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세계기록유산)이 디지털 자료화돼 열람과 활용이 쉬워진다. 사진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대장경판들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부르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 디지털 자료로 구축돼 내년부터는 언제 어디서 누구나 열람할 수있는 웹서비스가 이뤄진다.
문화재청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활용 가능한 웹서비스로 제공하기 위해 ‘팔만대장경 디지털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18일 밝혔다.
‘팔만대장경 디지털 DB 구축’ 사업은 우선 8만여 장에 이르는 각 경판의 정밀 기록, 보존상태 파악 등 기초학술 조사를 통해 보존대책을 마련한다. 이어 각 경판의 정밀사진 촬영, 전통방식의 인경본(印經本)을 제작한다. 인경본은 경판에 먹을 묻혀 한지에 인쇄한 뒤 엮은 책을 말한다.
문화재청은 “인경본 제작 후 이를 디지털 자료화(스캔)해 2025년부터 누구나 쉽게 경판을 열람하고 그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대장경판 활용 웹서비스를 구축할 계획”이라며 “누구나 일상에서 쉽고 다양하게 국가유산을 향유하고 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의 각 경판은 극히 세밀한 돋을새김으로 만들어졌다. 문화재청 제공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인 1236~1251년 사이에 제작됐다. 대장경판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새긴 목판(경판·대장경판)이다. 대장경은 불교의 성전인 삼장(三藏)을 중심으로 부처의 가르침과 관련된 기록을 총칭하는 용어다.
삼장은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장(經藏), 스님 등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도적적 규범인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경장과 율장을 포함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논설을 모은 논장(論藏)을 말한다. 여기서 ‘장(藏)’은 ‘그릇’ ‘광주리’란 의미다. 즉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부처의 가르침과 한국 불교사의 고갱이를 집대성해 담아 놓은 그릇이다.
현재 8만1000여 장의 경판은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장경판전’(藏經板殿) 안에 보관돼 있다. 각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 내외, 세로 24㎝ 내외, 두께는 2.6~4㎝, 무게는 3~4㎏이다. 국보로 지정된 대장경판과 장경판전 건물은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각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흔히 ‘다시 조성한 대장경’이란 의미에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200여년 앞서 대장경이 먼저 제작됐다. 최근 막을 내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무대인 고려 현종 임금 당시다. 거란의 침입에 따라 1011년 등 두차례에 걸쳐 대장경이 조성됐는데, 당시의 대장경을 ‘처음으로 새긴 대장경’이라 뜻의 ‘초조대장경’이라 한다. 하지만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군의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 전해지는 인쇄본도 극히 희귀해 대부분 국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지금의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송나라·요나라(거란)의 대장경 등을 비교·검토해 제작됐다. 13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이다. 송나라, 요나라 대장경들은 현재 대부분 사라져 팔만대장경은 온전히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대장경이다. 목판 인쇄사나 불교 문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또 5200여만 자에 이르는 글자들이 경판에 하나같이 일정하게 돋을새김됐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분량에도 꼼꼼하게 교정까지 본 덕분에 오자·탈자도 극히 적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은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4동의 건물로 구성됐다. 남북 방향으로 세워진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 동서 방향인 작은 규모의 ‘동사간전’ ‘서사간전’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세계문화유산) 전경. 문화재청 제공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팔만대장경이, ‘동·서 사간전’에는 경전과 고승들의 저술 등을 새긴 고려시대 다른 목판들(국보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이 있다. 장경판전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세조 때인 1457년, 성종 때인 1488년에 각각 다시 지었고, 광해군 때인 1622년과 인조 때인 1624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훼손되기 쉬운 나무로 제작됐음에도 잘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 문화유산이다. 경판과 장경판전 건물에 훼손을 막기 위한 과학적 원리들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경판은 산벚나무·돌배나무 등을 벌채해 바닷물에 1~2년 담가 놓았다가 다시 소금물에 삶은 후 건조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병충해, 갈라지거나 비틀어지는 것을 막는다. 경판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양끝에 마구리 작업도 했다. 또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옻칠을 했다. 경판들이 검은 것은 옻칠 때문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건물의 건축적 특성에도 보존의 비밀이 있다. 경판 보존을 위해서는 원활한 통풍, 낮은 습도와 온도의 일정한 유지가 핵심인데, 이들 건물은 이를 충족시키고 있다. 건물 앞면과 뒷면 벽의 아래·위 창문 크기·형태 등을 달리함으로써 자연적인 환기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내부 흙 바닥 속에도 숯, 횟가루, 소금, 모래 등을 넣어 내부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같은 지혜로운 보존은 유네스코 기록유산·문화유산 등재 당시 전문가들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1)
팔만대장경의 1971년(왼쪽 사진·셀수스협동조합 제공)과 2021년 (위쪽·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제공)의 모습.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장악하던 ‘무신정권’의 시기.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꿔 놓을 정복전쟁을 시작한 몽골제국은 1231년 고려를 침공한다. 이로써 28년간 9차례 침략으로 이어지는 ‘여몽전쟁’이 발발한다. 수도 개경이 포위당한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복하고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했고, 이에 2차 침략이 발발한다. 강화도 천도는 결사항전의 표시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우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이미 군사력의 절대적 격차를 경험한 조정에서는 전란을 끝내자는 ‘현실론’이 제기됐지만 정권은 권력의 붕괴를 우려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정의 강화도 칩거 27년 동안 육지는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용감한 장수와 백성들의 대몽 항전이 있었던 반면, 지방 관리들과 농민 및 노비들은 민심을 잃은 조정에 대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몽골군은 국토를 유린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1235년 3차 전쟁이 발발하자 조정은 주민들을 험준한 산성이나 외딴 섬으로 이주시키는 ‘입보 정책’으로 몽골에 저항토록 했지만 백성들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조정은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했다.
11세기에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대장경이 만들어졌는데, 이 ‘초조(初彫)대장경’이 몽골 2차 침략 때 불타버렸다. 이에 몽골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대장경의 복원, 즉 ‘재조대장경’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1251년에 마침내 완성된 목재 경판 수는 무려 8만1258장. 이리하여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은 1398년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팔만대장경이 최우 정권에 의해 시작됐고, 최씨 집안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권 유지의 도구라고 폄하하거나, 전란 속에서 종교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재단하는 것은 오류다. 대장경 제작엔 승려, 관리, 평범한 백성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국가적 재난을 불심으로 단결해 극복하려 한 모든 고려인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2021년 6월,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 봉안된 지 620여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770년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대장경은 그대로이다.(2)
건물과 목판 모두 국보..각각 세계유산·세계기록유산 등재 통풍·방습 최적화로 해인사서 600년 세월 원형 보존
해인사 팔만대장경 (합천=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해인사가 10일 오후 경남 합천군 해인사 장경판전 법보전에서 팔만대장경을 공개하고 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19일부터 매주 토, 일요일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2021.6.10 image@yna.co.kr
(서울·합천=연합뉴스) 박상현 양정우 기자 = 해인사가 10일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해온 장경판전 내부를 취재진에게 공개하면서 대장경판과 그 보고(寶庫)에 관심이 쏠린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따르면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이곳에 보관돼 온 팔만대장경판은 각각 국보 제52호와 제32호인 국가지정문화재다.
장경판전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종묘'와 함께 우리나라의 첫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대장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려 건축물과 목판 모두 세계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내 현존 최고(最古) 건물이다. 목조 건물인 장경판전은 북쪽의 법보전과 남쪽의 수다라장, 두 건물 사이에 위치하는 작은 크기의 동·서사간판전 등 4개 동이 입구(口) 자 형태로 배치돼 있다.
600년이 넘는 시간 대장경판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온 비결은 장경판전의 과학적 설계와 독특한 건축 방법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정면 15칸인 법보전과 수다라장은 앞뒤에 크기가 다른 붙박이 살창을 설치했다. 창은 통풍, 방습, 실내 온도 유지에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장경판전 내부 바닥에는 모래, 횟가루, 찰흙에 숯, 소금 등을 깔았는데 이는 내부 습도 조절을 최적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전반적으로 건물의 미를 강조하고 장식을 더하기보다는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라는 기능에 집중한 결과 대장경판 원형 보존이 가능했다고 분석된다.
장경판전에 있는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에서 '고려대장경'으로도 불린다. 아울러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몽고 침입으로 불에 타 사라진 뒤 다시 만들었다는 뜻에서 '재조대장경'으로도 부른다.
팔만대장경의 정확한 판수는 그간 논란이 많았으나, 문화재청은 현재 8만1천258장으로 추산한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목판도 포함됐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공개 (합천=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합천 해인사 스님이 10일 오후 경남 합천군 해인사 장경판전 법보전을 둘러보고 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19일부터 매주 토, 일요일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2021.6.10 image@yna.co.kr
경판 크기는 가로 70㎝ 내외·세로 24㎝ 내외이며, 두께는 2.6∼4㎝이다. 경(經)·율(律)·논(論) 등 불교 경전의 모든 것을 경판에 새겼는데, 불경 종류는 약 1천500종으로 알려졌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00만 자에 이른다.
팔만대장경 이전에도 송나라의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 초조대장경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팔만대장경 조성을 주관한 개태사 승통 수기대사는 당시 이들 경전을 참고하고 오류를 바로잡으며 대장경을 제작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팔만대장경이 지금은 접할 수 없는 북송관판이나 거란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글자 또한 오자나 탈자 없이 고르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문화재라고 설명했다.
오는 19일부터는 장경판전 내부를 공개하는 '사전예약 탐방제'가 시행돼 대중의 관심도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탐방은 매주 토·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각 2차례 진행된다. 문화재 관리 등을 이유로 탐방에 참여하는 인원은 최대 20명으로 제한된다.
탐방객은 해인사 일주문을 시작으로 봉황문→국사단→해탈문→법계탑→대적광전→대비로전→수다라장→법보전을 차례로 순례하게 된다.
법보전에서는 내부로 들어가 대장경판을 직접 보고, 전문가로부터 문화재로서 장경판전과 대장경판이 갖는 역사적 의미 등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해인사는 지난 5일부터 사찰 홈페이지를 통해 탐방 참가자 사전예약을 받았는데 높아진 관심을 반영하듯 19일부터 7월 4일까지 예약이 조기 마감된 상황이다.(3)
문화재청국립문화재연구소는 '해외 전적문화재 조사목록―일본 오타니대학 소장 고려대장경'을 발간했다.헤럴드경제 3월 12일 보도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즉 팔만대장경을 찍어낸 책 중에서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대장경판이 만들어진 지 600여 년 뒤에 나온 강원도 월정사 소장본(1865)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20세기에 찍어낸 판본들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는 고판본(古版本)이 없다. 그렇다면 '최고(最古)의 팔만대장경 인쇄본'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것은 일본 교토(京都) 오타니(大谷)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고려대장경이었다.
일본 오타니대 도서관이 소장한 고려대장경의 각 권 표지. 해인사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의 현존 인쇄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대장경은 587상자 4995첩의 방대한 분량으로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1328~1396)의 발문(跋文·책 끝에 발행 경위를 적은 글)이 붙어 있다. 발문은 ▲1381년(우왕 7) 대신 염흥방(廉興邦·?~1388) 등이 제작비를 마련해 대장경을 인쇄한 사실과 ▲(시해당한) 공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간행 이유를 밝혔다. 이숭인(李崇仁)이 쓴 다른 기록에는 이 대장경을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왜 이 '최고의 고려대장경'이 일본에 있는 것일까? 왜구가 약탈해 갔거나, 일제시대에 불법으로 반출됐던 것일까?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타니대 대장경 조사를 주도하고 조사목록집에 논문을 쓴 박상국(朴相國)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14~16세기 한·일 양국의 관계는 선린외교이자 '대장경 교류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1395년(태조 4) 왜구가 잡아갔던 조선인 570명이 송환되자 조선은 규슈(九州) 절도사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에게 감사의 뜻으로 대장경 2질을 하사했다. 이 기막힌 보물을 얻게 된 미나모토의 반응은 이랬다. "절하고 읽어보니 귀국의 은혜에 감동됨이 마치 바다가 끝이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로부터 일본은 조선이 요구하지 않아도 섬마다 조선인 포로들을 수색하고 송환하면서 끈질기게 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했다. 심지어 대장경판 자체를 달라고 떼를 써서 사신이 단식 투쟁을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 세종이 이 요청만은 끝까지 거부하자 일본 사신은 한때 왜구를 해인사에 침투시켜 대장경판을 약탈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 외교 사절의 대부분이 승려였던 것도 이런 현상을 부채질했다. 1556년(명종 11)까지 대장경을 요청한 건수가 100회를 넘었는데, 조선은 이중 반 이상을 들어줬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던 나라였고 어느 시점부터 '대장경 그거 다 줘 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오타니대 소장 대장경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으로 가게 됐다. '태종실록' 14년(1414)조의 기록을 보면 태종은 "일본의 풍속은 불법(佛法)을 숭상하기 때문에 존경하고 믿는 것이 여기의 배가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예조에 명해 여흥(=여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일본에 보내도록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150년 넘게 계속되다 보니 조선에는 고려대장경 책이 자취를 감추게 된 반면 일본으로 건너간 대장경들은 일본의 불교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의 고판본은 오타니대 소장본까지 16종이나 된다. 고려대장경에 대한 연구도 계속돼 1710년 고려대장경의 정확성을 입증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이 나왔다. 오늘날 '고려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일본인들의 연구 덕택이었다는 것이다.(5)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역 고려대장경 판본이 일본 오타니대 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2007년까지 해외전적문화재를 조사했던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오타니대 박물관이 소장한 고려대장경 판본은 고려 우왕 7년(1381년) 찍어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고, 조선 태종 14년(1414년) 일본왕에게 선물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오타니대 소장 판본은 고려판 4995첩과 19세기 때 필사된 일본사경 541첩 등 587상자 분량에 이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고려대장경 판본은 1865년 간행된 월정사 소장본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20세기에 찍어낸 것들이다. 박 원장에 따르면 이 판본에는 1381년에 쓴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년)의 발문(사진)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발문은 염흥방(廉興邦·?~1388년)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출세시켜준 공민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대장경의 인출을 발원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와 함께 이색 본인도 “내 조상도 공민왕을 섬겼고, 나 또한 급제하였으므로 공민왕의 은혜를 갚는 것은 대장부의 일이며 두사람(이색·염흥방)의 뜻이 같으므로 발문을 쓴다”고 밝혔다.
박상국 원장은 “이 고려대장경 판본은 공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염흥방이 발원하고 인출경비를 부담했으며, 뜻을 함께 한 이색이 전체 진행을 맡아 발문을 쓰고 신륵사에 봉안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오래 된 판본은 남아있지 않고 모두 일본에 있다는 점이다. 박상국 원장은 “이는 숭유배불정책을 쓴 조선왕조가 일본 사신들의 끊임없는 요구로 고려대장경 판본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14년(1414년)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원하는데, 우리는 경판이 많으니 여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 전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는 왜구침입 문제로 양국간 외교전이 뜨겁게 벌어지던 때. 주로 승려들로 구성된 일본 사신들은 고려대장경 판본은 물론 원판까지 달라고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 원장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태조 3년(1394년)~명종 11년(1556년) 사이 160년 동안 조선을 찾은 일본 사신은 예외없이 고려대장경을 요청했다”면서 “조선은 100회 이상의 요구 가운데 반 이상을 들어주었다”고 전했다. 그는 “따라서 현재 일본에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들은 약탈 문화재가 아니라 숭유억불책을 쓴 조선이 썼던 외교적 흥정거리였다”고 말했다. 박 원장의 ‘오타니대의 고려판대장경’ 논문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해외전적문화재조사목록-일본 오타니(大谷)대학 소장 고려대장경’에 실려 있다.(6)
“日 난젠지에 있는 초조대장경 조선 초 日승려가 수집해 간 것”
문화전문 기자
입력2007-11-01 00:00
업데이트2007-11-01 00:00
고베 젠쇼지 주지 주장… 임진왜란때 강제반출설 뒤집어
‘일본 난젠지(南禪寺)의 일체경(一切經) 장경 중 대부분은 조선 초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
일본 교토 난젠지에 수장된 일체경의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은 고려말∼조선초기 일본 승려들이 수집해 가져간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고베 젠쇼지(禪昌寺) 주지인 곤도 도시히로(近藤利弘)는 고려대장경연구소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로 10·11일 서울대 규장각에서 열리는 초조대장경 국제워크숍 중 ‘일체경의 유래’ 발제를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밝힐 예정이다.
곤도 도시히로의 주장은 일본에 있는 우리의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이 임진왜란과 일제침략기에 강제로 반출됐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곤도는 미리 배포된 발제문을 통해 “젠쇼지의 에도(江戶)시대 기록을 볼 때 일체경은 원래 젠쇼지에 있던 것을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지금의 난젠지로 옮긴 것”이라며 “중국 원(元)나라기의 원판인 제46∼88고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곤도는 그러나 “원(元)판에 더해 1400년부터 1429년까지 부족한 부분을 고려나 중국 각지에서 출판된 것을 구입하거나 일본에서 추가해 지금의 일체경을 갖췄다.”고 덧붙여 일체경이 임진왜란 훨씬 이전인 조선 초기에 이미 완성됐음을 시인했다. 특히 “일체경에 들어 있는 지도를 보면 일체경은 중국의 익주 성도, 복주 동선사각원, 개원사, 항주 만산보령원, 고려의 부인사 등지에서 10세기 말∼13세기 제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며 “제작된 나라에서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는 귀중한 것들”이라고 강조했다.
일체경은 고려의 초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비롯해 중국 송대의 송판, 원대의 원판, 고려사경, 일본 사경 등 한·중·일 삼국의 경전들을 수집해 한질의 대장경으로 완성한 6000권 분량의 대규모 컬렉션. 경, 율, 논 등 이른바 불교의 ‘삼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967년 한국의 한 서지학자가 이 일체경에 고려 초조대장경이 들어 있음을 처음 확인해 기록으로만 전하던 초조대장경의 실존이 확인되어 양국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시대의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에 이어 세계 대장경으론 두 번째 제작된 것.5000여권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몽골전쟁 때 목판이 완전히 파괴된 뒤 기록으로만 전해오다가 일본 난젠지와 국내 고려대장경연구소 등 양국 학자들이 공동 복원과 디지털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현재 국내 300여권을 포함해 일본 교토 난젠지의 1800권, 쓰시마민속자료관 600권 등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가 세상에 알려졌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