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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고려

1. 고려 (6) 1231년~1270년 고려-몽골전쟁 / 1270년~1352년 몽골간섭기

대야발 2024. 8. 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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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사신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된 몽골의 침략, 고려는 결국 개경서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76) 고려·몽골의 전투와 강도정부

 
 
 
고려시대에 쌓은 강화산성 외성 남쪽. /강화군 제공
 
 

 

 

고려는 등거리 외교와 활발한 무역을 바탕으로 분열된 중국과 공존해왔다. 하지만 몽골의 등장으로 공존과 굴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부는 강화로 천도했다. 고려의 강화 천도 사건은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 문제, 우리가 외세를 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고려와 몽골의 갈등은 1225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231년 1차 침입이 있었다. 이후 몽골은 내정을 간섭하고, 압박을 가해 무신정권은 천도를 제의했다. 실권자인 최우의 힘으로 고종과 정부는 1232년 7월 6일 강화로 천도했다. 출륙하는 1270년까지 38년 동안 몽골은 고려를 총 아홉 차례 공격했다. 강화 천도를 두고 몽골의 고압적인 태도와 과중한 경제적 보상, 군사의 파병과 군비의 조달, 그리고 정치적 간섭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명분보다 중요한 실질적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강화도는 수전 능력이 약한 몽골의 공격을 방어하며 장기간 항전하는 데 유리하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복잡해 외부 세력이 근접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일부만 맞을 뿐이다. 강화 수로는 폭이 매우 좁고, 밀물과 썰물을 이용할 수 있어 도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몽골군은 절대 수전에 약하지 않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발하슈호·카스피해·흑해·볼가강 등을 건넜다. 그들은 최고의 기술자 군을 거느린 다국적 군대였다.

둘째, 강화도는 경제적인 타격을 덜 받으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국가 재정은 대부분 초기에 설치한 13개 조창을 활용한 시스템으로 충당됐다. 납부된 세곡은 일부가 한강 수로망을 이용했고, 대부분은 서해 연안 해로를 따라 개경까지 운반됐다. 따라서 개경의 입구인 강화도는 조세 시스템을 유지하고, 물자를 공급받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셋째, 강화도는 해양 능력이 강한 고려의 외교에 유리했다. 강화도는 다양한 항로를 이용해 동아시아 어떤 지역과도 방해받지 않고 교류할 수 있었다. 특히 몽골의 적대국인 남송과 무역, 우호관계 등을 추진해 몽골에 외교적 부담을 주고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넷째, 무신정권은 몽골 제국이 추진한 정복전쟁의 구도를 파악하고, 내부 혼란을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몽골의 대고려전은 세계 패권 전략과 정복전쟁의 일부였으므로 공격 시기와 규모 등의 판단과 계획은 처한 상황과 전체 계획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40여 년 동안이나 약체인 고려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무신정권은 이런 몽골 제국의 정책과 군사전략적 특성을 간파하고, 현실적인 한계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칭기즈칸은 1207년 서하를 공격한 이후 1211년부터 금나라를 공격했고, 1215년에는 수도인 연경(베이징)을 함락하고, 이어 고려를 침입했다. 1221년에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침공했다. 1231년(고종 18년) 8월에는 사리타이가 고려를 침공했다가 강화로 천도한 해에 용인전투에서 전사했다. 몽골은 1233년 만주를 장악했고, 1234년 1월에는 금을 멸망시켰다. 1236년에는 발트해까지 진격했고, 폴란드 왕국을 공격했다. 1240년부터는 러시아 전토를 지배했다. 1252년에는 아랍의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이란 이라크 지역을 점령했다.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듬해 ‘일한국(Il Khanate)’을 세웠다.

이 거대한 대전투는 모두 강도정부 시절 발생했다. 거대한 전쟁 속에서 몽골에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배후세력이라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을 뿐 군사전략상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몽골 군대가 고려와 벌인 아홉 번의 전투는 정부 없는 나라를 약탈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구나 몽골은 1259년 몽케 대칸이 남송을 원정하는 도중에 죽자 내분과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동생인 쿠빌라이 칸이 뒤를 잇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쿠빌라이의 편을 들어 외교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그 결과 유리한 조건으로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가고 항복해 쿠빌라이의 부마국이 됐다.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질서의 상황을 간파해가면서 유연성과 배짱을 겸한 고려 무신정권의 외교 전략은 현실감이 부족한 지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1210931612021.12.1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에 승복한 고려는 강화서 개경으로 환도, 반대파는 삼별초로 집결···3년여간 항몽 전쟁(77) 삼별초 항쟁 (上)

 
 
일본 오키나와 중부 소재 우라소에성. ‘계유(癸酉)’명이 있는 고려 기와 발견.
 
 
고려는 강화라는 섬으로 피신해 당시 세계 최강 국가인 몽골에 38년간 저항했다. 섬이라는 전술적인 이점도 작용했지만, 세계 전략과 국제전이란 군사 작전의 특성을 이해한 무신정권의 판단력이 성공한 결과다. 하지만 국제질서는 변했고, 정복전쟁을 완료한 몽골 제국은 남송이라는 최후의 강적을 향해 동쪽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몽골의 협박과 회유는 100년간 권력을 무신들에 뺏긴 채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왕족과 귀족들을 돌아서게 했다. 또한 오랜 전쟁의 피해로 염전 분위기가 팽배했고, 강도정부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필요성이 혼재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병 집단으로 시작한 삼별초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으로 출발했다. 규모가 커지고, 군사력이 강해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됐다. 이후 강도정부에서 몽골에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합세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무신정권과 이해관계가 깊었고, 실제로 권력의 향방에 큰 역할을 한 군사 집단이다. 몽골에 강경했던 항전파인 그들은 배중손과 노영희 등을 주축으로 승화후인 온(溫)을 임금으로 추대한 후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전면전에 돌입했다. 전력은 열세였지만 수군 능력이 뛰어나고 해양의 메커니즘을 잘 파악한 그들은 승부수를 던졌다. 해상의 섬들을 거점으로 해군력을 이용해 연안 지역을 관리하면서, 해전을 벌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삼별초군이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걸고 비장한 결심을 한 채 강도정부를 떠나는 광경을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기록했다.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해 무려 1000여 척이나 됐다.”

 

삼별초의 진도 정부와 전투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무덤.

 
 
 

자의와 타의로 강화를 탈출한 수천 명의 사람들은 서해안을 내려가면서 동참하는 세력들과 합류하면서 서해의 다도해와 남해의 다도해가 만나는 절묘한 위치의 큰 섬인 진도의 고군면 연동마을에 상륙했다. 적당히 넓어 다수의 주민이 농사지을 만한 터전이 있고, 육지와 가까워 반몽세력 및 농민들과 연합해 육전도 벌일 수도 있는 지역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모여진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므로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다. 이곳은 훗날 해양전술의 천재인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궤멸시킨 ‘울돌목(鳴梁)’이 있는 해양방어전의 요충지다.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정부의 명분으로 해군력을 활용해 전라도 해안의 나주 같은 항구 도시와 곡창들을 공격하고, 세력권 아래에 뒀다. 또한 전략적으로 가치가 풍부하며 국제적으로 활동하기에 적합한 제주도를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진도, 완도, 흑산도, 해안의 큰 섬들, 그리고 제주도를 잇는 해양왕국을 완성했다. 일부 사료를 보면 반몽골적인 정서를 가진 일부 백성의 호응을 받았고, 일본에는 ‘고려첩장불심조조’라는 국서를 보내 공동 대응을 모색할 정도였다.

이에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삼별초 정부와 개경정부, 연장된 무신정권과 왕족 및 문신정권, 자주적인 반원정책과 실용적인 친원정책 간의 내부 전쟁으로 변화했다. 원나라는 고려의 분열을 활용해 왕족들과 고려 출신의 홍다구가 지휘하는 고려인들을 참여시킨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400척의 병선으로 공격했다.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용장산성이 함락당하자 온왕(溫王)은 홍다구 부대의 추격을 받아 아들과 함께 사살됐다. 실질적인 권력자인 배중손도 남도포에서 전사했다. 진도정권은 1년 만인 1271년 5월에 붕괴했고, 탈출한 일부 세력은 김통정을 필두로 제주도에 상륙했다.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1217477412021.12.20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제주로 거점 옮긴 삼별초, 해안 방어체제 구축…환해장성·항파두리성 쌓고 여몽연합군에 대항

(78) 삼별초 항쟁 (下)

 

제주 항파두리성벽
 
 
 
제주도는 토지가 부족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 불충분했고, 군수물품들을 자체 생산할 환경이 안 됐다. 반면에 육지와 거리가 멀어 정부의 예봉을 피할 수 있고,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양력을 갖춘다면 일본 남송 유구(오키나와) 등과 교류와 무역을 하면서 자립하고, 해군력을 강화해 해양왕국을 건설할 만한 곳이었다. 마치 에게해의 크레타섬이나 이탈리아 반도 아래의 시칠리섬 같은 위상이었다. 이러한 이점들을 간파하고 이미 1270년에 점령했던 삼별초군은 신속하게 ‘환해(環海)장성’이라는 긴 해안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북제주군의 애월읍에는 궁궐과 관청 역할을 한 항파두리성을 쌓았다.
 
제주도 정부와의 전쟁
 
이 무렵 원나라는 남송 공격전에서 고전하는 과정이어서 고려 내부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고려 정부 또한 삼별초와 정면대결을 할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삼별초군은 조운 등 해양적 시스템과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해 전라도와 남해안을 공격했다. 개경으로 항행하는 조운선을 탈취해 개경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해안을 공격했고, 개경을 위협할 정도였다. 이어 경상도도 공격했고, 마산과 거제를 습격해 일본국을 정벌할 목적으로 건조 중인 군선들을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제주도를 남송 공격에 활용하는 전략을 가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고려 정부에 삼별초를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제주 항파두리성벽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고려와 원은 총 병력 1만2000명, 군선 160척으로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1273년 4월 9일에 영산강 하구를 출항했다. 대선단은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의 곳곳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해 삼별초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 1273년 4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군대는 항파두리성을 점령했고, 김통정은 도피했다가 자살했다. 당시 130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기록됐다. 이로써 40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끝났다. 탈출한 일부 세력들은 일본, 남송, 그리고 오키나와 지역 등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별초에 대한 후대의 평가
 

장렬했지만 결과적으로 무모했던 삼별초의 행위는 고려인의 삶과 우리 역사에 각각 어떻게 작동했을까?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몽골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면전은 현실을 무시한 행위였고, 참혹한 결말로 끝났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체세력들과 일부 백성들에게 삼별초의 행위는 분명히 소중하고 고귀한 항쟁이었다. 또 그들의 자유의지와 희생은 오랫동안 외세의 그늘이 드리워졌던 후대의 우리 민족에게 무엇보다도 값진 유산을 선사했다. 이에 ‘난(亂)’으로 평가됐다가 언제부터인가 ‘항쟁’ 심지어는 ‘혁명’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토와 살림, 이중 정부의 조세징집, 전투력 징집 등으로 생활과 생존이 파괴되는 백성들의 처지 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별초 항쟁으로 ‘6·25 전쟁’처럼 전후에 만연했을 가치관의 충돌, 세력들의 분열, 제주도·진도 등 피해지역을 중심으로 만연한 지역 갈등 등 민족력을 소모시킨 현실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원나라의 장악력이 더욱 강해지고, 일본 공격이라는 명분 없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붓고, 여몽연합군이 편성돼 엄청난 인적 손실이 발생한 계기를 마련한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다.

역사도 개인의 삶처럼 정의와 불의, 선과 악처럼 명확하게 구분하고, 거기에 따라 상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현재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됐을까? 역사에서는 일부 시대나 일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명분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전제로 당시대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유보하거나 양보할 수는 없다. 더더욱 생존을 담보로 하는 일은 죄악이다.

삼별초. 우리 역사에서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사건이지만, 잊을 수 없는 과거이고, 더더욱 잊어서도 안 되는 미래다.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122410621 2021.12.27 

 

 

 

 

고려는 1231년 원나라 공격을 받은 후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문명이건 민족이건 붕괴를 시작한 집단은 혼란을 겪다 결국 ‘극복’ 아니면 ‘멸망’을 맞는다.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 전쟁 패배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다. 반면 내부에서 발생한 지배계급의 권력 교체나 쿠데타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실질적인 희생이 적다.

 

 

원나라 공격 후 서서히 붕괴된 고려

 

고려는 150여 년간 서서히 붕괴했다. 그동안 원치 않은 국제전에 동원됐고, 부마국으로 독립성을 인정받았지만 영토 일부를 탈취당했다. 정동행성을 통해 정치를 간섭당하며 멸망의 길을 걸었다. 약 80년 동안 재위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의 충(忠)은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몽골의 피가 섞였고, 원나라에서 교육받았고, 공주와 결혼해 황제의 사위가 된 후 귀국해 왕이 됐다.

이들은 세계 제국인 원나라 궁전에서 국제 정치를 학습하고, 우수한 문명을 체험했지만, 고려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했다. 그뿐 아니라 현실을 몰라 정치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원나라와 연결된 환관, 역관, 투항한 군인 등 친원파와 공존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심지어는 쿠빌라이칸의 사위인 충선왕을 티베트로 귀양 보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환관도 있었다.

매년 150명의 처녀를 공녀로 원나라에 바치면서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이 생길 정도였다. 이때 공녀로 끌려가 토구훈 테무르(혜종)의 비가 된 기황후의 일족도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이들은 건국 이후 존재한 문벌 귀족, 무신정권의 잔재, 고급 관료와 합쳐 권문세족을 이뤄 정부의 요직을 독점했다.

또 토지를 탈취하고, 겸병해 대농장을 만들어 고려 말기에는 ‘토지의 넓이는 주(州)와 군(郡)을 넘어다니고 큰 산과 강을 경계로 했다’(고려사 78권, 우왕 14년)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많은 농민이 노비로 전락했다. 국교였던 불교는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변질하고 타락했다. 불필요한 행사들, 사찰과 탑의 과도한 조성 등으로 국가 재정이 낭비됐고, 대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대사찰이 심지어는 고리대금업까지 벌였다.

 

 

왜구와 홍건적 침입으로 안보 위기

 

고려 말기에는 외적의 위협과 빈번한 침공으로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했다. 왜구는 1223년부터 침략을 시작했다. 침략 횟수는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가 넘었다. 우왕 당시에는 14년 동안 378회나 됐다.

14세기 중반에는 원나라에서 한족 농민의 세상을 만들려는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과 농민반란군이 등장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에 패배한 홍건적 잔당이 만주를 거쳐 고려를 침범해 1359년에는 서경(평양)을 공격했다. 1361년에는 개경(개성)까지 침공해 왕이 안동으로 피란 갈 정도였다. 당시 조운체제에 의존한 국가 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백성은 농토를 잃었고 어업과 목축업을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조세 수탈까지 심각해지자 유랑까지 해야 하는 대재난을 겪었다. 그리고 최영, 이성계, 정지, 최무선 등의 신흥 무장이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성리학을 내세운 신진사대부의 등장

 

붕괴와 달리 멸망의 조짐은 쉽게 감지할 수 없다. 항상 뒤늦게야 전 구성원이 위기감을 느끼고, 극복하는 시도를 한다. 고려 말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왕실과 권문세족, 새 질서를 구축하려는 개혁파, 희생을 담보하고 완전한 새 세상을 꿈꾸는 무력한 일부 백성이 자기 방식으로 움직였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고려를 멸망시킨 신진사대부였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 지주로 향리 출신이 많았다. 과거를 통해 다수가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던 학자적 관료였다.

특히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자 공민왕은 친명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신진사대부를 대거 관직에 등용시켰다. 실력과 자부심, 사명감을 가졌지만, 고위 관직에서 소외됐고, 불공평한 토지 소유로 인해 불만이 가득 찬 이들은 개혁의 이론적인 토대와 명분을 제공하고,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사상과 방략으로 성리학을 활용했다.(1)

 

 

 

 

'뼛속까지 몽골 사랑' 고려 충선왕의 놀라운 업적

김종성2017. 9. 7. 10:55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왕은 사랑한다> 세 번째 이야기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박순옥]

조선은 이성계를 위시한 무인 집단과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의 합작으로 세워졌다. 조선 왕조가 고려 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혁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인 집단이 아니라 신진사대부 때문이었다.

신진사대부로 불리는 사대부 그룹은 이전의 지배층과 확연히 달랐다. 권세 있는 가문이고 세력 있는 족속이라 해서 권문세족이라 불린 종전의 고려 지배층은 실력보다는 가문에 더 의존했다. 또 대규모 노비와 부동산에 의존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변화를 거부했다.

 

신진사대부로 분류되는 선비 그룹은 가문보다는 실력에 의존했다. 학문적 실력이 이들을 도드라지게 했다. 이들도 노비와 부동산을 보유했지만, 권문세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중소 규모의 지주였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중소기업 정도의 경제적 기반에 의존하는 세력이었다.

신진사대부는 일반 평민들보다는 잘살았지만, 자기 위에 넘어야 할 계층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개혁성을 띠었다. 물론 꼭 시기심만으로 개혁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유교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에, 지식인이라는 소명 때문에도 개혁을 주장했다.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소신 있게 개혁을 외칠 수 있었다. 

정도전이 신진사대부를 이끌고 새 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집단이 공민왕 때 지배층이 됐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무명의 승려 신돈을 전격 발탁해 국정을 위임하고 그를 앞세워 구세력을 숙청했다. 불교 승려 신돈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며 구세력을 숙청하면, 공민왕은 빈자리를 유교 성리학자인 신진사대부들로 채웠다. 이래서 신돈 집권 5년 동안에 신진사대부는 구세력을 대체하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급부상했다.

공민왕은 고려 멸망 41년 전인 1351년 왕이 됐다. 신진사대부가 중앙 정계를 장악한 것은 그 이후다. 공민왕이 그들과 제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전에 그들이 정치적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런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운 왕이 있었다.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충선왕(임시완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몽골 수도로 가버린 고려의 왕
 
 
  <왕은 사랑한다>.
ⓒ MBC
 
 
 
충선왕은 몽골인 왕비의 몸에서 출생한 최초의 고려왕이다. 그는 순혈 고려인인 아버지 충렬왕을 상대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는 1298년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고 왕이 됐다가 7개월 만에 도로 빼앗겼다. 그 뒤 몽골 수도에서 생활하던 중에 10년 만인 1308년, 아버지가 죽자 고려로 돌아와 제2차로 왕위에 등극했다.

아버지와 투쟁을 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과도 정쟁을 벌였다. 세자가 된 아들이 자기한테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자, 세자를 죽이고 둘째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 둘째아들이 충숙왕이다. 충숙왕이 낳은 두 아들이 충혜왕과 공민왕이다. 충혜왕은 MBC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했다. 배우 주진모가 충혜왕을 연기했다.

 

제2차로 등극한 지 2개월 뒤 충선왕은 개경을 버리고 몽골 수도 대도(大都)로 돌아갔다. 외갓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몽골 생활에 익숙해져 고려 생활이 불편했던 탓이다. 대도는 지금의 베이징 절반과 그 위쪽에 걸쳐 있었다. 그는 거기서 원격으로 고려를 통치했다. 스마트폰 화상통화도 없던 시절에 인편을 통한 원격 통치를 했기에 고려 지배층의 빈축을 많이 샀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보나 근무 자세로 보나 충선왕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 분야에서만큼은 꽤 선명한 업적을 남겼다. 신진사대부가 기반을 잡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놓은 것이다.

1298년 제1차 즉위 당시, 고려 정부에 문한서(文翰署)란 관청이 있었다. 임금 명의의 문서를 작성하는 기관으로, 실력은 있으되 가문이 약한 선비들이 주로 근무하는 곳이었다. 관직제도를 정리해놓은 <고려사> 백관지에 따르면, 문한서에 대해 충선왕은 이런 조치를 내렸다.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문한서가 관리 선발을 주관하도록 했다. 얼마 후에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치고, 왕의 명령을 내보내는 임무를 맡겼다."

충선왕은 인사권을 행사하는 정방을 폐지한 뒤 그 권한을 문한서에 주었다. 그리고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개칭한 뒤, 왕명 출납권까지 주었다. 비서실 기능까지 부여한 것이다.

충선왕의 조치는 사림원에 근무하는 '배경 약한' 선비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1년 발행된 <역사학보> 제52집에 실린 이기남의 논문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의 문투를 지금에 맞게 수정했다.

"사림원의 구성원들은 모두 문과 시험에 급제해서 출세한 인물들이며, 대부분이 지방 출신의 신진세력이었다. ······ 주요 가문에 끼지 못하여 신진세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지방 출신의 신진 선비, 즉 신진사대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충선왕의 노력은 충숙왕한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진행됐다. 1308년 제2차로 즉위했다가 1313년 양위한 충선왕은 대도에 만권당(萬卷堂)이란 학술기관을 세웠다. 상왕이 된 그는 이곳에 진귀한 서적들을 모아둔 뒤 고려인과 중국인 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양쪽들이 학술 교류를 하도록 만들었다. 몽골 치하의 중국인 학자들이 거둔 학문적 성과가 고려 학계로 유입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활동한 대표적 학자가 이제현이다. 이곳을 통해 고려에 유입된 유교 철학의 분파가 성리학이다. 세계 정치의 중심인 몽골 수도 대도에서 고려 상왕이 신진사대부들의 학문을 지원했으니, 고려 본국에 있는 신진사대부들의 입지도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신진사대부의 대부인 이색이나 그의 제자들인 정도전·정몽주 등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1351년 등극한 공민왕이 구세력을 내몰고 신진사대부를 새로운 지배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공민왕이 신진사대부를 지배층으로 만든 것은 할아버지 충선왕의 노력을 완성시키는 의미였다.
 
 
 
  드라마 <정도전>.
ⓒ KBS

'왕권 강화' 노린 신진사대부 육성, 조선 건국 낳았다

충선왕이 신진사대부를 지원한 일차적 동기는 왕권 강화였다. 고려 왕실은 전통적으로 귀족세력에 눌렸다. 몽골 간섭기의 고려왕들은 몽골의 지원에 힘입어 귀족들에 맞섰다. 그래서 고려 왕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없었다. 몽골 간섭기는 물론이고 고려시대 전 기간을 관통하는 그 같은 고려 왕실의 고민거리와 관련하여, 미국 UCLA 존 던컨 교수의 <조선왕조의 기원>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대부분 중앙집권화 시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국왕을 반대했다 ······ 그런 반발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왕은 구 귀족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수립에서 이익을 얻는 집단과 제휴하려고 시도했다."

충선왕의 경우에는, 제휴 상대가 지방 출신 선비들이었다. 그는 왕권 강화나 중앙집권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이런 세력을 중용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꽤 과감한 정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에 비주류 인사들을 과감하게 등용한 것 이상으로 과감한 일이었다.

왕권강화라는 동기에서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충선왕의 조치는 고려 역사뿐 아니라 한국사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띠는 사건이었다. 그가 양성한 신진사대부는 손자 공민왕 때 가서 지배층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공민왕 사후에 구세력인 권문세족이 부활하자, 신진사대부는 정도전·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웠다.

고려와 비교할 때 조선은 서민의 이익을 더 존중하는 나라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고려보다 진보적인 국가였다. 충선왕이 양성한 신진사대부가 그런 나라를 세웠다. 조선이라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왕조가 등장하는 데에 충선왕이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2)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https://youtu.be/yTya5JcM1kA?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자료출처>

 

 

(1)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20408441

 

 

(2) https://v.daum.net/v/20170907105503779

 

 

 

 

 

<참고자료>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①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3.12.17 06:52:00

문화방송(MBC)이 50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 <기황후>가 큰 화제를 몰면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담당 PD가 "기황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상당히 단출하고, 원나라의 역사 자체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기황후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역사드라마를 단순히 드라마로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987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②<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3.12.26 07:58: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057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③<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03 09:18: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138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④<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09 07:44: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200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⑤<기황후>가 왜곡한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16 23:42:45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2742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⑥<기황후>유감…원나라, 고려의 허언을 인내하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1.23 18:13:28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3032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⑦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김운회 동양대 교수  |  기사입력 2014.02.04. 09:13:28 최종수정 2014.02.04. 10:55:04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3599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⑧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13 07:48:07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072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⑨원 혜종이 '까막눈'이라고?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20 09:22:5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416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⑩MBC <기황후>, 30부까지 사실이 없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26 15:21:14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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