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1) 1919년 3·1운동(3·1혁명) 본문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당시 68세였던 고종은 평소 지병이 없고 건강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 등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들이 퍼져나갔습니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 전화벨이 가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부왕(父王)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덕수궁으로 달려간 순종이 함녕전에 들어섰을 때 이미 고종은 흰 천을 쓰고 누워 있었다. 향년 68세,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은 망국(亡國) 9년 뒤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전국으로 번진 '고종 독살설'
승하 직후 '황제 폐하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도 나붙었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 시종관 한상학, 자작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다. 독살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개화파 인사 윤치호의 일기다.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전한 말을 기록한 것인데,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거뒀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시신의 이는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는 내용이다.
독살 관련 정보는 당시 일본 궁내성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굴한 일본 궁내성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등장하는 정보는 이런 것이었다. 초대 조선 총독이자 전 총리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시켜 이태왕(고종)에게 어떤 '뜻'을 전달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친일파로 일본의 작위를 받은 윤덕영과 민병석 등을 시켜 태왕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고종, 밀사 파견과 망명 기도"
데라우치가 고종에게 전달하려 했던 그 '뜻'이란 무엇일까? 구라토미 일기 중 다른 궁내성 관리의 전언에 그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91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협상을 위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담은 '14개 항'을 발표했다. 여기에 고무된 고종이 밀사를 보내려 했고, 이 때문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 된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고종이 밀사로 파견하려고 했던 사람은 고종의 5남 의친왕과 김란사 이화학당 교수일 것이라고 본다. 기독교 민족운동가 신흥우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이 김란사에게 한 궁녀를 보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원본을 찾으면 그걸 가지고 파리에 가서 윌슨 대통령에게 보이며 도와달라고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기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국제 정세가 일변하는 상황에서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워 동의를 얻고 베이징(北京)에 행궁을 마련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왕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고종이 독립을 도모하다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3·1 만세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 고종이 독살 당했다고 믿은 전국의 백성들이 3월 3일 고종의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그대로 3·1운동 시위대의 일원이 됐으며, 각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학계에선 고종의 독살을 정설로 받아들이진 않지만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촉발한 민중의 울분이 '왕정 복고'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는 "고종이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새 국가를 세우자고 말할 수 없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곧 '민주공화정의 수립'과 동의어가 됐다"고 말했다.(1)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인 1918년 11월(또는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원본이 처음 발견됐습니다.
'무오(戊午) 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기미(己未) 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나온 것으로,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됩니다.
서지학자이자 애국가 연구가인 김연갑(金煉甲)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최근 발굴한 '대한독립선언서'의 원문을 11일 본지에 공개했다. 그는 "6년 전 아리랑 조사를 위해 중국에 갔다가 옌지(延吉)의 한 동포가 '대한독립선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최근 이 동포가 작고한 뒤 그 아들이 자료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가로 51.8㎝, 세로 37.5㎝ 크기의 이 문서는 '大韓獨立宣言書'라는 제목 왼쪽에 세로로 선언서 전문을 실은 석판 인쇄본이며 왼쪽 아래에 서명자 39명의 이름을 명기했다.
1979년 중앙대 영신아카데미에서 이 선언서의 사본을 처음으로 전시했던 김성근 한국학연구소 자료조사실장은 이 자료를 검토한 뒤 "종이의 재질과 왼쪽 가운데에 찍힌 도장의 상태 등을 보아 광복 이전의 원본이 분명하다"며 "원본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본지 확인 결과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것은 재일 학자 강덕상씨가 소장한 마이크로필름을 복제한 것이었고, 이화장(梨花莊)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도 원본은 없었다.
김연갑 이사는 "작고한 소장자는 일제시대 간도로 이주해 이 선언서를 입수한 뒤 1920년대 초 독립자금 영수증과 함께 벽지 속에 숨겨 놓았는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야 다시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그의 아들은 한국에 이 선언서가 필요한 기관이 있다면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누가 왜 선포한 것일까? 선언서의 주인공들은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망명 독립운동가들이다. 학자들은 작성자가 훗날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 되는 조소앙(趙素昻·1887~1958) 선생이며 선언의 실질적 주체는 길림성의 대한독립의군부라고 본다.
서명자로는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안정근(안중근의 동생),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조용은(=조소앙) 등 당시 해외에 있던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선언문의 내용은 '기미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다. '아(我) 대한(大韓) 동족남매(同族男妹)와 기아편구(�E我遍球·우리 세계만방) 우방동포(友邦同胞)아'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대한 민주(民主)의 자립'을 선포했다.
이어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無道), 무력·폭행에 의한 것'이라며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에는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며 일본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밝혔다. 이 때문에 4000부가 배포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서의 목적이 무장독립 노선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김기승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해 "무장투쟁론에 가까울 정도로 전투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 독립선언서"라며 "당시의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생각은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나타난 국내 지도자들의 평화적인 노선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2)
100년 전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외쳤던 2·8독립선언이 조선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대만, 중국의 독립운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규슈대 교수는 2019년 2월 9일 재일본한국YMCA(이하 도쿄YMCA)가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도쿄YMCA회관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2·8독립선언은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라고 강조했습니다.
2·8독립선언의 주역들 [재일본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2·8독립선언은 제1차대전 종결 후의 일본 사회에 '개조'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며 "일부 지식인과 학생이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이 조선 지배 문제에 대해 처음 마주 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오노 교수에 따르면 당시 선언에 참여한 유학생들은 1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의 타파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일본인들과 교류가 적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가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교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여명회(黎明會)'의 경우 선언 직후인 1919년 3월19일 모임에 선언에 참여했던 조선인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선언의 취지를 설명하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했던 조선인들의 심정을 설명했다.
오노 교수는 "2·8독립선언은 일본 사회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조선을 이해하게 된 계기였다"며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도 일본인 전체를 적대시하는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오노 교수에 따르면 2·8독립선언은 대만인들이 국가주의를 자각해 자치를 요구하는 운동이 펼치는 데 영향을 줬다.
도쿄YMCA, '2·8독립선언 100주년 심포지엄' 개최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가 9일 재일본한국YMCA(이하 도쿄YMCA)가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간다(神田)에 있는 도쿄YMCA회관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다. 2019.2.9 bkkim@yna.co.kr
중국과 관련해서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소식이 현지 언론 등을 통해 알려졌고, 이는 1919년 베이징대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 운동인 5·4운동이 발발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오노 교수는 "조선사의 관점에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동아시아의 독립운동 역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 설치된 선언문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간다(神田) 재일본한국YMCA회관의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 설치된 선언문 전시물. 2019.1.21 bkkim@yna.co.kr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서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는 "2·8독립선언은 3·1운동을 비롯해 이후 전개되는 다양한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하지만 청년들의 염원인 독립은 1945년까지 이뤄지지 못했고, 6.25 전쟁을 거쳐 조국은 분단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한국 근대사의 3대 사건인 2·8독립선언,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100주년이 되는 황금돼지해"라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획기적인 진전이 생겨 100년 전 외쳤던 자주·독립의 정신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3)
- 2.8독립선언, 3.1운동에 가장 크게 영향 준 항일저항 운동
- 동경 유학하던 20-30대 한국엘리트들이 세계질서 속 민족의 방향 모색한 선언
- 2.8독립선언서, 동경유학생들 토론의 산물... 개인의 작품 아니라 집단지성의 발로
- 마지막에 합류한 이광수는 선언서 문장 다듬는 역할 해
- 2.8선언, 동경유학생 700명중 600명이 침략국 심장부 동경에 모여
- 주모자 60여명 내란죄로 사형하려했으나, 국제여론에 1년 금고형 처해
- 2.8독립선언서...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 외에 세계평화, 인류문화 공헌 선언해
- 민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세계주의와 미래 조명해... 당시 청년들의 통찰 담겨(4)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석방을 이틀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으로 인한 '갑상선 기능저하증'으로 추정됩니다.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석방을 이틀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사망했다.
사인은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으로 인한 '갑상선 기능저하증'으로 추정된다.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자신들의 만행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거부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화학당의 교장 월터가 '일제의 만행을 세계 신문에 알리겠다'라고 항의하자 꼬리를 내렸다.
일제는 자국에 대한 국제 여론 악화를 경계했다. 1919년 4월 15일에 자행한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져 곤욕을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을 것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 등 조건으로 시신을 인도했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모교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교는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천안은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집중적으로 전파하던 지역으로, 그의 집안은 일찍이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데 이어 2년 후엔 고종 황제를 강제로 내쫓았다. 1910년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나라가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사회개혁과 부녀자 계몽에도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유관순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유관순의 삶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선교사 샤프의 추천으로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로 편입할 수 있게 된 것.
이화학당은 1886년 서울 정동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선진적인 체계와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명문 학교였다. 유관순에게 서울 상경은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 최초의 한옥교사/사진=이화여자대학교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학업에 열중하던 1919년의 어느 날. 그는 소문을 통해 고종황제의 장례식 이틀 전에 만세 시위 운동이 열린다는 '3.1운동 추진 계획'을 전해 듣게 된다.
소문대로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며 역사적인 만세 시위 운동이 막을 올렸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자 분위기는 고조됐다.
시위대가 탑골공원을 나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과 그의 친구들은 대열에 동참해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대의 함성과 분위기를 직접 본 유관순의 마음엔 조국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이 싹텄다.
나흘 뒤인 3월 5일. 남대문 역 인근에서 만세 시위가 열리자 유관순은 이번에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무사히 석방됐다.
조선총독부의 고민은 깊어졌다. 시위 규모가 점점 커지며 통제가 어려워져서다. 결국, 그해 3월 10일 전국에 임시휴교령을 내리는 초강수를 뒀다. △학생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고 있고 △학교가 시위 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관순은 사흘 뒤인 3월 13일 천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독립선언서를 품에 지닌 채.
유관순은 서울에서 못다 한 시위 운동을 천안에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귀향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자신이 서울에서 본 독립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했고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지역 어른들을 설득하는 노력 끝에 대규모 만세 운동을 4월1일 천안 아우내 시장에서 전개하기로 결정됐다.
유관순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은 양력 4월1일로, 음력으로 따지면 3월1일이었다. 그리고 3.1 운동은 양력 3월1일 하루에 발생한 만세 운동이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월1일부터 4월 말까지 두 달 간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한 모든 만세 운동을 포함한다. 그가 3.1 운동의 핵심 인물로 주목받는 이유다.
마침내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 아우내 시장에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다. 시위는 한 사람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막을 올렸다. 장터는 순식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온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시위 대열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한창이던 오후쯤. 현장에 출동한 일본 헌병이 평화롭게 시위하던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도망가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해 총과 칼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이날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유관순의 부모 및 19명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일본 헌병들이 있던 주재소로 달려들어 항의하다 독립운동 주모자로 체포돼 공주 교도소로 넘겨졌다. 이날 유관순은 나라를 잃은 데 이어 부모마저 잃고 철창신세가 됐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자 항소했다. 그해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선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내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왜 죄가 되느냐?"며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내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있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뒤 이듬해인 1920년. 유관순은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3000여명이 크게 호응해 만세 소리가 밖으로 퍼져나갔고, 이에 교도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운행이 마비됐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지하 독방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숨졌다. 석방 이틀을 남긴 시점이었다.
영친왕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량은 1년 6개월로 감형되었고, 체포 당시 구금된 3개월도 형기에 포함됐다. 따라서 원래 일정대로라면 1920년 9월 30일에 석방될 예정이었다.
유관순의 묘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마련됐다. 하지만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자 그의 주검은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됐다. 이 과정에서 열사의 시신은 소실됐다.
현재 이태원엔 유관순 열사가 안장됐던 묘지 터에 부군당 역사공원과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조성돼 있다.
소녀가 열망하던 조국 독립의 꿈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난 1945년에 이뤄졌다.(5)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이라면?
여운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광복 전후부터 그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몇년간의 활동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이라면 사람들이 믿을까. 여운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광복 전후부터 그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몇년간의 활동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지난해 12월 초 국내에 번역·출간된 재일동포 역사학자 강덕상 시가현립대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은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강 교수는 자신이 “평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운동사론”이라고 한 그 책에서 독립운동 세력이 3·1운동과 밀접하게 얽혔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자세하게 논하면서 몽양의 역할에 대해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은사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한국민족운동사를 천착해온 이정식(77)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경희대 석좌교수의 <몽양 여운형>(서울대 출판부 펴냄)은 <여운형 평전 1>과는 또 다른 각도로 몽양의 실체에 다가가면서 그것이 이룩한 성취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요소들을 보탰다. 특히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몽양이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들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쪽 승리로 끝난 1918년 11월28일 당시 상하이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교민친목회(그 다음해 초 교민단으로 바뀌고 몽양이 단장이 됨) 총무를 맡고 있던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를 피압박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한 주중 미국대사 내정자 찰스 크레인의 연설을 듣는다.
그 자리에서 크레인을 직접 만난 몽양은, 그해 여름 상하이에 와 있던 8살 아래의 와세다대 출신 장덕수 등과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톈진으로 망명한 김규식을 불러 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했다. 김규식이 상하이를 출발한 것은 1919년 2월1일.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는 노력은 여러 갈래로 경주됐으나 오직 김규식만 성공했다.
파리행을 토의할 때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쪽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이란 망한 나라가 존재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발언권도 없고 누군지조차 모를 자신에게 회의 참석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정식 교수의 ‘몽양 여운형’
이정식 교수는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씨를 만나 책에 인용한 그 얘기를 확인했는데 김규식 평전까지 썼던 자신의 뒤늦은 깨달음을 탓하면서, 도쿄와 서울에 전달된 그 말이 3·1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조직하고 주동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그런데 2·8선언 직전 주동자였던 최팔용을 움직인 것은 상하이에서 도쿄로 잠입한 장덕수였다. 장덕수를 일본과 조선에 파견한 것은 몽양이었고, 거사 계획을 알리고 김규식 여비를 모금하는 것이 장덕수의 주요 임무였다.
이정식 교수는 중국 5·4운동까지 촉발한 3·1운동 발발 이후 전도사 여운형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위상이 바뀌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광복 뒤의 일들만 가지고 몽양을 평가하지만 그 기간은 “그의 60평생의 극히 짧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며, 50여 년에 걸친 자신의 한국민족주의운동사 연구 “거의 모든 장면”에서 몽양과 마주쳤다고 강덕상 교수와 꼭 같은 말을 했다.
그는 강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이 “자료의 방대함과 서술의 세밀함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며, 그 때문에 자신은 몽양의 삶 전체를 추적하는 전기를 쓰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해석” 쪽으로 집필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몽양 여운형> 역시 8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다. <여운형 평전 1>은 왜곡되거나 무시당한 몽양의 일생과 시대상을 구체적 사실들을 통해 바로잡는다는 일념으로 일로매진했고, <몽양 여운형>은 사실들의 중층적 맥락을 섬세하게 살피면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애썼다.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을 연구하여 전기를 쓰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바 있지만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교수는 몽양의 사상이 ‘모호한 팔방미인’이라거나 그를 ‘공산주의에 도취된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주류적 시각에 대해서는 그에게 맞지 않는 “사상적인 틀을 무리하게 맞춰보려고” 한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6)
"의리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신력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유진 무퇴하는 신을 신고 일심으로 일어나면…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할 것도 없도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 독립 만만세."
1983년 11월, 도산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집에서 문서 한 장이 발견됐다. 한지 위에 순한글로 1291자, 도도한 문체와 질풍노도의 기백이 넘치는 이 문서 제목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 3·1운동을 전후해 국내외에서 선포한 독립선언서 수십 종 중에서 여성 목소리로만 이뤄진 것이었다.
◇"여성의 힘으로 민족 독립 이뤄야"
선언서 작성 시기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9년 2월.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이 선언서를 우리 동포가 많이 이주한 간도 땅 지린(吉林)에서 기독교계 젊은 여성들이 썼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성이 독립운동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겁나의(오래된) 구습을 파괴하고 용감한 정신을 분발하라." 선언서에서 돋보이는 것은 상무(尙武) 정신이었다. 남자와 동등한 국민 된 여성도 성력(誠力)을 다하면 민족 독립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며, 여성의 힘은 용기와 고매한 지식을 가진 남성 영웅호걸을 능가할 수 있다고 외쳤다.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선언서에 서명한 여성들은 과거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처럼 '누구의 처' '누구의 어머니'로 등장하지 않고 제 이름 석 자를 당당히 밝혔다.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기 시작해 '개인'으로 우뚝 선 여성들이 거대한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밝힌 이 선언서는 이후 미주 등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를 고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한다"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합니다." 1919년 2월 6일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며 웅변대회를 열었을 때, 여학생이 소외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여성 친목회 회원 황에스터(1892~1971)가 분연히 일어나서 한 말이다. 유관순은 3·1운동 당시 보기 드문 여성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3·1운동은 민족운동 전선의 남녀 성차(性差)를 비로소 극복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름 없는 숱한 여성들이 전국에서 만세 시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여성들 사진이 있다.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실린 이 사진에선 어두운 색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대로를 걷고 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이 옷은 당시 교복으로, 사진 속 여성들은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상하이 대한적십자회가 1921년 발행한 사진첩에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죄목으로 포승에 묶인 채 일경에게 끌려가는 두 여성의 사진이 있다. 그들에게서 위축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망각 속에서 꺼내야 할 이름들"
여성들이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대표적 지역 중 한 곳이 호남이다. 광주 수피아여학교(3월 10일), 전주 기전여학교(3월 13일), 목포 정명여학교(4월 8일) 등 여학교 학생들이 만세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수피아여학교의 만세 운동에는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김마리아(1892~1944)가 은밀하게 교사인 언니 김함라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해 주고, 교사 박애순이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등 여성 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를 벌이던 여학생들은 무장한 일본군 기마 헌병대가 시위대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우리 발로 경찰서에 가겠다"고 외치며 경찰서 앞마당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기개를 보였다. 그날 체포된 100여 명 중에서 80여 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3·1운동의 '수레바퀴' 중 하나였던 여성 독립운동가는 상당수 잊혔다. 지난해 8월까지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은 1만5052명 중 여성은 외국인 4명을 포함해 325명, 전체의 2.1%에 그쳤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지난해 국가보훈처의 의뢰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한 결과 모두 202명을 새로 찾아냈는데, 이들 중 3·1운동 관련자는 35명이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은 "독립운동은 여성의 참여 없이는 지속 불가능했다"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여성들의 삶을 망각 속에서 꺼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7)
<자료출처>
(1) 그의 죽음이… '만세운동'과 '민주공화정'의 기폭제 됐다 (chosun.com)2019.01.21.
(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3/2009021300951.html 조선일보. 2009.02.14.
(3) https://v.daum.net/v/20190209190518583 연합뉴스. 2019. 2. 9.
(4) https://v.daum.net/v/20190208101143084 .KBS.2019. 2. 8.
(5) https://v.daum.net/v/20240928070015371 머니투데이. 2024. 9. 28.
(6) 3·1운동 뒤에 ‘몽양’ 있었다 (hani.co.kr)2019-10-19
(7) 그녀들은 3·1운동의 또다른 '수레바퀴'였다 (chosun.com)2019.01.09.
<참고자료>
“불멸의 위훈…”, 김구 선생의 유관순 열사 추도사 복원 - 경향신문 (khan.co.kr)2021.03.31
뉴욕타임스 100년 늦게 쓴 부고 기사···유관순 열사 삶 재조명 | 서울신문 (seoul.co.kr)2018-03-30
"분노한 백성들을 옥에 가두고" 노모가 기록한 아들의 만세운동 | 연합뉴스 (yna.co.kr)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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