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①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3.12.17 06:52:00

문화방송(MBC)이 50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 <기황후>가 큰 화제를 몰면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담당 PD가 "기황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상당히 단출하고, 원나라의 역사 자체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기황후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역사드라마를 단순히 드라마로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987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문화방송(MBC)이 50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 <기황후>가 큰 화제를 몰면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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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②<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3.12.26 07:58: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057 

 

<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문화방송(MBC) 월화드라마 <기황후> 방송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타 배우들의 호연으로 월화극 정상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기황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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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③<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03 09:18: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138 

 

<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드라마 <기황후> 17부에는 원나라의 황태후(皇太后)가 왕유(前고려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권유하는데, 왕유가 이를 사양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자 황태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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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④<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09 07:44: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200 

 

<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드라마 <기황후> 17부에서 20부까지는 주로 왕유(고려 폐주)가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권신인 엘테무르(연철) 대승상을 공격하는 부분으로 원 순제(혜종 :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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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⑤<기황후>가 왜곡한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16 23:42:45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2742 

 

<기황후>가 왜곡한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황룡사 9층 탑을 비롯한 각종 문화재들은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다.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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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⑥<기황후>유감…원나라, 고려의 허언을 인내하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23 18:13:28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3032 

 

<기황후>유감…원나라, 고려의 허언을 인내하다

이제 궁궐을 짓고 있으니 육지로 나갑니다1249년 11월 최이(崔怡 : 최우)가 죽고 아들인 최항(崔沆)이 정권을 계승했다. 원나라 조정은 고려에 국왕 친조를 요청했으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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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⑦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김운회 동양대 교수  |  기사입력 2014.02.04. 09:13:28 최종수정 2014.02.04. 10:55:04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3599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드라마 <기황후>는 보편적인 한국인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는 몽골은 오랑캐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 상인의 입을 빌려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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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⑧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13 07:48:07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072 

 

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

드라마 <기황후> 25부에서는 기양의(후일 기황후)가 황제(순제 : 혜종)에게 "저의 복수가 바로 폐하의 복수"라고 하면서 엘테무르(연철)의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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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⑨원 혜종이 '까막눈'이라고?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20 09:22:5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416 

 

<기황후>, 원 혜종이 '까막눈'이라고?

황제가 '까막눈'이라니? 드라마<기황후>에서는 이미 성인이 된 혜종(타환 : 순제)이 '까막눈(일자 무식꾼)'으로 나온다. 그래서 기양의(기황후 : 당시는 기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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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⑩MBC <기황후>, 30부까지 사실이 없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26 15:21:14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722 

 

MBC <기황후>, 30부까지 사실이 없다

문화방송(MBC) 드라마 <기황후>는 기황후의 실제 삶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드라마 <기황후>에서의 기황후는 실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기황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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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북 개성 고려왕릉 40여 기 능주도 모른다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등록 2020.01.04 06:00:00수정 2020.02.24 11:12:56

 

수백여 년 방치·도굴… 18곳만 왕릉주인 확인

김정은 왕릉 대대적 정비에도 곳곳 황폐화

평화경제연구소 사진 500여 장 단독입수 공개



1. 연재를 시작하며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2016년 북한은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소릉군으로 부르는 5기의 왕릉을 대대적으로 보수 정비했다. 사진 오른쪽 상단에 ‘소릉군 제3릉’을 정비하는 대원들 모습이 보이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이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문화재 발굴과 정비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특히 지난 5년간 북한 당국이 개성시와 개성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려 왕릉과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대대적으로 발굴, 정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고려 9대 왕 덕종(숙릉, 肅陵)과 10대 왕 정종(주릉, 周凌)의 무덤을 새로 찾아냈고, 2017년에는 15대 숙종(영릉, 英陵)의 묘를 발굴했다. 또한 남북이 공동 발굴해온 고려궁궐 만월대(滿月臺)를 독자적으로 발굴 조사해 금속활자 1점을 찾았고, 지난해에는 화곡릉을 발굴해 2대 혜종의 묘라고 확정 발표했다.

분단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개성지역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보수가 이뤄지고 있던 셈이다. 개성의 고려 왕릉들은 195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공민왕릉을 발굴하면서 조사가 시작됐고, 총 20여 기의 왕릉과 왕릉급 고분들이 간헐적으로 조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 이후 북한은 1994년 태조 왕건이 묻힌 현릉(顯陵)을 대대적으로 개건하고 공민왕릉을 보수했지만, 나머지 왕릉들은 거의 방치되어 세월의 풍상을 견뎌야 했다. 1990년대 중반 최악의 경제난을 겪으면서 문화재 관리에 신경을 쓸 여력도 부족했다.

[서울=뉴시스]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 북쪽에 있는 7릉군의 제1릉 앞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는 표식비가 세워져 있다. 고려 왕릉 중에서는 7층군을 비롯해 태조 현릉(顯陵), 공민왕 현릉(玄陵), 명릉군이 포함됐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2004년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는데 성공하면서 북한은 민족문화유산의 보존과 세계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까지 직접 나서 2014년 ‘민족유산보호사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빛내는 애국사업이다’ 제목의 담화를 통해 “우리나라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문화재 관리 법제도 개정해 2015년 ‘민족유산보호법’을 새로 제정했다.

이후 북한은 내각 민족 유산 보호국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사, 송도사범대학 교원 주도로 고려의 도성인 개성성 안의 여러 유적과 도성 밖 고려 왕릉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활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 왕릉의 현재와 과거 비교 위해 수천장 사진DB 대조

[서울=뉴시스]일제는 고적조사 명목으로 고려 왕릉을 조사한 후 출토된 유물을 약탈해 갔다. 사진은 1916년 고적조사 후 촬영한 명종의 지릉 전경. 당시도 퇴락한 모습이었고, 현재는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1.0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려 인종의 능에서 발견된 시책. 아들 의종이 선왕인 인종의 생전의 여러 업적과 인품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말미에 시호와 묘호를 기록하였다. 명문이 새겨진 책엽(冊葉) 41개(33.0×3.0×2.5cm)와 천부상(天部像)이 새겨진 다소 넓은 책엽 2개(33.0×8.5×2.5cm)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1.04.photo@newsis.com



머니투데이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는 개성지역에 대한 북한의 조사와 발굴 작업이 활발해진 것에 주목해 지난 1년 동안 고려 왕릉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진과 동영상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중국, 일본, 미국 등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해외교포를 통해 고려 왕릉 사진 5백여 장을 단독 입수했다. 이를 과거 고려 왕릉의 모습과 비교 분석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리 원판 사진을, 분단 이후 시기는 ㈜미디어한국학이 소장한 수천 장의 개성지역 역사유적 사진 DB를 활용했다.

현재 개성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 중에서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거나 추론이 가능한 것은 모두 18기다. 태조 왕건을 비롯해 혜종(2대), 정종(3대), 광종(4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덕종(9대), 정종(10대), 문종(11대), 순종(12대), 숙종(15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공민왕(31대) 등이다.

개성지역 18기 왕릉은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에 모두 소재한다. 그중 태조 현릉(顯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은 국보급 유적으로, 나머지는 보존급 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어 왔다. 이번에 입수된 사진을 통해 2017년 발굴한 숙종 영릉이 국보 유적 36호로 새로 지정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뉴시스]

- 쇠락한 고령 왕릉 처참한 모습 드러나

[서울=뉴시스]2016년 북한이 황해도 개풍군 해선리에서 발굴한 9대 덕종의 숙릉으로 비정한 무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왕릉의 모습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 상태가 엉망이고,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최근 사진을 통해 확인된 고려 왕릉은 북한 당국의 대대적인 정비에도 600년 넘게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석물의 상당수가 사라지고 왕릉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리가 잘된 신라나 조선 시대의 왕릉과 비교하면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몰락한 왕조의 비애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현재 파악된 고려 시대 재위 국왕, 추존된 국왕, 그리고 왕비와 공주를 포함한 왕릉은 모두 61기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은 현재 20여 기에 불과하다. 제17대 인종 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59기의 왕릉에 위숙군(圍宿軍)을 배치해 철저히 관리하였으나 무인집권기와 몽골 침입기 등을 거치면서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게 되면서 많은 왕릉이 도굴 피해를 당하였고, 그에 따른 보수가 여러 차례 있었다.

- 고려 왕릉은 왜 이렇게 방치됐나

[서울=뉴시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왕릉마저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은 고려의 태조를 비롯한 전조 8왕의 능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었고, 세종은 태조·현종·문종·원종의 능에만 수호인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의 관(官)이 관리케 하였다. 따라서 4명의 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은 관리가 소홀해지게 되었고, 구전으로 왕릉의 위치 등이 전승되는 수준이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려 왕릉은 다시 방치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왕릉의 능주는 양난 이후 대부분 실전됐다가, 조선 현종 때 다시 고려 왕릉을 찾아서 비정한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현종은 1662년부터 고려 왕릉의 보수와 관리 등을 실시해 고려 왕릉 61기 가운데 43기까지 파악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능주를 알 수 없는 왕릉에 대해서는 번호를 매겨 통칭했다.

1867년(고종4) 고종은 고려 왕릉을 일제히 정비하여 57기에 대해 ‘고려 왕릉’이라고 표석을 세웠다. 이들 명칭은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왕릉조사 사업 때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물이 1916년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표기된 53기 고려 왕릉의 위치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늘날에도 그대로 불리고 있지만 불확실한 능주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관리와 연구 위해 남북 공동 노력 필요

[서울=뉴시스]1994년 개건을 마친 태조 왕건의 현릉. 다른 고려 왕릉에 비해 잘 관리되어 있다. 2013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표지석이 앞에 서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04. photo@newsis.com


대다수 고려 왕릉의 능주를 알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왕릉 안에 여러 부장품과 함께 묻은 시책(諡冊)이 도굴되거나 없어졌기 때문이다. 시책이란 왕의 시호와 묘호, 생전의 업적 등을 돌에 새긴 것이다. 글을 새긴 각 돌의 옆면 위아래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 금실 같은 끈을 넣어 연결해 놓았다. 현재 발견된 시책은 두 개로 고려 17대 인종(仁宗)과 20대 신종(神宗)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인종 시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렇게 된 사연이 기구하다. 이 시책은 1916년 9월 25일 총독부 박물관에서 일본 육군대학 교수이자 일본어 학자로서 한국도자기 컬렉터로도 유명한 구로다 다쿠마(黑田太久馬)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고려청자 등 인종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도굴된 여러 점의 유물과 함께 입수됐다. 구로다가 어떻게 이것을 구했는지, 경술국치 직전 통감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한 그가 개성 왕릉 도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부터 1910년대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한 개성 주변의 분묘 도굴과 고려청자의 유통이 성행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역시 개성의 인종 장릉에서 도굴되어 도쿄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총독부 박물관이 구매해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게 된 것이 다행이다. 다른 고려 왕릉의 시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릉은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당하였고, 한국전쟁 때도 많은 석물이 파괴·분실돼 대다수 왕릉의 원형은 크게 훼손됐다. 휴전 이후에도 개성이 군사도시로 되면서 고려 왕릉은 제대로 관리되기 어려웠다. 해방 후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굴레에서 고려 왕릉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2013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당시 제외된 고려 왕릉(태조릉, 공민왕릉 명릉군, 7릉군만 포함)을 추가로 포함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남한에서는 강화도 소재 고려 왕릉까지 포함해 남북이 공동으로 확장 올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려 왕릉은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묘제를 잘 보여준다. 왕릉의 크기 변화, 출토 유물 등은 당대의 권력 관계와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가장 최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으로나마 고려 왕릉 연구에서 남과 북이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등록 2020.01.11 06:00:00수정 2020.02.24 1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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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남쪽 왕릉 전쟁·개발로 많이 훼손

왕과 비는 화장하지 않고 목관에 매장

학문 뛰어나 文宗, 어진 임금이라 仁宗

[서울=뉴시스] 북한은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을 개건하면서 능 앞쪽에 홍살문 대신 삼문(三門)을 세웠다. 삼문은 사당이나 제실에 쓰는 문의 형식으로 세 칸 중 어칸(가운데 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출입하지 않았다. ‘동입서출’이라 하여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온다. 고려 왕릉은 홍살문이나 삼문이 세워져 있지 않고 정자각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왕권 강화로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4대 광종(光宗)까지 초기 4대왕 중 태조는 서쪽에, 혜종은 동쪽에, 정종은 남쪽에, 광종은 북쪽에 분산해 안장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치라고 판단된다. 사방에 초기 왕릉을 각각 배치해 그들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도성을 보호하려는 풍수적 관념이 적용된 것이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융성하고, 국가 운영에서 유교가 본격 수용된 시기지만 풍수지리설 또한 크게 유행했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속에 흐르는 기운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 산천의 형세를 살펴 도읍이나 사찰, 주거, 분묘 등의 위치를 정할 때 많이 활용됐다. 풍수지리로 보면 개경은 힘찬 기상이 솟아나는 송악산을 진산(鎭山)으로, 자남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오공산(지네산)을 우백호(右白虎)로, 남쪽의 용수산을 사신사(四神砂)로 한 장풍국(藏風局, 주변을 둘러쌓은 산세)의 도읍지다. 개경은 송악산이 진산이기 때문에 송도(松都)라고도 불렸다.

[서울=뉴시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은 당대 시대이념인인 유교, 불교적 이념과 풍수지리를 적절히 활용해 새로운 왕조 건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고려는 진산인 송악산(490m) 남쪽에 궁궐(황궁)을 짓고, 그 주변으로 황성과 내성을 쌓았으며, 외곽에 서쪽의 오공산(지네산, 203m)과 남쪽의 용수산(178m), 동쪽의 부흥산(156m)을 잇는 능선을 이용해 외성을 쌓았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아 대단하구나. 도성안의 수 만 채 집들은 잉잉거리는 벌떼들이 모인 것 같고 큰길 내왕하는 수 천여 사람들은 개미떼 굼질거리는 것 같구나”라며 도성 안 사람들을 묘사했다.

[서울=뉴시스]북한 개성시 자남산 관덕정에서 바라다 본 개성의 민속거리와 개성학생소년궁전. 오른쪽이 주산인 송악산이고, 왼쪽의 낮은 구릉이 오공산이고, 그 뒤로 만수산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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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외곽 서쪽에 태조 현릉 조성

고려 왕릉은 궁궐(만월대)을 기준으로 도성 밖 동서남북에 고르게 분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왕릉도 대부분 도읍지였던 한양 외곽에 터를 잡았는데, 왕릉을 도읍지의 4대문 10리(당시 10리는 4km가 아니고 5.2km)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거리 설정은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왕릉의 배치로 봤을 때 고려 때도 왕릉을 잡는 기준이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뉴시스]1872년 작성된 개성 전도. 북쪽으로 송악산·응봉·천마산, 서쪽으로 오공산· 만수산·봉명산, 남쪽으로 자남산과 용수산, 동쪽으로 부흥산 등이 표시돼 있고, 만월대를 중심으로 황성, 내성, 외성(라성)의 위치와 경계가 잘 나타나 있다. (사진=서울대 규장각)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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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릉은 도성 서쪽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왕릉들의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은 편이다. 도성 서쪽에 가장 숭배대상이던 태조 현릉이 조성되어 있고, 왕족들의 생활근거지인 궁성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만수산과 봉명산 등에서 뻗어 내린 얕은 야산과 구릉이 풍수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고, 불교의 서방 정토사상과도 방향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릉 등 송악산 북쪽 응봉(鷹峯, 매봉) 자락에 위치한 왕릉들도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울=뉴시스]고려 도성의 서쪽 송악산 능선에서 바라다본 개성 시내. 도성 서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고, 그 안쪽으로 고려 궁궐(만월대)터가 보인다. 왼쪽 멀리 송악산 능선이 보이고, 그 능선 끝 너머로 응봉(매봉) 능선이 살짝 보인다. 오른쪽으로 개성 남쪽에 있는 용수산이 뚜렷하게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진봉산(310m)이다. 용수산 남쪽과 진봉산 서쪽 사이에는 정종의 안릉, 신종의 양릉, 충정왕 총릉, 예종 유릉, 성종 강릉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반면 최근 촬영된 사진을 보면 고려 도성 남쪽 용수산과 진봉산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왕릉들은 자연재해, 전란(戰亂), 개발 등으로 훼손이 많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도성의 동남쪽에 자리 잡은 왕릉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려는 왕릉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철저히 고려했다. 우선 고려의 왕릉은 산 중턱 경사면에 터를 잡았고, 능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그 사이에 천(川)이 흘러가는 지형을 선호했다. 그리고 터의 앞쪽에는 조산이 솟아 있는 곳으로 정했다. 이러한 여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곳에는 인공적으로 곡장(曲墻, 무덤 뒤의 주위로 쌓은 나지막한 담)을 세워 주산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거나, 바람을 갈무리하게 하여 풍수적 여건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평지 또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는 통일신라시대 왕릉과 능선 끝자락에 조성된 조선 왕릉과 다른 점이다.

능역은 남북 길이 30∼40m, 동서너비 20∼25m 내외로 조성됐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3~4단의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계단식 구조는 산지의 지형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 능의 위엄을 높일 수 있었다.

[서울=뉴시스] 고려시대 태조가 창건하여 거처하던 궁궐터인 만월대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만월대 뒷쪽으로 보이는 산이 송악산이고, 그 뒤로 매봉이 보인다. 송악산과 매봉 사이 능선에는 혜종의 숙릉, 원종의 소릉 등의 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조선 왕릉과 비슷한 구조

왕이 죽으면 종묘를 신주에 모시는 과정에서 왕의 업적을 한 글자로 표현하고, ‘조(祖)’와 ‘종(宗)을 붙이고 묘호(廟號)라 했다. 예를 들어 학문에 뛰어났다는 뜻의 문종(文宗), 어질었다는 뜻의 인종(仁宗) 등이다.

원칙적으로 ‘조’는 창업한 왕에 대해서만 쓰는 호칭이었다. 즉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왕을 ‘종’이라” 했다. 고려의 경우 첫 왕인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몽골 간섭 시기에는 왕의 호칭이 강등되어 ‘충’(忠)을 앞에 붙이고, ‘종’ 대신에 제후국을 상징하는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고려시대 왕과 비는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매장하는 게 원칙이었다. 단 왕위쟁탈전에서 패해 살해당한 뒤 화장된 목종(997~1009)만이 유일한 예외이다. 장례의식은 일차적으로 국왕의 시신을 묻는 매장의식으로 일단락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망 후 5개월 만에 장례를 지냈다. 왕릉터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후 그곳에서의 제례, 왕릉 형식, 장례 후의 관리까지 자세한 내용이 『국조오례의』 흉례 치장 편에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절차는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고려왕조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했을 것이다. 태조부터 7대 목종(穆宗)까지는 왕과 왕비를 합장했고, 그 뒤부터는 따로 능을 조성했다.

[서울=뉴시스]고려 2대 혜종 무덤인 순릉(順陵)의 무덤칸(묘실) 모습. 사진 가운데 목관을 올려놓는 관대(棺臺)가 있고, 그 양쪽으로 유물 부장대가 마련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태조 때부터 왕의 무덤은 (반)지하식의 평면 (장)방형 횡구식단실묘(橫口式單室墓 · 무덤방이 1개로 3면의 벽을 먼저 쌓고 나머지 1면으로 드난든 후 밖에서 벽을 쌓아 막는 무덤 양식 )로 조성됐다. 일반적으로 묘실의 동·서·북 3면의 벽석은 모두 수직으로 쌓았고, 벽석 위쪽에 3∼4매의 대형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묘실 내부 바닥 중앙에는 관대(棺臺)를 놓고 그 좌우에 유물 부장대를 마련하였으며 나머지 바닥에는 전이나 박석을 깔았다. 왕릉에는 고급 자기와 도기, 청동제품이 부장된다. 목관의 겉을 장식했던 금동장식이나 못 등도 확인되어 왕릉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개성을 다녀온 후 남긴 유송도록(遊松都錄)에서 유학자 유호인(兪好仁, 1445-1494년)은 “(공민왕릉을) 처음 만들 때에 구슬과 비단, 옥으로 된 상자, 금으로 만든 오리, 은으로 만든 기러기 등 많은 보물로 장식하여서 여산에 있다는 진시황의 무덤과도 비견할 만하였단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계속된 도굴로 고려 왕릉의 부장품은 태조 현릉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형태로 출토된 것이 거의 없다.

[서울=뉴시스]북한 개성 고려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태조 현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의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소나무 그림.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1.photo@newsis.com


무덤칸의 크기는 능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략 남북 3~3.5m, 동서 2.5~3m이며 높이 2m 내외로 사람이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묘실의 벽면과 천장에는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벽면에는 12지신, 사신(四神), 건물, 매화, 소나무, 대나무를 그리고 천장에는 천체도(성좌도)를 그렸다. 이렇게 마련된 묘실에 목관과 유물을 넣은 후 나무문과 1장의 대형판석(문비석)으로 입구를 2중으로 폐쇄했다.

그리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1단), 그 아래쪽으로 2-3층 단을 쌓아 2단에 장명등(석등)과 문·무인석, 3단에 정자각(제향각)을 배치했다. 현재 정자각은 태조와 공민왕의 무덤에만 복원돼 남아 있고, 다른 왕릉에서는 터만 확인된다.

[서울=뉴시스]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공민왕과 왕비의 무덤인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공민왕릉은 한국 왕릉의 전형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조선 왕릉 조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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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신라시대의 능에 없던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 새로운 요소들은 조선시대 왕릉으로 계승된다. 전체적으로 고려 왕릉은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왕릉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릉이 기본적으로 고려 말 공민왕릉을 모태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왕릉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봉분을 조성했지만, 조선 왕릉은 둥그스름한 토단(土斷 · 흙으로 쌓은 단) 상부에 봉분을 조성한 점이 다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등록 2020.01.18 06:00:00수정 2020.02.24 11: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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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촬영한 최초 사진 공개

뚜렷하게 남아 있는 벽화 인상적

1994년 대대적 개건돼 원형 사라져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3회 – 조선과 북녘에서 ‘특별대우’ 받은 고려 태조 현릉(顯陵)

2003년 2월 23일 3시경, 1994년 북한이 대대적으로 개건해 새로 조성한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에 도착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려 궁궐(만월대) 서쪽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다. 현릉은 태조 왕건이 죽은 943년 5월에 만들어졌으며,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 씨와 함께 묻힌 합장묘다.


[서울=뉴시스]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 태조 현릉(顯陵)의 전경. 평양-개성 고속도로 서쪽에 인접해 있다. 현릉이 자리 잡은 고려 도성 서쪽에는 현종 선릉, 충목왕의 명릉, 공민왕릉,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서구릉, 선릉군 등 가장 많은 왕릉이 분포돼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주차장에 내리니 홍살문 대신 자주색 기와를 덮은 커다란 삼문이 서 있다. 삼문 앞 동쪽에는 1993년 김일성 주석이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세워져 있고, 정면에 커다란 규모의 왕건릉이 보인다. 삼문에서 봉분까지에 이르는 완만한 비탈길에는 돌을 깔고, 그 좌우에는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세웠다. 서쪽의 정자각 안벽에는 왕건 화상(像, 초상화)을 비롯해 왕건 생애도가 전시돼 있다.

[서울=뉴시스] 드론으로 촬영한 태조 현릉의 부감.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아쉽게도 왕건의 화상은 당대의 진본이 아니다. 이 화상은 1918년에 재판한 왕 씨 족보에 그려진 화상을 토대로 새로 그린 것이다. 고려 때도 왕의 진영(眞影)이 그려져 사찰 등에 봉안됐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 정자각 안에는 북한이 왕 씨 족보(오른쪽)에 그려진 초상화을 토대로 그린 왕건의 진영이 전시돼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태조 현릉의 정자각 안에는 북한이 1990년대 초에 그린 왕건의 진영과 생애도가 전시돼 있다. 왕건의 진영은 1918년에 재판된 왕 씨 족보에 그려진 화상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 )와 개수기실비가 들어 있다. 비석은 1867년 현릉을 중수하고 세운 것이고, 비각은 개선할 때 새로 지었다. 새로 만든 왕건릉은 잘 다듬어진 봉분을 비롯한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석등, 4마리의 돌 호랑이,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고 있는데, 모두 새로 만든 것이어서 사진에서 보던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서울=뉴시스] 최근 드론으로 촬영된 태조 현릉의 전경. 1994년 개건되기 전의 원형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원래 봉분의 직경은 11.56m, 높이 6.25m였지만 현재는 직경이 19m, 높이 8m로 커졌고, 고려 왕릉의 양식에 맞게 3단으로 분리해 석수와 망주석, 문인상, 무인상을 모두 새로 배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데 뜻밖에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한다. 능의 서쪽에 무덤 칸(묘실)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석문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워진 비가 옮겨져 있었다.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의 서쪽에는 무덤 칸(묘실)으로 들어가는 돌문(왼쪽 사진)이 있고, 돌문 앞에는 조선 시대 때 세워진 ‘고려 시조 현릉’ 비가 옮겨져 있다. 태조 현릉의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의 좌우에는 원래 왕건릉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을 옮겨 전시해 놓았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의 무덤 칸(묘실) 중앙 유리벽 안에 전시된 관대(위)와 고려청자, 벽화.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무덤 칸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 벽에 원래 왕건릉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이 전시돼 있다. 북한이 왕건릉을 개건하면서 병풍석을 새로 만들고, 진품은 이곳에 옮겨놓았다.

무덤 칸으로 들어가자 왼쪽에 왕건이 사용했다는 고려청자 등 일부 출토 유물이 놓여 있다. 무덤 칸은 화강암의 판석을 이용하여 사방의 벽을 만들었는데 상부는 단을 두어 좁힌 뒤 천장돌을 올렸다. 무덤 칸 바닥의 중앙에는 관대가 있고, 관대의 좌우로 벽과 맞닿게 설치한 부장을 위한 단이 마련되어 있다.

무덤 칸의 네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러져 있었다, 동서벽의 벽화만이 뚜렷하게 확인될 정도였다. 동벽에는 매화나무, 참대, 청룡의 꼬리 부분이 남아 있으며, 서벽에는 소나무(老松圖), 매화나무가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으며 백호의 모습도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북벽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무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천장에는 별자리 그림이 그려졌다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대나무·매화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진 이 벽화는 한국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된다.

왕건릉이 몇 차례 이장됐기 때문에 벽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북측 해설 강사는 벽화에 네 차례 덧칠한 흔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무덤 훼손이 걱정됐지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 2013년 세계문화유산 지정뒤 완건릉 새로 정비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2013년 개성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왕건릉도 여기에 포함됐다. 최근 입수된 사진을 보면 북한은 삼문 앞에 세계문화유산 표식비를 세우고, 봉분 뒤쪽에 곡장(曲墻)을 새로 조성했으며, 묘역 왼쪽에 있는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표지석을 새로 세워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 2013년 세계문화유산 지정(왼쪽 빨간 원) 이후 삼 문 앞에 표식비가 세워진 태조 현릉의 입구 모습. 오른쪽에 1993년 김일성 주석이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photo@newsis.com


- 현재 왕건릉 원형 사라져

현릉은 외적의 침입으로 몇 차례 이장의 아픔을 겪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현릉은 부아산 향림사로 잠시 옮겨졌으며, 1217년(고종 4)에 거란 유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다시 태조의 재궁은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한 1232년(고종19)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환도한 1270년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현릉이 송악산 서쪽 파지동 남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 시대 때도 파지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원래의 자리로 이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성종 때 유학자인 유호인(兪好仁, 1445~1494년)은 성종 8년(1477년)에 개성을 다녀온 후 기행문인 유송도록(遊松都錄)을 남겼다. 여기에 태조 현릉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갈 길을 재촉하여 저물녘에 보현원에 도착하였다. 보현원 서쪽으로 돌아서 파지동(巴只洞)에 들어가서 고려 시대 왕릉의 소재를 물었다. 촌 할머니 한 분이 저쪽에 있는 산모퉁이를 가리킨다. 과연 그쪽에 조그만 구릉(丘陵)이 우거진 잡초 사이로 바라보인다. 그 곁에 한 자쯤 되는 비석이 하나 서 있고 거기에는 고려 시조 현릉(顯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 앞의 석상(石牀) 밑에는 풀들이 이리저리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치성 드린 흔적이 있었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왼쪽)와 1980년대 촬영된 태조 현릉 전경. 원래 봉분의 직경은 11.56m, 높이 6.25m였지만 현재는 직경이 19m, 높이 8m로 커졌고, 고려 왕릉의 양식에 맞게 3단으로 분리해 석수와 망주석, 문인상, 무인상을 모두 새로 배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이 기행문을 통해 조선 성종 때 2명의 능지기가 있었고, 세시(歲時, 명절)와 복납(伏臘, 삼복 날과 섣달그믐)에는 짐승을 잡고 술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관리가 썩 잘 된 것은 아니었다. 현릉은 또한 1906년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파괴되었다가 1954년에 복구됐다. 1910년대 일제가 찍은 사진이나 전쟁 후 복구된 현릉은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의 왕건릉은 1992년 발굴조사 후 공민왕릉의 조각수법 등을 본 따 새로 조성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6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원형 난간석, 장명등, 문인석 등의 석물들이 삼문 왼쪽에 전시해 놓은 것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서울=뉴시스] 태조 왕건의 현릉의 원형 봉분의 직경은 11.56m, 높이 6.25m였지만 1994년 개건 후 직경이 19m, 높이 8m로 커졌다. 또한 고려 왕릉 양식에 맞게 3단으로 분리해 석수와 망주석, 문인상, 무인상을 모두 새로 배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에 있던 석물들. 1994년 북한은 태조 현릉을 고쳐서 세우면서 원래 무덤의 병풍석은 묘실 안으로 옮겼고, 무덤 주위에 있던 장명등, 석수, 석인상 등은 묘역 한쪽에 모아 놓았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 왕건, 미완의 민족통합 최종 해결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877년 송악군의 사찬인 왕융(王融)의 아들로 태어나 한반도 중부지역을 석권한 궁예(弓裔)의 부하가 되어 서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경상남도까지 공략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나 궁예의 폭정과 위협에 반기를 들어 휘하 장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다음 해인 919년에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가 있는 지금의 개성인 송악으로 옮겼으며 궁성을 송악산 아래에 정했다.

[서울=뉴시스] 고려 태조 현릉에 있는 석물. 1994년 북한은 태조 현릉을 고쳐서 세우면서 원래 무덤의 병풍석은 묘실 안으로 옮겼고, 무덤 주위에 있던 장명등, 석수, 석인상 등은 묘역 한쪽에 모아 놓았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 photo@newsis.com



이후 왕건은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935년에는 신라를 흡수하였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 시켜 ‘삼한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936년 거란에게 멸망하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10만에 달하는 발해의 유민을 포용하여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로 불렸던 미완의 민족통합을 최종적으로 해결하였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고려에는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할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고려의 영역으로 통일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서울=뉴시스] 태조 현릉을 찾은 북한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18.photo@newsis.com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룬 후 7년을 더 살다가 사망하였다(943년). 후대에 벌어진 거란과의 전쟁에서 개경이 점령되면서 국초의 기록이 상당수 사라져, 통일 후 7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왕건은 즉위 이후부터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후대의 왕들을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통치의 주요 방향을 제시했다. 왕건이 내린 여러 가르침은 ‘태조의 유훈(遺訓)’으로 고려 왕조 내내 존중되었다.

북한은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해 높이 평가하고 있고, 왕건릉을 역사 교양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왕건릉을 찾는 개성 시민들의 달라진 모습이다. 이곳을 찾은 많은 방문객이 해설 강사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북한 전역에 600만대 이상의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풍속도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고려 역대 왕 계보도>

[서울=뉴시스]

 

 

등록 2020.01.25 06:00:00수정 2020.02.24 11: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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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왜란, 호란 겪으며 무덤 위치 소실

일본 강점기에 엉뚱한 무덤을 혜종릉으로 비정

지난해 ‘화곡릉’ 발굴해 혜종의 순릉으로 확정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4회. 두 이복동생에게 밀려 단명한 고려 2대 혜종의 무덤 순릉(順陵)


순릉(順陵)은 고려 2대 군주인 혜종((惠宗·914∼945)과 의화왕후의 합장묘다. 고려사(高麗史) 945년(혜종 2년) 음력 9월 15일자 기록에는 “(혜종이) 9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자 송악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순릉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에 혜종의 왕비였던 의화왕후가 승하하자 순릉에 합장됐다.

[서울=뉴시스] 혜종의 순릉(順陵)에서 바라다 본 제당(정자각)터와 송도저수지. 멀리 송악산 줄기가 보인다. 북한은 2019년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화곡릉’을 발굴한 후 이 무덤이 고려 2대 혜종의 순릉이라고 확정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문제는 순릉이 있는 송악산 동쪽 기슭이 어디냐 하는 점이다. 조선 성종 때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탄현문(炭峴門) 밖 경덕사(景德寺) 북쪽”에 순릉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선조 때 기록에 따르면 이 때까지만해도 혜종의 능은 탄현문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다만 고려 태조의 능에만 비석이 있어서 정확히 알 수 있었고, 나머지 고려 왕릉은 비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다수 고려 왕릉은 무덤 주인을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으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소실된 혜종 무덤 찾기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고종(高宗)은 고려 왕릉의 여러 능침(陵寢)을 보수하고 정비해 75기에 대해 ‘고려 왕릉(高麗王陵)’이라고 쓴 표석을 세웠다. 이때 혜종의 순릉(順陵)은 송악산 동쪽 자락의 남안화사화사 근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1916년(대정 5년) 일제는 2대 혜종(惠宗)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남겼다.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석(欄干石)의 잔석(殘石)이 남아있으며, 다른 석물(石物)은 없다. 능 앞에 정자각(丁字閣)의 초석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조사보고에서 ‘전 혜종 순릉(傳 惠宗 順陵)’으로 표기하여 이 무덤이 순릉이라고 확정하지 않았다. 일제가 추정한 순릉은 일본강점기 때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자하동이다. 이곳은 고려 도성(개성성)의 안쪽에 있다. 고려 왕릉이 모두 개성성 밖에 있다는 것과 배치된다.

[서울=뉴시스] 1916년 일제가 발굴한 ‘전(傳) 혜종 순릉’의 전경.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상 경기도 송도면 자하동에 있던 이 무덤은 고려 도성 안에 있어 혜종릉이 아니라는 반론이 계속 제기됐고, 1957년 북한은 이 능을 발굴한 후  ‘무덤칸이 없다’는 점을 들어 왕릉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북한은 1957년 이 능을 다시 발굴 조사했다. 그리고  ‘무덤 칸(묘실)도 없는 거짓 무덤’으로 발표했다. 고려 왕릉이라면 당연히 돌로 조성된 묘실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이후 북한 고고학계는 개성시 룡흥동(일본강점기 때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송도 저수지 북쪽에 있는 화곡릉을 혜종의 무덤으로 지목했다. 이 능은 그때까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옛 지명인 화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화곡릉’으로 불려왔다.

화곡릉은 개성시 룡흥동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송도 저수지 북쪽 기슭의 나지막한 산 능선 중턱에 있다. 능의 서쪽에는 고려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동구릉과 냉정동무덤군을 비롯한 많은 유적이 있고, 서남쪽에는 개성성 외성의 동북쪽문터인 탄현문터가 있다. 고려 궁궐(만월대)로부터 동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위치다. 일부 학자는 ‘화곡릉’의 서쪽에 있는 ‘동구릉’이 혜종릉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 일제가 촬영한 화곡릉의 모습. 이 능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옛 지명인 화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화곡릉’으로 불려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종 때 세운 비석이 훼손되지 않고 정면에 서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1997년 북한 고고학계는 ‘동구릉’을 발굴했지만 타다 만 자기 조각들과 판 못 몇 개만 찾아냈을 뿐 무덤의 주인을 확정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19년 북한은 내각 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도로 화곡릉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발굴 당시 화곡릉은 봉분만 남아 있고, 대부분의 석물은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북한은 발굴 과정에서 ‘高麗王陵’(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 모양의 치미(지붕 용마루의 두 끝에 설치하는 조각 장식)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을 찾아냈다. ‘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은 조선 시대 고종 때 세운 것으로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한 것이다.

발굴 후 북한은 “무덤의 형식과 위치, 유물, 역사 기록자료들을 심의·분석한 결과 오랜 세월 비밀로만 전해오던 화곡릉의 주인이 고려 2 대왕 혜종의 무덤인 순릉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라고 발표했다.

[서울=뉴시스] 2019년 북한이 발굴을 끝내고 공개한 고려 2대 혜종의 무덤 순릉(順陵) 전경. 3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고려왕릉의 배치구조가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선 고종 4년에 세운 ‘고려왕릉’이라 세긴 비석(왼쪽). 그 동안 두 토막으로 갈라져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굴해 세워놓았다.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 혜종 순릉 서쪽에 세워 놓은 문인상(오른쪽). 마모가 심하게 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고려 왕릉 중 가장 작은 규모라는 통설 뒤집어

북한 고고학계가 화곡릉 발굴 후 혜종의 순릉으로 확정한 결정적 단서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사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가지가 판단의 주요 근거인 듯하다.

하나는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 가운데 무덤 칸의 규모가 가장 크고, 무덤 칸이 반지하에 만들어진 외칸의 돌 칸 흙무덤으로 전형적인 고구려의 무덤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용 모양의 치미가 고려왕궁터인 만월대에서 발견된 것과 같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거에 기초해 이 무덤이 고려 건국 초기의 왕릉이라고 확정하고, 문헌상 ‘송악산 동쪽’에 묻힌 고려 초기 왕인 혜종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발굴 결과 순릉은 남북 63.6m, 동서 20m 범위 안에 총 3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위 구획에는 직경 13m, 높이 3m 규모의 봉분과 비석 받침돌이 있었고, 중간 구획에서는 좌우에 각각 1개의 문관상(文官像)이 땅속에서 발견됐다. 아래 구획에는 제를 지내던 정자각 터가 확인됐고, 많은 주춧돌이 발견됐다.

봉분 주위에서는 난간석들이 일부 발굴됐고, 무덤 구역 전체에 돌담(曲墻)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순릉은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배치구조를 하고 있다. 다만 다른 고려 왕릉과 달리 12지신을 새긴 병풍석이 없고,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진 화강석을 둘러놓은 원형의 기단이 확인됐다.

무덤 칸(묘실)은 크기가 길이 4m, 너비 3.4m, 높이 2.2m로, 묘실 안 중앙에 합장된 왕과 왕비의 관대가 마련돼 있고, 그 옆에 부장대가 있다. 사진상으로는 벽화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서울=뉴시스] 고려 혜종의 무덤인 순릉 내부 무덤 칸(묘실) 전경. 혜종과 왕비 의화왕후가 합장되어 안장돼 있었다. 북한 학계는 순릉의 내부를 조사한 후 “무덤 칸(묘실) 규모가 길이 4미터, 너비 3.4미터, 높이 2.2미터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 왕릉들 가운데서 제일 크다”고 평가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순릉에서는 남쪽으로 송도 저수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멀리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오관산 영통사가, 동남쪽에는 조선 시대 명기(名妓) 황진이가 사모했다는 유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년~ 1546년)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서울=뉴시스] 조선시대 명기(名妓) 황진이가 사모했다는 유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년~ 1546년)의 묘. 고려 2대 혜종의 순릉과 송도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위치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25. photo@newsis.com


- 재위 2년만에 요절, 단명한 혜종

혜종은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지역의 호족이었던 다련군(多憐君)의 딸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두 사람은 왕건이 아직 궁예(弓裔) 휘하의 장수로 활약하던 때에 만나 인연을 맺었고, 912년에 아들 왕무(王武)를 낳았다. 여러 호족과 ‘정략결혼’을 통해 통합을 모색한 태조 왕건에는 20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사후에 왕자 간 권력투쟁을 우려한 태조는 이른 시기에 장자를 후계자로 책봉했다.

[서울=뉴시스] 2019년 북한이 발굴을 끝내고 공개한 고려 2대 혜종 순릉(順陵)의 봉분 정면 모습. 그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고종시대에 세운 비석을 찾아내 다시 세워놓았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1.25.photo@newsis.com


“혜종이 태어나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태조가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미약한 가문 출신이어서 옹립 못할까 우려한 나머지(其母吳氏側微恐不得立),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 黃袍)를 담아서 오씨에게 내려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박술희가 태조의 의도를 짐작하고서 혜종을 세워 정윤(正胤)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으니, 정윤은 바로 태자이다.” (『고려사』 권92열전5전5, 박술희)

혜종은 태조를 도와 후삼국의 통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재위 기간 기호족 세력에 억눌려 왕권이 크게 약화됐다. 특히 왕규(王規)시해 음모와, 지방 호족 세력 및 이복형제들의 도전을 제압할 만한 독자세력 기반이 없어 항상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죽었다.

고려사에는 “혜종은 민(民)에게 공덕(功德)”이 있었다고 기록했으나 아주 적은 양만 남아 있는 고려 초기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혜종에게 어떤 공덕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기록에 담긴 그의 삶은 왕위 계승 분쟁에 시달리다가 요절한 비운의 군주일 뿐이다. 혜종의 이복동생인 광종 때 외아들이 정치적 사건과 연루되어 처형됐다는 기록이 보여주듯, 혜종은 당시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평온하게 일생을 마치지는 못한 듯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등록 2020.02.01 06:00:00수정 2020.02.24 11: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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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전혀 관리되지 않아

옥수수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방치

잘 보존된 조선 왕릉과 비교돼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5회. 서경(西京) 천도 시도하다 좌절한 정종의 무덤 안릉(安陵)

 


혜종이 945년 사망하자 그해 9월에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인 왕요(王堯)가 왕위에 올랐다. 고려 3대 임금 정종(定宗)이다. 그러나 그는 949년 재위 4년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종은 동생 왕소(王昭)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제석원(帝釋院)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자신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왕식렴(王式廉, 태조의 사촌 동생)이 사망한 직후의 일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두 사건을 연결해 정종의 사망에기록되지 않은 흑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정종은 고려 도성의 남쪽에 안장됐다. 현재의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이다. 능호는 안릉(安陵)이다. 후에 첫 번째 왕비인 문공왕후가 부묘(廟)됐다. 안릉동이라는 이 곳 지명은 안릉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면 20대 신종의 무덤인 양릉(陽陵)이 있다.

[서울=뉴시스] 서쪽에서 본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에 있는 정종의 안릉(安陵) 전경. 능 위쪽까지 옥수수밭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정종의 안릉(왼쪽)과 현재 안릉의 모습. 조선 후기에 세운 왕릉 표식비가 없어진 것이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북한은 안릉을 보존유적 552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지만 1910년 안릉 사진과 비교해 보면 묘역 주변의 나무들이 거의 다 베어졌고, 바로 옆까지 옥수수밭으로 개간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후기에 세운 왕릉 비석(위 왼쪽 사진의 맨 오른쪽에 있는 비석)도 사라졌다. 다만 1995년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봉분을 세우고, 두리뭉실하게 병풍석을 둘러쳤다. 이 때문에 원래 있던 12각 병풍석의 원모습을 알 수 없게 됐다.

안릉의 묘역은 3단으로 직선거리는 31.5m이다. 1단은 한 변의 길이가 20m인 정방형이며, 거기에 봉분과 병풍석시설, 난간 부분, 돌짐승조각상(돌사자) 등이 모여 있다. 2단은 1단보다 높이가 30m 낮으며 크기도 길이 17m, 너비 6.5m로 1단에 비해 좁다.   

3단은 길이 17m, 너비 5m이며 2단보다 20m 낮다. 오랜 세월 자연적인 피해와 인위적인 파괴로 1단과 2단만 석축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고, 정자각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최근 사진을 비교하면 조선 후기에 세운 왕릉 표식비가 없어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서울=뉴시스]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에 있는 정종의 안릉 뒤쪽 전경. 안릉 주변이 옥수수밭으로 변해 있고, 언덕 너머로 고남협동농장의 살림집들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황해북도 개풍군 고남리 용수산 남쪽에 있는 정종의 안릉의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도굴되고 훼손된 무덤 칸

1978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무덤 칸(묘실)을 발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덤 칸은 완전히 지하에 있고, 봉분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무덤 칸의 크기는 남북 길이 347cm, 동서길이 343cm, 높이 240cm이다.

무덤 칸의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동, 서, 북쪽의 세 벽은 돌로 쌓고 회미장(석고로 벽을 마감)을 했으며 남벽에는 문틀을 겸하는 2개의 큰 판 돌을 세웠다. 천장은 한 단의 평행 고임 위에 3장의 판 돌을 동서로 올려 놓았다.

무덤 칸의 중심에는 큰 화강암을 잘 다듬어 만든 관대가 놓였다. 그 위에서 정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 조각이 일부 발견됐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고려자기와 금동자물쇠, 은 장식품, 청동 제품, 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청자꽃모양 바리와 청자 잔대는 고려청자 초기작품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여러 차례 도굴을 당해 중요 유물은 없었지만 무덤 칸 바닥에서 금은 부스러기 등이 나왔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고구려 벽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는 무덤 칸의 벽화다.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동쪽 벽의 풍경화와 남쪽 벽의 건물 그림, 천장의 별 그림이다. 동쪽 벽에는 푸른 왕대와 꽃나무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고, 천장의 별 그림은 붉은색으로 둥글게 그렸다.

별과 별 사이는 굵은 선으로 연결해 별자리를 표시하였다. 원래 28수의 별자리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여섯 개의 별뿐이라고 한다. 이런 별 그림은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아쉽게도 무덤 칸 내부 사진을 입수하지 못했다.

[서울=뉴시스] 고려 3대 정종의 안릉 앞에 남아 있는 석물들. 난간 석주와 동자 석주, 석수 등이 원래 자리에서 봉분 주변으로 옮겨져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3대 정종의 안릉 앞에 남아 있는 사자상의 석수(오른쪽)와 봉분 주변의 난간 석주, 조선 후기에 세운 표식비 받침돌. 1910년대까지 왕릉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 비는 없어졌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이 고려 3대 정종의 안릉 앞에 세운 표식비. 현재 보존유적 552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서경 천도 시도하다 단명(短命)

 「시무 28조」를 고려 성종에게 바쳐 정치 개혁을 이룩한 최승로(崔承老)의 회고에 따르면, 정종은 즉위 초반에 밤낮으로 좋은 정치를 위해 노력하여 밤에 촛불을 켜고 신하들을 부르기도 하고, 식사 시간을 미루어가며 정무를 처리했다. 정종이란 묘호(廟號)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고려 3대 정종은 조선의 2대 왕으로 같은 묘호를 받은 정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이 약하고, 친동생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는 상황에서 여러 측면에서 닮은 꼴 행보를 보였다.

우선 두 왕은 모두 왕권 강화를 위해 천도(遷都)를 시도했다. 고려 정종은 개경의 왕족과 호족을 견제하고, 불안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지 세력인 왕식렴의 근거지인 서경(평양)으로 천도하려 했다. 이에 관해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정종이 도참(圖讖)을 믿어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다고만 서술했다. 정종의 서경 천도 준비는 많은 노역 수요를 발생시키고 개경 주민을 서경으로 이주시켜야 하는 등의 부담 때문에 반대가 컸고, 결국 정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서경 천도는 중단됐다. 조선 정종도 왕권 강화를 위해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으로 천도했으나 사망 후 다시 한양으로 도읍지가 옮겨졌다.

또한 두 왕은 모두 재위 중에 동생에게 양위(讓位)했다. 고려 정종은 재위 4년만에 동생 왕소에게, 조선 정종은 재위 2년만에 동생 이방원(李芳遠)에게 왕위를 넘긴 것이다.

두 왕은 묘호가 같아서인지 능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현재 조선왕릉 중 2개의 능이 휴전선 이북에 존재한다. 하나가 정종의 무덤인 후릉(厚陵)이고, 다른 하나가 태조 이성계의 정비이자 정종의 모친인 신의황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이다.

두 왕릉 모두 고려 정종의 무덤인 안릉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이들 두 왕릉은 고려 정종의 퇴락한 안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서울=뉴시스] 드론으로 촬영한 조선 2대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의 무덤인 후릉 전경.  후릉은 고려 정종의 무덤인 안릉의 남쪽 황해남도 개풍군 백마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고, 정자각은 사라졌지만 혼유석, 장명등, 석수 등이 거의 원형 형태로 보존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사진9> 고려 정종의 무덤인 안릉의 남쪽 백마산 능선에 자리 잡은 신의황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 전경. 정자각을 비롯해 조선 시대 왕릉의 요소들이 모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1. photo@newsis.com


실권이 거의 없어 ‘허수아비 왕’이라고 불린 조선 정종과 달리 고려 정종은 훗날 최승로로부터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왕권강화책으로 천도를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단명하게 된 화근이 됐다. 명분과 취지가 훌륭해도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인 모양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등록 2020.02.08 06:00:00수정 2020.02.24 11: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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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6회. 왕권 강화에 성공한 광종이 묻힌 헌릉(憲陵)

개성 시내를 빠져나와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10km쯤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2km 정도 더 가면 왼쪽으로 낮은 산줄기가 나온다. 이곳에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삼거리동이다. 광종은 925년(태조 8)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나 949년 왕위에 오르고, 975년 재위 26년만에 51세로 죽어 송악산 북쪽 기슭에 묻혔다. 고려 3대 정종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왕소(王昭)이고, 능 호는 헌릉(憲陵)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태조는 도성 서쪽에, 혜종은 동쪽에, 정종은 남쪽에, 광종은 북쪽에 안장된 것이다.

헌릉에서 포장길을 따라 동북쪽으로 13km 정도 가면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박연폭포가 나오고, 박연폭포 남쪽에 광종 21년(970년)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한 관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북쪽 사람들도 박연폭포나 관음사를 찾지 가까운 곳에 헌릉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2007년부터 개성관광이 시작됐을 때도 박연폭포와 관음사만 관광코스에 포함됐지 헌릉은 관심 대상도 아니었다.

 
최근 촬영된 헌릉의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헌릉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없고, 오랜 기간 방치돼 왕릉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고려 31대 공민왕 때까지만 해도 왕이 광종의 헌릉에 배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서울=뉴시스] 개성직할시 삼거리동 소재지에서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에 있는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 전경. 왕릉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초라한 상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반면 박연폭포는 여전히 즐겨 찾는 명소로 남아 있다. 개성 시내에서 직선거리로 16km 떨어진 천마산 기슭에 있는 박연폭포(높이 37m)는 금강산 비룡폭포(높이 50m), 설악산 대승폭포(높이 88m)와 함께 국내 3대 명폭의 하나다. 폭포 위쪽에 지름 8m의 박연(朴淵)이 있고, 아래쪽에 지름 40m쯤의 고모담이 있다. 박(朴) 씨 성을 가진 진사가 연못 가운데 바위에서 피리를 불자, 물속에 살던 용왕의 딸이 반해 용궁으로 데려가 함께 살았다 하여 박연이란 이름이 붙었다.

예로부터 박연폭포의 절경, 유학자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기품과 절개, 황진이의 절색을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했다. 30년 면벽을 하던 지족암의 선사를 파계시킨 절색 황진이도,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서경덕도 이 폭포를 자주 찾아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폭포 아래 고모담(姑母潭)에는 ‘용바위’라 불리는 바위 하나가 솟아 있다.

용바위에는 숱한 한자 이름과 시구들이 새겨져 있는데 크고 유려한 초서체로 중국 이백(李白)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 중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나는 듯 흘러내려 삼천 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구나)’이란 두 구절이 새겨져 있다.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폭포에서 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관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찰은 고려 광종 때(970년) 처음 세워진 뒤 조선 인조 때 복원된 절로 경내에는 대웅전, 승방, 7층 석탑, 관음굴이 남아 있다.

[서울=뉴시스]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에서 동북쪽으로 1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박연폭포의 전경. 폭포 위가 박연(朴淵)이고, 아래가 고모담(姑母潭)이다. 고마담 왼쪽에 있는 것이 용바위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에서 동북쪽으로 1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박연폭포 아래 고모담(姑母潭)에 솟아 있는 용바위 전경. 가장 오른쪽에 초서체로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이라고 쓴 글귀가 보인다.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4대 광종(光宗) 때 창건 된 관음사의 대웅전(오른쪽)과 7층석탑. 대웅전은 국보유적 12호로, 7층석탑은 보존유적 540호로 지정돼 있다. 7층석탑 뒤로 보이는 것이 관음굴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일본 강점기 때까지 남아 있던 능비와 석수는 어디로?

광종 때 처음 세워진 관음사가 여러 차례 중건돼 잘 보존된 것에 비하면 헌릉의 관리상태는 대단히 안타깝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 봐도 능비뿐만 아니라 많은 석축이 사라지고, 능 구역이 협소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과 2017년에 촬영된 헌릉의 정면 모습. 봉분의 병풍석과 석축의 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과 2017년에 촬영된 헌릉의 정면 모습. 봉분의 병풍석과 석축의 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191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능 구역은 3단면으로 이루어져 그 좌 ·우 ·후방의 3면에 돌담장(곡장)을 둘렀던 흔적이 있다. 1단은 1.65m 높이의 토류석벽(土留石壁)으로 2단과 구별했고,  여기에 능과 돌난간, 돌짐승(石獸)이 남아 있었다. 높이 70cm의 12각형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이 밖에 망주석과 석상(石床)이 남아 있었다.

2단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석인(石人) 한 쌍이 좌우에 있고, 3단면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능비가 있었다. 정자각은 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원래 위치를 알려준다.

그러나 2017년에 촬영된 헌릉 사진을 보면 묘역 주변의 울창했던 산림은 훼손됐고, 돌담장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2단 양쪽에 설치돼 있던 너비 1.8m의 계단도 완전히 없어졌고, 묘비도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의 보고서에 보면 4구의 석수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진 듯하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4대 광종(光宗)의 헌릉(憲陵)과 2017년에 촬영된 헌릉의 정면 모습. 봉분의 병풍석과 석축의 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봉분은 높이가 1.36m, 직경은 6.4m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개성직할시에서도 외진 곳이라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은 광종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과거 학계에서는 헌릉의 석물들이 훼손된 데 비해 축대나 초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능 구역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지만, 최근 입수된 사진으로 보면 1단과 2단 사이의 축댓돌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정자각 터에 있던 돌들을 모아 보수해 놓았다. 원형이 사라진 것이다.

[서울=뉴시스] 위에서 바라 본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 전경. 석물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몇 개의 난간석만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평가 엇갈리는 광종의 개혁정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외척 세력이 개입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왕권이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개혁 정치를 펼쳐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광종은 개혁 과정에서 자신의 정책 반대하는 외척 세력과 공신, 호족 세력들을 과감히 숙청했다.

이에 고려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은 크게 약화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에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했다.

엄격함과 관대함은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를 겸비한 제왕은 흔치 않다. 광종은 그것을 겸비한 군주였다. 광종이 호족 숙청과 과거제 실시로 정치판과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한 건 채찍과 같은 엄격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외국인 관료를 우대한 건 광종의 관대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광종은 호족 세력에 의지한 정종의 정치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痛感)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 등 중국계 귀화인 관료를 등용 시켜 정치판을 물갈이하려 했다.

고려 성종 때 유학자인 최승로(崔承老)도 광종의 초기 정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광종(光宗)은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접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았으며, 친하고 귀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항상 호강(豪强)한 자를 누르고 소천(疏賤)한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며, 환과(鰥寡) 고독(孤獨)에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해로부터 8년 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며 형벌과 은상(恩賞)이 남발되지 않았습니다.”

[서울=뉴시스]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인 헌릉(憲陵)의 정면 모습. 석축은 북한이 정비하면서 새로 쌓은 것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그러나 당시 지배층 여론은 광종의 외국인 관료 우대 정책이나 호족 세력을 약화하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시행에는 초기부터 우호적이지 않았다. 최승로(崔承老)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왕조 건국 당시 공신들은 원래 소유한 노비에다 전쟁에서 얻은 포로 노비와 거래를 통해 얻은 매매 노비를 갖고 있었다. 태조는 포로 노비를 해방하려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긴 지 약 60년이 되었다. 광종이 처음으로 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자, 공신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다. 대목왕후(大穆王后·광종비)가 광종에게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듣지 않았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노비는 호족들에 토지와 함께 당시 중요한 재산의 일부였다. 그런데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노비는 해방하거나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족의 군사·경제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였다.

광종이 겨냥한 숙청의 주된 표적은 당시 최대 군벌인 서경의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이 960년(광종11)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이름을 고쳐 정종의 서경 우대정책을 버리고 개경 중심의 정치를 천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이 지속하면서 수많은 호족이 목숨을 잃었다. 최승로는 광종이 “만년에 이르러서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라며 “어찌하여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도 뒤에 잘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은 2014년 헌릉 앞으로 보이는 오관산 영통사와 박연폭포 사이를 잇는 관광 도로를 확장해 개통했다. 이제는 개성관광이 재개되더라도 헌릉 앞길을 지나 박연폭포로 가지 않고, 영통사를 관광하고 바로 산길로 박연폭포로 도달할 수 있게 됐다. 헌릉이 더 쇠락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서울=뉴시스] 대흥산성 남문 앞을 지나는 영통사와 박연폭포를 잇는 관광도로. 북한이 2014년 새로 확장한 도로로, 앞으로 개성관광이 재개되면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대흥산성은 천마산 능선에 쌓은 10.1km의 산성으로, 박연폭포는 대흥산성 북문 근처에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08. photo@newsis.com


 

[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⑦사촌사이 5대 경종·6대 성종 능도 인접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등록 2020.02.15 06:00:00수정 2020.02.24 11: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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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공단의 서쪽 산기슭에 잠든 고려 5대 경종(景宗)

논밭으로 변한 고려 6대 성종의 무덤 강릉(康陵)

사촌이 조카에게 선위(禪位)하며 근접지에 나란히 묻혀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7회 – 부자간 선위(禪位) 못한 고려 6대 경종의 영릉(榮陵)과 6대 성종의 강릉(康陵)

2003년 2월 23일 11시쯤, 개성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는 사천강과 평양-개성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버스가 도착했다. 판문까지는 4km가 채 안 되는 곳이다. 서쪽으로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진봉산(310m)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 이 산에서 봉황이 살다가 날아갔다는 전설에서 전해온다. 개성공단 착공식을 앞두고 진봉산 앞 도로에는 부지공사를 위해  트럭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1년 뒤 이곳에 개성공단 시범단지 2만8000평 부지가 조성된다.

진봉산은 산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진봉산은 휴전선 남쪽 도라산전망대에서도 잘 보인다. 진봉산과 현재 개성공단 사이에 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서쪽)으로 진봉산을 관통하는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고개를 넘기 전 북쪽 중턱에 고려 5대 경종(景宗)의 무덤인 영릉(榮陵)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넘으면 서쪽으로 얕은 구릉 너머에 고려 6대 성종(成宗)의 강릉(康陵)이 있다.

[서울=뉴시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측면 모습. 오른쪽으로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이 자리 잡고 있는 진봉산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판문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판문까지 4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판문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진봉산의 북쪽 봉우리가 보인다. 2003년 2월 당시 개성공단 착공식을 앞두고 부지공사가 한창이어서 도로를 오가는 트럭들이 많이 보였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photo@newsis.com


영릉과 강릉이 아주 가깝거나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기 있지 않았을까?

경종과 성종은 사촌 사이다. 고려 4대 임금 광종의 아들 경종(975~981)에게는 네 명의 왕비가 있었다. 경종이 27살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 유일한 왕자는 제3 비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가 낳은 왕송(王誦)뿐이었다. 2살 된 아들이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은 ‘도학군자(道學君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 동생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에게 왕위를 넘겼다. 당시 왕족들의 지지를 받은 왕치가 왕위에 오르니 고려 6대 성종이다. 헌애왕후는 성종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성종은 조카 왕송을 개령군(開寧君)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고, 후에 왕위를 그에게 넘겼다. 왕이 된 왕송(목종)이 아버지 경종의 무덤 가까이에 성종을 안장한 것은 숙부의 보살핌에 대한 보은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영릉은 경종(景宗)과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金氏)의 합장묘다. 원래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읍에 속했지만 200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는 개성직할시 진봉리로 변경됐다.

1980년대 초 북한의 발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릉의 묘실(墓室)은 반지하에 설치되었고 화강암 판 돌로 축조됐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도굴로 출토유물은 청자 조각 몇 점밖에 없다고 한다.

능 구역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1단에는 12각형의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된 봉분(封墳)과 난간석(欄干石), 석수 4기(사진상으로는 3개가 확인)가 있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난간석은 기둥만 남아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좌우로 마주 보고 있었고, 3단에는 정자각터(丁字閣址)가 남아있었다.

1995년 북한은 영릉의 병풍석을 정비하고, 봉분을 다시 쌓았다. 1963년 첫 조사 당시 봉분의 높이는 1.38m, 직경은 5.19m였으나, 정비 후에는 봉분의 높이가 2.3m, 직경이 8.6m로 커졌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2000년대에 촬영된 영릉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능 앞에 조선 후기에 세운 표지석이 사라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 확인된다. 근처에 마을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 전경. 이때까지는 조선 후기에 세운 표지석이 남아 있는 게 확인된다.  (사진=국립박물관 제공) 2020.02.15. photo@newsis.com


고려 5대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한 광종(光宗)의 숙청 광풍 속에서 살아남아 즉위했다. <고려사>에는  “경종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광종의 부인 대목왕후)의 손에 자랐다.

따라서 궁문밖의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 광종의 말년에 겨우 죽음을 면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경종은 막강한 친서경(西京) 세력을 등에 업은 어머니 대목왕후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보전했지만 영특한 군왕의 자질은 없었던 것 같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과 벌을 주는 것이 고르지 않은 것이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향락, 바둑과 장기에 빠졌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뿐이었다. 군자의 말은 외면하고 소인의 말만 들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니 충신 의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닌가?”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981년(경종 6년) 경종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왕위를 사촌 동생 성종에게 넘겼다. 성종(960~997년, 981~997년 재위)은 태조 왕건의 아들 왕욱(王旭)과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의 국가체제 정비한 성종


『고려사』는 경종과 달리 성종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의리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 (『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에게도 성종(1469~1494년)이라는 묘호가 부여됐다.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된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 달리 그는 다른 성향의 정치 세력을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28가지 조항으로 된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진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었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또한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최승로 중심의 유학자 집단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 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 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 세력을 약화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우리에게는 성종보다 성종 대의 외교가이자 문신으로 유명한 서희(徐熙)가 더 익숙하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서희는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서희는 이에 극력 반대하고, 자진해서 국서를 들고 가 거란의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을 반박하며,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해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고려는 994년 거란으로부터 점유를 인정받은 압록강 동쪽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에 ‘강동 육주’를 설치했다. 이로써, 고려는 서북면의 군사·교통상의 요지인 ‘강동육주’를 통해 대륙 세력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건국 초기의 혼란을 딛고 국가체제를 정비한 성종은 997년(성종 16) 10월에 38세의 나이로 승하해 도성 남쪽(南郊)에서 장례를 지냈다. 능 호는 강릉(康陵)이고,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劉氏)가 함께 묻혔다.

고려사에는 성종 16년 9월(음력) 흥례부(興禮府 : 지금의 울산광역시)로 성종이 직접 가 태화루(太和樓)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고, 그 후에 “왕의 몸이 편찮았다”란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10월에 “왕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을 불러 친히 유언을 내려 왕위를 전한 후 내천왕사(內天王寺)로 거처를 옮겼다.

평장사(平章事)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자고 했으나, 왕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무엇하러 죄지은 자들을 풀어주면서까지 억지로 목숨을 연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무엇으로써 새 왕의 은혜를 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강릉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개성시 진봉리(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으로는 개성군 청교면 배야리 강릉동)에 있으며, 고려 궁궐(만원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능 구역은 원래 넓었지만, 협동농장이 들어서고 주변이 개간되면서 많이 축소됐다.

[서울=뉴시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보존유적 제567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photo@newsis.com


1916년 조선총독부의 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능 구역에는 “돌담과 기타 열석(列石)이 있으며, 능 앞은 평평한 풀밭이고 정자각지(丁字閣址)가 없다. 능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높이는 12척, 직경은 42척으로 비교적 크다. 병석(屛石)은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봉토도 유락(遺落)되었으며, 난간석(欄干石)의 일부가 남아 있고 석수(石獸)는 모두 넘어져 있었다. 그밖에 석양(石羊) 1구가 능 앞에 있고, 또한 석인(石人) 1구가 얼굴 부분이 결실된 채 넘어져 있다”고 했다. 능 앞에는 조선 후기 때 세운  ‘고려 성종’이라고 쓴 표지석이 있었다.

지난해 촬영한 강릉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존유적 567호로 지정돼 관리되는 강릉 주변은 ‘평평한 풀밭’이 밭으로 변했고, 석물들이 원래 자리를 잃은 채 모여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고려 왕릉의 표지석이 사라진 것과 달리 ‘고려 성종’이라고 쓴 표지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 

[서울=뉴시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정면 모습. 오랜 세월 봉분의 흙이 흘러내려 방풍석과 난간석이 묻혔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앞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 ‘고려 성종’이라고 쓴 것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photo@newsis.com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등록 2020.02.22 06:00:00수정 2020.02.24 11: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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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릉에서 북쪽 1.2km에 있는 3개의 왕릉

선릉은 가장 북쪽에 있는 능으로 추정

목종(穆宗)의 의릉(義陵)은 소실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8회 ‘사생아’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의 선릉(宣陵)

송악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온 작은 봉우리가 만수산(萬壽山)이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등장하는 산이다.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세를 규합하며 정몽주에게 ‘하여가’를 통해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다. 조선 건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가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 역시나 익히 알려진 ‘단심가(丹心歌)’로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을 확인한 이방원은 수하를 시켜 선죽교에서 그를 죽였다.

만수산은 ‘고려의 북망산’으로 불린다. 태조 왕건의 현릉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 가장 많은 왕릉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고려 왕릉 외에도 고려의 귀족과 조선시대 고위 관료들의 묘가 만수산 주변에서 확인된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해선리다.

왕건릉 서쪽에서 북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낮은 언덕을 넘어 가면 ‘칠릉골’이 나온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7개의 고려 왕릉(칠릉군 또는 칠릉떼라고 부름)이 자리 잡고 있어 붙은 지명이다. 7개의 고려왕릉은 2013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다시 고개 하나를 넘으면 3개의 왕릉이 나타나는데, 선릉군(宣陵群) 혹은 선릉떼라고 부른다. 만수산이 서남으로 뻗기 시작하는 높지 않은 언덕에 남향으로 조성돼 있다. 과거에는 이 마을을 능현동(陵峴洞)이라고 불렀다. 역시 왕릉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선릉군(선릉떼)이라 불리는 3개의 왕릉

3개의 왕릉 중 ‘선릉군 제1릉’은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능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따르면 현종은 1031년(현종 22) 5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여 송악산(松岳山) 서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능호는 선릉(宣陵)이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해선리에 있는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宣陵) 전경. 고려 태조 왕건릉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2. photo@newsis.com


고려 현종의 능으로 추정되는 선릉은 능 앞으로 완만하게 뻗어 내린 산기슭을 다듬어서 장축을 동서로 하는 장방형의 4층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제1단의 중심 부위에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북한의 조사에 따르면 봉분은 먼저 병풍석(屛風石)을 12각으로 축조한 위에 조성했고, 봉분의 높이는 2,25m, 직경은 9m이다.

병풍석의 아래 부분은 매몰되어 있고, 면석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었다. 12지신상은 능묘를 보호하는 기능으로 새겨지며, 대부분 문복을 입고 손에 홀(笏)을 잡고 있는 수수인신(獸首人身, 동물 머리에 사람 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 임금의 능 중에서 선릉을 비롯해 태조의 현릉(顯陵), 경종의 영릉(榮陵), 공민왕의 현릉(玄陵) 등에서 12지신상이 확인된다. 선릉의 12지신상은 현재 대부분은 마멸되어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다. 현재 병풍석의 일부 구간은 1963년 이전에 보수할 때 잡석으로 보충한 것으로 보이며, 북한은 2016년에 다시 대대적으로 능역을 정비했다.
 
봉분 주위에 12각형으로 난간석을 돌렸으나 현재 난간 기둥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몇 개의 석물만 남아 있다. 동서 양 쪽에는 8각 돌기둥 형태로 된 망주석(望柱石) 1쌍이 마주 서 있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1867년(조선 고종 4)에 세운 표석이 서 있었다. 그러나 2016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능비가 사라졌다.
 
2단의 동서 양 켠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마주 보며 서 있는데, 심하게 훼손되었고 인위적으로 파손된 부분도 있다. 높이는 2.12m이고, 너비는 0.36m, 두께는 0.4m 정도이다.

3단에도 2단의 문인석과 일직선상에 문인석 1쌍이 서 있다. 동쪽에 있는 문인석의 높이는 2m 정도다. 1910년대 사진을 보면 문인석 1쌍이 3단이 아닌 4단에 위치해 있어서 3단이 비어 있었고, 1쌍의 문석인이 서로 마주보지 않고 동쪽 문인석이 남향하여 서 있었다. 이밖에도 고려 왕릉의 기본 구조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많았는데, 현재는 원형에 가깝게 새로 조성되어 있다.

아래쪽 4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있는데, 1963년에는 초석 2개와 기와 파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宣陵) 전경. 2단 서쪽의 문인석이 넘어져 있고, 4단 동쪽의 문인석이 정면을 향하는 등 정비된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2.2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조선 건국 후 세종(世宗) 때까지만 해도 현종의 선릉은 수호인이 있어 어느 정도 관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선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의 대부분이 관리가 소홀해졌다. 조선 현종 때의 기록을 보면 “이미 봉토는 다 훼손되었고, 사면석물은 대부분 매몰되어 어느 것이 현종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선릉은 황폐화됐다.

그 후 선릉은 어느 시점에 다시 복원되었고, 조선 순조(純祖)와 고종(高宗) 때 왕릉 표석(表石)을 세우고 산지기를 두어 관리했지만 여러 차례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대한 광무(光武) 9년)에 “고려 현종(顯宗) 선릉(宣陵)의 산지기가 보고하기를, ‘음력 정월 14일 밤에 알지 못할 어떤 놈이 능을 허물었습니다’라고 하기에 즉시 달려가 봉심하니 능이 허물어 진 곳이 3분의 1이나 되고 앞면의 판 곳은 깊이가 3, 4자 가량 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제1릉을 현종의 선릉으로 새로 파악한 것은 조선후기였고, 발굴된 유물로 거의 없기 때문에 제1릉을 선릉이라고 확증하기는 어렵다.

선릉군 제1릉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제2릉이 자리 잡고 있고,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제3릉이 있다. 제2릉과 제3릉은 현재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다. 선릉에 비해 제2릉과 제3릉이 규모 면에서 조금 작은 편이다.

현종의 제1비인 원정왕후(元貞王后)가 1018년(현종 9) 죽은 뒤 화릉(和陵)에 장사지냈는데, 현종의 무덤에 가깝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두 능 중 하나가 화릉일 가능성이 있다.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元成王后, 고려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의 모후), 현종의 제4비인 원혜왕후(元惠王后, 고려 11대 문종의 모후)의 무덤일 수도 있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해선리에 있는 선릉군 제3릉 전경. 무덤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군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 보면 망주석, 문인석 등 대부분의 주요 석물이 사라진 것이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선릉군 제3릉 전경. 무덤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선릉군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 왼쪽 위로 제1릉이 보인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2.2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현종이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한 이유

고려 현종은 1021년(현종 12) 도성 서쪽에 현화사를 창건했다. 현재 현화사는 폐사돼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창건 당시 세운 현화사비(玄化寺碑)가 1988년에 개관한 고려박물관 뒤뜰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51로호 지정된 현화사비에는 현종이 양친인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 연기(緣起, 절을 깃게 된 이유)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비의 뒷면에는 현종이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함을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베풀고, 양친의 명복을 위해서는 매년 7월 15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타불회(彌陀佛會)를 열었다고 기록돼 있다.

[서울=뉴시스] 고려 현종이 1021년(현종 12) 도성 서쪽에 세운 현화사터. 현재는 폐사되어 당간지주(사진 중앙 멀리 보이는 기둥처럼 생긴 것)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창건 당시 세운 현화사비(玄化寺碑)와 7층석탑은 고려박물관 뒤뜰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고려 8대 현종(顯宗)이 1021년(현종 12) 도성 서쪽에 창건한 . 현화사가 폐사되면서 현재는 고려박물관 뒤뜰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51호로 지정된 현화사비에는 현종이 양친인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연기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2. photo@newsis.com


현종이 특별히 양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한 이유는 그의 출생 비밀과 연결돼 있다. 현종은 두 차례 거란의 침입을 수습하고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로 평가된다.

묘호인 현(顯) 자는 “업적이 나라 안, 밖으로 널리 알려졌다”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생아’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역대 한국 왕조 중에 서자 출신 군주는 여럿 나왔으나 부모가 정식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현종은 원찰(原刹)을 세워 사생아인 본인을 낳아 힘들게 살다 죽은 부모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사생아라는 약점만 빼고 부모의 혈통만 따지면 현종의 정통성은 뚜렷했다. 현종의 아버지는 안종(安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郁)이고, 어머니는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였다.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에 사저로 나가 살고 있었는데, 이때 왕욱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왕욱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인 사수현(泗水縣)에 유배됐고,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 이 아이가 바로 왕순(王詢), 즉 훗날의 현종이다.

그가 국왕의 자리에 서게 된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헌정왕후는 당시 국왕이던 성종(成宗)의 친누이였으므로 현종은 성종의 친조카다. 현종은 성종의 배려로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유배지에 있던 왕욱에게 보내져 함께 살았다. 이후 대량원군(大良院君)에 책봉됐고, 왕욱이 사망한 뒤에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종이 사망하고 고려 7대 목종(穆宗)이 즉위한 뒤로 정치적인 견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권력을 쥔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어린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아 숭교사(崇敎寺)에 들여보냈고, 이후 신혈사(神穴寺)로 옮겼다. 천추태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현종을 해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1009년(목종 12)에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30세의 한창 나이였던 목종이 갑자기 병이 들어 위독해지면서 후계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아들이 없던 목종은 측근들과 의논하여 당시 유일하게 남은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고, 신혈사에 있던 왕순을 불러오는 한편, 서북면을 지키고 있던 강조(康兆)를 불러들여 호위를 맡겼다.

그러나 목종의 어미인 천추태후와 정을 통한 김치양(金致陽)이 정권을 잡았다고 오해한 강조는 개경에 도착한 후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즉 현종은 원래 목종의 지명을 받아 정상적으로 후계가 될 수 있었으나, 뜻하지 않은 정변으로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현종은 두 차례 거란을 침입을 막아내고, 군현제 실시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해 100여 년간 지속된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1018년(현종 9)에 시작된 거란과의 전쟁(‘3차 고려-거란 전쟁’)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龜州)에서 결정적으로 승리(귀주대첩)함으로써 현종은 고려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 11세기의 활발한 국제 교류 시대를 여는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한편 폐위된 목종은 강조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되어 ‘개성현 남쪽’에 화장(火葬)됐다. 이때 조성된 목종의 능은 공릉(恭陵)이라고 했으며, 묘호(廟號)는 민종(愍宗)이었다. 이것은 강조의 주도로 이뤄졌고,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1012년(현종 3)에 개성 동쪽으로 이장하고 능호를 의릉(義陵)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목종의 제1비인 선정왕후가 사망하자 의릉에 합장됐다. 조선 세종대까지만 해도 “의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의릉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면 현재 개성 도성의 동북쪽에 있으면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동구릉, 냉정동 무덤군, 소릉군 등의 왕릉급 무덤 중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등록 2020.02.29 06:00:00수정 2020.04.06 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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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리의 인접한 두 왕릉 발굴 큰 성과

부왕(父王)인 현종(顯宗)의 무덤과 근접

북, 숙릉(肅陵)과 주릉(周陵)으로 확증 발표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 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9. 덕종(고려 9대 왕)과 정종(고려 10대 왕)의 무덤인 숙릉(肅陵)과 주릉(周陵)

2016년 북한 고고학계는 개성시 해선리 북쪽에 있는 ‘해선리 1릉’과 ‘해선리 2릉’을 발굴하고, 이 무덤이 각각 고려 9대 덕종(德宗)과 10대 정종(靖宗)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덕종의 능호는 숙릉(肅陵)이고, 정종의 능호는 주릉(周陵)인데,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북쪽 교외(北郊)에 장사지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동안 능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조선 세종(世宗) 1432년(세종 14)에 숙릉과 주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까지만 해도 간수인(묘지기)을 두고 관리가 이뤄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 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능의 위치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 영조(英祖) 때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숙릉과 주릉의 위치가 “개성 북교”로 나와 있지만, 이 기록은 조선 초기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당시 두 능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숙릉과 주릉의 발견은 실로 500여년 만에 이룬 '역사적인 쾌거'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뚜렷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 앞으로 남북학계의 상호 토론과 논증을 통해 확증작업이 더 진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숙릉’과 ‘주릉’이 개성시 해선리 소재에서 북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매봉 남쪽 경사면에 25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나란히 조성돼 있다고 발표했다.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숙릉과 주릉은 평양-개성 고속도로 서쪽으로 가까운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태조 현릉(顯陵)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다. 덕종과 정종의 부왕(父王)인 현종(顯宗)의 선릉(宣陵)에서도 북동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어 선릉 뒤쪽 언덕을 넘으면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2016년 발굴 초기 사진을 보면 봉분이 무너져 내리고, 석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왕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숙릉보다 주릉의 상태가 더욱 퇴락한 모습이었다. 북한학계가 그 동안 ‘해선리 1릉’, ‘해선리 2릉’으로 지칭한 이 무덤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도 이처럼 무덤이 너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은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해선리 1릉’을 발굴한 뒤 고려 9대 덕종(德宗)의 무덤인 숙릉(肅陵)이라고 발표했다. 사진은 발굴 초기 모습으로 봉분이 내려앉는 등 왕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퇴락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은 개성시 해선리에서 ‘해선리 2릉’을 발굴한 뒤 고려 10대 정종(靖宗)의 무덤인 주릉(周陵)이라고 발표했다. 사진은 발굴 초기 모습으로 봉분은 무너져 내리고, 석물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남향으로 보성된 숙릉의 능 구역은 화강석(화강암) 축대들에 의해 각각 3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1단에는 봉분과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돼 있는 상태였다. 2단에는 문관을 형상한 돌조각상(文人像)이 좌우에 2상씩 있었지만 일부는 넘어져 있었다. 3단에서는 정자각(제당)터가 발견됐다.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9대 덕종(德宗)의 무덤인 숙릉(肅陵)의 무덤칸(묘실) 입구. 도굴의 흔적이 뚜렷하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9대 덕종(德宗)의 무덤인 숙릉(肅陵)의 무덤칸(묘실) 내부 전경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photo@newsis.com


숙릉 무덤칸(묘실) 천정은 5개의 큰 판석을 덮은 평천정이고, 다듬은 화강석으로 벽체를 쌓은 무덤칸의 크기는 남북길이 3.77m, 동서너비 3m, 높이 1.65~1.73m로 조사됐다. 숙릉의 무덤칸에서는 금동활촉, 금동장식판, 은장식품들, 그리고 각종 청자기조각 등의 유물들이 출토됐다.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9대 덕종(德宗)의 무덤에서 출토된 고려청자 조각, 금동활촉 등 유물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은 2016년 개성시 해선리에서 ‘해선리 1릉’을 발굴하고, 고려 9대 덕종(德宗)의 무덤(숙릉)이라고 발표했다. 사진은 발굴이 끝난 후 북한이 고려 왕릉의 묘제에 맞게 복원, 정비한 모습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정종의 무덤으로 추정된 왕릉은 덕종의 무덤에서 북동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골짜기에 있다. 발굴 전 주릉은 봉분이 무너져 내리고, 석물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등 숙릉보다 더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 초기 사진을 보면 ‘주릉’은 3단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1단에는 봉분과 난간석들이 일부 남아 있고, 병풍석은 대부분 묻혀 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 하나가 넘어져 있었고, 3단에는 정자각터가 남아 있다.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10대 정종(靖宗)의 주릉(周陵) 무덤칸(묘실) 입구.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10대 정종(靖宗)의 주릉(周陵)의 무덤칸(묘실) 내부. 천정에 화강암을 깎은 2개의 들보가 있고, 이를 지탱하는 2개의 기둥이 서 있어 다른 고려 왕릉의 무덤칸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10대 정종(靖宗)의 주릉(周陵)의 무덤칸(묘실) 내부. 천정에 화강암을 깎은 2개의 들보가 있고, 이를 지탱하는 2개의 기둥이 서 있어 다른 고려 왕릉의 무덤칸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발굴 결과 무덤칸(묘실)은 벽체를 정교하게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았으며, 천정은 2개의 돌로 된 들보를 건너대고 13개의 판석을 덮은 평천정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무덤칸의 크기는 남북길이 3.56m, 동서너비 3.38m, 높이 2.2m로 조사됐다.

특히 다른 고려왕릉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건축양식도 나타나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주릉의 무덤칸은 천정을 여러 개의 돌기둥으로 받치는 양식으로 조성됐는데, 이러한 형식은 5세기 후반 고구려 왕릉인 쌍영총과 비슷하다. 쌍영총도 2개의 8각 돌기둥이 천정의 들보를 받치고 있다. 이같은 주릉의 무덤칸 내부구조는 숙릉과 완전히 다른 양식이다.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이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한 고려 10대 정종(靖宗)의 주릉(周陵)에서 출토된 고려청자 조각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주릉에서는 발굴과정에서 다양한 고려청자 조각들이 출토됐다. 북한 고고학계에서는 무덤의 외부 건축양식, 무덤칸의 규모와 축조 방식, 출토 유물, 『고려사』 등의 옛 문헌기록에 기초해  새로 발굴한 ‘해선리 1릉’과 ‘2릉’을 덕종과 정종의 무덤으로 확증했다고 한다.

-고려 천리장성을 완성한 덕종과 정종

고려 9대 덕종(德宗)과 10대 정종(靖宗)은 현종과 원성태후 김씨(元成太后 金氏)사이에서 태어난 친형제 사이다.

덕종(1016-1034년, 재위: 1031-1034년)의 이름은 왕흠(王欽)이고, 1020년(현종 11)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지고 1022년(현종 13)에 태자에 책봉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7세였다. 1031년(현종 22) 5월에 현종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중광전(重廣殿)에서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덕종은 어려서부터 성숙했으며, 성격이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기왓장을 밟기만 하면 깨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왕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1032년(덕종 원년)에는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로 삼아 태조에서부터 목종(穆宗)에 이르는 7대의 사적을 36권으로 구성한 7대실록을 완성했으며, 1034년(덕종 3년)에는 양반 및 군인과 함께 한인(閑人)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한인은 고려 시대에 있던, 토호(土豪) 출신의 무인(武人)을 말한다.

그러나 덕종의 개혁정치는 재위 4년만에 사망한 탓에 오래가지 못했다. 병에 걸린 덕종은 동생인 평양군 왕형(王亨) 즉, 정종(靖宗)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李齊賢)은 덕종에 대해 “부모상을 당해서는 자식으로서 효성을 다하였고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하던 일을 고치지 않았으며, 원로들인 서눌(徐訥)과 왕가도 그리고 최충(崔冲)과 황주량 등을 신임하여 서로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면서 그러한 결과로 백성들은 제각기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여, 시호에 덕을 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했다.

고려 10대 국왕인 정종(1018년~1046년, 재위 1034~1046년)은 현종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왕형(王亨)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종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강단이 있어서 사소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뉴시스] 2016년 북한은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해선리 2릉’을 발굴한 뒤 고려 10대 정종(靖宗)의 무덤인 주릉(周陵)이라고 발표했다. 사진은 북한이 발굴을 끝낸 뒤 새로 복원, 정비한 주릉의 모습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29. photo@newsis.com


정종은 대외관계에서 현안이던 거란(요나라)과 화친을 맺었다. 당시 국제정세가 거란을 중심으로 재편된 이상 고려도 더 이상 거란과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지속할 필요가 없었다. 거란도 고려가 송이나 여진과 외교관계를 맺고 자국을 견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고려를 압박할 수는 없었다. 양국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 것이었다.

국무에 전념하던 정종은 1046년(정종 12) 4월 병에 걸렸다. 모든 관리들이 정종의 회복을 바라며 절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을 보면, 매우 심각했던 듯하다.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종은 5월에 이복동생 휘(徽, 문종)를 불러 국정을 맡기고 사망했다.

덕종은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33년(덕종 2)부터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 도련포(都連浦, 함경남도 정평)에 이르는 석성(石城)을 쌓게 했고, 1000여리(400km 가량)에 달하는 이 고려장성(천리장성)은 12년에 걸친 공사끝에 정종 10년(1044년)에 완성된다.

고려는 성종과 현종 때 거란, 여진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극복하면서 내부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마련한 뒤 덕종과 정종을 거쳐 문종에 이르는 시기에 토지제도와 신분체제가 완비되어 황금기를 맞았다.

 

 

 

등록 2020.03.07 06:00:00수정 2020.04.06 1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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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지시 계기로 박지원묘 등 정비

조선시대까지도 특별 관리된 문종 경릉

지난해 촬영된 최근 모습 단독 공개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0. 고려의 찬란한 문화황금기 연 문종(文宗)의 경릉(景陵)

개성 남대문 앞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고려 도성을 둘러싼 개성성의 옛 숭인문(동대문) 자리가 나온다. 여기서 계속 동쪽의 장풍군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2km 쯤 가면 북쪽으로 ‘황토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나오고, 이 언덕 아래에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1959년 비석이 발견되면서 위치가 확인됐고, 2000년에 북한이 봉분을 새로 쌓고, 비석과 석물 등을 정비했다.

1999년 4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지역의 군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빛낸 명인들을 다 잊은 것 같은데 부대 주둔구역 안에 있는 역사유적과 유물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인근의 박지원묘와 황진이(黃眞伊)묘가 다음해에 복원, 정비됐다고 한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은덕동 황토고개 아래 있는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무덤 전경. 현재의 모습은 북한이 2000년에 복원 정비한 것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황진이 묘는 박지원 묘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 더 가면 있다. 조선 중기의 기생이던 황진이는 “내 평생 성품이 분방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거든 산 속에다 장사 지내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언대로 그의 무덤은 개성에서 장풍군으로 가는 도로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도로변에 있는 조선 시대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의 무덤. 현재 모습은 북한이 2000년에 복원 정비한 것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황진이 묘 뒤쪽 산봉우리 남쪽 기슭에는 고려 15대 숙종(肅宗)의 영릉(英陵)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봉우리 하나를 넘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숙종의 부왕(父王)인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이 있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다.

[서울=뉴시스] 2019년 드론을 이용해 촬영한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전경.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경릉은 해발 400-500m의 비교적 높은 골짜기(경릉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선적저수지와 광종 때 세운 불일사(佛日寺)터가 있다.
 
조선의 명군(明君)으로 세종(世宗)이나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손꼽힌다면, 고려의 훌륭한 군주로는 문종을 들 수 있다. 그의 치세는 고려인들이 태평성대라 불렀음은 물론, 송나라에서도 문종이 훌륭한 임금이었음을 기록하였다.

문종은 고려의 11대 임금으로 8대 현종(顯宗)의 셋째 아들이고, 이름은 왕휘(王徽)이다. 현종 사후 차례로 즉위한 덕종(德宗)과 정종(靖宗)의 이복동생으로, 형인 제10대 정종(靖宗)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해 1046년(정종 12) 왕위를 계승했다. 현종 이후에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 셈이다.
 
문종때 고려는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평가한다. 문종은 신라 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나라 문화를 수용해 창조적 고려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불교·유교를 비롯해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뤘다.

고려 말의 유학자인 이제현(李齊賢)은 “현종·덕종·정종·문종은 아버지가 일으키고 아들들이 계승하며, 형이 죽으면 아우가 뒤를 이어서 시작에서 끝이 거의 80년이고, 가히 전성기라 이를 만하다”라고 평했다.

문종은 몸소 절약에 힘쓰고, 현명하고 재주 있는 자들을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였고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했다고 한다.
 
이제현은 “대창(大倉)의 곡식이 계속해서 쌓이고 쌓였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세라 불렀다"고 썼다.

송(宋)은 매년 왕을 포상(褒賞)하는 글월(命)을 보냈으며, 요(遼)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동쪽 일본(倭])은 바다를 건너와 진기한 보물을 바쳤고, 북쪽 맥인(貊人)은 관문(關門)을 두드려서 토지를 얻어 살게 되었다”라며 문종의 치세(治世)를 높이 평가했다.
 
문종은 1019년(현종 10년)에 태어나 1083년(문종 37년)에 사망했다.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였다. 65세에 사망했으니 장수한 셈이다. 자녀로는 그를 이어 즉위하는 순종(順宗)과 선종(宣宗), 숙종(肅宗) 등 여럿을 두었고,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역시 그의 아들이다.

『고려사』에 “왕이 1083년(문종 37년) 7월 신유일(辛酉日)에 죽자 8월 불일사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경릉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직할시 선적리(옛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이다.

경릉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에 공덕이 많은 왕으로 여겨 특별히 ‘숭의전’에 배향하여 제사를 드렸으며, 능 또한 특별히 관리했다.

그러나 경릉은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년) 사이에 다른 고려 왕릉들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도굴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이를 수리하고 치제(致祭)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고종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난간석의 일부가 소실되고, 정자각도 사라진 것이 확인된다. 2019년 가을에 촬영한 사진과 비교해 보면 외형상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 때 세운 능비는 사라졌고, 2단의 문인석은 두 동강 나 윗부분이 사라졌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앞면 전경. 현재 보존유적 5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후면. 비교적 높은 야산에 자리잡고 있고, 인근에 민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능역은 남향으로 조성됐고, 원래 3단으로 조성됐으나, 현재는 봉분이 있는 1단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2단에는 위 부분이 잘려나간 문인상 3개만 남아 있다.
 
1963년 북한 학계의 조사로는 봉분 주위에 곡장(무덤 뒤에 둘러쌓는 담)이 130cm 높이로 둘러져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1963년 조사 당시 봉분의 높이는 2.3m, 폭은 8m였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서쪽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동쪽에 남아 있는 난간석과 석수.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서쪽에 남아 있는 난간석과 석수.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선적리 산 중턱에 있는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무덤인 경릉(景陵) 동쪽에 있는 2개의 문인석. 윗부분이 파괴돼 사라진 모습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07. photo@newsis.com


1982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주검 칸(석실)의 크기는 가로 3.63m, 세로 2.9m, 높이 2.25m이다. 주검 칸의 내부에는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천정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고, 바닥 중심에 관대가 있었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도금활촉 4점, 도금장식품 1점, 옥장식품 1점, 지석 10여 점, 관못, 고려자기 조각들이 나왔다.
 
문종의 경릉은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10km, 판문점에서는 북쪽으로 불과 6km 거리에 있다. 인근의 숙종의 영릉, 박지원 묘, 황진이 묘 등을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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