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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백범김구기념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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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 민주 ·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님(1876~1949)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 · 발전시키기 위해 2002년 10월 22일 개관한 백범김구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백범김구기념관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백범 김구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분단된 조국의 자주 · 민주 ·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입니다.
백범김구기념관 전시관
중앙홀 - 백범좌상
나의 소원 『백범일지』 - 나의 소원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국민교육이다. ......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나의 소원> 중에서
1896년 을미사변의 원수를 갚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한 치하포 의거로 인해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김구 선생은 『세계역사, 『세계지지』 등 신서적을 읽으며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19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인시정부에 참여하여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내무총장 · 국무령 · 주석을 역임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 시기(1919년 ~ 1932년), 경무국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 시기(1919년 ~ 1932년), 내무총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 시기(1919년 ~ 1932년), 국무령
김구와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193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시기(1940년 ~ 1945년)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국과의 공동작전에 적극 참여하였고
1941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1943년 8월, 인도 · 버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였습니다.
1945년 2월, 대독선전포고도 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 · 독일 ·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또한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독수리 작전'이란 이름으로 공동작전을 추진하였습니다.
일본의 항복으로 국내진입작전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한국광복군이 대일항전을 펼치고 국내진입작전을 시도한 것은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조국의 독립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우리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1940.9.17.)
임시정부로 좌우합작을 이룬 34차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각료들(1942. 10.)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도(1944)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은 남북의 통일 · 자주 · 독립정부를 수립하고, 38선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항일투쟁 27년 만에 개선길에 오르면서 임시정부 청사 앞에 선 요인들(1945. 11.3.)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 · 소에 의한 신탁통치안이 채택되자 김구 선생은 즉각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반탁운동을 펼쳤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미 · 소의 내정간섭 없이 유엔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해 통일된 국회를 구성하고 통일된 자주독립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려 하였습니다.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에서 연설하는 김구선생(1945)
민주의원 회의 직후 창덕궁에서 손잡은 김구와 이승만(1946)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은 북측 지도자들에게 '님북협상',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의하였습니다.
김구 · 김규식 · 조소앙 · 김창숙 · 조완구 · 홍명희 · 조성환 등 당시 대표적 민족주의자들이 <7거두 성명>을 발표하며 "남북에 두 정부, 두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 · 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니 이를 막자"고 하였습니다.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백범 김구 선생은 김규식 선생과 함께 김일성 · 김두봉과 '4김회담'을 열어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결의 , 공동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각각의 정부가 세워지고 말았습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은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통일 대한민국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비보를 접한 시민들이 경교장으로 몰려와 조문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은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 10일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7월 5일 생전 김구 선생의 뜻대로 삼의사(안중근 가묘 · 이봉창 · 윤봉길 · 백정기)의 묘와 임정요인(이동녕 · 조성환 · 차리석)의 묘가 있는 효창원에 안장되셨습니다.
※ 백범김구기념관은 전시관 개선공사로 2024년 10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휴관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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