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국립고궁박물관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박물관, 기념관

국립고궁박물관

대야발 2024. 11. 12. 15:20
SMALL

 

 

 

 

 

국립고궁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은 3개의 층, 7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층에는 조선 왕조의 상징물과 기록물 위주로 전시된 ‘조선의 국왕’실과 조선 5대 궁궐의 역사와 왕실 가족들의 생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조선의 궁궐’, ‘왕실의 생활’실이 있습니다.

 

2층 상설전시실은 임시휴관 중입니다.(재개관일시 : 2024. 11. 19.(화), 오후 2시)

 

 

 

 

 

 


1층에는 황제국의 선포와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살펴볼 수 있는 ‘대한제국’실이 있으며, 전시실 로비에서는 순종 황제와 황후가 타던 자동차 [어차]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즉위한 고종은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0년 외교·통상 업무를 강화하고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를 주도하였다.

고종은 대내외에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대제국의 건설을 이룩하기 위하여, 1897년 연호年號를 ‘광무光武’,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 · 외교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 · 미국 · 유럽을 통해 전기 · 철도 · 우편 등의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대한제국기의 이러한 경험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하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종은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사회 전반에서 근대화 작업이 이뤄졌고, 미국 · 유럽 · 일본을 통해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생활도 근대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전통적 이동 수단 대신 자동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910년대에 사용되었던 황제와 황후의 어차가 전시되고 있으며, 각종 문물과 제도를 새롭게 정비했던 황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지하에는 조선 왕실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궁중서화’실, 왕실의 의례를 살펴볼 수 있는 ‘왕실의례’실 그리고 조선의 수준 높은 과학 문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과학문화’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궁중회화가 국가 통치에 활용되었다. 궁중회화는 주로 국가의 예를 담당했던 예조禮曹의 감독에 따라 회화 전담부서였던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궁중회화는 특정한 쓰임새와 형식을 가졌으며, 창조적 예술성보다는 사실성·기록성·상징성·장식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은 유교 정치에 입각한 문화적인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학문을 숭상하고 배움을 글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왕이나 종친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글짓기와 서예를 수련하였으며 서화의 제작과 감상을 통해 인격을 수양하였다."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한 조선은 ‘예禮’를 기초로 사회질서를 지키면서 백성과 즐겁게 화합하고자 하였다. 국왕은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5가지로 예제를 정비해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더불어 일생 동안 단계에 맞는 예를 행하고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다. 의례를 치를 때는 절차마다 연주되는 음악부터 기물, 음식, 복식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식을 제도에 맞춰 행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

 

 

 

 

 

 

 

 

 

 

 

 

 

 

 

 

 

 

 


"조선시대에 과학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보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다. 국왕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천문, 농업, 의학, 무기제조 등 과학기술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천문학天文學은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하늘의 여러 현상을 살펴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는 천문학을 통해 백성들이 때에 맞춰 농사를 짓고 생업에 힘쓰게 했으며 국왕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드러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국왕은 중국 천문 과학기구와 역법曆法을 연구하고 이를 조선 실정에 맞추어 쓸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앙부일구나 자격루 같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높은 과학적 성취가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도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과학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조선, 1782년측우대 測雨臺

비가 내린 양을 재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1441년(세종 42) 측우기와 측우대를 처음 만들고 전국에 설치하여 강수량 측정을 제도화했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 전란을 겪으며 중단되었다가 1770년(영조 46)에 재정비되었다. 이 측우대는 1782년(정조 6) 제작하여 창덕궁 이문원摛文院(규장각 부속건물)앞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측우대 4면에는 측우기를 세우게 된 연원과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하늘의 모습을 구역을 나누어 배열해 놓은 천문도로 돌에 새겨 만들었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전해져 오던 석각 천문도의 탁본을 바탕으로, 달라진 별자리 위치 등을 보정해 만들었다는 제작 경위가 새겨져 있다. 태조는 천문도를 제작함으로써 천문을 살피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여 이를 백성에게 알리는 관상수시觀象授時의무를 실현하고, 조선 건국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알리고자 했다. 천문도 가장 안쪽 원 안에는 북두칠성처럼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를, 바깥쪽에는 계절별로 바뀌는 별자리를 그렸다. 별 크기와 깊이를 다르게 표현하여 밝기 차이를 나타냈다. 세월이 지나 태조 대 각석이 닳자 1687년(숙종 13)에 새로 새긴 것도 전한다.

 

 

 

 

https://youtu.be/o3AvhCqGw0I

 

 

 

 

 

 

 

 

 

 

 

※ 자료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  https://www.gogung.go.kr/gogung/main/main.do

 

 

 

 

 

 

 

LIST

'우리겨레력사와 문화 > 박물관, 기념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제주박물관  (38) 2025.01.02
서울역사박물관  (134) 2024.11.16
인천개항박물관  (39) 2024.11.09
백범김구기념관  (61) 2024.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