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1. 고려 (1) 918년 왕건 고려 건국 본문

남국/고려

1. 고려 (1) 918년 왕건 고려 건국

대야발 2019. 6. 5. 18:54
SMALL

 

 

 
 
 
 

후삼국 시대의 도래와 동아시아의 대분열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 실패, 지방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국제 환경은 왕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후삼국이라는 분열 시대에 중국 지역과 북방 지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대규모 침공이나 당나라처럼 민족 통일 과정에 외세로서 간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상황이었고, 북쪽은 발해와 거란이 운명을 걸고 충돌 중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고려는 이러한 국제 환경을 통일의 승자가 되는 데 활용했다.

 

 

왕건은 군사 지도자로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이를 충분히 활용했다. 포용성 강한 성품과 거시적인 세계관도 갖췄다. 신흥 고려는 국력이 강한 편이 아니었고, 왕건의 정치력과 군사력도 호족세력이나 부하들을 압도할 수준에는 못 미쳤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했고, 권력 독점과 오만이 아니라 권력 공유와 인품으로 통일을 추진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궁예의 부하로 입문한 직후부터 연전연승을 거둔 그가 이미 광기를 보인 궁예의 관심술과 칼날을 벗어났다는 점은 매우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임을 알려준다. 더구나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의 추대로 고려를 세운 사실은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927년에 견훤은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잔악한 짓을 했다고 기록됐다. 하지만 왕건은 멸망 직전인 신라를 우호적으로 대했고, 마치 신라의 복수전처럼 후백제와 대구 팔공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포위됐다가 신숭겸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왕건을 지켜본 신라인들은 이미 고려의 백성으로 변신했을 것이다.

 

 
 

그는 무려 29명에 달하는 유력한 호족의 딸들을 부인으로 뒀다. 이러한 혼인정책을 추진해서 강력한 지방세력들을 군사적인 충돌, 희생 없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분점하고, 통일의 실질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심지어는 통일 후에도 경순왕에게 딸인 낙랑공주를 부인으로 줬다. 적이던 견훤은 물론이고, 끝까지 저항한 그의 아들인 신검도 살려줬다. 그는 군사지향적이고 야심만만하며, 반란을 일으킨 인물 치고는 드문 성격의 소유자였다.

 

 

왕건이 성공한 비결은 해양활동의 역할과 해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용했다는 점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동아지중해 서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경기만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작제건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내륙 하항도시인 개주(개성)를 비롯해 정주(풍덕), 염주(연안), 백주(배천) 4개 주와 강화 등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강화도가 만나고 황해와 한강하류와 예성강이 합쳐지는 소지중해에서 성장한 해상호족이었다.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는 해상세력이 물류체계를 장악한다면 경제력과 정치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해륙 및 수륙교통의 요지다.

 

 

그는 903년 3월, 해양호족들과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남부로 내려가 나주 지역과 인근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 909년에는 해군대장군으로서 나주를 지켰고,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했다. 910년에는 70여 척의 배에 2000여 명씩 싣고 후백제를 원정했다. 왕건 세력이 초기의 열세를 뒤집고 후백제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배경에는 ‘백선장군’ ‘해군대장’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의 강력한 수군력이 있었다.

 

 

또 하나, 국제 환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양을 외교전에 활용했다. 923년에 강남의 오월국에 사신을 보냈고, 또한 답례를 받았다. 북쪽의 후량·후당·후진 등 화북의 나라들에 사신을 자주 파견했고, 특히 후당은 925년을 시발로 짧은 기간에 8번이나 보냈을 정도였다. 시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는 해양의 중요성과 해양력 강화가 국가 발전의 토대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후 고려는 해양활동 능력을 바탕으로 군사적인 활동은 물론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외교, 국제무역, 국내 조운 등에 활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문화적으로 성숙했다.

 

 

왕건은 신흥국인 고려의 정체성과 사상, 그리고 미래의 국가발전 정책까지 해결하려는 지도자였다. 북쪽에서 동족인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취약한 국력의 운명을 걸고 군사적인 능력이 검증된 요나라와 직접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 발해 유민들을 수용해서 거주지를 마련했다. 거란은 적대국으로 인식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고,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만부교 아래에 묶어둬 죽게 했다. 이는 왕건의 단호한 자세와 고려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국제적으로 선언했고, 북상해서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나라의 국시, 즉 후대의 임금들이 추진할 국가발전 정책의 대강을 발표했다. 이것이 훈요 10조다. 그 가운데 제 7조는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민심을 얻어야 한다’이다.(1)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청동상.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 안에 있는 왕건의 무덤 현릉에서 출토됐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2)

 
 
 
 
 

시대와 백성들이 선택한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통일을 성취하기 전인 924년에도 7월에는 상선이, 10월에는 사신선이 황해를 건너가 산둥반도 북부의 등주(펑라이)에서 후당과 무역을 벌였다. 정국이 안정된 1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송나라는 운하도시인 동경(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상업과 무역을 추진했다. 거란을 의식하고 고려의 편의를 위해 국가항구를 산둥반도의 남단인 판교진(지금 산둥의 고현)으로 옮기고, 무역 업무를 도와주는 ‘시박사’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상업의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1078년에는 명주(닝보우)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주산군도로 들어가는 진해(칭하이)에 고려 사신과 상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117년에는 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

 


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민간무역이 발달했다. 기록을 보면 송나라 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012년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278년까지 266년 동안 무려 129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왔다. 송 상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산둥성이나 장쑤성 북부 해안이 아니라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등 주로 강남 출신이었다. 기록된 출발지를 보면 푸젠성 남부의 천주(대만 건너)가 19회, 그 위의 복주가 2회, 저장성의 영파인 명주가 3회 등이다.

 

 

1090년 이후에도 훗날 마르코폴로가 세계 최고라고 극찬한 천주항의 상인들이 20회 이상 왔다. 아라비아 상인도 많이 와서 1024년에는 대식국(이란 및 아라비아 지방)의 상인 100여 명이 한 번에 왔다.

다음 해인 1025년과 1040년에도 대거 방문했다. 주로 향료, 물감, 조미료 등 동남아시아와 인도 지역의 특산물을 중계무역했다. 하지만 마팔국(인도), 삼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등의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무역을 했다.

 

 

한강과 예성강이 경기만과 만나는 강화도 해역은 왕건 세력의 토대였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랴오둥반도, 산둥반도 등과 교류할 때 가장 효율적인 해양환경과 무역환경이 갖춰진 장소였다. 거기다가 정부는 개경 앞인 예성항에 벽란도(부두)를 설치해 입출항과 하역을 편하게 만들었다. 개경에는 사신과 상인들이 머물면서 무역을 하는 객관들이 오빈관, 영은관, 영선관 등 10여 개나 있었다. 개성은 다양한 인종과 물건이 모여드는 동아지중해의 유명한 국제도시였다.

 
 

 

1123년에 사신단으로 온 송나라의 서긍은 한 달간 머물면서 자료를 모아 귀국한 뒤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사신선들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즉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저자를 만들고는, 온갖 물건을 진열했다. 또 해안에는 1만여 명의 사람이 무기, 갑마, 기치, 의장들을 늘어세우고, 구경꾼들은 담장처럼 모여 있다고 했다.

 

무역활동에 적극적인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송나라와 무역을 계속했다. 상인들이 여러 차례 들어왔고, 원나라와도 무역을 했다. 일본과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 상인들이 활동하던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太宰府)를 이용해 무역을 벌였다.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국가였다. 경제력이 강했고, 국제적인 사회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성과를 거두었을까.

첫째는 계승성이다. 국제무역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의 물류망, 인적네트워크, 기술력은 물론이고 사회적 필요성과 인식, 국제적인 감각도 신라를 계승했을 것이다.

둘째는 국제적 환경의 변화와 관계다. 고려 전기에는 송나라가 중국의 분열을 종식하고 무역중시 정책을 추진했다. 송나라는 상업과 무역업이 극도로 발달했고, 조선술과 항해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서아시아에서는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의 무역망을 장악했던 아랍 세력과 이슬람교도들이 한동안 셀주크 튀르크에 억압받다가 아바스 왕조가 부흥에 성공해 인도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크메르 왕국이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며 무역왕국으로 번창하는 중이었다. 이처럼 지중해, 페르시아만, 인도양, 동남아시아, 동아지중해에 이르는 해양유라시아 세계에서는 해양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무역이 활발한 시대였다.

 


셋째는 국가정책과 시대정신이다. 왕건은 경기만의 해양무역상 출신이었고, 지지세력도 주로 범해양 호족세력이었다. 그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상업과 무역이 중요함을 인식했으므로 무역에 비중을 두는 정책을 추진했을 것이다.

 


넷째, 해양활동 능력 발전과 해양력 향상이다. 무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는 내부적으로는 산업의 발달이지만, 실제로 필수적인 요소는 ‘조선술’ ‘항해술’ 등의 기술적인 능력이다. 고려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등거리 외교를 기본으로 삼은 외교정책에서 성공을 거뒀다.(3)

 

 

 

 

 

 

<자료출처>

 

 

(1)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상권 잡고 후삼국 통일전쟁 승리한 왕건 끝까지 저항한 적 품은 포용의 리더십 빛나 | 생글생글 (hankyung.com)

 

 

(2)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왕건 앞세워 이룬 중앙-지방 권력 교체의 대사건 (daum.net) 입력 2024. 1. 5.

 

 

(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역사상 국제무역 가장 활발했던 고려…인삼·청자 찾아 마팔국·아라비아서 오기도 | 생글생글 (hankyung.com)

 

 

 

 

<참고자료>

 

 

 

고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Goryeo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000 - Wikipedia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제자(왕건)와 스승(희랑), 1100년만의 만남 성사될까 - 경향신문 (khan.co.kr)

 

 

 

힘줄, 뼈마디, 팔자주름까지..'왕건의 스승' 희랑대사 실제상, 최고의 걸작 인정받아 국보 된다 (daum.net)2020.09.02.

 

 

 

 

 

 

 

[건국 1100주년, 고려를 돌아보다] 강대국 틈새 실리 외교… 外人 파격 등용 ‘글로벌 코리아’ 원조-국민일보 (kmib.co.kr)2018-12-03

① 정치·외교 분야

 

 

 

 

[건국 1100주년, 고려를 돌아보다] “세계가 환호한 고려청자·나전칠기… 문화 한류 원조는 고려”-국민일보 (kmib.co.kr)

③ 문화분야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다문화 국가' 고려 건국 1100주년2018-01-02 

 

 

 

 



문화재급 고려시대 '대방광불화엄경' 2점 발견 (daum.net)2018.03.21.

 

 

[단독]14세기 고려불화 '관음보살내영도' 최초 발견 (daum.net) 2017.05.22.             

문명대 교수 日서 돌아온 그림 정밀 감정.. 6월 논문 발표

 

 

정선 정암사, 고려시대 번창한 계율종 사찰로 확인 (pressian.com) 2018.12.17 

정선군·강원문화재연구소 합동 문화재 조사결과

 

 

[단독] 수덕사 불상 몸 속에서 800여년전 희귀불경들이 나왔다 (daum.net) 2018.10.31.

 

 

 

차질 빚던 춘천 칠층석탑 이전 '속도'…역사 공원화 | 연합뉴스 (yna.co.kr) 2018.04.23. 

 

 

해외반출·폭격·해체…110년 타향살이 끝내는 지광국사탑 | 연합뉴스 (yna.co.kr)  2019.06.21. 

1085년 원주 법천사에 건립된 승탑..1911년 일본인이 무단 반출
10차례 전전하며 수난..2016년부터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해체·보수

 

 

[굿모닝 내셔널]377t 짜리 은진미륵은 어떻게 세웠을까? (daum.net)  2018.03.13.       

 

tv.kakao.com/v/383455995

 

 

 

"다보탑 유물 일본에 있다" (chosun.com)2008.01.19 

목간학회 '묵서지편 정밀분석 결과' 23일 논문 발표

'무구정광다라니경'은 고려때 석가탑에 넣은 것으로 확인 

다보탑 중수기를 왜 석가탑에 넣었는지 학계 논란일듯

 

 

 

 

 

 

 

 

 

KBS 한국사전 – 고려 여걸 천추태후

https://youtu.be/2lvmYi1Fm10?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