는 말의 유래, 이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선조들의 혼 서린 동북 3성... 중국 여행 갔다가 나를 보고 돌아온 사연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지친 몸을 휴식하기 위해서?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너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기 위해서'이다.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흘렀던 중국 동북 3성을 돌아보았다. 2천 킬로미터를 돌아보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그 어떤 여행보다 값진 경험을 했다. 나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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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공항 모습으로 한글로 써진 '연길'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
ⓒ 오문수 |
중국 동북 3성 답사 여행을 떠나는 일행 7명이 인천공항 출국장에 모인 날은 10월 10일 오전 8시. 전북 장수와 전주, 여수에서 새벽에 이동했기 때문에 피곤할 것 같지만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여행이 주는 기쁨으로 약간 들떠 있기 때문이다.
일행을 안내하는 리더는 고조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이다. 동아지도 대표이기도 한 안동립 단장은 우리 조상의 뿌리를 찾아서 중국과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20여년 동안 고조선유적답사단을 리드한 실적이 올해로 47회에 이른다.
'조선족' 아닌 '중국동포'로
일행이 중국을 향해 떠난 시기는 여행하기 좋은 날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통일이 됐더라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리인데 서해를 거쳐 중국 동북 지방을 돌아 연길 공항까지 가는데 2시간여가 걸렸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기 전 승무원들로부터 안내방송이 나왔다.
"군사 공항을 민간 여행기가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반드시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항 통과도 까다롭다. 한국인은 여행 일정표를 제출해야 한다. 아마도 남북 관계를 의식한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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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대학교 모습. 교정에서 나오는 대학생에게 한국말로 물으니 알아듣지 못한 경우가 있어 안타까웠다. |
ⓒ 오문수 |
그래도 반가운 게 있었다. 통관절차를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延吉 연길'이라는 공항 표지판이 보였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를 다녀 봤지만 한글 간판이 버젓이 서있는 곳은 연길 공항뿐이다. 비록 한문 글자 다음에 나오는 한글이지만 반가웠다.
가이드는 역사를 전공한 조선족이어서인지 우리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대화 중 안동립 대표가 '조선족'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중국동포가 맞지 않냐는 말이다.
"미국에 사는 동포는 재미교포, 일본에 사는 교포는 재일교포라고 부르는데 중국에 사는 동포만 중국인들이 부르는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건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이기도 하고, 일전에 어떤 중국 동포가 이의를 제기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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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대학교 주변 상가 야경 모습으로 연변의 대표적 명소 중 하나이다. |
ⓒ 오문수 |
일리 있는 얘기다. 중국에는 한족 포함 55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55개 소수민족 중 신강, 내몽골, 조선족, 서장(티벳)에 사는 소수민족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소위 '조선족'은 240만명으로 동북 3성에 180만명이 살고 연변에는 90만명이 산다.
점심을 먹기 위해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식당은 '열군속(렬군속)'이라는 간판을 단 냉면집이다. 가이드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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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에 나섰던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냉면식당인 '열군속' 모습 |
ⓒ 오문수 |
"'열군속(烈軍屬)'은 '열사의 가족이 만드는 음식점'이라는 뜻으로 조상이 독립운동을 했던 식당이라는 뜻입니다. 연변 음식점 중에 왼쪽 한문 글씨가 크고 옆에 쓴 한글 글씨가 작은 식당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반면에 한글이 크고 한문 글씨가 작은 간판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보면 됩니다"
푸짐하게 차려진 냉면을 먹은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백초구령에 있는 고성촌과 려성촌. 이곳은 고려 예종 때 윤관 장군이 17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족을 물리친 후 9성을 쌓아 공험진 이남을 조선의 경계로 세운 비가 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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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속 고지도를 보면 '두만강' 을 뛰어넘어 '선춘령''과 '고려경'이 보이고 윤관이 세웠다는 비석이 보인다. |
ⓒ 안동립 제공 |
윤관이 9성을 쌓았다는 학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에서는 9성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서부터 두만강 유역 일대까지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일부 학자나 일본인 학자들은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 함흥평야 일대로 국한했다.
이상태 교수의 논문과 옛 고지도를 보면 9성 위치를 두만강 이북으로 그려놓았고 현재 연길시 왕청현 부근 백초구령 부근의 고려촌(고성촌, 려성촌)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행은 고성촌 고려마을에 들러 옛 촌로들로부터 전해오는 9성의 위치에 대해 청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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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초구령에 있는 고성촌 모습으로 윤관이 9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동포들이 집단촌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중국 동포들은 물을 다스려 벼농사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이드 말이에 의하면 "중국 동북 3성에서 벼를 재배하고 있는 곳에는 중국동포들이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
ⓒ 오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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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초구령의 '고성촌'에서 4킬로미터 쯤 더 올라가면 '려성촌'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윤관이 9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고려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
ⓒ 오문수 |
"만성천 개발지구에서 토성과 비석 등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이곳을 고려촌이라고 부릅니다. 만주족들은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고려인들은 물을 다스릴 줄 알아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길을 가다 도로변 가옥 중에 팔작지붕을 하고 벼농사를 짓고 있는 곳에는 중국 동포들이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중국동포들은 '연변'이라고 부르는 데 정작 한국에서는 '옌지'라고 부르는 게 기분이 상한다"는 그들. 그들은 중국에 사는 55개 소수민족 중 중국동포가 가장 잘 살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도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해준 부부가 사과를 꺼내오며 집안 살림살이 현장을 구경시켜 줬다. 방에 들어가니 아예 부엌이 방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겨울이면 너무나 춥기 때문에, 거기서 밥도 지을 뿐만 아니라 난방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동포들은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된 한국의 영향을 받아 잘 살고 있어요.
특히 뛰어난 교육열, 깨끗한 환경, 노인 공경 사상이 우수한 전통이죠.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7년간 살다 왔어요. 솔직히 말해서 중국 동북 3성 동포들은 잘살고 있는 한국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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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7년간 돈벌어 잘살고 있다는 중국 동포집에 초대받아 방문했다. 중국 동북 3성 동포들은 잘사는 한국 덕택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 방안에 부엌이 있다. "연기는 어떻게 처리하느냐?" 는 질문에 "연기가 안 난다"고 했다. |
ⓒ 오문수 |
윤관의 9성 개척사를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사돈(査頓)'이라는 말은 고려 예종 때 여진을 물리친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 장군 사이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사돈'이라는 한자 뜻은 '나무등걸에서 머리를 조아리다'라는 뜻으로, 혼인한 두 집안 부모들 사이 또는 그 집안의 같은 항렬이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편을 일컫는 말이다.
"평생을 전우로 지낸 돈독한 사이인 두 장군은 여진 정벌 후에도 자녀를 결혼시켰다. 둘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살았기에 자주 만나 술로 회포 푸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어느 봄날 술이 잘 익은 것을 본 윤관은 오연총 생각이 나서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 집으로 향했다.
개울을 건너려는 데 저편에 오연총이 서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간밤 소나기로 개울물이 불어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에 윤관이 말하기를 '서로가 가져온 술을 상대가 가져온 술이라고 생각하고 마시세!'라고 했다.
둘은 서로 산사나무(査) 등걸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頓) '한 잔 하시오' 하면서 저쪽에서 한 잔하고 ,또 저쪽에서 '한 잔 하시오'하면 이쪽에서 한 잔 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후 서로 자녀를 결혼시킬 때 '우리도 사돈(서로 나무등걸에 걸터앉아 머리를 조아린다)을 해볼까?' 했던 데에서 '사돈'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한복가게가 많은 '조선족 민속원'
북위 43도까지 올라와서 인지 해가 일찍 져 주변이 캄캄해진 밤. 일행이 들른 곳은 '조선족민속원'이다. 중국 조선족민속원은 연길시 소영진 리화촌에 위치해 있다.
총 투자액은 2.5억원이고 토지 면적은 9.4h㎡이며 건축면적은 6145㎡이다. 총 40채의 조선 민족 특색의 건축물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는 9채의 백년 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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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조선족민속원 앞 도로에 있는 100여개의 한복대여점 모습 |
ⓒ 오문수 |
중국조선족민속원은 중국조선족 민속문화를 핵심으로 중국조선족의 풍부하고 유구한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대중 유람객을 위한 문화체험, 오락, 휴가 등 다양한 놀이시설도 구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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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시 소영진 리화촌에 위치한 조선족민속원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예쁜 한복을 빌려입고 화보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
ⓒ 오문수 |
이곳에는 한복대여점이 100여개 이상이나 된다. 어쩌면 세계 최대의 한복대여점이 있는 곳이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한국과 한국 음식을 체험하고 싶은 상하이, 광저우, 항저우 출신 젊은이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10월 1일부터 10월 7일까지 중국국경절 연휴에는 93만명이 방문해 사람들이 떠밀려 다녔다고 하니 조선족민속원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2)
본국의 동북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길주, 단주, 영주, 웅주, 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나라 건통 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예왕이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나라 초년에 이르러 몽고가 여진을 거두어 복속시킬 때 본국의 조휘와 탁청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하여금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 모든 것은 다 주어도 땅은 내줄 수 없다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2007. 5. 29.
달라는 것은 다 주어라, 막 퍼주어라
잔치외교와 기생외교가 개막된 이래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은 싱글벙글했다. 최상의 대우와 어여쁜 미인을 안겨주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륜이 건의하여 실행하기 시작한 대명외교 전략은 입국하는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달라는 것은 퍼주되 국토를 보존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때맞춰 병조에서 통계보고가 올라왔다. 조선의 총 군사 수가 29만6310명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정예 장졸 이외에 지방 관아에서 관리하는 군졸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하륜의 소신에 설득력을 뒷받침해두는 통계였다. 하륜은 평소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명나라와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말(馬) 1만 마리를 보내라 하는 것도 보내주었고 소 1만 마리를 보내라 하는 것도 10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 당시 말은 전략적 군수물자였고 소는 대표적인 생산 산업 농사의 기둥이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농업을 마비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주었다.
'달라는 것은 주되 국토는 지키자'는 것이 대명 외교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을 조심스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명나라에서 얄궂은 첨보가 들어왔다. 조선을 확실하게 묶어두기 위하여 통혼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조선의 왕실과 혼인하기 위하여 공주를 차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극복의 대상이다
태종 이방원은 다른 것은 다 주어도 이 문제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극복의 대상인데 딸을 보내거나 받으면 영원한 사위국이 아닌가? 고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이에 깜짝 놀란 태종 이방원은 경정궁주를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하가시키고 아직 나이 어린 경안궁주마저 권근의 아들 권규에게 출가시켰다.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서 명나라 황실과 통혼은 가문 이상의 혼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명나라 황실과 혼인하면 한민족(韓民族)의 피와 한민족(漢民族)의 피가 섞이지 않은가? 피가 섞이면 현실에 순응해야 하지 않은가? 피가 섞이고 어떻게 요동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방원의 뇌리에는 두 차례 사신 길에 목격한 요동의 고구려 유적과 유민들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두 딸을 서둘러 혼인시킨 태종 이방원에게 불길한 정보가 날아들었다.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할 체재로 다스리겠다는 정책이었다. 그동안 여진족은 조선에 조공했고 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을 넘나들며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조선은 묵인해주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겠다면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국토와 연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은 철령위(鐵嶺衛)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한민족을 한반도에 묶어두려는 대륙세(勢)와 대륙으로 뻗어나가려는 한민족이 부딪치는 분기점이 철령(鐵嶺)이다.
"삼부(三府)가 모여서 여진의 일을 의논하였다. 황제가 여진에게 칙유(勅諭)하여 오도리(吾都里),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 등을 초무(招撫)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는데 여진은 본래 우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삼부가 회의한 것이었다." - <태종실록>
역사에 기록된 근거 자료를 찾아라
의정부와 사헌부 그리고 사간원 대신들을 모아 회의를 마친 태종은 하륜을 불렀다.
"사고(史庫)를 열어 윤관이 동여진(東女眞)을 치고 변경에다 비(碑)를 세운 것을 면밀히 조사하여 보고 하시오." - <태종실록>"전조(前朝)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살펴보니 시중(侍中) 윤관이 동여진(東女眞)을 치고 변경에다 비(碑)를 세웠다는 것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지체 없이 동북면에 나아가 그 비를 확인토록 하시오."
하륜이 동북면으로 떠났다.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에 역사적인 자료를 들이대며 명나라의 요구가 불가함을 논박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다.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전략이다. 동북면을 다녀온 하륜이 그 비(碑)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명나라와 외교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여진족은 우리나라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이민족이다. 고려 조정이 강하면 납작 엎드려 조공하고 약하면 국경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로 부임한 윤관이 여진족을 얕잡아보고 정벌하려다 무참히 참패했다.
이에 절치부심 칼을 갈던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 등 9성을 평정하고 비를 세웠다. 이듬해 봄에 개선한 윤관은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때 윤관이 세운 비(碑)를 근거로 '우리나라 영토다'라는 것을 주장하자는 복안이다.
명나라의 여진족 직할통치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요동천호(遼東千戶) 왕가인이 명나라 황제의 칙유(勅諭)를 가지고 입국했다.
"삼산(參散), 독로올(禿魯兀)등 여진지방 관민인 등에게 칙유(勅諭)하여 알린다. 너희에게 인신(印信)을 주어서 스스로 서로 통속케 하고 생업을 편하게 하여 짐과 함께 태평의 복을 누리도록 하라."
명나라가 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겠다는 외교문서다.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외교문서라기보다 일방적인 통보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눈 빤히 뜨고 오늘날의 평안도 일부와 함경도 지방을 내주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김첨을 명나라에 계품사(計稟使)로 파견했다.
"너희 아버지가 인정했으니 딴지 걸지 말라"
"본국의 동북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길주, 단주, 영주, 웅주, 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나라 건통 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예왕이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나라 초년에 이르러 몽고가 여진을 거두어 복속시킬 때 본국의 조휘와 탁청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하여금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 지어 길주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를 독로올(禿魯兀)이라 불렀으며 영주를 삼산(參散)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웅주를 홍긍(洪肯)이라 부르고 함주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황제의 칙유(勅諭)에 '삼산(參散)과 독로올(禿魯兀) 등 여진 지역의 관민인(官民人)을 직접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상고하건대, 삼산천호(參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가 비록 여진인에 속하기는 하나 본국 땅(本國地)에 와서 산지가 오래되었고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또 신(臣)의 조상이 일찍이 동북지방에 살았으므로 현조(玄祖) 이안사의 분묘가 현재 공주에 있고 고조(高祖) 행리와 조(祖) 이자춘의 분묘가 모두 함주에 있습니다. 생각건대 소방(小邦)이 고황제의 '왕국유사(王國有辭)'라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인민들을 본국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에 지형도본(地形圖本)을 받들고 경사에 가게 하여 주달(奏達)합니다." - <태종실록>
재반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반론이다. 외교문서이니만큼 정중한 예를 갖췄다. 하지만 내용은 유구한 역사를 상고하고 지도를 첨부하여 '너희 아버지 주원장 홍무제(洪武帝가 인정했으니 딴지 걸지 말라'는 얘기다.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한 태종 이방원은 상호군(上護軍) 박영을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로 임명하고 현장으로 출동하라 명했다.
"동요하는 여진족을 안무하라."
동북면에 도착한 박영은 국경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술렁이는 여진족을 진정시켰다. 명나라와 담판을 짓기 위하여 경사에 들어간 계품사(計稟使) 김첨이 황제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돌아왔다.
"조선 국왕 이휘에게 칙유한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參散)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을 그대가 성찰(省察)하라. 이에 그대의 준청(淮請)을 칙유하노라."
여진족을 간섭하지 않을 테니 조선이 계속 관리하라는 뜻이다. 조선의 승리다. 명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전에서 거둔 작은 성공이었지만 큰 수확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구획 짓는 국경선이다.(2)
<자료출처>
(1) 여진정벌 큰 공 세우고 벌 받은 윤관 (daum.net)2024. 2. 27.
(2) '사돈'이라는 말의 유래, 이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daum.net) 2024. 10. 21.
(3) 모든 것은 다 주어도 땅은 내줄 수 없다 (daum.net)2007.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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