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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의 강역 (1) 서희의 강동6주 본문

남국/고려

2. 고려의 강역 (1) 서희의 강동6주

대야발 2024. 9. 23. 11:36

 

 

 

 

■ [강동 6주를 찾아서 ①] 압록강 남쪽인데 강동 6주? 고려 북계의 서북쪽 국경은 요령성 요양, 심양 인근

조하준 기자 입력 2023.12.08 13:23 수정 2023.12.10 10:19

 
 

고려 북계는 요양, 심양과 접경하고 있었다

 

『명사』 권 41 지리지 2에 철령위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그 기록을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철령위는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에 옛 철령성에 설치했으나 26년(1393년) 4월에 옛 은주(嚚州)의 땅으로 옮겼다.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는 요하가 있으며 남쪽으로 범하(泛河)가 있고 또 남쪽에 소청하(小清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 남쪽에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에 의로천호(懿路千戶)를 이곳에 두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의 남쪽에 있으며 또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한다. 정통(正統) 4년(1439년)에 범하천호(泛河千戶)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곧 옛 철령성이며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기에 현을 설치했으나 폐지했다. 또 함평부(鹹平府)가 있는데 원나라 때의 직예요동행성(直隸遼東行省)이다. 지정(至正) 2년(1342년)에 항복하여 현이 되었으며 홍무 초에 폐지하였고 남쪽으로 도사(都司)와의 거리는 240리이다.”

 

1388년 철령위는 철령성이란 곳에 설치했는데 그 철령성은 봉집현이란 곳에 있었고 그곳이 당시 고려와 명나라 사이의 국경이었다는 뜻이다. 그럼 봉집현의 위치를 알면 대략적으로 고려와 명나라 양국 간 국경이 어디서 형성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봉집현의 기록을 찾으면 이렇다.

 

“봉집현은 당나라 때 발해가 설치했으나 원나라 때 폐지되었고 명나라에서는 봉집보(奉集堡)라 했다. 오늘날 요령성 심양현 동남쪽 45리에 있다.(奉集縣唐時渤海置元廢明爲奉集堡在今遼寧省瀋陽縣東南四十五里)”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철령위의 위치와 실제 철령위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명사』 지리지는 철령위를 설치한 봉집현이 고려-명 양국 간 국경이라 기록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봉집현은 요령성의 성청이 있는 심양시 동남쪽 45리 지점에 있었다는 뜻이다. 명나라 때 이곳은 봉집보란 이름으로 바뀌는데 실제로 심양시 소가둔(蘇家屯)구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심양시 동남쪽 직선거리 28.5km, 본계시 서북쪽 직선거리 13.2km 지점에 있다.

 

 

바로 이 부근에서 고려와 명나라 양국 간의 국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건 다른 나라 기록도 아닌 철령위를 설치한 주체인 명나라 측에서 직접 남긴 기록이다. 철령위가 바로 저곳에 있었기 때문에 최영 장군이 요동 정벌을 계획했던 것이다.

 

 

만일 철령위가 국사 교과서 속 지도대로 표기된 곳에 있었다면 최영 장군이 요동 정벌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럼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 너머 요령성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사서에서도 교차 검증이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다행히도 교차 검증이 된다.

 

 

『고려사』 권 135 열전 48에 기록된 우왕(禑王) 9년(서기 1383년)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우왕에게 국경 수비에 대해 건의한 내용이 있다. 해당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두 사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북계(北界)는 여진(女眞), 달달(達達), 요심(遼瀋) 등의 땅과 맞붙어 있어 실로 국가의 요충지이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때라도 반드시 군량을 비축해 두고 군사를 양성해 불의의 사변에 대비해야 합니다.(北界與女眞達達遼瀋之境相連實爲國家要害之地雖於無事之時必當儲糧養兵以備不虞)”

 

 

 

1383년 이성계는 고려의 북계가 요령성 요양, 심양과 맞붙어 있다고 기록했는데 국사 교과서 속 북계의 북쪽 끝 지역인 신의주시와 심양시 간 직선거리는 210km로 서울에서 경북 성주군까지 거리와 비슷하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즉, 고려의 북계는 요령성 요양시, 심양시와 매우 가까운 곳까지 이어져 있었고 『명사』 지리지에 나온 기록이 이를 보충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해당 기록은 고려 멸망 직전 상황의 기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1392년 고려 멸망 당시까지 고려 영토는 현재의 압록강을 넘어 요령성 요양시와 심양시 인근까지 뻗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1)


 

 

 

[강동 6주를 찾아서 ②] '맑은 압록강'과 '푸른 압록강' 고려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

조하준 기자입력 2023.12.08 19:57수정 2023.12.10 10:18

 

 

 
1388년 철령위 사건 당시 고려와 명나라는 위 지도에 표기된 심양시와 본계시 사이에서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앞선 기사에서 확인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려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

 

 

1차 여요전쟁 이전에도 등장하는 압록강

 

 

강동 6주는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범위였을까? 『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편에 기록된 성종 13년(서기 994년)의 기록을 다시 보면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 성종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엎드려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신하들을 지휘하시어 안북부에서 압강(鴨江)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답사하고 성들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게 하십시오. 아울러 일꾼들을 동원해 우리 측과 함께 축성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분부해주시고 축성할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를 빨리 회신해 주십시오.”

 

 

먼저 『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3년(서기 984년)의 기록이다.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 언덕에 성을 쌓아 보루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로서 저지하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가니 군대가 궤멸되어 성을 쌓지 못했으며 돌아온 자가 1/3에 불과했다.”

 

 

이 기록은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기 10년 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미 이 때 고려는 압록강 언덕에 성을 쌓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미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소 어긋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문스러운 기록은 성종 10년(서기 991년)에도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다.

 

 

“압록강 바깥의 여진족들을 쫓아내 백두산 바깥에서 살게 했다.(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

 

 

2개의 압록강

 

보통 압록강을 한자로 쓰면 우리는 아마 ‘鴨綠江’이라고 쓸 것이다. 하지만 옛 사서에는 다른 표기의 압록강이 등장한다. 일일이 다 언급하기엔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지만 우선 강동 6주와 관련된 기록만 살펴보기로 하자. 『요사(遼史)』 권 115 열전 45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조에는 강동 6주가 넘어간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통화(統和) 11년(서기 994년)에 왕치(王治, 고려 성종의 이름)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 표를 올리고 사죄하므로 조서를 내려 여직국(女直國)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백 리의 땅을 주었다.(十一年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위 기록에 나온 여직국이란 여진족을 말하는데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이 야율종진(耶律宗眞)이라 ‘참 진(眞)’자가 겹치기에 이 때부터 요나라에선 여진족을 ‘여직(女直)’이란 이름으로 기록했다. 

 

 

『요사』는 강동 6주의 기준이 되는 ‘압록강’을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鴨淥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럼 鴨淥江과 鴨綠江은 서로 같은 강일까? ‘淥’과 ‘綠’은 발음은 같은 ‘록’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淥은 ‘맑다’는 뜻이고 綠은 ‘푸르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인하대학교의 윤한택 교수가 이 2개의 압록강을 ‘맑은 압록강’ ‘푸른 압록강’이란 이름을 붙여 구분하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압록강’과 ‘압강’이란 강이 등장하고 『요사』에는 ‘鴨淥江’과 ‘鴨綠江’이란 강이 등장하는 셈이다. 과연 이 두 강이 서로 같은 강인지는 더 따져 봐야 한다. 문맥으로 볼 때 『고려사』의 ‘압강’과 『요사』의 ‘鴨淥江’은 서로 같은 곳이라 봐야 한다.

 

 

몽골 역사를 기록한 『원사』에서도 2개의 압록강이 나오는데 이 2개의 압록강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한다. 먼저 『원사』 권 208 열전 95 외이(外夷) 1 고려 편에 실린 기록을 보면 이렇다.

 

 

“강물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하며 이름은 압록강(鴨淥江)이다. 평양성은 그 동남쪽에 있으며 그 강에 의지해 요새로 삼았다.(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因恃以爲險)”

 

 

이 기록에선 鴨淥江이 등장하고 평양성이 그 강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얼핏보면 지금 북한의 평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같은 책 권 59 지 11 지리 2 요양등처행중서성 동녕로(東寧路) 편에 적힌 기록은 뭔가 심상찮다.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이라고도 했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의 땅이다. 동진(東晉) 의희(義熙) 이후에 그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해 평양성을 함락시키니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는 것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성을 서경이라 했다.”

 

 

동녕로란 1270년에 고려의 역적 최탄(崔坦) 등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갖다 바치자 몽골이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원사』는 동녕로가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던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지금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는 것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고 못을 박고 있다.

 

 

즉, 고구려 평양성이자 몽골의 동녕로가 된 곳은 ‘鴨淥江’ 동남쪽에 있던 곳이었지 ‘鴨綠江’ 동남쪽에 있던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鴨淥江’과 ‘鴨綠江’이 다른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鴨綠江’ 동남쪽에 있던 곳은 지금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곳이 옛날의 평양 즉, 고구려 평양성이 아니라고 했으니 실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도 다른 곳일 가능성이 높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역시도 압록강에 대해 묘한 기록을 남겼다. 먼저 『금사』 권 135 열전 73 외국 하 고려 편에 실린 고려의 영토 기록은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의 국왕은 왕해(王楷, 고려 인종의 이름)이다. 그 땅은 압록강(鴨綠江) 이동, 갈라로(曷懶路) 이남이며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이른다.(高麗國王王楷其地鴨綠江以東曷懶路以南東南皆至于海)”

 

 

압록강의 표기는 우리가 아는 압록강과 같은데 압록강 ‘이남’이 아닌 ‘이동’이라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 기록에 나온 압록강도 지금의 압록강일까? 무신정변 직후인 1174년에 서경유수였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조위총은 서경 예하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바치겠다며 귀순을 청한 바 있다. 당시 사건을 『금사』 권 7 본기 제 7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때엔 개경에서 서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자비령을 넘어야 했는데 조선시대 때부터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서경이 평양일 경우 굳이 자비령을 넘을 필요가 없다. 화살표로 표시한 길목을 따라 지금도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신묘(辛卯)일에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그 임금을 배반하고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鴨淥江) 이동의 40개의 성을 들어 내부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 사이 지역에 조위총의 본진이었던 서경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또 압록강이 ‘鴨淥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보통 우리는 자비령이라면 황해도 황주군의 고개로 알고 있다. 그런데 서경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고 압록강이 지금 북한과 중국 사이의 압록강이라면 큰 문제가 생긴다.

 

 

자비령은 평양 남쪽에 있는 고개이고 평양은 압록강 남쪽에 있지 동쪽에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경의 관할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예로 든 압록강 또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고 자비령 또한 황해도가 아닌 다른 곳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의 국경이 되었던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이자 『고려사』에 나온 압강(鴨江)으로 보인다. ‘푸른 압록강’인 ‘鴨綠江’은 지금의 압록강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맑은 압록강’은 어느 강을 지칭하는 말인가? 이 점을 알면 강동 6주의 위치를 더욱 자세히 알게될 것으로 보인다.(2)

 

 

 

 

[강동 6주를 찾아서 ③]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강동 6주는 만주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 더 높아

조하준 기자입력 2023.12.09 08:57수정 2023.12.12 23:55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모두 만주 지역에 소재

 

다시 철령위 사건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 따르면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고려 우왕(禑王)이 표문을 올려 “철령(鐵嶺)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가 지켜왔으니 옛날처럼 해주시길 바랍니다”고 항의했다.

 

 

『명사』 지리지에 기록된 요동도지휘사사의 지리적 범위는 서쪽으로 산해관, 동쪽으로 압록강, 남쪽으로 여순, 북쪽으로 개원시로 나와 있다. 즉, 명나라 당시 요동은 오늘날 요령성 전역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고려사』엔 철령위 설치 당시 명나라가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여 개의 참(站)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이는 산해관에서 만주 철령까지 이르는 구간을 가리키는 것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그런데 정작 이에 대한 주원장의 답변이 뭔가 이상하다. 주원장은 고려 우왕의 표문을 받고선 이런 반응을 보였다.

 

“고려가 옛날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했으면서 이제 와서 철령(鐵嶺)이라고 꾸며서 말하니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서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말게 하라.(高麗舊以鴨綠江爲界今飾辭鐵嶺詐僞昭然其以朕言諭之俾安分毋生釁端)”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먼저 『요사』 권 1 본기 1 태조 상(上)을 보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천복(天復) 9년(서기 909년) 겨울 10월 무신(戊申)일에 압록강(鴨淥江)에서 낚시를 했다.(天復九年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나온 압록강이 과연 지금의 압록강이었을까? 당시는 발해가 아직 버티고 있었고 요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야율아보기가 어떻게 발해 영토 한복판에 있는 지금의 압록강에 가서 낚시를 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이 기록을 통해서도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사』 권 36 지(志) 6 병위지(兵衛志) 하편에 적힌 기록을 보면 압록강(鴨淥江)의 정체가 좀 더 자세히 드러난다.

 

 

“동경(東京)은 압록(鴨淥)의 서북쪽 봉우리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삼는다. 황룡부(黃龍府)는 정병(正兵)이 5,000명이고 함주(咸州)는 정병이 1,000명이다. 동경과 여직(女直)의 경계는 압록강(鴨淥江)에 이른다.(東京至鴨淥西北峰為界黃龍府正兵五千咸州正兵一千東京沿女直界至鴨淥江軍堡凡七十各守軍二十人計正兵一千四百)”

 

 

동경이란 동경 요양부를 말하는데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기록에 나온 동경이란 곳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를 말하고 황룡부는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을 말한다. 함주는 요령성 철령시 일대를 말한다. 과연 위 기록에 나오는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위 기록에서 말하는 압록강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면 동경이 압록강 서북쪽 봉우리~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안에 길림성 장춘의 황룡부와 요령성 철령의 함주가 들어갈 수도 없다. 이 말은 곧 요나라 동경과 관련된 압록강은 한반도의 압록강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이 되었던 ‘맑은 압록강’ 즉, 압록강(鴨淥江)은 동경 요양부 인근에 있는 강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동경 요양부 인근에 있는 큰 강으로서 땅을 동서로 가르는 강은 요하 뿐이다. 이로 볼 때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강동 6주 또한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이 아니라 요하 동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鴨淥江을 요하에 옮겨놓고 설명하면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된다. 909년에 야율아보기가 鴨淥江에서 낚시를 했다고 했는데 요하 상류가 바로 거란족의 발상지인 내몽골자치구의 시라무렌 강이다. 야율아보기가 낚시를 한 鴨淥江은 바로 요하 상류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당서』 《동이열전》과 『원사』 《외국열전》 등은 고구려 평양성이 鴨淥江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요사』 지리지는 바로 동경 요양부가 고구려 평양성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요양시는 요하 동남쪽에 있으니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994년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했을 때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의 옛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요나라가 현재 고구려 옛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요나라가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식으로 발언을 했다. 이에 서희가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실 것이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것이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는 말과 "게다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이란 말이다. 그간 학계에서는 서희가 말한 '우리 땅'의 의미를 고구려의 옛 땅으로 해석했다.

 

 

 

송나라 사신 허항종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신라산이란 산 속에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고 『금사』엔 고려의 위치를 '압록강 이동, 갈라로 이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인근을 흐르는 큰 강이면서 땅을 동서로 가르는 강은 요하 뿐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또 1125년에 금 태종의 즉위식 참석을 위해 송나라 사신으로서 금나라를 방문한 허항종(許亢宗)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따르면 고려 국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9일 차 노정 : 함주(鹹州)에서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또 50리를 가면 동주(同州)에 이른다. (중략)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니 금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산(新羅山)이오. 산 속이 깊고 멀어서 갈 수 있는 길이 없소이다. 그 사이에선 인삼과 백부자가 나고 산 깊은 곳에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소.’라고 했다. 산 아래에 이르러 행로가 가히 30리였다.”

 

 

신라산이란 산이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라는 것인데 허항종 일행이 신라산을 목격한 것은 함주에서 동주로 가는 길목이었다. 먼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함주의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숙주에 대해선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 동북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동주는 요령성 개원시 남쪽 30리에 있다고 설명했다.

 

 

위 3곳 모두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를 중심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대로 압록강~원산만이라면 어떻게 요령성 개원시 일대에서 고려의 국경이 보인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령성 개원시에서 평안북도 의주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무려 264km나 떨어져 있고 또 방향도 남쪽이지 동쪽이 아니다. 결국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은 오늘날 압록강 지역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도 고려와 금나라 사이 국경이었다는 신라산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다고 주해했다.

 

 

그런데 『금사』 《외국열전》 고려 조에는 고려의 영토에 대해 “압록강 이동, 갈라로 이남”이라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압록강’이 과연 지금의 압록강이었겠는가?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는 요하가 있다.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인 신라산의 위치가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었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에 있었다면 결국 고려의 국경인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 강동 6주 또한 요하 인근에서 찾아야 한다.(3)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려, 조선의 북방강역이 어디인가? #1

https://youtu.be/7QiX-P289oI?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자료출처>

 

 

 

(1) [강동 6주를 찾아서 ①] 압록강 남쪽인데 강동 6주?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3.12.08 

 

 

(2) [강동 6주를 찾아서 ②] '맑은 압록강'과 '푸른 압록강'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3.12.08 

 

 

(3) [강동 6주를 찾아서 ③]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3.12.09

 

 

 

 

<참고자료>

 

 

고대 압록강은 어디인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2017.02.14 

 

 

서희가 거란한테 받은 강동6주는 어디일까?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5.16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64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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