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3) 1912년 대한독립의군부 본문

■ [손호철의 발자국] 한말 선비들의 의병운동은 숭고하지만 '때늦은 애국'이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0. 10. 12. 04:40

“아-어느 시대인들 난적의 변고가 없겠느냐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 또한 어느 나라엔들 오랑캐의 재앙이 없었겠느냐만,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의병을 일으켜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낫지 않겠는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뛰는 이 격문은 110여 년 전인 1906년 면암 최익현이 무성사원에서 일본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키며 선포한 창의(倡義)격문이다. 그의 나이는 무려 74살이었다.
나는 최익현, 그의 제자로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을 만나러 정읍의 오지로 가고 있다. 칠보면과 산외면은 정읍에서도 동쪽 끝에 위치한 오지 중의 오지지만,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산외면 동곡리는 동학의 맹장인 김개남이 태어났고 이곳에 이사 온 전봉준과 함께 공부하고 자란 곳이다. 여기에서 10㎞ 떨어진 칠보면 무성리에 무성서원이 있고, 이 두 곳으로부터 20㎞ 떨어진 산외면 총성리는 임병찬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전국 47개 서원 중 전북에 위치한 유일한 서원인 무성서원은 1615년 세워져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 8개 서원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자랑스러운 곳이다. 서원에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서원 뒤쪽에 낡은 비석이 하나 눈에 뜨인다. 1905년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병오년인 1906년 6월 면암 최익현, 임병찬이 이곳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것(창의)을 기념해 세운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記蹟碑)’이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수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되었고 성리학의 ‘왕도정치’를 이상향으로 생각해, 서구의 제국주의가 밀려오자 목숨을 걸고 ‘위정척사’(衛正斥邪,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를 추구한 강직한 선비였다.
특히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대원군의 계획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빼앗기는 등 바른 말을 아끼지 않았고, 민씨 정권이 1876년 나라의 문을 여는 강화도조약을 맺으려 하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에 반대하는 항소를 올린 것은 전설적인 일화이다. 임병찬 역시 낙안군수로 민생을 노력하다가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나아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학문에 전념한 올곧은 선비이다.

최익현은 임병찬 등 제자 80여명과 무성서원에서 진군해 태인에 무혈 입성했다. 그곳의 무기로 무장한 의병들은 곡성, 남원, 순창을 점령하고 숫자도 100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이 아니라 관군이 정벌을 하러 오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고 스스로 무장해제해 체포됐다. 그는 임병찬과 함께 일본 대마도로 압송됐다. 그는 “적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임병찬은 다음해 특별사면으로 귀국했고 스승의 유서를 고종에게 전달했다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선포되자 그는 다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는 고종의 밀사를 통해 독립의군부라는 전국적인 의병조직을 조직해 사령총장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려 했지만 비밀이 누설되면서 다시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 거문고로 유배를 갔고 스승처럼 단식 끝에 목숨을 잃었다.

나는 임병찬을 만나기 위해 산외면 총성리로 향했다. 물안개가 아름다운 옥정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자 임병찬이 의병을 키우던 훈련장 등을 재현하기 위한 조감도와 함께 ‘대한독립의군부 사령총장 임병찬 묘’라는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조국을 위해 단식으로 목숨을 바친 한 선비에게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그 때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최익현, 임병찬 등 선비들의 의병투쟁으로부터 시계바늘을 12년 전인 1894년으로 돌려보는 것이다. 12년 전 동학농민군은 척양척왜를 외치며 봉기,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상경했고 대원군이 유림도 같이 하기를 호소했을 때, 최익현과 임병찬 등 ‘애국적 유림’과 선비들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논산의 유림들, 연산현감 이현세 등 일부 ‘계몽된’ 양반들은 동학군과 같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를 외면했다. 아니 상당수는 ‘민보군’이라는 무장조직을 만들어 일본군, 관군과 합동으로 동학군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다. 임병찬 의병 창의비로 올라오는 길에 걸려 있는 작은 팻말이 모든 것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것은 ‘김개남 피체지’라는 표식이었다. 그렇다. 임병찬의 고택은 김개남이 잡힌 곳이기도 하다. 김개남 이야기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그는 자신의 절친인 김개남이 동학의 지도자가 되자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관군에게 밀고해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다.

많은 유림들에게는 일본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격하고 자신들이 이상사회라고 생각하는 신분제의 봉건유교사회를 혁파하려는 동학이 더 큰 적이었고, 이들을 없애야 한다는 데에서 일본군, 관군과 이해를 같이 했다. 민족적 영웅인 안중근 의사조차도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김구가 이끌던 황해도 동학군의 토벌에 앞장섰고, 죽기 직전까지도 동학군을 “조선의 좀도둑”이라고 비판했다.
동학군은 단순히 일본군이 아니라 정부군+일본군+양반군(민보군)의 연합세력들에게 처절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자신들의 조선정벌의 가장 큰 장애인 민중세력을 초토화시키고 나라를 뺏으려 하자, 유림들은 그 때서야 나라를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때 늦은’ ‘때 놓친’ 애국, ‘병 주고 약 주는 애국’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선비들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이 선포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분제를 이상사회로 믿는 유교관을 고수하고 있었고, 이에 기초해 반봉건을 외친 동학농민들을 일본군, 관군과 손잡고 압살했다.
주목할 것은 동학의 주장이 그리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왕정타파를 주장한 것도 아니고 노비제 폐지 등을 주장했지만 완전히 신분제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의 행실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유림들은 그 정도조차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위정척사는 자주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체’되어 있었고 ‘퇴행적’이다. 다만 유림출신의 의병들이 다른 민보군들처럼 이후 친일파로 변신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지 않고 일본과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줄만 하다.

임병찬의 창의비를 보고 있자, 문득 '지리산' 등의 대하소설을 통해 선구적으로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이병주 작가가 한말을 배경으로 1978년 집필한 대하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碑)'의 후기가 떠올랐다.
“한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회환이다. 서울의 지식인들과 일부 지배층이 동학당과 합세하여 청국과 일본의 개입을 막고 혁명의 과정을 밟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국왕과 동학도가 일치해 버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 임병찬 등 양반과 유림들이 절친을 동학이란 이유로 밀고하거나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군을 괴멸시키려 하지 않고, 낡은 신분제의 타파 등 시대적 변화를 인정하고 동학군과 손을 잡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와 싸우고, 안으로는 기득권을 버리고 낡은 봉건적 질서를 혁파해 나갔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유림들의 목숨을 건 의병활동은 당연히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로 높이 평가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숭고한 애국심과는 별개로 이들이 시대착오적인 봉건적인 유교관에 사로잡혀 일본에 대항해 함께 싸워야 할 동맹세력이었던 동학민중들을 척결한 뒤에야 뒤늦게 일본에 대해 목숨을 건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은 너무도 비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낡은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나름 ‘숭고한 애국심’으로,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애국’을 하고 있는 극우세력에서 나는 동학군을 때려잡던 민보군의 얼굴을 본다. 아니 각가지 위선이란 위선은 다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절대선이라고 착각하는 일부 ‘개혁세력’에서도 나는 민보군의 ‘잘못된 애국’을 본다.(1)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 세계관이 달랐던 친구의 밀고, 참수 당한 김개남
이영천기자 2024. 8. 18. 19:36
동학혁명군 장수 중 가장 용맹했던 김개남이 체포된 곳, 정읍 산내 종성리
심심산골이다. 바위에 부딪혀 퍼렇게 멍든 물이 구불구불 힘겹게 빠져나가는 골짝이다. 이곳 하종성에서 김개남이 붙잡힌다. 산내 종성리는 상하(上下) 두 마을로 나뉜다. 용두봉과 그 자락이 전부인, 산이 곧 마을인 셈이다. 높은 봉우리 사이로 가끔 새가 날고, 고즈넉한 골짝은 평화롭다 못해 소슬하기까지 하다.
용두봉과 필봉산 사이 강을 막은 댐이 웅장하다. 거대한 옥정호를 품은 섬진강댐이다. 호수는 잔잔하고 푸르러, 여기서 격랑으로 일렁였던 역사를 읽어내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위급에 처할 때마다 이곳은 힘을 기르거나 저항의 장소로 선택되곤 했다.
바로 옆이 회문산이다. 6.25 전쟁 때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회문산은 그때 전북 도당의 아지트였다. 작가 이태(李泰)의 '남부군'이라는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지리산으로 쫓겨가기까지 이웃 청웅과 오수 등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긴 시간 반복되었다.
넓게 펼쳐진 용두봉 자락 꼭대기엔 너른 평전(平田)이 펼쳐져 있다. 족히 수만의 군사를 기를 만한 터전이다. 김개남이 찾은 상종성으로, 그의 매부 서영기가 살던 자리다. 더구나 친구 임병찬이 학당 흥학재(興學齋)를 세워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 아니던가? 훗날 을사늑약에 분노한 임병찬이 최익현과 함께 실제로 여기서 군사를 길러 일제에 맞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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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종성 평전 능히 수만의 군사를 기르기에 넉넉한 산 정상의 드넓은 평전. 김개남은 재봉기를 도모하려 이곳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
ⓒ 이영천 |
'남녘에 새 세상을 열겠다(開南)'는 웅지를 품었던 김개남도, 이곳을 근거지 삼아 권토중래를 꿈꿨을 가능성이 있다. 전라도의 지형과 지세에 상당한 지식이 있던 전봉준도 이에 동의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 쉽게 종성리로 길을 잡았을 수 있다. 전봉준도 이곳으로 오던 길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었던 친구에게 배반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신의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의 차이였을까, 혹 벼슬자리가 탐났을까, 그도 아니라면 역적으로 몰린 친구를 보호해 주었다는 명목으로 후한을 두려워한 옹졸함의 발로였을까?
친구이기 전에
청주에서 패배한 김개남은 진잠과 연산 쪽으로 내려와, 고향 지금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성리로 스며든다. 우선 매형에게 의탁하기 안성맞춤이다. 떠도는 이야기로 임병찬이 "자네가 있는 곳보다 이곳이 더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옥구 출신으로 김개남보다 두 살 많은 임병찬(1851년생)은 아전 출신이다. 1867년 옥구 형방(刑房)이 그의 첫 벼슬이다. 이후 여러 관청에서 공훈을 세우며 승승장구한다. 26년간의 관리 생활을 접고, 1893년 종성리를 터전으로 삼는다.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을 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지, 이후 그의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도 훗날 목숨을 걸고 항일에 나섰고 죽음마저 김개남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1894년 겨울, 그때는 달랐다.
을사늑약 후인 1906년 2월 최익현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군사를 맡아 곳곳 관아를 습격, 곡식과 무기를 탈취해 종성리 평전에서 훈련한다. 그해 6월 8백여 군사로 순창에서 전투하다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2년 형을 선고받고 최익현과 대마도로 유배당한다. 1907년 1월 임병찬은 귀국하나,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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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과 임병찬 산내면 종성리 용두봉 자락 평전에서 8백여 군사를 길러 일제와 맞선 순창전투에서 둘은 나란히 체포된다. |
ⓒ 정읍시청 |
일제 강점기인 1912년 9월 고종의 밀서를 받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나, 무력 집단이었는지는 의문이다. 1914년 2월 서울에서 이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 '대한독립의군부'로 재편한다. 이를 바탕으로 항일 의병 활동을 계획하나, 그해 5월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되고 만다. 6월 거문도로 유배되고 1916년 5월(음) 유배지에서 자결한다.
둘 사이는 친구였을까? 친구라면 신뢰가 바탕이다. 어떤 관계였을까? 이념이 다르다고, 목숨이 걸린 밀고에 나섰다. 차안대(遮眼帶) 찬 경주마처럼 협소한 그의 세계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측면에서 '친구나 동무'는 아닌 듯하고 '벗'은 더더욱 멀어 보이며 조금 가까운 '지인' 정도로 추측해 본다.
다만, 임병찬은 '의식 있는' 보수주의자로 읽힌다. 보수를 참칭하는 작금의 수구와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최익현이 스승이니 '위정척사'가 뿌리다. 왕권과 성리학에 충실하였으니, 동학혁명과 김개남을 어찌 보았을지는 명확하다. 그에게 김개남은 친구 이전에 역적이었던 셈이다. 김개남 처형 후 벼슬을 제수받으나 사양한다. 차마 친구를 팔아 군수 노릇 하기엔 양심에 일말의 가책이라도 느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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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찬 묘지석과 창의 표석 상종성 평전에 세워져 있는 임병찬의 묘비석과 창의 기념 표석. 이 부근에서 그의 모친 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 이영천 |
아무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였던 그의 고발로, 김개남은 체포된다. 전봉준보다 하루 이른 12월 01일(음)이다. 평전에서 옥정호로 내려가는 하종성 호젓한 곳에서다. 그 자리엔 아담한 찻집이 앉았다.
화급한 참수
임병찬의 연락을 받은 전라감사가 강화도 진무영 중군인 황헌주에게 80여 군사를 딸려 보낸다. 황헌주는 갑오년 봄 홍계훈 원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 전투에 참여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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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성 김개남이 붙잡힌 곳이 사진 우측의 작은 골짝이다. 사진 좌측의 급경사 도로를 오르면 상종성 평전이 나온다. |
ⓒ 이영천 |
김개남도 밀고를 어느 정도 감지한 듯하다. 황헌주가 집을 포위하고 소리칠 때 김개남은 뒷간에 있었다고 한다. "올 줄 알았네. 보던 일이나 다 보고 나가겠네"라며 대꾸했다고 한다.
김개남은 동학혁명군 장수 중 가장 용맹하고 급진적이었다. 이를 두려워한 황헌주가 그를 어떤 식으로 대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중 신빙성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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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 피체지 푯말이 가리키는 곳이 피체지로, 소담한 찻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
ⓒ 이영천 |
포박해 온 김개남을 황소가 끄는 달구지에 태운 뒤, 열 손가락에 대못을 박았다. 못에 박힌 김개남이 탈출하지 못하게 빙 둘러 소나무로 서까래를 엮고, 짚둥우리를 씌웠다고 한다. 달구지에 실려 끌려가는 그의 마지막을 구름처럼 몰려든 백성이 슬퍼한다. 그리곤 애절한 단조의 가락으로 위로한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만 군사 어디 다 두고 짚둥우리 웬 말이냐?"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구출하려 농민군이 몰려올까 봐, 혹은 김개남이 동학혁명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 내밀하게 협의한 사실을 폭로해 버릴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재판도 없이 그를 즉결처분으로 참수해 버린다. 12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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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된 자리 김개남이 피체된 자리엔 현재 소담한 찻집이 앉아있다. |
ⓒ 이영천 |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심문하였다. 개남은 큰 소리로 "우리가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312)
뼈에 사무친 원한이 아니고서야, 그의 내장을 씹을 사람이 있었을까. 그의 살점으로 과연 제사를 지냈을까. 김개남이 죽인 어느 관리의 아들이 간을 씹었다는 풍문이 떠도나, 단연코 백성들은 그러지 않았다. 한양으로 보내진 그의 머리는 여기저기 떠돌며 효수된다. 나중엔 지방 각지로 보내져 조리돌림 당하기도 한다. 죽어서까지 치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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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 동학혁명의 주역이었던 김개남. |
ⓒ 정읍시청 |
가늘고 소담한 섬진강은 향수 짙은 서정적 풍광을 자랑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강가에서의 서늘한 배반이, 결국 차디찬 죽음을 불러왔다. 짙도록 푸른 옥정호가 김개남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웅변하는 듯하다.
혁명 실패라는 설운 물줄기가, 이곳 백성마저 휘감아서일까? 종성리 섬진강 물길도 종내 커다란 격랑을 맞게 된다. 잘 흐르던 물이 갇히고 물길이 바뀐다. 강에 기대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들도 쫓겨난다.
일제가 1929년 임실 강진면 옥정리 강을 막았으니, 운암댐이다. 1940년 이보다 더 큰 댐을 만들기 시작한다. 섬진강댐이다. 격랑으로 몰아친 2차대전과 해방, 한국전쟁을 다 보내고 난 1965년에서야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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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댐(1968) 정읍 산내면 종성리(용두봉)와 임실 강진면 용수리(필봉산) 사이를 막아 들어선 섬진강댐. 이로 인해 드넓은 옥정호가 생겨났다. |
ⓒ 임실군청 |
1961년부터 이곳 수몰민이 부안 계화도 간척지로 이주당한다. 그렇게 갇힌 물은 흐름마저 바뀐다. 터널을 뚫어 동진강으로 내보내는 '유역변경식 발전소' 때문이다. 결국 고향을 잃고 먼 타향 간척지에서 고향에서 흘러온 물로 농사를 짓게 된다. 작은 위로라도 되었을까? 정작 1894년 백성은 어디서 위로 받아야 하지?(2)
<자료출처>
(1) [손호철의 발자국] 한말 선비들의 의병운동은 숭고하지만 '때늦은 애국'이었다 (daum.net)
(2) 세계관이 달랐던 친구의 밀고, 참수 당한 김개남 (daum.net)
<참고자료>
일제강점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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