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 전 침몰한 신안보물선…수출금지품 800만개 실은 밀수선"[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 기자2023. 12. 4. 05:00
신안 보물선에서 출토된 동전. 총 갯수가 800만개나 되었고 무게가 28t에 이르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30, 50, 70, 700, 900, 1500. 무슨 숫자조합일까요. 올해(2023년)에 유독 많이 붙은 ‘~주년’의 수식어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과, 천마총 발굴 50주년이고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입니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 방문(1123년) 900주년이 됩니다. 백제 무령왕의 장례식(523년)이 거행된지 1500주년이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올해가 또하나의 ‘~주년’이었다는 사실을 알린 행사가 열렸더라고요.

그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 보물선’이 1323년(충숙왕 10) 원나라 경원(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출발한 지 700주년이 된 해라는 겁니다. 얼마전(11일) 고려대에서 ‘신안선 출항 700주년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답니다.

새삼 ‘신안 보물선’ 인양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신안선에서 인양된 동전. 배 가장 아랫부분에 깔려있던 자단목 위에 총 66종류의 동전이 놓여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쇠닻과 도자기

전남 목포에서 서북쪽 40㎞ 거리에 증도(신안군)라는 섬이 있습니다. 1972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인근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민 최씨의 그물에 갈퀴 4개가 달린 쇠닻이 걸려 올라왔습니다. 길이 2m30㎝에 무게가 140㎏이나 되는 대형 닻이었어요. 최씨는 이 닻을 이웃주민 박씨에게 건넸습니다.

“정치망 어장의 그물추로 쓰라”고요. 박씨는 2㎞ 떨어진 죽도 해역까지 쇠닻을 끌고가 어장의 그물추로 썼습니다.

물론 이 그물추가 무엇인지 최씨와 박씨가 알 턱이 없었습니다.

4년 뒤인 1975년 8월20일이었습니다. 증도 방축리 앞바다에서 조업중이던 어부(최형근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도자기 6점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이 도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1195년(남송 영종)에 주조한 경원통보(왼쪽)와 1068~1077년(북송 신종) 연간에 만든 희령원보(가운데), 1310-1311년(원 무종) 시대에 제작된 지대통보.|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요강과 개밥그릇으로 쓰인 청·백자

사실 이 해역에서는 1950년대부터 어민들의 그물에 곧잘 중국제 청·백자가 걸려 올라왔는데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답니다. 이 도자기를 요강 혹은 개밥그릇으로 사용했거나 엿과 바꿔먹기도 했다죠.

최형근씨는 인양한 도자기들을 그냥 집 마루 밑에 넣어 두었답니다. 그나마 엿바꿔 먹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던 거죠.

 

해가 바뀐 1976년 1월 초등학교 교사였던 동생(최평호씨)이 형 집을 찾아와 마루밑 청자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동생 최평호씨의 ‘촉’이 발동됩니다. 뭔가 심상치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린 최평호씨는 신안군청에 신고했습니다.

얼마 후 다른 어부의 그물에도 도자기 한 점이 걸렸습니다. 그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자 증도 앞바다에 도굴범들이 북적댔습니다. 그해 9월 도굴꾼 이모씨가 청자화병 등 122점을 인양해서 몰래 팔아넘기다 검거됐습니다.

이와같은 사건이 터지자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발굴단을 꾸려 사상 처음으로 수중발굴에 나서게 됩니다.

1976년 10월 말 1차 긴급발굴 끝에 청자 52점을 포함해서 112점의 도자기를 건져올렸습니다.

목포해양문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자단목. 고급 가구재로 쓰이는 자단목이 선체의 밑바닥에 1017점이나 깔려 있었다.|목포해양유물전시관 제공

 

■고려 앞바다의 보물선

이러한 발굴사실을 접하고 무릎을 친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4년 전 1~2㎞ 떨어진 해역에서 발견된 대형 닻을 선물받아 어장의 그물추로 쓰고 있던 박모씨의 동생이었습니다.

박씨의 동생은 이 쇠닻이 도자기 발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즉각 관계당국에 신고했습니다.

전문가의 감정결과 이 그물추는 송·원나라 시대에 사용된 중국제 닻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쇠닻의 크기(2m30㎝)와 무게(140㎏)로 미루어볼 때 이 닻을 장착한 배는 300t 정도 되는 대형선박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발굴 결과 해저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최대 길이 34m, 최대 폭 11m)은 10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200t급 대형 선박으로 추정되었습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천동지’, 그 자체였습니다.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는데요.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인양되었습니다.

자단목에 쓰여진 다양한 먹글씨. 일종의 물품꼬리표인 글씨지만 그 내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김병근의 논문에서

 

■하카다행 무역선의 침몰

이 배가 언제 어디서 출항했으며, 어디로 가는 무역선이었는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인양된 명문 목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배에 실려있는 물품에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 선적일자, 수령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목간이 364점 달려 있었거든요. 오늘날의 ‘택배 송장’이죠. 이 중 ‘지치 3년’명 목간이 눈에 띕니다.

‘지치(至治)’는 원나라 영종의 연호(1321~1323)입니다. ‘지치 3년’이면 1323년(충숙왕 10)이 됩니다.

그와 함께 ‘4월22일, 23일, 5월11일, 6월1~3일’ 목간이 인양되었습니다. 또 ‘경원로(慶元路)’명 청동추가 나왔습니다.

‘경원’은 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절강성 영파)를 가리킵니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지금의 후쿠오카)가 유력했습니다. 목간 중에 교토(京都)의 도후쿠사(東福寺)’와 함께 ‘하코자카궁(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의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였거든요. 교역선장의 의미인 쓰나지(綱司)명 목간도 있었습니다. 배는 1323년 4~6월 세 차례에 걸쳐 하물을 선적한 경원(닝보)을 떠나 일본 하카다로 향하던 중에 고려의 신안 앞바다에서 악천후를 만나 침몰하고 만 겁니다.

자단목에 새겨진 다양한 한자. 한자가 새겨진 자단목은 106점 확인됐다. 자단목의 소유주를 표시한 듯 하다.|김병근의 논문에서

 

■동전 800만개의 정체

그렇게 수장되어 700년 남짓 만에 모습을 드러난 유물 중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아무래도 중국제 도자기였죠.

그런데 이번 학술대회 발표문 중 에노모토 와타루(가本涉)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의 논문(‘일본과 원나라 무역의 시박사 무역과 밀무역’)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이 신안선에 밀수품이 다량 적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건데요.

 

그 밀수품이란 선체의 밑바닥에 쌓여있던 자단목(1017개) 위에 덮여있던 800만개의 동전이라는 겁니다. 무게가 28t에 달했습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로 확인되었는데요.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어요.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습니다. 그 종류 또한 다양했습니다. 66종에 달했는데요.

신(기원후 8~23)에서 제작된 화천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끊임없이 쏟아진 겁니다.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습니다.

자단목에 새겨진 다양한 형태의 기호문양. 한자와 로마자 같은 부호가 섞여있다. 글자와 문양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있다. 삼각형과 원, 나뭇잎, 원 안에 든 팔(八)과 삼(三)이 새겨진 문양도 보인다.|김병근의 논문에서

 

■신안선에 밀수품이 존재했다?

그런데 ‘동전 800만개=밀수품’일 수 있다는 주장이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겁니다. 발표자는 몇가지 사례를 듭니다.

즉 신안선이 출항하기 70여년 전인 1250년대 남송의 관리 포회(1182~1268)가 경원 일대에서 동전의 해외 유출 상황과 그 대책을 논한 장계를 남송 조정에 올리는데요.

“일본선이 경원(공인무역항)에 도착하기 전에 (무역이 불허된) 인근 지역에 들러 동전을 공공연히 (불법) 거래…일본인이 좋아하는 것은 동전 뿐…중국인들은 일본선이 가져오는 물건을 싯가의 10분의1로 구입…시장의 동전이 동이 날 지경….”

자단목에 새겨진 로마자. 자단목의 개수를 표시한 것일 수 있다. 이집트나 유럽의 상인들이 수입해가던 곳에서 나는 자단목을 신안선에 실었다는 얘기도 된다.|김병근의 논문에서

 

또 신안선 출항 후 17년 정도 뒤인 1340년 무렵 원나라 문인 허유임(1287~1364)이 “(중국 남부 해안)에서 ‘섬나라 오랑캐(島夷·일본인)’와 (불법)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졌는데, 관청에서 통제할 수 없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중국에서는 동전 수출이 금지되어있었는데요. 여기에 남송대에 이르러 지폐와 동전 병행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요.(1160년대) 게다가 금나라(1215)와 원나라(1270)가 동전 사용을 금지하고 지폐(보초와 교초) 사용을 공식화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동전이 화폐의 기능을 잃게 되었죠.

자단목에 기재된 문자 및 문양의 상당수가 중세 일본의 무사 및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즉 가문(家紋)일 수 있다는 견해가 제기됐다.|출처:정순일의 논문에서

 

■밀수품은 동전 28t

일본쪽 사정은 어떨까요. 일본에서는 683~958년까지 13종의 동전이 발행되었는데요.

그런데 동전을 주조하는 비용보다 액면가치가 높은 화폐를 유통시킨게 문제였어요. 수도 조영에 필요한 경비 등을 마련해려고 발행한 겁니다. ‘주조비용<액면가치’의 차액에서 얻은 재정수입을 노린거죠.

그러나 이렇다보니 민간에서 동전을 마구 찍어내는 밀조(密造)가 이뤄졌고요. 그럴 때마다 기존의 동전은 10분의 1로 평가절하됐죠. 그러니 동전은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죠.

결국 일본에서 동전은 11세기말이 되면 거의 유통되지 않았답니다.(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그래서 중국의 동전이 대량으로 수입·유통된 겁니다.

일본 가마쿠라(鎌倉·1192?~1333)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한 ‘호조(北條)’씨와, 역시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문인 ‘아시카가(足利)씨’의 가문. 신안선 인양 자단목의 문양과 비슷하다.|출처:위키피디아 일본

 

정리해볼까요. 중국에서 동전은 수출금지 품목이었지만 (동전이 사라진) 일본에서는 그 수요가 생겼고요.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싯가의 10분의 1의 가치로 일본 물품을 살 수 있었죠. 그러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전의 밀수출입이 성행했던 겁니다.

그 당시 신안선이 출항한 경원은 공인된 무역항이었는데요. 그러니 경원항에서는 정상적인 물품을 싣고요. 인근 지역에서는 동전과 같은 밀수품을 선적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번에 발표된 일본학자의 논문입니다.

신안선에 28t이나 선적된 그 어마어마한 동전이 실은 ‘밀수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니….

일본 무사가문에서 쓰인 괭이밥 문양의 문장과 신안선 자단목의 괭이밥 문양. 비슷하다. |위키피디아 일본·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전을 화폐로 사용?

신안선 뿐 아니라 일본으로 (밀)수입된 동전은 어떻게 화폐로 활용되었을까요.

현재 일본에서 출토되는 동전은 낱개가 아니라 꾸러미 단위로 묶여 있거나 묶여있는 흔적이 역력하다는데요.

예컨대 100개씩 꿴 한 꾸러미 10개를 모아 1관 단위로 만든거죠. 신안선에서도 66종의 다양한 동전이 인양되었죠.

일본에서는 그렇게 다양한 동전의 구성비를 일정하게 맞춘 흔적이 보인답니다.(고은미 교수)

그런 면에서 신안선에서 보이는 꾸러미 흔적이 심상치않습니다.

실제 12~15세기 일본에서 수많은 중국 동전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방증자료가 있는데요.

즉 동전을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모습은 승려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수입한 중국 동전을 사용한 1187년의 토지매매기록도 있어요.

‘세키가하라 전투(關ヶ原合戰合·1600) 병풍’.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전쟁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일본·일본 기후(岐阜)시 역사박물관 소장

 

■청동대불 조성용?

그러나 단순환 화폐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컨대 신안선의 동전이 ‘청동대불 조성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유통되던 동전은 동의 함유량(개당 4g에 동 80%)이 높은 양질이어서 그 가치가 높았답니다. <송사>는 “동전 10점을 녹이면 정련된 동 1량을 얻는데 그것으로 청동기를 만들면 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지·식화하2·전폐)고까지 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동 수요량은 늘고 있었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시기였죠.

신안보물선이 발견된 전남 신안 증도(시루섬) 앞바다. 1975년 8월20일 이 해역에서 조업중이던 어부(최형근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도자기 6점이 걸린 게 계기가 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불교의 극락세계로 왕생한다는 말법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에따라 경통(經筒·경서와 경문을 넣는 통)과 청동대불의 주조가 대거 이뤄졌는데요. 그런데 일본의 ‘3대 대불’ 중 하나인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1185~1392)의 금속성분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납 성분이 19.57%에 달했는데요.

이게 의미심장한 분석입니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북송 시기의 동전 5개를 분석한 결과 납성분이 21.13~45.40%였던 겁니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북송 시기의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가마쿠라 대불이 바로 북송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조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리가 있어요. 그래서 수입 동전 중 일부는 화폐로, 일부는 청동대불용으로 나눠 썼다는 수정론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1972년 신안선 인근 해역에서 어부가 끌어올린 닻. 길이 2m30㎝에 무게가 140㎏이나 되는 대형 닻이다. 신안선의 닻으로 추정된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명품 원목에 새겨진 부호

이번 학술대회에서 또하나 눈길을 끈 발표문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신안선 밑바닥에 적재한 자단목 1017점의 주인공입니다.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요. 박달나무처럼 단단해서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죠.

그런데 자단목마다 표면에 새겨진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주목을 끄는데요.

한자 중에는 ‘대일(大一)’명이 51점으로 가장 많고요. 그 뒤를 ‘일정(一丁·32점)’과 ‘품(品·13점)’, ‘팔(八·10점)’자 가 잇고 있습니다. 이외에 ‘주칠호(宙柒號)’와 ‘대길(大吉)’, ‘일본(一本)’, ‘팔팔(八八)’, ‘대+십(大+十)’, ‘품(品)’명 자단목도 있습니다. 로마자를 새긴 자단목이 241점이나 되고요. 이중 Y, L, E, T. V 등은 유럽인이 원자재를 생산지에서 사들였다는 표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본(本)◈’처럼 글자와 문양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명문도 보이고요. 삼각형, 원, 꽃무늬, ‘원안의 팔(八)자와 이(二)’자 문양도 흥미롭습니다. 이밖에 삼각형이나 동그라미, 산(山) 모양의 문양도 독특한데요.

그동안 이러한 명문과 문양, 부호를 두고 이 자단목의 소유주나 상단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했는데요.

신안선은 1323년(지치 3년) 경원(저장성 닝보)를 떠나 일본 하카다로 향하던 중 악천후를 만나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일본 무사 가문의 문장?

그런데 이번에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주인’이 조심스럽게 특정되었습니다.

즉 자단목에 기재된 문자와 문양 가운데 상당수가 중세 일본의 무사 및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즉 가문(家紋·가문의 표지로 정한 문양)일 가능성이 짙다는 견해입니다.(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존 연구에서 ‘품(品)’과 ‘클로버’, 두 겹(세 겹) 육각형 문양, 글자 이(二)에 동그라미를 친 것으로 읽었던 문양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컨대 ‘세 개의 비늘(三つ鱗·미쓰우로코)’ 문양은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직을 계승하며 가마쿠라(鎌倉·1185?~1333)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한 ‘호조(北條)씨’와 관련된 물품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목간 중에 ‘교토(京都)의 도후쿠사(東福寺)’와 함께 ‘하코자카궁(거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의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였거든요. 교역선장의 의미인 쓰나지(綱司)명 목간도 있었다. 도착지가 일본 하카다(博多)임을 암시해준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또 ‘동그라미에 두 줄 그은 문양(丸に二つ引き·마루니 후타쓰히키)’ 역시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문인 ‘아시카가(足利)씨’와의 연관성이 제기됐습니다. 이밖에도 신안선 적재 화물을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름모, 세 개의 별(동그라미), ‘대길(大吉)’ 등 나무상자 겉면의 문양 또한 일본 열도의 특정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정순일 교수)

제가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자단목의 ‘괭이밥(片餐·가타바미)’ 문양은 일본의 여러 무사 가문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더군요.

신안선은 최대 길이 약 34m, 최대 폭 약 11m, 최대 깊이 약 3.7m의 대형 선박이었다. 10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200t급 선박으로 해양실크로드를 대표하는 무역선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래서 제가 ‘가문(家紋·かもん)’을 검색해보았는데요. 예부터 스스로의 가계, 혈통, 집안,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표시했답니다. 일본에서 현재 241종류 5116문 정도의 개별 가문이 있다고 합니다. 무사 시대에 들어 펼쳐진 크고작은 전쟁에서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답니다. 훗날엔 묘지나 가구, 또는 선박에까지 붙이는 관습이 퍼졌고요.

제가 이 논문이 분석한 자단목의 문양과 일본 지식백과 등에 등장하는 무사 가문의 문장을 비교해보았는데요.

비슷한 문양이 제법 있더라구요. 흥미로운 문제제기여서 향후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이 기사를 위해 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와 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김병근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1)

<참고자료>

고은미, ‘동전을 중심으로 본 전근대 동아시아의 화폐-송과 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림> 69권68호, 수선사학회, 2019

고은미, ‘전근대 동아시아의 무역과 화폐-12~13세기의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10권110호, 한국역사연구회, 2018

김병근, ‘신안선 적재 자단목의 고찰’, <해양문화재> 6,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3

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 2006

서동인, 김병근,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주류성, 2014

정순일, ‘문자 자료로서의 신안선: 한일학계의 연구성과와 전망’, <침몰선의 문자자료:소생하는 아시아의 해역교류>(신안선 출항 700년 기념 국제 학술 심포지엄 발표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고려대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2023

에노모토 와타루, ‘일원(日元) 무역에서의 시박사 무역과 밀무역’, <침몰선의 문자자료:소생하는 아시아의 해역교류>(신안선 출항 700년 기념 국제 학술 심포지엄 발표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고려대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2023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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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갯벌 속 고려선박 건졌더니 ‘800년 된 붉은색 곶감 꾸러미’가 올라왔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3.06.20 05:00 수정 : 2023.06.20 20:30

12~13세기 고려시대 선박인 대부도2호선 발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곶감꾸러미. 감씨와 붉은 색의 과육이 800년전의 모습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나뭇가지 뭉치와 함께 나뭇가지를 묶은 것으로 보이는 초본류가 확인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거, 배 같은데?’ 2014년 11월23일 경기 안산 대부도의 방아머리 해수욕장 인근 갯벌에서 맨손어업(낙지) 중이던 어민이 옛 선박(배) 한 척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530m 정도 떨어진 갯벌이었다.

2006년 여기서 3.5㎞ 정도 떨어진 갯벌에서도 고려시대(12~14세기) 선박(대부도선)의 조각이 확인된 바 있었다.

시화호 및 주변의 해변도로 건설로 깎여나간 갯벌에서 옛 선박이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2015) 6월부터 시작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정식발굴에서 고려시대 선박 1척이 노출됐다. 이것이 ‘대부도 2호선’이다. 선체에서는 접시와 주발 등 청자 21점과 청동숫가락 및 그릇 등 선상용기가 확인됐다.

곶감이 출수된 대부도2호선의 발굴모습. 곶감은 선체의 외판 밑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800년간 붉은 색의 과육 상태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800년전 곶감의 향이 났다

6월26일이었다. 갯벌에 박힌 선체를 인양하려고 배의 바닥판을 들어올릴 때 ‘붉은 색’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체의 외판 밑에 깔려있던 ‘붉은 색의 무언가’가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감 씨와, 빨간 색 과육(씨를 둘러싼 과일의 살)이 나뭇가지 뭉치와 함께 나왔습니다. 한눈에 봐도 곶감 꾸러미가 틀림없었습니다.”(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유물과학팀장)

발굴단원이 과육에 코를 갖다댔더니 아! 글쎄, 감의 향이 풍겼다. 곶감 사이에서 몇 개의 나뭇가지를 묶은 흔적이 확인됐다. 곶감을 나뭇가지에 여러개 꽂고 몇 다발 단위로 줄로 묶은 것이 확실했다.

곶감 씨앗과 선박의 받침목을 대상으로 한 탄소연대측정 결과 1151~1224년으로 추정됐다. 출토된 청자음각연판무늬 그릇 등의 유행시기(12세기 후반)과도 맞는 연대다.

공기 중에 노출되어 검게 변한 곶감. 감(柑) 씨와, 빨간 색 과육(열매에서 씨를 둘러싸고 있는 살)이 나뭇가지 뭉치와 함께 나왔다.과육 사이에서는 나뭇가지를 묶은 것으로 보이는 초본류가 확인됐다. 곶감을 나뭇가지에 여러개 꽂고 몇 다발 단위로 줄로 묶어 운반한 흔적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대부도 2호선에서 발견된 곶감은 자그만치 800년 전의 과일이라는 얘기가 된다.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800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났는데, 오늘 나뭇가지에 꽂은 곶감처럼 붉은 빛을 발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수중발굴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동·식물 등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물은 공기중에 노출되면 썩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수중의 개흙(갯벌)에서는 훨씬 오래 간다. 곶감도 그렇게 800년 가까이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배의 침몰과 함께 유실되었다면 금방 물고기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침몰선의 선체바닥 밑에 눌려 있었던 덕분에, 진공상태가 된 곶감 꾸러미가 온전할 수가 있었다.

곶감이 출수된 대부도 2호선이 확인된 경기 안산 대부도 갯벌. 시화호와 해변도로 조성으로 갯벌이 깎여나가면서 800년전 선박이 노출되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누런 생선살의 흔적도’

곶감과 같은 예가 또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려시대 난파선에서는 도기 항아리가 120여점 확인됐다.

그중 마도 3호선에서는 청어, 전어, 밴댕이, 조기와 같은 소형 어류 뼈들이 뒤섞여 담겨있는 항아리가 보였다.

즉 전어, 밴댕이와 같이 쉽게 부패되는 소형 어종을 뒤섞어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든 ‘잡젓’을 넣은 항아리였다.

항아리 안에 된장 같은 장류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심심치않게 보인다.

또 말려서 포로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생선의 뼈에는 누런 생선살이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동·식물 등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물은 공기중에 노출되면 썩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수중의 개흙(갯벌)에서는 훨씬 오래 간다. 바닷속에서 발견된 800~900년 전 고려시대 유물들도 마치 지금 묻힌 것처럼 새것 같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배(마도3호선)에서 발견된 나무빗은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생생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만약에 공기중에 노출되는 유기물이라면 형체를 온전히 보전할 가능성은 ‘0’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예가 바로 붉은색의 과육이 그대로 드러난채 확인된 곶감이다. 발굴단은 주변의 흙까지 그대로 떠서 이 곶감꾸러미를 인양했다. 그러나 공기 중에 노출된 곶감 부위는 몇시간도 되지 않아 까맣게 변색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시 수장고에 들어간 곶감꾸러미 중 개흙 속에 남아있는 부위는 붉은 색을 유지하고 있을까. 발굴 유물은 보존처리를 통해 말끔하게 복원되곤 하는데, 800년전의 곶감이 붉은 과육,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게 될 지 기대가 된다.

마도 3호선에서는 청어, 전어, 밴댕이, 조기와 같은 소형 어류 뼈들이 뒤섞여 담겨있는 항아리가 보였다. 즉 전어, 밴댕이와 같이 쉽게 부패되는 소형 어종을 뒤섞어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든 ‘잡젓’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갯벌에서 속속 드러나는 고선박

며칠전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해변에서 고선박으로 추정되는 선체가 발견·신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 대학원생이 논문준비를 위해 드론촬영을 하다가 마침 썰물 때문에 갯벌에 노출된 선체를 발견한 것이다.

국립해양연구소의 현지조사 결과 길이 14m, 폭은 5m 정도되는 ‘한선(韓船·한국 전통 배)’로 추정됐다. 맞다면 국내 바다에서 확인된 17번째 고선박으로 기록될 것이다. 연구소측은 오는 26일부터 정식 발굴조사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국내 해역에서 처음 확인된 난파선은 1976~1984년까지 8년간 조사된 신안선이었다.

총 11차례의 인양결과 도자기와 자단목, 선체조각 등 유물은 2만3502점에 달했고, 동전도 800만개(28톤)가 쏟아져 나왔다. 2007년 주꾸미 한마리가 청자 접시를 발로 끌어안은채 잡히는 덕분에 찾아낸 난파선이 있으니, 그것이 ‘태안선’이다.

마도 3호선에서 출수된 항아리는 초본류로 밀봉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된장으로 추정되는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인양된 유물 2만3815점 중 절대 다수(2만3771점)가 고려자기였다. ‘보물선’이라 이름 붙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 태안 앞바다에서는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이 잇달아 인양됐다. 세 척의 화물 대부분은 쌀·콩·메밀 등 곡물과 건어물, 젓갈류 등이었다. 태안선이 ‘청자운반선’이라면 마도 1·2·3호선은 먹을거리를 개경으로 옮기던 ‘식량운반선’이었다.

1991~92년 진도의 갯벌에서 확인된 ‘진주선’은 13~14세기 중국 배일 수도 있고, 왜구의 약탈선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2010년 인천에서 확인된 ‘영흥도선’은 통일신라시대(8세기 후반)의 선박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17척 중 바닷속 아닌 갯벌에서 확인된 고선박은 8척에 이른다. 방파제 및 해안도로 조성과 같은 외부요인으로 지형이 바뀌면서 수백년 동안 갯벌 안에 숨어있던 고선박이 노출되는 것이다. 이번에 확인된 ‘해남 송호리선(가칭)’ 역시 방파제 공사로 조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갯벌 속에 있다가 노출됐다.

최근 드론촬영으로 발견 신고한 ‘해남 송호리선(가칭)’. 17번째로 발견된 고선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도자기에 깔려 몸부림 치다가 그만…

지금까지는 중국자기 및 고려청자가 수만점 쏟아져나온 ‘보물선’(신안선·태안선)에 초점을 맞춰온 감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식량운반선’인 마도 1·2·3호선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중 고급 청자가 참기름병과 꿀단지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 명문 죽찰(대나무 조각)이 인상적이다.

필자가 요즘 난파선과 관련해서 ‘꽂힌’ 분야는 바로 ‘선원과 선상 생활’이다.

그런 점에서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장기알 46개가 눈에 띄는 유물이다.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들어 갯벌에서 고선박이 자주 노출되고 있다. 방파제와 해변도로 등의 건설에 따라 조수의 흐림이 바뀌면서 갯벌의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료함을 달래려고 장기를 두고 있던 선원들이 갑작스런 풍랑에 배가 난파되고 침몰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수장되었을테니까…. 2008년 태안선에서 인양된 인골이 뇌리를 스친다.

수심 15m 바닥에서 발견된 인골은 왼쪽·오른쪽 어깨뼈와 왼쪽 위팔뼈, 왼쪽·오른쪽 아래팔뼈 및 척추였다.

키 160㎝ 정도의 30대 남성으로 추정된 주인공의 팔뼈와 척추에는 육체노동에 의한 발달 양상이 현저히 나타났다.

골절이나 질병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매우 건장한 신체를 가진 뱃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인골은 발견 당시 오른쪽 팔은 길게 펼친 것처럼 옆으로 폈고, 어깨뼈와 척추도 정면이 약간 들려 왼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무슨 뜻일까. 배가 갑자기 침몰하자 선원은 5겹으로 선적되어 있던 도자기에 깔렸고, 탈출을 위해 왼쪽으로 비틀어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안타까운 사투는 침몰하는 배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한국판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이름과 함께 ‘바닷속 경주’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태안 앞바다(안흥량).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 해난사고가 빈발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시대 세금 운반선의 비밀

마도 1·2·3호선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마도 4호선에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숨겨져 있다.

‘마도 4호선’은 마도 해역의 확장 조사 중에 확인된 ‘조선시대 조운선’이다. 선체 내부에서 분청사기 150여 점 확인됐다.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으로 보아 15세기 초의 작품으로 판단됐다.

그 중에는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 유물이 보였다. 우선 ‘내섬(內贍)’명 사기가 3점 눈에 띄었다.

1403년(태종 3) 6월 29일 설치된 ‘내섬(시)’은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는 호조 산하의 관청이다. 그런데 10년 후인 <태종실록> 1413년 7월16일자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해마다 사기그릇을 진상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

‘태안선’에서 확인된 인골의 모습. 이 선원은 겹겹이 쌓인 청자 꾸러미 아래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을 위해 팔을 뻗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청자더미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또 출토된 63점의 목간 중에는 ‘나주(羅州) 광흥창(廣興倉)’명 목간이 도드라졌다. 나주에는 전라도 27개 고을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하던 ‘영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서울의 중앙관청이었다.

마도 4호선에서는 상당량의 벼와 보리, 새끼줄에 묶인 숫돌 15개가 다발상태로 확인됐다. 숫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전라도 나주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마도 4호선은 나주(영산포)에 거둬둔 전라도 세곡 및 특산물을 서울의 광흥창으로 옮기는 ‘조운선’이었던 것이다.

이 조운선은 1403~1413년 이후 15세기 초 사이에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을 것이다.

태안 앞바다에서 확인된 마도 4호선. 처음에는 고려시대 선박인줄 알았지만 조사결과 15세기초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특산물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조운선으로 확인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태안 앞바다에서 빈발했던 침몰사고

어떤 해난사고였을까. <태종실록>에는 “전라도 조운선이 여러척 침몰했다”(1404년 7월3일)는 기사와 “전라도 조운선이 바람을 만나 침몰해서 6명이 사망했다”(1412년 10월11일)는 기록이 잇달아 등장한다.

또 1414년(태종 14) 8월4일에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태풍으로 파선,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두 5800여석이 침몰됐다”(<태종실록>)는 것이다. 당초 태종은 “태풍이 빈발하는 7~8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말라”는 교지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이 영을 따르지 않아 이와같은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인재(人災)였다. <태종실록>은 “반드시 안흥량(태안 앞바다)를 통과해야 하는 전라도 조운선은 늘 위험에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마도 4호선에서 출수된 ‘내섬’명 분청사기와 ‘나주 광흥창’명 목간. 마도 4호선은 15세기초 궁중의 물품을 관장하는 내섬시의 주도 아래 나주(영산창)에서 서울의 광흥창으로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공물을 싣고가는 조운선이었음을 증거해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세종실록> 1448년 4월6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1척이 안흥량(태안 앞바다)에서 전복됐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문종실록> 1451년 5월26일자는 “영산성(나주)에서 출발한 조운선이 안흥량에서 풍랑에 휩쓸려 7척이 표몰(漂沒)하고, 4척은 실종됐고, 선원들은 겨우 생존했다”고 전했다. <세조실록> 1455년 9월10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안흥량에서 파손되어 침몰했거나 실종됐다”(<세조실록>)고 했다.

정리해보자. 1395~1455년 사이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 이 중 전라도 조운선인 마도 4호선의 침몰사고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선원들이 선상에서 쓴 식기들. 출수된 숟가락과 젓가락 수를 세어보면 배에 탔던 선원들의 수를 추정할 수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숟가락·젓가락으로 추정한 선원수

마도 4호선 출토 유물 가운데 선상생활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127점 확인됐다.

금속유물은 철제솥과 솥뚜껑, 청동숟가락 1점이 나왔다. 나무젓가락 38점과 함께 참빗과 목제빗, 뜰채, 그리고 수선용 바늘형 목제품 등 목제유물도 다수 확인됐다. 초립, 짚신 등도 나왔다. 선원들의 땀내가 물씬 풍기는 생활용품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난파선에서 출토되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배에 탑승한 인원들의 숫자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고려시대 선박인 마도 1·2·3호선에서 확인된 청동숟가락은 13점(1호선)과 12점(2호선), 9점(3호선)이었다.

마도 1호선에서 출토된 철제솥과 시루. 9ℓ들이 철세솥은 요즘 사람 기준으로 45인분의 밥을 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시루도 확인됐다. 솥과 시루가 한 세트가 되어 밥을 쪄서 먹었음을 시사해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침몰과정에서의 유실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15점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선박의 승선인원은 10~15명 사이였을 것이다. 반면 조선전기의 선박인 마도 4호선에서 청동숟가락 1점, 나무젓가락 38점이 확인되었다.

탑승인원은 19~20명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19세기 전라도 조세책임자였던 조희백(1825~1900)의 항해일기인 <을해조행록>은 “12척에 승선원 인원이 228명”이라 전했다. 1척당 평균 19명이 탔다는 얘기다.

화물선에 탑승하는 인원은 고려시대엔 10~15명, 조선시대엔 19~2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국힙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밥심으로 버틴 대식가

그렇다면 뱃사람들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조운선이든 식량 및 청자운반선이든 기본적으로 화물적재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선창 안은 태반이 화물을 적재하거나 선상용 생활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승선자들은 주로 선박의 상부 갑판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을 것이다. 뱃사람들은 좁고 흔들리는 선체에서 힘들게 불을 피우며, 선체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십이동파도선이나 안좌선, 마도1·2·3·4호선에서는 뱃사람들의 취사공간에서 화덕으로 사용한 돌들이 그을린 채 발견됐다. 또 마도 1·4호선에서는 땔감으로 사용된 솔방울과 불에 탄 나뭇가지가 나왔다.

난파선에서는 주로 화덕 주변에서 철제솥과 시루 등이 발견된다. 밥을 쪄먹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리가 달린 솥으로는 국이나 찌개, 반찬을 조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으리라.|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또하나 선원들은 대식가였다. 오늘날의 밥솥은 대체로 1ℓ에 5인분(0.2ℓ=1인분)정도이다. 반면 마도1호선에서 인양된 시루의 용량은 대략 9ℓ 가량이나 되었다. 지금 용량이라면 약 45인분에 해당하는 밥을 한 번에 지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어른이 하루에 두번, 한 끼에 7홉(1홉=0.18ℓ)을 먹는다”(<오주연문장전산고>)는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에 현대인들의 4배 가량 많이 먹은 대식가였다. 달리 말하면 ‘밥심’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다.

선체에서 확인된 각종 육식류로 선원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마도 2·3호선의 경우 돼지·사슴·개·고라니·오리·닭뼈들이 다수 확인됐다. 이들 뼈에서는 절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식료품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의 ‘권수 도설’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거북선 찾기는 수중고고학의 숙원사업

또하나 한국 수중고고학의 ‘꿈의 숙원사업’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 수군의 돌격선인 거북선을 발견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50여 년 간 끈질기에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거북선이 3~5척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그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남해 바다 어디엔가 묻혀있을 수 있는 거북선을 찾는다면 이것은 희대의 ‘발굴유물’이 될 것이다.

요즘 지형변화에 따라 갯벌에서 심심찮게 고선박이 발견된다니 한번 기대해보면 어떨까. 독자여러분도 여름 휴가철에 남해 앞바다의 갯벌을 찾아가 보시길….(이 기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양순석 유물과학팀장, 이규훈 수중발굴과장, 신종국 전시교육과장, 박상준 수중발굴과 학예연구사가 도움말 및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2)

 

 

명품 고려청자를 '참기름병', '꿀단지'로…침몰선, ‘900년만의 증언’[이기환의 Hi-story]

기자2022. 12. 12. 06:00
 

“무슨 무병장수? 농담이겠지!” 2020년 4월 충남 태안 신진도에서 이 일대 바다(안흥량)를 지키던 조선 수군의 지휘소 건물이 확인되었는데요. 폐가로 남아있던 건물에서 확인된 명문 기록 2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나는 벽지 형태로 발견된 한시인데요. ‘사람이 계수나무 꽃 떨어지듯 지니(人間桂花落)…’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수군지휘소의 현판 글씨(무량수각·無量壽閣)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충남 태안 마도 2호선에서 출토된 청자 병 두 점. 청자 두 점에는 개경의 중방(무신정권의 최고 의결기구) 도장교(정 8품) 오문부 댁에 참기름(眞)과 꿀(蜜)을 보낸다는 물품꼬리표가 붙어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명장수라고? 농담이겠지”

불교에서 ‘무량수’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수명’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무량수각은 ‘무병장수하는 집’라는 의미입니다. 대개 전란이나 재해가 심한 지역의 사찰에 주로 세워진답니다.

신진도 수군지휘소의 ‘무량수각’ 현판에는 ‘무량’ 부분에 낙관처럼 쓰인 단어가 있죠. ‘구롱(口弄·농담)’입니다.

왜 공공 건물의 현판에 ‘농담’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건물은 이곳 해안의 안전운항을 관장하는 수군 지휘소라 했죠. 그러나 한시에서 보듯 해난사고가 계속 일어나고 인명피해가 줄지 않았죠. 그래서 ‘무병장수’를 바라며 쓴 현판에 훗날 누군가가 ‘무병장수는 무슨! 농담(구롱)이야!’라는 풍자문구를 써놓았다는 겁니다. 억측 같지만 ‘안흥량’ 해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사고를 들춰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인양된 ‘태안선’에서 확인된 인골의 모습. 인골은 정면을 위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오른쪽 팔을 펴져 있었다. 어깨뼈와 척추가 정면에서 살짝 들려져 있었다. 비운의 고려선원은 겹겹이 쌓인 청자 꾸러미 아래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을 위해 팔을 뻗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청자더미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10척 중 7~8척이 침몰”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을 볼까요.

“안흥량 물길이 격렬한 파도 때문에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옛날엔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기 때문에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안흥량’은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혔습니다.

충남 태안 앞바다의 안전운항을 관리했던 조선 수군지휘소에서 확인된 ‘무량수각’ 현판. ‘무량’ 부분에 낙관처럼 쓰인 단어가 있다. ‘구롱(口弄·농담)’이다. 무량수각은 ‘무병장수’를 바라며 쓴 현판이다. 그러나 이 해역에서 해난사고가 빈발하자 훗날 누군가가 ‘무병장수는 무슨! 농담(구롱)이야!’라는 풍자 문구를 써놓았을 것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안흥량은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합니다.

여기에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물살이 더욱 빨라지죠.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승정원일기> ‘1667년 윤 4월9일’조는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중 7~8척에 이르고…한 해에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달한다”고 기록했어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안흥량을 통과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라·경상·충청도 등에서 거둔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피할 수 없는’ 조운선의 항로이기 때문이었죠.

고려시대 침몰선인 ‘태안선’에서 포장된 그대로 적재 되어있던 ‘신상’ 명품 고려청자. 침몰선에서는 총 2만3815점의 유물이 인양되었고, 그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고,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운하개통에 매달렸지만…

고려·조선 등 역대 왕조가 대를 이어 마련한 매력적인 대안은 ‘운하 개통’이었습니다.

처음 계획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4년(인종 12)의 일이었는데요.

요컨대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물길(운하)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는 “군사 수천명을 총동원한 이 대역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기록했습니다.

1154년(의종 8)과 1391년(공양왕 3)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중도 포기됐습니다. 공사구간이 파기 어려운 화강암 암반층이었고, 용케 팠다 해도 조수가 들락날락 하는 바람에 족족 다시 메어지는 난공사였기 때문입니다.

태안선이 ‘고려청자 운반선’이었다면 마도 1,2,3호선은 각종 곡물과 젓갈류 등 서울(개경)으로 가는 미곡과 특산물을 가득 실은 ‘세곡 특산물 운반선’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개국 후에도 운하를 향한 새 왕조의 열망은 식지 않았는데요. 개국공신인 하륜(1347~1416)은 나름 묘안을 짜냅니다.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겁니다. 고려 때 뚫어놓은 미완성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건데요.

그 사이 높낮이에 따라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마다 소선(작은 배)를 둔 뒤 포구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 방법을 쓴다는 겁니다.(1413년) 그러나 이 공법 또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무엇보다 세곡을 첫번째 저수지에 옮겨 실으려면 대선(大船·큰 배)이 우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안흥량의 바람이 워낙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입니까.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죠.

그럼에도 운하계획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종 때인 1537년 대안 노선인 ‘의항운하(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의항리)’ 건설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거센 조수간만의 차이 등으로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마도 3호선의 시그니처 유물은 장기알이다. 46개가 원들의 생활공간인 선체 중앙부에서 나왔다. 둥근 조약돌을 이용해 만든 장기알은 앞뒤에 차(車), 포(包), 졸(卒) 등을 적은 게 확인된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 사이 이 지역에서의 해난참사가 빈발했습니다. 조선 전기의 기록만 따져볼까요.

1395년(태조 4)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습니다.

이건 사고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1403년(태종 3)과 1414년(태종 14)의 침몰사고는 대형 참사였습니다.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여석이 수장됐습니다. 이때 태종이 “모두 부덕한 과인의 책임(責乃在予)”이라면서 “내가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고 간 것과 다름없다”이라고 사과한 것으로 유명하죠. 1414년에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습니다. 1455년(세조 1)에는 조운선 54척이 침몰했구요.

1395~1455년 사이 60년간 안흥량에서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에 달했습니다.

이로써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 국가재정 또한 고갈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태안선 출토유물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것은 ‘사자모양 향로’이다. 두 점 다 보물로 지정됐다. 출토된 사자 모양 향로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

그렇게 거센 풍랑 속에 빨려 들어간 ‘난파선’이 이제와서 ‘보물선’이 되어 떠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07년 5월 14일 밤이었는데요.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민 김용철씨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이랍니다.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답니다. 그중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던 주꾸미 한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원래 주꾸미를 잡으려면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습니다. 그러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뒤 입구를 자갈 같은 것으로 막아놓는데요. 그런데 문제의 주꾸미는 자갈이 아닌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이 태안군청에 신고되었구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 돌입했는데요. 발굴 3일만(7월6일)에 수심 15m 정도에서 95도 가량 기울어진 침몰선의 선체가 드러났습니다. ‘태안선’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은 이 난파선의 별명이 있죠.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선’이었죠.

‘태안선’에서는 ‘두꺼비 모양 벼루’도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2만3815점의 인양유물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구요.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청자들은 완충재(짚)와 목재를 이용하여 끈으로 묶어 포장한 그대로 쌓여있었습니다.

그중의 백미는 사자머리 모양 향로 2점(보물)이었습니다.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입니다. 또 ‘퇴화문(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무늬) 두꺼비형 벼루’도 올라왔는데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지죠.

이 사자모양 향로와 두꺼비 벼루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태안선에서는 명문 목간도 다수 인양됐는데요.

이중에는 ‘탐진(耽津·강진) 재경(在京·개경)…’과 ‘최대경댁상(崔大卿宅上·최대경댁에 올림)’ 등의 목간이 주목됩니다.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가 개경의 왕실이나 귀족층(최대경 등)에 납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395~1455년 사이 60년간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에 따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고려청자 보물선-태안 대섬 수중발굴보고서>(학술총서 제17집), 2009에서

 

■참기름, 꿀을 담은 고려청자

그렇게 태안선 발굴이 한창이던 2007년 7월 20일과 27일이었는데요.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 심선택씨가 청자 26점을 인양했다는 신고가 접수됩니다. 이곳은 ‘태안선’ 발견지점에서 약 2㎞ 떨어진 섬 앞바다였는데요. 이번에는 주꾸미가 아닌 청자가 그물에 걸렸답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어졌구요. 이곳에서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가 잇달아 인양됐습니다.

세 척의 화물 대부분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 및 메주, 젓갈류 등이었습니다.

태안선이 ‘청자운반선’이라면 마도 1·2·3호선은 전라도 각지에서 거둔 곡물 등 먹거리를 개경으로 운반하다가 난파된 ‘식량운반선’이었습니다. 마도 1호선의 경우 명문 목간을 분석하면 1208년(무진년) 출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서울(개경·한양)로 무사히 이송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1134년(인종 12) 나름 묘안이 나왔다.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물길(운하)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하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도 2호선 출토유물 중 백미는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과 죽찰(국화 모란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무늬 매병과 명문 대나무 조각’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과 죽찰’(연꽃 줄기 무늬 매병과 명문 대나무 조각)’ 등 2점의 청자였는데요.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제작된 2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죠. 그런데 이 두 점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요소가 따로 있습니다. 청자 두 점의 목에 걸려있던 명문 죽찰(대나무 조각)이었는데요. 두 점 모두 ‘중방(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의결기구) 소속 무관(도장교·정 8품) 오문부에게 보낸 참기름과 꿀’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모란~’ 매병에는 ‘참기름(眞)’자가, ‘연꽃가지~’ 매병에는 ‘꿀(精蜜)’자가 들어있었거든요. 명문 대나무 조각은 지금의 택배 물품표였던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명품 청자를 생활용기로 썼다니 말입니다.

하륜의 갑문식 공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안흥량의 바람이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인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다.

 

■장기 두다가 수장된 선원의 시신?

또 마도 3호선은 1265~1268년(고려 원종 연간) 사이에 난파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당대 최고 권력자인 무인집정 김준(?~1268) 등에게 보내는 곡물과, 젓갈·전복·홍합·상어 등 각종 식품을 실었던 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중 마도 3호만의 시그니처 유물은 장기알인데요.

모두 46개의 장기알이 선원들의 생활공간인 선체 중앙부에서 나왔는데요. 적어도 2벌 이상의 장기알이 있었을 겁니다.

모서리가 둥근 조약돌을 이용해 앞뒤에 차(車), 포(包), 졸(卒) 등을 적은 게 확인됩니다.

750년 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증거할 유물이 현현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선상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장기를 두고 있던 선원들이 갑작스런 풍랑 속에 배가 난파되고 침몰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수장되었다는 생각에….

새삼 태안선에서 인양된 인골이 떠오르네요. 이 선원은 선박의 침몰 당시 5겹으로 켜켜이 쌓은 청자 더미에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인골이 정면을 위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약간 틀어진 상태였는데요. 오른쪽 팔을 뻗고 있었구요. 견갑골(어깨뼈)과 척추가 정면에서 살짝 들려져 있었구요. 이런 인골의 상태로 미루어보면 안타까운 추론이 가능했습니다.

즉 이 불행한 고려 선원은 너무도 빨리 침몰한 선박과 함께 선적된 상자가 무너지면서 상자 아래에 깔렸다, 선원은 사력을 다해 몸을 틀어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뭐 이런 스토리가 되겠네요.

마도 3호선은 당대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무인집정 김준(?~1268) 등에게 보내는 곡물과 젓갈, 전복, 홍합, 상어 등 각종 식품을 실었던 배였음이 밝혀졌다.

 

■‘재난은 사람이 부른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안행량 등에서 일어난 잦은 해난참사가 단순히 ‘거센 바람과 암초,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1473년(성종 4) 4월 20일 성종 임금의 말씀을 한번 볼까요.

“안흥량이 험악하다고? 아니다. 험악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항행에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난다. 해당 관리들이 제대로 지휘·고찰한다면 조운선의 침몰을 면할 수 있다.”

1633년(인조 11) 7월21일 인조 임금의 하교가 귓전을 때립니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災不虛生 由人所召)

이제와서 ‘바다속 경주’니, ‘보물선으로 환생한 침몰선’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참사는 사람만 조심하고 제대로 관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인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23년 6월25일까지 충남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출귀물’ 주제전에 출품된 안흥량 출토 보물 청자들.|태안 해양유물전시관 제공

 

■‘신출귀물 고려청자’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내년 6월 25일까지 충남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특별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요.

안흥량 해역 발굴 유물 중 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신출귀물(新出貴物), 태안 바다의 고려청자’ 주제전(테마전)인데요. ‘사자형뚜껑 향로’와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과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 등 보물들이 선을 보입니다. ‘난파선의 무덤’에서 ‘바닷속 경주’로 거듭난 안흥량 해역에서 ‘보물’로 떠오른 명품청자들을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와함께 거센 풍랑 속에 희생된 분들의 넋도 빌면서….(이 기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김현용·김동훈·진호신 학예연구관, 신종국 전시과장 등이 자료 및 도움말을 주었습니다.)(3)

<참고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청자보물선-태안 대섬 수중발굴보고서 본문 및 도판>(학술총서 제17집), 2009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 1·2·3호선 수중발굴보고서>, 2010·2011·2012

서태원·문광균·박범·문경호,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태안 안흥진성의 사적진성을 위한 학술세미나), 태안시, 2020

진호신, ‘태안 신진도 고가(古家) 발견 유물의 종류와 성격’, <해양문화재> 16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2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29)건져올린 14척 중 고려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는 겨우 1척씩뿐 바다만 아는 미스터리 ‘고선박’

입력 : 2019.08.03 06:00
도재기 문화에디터

 

바닷속의 보물선, 고선박

수중고고학이 발전하면서 ‘보물선’으로 불리는 고선박 등 다양한 수중문화재들이 주목받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지금까지 바다에서 발굴한 고선박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두 14척이다. 사진은 경기 안산시 대부도 방아머리해수욕장 인근에서 고려시대 선박 ‘대부도2호선’이 발굴되는 장면(2015년)이며, 선체에서 청자 등 유물과 함께 곶감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 수중고고학, 1976년 ‘신안선’ 발굴로 첫걸음…선박들 안에 콩·젓갈·솥부터 청자 수만점까지 온갖 물건물살 악명 높아 “1392~1455년 200척 침몰” 실록에도 기록된 태안 마도해역, 지금은 ‘바다의 경주’ 평가
고고학 지식·잠수능력 겸비한 전문 인력 태부족…육지서 많이 사라진 도굴꾼들이 바닷속 호시탐탐

 

문화유산이 땅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의 해저, 해안의 갯벌 속에도 묻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이 땅은 3면이 바다여서 고대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했고, 서남해안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로 국제 문화교류의 현장이었다. 특히 서해는 갯벌이 발달돼 유물의 보존환경도 좋다. 2000년대 들어 수중문화재를 다루는 수중고고학이 자리 잡으면서 수중문화재도 부상하고 있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대표적 수중문화재는 옛 배, 고선박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누비다 침몰, 수백~수천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난파선이다. 고선박은 대부분 침몰 당시의 사람들이 쓰던 온갖 물건이 실린 ‘타임캡슐’이자, 유물이 가득한 ‘보물선’이다. 실제 고려시대 고선박에선 적재물품의 내용과 발송처·수취인 등을 기록한 목간은 물론 청자, 콩·메밀 같은 곡물, 각종 특산품, 젓갈 등 먹거리, 솥·수저 같은 생활용품 등이 발견된다. 전남 완도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완도선’에선 청자 3만여점이 포장상태 그대로 확인됐고, 중국 원나라 무역선 ‘신안선’에선 2만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다. 유물도 귀하지만 고선박도 전통 배(한선) 연구, 당시 해상운송 체계·국제교류 등을 파악하는 데 소중하며 때로 한국사를 다시 쓰게 하는 문화재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배는?

해저 수중발굴에서 유물을 수습하는 모습.

 

알다시피 배의 역사는 길다. 신석기시대부터 바다나 강·호수를 누볐다. 신석기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어업활동을 한 사실은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배 그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배 유물은 약 8000년 전의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다. 통나무 속을 파낸 배는 경남 창녕 비봉리 조개무지(패총·사적 486호) 유적에서 나왔다. 길이 310㎝, 폭 62㎝ 정도다. 발굴된 곳은 공기가 차단돼 보존환경이 좋은 저습지 유적이어서 아직도 불로 지지고 돌도끼 등으로 가공한 흔적이 배에 남아 있다. 이 소나무로 만든 통나무배는 보존처리를 거쳐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삼국시대 유적에서는 배 모양 토기들이 출토돼 해상활동의 증거를 보여준다. 실제 가야시대의 선박 부재(3~4세기 추정)가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됐다. 통일신라시대의 배로는 ‘안압지선’이 유명하다. 왕실 정원의 인공연못인 경주의 월지(안압지)에서 나온 안압지선은 통나무배에서 진화, 가공한 나무 판재들로 만든 목선이다. 선박 발달사로 볼 때 원시적 뗏목배~통나무배~(부재 가공을 해 짜맞춘) 준구조선~구조선의 단계 중 준구조선이다. 8~9세기에 제작됐으며 재료는 소나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다. 통일신라의 활발한 해상활동은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상이 잘 말해준다. 통일신라와 남북국시대를 이룬 발해도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과 사절단을 교류할 정도로 조선술·항해술이 뛰어났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바닷길이 더욱 열렸다.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세곡)이나 궁중에 상납하게 한 특산물(공물)을 운송하는 조운선, 신안선 같은 동북아시아 무역선들이 서해를 오르내렸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청자운반선이 강진, 부안에서 빚어진 명품 청자들을 실어 날랐다.

 

■ 14척의 고선박, 역사를 증언하다

왼쪽부터 고려시대 청자운반선 ‘태안선’에서 나온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보물 1782호), 고려 선박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청자 상감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보물 1783호).

 

한국 수중고고학의 첫걸음은 1976년 ‘신안선’ 발굴 작업이다. 당시엔 전문인력, 장비가 없어 해군이 주도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수중문화재 조사·발굴·연구·전시 등을 이끈다. ‘비봉호’나 ‘안압지선’과 달리 바다에서 지금까지 발굴한 고선박, 명실상부한 ‘바닷속의 보물선’은 모두 14척이다. 고려시대 배가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 각 1척이며, 국내에서 발굴됐지만 중국 고선박이 2척이다. 발굴 장소는 인천 옹진부터 전남 진도·완도에 이르기까지 서남해에 집중돼 있다. 발견 당시 모습을 보면, 운항 중이거나 정박 상태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 고선박은 겨우 1척인데, 고려시대 배는 10척으로 훨씬 많이 발굴됐다. 그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고, 조선시대에 조선술·항해술이 더 발전해 침몰한 배가 적을 수 있다는 분석 등이 나올 뿐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바다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고선박은 ‘영흥도선’이다. ‘안압지선’과 더불어 2척뿐인 통일신라시대 배다. 인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해저에서 2013년 발굴됐는데, 선체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710~774년으로 나타났다. 선체는 철제 솥 10여점과 도기 등 유물에 눌린 길이 약 6m, 너비 1.4m가 남아 있다. 황금빛을 내는 당시 최고급 도료인 황칠이 발견돼 화제를 모았으며, 주변 해저에선 수백점의 청자 등이 흩어져 있어 또 다른 배가 침몰해 있을 가능성도 높다.

고려시대 고선박은 10척인데,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만 3척이 발굴됐다. ‘마도 1~3호선’이다. ‘마도3호선’은 선체와 함께 나온 30여점의 목간 분석 결과, 1265~1268년 사이 전남 여수 일대에서 거둬들인 곡물과 전복 등을 싣고 강화도로 가던 중이었다. ‘마도1호선’은 1208년 나주와 해남·장흥 등의 곡물을 개경으로 운반하던 중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마도2호선’은 4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주목할 만하다. 1213년쯤 전북 고창 일대에서 모은 곡물 등을 싣고 개경으로 가던 배에서는 청자 매병 2점과 물품꼬리표라 할 수 있는 죽찰(대나무 조각의 목간)도 발견됐는데, 죽찰에서 매병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동안 매병의 용도를 놓고 여러 주장이 난무했는데, 참기름이나 꿀을 담은 생활용기로 확인된 것이다. 이 매병과 죽찰은 각각 보물 1783호(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 1784호(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로 지정됐다. 마도 해역 인근인 대섬 앞바다에선 청자운반선 ‘태안선’이 나왔다. 통발에 주꾸미가 청자대접을 붙들고 올라온 덕분에 발견된 태안선에선 2만3000여점의 청자가 당시 포장한 그 상태로 확인됐다. 그중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는 워낙 희귀해 보물 1782호로 지정됐다.

마도 해역에서는 지금까지 발굴된 유일한 조선시대 고선박인 ‘마도4호선’도 나왔다. 1417~1421년 사이에 세곡과 분청사기 같은 공물을 싣고 한양으로 가던 이 배는 당시 조운선의 구조나 조운체계·조세제도 등의 연구에 귀중한 첫 조운선 실물자료다. 전통 한선에는 나무못만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왔는데 마도4호선에는 쇠못이 박혀 있어 그동안의 학설이 수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마도 해역에서 고선박이 유독 많이 발견될까. 이 지역은 개경, 한양으로 올라가는 바닷길의 길목이자 외국 사신들의 숙소도 있어 무역선·조운선 등 많은 배가 오르내렸다. 정박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센 물살과 암초, 안개 등으로 난파 위험성도 높은 대표적 바닷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392~1455년 사이 200척이 이곳(태안 안흥량)에서 침몰됐다고 기록될 정도다. ‘배 무덤’이라 불리던 곳이 지금은 ‘수중문화재의 보물창고’ ‘바다의 경주’라고 평가받는다.

고려 고선박은 경기 안산시 대부도 해역에서도 ‘대부도선’ ‘대부도2호선’이 확인됐다. 또 다른 고려 배로는 ‘신안 안좌도선’(전남 신안군 안좌도), ‘군산 십이동파도선’(전북 군산시 십이동파도), ‘목포 달리도선’(전남 목포시 달리도), ‘완도선’(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이 있다.

국제교류의 결과로 국내에서 발굴된 중국 배는 ‘신안선’과 ‘진도 통나무배’다. ‘신안선’은 1975년 발견돼 1976~1984년 총 11차례 발굴이 이뤄졌다. 중국 도자기 2만여점을 비롯해 동전 28t, 인도·동남아시아산 향료·향나무·한약재 등을 싣고 중국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로 가던 중 1323년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통나무배’(전남 진도군 벽파리)는 원시적 통나무배가 아니라 구조선의 하나이며, 일본 배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 배가 국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고려 고선박이 발굴됐다. 산둥성 펑라이(蓬萊)시의 항구유적인 봉래수성(蓬萊水城) 해안에서 발굴된 ‘봉래 3·4호선’이다. 이들 배는 형태·구조 등에서 고려 선박의 특성을 보이고, 고려 청자도 실려 있었다.

이들 고선박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고려 선박의 구조와 형태, 당시 해상운송 루트나 체계, 중국 배와의 특성 비교, 실린 유물을 바탕으로 한 각종 연구 등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수중발굴된 고선박과 해저 유물들은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의 보존센터·해양유물전시관에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수중고고학의 중요성, 이해를 높이기 위해 체험교육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 운영 중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육지의 발굴에 비해 수중문화재 발굴에 대한 정부의 관심, 지원은 크게 부족하다. 3면이 바다인 한국의 특성상 주목하는 게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많은 문화재가 해저, 갯벌에 있음을 알면서도 조사·발굴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육지에선 많이 사라진 도굴꾼들이 바다에서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학계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역사의 죄인”이라 자책하는 이유다. 수중문화재 발굴은 그 특성상 예산, 시간, 노력이 육지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고고학 전문지식에 더해 잠수 같은 전문능력을 갖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선 과감한 지원과 높은 관심으로 전문인력 양성, 수중발굴조사에 특화된 기술 개발, 로봇 등 첨단장비의 활용 등이 시급하다. 나아가 단순히 수중유물 발굴을 넘어 이젠 세계적 추세처럼 해양문화유산 전반으로 연구 지평을 넓혀야 한다. 혹시 이번 여름 바다를 만난다면 저기 어딘가에 묻혀 있을 ‘보물선’을 상상해봤으면 한다. 그리고 그 고선박이 우리에게 안기는 숙제도 되새김질했으면 좋겠다.(4)

사진 제공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2021. 2. 15. 05:07

 

[바다에서 건져올린 타임캡슐] <2>한국 수중발굴의 시초 신안보물선
 

[서울신문]1970년대 어부 그물에 도자기 자주 걸려
당시 중요성 몰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려
1976년 도굴꾼 유물 팔려다 존재 알려져

수중발굴 경험 없어 해군 등과 합동조사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대규모 유물 나와
금속품·도자기 등 2만 4000여점 찾아내

목간 글씨 연구 결과 원나라 국적 밝혀져
당시 항로·유물 추정… 고려 거쳐 日향한 듯
신안보물선 14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실증

신안보물선은 700년 가까이 물속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13~14세기 생활상을 알려줬다. 전남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에 신안보물선을 복원해 전시해 놨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1970년대 중반 보물선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발굴된 신안보물선에서 값진 고려청자와 송·원대 도자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수중 발굴은 물의 흐름, 기상조건, 기압차이 등에 따라 매우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고, 고가의 발굴 장비와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수중고고학은 신안보물선 발굴 전까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신안보물선 발굴 현장에서 나온 도자기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어부 그물에 걸린 도자기 6점의 가치

신안보물선은 1975년 8월 처음 확인됐다. 어부 최모씨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다른 어부들은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가 개밥그릇이나 재떨이로 썼다. 최씨도 도자기의 중요성을 몰랐지만,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동생은 달랐다. 동생의 관심으로 신안군청에 신고해 나온 감정 결과, 중국 송·원대의 도자기였다. 그 이듬해 침몰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무려 700년 동안 깊은 바닷속에 잠들었던 보물선이 비로소 물 위로 떠올랐다.

이듬해 9월 도굴꾼이 잠수부를 고용해 유물을 건져내 팔려다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도굴이 잇달아 일어났고, 발굴 해역 주민들도 도굴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관계 당국은 조사를 서둘렀지만 수중발굴 경험이 없던 탓에 유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도구나 장비도 딱히 갖추지 못했다.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과 해군해난구조대 등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

신안보물선의 발굴 위치는 전남 신안군 증도 해역이다. 증도는 전남 목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40㎞ 떨어진 섬이다. 발굴 현장은 증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 떨어진 해역이었다. 여기서 197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이 시작됐다. 이후 약 10년 동안 조사가 이어진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물의 흐름이 바뀌는 정조 시간에만 발굴할 수 있었다. 수심은 평균 20m 정도였는데, 수중 시야가 좋지 않고 조류가 빨라 조사에 어려움이 상당했다.

1977년 제3차부터 바둑판 모양의 철재로 된 ‘그리드’를 설치해 육상 발굴처럼 조사 결과를 기록했다. 해군이 발굴하고, 학자들은 유물과 도면을 정리했다. 이렇게 해 선박과 송·원대 도자기 등 무려 2만 4000여점이 최종 출수됐다.

신안보물선에서 찾은 목간.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지치삼년’이 새겨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보물선의 국적은 뜨거운 관심사였다. 고려냐, 중국이냐, 아니면 일본이냐로 의견이 속출했다. 연구 결과 중국 선박으로 최종 밝혀졌다. 신안보물선에서 나온 ‘지치삼년’(至治參年)이라고 새겨진 목간의 글씨가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가와 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선박의 구조는 어땠을까. 당시는 고려시대로,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된 선박은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지만 신안선은 중국 선박으로 배 밑이 ‘V’자 모양인 첨저선이었다. 신안보물선은 중국 푸젠 지역 첨저선으로, 수심이 깊은 해역에서의 운항과 파도를 가르기에 적합하고, 배를 만들 때 무사 항해와 안녕을 기원하는 보수공이 있어 중국 선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수공은 선수·선미 용골재 연결부에 위치한다. 선수 수직접합면 원형 구멍에는 청동거울을 넣었고 선미에는 송대 화폐인 태평통보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했다. 선체는 모두 720여편(조각)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여년 동안 보존처리 후 복원했다. 추정 실물 크기는 길이 34m, 폭 11m, 깊이 3.7m이다.

 

●신안보물선에 고려인들도 승선한 듯

신안보물선의 유물은 도자기 2만여점, 금속품 1000여점, 자단목 1000여점, 향신료, 약제품, 석제품, 목제품, 유리·골각제품, 동전 28t(약 800만개) 등이다. 도자기는 길이 50~70㎝, 너비 40~60㎝, 높이 40~60㎝ 정도 나무상자에 10~20개씩 포개서 끈으로 묶어 적재했다. 배의 균형을 잡고자 자단목을 배 밑에 골고루 깔고 그 위에 28t이나 되는 동전을 쌓았다. 동전 상단에는 도자기와 칠기·금속제품 등을 수납했다.

배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고려와 원, 일본에서 사용한 것들로 2만여점에 달한다. 침몰한 배에서 도자기가 대량으로 나온 사례는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드문 사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우리나라 유물은 청자 매병과 청자 베개, 선원들이 배 위에서 사용하던 청동숟가락 등이 있다. 고려청자는 12~13세기 강진 사당리요와 부안 유천리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에서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인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숟가락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승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신안보물선의 항로나 유물로 봐서는 고려를 거쳤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려 왕실과 귀족들에게는 중국의 영향으로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 취향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예의 발전을 이끌어 고품질 상감청자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유물로는 세토매병과 나막신, 칼코 등이 있다. 일본 가마쿠라시대는 중국과 외교 관계가 중단된 상태였지만,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교류는 활발했다. 차 마시고, 향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선종사찰,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사와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이런 문화를 즐기고자 관련 기물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와 관련한 유물들이 향로, 향합, 꽃병, 잔, 주전자 등이다.

신안선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도자기·토기류로, 2만 660여점에 이른다. 도자기는 청자와 청백자가 다수였는데 대부분 중국 용천요와 경덕진요계였다. 도자기 분류로 편년과 생산지 등도 밝혀냈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출수된 도자기는 지금까지도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유례가 드물다.

금속 유물은 1000여점으로 분향구, 불교의식구, 주방용구, 생활용구, 금속정 등 다양했다. 금속덩어리인 금속정은 녹여서 불상이나 기타 기물 제작에 사용하고자 했을 터다. 주석정과 철정이 340여점으로 가장 많고 ‘왕구랑’(王九郞)이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특히 ‘경원로’(慶元路)가 새겨진 청동추 덕분에 선박 출항지가 중국 경원로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목제유물로는 목간, 목기발, 목제반, 칠기완, 자단목 등이 나왔다. 목간 360여점은 화물표이니만큼 화물주·적재품 단위 등을 밝히는 데 요긴하게 쓰였고 침몰연대를 분석하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중 목간에서 언급한 ‘도후쿠지’(東福寺)는 일본 교토시 도잔구에 있는 임제종 사찰을 가리킨다. 1319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325년 가마쿠라 막부의 도움으로 재건됐다. ‘도후쿠지’ 목간은 1323년 도후쿠지 사찰 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신안보물선을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아래 파견된 무역선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식물류는 후추, 은행, 빈낭(기호식품), 여지(과일) 씨 등이 나왔다. 이러한 식물은 한약재와 향료 등이 거래되거나 구급약, 혹은 식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며 당시 해상운송의 규모와 교류 정도를 가늠케 한다.

신안보물선 발굴 당시 해군 조사 모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출항한 신안보물선, 최종 목적지는

신안보물선의 항로는 두 갈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추정은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항에서 연안 항로를 따라 온저우 등을 거쳐 칭위안으로 북상해 무역품을 싣고 고려,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다. 중국 저장성 칭위안항을 출발한 배는 고려 개경을 중간 기착지로 삼았을 것이다. 배의 발굴 지점은 한중 항로인 서남해사단항으로, 기상재해 등 돌발 상황으로 인해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추정은 중일 무역이 활발했던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항이 목적지인 항로다. 중국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직항하던 무역선이 남송·원대의 중국과 일본 간 주요 무역품이던 도자기와 동전들을 싣고 표류하다 침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물주는 일본인과 기관의 대리인 등이 많았으며 목간에 새겨진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筥崎) 등은 규슈의 사찰로, 하카다항과 관련이 있다. 출항지는 청동추에 새겨진 대로 ‘경원로’이다. 칭위안은 현재 중국 저장성 닝보 지역으로 남송대에 광저우, 취안저우와 더불어 국제항으로 성장한 곳이다. ‘지치삼년육월삼일’(至治參年六月二日) 목간은 신안선이 6월 남풍 시기에 출항했음을 알려준다.

신안보물선과 유물은 14세기 전후 해양 실크로드 무역의 실증이며 고려·일본 유물도 출수돼 한중일 관련성도 증명한다. 당시 중국 범선의 무대는 고려·일본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였다. 신안보물선이 고려를 경유해 일본으로 갔는지, 아니면 바로 일본으로 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수가 우리나라 해역인 것은 분명한 만큼 우리나라가 해양 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대변한다.

신안보물선 수중발굴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수중고고학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복원된 신안보물선의 선체와 다양한 도자기, 자단목, 목간, 금속제품 등 유물은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시하고 있다. 연구소를 방문하면 영상과 전시를 통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신안 증도 발굴해역은 현재 사적 제274호로 지정돼 안내판과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생생한 해양 실크로드를 보고 싶다면 직접 방문해 볼 만하다.(5)

김병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안선 800만개 동전의 수수께끼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6.08.17 13:08 수정 : 2016.08.19 09:12

 

전남 목포에서 서북쪽으로 40㎞ 거리에 증도라는 섬이 있다.

증도 서쪽에서 북으로 임자도와 지도 사이에 물골이 있는데, 그 골을 따라 바닷물이 하루 4번 오르내린다.

이곳에서 북으로 영광 낙월도까지는 지호지간이다. 바닷물은 증도에서 임자도와 지도 사이에 있는 수도(水島)를 따라 오르내린다. 그래서 임자도에서 증도 서편으로 흐르는 갯골을 수도수도(水島 水道), 즉 수도를 가운데 두고 바닷물이 흐르는 물길이라는 소리다. 이 물길은 영광-고창으로 이어지는 뱃길로 예전부터 매우 중요한 조운로이자 조기의 이동로였다. 그런데 이 증 서편 방축리 앞바다엔 오래 전부터 심상치않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신안선에서 쏟아져나온 동전들. 28톤 800만개의 동전이 나왔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전설의 보물선

“언젠가 이곳에 큰 배가 가라앉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른바 구전이었다. 그러던 1975년 8월 20일이었다. 어부 최평호씨(당시 35살)가 ‘언젠가 큰 배가 가라앉았다’던 그 지점에서 그물을 걷어올렸다.

“아니 이게 뭐야.”

그릇이 6점 걸려나온 것이다. 청자화병(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청자와 백자였다. 그러나 최평호씨는 그 그릇의 가치를 몰라보고 그냥 집 마루 밑에 보관해두었다. 값어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웠으므로….

해가 바뀐 1976년 1월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씨의 동생이 형 집을 찾아와 마루밑 그릇의 존재를 듣게 됐다.

“이 물건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신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대번에 심상치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린 동생은 신안군청에 중국제 청백자의 인양사실을 알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선의 존재가 비로소 알려진 것이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이 중국제 청·백자가 중국 송~원나라 시대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렇게 인양사실이 알려지자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동전은 배 밑바닥에 자단목과 함께 꾸러미째 쌓여있었다.

 

며칠후 어부 그물에 중국청자가 무더기로 인양됐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그 해 9월엔 도굴꾼인 이모씨가 잠수부를 고용해서 청자화병 등 122점을 인양해서 몰래 팔아넘기다 검거됐다. 조모씨 역시 이곳에서 도굴한 문화재를 밀매하다가 구속됐다. 당시는 기본측량장비나 GPS같은 첨단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도굴꾼들은 잠수부를 태운 배를 몰고 단숨에 신안선이 난파된 지점을 목측으로 찾아냈다. 불법인양한 도자기의 양이 엄청났으니 그야말로 신출귀몰의 눈썰미를 자랑한 것이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신품 도자기가 2만여점 세트로

이렇게 3차례에 걸쳐 엄청난 규모의 유물이 확인되자 문화재관리국은 조바심을 냈다. 상상 이상의 유물들이 해저에 있는 것은 확실한데, 수중발굴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단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냥 둘 수 없었다. 결국 유물인양작업은 해군의 전문잠수사에게 맡겼다. 1976년 10월 말 늦가을의 차디찬 바닷물을 헤치고 1차긴급발굴을 마쳤는데, 청자 52점을 포함해서 112점의 도자기를 건져올렸다.

본격발굴작업 끝에 해저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은 길이 34m, 폭 11m로 측정됐다. 1977년부터 2척의 해군함정(장병 240명)과 해난구조대 요원(심해잠수사 60여 명)이 발굴을 담당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이로웠다.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고,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나왔다. 260톤의 선적량을 갖고 있던 배는 모두 140톤의 물품을 적재했다. 그 많은 화물 중에 가장 큰 부피와 양을 차지한 것은 도자기와 동전, 자단목 원목이었다. 난파선에서 인양된 도자기는 무려 2만661점이었다. 청자가 1만2359점, 청백자·백자는 5303점에 달했다.

인양된 도자기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완형의 신품들이었다. 같은 종류의 그릇을 10개나 20개씩 포개 끈으로 묶은 다음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한 것이었다. 이 무슨 뜻인가. 이 배가 상품을 싣고 가던 대형 무역선이라는 얘기다.

■무역선의 국적은 어디?

그렇다면 이 배는 대체 언제 어디서 출항했으며, 어디로 가는 무역선이었을까.

수수께끼는 인양된 목간의 글씨에서 풀렸다. 당시 선적한 물품에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 선적일자, 수령

동전과 함께 배 밑바닥에서 쌓여있던 자단목. 1000여 본이 있었다. 아마도 일본의 대형 사찰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자재였을 것이다.

 

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나무 패(목간)가 364점 달려 있었다. 나무패는 결국 오늘날의 택배 송장 같은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신안선이 사찰의 건축이나 복구비용을 조달하려고 일본이 파견한 무역선이 아닐까 추정한다.

즉 도후쿠사가 사원의 재건자금을 마련하려고 가마쿠라 막부(鎌倉·1192~1333)의 허가를 받아 원에 파견된 무역선이라는 것이다. 신안선에서 확인된 목간 364점 가운데 ‘도후쿠사(東福寺)’라고 적힌 것이 무려 41점이나 되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도후쿠사 뿐 아니라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궁(거崎宮)’은 일본의 대형사찰들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그럴까. 물론 송·원시대에 일본에서 사찰이나 신사를 건축하는데 드는 비용을 조달하려고 선박을 중국에 보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런데 물건을 실어나른 기록인 목간 가운데는 지치 3년, 즉 1323년의 나무패가 특히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1323년 무렵에 일본이 중국에 무역선을 파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목간의 명문을 보면 한결같이 ‘지치(至治)’라는 중국연호를 사용했다. 지치는 1321~1323년까지

경원로라는 글자를 새긴 청동추. 물건을 선적한 곳이 중국 경원 즉 지금의 저장성 닝보였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중국과 고려에서 사용한 원나라의 연호이다. 당시 가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였던 일본은 ‘원형(元亨)’이란 연호를 독자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배라면 일본연호를 썼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일본배가 아니라 중국 선박이거나, 원과 고려의 상인들이 고려와 일본선원을 고용해서 공동으로 운영한 국제무역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유력하다.

목간을 읽어 복원한 바에 따르면 난파선은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 4월22~24일과 5월11일, 6월1~3일 세 차례에 걸쳐 하물을 선적한 뒤 경원(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떠나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경원로(慶元路)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추가 인양된 것이 바로 그 출발점의 단서이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후쿠오카)였을 것이다. 목간 중에는 ‘하코자키궁(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후쿠오카)에 있는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이는데, 14세기 일본의 주요출항지가 바로 이 항구였다.

■그 무서운 침몰의 순간

배에서 인양한 생활용품들로 당시의 선상생활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선박 안에는 선원, 상인, 승려 및 사찰 관계자, 화주 등이 삼삼오오 모여 국수, 튀김, 야채, 고기요리를 해먹었다.

후추와 생강, 정향을 사용해서 청동제 솥과 냄비, 깔때기, 도마에서 요리했으며, 식사는 낡은 백자사발과 접시를 사용했다. 간식으로는 여지, 복숭아, 은행, 잣, 밤을 먹었다. 배 안의 승려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 동원해서 예불을 올렸다. 탑승자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바둑과 장기, 주사위 놀이도 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왜 침몰의 순간을 맞이했을까.

나무패에 기록된 마지막 선적일자, 즉 6월3일이라는 날짜가 마음에 걸린다. 물론 ‘음력’임을 감안해야 한다. 원래 고려·조선시대 조운의 원칙은 4월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태풍이 불기 시작하는 음력 6월부터는 항해에 각별히 조심해야 하며 7월~8월 사이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배를 띄울 수 없다.

지치 3년, 즉 1323년에 선적했음을 알려주는 물건 꼬리표.

 

그러나 무슨 이유인 줄은 모르지만 배는 음력 칠월 보름 이전에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博多) 항에 도착하려 했다. 배는 6월3일 중국 닝보에서 마지막 선적을 마치고 고려의 연안을 따라 신안 앞바다를 통과할 때 태풍을 만난 것은 아닐까.

해저 속의 난파선 모양을 통해 침몰 당시의 상황을 복원할 수 있다. 즉 먼저 배의 우현 뱃머리 근처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깨어진 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에도 배는 쏜살같이 미끄러지듯 물위를 내달았다. 신안선은 배 밑바닥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이다. 첨저선은 높이 3m의 파도에도 끄덕없다.

바람이나 파도에 밀려도 배의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거센 바람에도 선체의 상하 및 좌우 흔들림이 심하지 않다. 속도 역시 조파저항(배가 파도를 일으키며 달림으로써 생기는 저항)이 적어서 저항성능이 매우 우수하다. 그러니까 먼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이 200톤 급의 배가 표류해서 결국 난파됐다면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일까. 이미 돛을 내렸거나 파손되어 제 기능을 잃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갯바위나 암초에 충돌하면서 뱃머리 우현에 틈이 벌어졌고 그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배는 서서히 물이 차면서 선수 우측부터 가라앉으며 갑판으로 물이 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무사귀환을 원하는 승려의 기도와 막대한 이문을 기대했던 상인의 꿈 역시 속절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고려청자는 왜?

앞서 잠깐 일별했지만 신안선에서 확인된 유물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2만점이 넘는 도자기였다. 이중 중국 저장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 생산품이 60%인 1만2000점에 달했다. 용천요 가마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음을 알 수 있다. 7점의 고려청자가 확인된 것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매병(입이 작고 어깨선이 풍만하며 몸체가 서서히 좁아지는 병)과 상형 연적(코끼리 형태의 벼루 먹 그릇), 완(주발), 베개, 뚜껑, 잔받침 등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적은 수의 고려청자가 무역선에 선적됐을까. 고려청자 가운데 매병은 당시 중국에서 대대로 전해진 골동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시기가 침몰당시 보다 100년 이상 앞선 13세기 전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고려청자 6점은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매병과 달리 6점의 청자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신형이다. 그러나 고려청

신안선에서 발견된 7점의 고려청자.

 

자의 수량이 너무 적으니 주된 무역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긍의 고려 기행문인 <고려도경>은 “고려의 비색청자는 천하제일”이라 호평했다. 그랬으니 고려청자가 중국인들의 애호품으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애호가들이 소장했던 고려청자 7점이 왜 신안선에 실렸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배 밑에 자단목을 깐 이유

출토품 가운데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배 밑바닥에서 잔뜩 쌓인채 발견된 자단목 1017본과 동전 28톤이었다.

우선 자단목을 보자. 자단목은 단향(檀香)으로 일컬어진다. 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다. 신안선 밑바닥에 가장 먼저 적재한 자단목은 길이 2m 내외였다. 직경은 10~15㎝ 짜리가 가장 많았지만 40㎝가 넘는 것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표면에는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지중해 지역과 서남아시아에서 온

신안선을 축소 복원한 모습. 밑바닥에 뾰족한 첨저선이다.

상인들이 원산지를 드나들며 남긴 흔적일 것이다.

왜 자단목을 배의 맨 밑바닥에 실었을까. 배의 무게중심, 즉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해도 배의 균형만 맞추려고 실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일본의 후쿠오카나 교토의 사찰에 대불을 건축하려 했던 승려와 상인들이 이 자단목을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 자단목은 특히 불가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목재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 불교와 힌두교에서 사랑받았으며, 조각품이나 장식품, 고급가구 등에 사용됐다. 따라서 신안선이 실린 자단목 역시 일본의 승려들이 소형불상이나 목탁을 만드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사찰과 귀족들의 가구에도 활용했을 것이다.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

화려한 도자기에 가려서 그렇지 신안선에서 확인된 엄청난 양의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였다.

처음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7차 발굴 때까지는 약 3t에 그쳤다. 그런데 1983년 9월30일까지 진행된 8차 발굴에서 동전이

잇펜 스님(一遍·1239~1289)의 생애를 두루마리로 그린 ‘잇펜쇼닌에덴(一遍上人繪傳·잇펜 스님의 생애를 그린 두루마리)’. 사람들이 저잣거리에서 동전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땅에 묻는 장면이 묘사돼있다.

 

터졌다. 침몰선 내부를 가득 채운 토사를 빨아들이려고 흡인호스를 들이댔는데, 거기서 동전노다지가 끌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10~11차 발굴까지 그렇게 빨아들인 동전은 무려 2만8018㎏, 즉 28t이 넘었고 수량으로는 800만개에 이르렀다.

이 어마어마한 동전은 배 밑바닥에 쌓아둔 자단목 위에 실려 있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였다.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다.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다. 주인들이 자신의 동전에 주인표시를 내놓은 것이다. 인양된 동전을 검토하니 놀라웠다. 신안선은 가히 동전박물관이었던 것이다.

배에서 확인된 동전은 66종에 이르렀다. 신(기원후 8~23년)에서 제작된 화천(14년) 및 후한의 오수전

신안선이 발견된 신안 앞바다. 평균 수심 20미터 내외이며 바닥이 진흙으로 이뤄져있다. 조류가 세차고 복잡하며, 물이 흐리기로 유명한 곳이다.|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25~219년)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년)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하염없이 쏟아진 것이다. 신-후한-당-북송-남송-요-금-원 및 서하시대까지….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다. 이 발굴로 우리나라는 중국 동전 세계 최다 보유국이 되었다.

■동전 800만개의 의미

그렇다면 신안선에 실린 어마어마한 동전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상인들은 동전을 닥치는대로 실었을까.

동전은 우선 자단목과 함께 밸러스트(ballast·배의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바닥에 놓는 물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작 배의 균형이나 잡으려고 그 엄청난 동전을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지금까지 연구로는 대략 두가지 견해로 해석된다. 즉 중국 동전을 수입해서 그대로 일본에서 사용하려 했다는 설과, 청동대불을 조성하기 위한 재료로 수입하려 했다는 설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 중국본토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동전의 유통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나라의 주요 화폐는 지폐(교초와 보초)였다. 원나라 때 정식으로 주조된 동전은 딱 두 차례에 불과했다. 그것이 1310년 발행된 지대통보와 대원통보였다.

이 두 동전은 신안선에서 확인되어 신안선의 침몰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런데 원나라 조정은 그마저 딱 1년 만에 사용금지 시킨다. 원나라 황제 인종은 “새 동전이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옛 동전을 혼용할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불편을 야기시킨다”(<원사>)면서 폐기를 지시했다. 인종은 그러면서 “다시 지폐인 교초와 보초를 사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니까 원나라에서 동전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이다. 다만 원나라는 동전을 해외무역 때 금 은 및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허락했다. 결국 신안선에 실린 28t의 동전은 일본과의 교역품으로 중국에서 반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통용된 중국동전?

이렇게 실려가던 28t의 동전은 어떻게 사용될 운명이었을까. 여기서 제기된 첫번째 설이 바로 이 중국 동전을 수입해서 그대로 일본에서 유통시키려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 12~15세기 일본에는 북송의 동전을 위주로 한 수많은 중국 동전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방증자료가 있다. 즉 동전을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모습은 잇펜 스님(一遍·1239~1289)의 생애를 두루마리에 그린 ‘잇펜쇼닌에덴(一遍上人繪傳)’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저잣거리에서 동전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땅에 묻는 장면이 묘사돼있다. 또 수입한 중국 동전을 사용한 1187년의 토지매매기록도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동전을 수만개, 수십만개씩 꾸러미 채로 옹기에 넣어 매장한 사례도 있다.

일본에도 동전은 있었다. 708~958년 사이 12종류의 동전(황조십이전)이 주조된 바 있다. 그러나 새로운 화폐가 주조될 때마다 기존의 동전은 10분의 1로 평가절하됐다. 애써 돈을 모아도 신화폐가 발행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통화정책의 실패였다. 백성들은 새 동전이 발행될 때마다 옛 동전을 녹여 돈으로 바꿔 썼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는 점차 신용을 잃게 됐다. 그래도 경제활동에서 화폐가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중국의 동전이 대량으로 수입·유통됐다는 것이다.

비단 일본 뿐이 아니다. 요(907~1125)·서하(1038~1227)·금(1115~1234)은 물론 베트남에서도 중국 동전이 통화로 사용됐다. <고려도경>도 고려에서도 중국동전이 화폐로 사용된 사례를 전한다. 그러나 고개를 내젓는 전문가들도 있다. 즉 화폐라는 것은 단위와 통일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은 무려 66종에 이른다. 과연 화폐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복잡한 종류의 동전을 주고받느니 차라리 현물교환이 낫지 않을까. 화폐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황금과 맞바꾼 동전

사실 상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 동전의 일본 수출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장사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조국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1-1의 가치를 고스란히 인정했다. 즉 동 10g의 동전이라면 동 10g의 가치를 인정해준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은과 동에 비해 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중국 상인들은 일본에서 은과 동을 주고 금을 값싸게 살 수 있었다. 그 금을 중국으로 가지고 돌아가 팔면 큰 밑천없이 막대한 돈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남송 말년 일본의 황금 1냥의 가격은 630문이었는데, 당시 남송의 황금가격은 4만문 정도였다. 그러니 일본에서 금을 사서 중국에서 팔면 무려 63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원나라 시대에 들어서도 대도(베이징)의 금값은 일본 교토의 3배였다고 한다.

그러니 동전이 필요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값싼 황금으로 동전을 맞바꿔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반대로 황금이 필요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쓸모없게 된 동전을 일본으로 가져가 황금과 맞바꿈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원사>는 이를 두고 “1277년 일본 상인이 황금을 가져와 동전과 바꿨다”(持金來易銅錢)’고 기록했다. 중국과 일본 상인은 서로 ‘윈윈’하면서 큰 힘들이지 않고 떼돈을 벌었던 것이다.

■동전을 녹여 불상을 만들었다?

신안선의 동전이 ‘청동대불 조성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즉 일본학자인 이누마 겐지(飯沼賢司)에 따르면 일본은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동 생산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10세기 중반 최대 광산지인 나가노보리 동산(長登 銅山)이 폐광했다. 이에따라 동의 생산량은 계속 낮아졌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동 수요량은 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즉 불교의 극락세계로 왕생한다는 말법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경통(經筒·경서와 경문을 넣는 통)과 청동대불의 주조가 대거 이뤄졌다.

그런데 일본의 3대 대불이라는 아스카 대불(飛鳥大佛· 193~710), 나라 대불(奈郞大佛·710~794),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1185~1392)의 금속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아스카 대불(2.96%)과 나라 대불(0.55%)에 비해 가마쿠라 대불(19.57%)의 납성분이 엄청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분석이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북송 시기의 동전 5개를 분석한 결과 납성분이 21.13~45.40%였던 것이다.

무슨 의미냐. 신안선에서 출토된 북송시기의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마쿠라 대불이 바로 북송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조성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수입한 동전을 녹여 대불을 만들었기 때문에 납 성분이 많고 주조 기술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있어 불순물이 검출됐다는 것이다. 경통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누마 겐지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후반기에 주조된 일본 경통의 납 함유량이 유독 높았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 동전들은 과연 어떤 용도였을까. 현금이었을까, 청동대불 조성용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 였을까.

하기야 신안선, 아니 신안 보물선에 1300년 동안 묻혀있던 역사가 어디 그리 쉽게 시원한 답을 내어 줄리 있는가.(6)

<참고자료>

서동인·김병근, <신안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주류성, 2014

랜달 사사키, 홍성민 옮김, 문한석 감수, <해저보물선에 숨겨진 놀라운 세계사>, 공명, 2014

김병근, <수중고고학에 의한 동아시아 무역관계 연구-신안해저유물을 중심으로>, 건국대 박사논문, 2004

사쿠라키 신이치(櫻木晋一), <신안선 출토 동전의 용도와 성격>, ‘신안선 출토 금속 유물과 14세기 동아시아의 금속공예’ 국제학술대회,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7

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 2006

국립중앙박물관,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발굴 40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2016

 

 

고려 물품꼬리표 ‘목간’ 첫 발굴, 행선지·받는이 등 쓰여 있어

[동영상] 태안 청자운반선 2차발굴 결과
사자형향로 등 1만9천여점 인양

  • 수정 2019-10-20 17:20등록 2007-10-11 19:48
安永戶(안영호) 등 개경의 수취인이 금방 쓴 듯 선명하다. 함께 공개한 두꺼비형 벼루와 청사자형 향로는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는 이형청자다. 사진 연합뉴스

 

충남 태안 대섬 은근해역 2차 수중문화재조사

태안 해저 청자 운반선, 즉 지난 5월 주꾸미가 물어오린 청자 대접이 실마리가 돼 발견된 ‘주꾸미 보물선’이 12세기 초 전남 강진에서 귀족들한테 주문받은 청자를 싣고 개성으로 가던 배임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11일 오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충남 태안 대섬 인근해역에 침몰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의 2차 발굴결과를 발표하고 그동안 인양한 청자 가운데 이형 청자와 목제 물품 꼬리표를 공개했다. 1976년 발굴된 신안선에서 중국 목제 꼬리표가 발견된 적은 있지만 수중에서 고려시대 꼬리표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은 태안 청자운반선에서 나온 목제 물품 꼬리표. ‘崔大卿 宅上’(최대경 댁상)은 ‘최대감 댁 올림’ 정도로 풀이된다. 정자체 글씨와 ‘최대감’ 표기로 보아 청자 수취인이 성만 대도 알 만한 고관으로 추정된다.

 

폭 3cm 내외 두께 7~8mm의 목판에 먹으로 쓴 꼬리표는 모두 네 가지. 이 가운데 ‘耽津亦在京隊正仁守了’(탐진역재경대정인수료)라고 쓴 꼬리표는 ‘탐진(강진의 옛이름)이 개경(개성의 옛이름)의 대정(종9품 벼슬) 인수(인명 추정)에게’라고 풀이된다. 뒷면에는 ‘00載船進’(00재선진)은 ‘00가 배(의 특정부위)에 실음’이라고 쓰여있다. 이로써 태안 청자운반선이 강진에서 개성으로 운반하던 청자를 실은 배임이 확인된다고 문화재청 쪽은 밝혔다.

또 다른 꼬리표 ‘崔大卿 宅上’(최대경 댁상)은 ‘최대경 댁에 올림’으로 풀이된다. ‘대경’이 종3품 벼슬아치를 높여부르는 칭호이다. 또다른 꼬리표 ‘00安永戶付沙器一<果+衣>’(00안영호부사기일과)는 ‘(00는 재경으로 추정)개경의 안영 집에 사기 한 꾸러미를 보냄’으로 풀이된다. 나머지 꼬리표는 수취자 없이 ‘壽福’(수복)이라는 수결만 표시돼 있다. 이날 이두식 표기를 풀이해 준 최연식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는 더 많은 목간이 발견되면 좀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장에 참석한 한 인사는 꼬리표 뒷면의 수결이 ‘수복’이란 수결이 아니라 무사항해와 도자기가 깨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부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꼬리표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최대경 댁상’. ‘대경’은 조선시대의 ‘대감’ 정도의 뜻으로 성만 대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알만한 고위층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꼬리표가 휘갈겨 쓴 것과 달리 정자체로 정성스럽게 쓴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인양된 청자들의 상한선을 12세기 초로 잡는 것과 관련해 고려 최씨 무신정권기의 특정인물과 관련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또 꼬리표 상의 대경, 대정 등 수취인들이 직위가 벼슬아치들이어서 고려청자가 궁중뿐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이 뒷받침된다. 꾸러미마다 꼬리표가 달려 있고 청자의 품질이 다양한 점으로 미루어 청자는 개경 거주 귀족들의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 방식으로 청자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모두 1만9000여점의 청자가 인양되었다면서 이 가운데 청자사자형향로와 청자철화퇴화문두꺼비형벼루를 공개했다.

청사자형향로는 향불을 담는 세발그릇과 사자를 조각한 뚜껑으로 되어 있는데, 뚜껑에는 구멍이 뚫려 사자의 몸을 통해 입으로 향연이 나오도록 돼 있다. 사자는 앞발을 뒷발에 다소곳이 얹은 채 앉은 모양으로 수염과 이빨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몸에는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날 도자기를 감정한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은 이런 모양을 처음 본다면서 고려시대인들의 해학과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자는 굽는 과정에서 터진 듯 갈라져 있었다. 인양작업에 참여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문환석 과장은 하자가 있는 물품은 주문자한테 서비스로 끼워준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또 처음 발견된 두꺼비형 청자벼루는 피부의 융기와 눈동자를 철화와 백퇴화로 표현하고 입과 다리는 음각으로 표현하였으며 등 부분에 먹을 가는 연당과 연지를 만들고 유약을 칠하지 않았다.

이날 청자대접, 접시, 완, 잔, 단지, 바릿대 등도 함께 공개됐는데, 청자바닥에 내화토를 칠한 점, 접시의 아가리 부분에 음각선이 돌려진 점, 대접 등에 음각된 물고기와 앵무 문양이 가로가 아닌 세로인 점 등으로 미루어 청자 제작연대를 최대 12세기 초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가마에 고온으로 구울 경우 도자기의 유약이 흘러내리면서 자기가 바닥에 눌러붙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의 바닥에 칠하는 물질이 무엇인가로 도자기의 연대를 따지는데 1300도에서도 녹지 않는 내화토는 12세기 초까지 쓰이고 그 뒤에는 규석이나 모래가 사용된다.

이날 청자유물을 감정한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 관장은 참외형 주전자의 주둥이와 손잡이가 작은 점, 상감청자가 발견되지 않은 점도 이처럼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현재 유물선의 발굴은 3층까지 진행되었으며 나머지 4, 5층이 발굴되면 더 많은 종류의 청자가 나올 것이라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번 발굴을 계기로 현재 20톤급인 해저유물발굴선 외에 새로 150톤급으로 만들기 위한 예산을 신청했다고 말했다.(7)

12세기 청자 보물선 주꾸미어선이 낚았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영상 문화재청 제공

 

 

 

 

<주>

 

 

(1) "700년 전 침몰한 신안보물선…수출금지품 800만개 실은 밀수선"[이기환의 Hi-story] (daum.net) 이기환 기자 2023. 12. 4. 

 

 

(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6200500001

 

 

(3) 명품 고려청자를 '참기름병', '꿀단지'로…침몰선, ‘900년만의 증언’[이기환의 Hi-story] (daum.net)2022. 12. 12. 

 

 

(4) [도재기의 천년향기](29)건져올린 14척 중 고려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는 겨우 1척씩뿐 바다만 아는 미스터리 ‘고선박’ - 경향신문 (khan.co.kr)2019.08.03

 

(5)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daum.net)2021. 2. 15. 

 

 

(6)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608171308001

 

 

(7) 고려 물품꼬리표 ‘목간’ 첫 발굴, 행선지·받는이 등 쓰여 있어 (hani.co.kr)수정 2019-10-20 등록 2007-10-11

 

 

 

 

 <참고자료>

 

 

 

태안 보물선 복원에 무려 21년 왜?..이제 6년 남았다 (daum.net)2023. 7. 26. 

 

 

 


40년 수장고에 묻어놨던 신안선 보화들 이제야 다 꺼냈다 (hani.co.kr)
2016-07-28 

 

 

신안선에서 태안선까지 해저발굴의 궤적 (daum.net)연합뉴스 2007.07.24 

 

 

 

 

 

 

KBS 역사스페셜 – 800년의 타임캡슐, 태안 마도선

https://youtu.be/5zV-9iB8-pg?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KBS 역사스페셜 – 마도3호선의 비밀 / KBS 2012.10.25 방송

https://youtu.be/JzPzg1t0354?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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