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 이후 뒤처진 5가지 이유…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5.05 06:00 수정 : 2020.05.07 09:59

‘갑인자’를 개발한지(1434년) 2년만에 간행한 <자치통감>. 구텐베르크는 그보다도 18년 늦은 1454년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를 발행했다.

‘구텐베르크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필자는 얼마전 <직지>(1377년 간행)보다 138년 빠른(1239년) 금속활자본(보물 제758-2호 공인박물관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연구성과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룬 것 같은 혁명은 없었다’는 독자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는 뼈아픈 지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조선은 왜 애써 금속활자를 만들어놓고 서양처럼 역사를 뒤바꾼 혁신을 이루지 못했을까.

 

■억지로 우겨 설립한 주자소

굳이 <남명증도가>이나 <직지심체요절>까지 들춰볼 필요도 없다. 구텐베르크(1400년 전후~1468년)가 불과 10~20대초였던 조선의 15세기 초중반으로 돌아가보자. 조선의 임금들은 이미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를 국책사업으로 여기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예컨대 태종(재위 1400~1418년)은 즉위 3년만인 1403년 금속활자본을 찍어낼 관청(주자소)을 설립했다. 신료들은 이때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짓누르고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를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때는 조선의 태종·세종 시대라면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한지도 160여년이나 지난 때였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술을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최근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연구성과가 나온 ‘공인박물관 소장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년)보다 215년 늦은 1454년 발행된 구텐베르크 성서.

 

“나무에 새긴 글자를 모래가 함유된 부드러운 갯벌을 평평하게 편 인판(印板)에 찍으면 찍힌 곳에 글자가 새겨진다. 인판이 말라 굳어지면 쇳물이 통할 구멍과 길을 만들어놓고 다른 판을 겹친 뒤 녹은 구리를 구멍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면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 하나하나 글자가 된다.”

이것이 모래주형(주물사) 주조법이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금속활자 주조기술이 부족했다. 최근의 연구성과인 <남명증도가>)에서도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 등 온갖 흠결이 보인다. 주조기술도 그랬지만 인쇄 때가 더 큰 문제였다. 주조한 활자들을 조판틀에 움직이지 않게 배열하고 먹을 묻힌 뒤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야 인쇄가 됐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인쇄할 때 먼저 밀랍(蜜蠟·꿀 찌꺼기를 끓여서 짜낸 기름)을 조판틀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밀의 성질이 본디 부드러우므로 조판활자가 굳지 못했다.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세종실록> 1434년)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태종이 설치한 주자소에서 서적을 인쇄한 것은 ‘정해자’를 만들고(1407년) 그 뒤로도 3년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 1410년(태종 10년)의 일이다.

금속주조법으로 만든 구텐베르크식 활자와 모래주형(주물사)으로 제작한 고려 금속활자. 아무래도 깔끔한 금속주형보다는 모래주형으로 만든 활자는 네모 반듯하지 않고 모래알갱이가 붙어있어 주조나 인쇄상태가 고르지 않을 수 있다.

 

■‘활자의 백미’ 갑인자 개발 비화

그럼에도 여전히 활자와 인쇄기술은 턱없이 부족했다. 세종은 1420년 ‘경자자’와 1434년 ‘갑인자’를 개발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금속활자 주조 및 인쇄술을 완성한 이는 과학자 이천(1376~1451)이었다.

“경자년(1420년)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아…공조참판 이천에게 명해 새로 글자모양을 고쳐 만드니 매우 정교하고 치밀했다…하루에 인쇄한 것이 20여 장에 이르렀다.”(<세종실록> 1422년 10월29일)

세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인쇄 때 글자가 이리저리 쏠리고 비뚤어지는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현직에서 한발 물러난 지중추부사(명예직·정2품) 이천에게 “당신이 한번 개선해보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천은 “매우 힘든 과업”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소용없었다. 세종이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면서 실록의 표현대로 ‘강요’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강요하자’ 경(이천)이 지혜를 써서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으니….”(<세종실록> 1434년)

<용재총화>는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킨 방법은 ‘대나무였다’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글자를 조판하는 법을 몰라서 밀랍을 녹여서 글자를 붙였다. 그 뒤에 대나무로 빈 곳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

1420년 ‘경자자’를 개발하고, 조판틀이 흔들리지 않게 개선한 다음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다. 주자소에서는 1420년부터 2년간 <자치통감강목>을 찍어냈다. 1434년 개발한 ‘갑인자’는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았다.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해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갑인자’를 20여 만 자를 주조했다.

<용재총화>에 소개된 모래주형법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이던 고 오국진 기능보유자가 재현한 금속활자의 제작과정. 나무에 글자를 새겨 ‘어미자’를 만들고 적정한 수분을 유지한 갯벌의 해감 모래를 곱게 체질을 한 뒤 목재나 금속으로 어미자가지가 들어갈 적당한 거푸집을 만든 뒤 그 공간에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든다.|청주고인쇄박물관 자료에서 정리

 

이 ‘갑인자’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데 성공할만큼 조판틀(활판)을 고정시키는 기술도 발전했다. 현전하는 ‘갑인자본’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지고 있고 판면이 커서 늠름하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이로써 활자는 정해자(1407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로, 인쇄는 두어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진보했다.

각종 문헌을 읽어보면 금속활자 인쇄술을 개발하기 위한 태종과 세종의 분투는 유별났다. 내부(內府·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의 구리를 금속활자의 재료로 썼으며, 부족분은 대소 신료들이 자원해서 기부하는 형식으로 충당했다. 귀한 금속활자로 만든 서적이 잘못되면 감인관, 즉 서적간행을 책임진 관리를 곤장으로 때렸고, 의금부에 구속시키기도 했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그렇게 감인관을 곤장으로 치니 잘못된 글자가 아주 없어졌다”고 전했다.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이 고안한 금속활자 제작법. 펀치 끝에 예리한 칼날로 알파벳을 새긴 다음 연한 구리판 등에 찍어 활자를 만든 뒤 수동 주조기에 꽂고 쇳물을 부은 다음 조판하고 압착기(프레스)로 눌러 인쇄하는 방법이다. |존 맨의 <구텐베르크 혁명> 에서

 

■태종·세종이 금속활자에 올인한 이유

그렇다면 태종·세종 같은 임금들은 왜 그렇게 금속활자 개발과 인쇄에 시쳇말로 ‘집착’했을까.

1434년 ‘갑인자’를 개발한 세종은 무지몽매해서 불효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존속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잇따르자 삽화와 그림설명 및 시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간행 배포했다.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인 <소학>도 찍었고, 역사서인 <자치통감>까지 간행했다.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 중한 보배가 되었다. <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 종이 30만권만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세종실록>)

눈이 침침한 노인들도 책을 보게 하려고 활자가 큰 갑인자를 개발했다는 얘기다. 금속활자를 그토록 개발하려 했던 세종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가 구구절절 배어나온다.

세종은 “‘경자자’ ‘갑인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화와 교육이 번성하고 세상의 도리가 높아질 것”이라 했다. 물론 태종도 “훌륭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서적을 넓게 보고 널리 보급해야 한다”면서 주자소를 설립한 바 있다. 조선의 15세기초는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펼치기 위한 태종과 세종의 동분서주와 노심초사가 절절이 배어있던 시절이었다.

구텐베르크 주조 및 인쇄의 기본장치인 펀치와 어미자(매트릭스)와 주형(몰드). 모든 과정을 금속으로 진행하고 인쇄 때 압착기로 하다보니 비교적 깔끔한 활자가 나온다.

 

■모호한 행적의 구텐베르크

그렇다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살았던 서양의 15세기는 어떠했을까.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행적을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태종과 세종이 숱한 시행착오 끝에 ‘정해자’와 ‘경자자’, ‘갑인자’를 개발한 15세기 초까지도 구텐베르크의 행적이 모호하기 이를데 없기 때문이다.

금속활자의 주조법과 인쇄과정은 물론이고 활자를 개발한 주자소 직원들에게 술까지 120병 하사했다는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 죄다 남겨놓은 15세기 조선의 기록정신이 오히려 감탄사를 자아낼 정도다.

우선 구텐베르크의 탄생연도부터 불확실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있다.

1434년, 조선의 세종이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 20만자를 주조한 그 해에 비로소 구텐베르크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훗날 구텐베르크와 동업자들의 법정다툼 소송문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소송문에는 후대의 인쇄용어인 ‘프레스’(Press·인쇄기)와 ‘폼’(Form·거푸집) 등과 함께 포도주, 그리고 구텐베르크가 진행 중인 ‘또다른 비밀기술’, ‘모험과 기술’ 등의 용어가 암호처럼 등장한다. 구텐베르크가 이 무렵부터 비밀리에 인쇄술을 연구한 것이 아닌가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무형문화재 금속활자장 고 오국진 보유자가 재현한 금속활자. 조선초까지만 해도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조판하는데 온갖 오려움을 겪었다. 조선초까지 밀랍(벌꿀 찌꺼기)를 굳힌 뒤 활자들을 꽂아 조판했지만 원래 연한 성질의 밀랍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인쇄 때마다 활자가 밀려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바람에 인쇄공들이 고초를 겪었다. 세종 때 활자 사이의 틈을 대나무로 고정하면서 하루 40 여장씩 인쇄하는데 성공했다.

 

■인터넷 혁명과 같은 활자혁명을 이룬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는 1430년대까지도 인쇄술의 걸음마를 막 떼었거나 아직 떼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금속활자술을 완벽하게 터득한 구텐베르크는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온(1448년) 뒤 1450년 무렵 라틴어 표준문법인 <도나투스>를 간행했다. 1454년에는 1쪽에 42줄로 구성된 <구텐베르크 성서>(일명 <42줄 성서>) 180부를 찍어낸다. 1282쪽인 이 성서에 소요된 활자는 약 10만개였다.

구텐베르크가 시위를 당긴 서양의 활판인쇄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사이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됐다.

정보 대폭발이었으니 지금의 인터넷 혁명을 방불케 한다. 유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으로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시대가 이어졌다. 물론 학계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전래된 고려의 기술을 바탕으로 나름의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견해도 발표됐다. <구텐베르크 성서> 인쇄에 쓰인 활자들이 고려의 이른바 모래주형법(주물사주조법)으로 제작된 흔적들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텐베르크가 1430~40년대에 개발한 것으로 보이는 ‘모종의 비밀기술’이란 고려의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든저렇든 고려·조선의 인쇄술은 지식의 창제와 복제라는 측면에서 뒤쳐졌고, 서양의 인쇄술은 세상을 뒤바꾸는 일대혁명을 일으켰으니 명암이 갈렸다 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와 그 후예들이 고안한 금속주형 인쇄는 활가자 각지고 매끈하고 강해서 다량으로 인쇄하기 좋았다.

 

■발명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

그 원인이 무엇일까. 우선 구텐베르크는 시대가 구텐베르크를 낳았다고 할만큼 운이 좋았다.

구텐베르크는 주화주조조합에 종사한 부친에게서 금화주조법을 배웠고, 그 자신 금세공술 분야의 장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전은 금덩어리를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강하게 때리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또 당시에는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짜내는 압착기(press)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인쇄기라는 뜻인 프레스(press)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전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주변의 도구를 응용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는 바로 이 점에서 착안했다. 우선 펀치와 같은 금속 끝면에 날카로운 도구로 활자를 새긴다. 펀치 끝에 새긴 글자 모형을 구리 같은 무른 금속 위에 대고 망치로 두들긴다. 그러면 구리판에 글자가 새겨진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납과 주석, 안티몬을 섞어 녹인 쇳물을 붓는다. 그 쇳물이 식어 굳으면 비로소 활자가 된다. 그렇게 활자들을 만든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가 떠올린 장치는 바로 압착기, 즉 프레스였다. 압착기로 포도에서 즙을 짜는 원리를 적용하여 균일한 인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 중 하나인 퇴계문집목판. 국내 목판인쇄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일반적인 인쇄술이었다, 금속활자는 목판인쇄를 보완할 목적으로 활용됐다. |문화재청 제공

 

■루터의 종교개혁과 인쇄술

이 뿐이 아니었다, 당대 유럽은 인쇄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중세 후기 교양운동과 그에 따른 학문의 번영으로 14세기 말부터 대학들이 속속 생겨났다. 또한 필경사 한사람이 성서 1부를 필사하는데 3년이 걸릴 정도(1282쪽 짜리 <구텐베르크 성서>의 경우)였으니 끓어오르는 대중성서의 수요를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대중성서 판매에 뛰어들었다. 특히 “설사 성모 마리아를 겁탈했어도 면죄부를 사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수도사 마르틴 테첼(1465~1519)의 파렴치한 주장은 마르틴 루터(1483~1546)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1517년).

그러나 만약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없었다. 면죄부를 찍어내며 돈을 벌었던 구텐베르크의 후예들은 이제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비롯한 연설문과 논문, 반박문, 그리고 신구약성서를 대량으로 찍어대며 돈을 벌었다. 루터는 “인쇄술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도와주신 하느님이 주신 가장 고귀하고 무한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토로했다. 이제 유럽인들은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쇄매체를 통해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면서 기존의 견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비단 종교개혁 뿐이 아니었다. 인쇄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게되면서 폭넓은 식자층의 시대가 열렸다. 르네상스와 과학혁명도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에겐 목판인쇄가 있었다

반면 금속활자 발명국인 고려~조선에서는 왜 혁명을 이루지 못했을까. 다양한 견해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번째 우리에게는 금속활자 말고도 또 하나의 인쇄술이 있었으니 바로 목판인쇄였다.

불교경전과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을 수행과 공덕을 쌓는 행위로 여긴 선조들은 목판인쇄술을 발명했다. 그 결과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42년)을 필두로 초조대장경(1011~1087)과, 고려대장경(1233~1248) 등을 찍어냈다. 그러나 목판인쇄의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목판을 새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한번 삐끗해서 글자를 잘못 새기기라도 하면 그 목판은 버려야 했다.

그래서 활자 1개를 주조하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그것이 1230년대 찍어낸 책이 바로 <남명증도가>와 <고금상정예문> 등이다.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목판인쇄를 보완하는 정도로 쓰였다. 예컨대 급히 전국적으로 알려야 했던 국왕의 윤음(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 같은 문서와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보여야 했던 <삼강행실도> 등의 서적은 중앙에서 일단 금속활자본으로 소량 인쇄해서 각 도의 감사(도지사)에 내려보냈다. 그러면 각 감사들은 그것을 다시 목판으로 새기거나 베껴서 예하 각 수령에게 배포했다.

구텐베르크가 1454년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어낸 뒤 서양의 인쇄술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50년동안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됐다.

 

■모래와 금속의 차이

두번째로는 앞서 살폈듯 당시 제작한 금속활자 주조법과 인쇄법으로는 하루에 40여장 인쇄한 것이 고작이었다. ‘모래주형’을 이용해서 주조하다보니 모래알갱이 때문에 활자가 깔끔하지 않고, 네모 반듯 하지도 않았다, 물론 주조 때 너덜이(쇳물찌꺼기)도 생겼다. 그러니 활자들을 배열·조판할 때나 인쇄할 때 밀리거나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금속(펀치) 끝에 글자를 새긴 뒤 구리판 등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새겨 깔끔하게 주조했다. 또 서양에서는 활판을 조여 주는 장치, 즉 압축 인쇄기가 발달했다. 고려·조선의 부족한 주조 및 인쇄기술을 탓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은 이미 폭넓게 쓰였던 동전제작용 금속펀치와 포도주 압축기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맨땅에서 헤딩’ 하다시피한 고려·조선의 지도자와 기술자들을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고려·조선에는 목판이 ‘주(主)’이고, 금속활자가 ‘부(副)’였다.

세번째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았던 조선에서는 아무래도 금속보다는 나무를 구하기 쉬웠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각종 문헌을 읽어보면 태종과 세종 등 조선의 임금들은 금속활자 개발을 위해 내부(內府·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의 구리를 금속활자의 재료로 썼다. 심지어 부족분은 대소 신료들이 자원해서 기부하는 형식으로 충당했다. 재료 및 비용조달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준다.

구텐베르크 성서에 사용된 292개의 인쇄활자, 5만자가 넘는 한자로는 구형하기 힘들다. |슈테판 퓌셀의 <구텐베르크와 그의 영향>에서

 

■‘기밀누설죄’로 혹독한 고문 받았던 조선의 출판

네번째로 지적되는 것은 인쇄의 지향점이 달랐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의 세종은 “금속활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에서 서적은 기본적으로 대중용이 아니었다. 주로 왕실과 사대부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다. 가령 1577년(선조 10년) 의정부의 승인 아래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상업용으로 인쇄해서 팔았던 업자 30여명이 의금부에 붙잡혀 사경을 헤맬 정도의 고문을 받고 죗값을 톡톡히 치르기도 했다. 그들의 죄명은 ‘국가기밀누설죄’였다.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널리 서적 등을 보급하는 상업용 출판으로 시작했던 서양과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북한 개성 만월대 조사단이 2017년 발굴한 금속활자 ‘성할 선’자. 13세기 유물인 꽃모양청자접시 속에 박힌채(○표시 안) 확인됐다.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년)와 같은 시기의 금속활자다.

 

■5만자 한자와 26자 알파벳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문자이다. 기본적으로 서양에서는 26자 알파벳으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 대문자와 소문자 두 종류를 쓴다 해도 52자면 모든 단어를 구현할 수 있다. 아닌말로 서양에서 활판인쇄를 위해서는 52개의 활자 주형만 만들면 그만이 아닌가.

하지만 동양의 공식문자인 한자는 어떤가. 5만자가 넘는다. 게다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글씨체는 또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어떤가, 현대국어에서 표현될 수 있는 글자는 최소 2350자에서 최대 1만1172자라 한다. 하물며 고어(古語)와 한자를 섞어 써야 했던 조선시대 때는 어떠했으랴. 이루 말할 수 없는 활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금속활자의 유용성은 주조한 활자들을 이 책 저 책을 찍을 때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은 말할 나위 없고 쉽다는 한글로 된 책을 금속활자로 제때 찍어내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활자가 필요했을 지 가늠하기 어렵다. 동양에서 활판인쇄보다 목판인쇄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으뜸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안타깝기는 하다. 고려·조선이 비록 금속활자 발명국이지만 서양의 구텐베르크 혁명과 같은 사회변화를 이끌 토양이 마련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남권희 경북대 교수,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최경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등이 기사작성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활자기술의 제작원리는 https://blog.naver.com/ohryan77/221419516664에서 도움받았습니다.)(1)

<참고자료>

슈테판 퓌셀, <구텐베르크와 그의 영향>, 최경은 옮김, 연세대 대학출판문화원. 2014

존 맨, <구텐베르크 혁명>, 남경태 옮김, 예지, 2003

박상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김영사, 2020

이윤석, <조선시대 상업출판>, 민속원, 2016

남권희, ‘목판과 활자인쇄를 통해본 전통시대 지식과 정보의 소통’, <사회과학 담론과 정책>6(1), 경북대가회과학연구원, 2013

 

 

가장 오래된 '13세기 금속활자’ 개성 만월대서 찾았다…청자그릇 속에 박힌채 출토된 '성할 선’자

입력 : 2019.11.14 09:15 수정 : 2019.11.14 14:17
이기환 선임기자

북한 개성 만월대 조사단이 2017년 발굴한 금속활자 ‘성할 선’자. 13세기 유물인 꽃모양청자접시 속에 박힌채(○표시 안) 확인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과 같은 시기의 금속활자다. |최광식 교수 제공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알려진 <고금상정예문>(1234~1241년)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년)와 같은 시기인 13세기에 사용된 금속활자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성할 선(人변에 扇)’자가 새겨진 이 금속활자는 13세기 유물인 청자접시 속에 박힌채 발굴됨으로써 역사학·고고학적으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2007년 1차 조사 때부터 만월대 공동발굴을 이끌어온 최광식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고문(고려대 명예교수)은 15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열리는 ‘고려 도성 개경 궁성 만월대’ 학술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통해 “2017년 북한이 만월대를 단독 발굴하면서 ‘성할 선’자를 더 찾아낸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청자속에 박힌채 발견된 금속활자

지금까지 남북한 학자들이 고려궁성인 개성 만월대에 대한 공동조사를 시작한 2007년부터 이곳에서 찾아낸 고려 금속활자는 모두 5점으로 알려져 있었다. 2015년 11월 남북한 조사단이 공동으로 찾아낸 ‘한결같은 단(전·혹은 아름다운 전)’자 1점과, 2016년 북측의 4차 핵실험과 남측의 개성공단 무기한 중단 등에 따라 북측 단독으로 확인한 4점(水변에 仄·糟·名·明) 등이다. 기존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복(山 밑에 復)’자와 북측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전(顚)’자 등 2점을 합하면 총 7점의 금속활자가 확인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북한이 소장중인 금속활자. 물흐르는 모양 칙과 지게미 조, 이름 명 눈밝을 명, (산)이마 전 등이다.|조정철의 ‘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와 청자 꽃모양 접시에 대하여’, <민족문화유산>, 2018년 4월호에서

 

■2017년 북한 단독으로 발굴

그런데 이 7점 외에 남북관계가 급냉되면서 북한 단독으로 발굴한 지난 2017년 조사에서 금속활자가 1점 더 확인됐다는 것이다. 최광식 교수는 미리 배포한 기조강연문(‘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의 성과와 과제’)에서 “확인된 ‘선’자는 2015년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한 지점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다”면서 “재질도 2016년 북한이 단독 발굴한 4점과 같다”고 전했다. 최교수는 “이같은 발굴성과는 북측 조사단의 일원인 조정철이 지난해 4월 학술지 논문(‘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와 청자꽃모양 접시에 대하여’, <민족문화유산>)을 발표함으로써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최교수는 “이 금속활자 ‘선’자는 발굴 당시 흙속 30㎝에 묻힌 청자 접시 안에 박혀있었다”고 전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확인된 금속활자는 남북한 통틀어 8점으로 늘어났다.

북한의 노동신문에 실린 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들. |최광식 교수의 기조강연문에서

 

북한학계에 보고된 이 ‘성할 선’자는 가로 1.174cm×세로 1.164cm×높이 0.68cm 정도이다. 2007년 이후 찾아낸 다른 5점의 금속활자는 ‘물채질’로 걸러냈지만 ‘성할 선’자는 흙속에 묻혀있던 13세기 청자 속에 박혀있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최교수는 “이 ‘선’자가 13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꽃모양 청자접시’와 함께 발굴됐다”면서 “이는 금속활자의 제작시기와 관련되어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남북한 조사단이 공동으로 발굴한 ‘단(전)’자는 만월대 신봉문터 서쪽 255m 지점에서, 2016년과 2017년 북한이 단독으로 발굴한 4점과 1점 역시 이곳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다. 북한학계 보고에 따르면 1956년 발굴되어 지금 조선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전(顚)’자 역시 신봉문터 서쪽에서 확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속활자들의 생김새나 크기, 재질 등이 모두 같다고도 한다. 이는 만월대 신봉문터 인근 지역에 금속활자를 주조한 주자소의 존재를 가늠해볼 수 있다.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복’자는 1913년 10월7일 덕수궁 구 왕궁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 아카보시(赤星佐七)로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2원을 주고 사들인 것이어서 출토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출토지가 ‘개성’인 것으로 전해진다.

남북한이 1점씩 소장하고 있었던 금속활자등. 남측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복’자는 1913년 일본인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며, 북측 소장 ‘전’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한 활자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금상정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찍어낸 활자인가

지금까지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은 1234~1241년 사이에 출간된 <고금상정예문>과 1239년 나온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이 있다.

<고금상정예문>은 나라의 제도와 법규를 정할 때 참고했던 책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고금상정예문>은 기록만 존재할 뿐이었다.

또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경우 책의 발문을 보면 고려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鑄字本·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책도 안타깝게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서양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가 처음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이 1447년 무렵이니 <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보다 무려 210여년 뒤처진다.

최교수는 “이번에 12~13세기에 제작된 꽃모양청자접시(청자화형접시)와 함께 발굴됨으로써 ‘선’자의 제작시기가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고금상정예문> 시기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알려주었다”면서 “‘고려=금속활자의 나라’임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발굴성과”라고 의미를 두었다.

개성 만월대 서북지구. 이 인근에서 고려 금속활자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이 근방에 금속활자를 제작한 주자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짙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려 금속활자는 왜 적을까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금속활자의 원조임에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금속활자가 턱없이 적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의 경우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로 금속활자를 대량보급한 것과 달리 최초발명국이던 고려의 금속활자는 그 존재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 서양에서는 금속활자 선풍이 불었을까.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은 고려였지만 활판인쇄로 실용화한 것은 구텐베르크였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유럽에서는 수도사가 한 자 한 자 필사해서 10~15일에 겨우 한권의 성경을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구텐베르크가 혜성같이 나타나 같은 책을 수십권. 수백권을 찍어댄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를 찍어낸 지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50년동안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됐다. 유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으로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최초발명국인 고려와 그 뒤를 이은 조선에서 서적은 대중용이 아니었다. 왕실과 사대부 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다.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영어 알파벳은 26자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공식글자였던 한자는 5만자가 넘는다. 이렇게 많은 글자를 활자로 구현하기는 매우 힘들다.

고려·조선에서 활자인쇄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는 금속활자의 수도 거의 없다.

2015년 남북공동 조사단의 개성 만월대 제 7차 발굴에서 찾아낸 명문기와. 월개요에서 ‘동똥’이라는 기와장인이 제작한 기와라는 의미이다. 사진은 글자를 도드라지게 처리한 모습.

 

■<증도가자> 재검증, 만월대 주자소 발굴 등이 필요

몇 년 전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어냈다는 이른바 ‘증도가자’가 100여 점 나왔으나 ‘보물 지정’을 두고 진위논란을 빚었기 때문에 치지도외(置之度外) 되고 있다. 문화재청이 이 <증도가자>의 진위를 판정하는 조사단을 조직한 뒤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의 심의에서 ‘보물 지정’이 최종 부결된 바 있다. <증도가자>가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출처와 소장경위가 불분명해 고려금속활자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판정한 것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10월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증도가자>가 고려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유보적인 입장”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증도가자>의 연대가 고려시대일 가능성이 있다는 과학적 분석결과도 있는 만큼 차제에 다시 한번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증도가자>가 13세기 금속활자본인 <고금상정예문> 및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어낸 활자가 맞는데도 출처·소장경위 등을 문제삼아 ‘가짜판정’을 내린다면 씻을 수 없는 손실이기 때문이다.

또하나 ‘지속가능한 개성 만월대의 남북한 공동조사 사업’을 마련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남북관계가 냉랭해진 다음 북한 단독으로 금속활자들을 잇달아 발굴하자 남측학자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활자들이 속속 발굴되는 신봉문터 인근지역에 금속활자를 찍어낸 주자소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재숙 청장은 “최소한 5년 단위의 공동조사 연구사업으로 남북한이 합의해야 정치적인 변수에 구애받고 안정적으로 문화교류사업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만월대 지역은 고려 망국 이후 약 700년 동안 별다른 인위적인 훼손없이 보존되어온 곳이다. 남북한 학자들이 금속활자를 주조한 이른바 주자소’를 찾아낸다면 ‘고려=금속활자 발명국’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굴성과를 이룰 수 있다.(2)

 

 

<증도가자 논란> ① '직지'보다 앞서는 금속활자의 등장?

송고시간2015-11-23 06:01

서지학 권위자 남권희 교수, 2010년 증도가자 존재 주장서체 유사성, 먹 연대 측정 결과 제시…불충분한 논거로 반론 지속

<※편집자 주 = 2010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라는 주장이 제기된 '증도가자'(證道歌子) 논란이 5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연구 결과 발표 이후 진위를 두고 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의 공방이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입니다. 당분간 결론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큰 증도가자 논란의 진행과정과 양측의 주장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기획기사를 2꼭지로 나눠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문화재를 바라보는 지나친 상고주의(尙古主義)가 화근이다."

20여년간 박물관에서 근무한 한 학예사의 말이다. 그가 지적한 상고주의는 옛 문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숭상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문제는 유물이 제작된 시점이 오랠수록 가치가 더 높아진다는 그릇된 인식이다.

 

증도가자가 주목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인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유물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로,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했다고 전한다.

사실 증도가자는 정식 문화재 명칭이 아니다. 보물 제758호로 지정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찍을 때 사용한 활자라는 뜻이다. 이 책은 불교 선종의 고전인 '증도가'(證道歌)에 송나라 남명 법천선사가 게송을 붙인 것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증도가)는 고려 고종 26년(1239) 목판으로 찍은 번각본으로, 발문에 "기술자를 모집해 주자본(금속활자본)을 재차 새겨 오래 전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증도가자가 진품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1239년 이전에는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직지'보다 최소 138년이 앞선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역사책을 다시 쓰게 할 수도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증도가자가 처음 일반에 알려진 시기는 2010년 9월이다. 서지학자인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수년간 진행한 금속활자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면서 증도가자로 명명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당시 다보성고미술이 갖고 있는 고활자 100여개 가운데 명(明), 선(善), 법(法), 불(不) 등 12개를 증도가자로 주장했다. 주요한 근거는 증도가와 서체가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남권희 교수는 증도가자 논란의 핵심이 되는 인물이다. 1981년 경북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규장각 서고(西庫)의 서목(書目)과 장서변천 분석 : 현존 서목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구가톨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지학은 도서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학문으로 단순히 한문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많이 봐야 안목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남 교수는 1990년대 들어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고서적과 고문서를 연구해 학술 논문을 집필했다. 그러다 2006년 '주물사(鑄物砂) 주조법에 의한 금속활자 주조방법 연구'와 '직지 원본 조사 연구'를 발표하면서 금속활자로 관심 분야를 넓혀나갔다.

"학계가 함께 논의해 보자"며 증도가자의 존재를 주장한 남권희 교수는 일부 학자의 반대에도 시종일관 증도가자가 진짜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고려시대 문신인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도 증도가자로 인쇄했다고 주장했고, 증도가자와 증도가의 서체가 다르다는 지적에는 활자에 묻은 먹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제시했다.

2012년까지 남권희 교수는 증도가자와 관련해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못지않게 증도가자와 증도가를 연구한 학자는 김성수 청주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다. 그는 증도가의 간행 배경을 다룬 논문과 증도가자와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비교한 논문을 썼다. 불교서지학 전문가인 김 교수는 남 교수와 같은 시기에 경북대를 다녔다.

남 교수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진품이라고 거듭 주장했음에도 증도가자의 결론이 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서체의 유사성과 먹의 탄소연대 측정 자료만으로는 증도가자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서체가 흡사하다는 점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먹이 고려시대 산물로 입증된다고 해도 활자까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증도가'라는 책 역시 1980년대 최고의 금속활자본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청주에 사는 한 서예연구가가 금속활자로 찍은 새로운 증도가가 발견됐다고 밝혔고, 여러 언론이 이를 다뤘다. 그러나 결국 흐지부지됐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여전히 직지심체요절이다.(3)

 

 

 

<증도가자 논란> ② 세기의 유물일까, 희대의 촌극일까

송고시간2015-11-23 06:01

2014년 학술조사 용역 보고서로 심화된 진위 논쟁모든 활자 소장 경로 파악하고 조사해야 결론 나올 듯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동안 잠잠하던 증도가자 논란은 경북대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남권희)이 지난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제출한 '증도가자 기초학술조사 연구' 보고서가 올해 2월 언론에 알려지면서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김종춘 다보성고미술 대표가 부인 명의로 2011년 11월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자 조사를 실시하던 문화재청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문화재위원회의 지적에 따라 용역을 발주했고, 이 사업을 남권희 교수가 맡아 수행한 것이다.

증도가자의 존재를 알린 인물이 용역을 맡는다면 정확한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비판이 일었으나, 마땅한 인물과 제척 사유가 없다는 이유로 남 교수에게 조사 용역이 돌아갔다.

 

377쪽에 달하는 증도가자 기초학술조사 연구 보고서에는 남 교수의 종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 강화된 내용이 담겼다. 그는 다보성고미술의 금속활자 101개와 국립중앙박물관 활자 1개, 청주 고인쇄박물관 소장 활자 7개를 조사해 62개(다보성고미술 59개, 고인쇄박물관 3개)를 증도가자로 분류하고 나머지 47개는 고려활자로 규정했다.

남 교수는 보고서에서 "3곳의 소장 활자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서로 공통적인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며 "서체는 12∼13세기 대장경이나 사간본과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며, 활자의 금속 표면을 비파괴분석으로 조사했더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와 비슷한 데이터를 얻었고, 먹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에서는 19개 중 17개에서 12세기 이전에 사용됐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이 조사에 포함된 국립중앙박물관 활자는 '복'(복<山 아래 復>) 자로, 이 박물관의 전신인 이왕가박물관이 고미술상에게 구입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무덤에서 출토됐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어 증도가자 논란이 일기 이전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고려활자로 추정됐다. 박물관은 남 교수가 증도가자를 주장하기 전인 2010년 7월 이미 문화재 지정을 신청한 상태였다.

또 고인쇄박물관 활자는 남권희 교수 연구팀이 속한 경북대 산학협력단이 2010년 연구 용역 과정에서 사들인 뒤 박물관에 전달한 것이다. 남 교수는 전체 용역비 4억원 중 약 8천600만원을 활자를 매입하는 데 썼다.

남 교수가 문화재연구소의 용역 조사를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증도가자 연구에 편입시킨 국립중앙박물관과 고인쇄박물관 소장 활자는 결국 논쟁의 씨앗이 됐다. 국과수는 고인쇄박물관 활자 7점에 대해 자체 개발한 서체 비교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컴퓨터 단층촬영(CT)을 실시해 위조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놨고,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복 활자는 증도가자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남 교수가 주도해 내놓은 용역 보고서가 상당히 불명확하고 문제점이 많다고 봤다. 일례가 유일하게 파괴분석을 한 '법'(法) 자의 금속 성분이다. 선행 연구를 그대로 인용한 분석 결과에는 20세기에 인공적으로 만든 원소인 테크네튬(Tc)이 2.62% 함유돼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재정 학예연구관은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증도가자가 가짜이거나 분석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관은 "용역 보고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를 증도가자라고 하지 않았는데, 최근 갑자기 증도가자 논란에 휘말렸다"면서 "막연하게 서체가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증도가자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문화재에 대한 감정이나 조사 결과가 잘못된 사례는 종종 나온다. 지난 2013년 이상규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연구팀은 세종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관(翼善冠, 왕이 집무할 때 쓰던 모자)을 발견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임진왜란 이후인 1650년대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증도가자는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 남 교수가 금속활자 109개를 증도가자로 묶어버렸기 때문에 "증도가자는 가짜"라고 단정하려면 모든 활자를 하나하나 과학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그중 단 몇 개만 진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부만 진짜로 확인되더라도 역사적 의미와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고인쇄박물관 활자 7개를 조사한 강태이 국과수 연구사는 "증도가자로 추정되는 유물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여러 학자가 붙어서 함께 연구하면 증도가자의 실체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남 교수가 수세에 몰리는 분위기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증도가자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만큼이나 진품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지학자는 "지금까지 나온 증도가자 관련 논문과 발표문을 거의 다 읽었는데, 남 교수의 의견에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면서 "이러한 논란이 증도가자가 진품임을 확인해 과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증도가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관마다 차이가 있다. 특히 청주 고인쇄박물관은 증도가자가 진품으로 판명 나면 '직지의 고장'이라는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비쳐왔다. 직지 활자 주조법 연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황정하 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국과수 발표에 공동 연구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증도가자 논란에 엮이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김종춘 대표가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 뒤 4년간 지정 여부를 정하지 못한 문화재청은 더 이상 미루기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고 해서 학계의 주장이 대립하는 와중에 무작정 결론을 낼 수도 없는 형국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6월 3개 분야 12명으로 이뤄진 '고려금속활자 지정조사단'을 구성했고, 조사 기관과 방법 등을 조율하는 중이다. 김 대표로부터는 활자의 전수 조사에 대해 구두로 협조 약속을 얻어냈다. 다만 고인쇄박물관 활자는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아 조사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상태다.

증도가자의 진위를 밝히기 이전에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는 '소장 경로'다. 증도가자의 비교 대상으로 사용되는 국립중앙박물관 복 활자마저도 출토지와 경로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보성고미술의 증도가자 추정 활자는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대구 고미술상이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경찰이 현재 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결국 증도가자 논란은 문화재청과 경찰이 내놓을 결과에 따라 마침표가 찍힐 공산이 크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4)

 

 

 

[단독] ‘800년전’ 고려 증도가자에서 20세기 인공원소가 나왔다고?

‘고려 금속활자’ 진위 논란 빚어온 ‘증도가자’
1930년대 발명 인공원소 ‘테크네튬’ 성분이 검출
변조 여부 둘러싼 논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

기자노형석
  • 수정 2015-11-16 00:27 등록 2015-11-16 00:27
2010년 남권희 경북대교수가 공개한 증도가자의 일부.

 

2010년 남권희 경북대 교수가 세계 최고의 고려 금속활자라고 주장하며 공개한 뒤 진위 논란을 빚어온 ‘증도가자’의 일부 활자에서 1930년대 발명된 인공원소인 테크네튬 성분이 검출된 사실이 밝혀졌다. 남 교수는 증도가자 활자들의 연대를 현존 세계 최고의 고려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보다 100년여 앞서는 13세기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활자 일부에서 20세기 발명된 원소 성분이 확인됨에 따라 증도가자 위변조 여부를 둘러싼 의혹과 논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고려·조선 활자 전문가인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관이 14일 열린 한국서지학회 가을공동학술대회(국립중앙도서관) 토론에서 올해 2월 경북대산학협력단(책임연구원 남권희 교수)이 문화재청 용역을 받아 펴낸 보고서 <증도가자 기초학술조사연구>를 검토, 평가한 내용을 공개하면서 드러났다.

이 연구관은 이 보고서에 증도가자의 선행연구 사례로 소개된 개인소장 증도가자 활자인 ‘法(법)’자를 문제 삼았다. 증도가자로 분류된 활자 중 유일하게 이 ‘法’자의 표면을 긁어 금속 성분을 분석하는 파괴검사를 벌여 분석한 결과 본래 금속활자의 주성분인 구리와 주석 외에 인공원소인 테크네튬 성분이 2. 62%검출됐다는 것이다. 이 학예관은 “보고서를 보면, 이 ‘법(法)’자의 성분 구성은 산소(O) 1.74%, 규소(Si) 0.49%, 구리(Cu) 88.5%, 테크네튬(Tc) 2.62%, 주석(Sn) 6.66%로 나와있다. 그런데 미량이 나온 테크네튬(원자번호 43)는 과학자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최초의 원소로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원소가 검출된다는 것은 활자를 위조한 것이던가, 아니면 분석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밝혔다. 테크네튬은 1937년 이탈리아 광물학자 카를로 페리에르와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에밀리오 세그레이가 처음 만들어낸 방사성동위원소다. 우라늄보다 가벼우며 핵의학영상검사 등에 쓰이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연구용원자로에서 만들어내는 인공원소여서 고려활자의 옛 제조과정에서는 들어갈 수 없는 성분이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경북대산학협력단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테크네튬이 어떤 유래를 지닌 원소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법’자의 성분 분석결과가 조선시대 활자의 구성성분과 유사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연구관은 “보고서에서 근거로 댄 조선시대 활자들은 비교 자료로서의 유용성이 떨어지며, 문제의 활자 성분에는 다른 활자에 대부분 들어가는 납(Pb)도 포함되지 않는 등 다른 활자들과 성분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도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남권희 교수는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문제의 ‘법’ 활자는 증도가자를 다량 수집한 김종춘 다보성고미술대표의 소장품으로 10년전 김기호 충북대 신소재 공학과 교수팀이 유일하게 파괴분석 조사를 벌였으며 당시 조사경위는 나도 잘 모른다”며 “당시 조사팀에게 확인해보고 의문이 남아있다면 다시 파괴검사를 해서 진상을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증도가자의 진위 논란은 지난 5년여간 국내 문화재학계의 뜨거운 감자다. 세계 최고 고려활자설을 주장해온 남 교수팀은 지난해 문화재청의 연구용역을 맡아 올해 2월 증도가자가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보고서를 냈으나, 되레 연구용역 선정과정에서의 편파특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와 함께 4월부터 각계 전문가를 동원한 종합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뒤이어 지난달 31일 열린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추계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강태이 연구사가 증도가자로 분류됐던 청주 고인쇄박물관 소장 활자 7점을 비파괴 분석한 결과 위조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아 논란을 다시 점화시켰다. 남 교수는 이에 대해 보존과학 학술대회에서 바로 반론을 편데 이어 14일 서지학회 정기학술대회에도 원래 일정에 없던 반론을 자청해 “국과수 조사결과는 문화재 보존과학과 서지학적 지식 등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나온 잘못된 해석과 판단”이라고 주장하며 진품설을 고수했다. 이재정 연구관의 발표는 이날 남 교수 반론에 대한 질의 형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 연구관은 “활자의 진위 여부를 떠나 경북대산학협력단의 보고서는 상당부분 근거가 미약한 추론으로 채워져 있다. 논란의 당사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활자의 성분 문제 등을 비롯한 증도가자의 쟁점을 논의하는 평가토론회가 있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5)

 

 

 

<주>

 

 

 

(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 이후 뒤처진 5가지 이유…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 - 경향신문 (khan.co.kr)2020.05.05

 

 

(2) 가장 오래된 '13세기 금속활자’ 개성 만월대서 찾았다…청자그릇 속에 박힌채 출토된 '성할 선’자 - 경향신문 (khan.co.kr)2019.11.14  

 

 

(3) <증도가자 논란> ① '직지'보다 앞서는 금속활자의 등장? | 연합뉴스 (yna.co.kr)2015/11/23 

 

 

(4) <증도가자 논란> ② 세기의 유물일까, 희대의 촌극일까 | 연합뉴스 (yna.co.kr)2015/11/23 

 

 

(5) [단독] ‘800년전’ 고려 증도가자에서 20세기 인공원소가 나왔다고? (hani.co.kr)2015-11-16

 

 

 

 

<참고자료>

 

 

'直指'보다 앞선 금속활자 출토 (chosun.com)2015.12.0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 사라졌다고?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2007년 11월 17일 

 

 

 

한국고대사 | "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졌다." - Daum 카페

 

 

 

한국고대사 | 구텐베르크는 고려의 금속활자기술을 배워서 활자 만들었다. - Daum 카페

 

 

 

 

KBS역사스페셜 – 증도가자 논란, 세계 최고 금속활자의 진실은?

https://youtu.be/d8LJIXa-GtE?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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