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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 1913년 ~1923년 대한광복단(1915년 대한광복회)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 1913년 ~1923년 대한광복단(1915년 대한광복회)

대야발 2025. 5. 1. 18:11

 

 

 

 

 

 

이제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의 무장독립전쟁 위상을 조명하는 전시회가 2023년 7월 24일부터 28일 사이 열렸습니다.

 

(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회장 정윤선)는 국회의원회관 제2복도에서 "대한광복단 10년, 독립전쟁을 이끌다"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박형수 국회의원이 주최하고, 영주시가 공동주관하며 국가보훈부와 광복회가 후원해서 열렸습니다.

 

 

■ "독립전쟁 이끈 대한광복단 10년 활동 조명 전시회"

오마이뉴스 윤성효기자 2023. 7. 24. 08:30

 

 

이 단체는 "1913년 정월에 경북 풍기(영주시)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한 소몽 채기중(素夢 蔡基中, 1873~1921) 선생은 함창(상주시) 출신으로 함창 주둔 일본헌병대에 시달리고 있었다"며 "그는 1906년 자신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선택한 풍기로 이사오고, 그가 마지막으로 넘던 힛틋재에서 바라본 풍기 전경으로 전시회는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또 이 단체는 "일제의 무단정치 하에 독립운동세력이 대부분 해외로 망명한 뒤, 국내에 남은 지사들로 조직된 대한광복단은 '민국(民國)'을 지향했으며,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이었다"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모험용사대(冒險勇士隊)라는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군자금모집과 일본관리·친일파 처단에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1913년 창단부터 1915년 군대조직으로 확대개편된 광복회, 1916년에는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체제 정비를 했다"며 "1918년 지도부의 피체 이후에도 노출되지 않은 창립단원들이 1919년에 암살단과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고 덧붙였다.

대한광복단 최연소 창립단원이었던 김상옥 선생은 1923년 1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를 벌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대한광복단 10년간의 역사가 되는 근거자료를 선보인다.

 

 

 
  대한광복단 10년, 독립전쟁을 이끌다.
ⓒ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는 "대한광복단의 활동은 삼일혁명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의열단과 북로군정서 조직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정윤선 회장은 "1910년대 초반의 무장독립전쟁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며 "<대한광복단 10년사>를 편찬하여 이 시기의 기록을 완성하는 것이 본 기념사업회의 목적이며, 이로써 독립운동사 전체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 첫 걸음이다"라고 말했다.(1)

 

 

■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2021. 8. 25. 03:06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355번지는 1910년대 무장투쟁 조직 대한광복회를 지휘한 박상진 의사 생가다. 도로명 주소는 울산광역시 북구 ‘박상진길23’이다. 어릴 적 울산을 떠났던 증손자 박중훈(67)은 지금 그 생가를 지키며 증조 박상진을 기리며 산다. 대청마루 뒤쪽에 박상진 초상과 그가 남긴 옥중 절명시가 걸려 있다./박종인

 

 

 * 유튜브 https://youtu.be/tTYyPIBYlr8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주 세금 마차 강도사건

 

1915년 12월 26일 일요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받아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쾌재를 부른 사람도 있었고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기독교 성탄절 기사 가운데에 실린 사건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경주 아화(阿火)에서 관금봉적(官金逢賊) 팔천칠백원 분실 - 도적은 조선 사람’. 조선인 강도가 경주에서 세금 수송 마차를 털어 8700원을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이십사일 오전 인시 사십분에 경주를 출발해 대구로 배송될 관금 팔천칠백원의 행낭이 경주 아화간에서 분실된 대사건이 있더라.’(1915년 12월 26일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자 ‘매일신보’ 3면.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기사 가운데에 ‘세금 운송마차 탈취 대사건’ 기사가 실려 있다. 군기(軍器)를 마련하기 위해 광복회가 벌인 사건이었지만, 총독부는 광복 때까지 사건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1915년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조선 총독부 시정(施政) 5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한 해였다. 석 달 전 총독부는 경복궁을 허물고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어 식민 근대화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경사스러운 해’에 조선 강도에게 세금을 뜯겨? 그해 경성 숙련 목수 일당은 76전이었고(김낙년 등, ‘한국의 장기통계’1, 해남, 2018, p191) 이 목수가 연 200일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연봉은 152원이니, 목수 60명 연봉에 달하는 세금을 강탈당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일본 천황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된 뒤까지도 이 강도들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다.

 

 

사건 후 30년이 지난 1945년, 마침내 그 강도범 친척이 전모를 밝혔다. 내용은 이러했다. ‘…권영만은 환자로 변장하고 마부에게 부탁해 우편마차를 빌려 탔으며 우재룡은 효현교 천변에서 다리를 부숴놓고 대기하다가 마차가 물을 건너는 사이에 마차에 올라타…’ 그리고 사건의 주범(主犯)을 이렇게 명기했다. ‘이는 박상진씨의 명령에 의해 이뤄진 일이었다.’(이상 박맹진, ‘고헌실기약초’, 1945) 박상진은 평소 동료 무리에게 거듭 이리 말했다.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병사를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이 강도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에 대한 이야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암울했던 1910년대 무단정치

 

1910년 8월 29일,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 나라가 사라졌다. 수많은 지사들이 저마다 길을 제시하며 망국(亡國)을 피하려 했지만, 대한제국 황실은 망국을 택하고 말았다. 황실은 일본 왕족(王族)과 공족(公族)으로 살아남았다.(땅의 역사 201. 기미년 만세운동 특집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참조)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며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직하고 헌병과 경찰은 범죄 즉결처분권부터 민사소송조정권까지 폭넓은 권한을 가졌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됐던 태형(笞刑)도 부활시켰다.(윤경로, ‘1910년대 독립운동의 동향과 그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그런 엄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만주로 건너갔다. 감시를 피해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해외에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천도교와 대종교, 기독교 같은 종교단체와 신민회(新民會)를 비롯한 각종 비밀결사 조직이 생겨났다.

 

 

봉건 조선을 부활하려는 복벽파(復辟派)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미 1908년 유학자 이기(李沂)는 “농사꾼도 못 되고 상인과 공인도 못 되고 선비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들은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이기,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 1908) 대신 사람들은 공화국을 염원했다. 울산 사람 박상진(1884~1921)은 바로 그 독립공화국을 꿈꾸며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시도했던 선비였다.

 

 

박상진(1884~1921)

 

 

 

박상진이 권총을 들기까지

 

다른 이들에 앞서 근대 시대정신에 눈을 뜬 선비들을 ‘혁신유림’이라 한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엄존하던 노비들을 해방하고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근대 교육을 실시했다. 총을 잡기도 했다. 안동 혁신유림 허위(許蔿·1855~1908)는 1908년 13도창의군을 지휘해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다. 그해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된 허위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배후를 묻는 일본 관리에게 허위는 “이등박문이 배후요, 대장은 바로 나”라 답했다. 허위는 그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 첫 사형수로 처형됐다.(허복,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그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허위의 제자 박상진이다. 1884년 음력 12월 7일, 양력으로는 1885년 1월 22일 당시 경남 울산 송정에서 태어났다. 나이 열여섯에 허위 문하로 학문을 익힌 뒤 스물한 살이던 1905년 서울 양정의숙에 입학해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다.(국역 ‘고등경찰요사’(총독부 경북경찰부·1934), 류시중 등 역주, 안동독립운동기념관, 2010, p338)

 

 

일본 경찰에 따르면 박상진은 ‘우국(憂國)의 생각이 대단히 심각한 데가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양정 재학 시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선교사 헐버트와도 교류했다. 충청의 혁신유림 김좌진도 만났다. 그 인연이 깊게 이어져, 1921년 박상진이 죽었을 때 김좌진은 ‘박의사 상진씨를 곡함’이라는 만사를 쓰고, 스스로를 ‘도원결의 20년인 의동생’이라고 칭했다.(박중훈, ‘고헌 박상진의 생애와 항일투쟁활동’, 국학연구 6집, 국학연구소, 2001)

 

 

1911년 중국을 여행하며 손문의 신해혁명을 몸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안동 혁신유림과 신민회가 건설 중인 해외 독립기지도 경험했다. 그해 귀국한 박상진은 아버지 회갑연을 열며 ‘만주 동지의 실정과 사관 양성 기관을 설명한 뒤 집단이민을 제안했다.’(박상진 아들 박경중, ‘고헌박상진선생약력’, 1946) 과연 이민이 급증했다. 총독부에 따르면 1912년 ‘한일합병에 불평을 품은 계급들에 의한 선동과 교사’로 만주 이민이 급증했다.(박중훈, 앞 논문)

 

 

“무장 혁명을 한다”

 

그리고 1915년 8월 25일 박상진은 그때까지 인맥과 자금을 기반으로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박상진은 ‘총사령(總司令)’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한 계몽단체가 아닌, 군사조직임을 뜻하는 직책이다.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가능하다.”(경성복심법원, 1919년 9월 22일 박상진 등 판결문) 혁명은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을 말한다. 이에 앞선 1905년 제정러시아에서도 제정을 향한 혁명 시도가 있었다. 왕정복고는 박상진 안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을 위한 수단은 무장이었고 무장을 위한 기초는 자금이었다. ‘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조선 내 자산가로부터 금전을 모집하여 군기(軍器)를 구입하여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다.’(위 판결문) 중국 여행 때 반입한 권총 11정이 무장의 기초였다.(총독부 경북경찰부, 앞 책, p339)

 

 

광복회 결성 3년 전인 1912년 박상진은 ‘동지’라고 불렀던 평양 사람 김덕기, 전주 사람 오혁태와 함께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업했다. 문중이 소유한 대토지도 그에게는 독립자금이었다. 그렇게 전국에 설립한 상회는 갑인, 이춘, 백산, 평북상회와 충부상회 등이었다.(’고헌실기약초’) 상회를 통한 무역과 거래로 합법적 자금 축적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벌인 작업이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한 ‘의연금’ 모금이었다. 박상진은 동지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비밀과 암살, 폭동과 군령은 우리의 강령이다. 폭동은 현시점에 불가능하니 암살로 미래를 준비한다.’(경성복심법원, 앞 판결문)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 사건이다. 1917년 11월 광복회는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박상진 스승 허위에 의해 경북관찰사가 됐던 장승원은 훗날 “군자금을 지원해달라”는 허위 측 요청을 일본에 밀고했던 사람이다.(총독부 경북경찰부, 앞 책, p339) 광복회 회원 채기중과 임봉주, 강순필, 유창순은 장승원을 사살하고 집 대문과 마을 버드나무에 이런 경고문을 붙여놓았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한다 – 광복회원’.

 

 

세금 운송 마차 습격도 자금 모집에 동원된 비합법적 투쟁이었다. 1917년 미국 자본이 운영하던 평안도 운산금광 현금마차 탈취 미수 사건도 광복회가 주동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광복회 만주지부장 이진룡이 체포되자 후임에 임명된 김좌진이 만주로 떠났다. 서울 인사동에서 박상진은 김좌진에게 전별시를 이렇게 써주었다. ‘칼집 속 용천검 북두까지 빛나니 이른 때 공을 세워 개선가를 부르자’.(박중훈, ‘역사, 그 안의 역사’,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 2021, p294)

 

 

경북 경주에 있는 박상진 의사 묘 비석. /박종인

 

 

 

1910년대를 살아낸 광복회

 

부호(富豪) 가운데 처단 대상을 골라 사살하고 그 현장에 광복회 행위임을 밝혀놓았으니 광복회는 강도 집단이 아니었다. 성리학과 신문물을 공부하고 대륙으로 간 혁신유림과 교류 끝에 나온 행동이니 박상진은 단순한 비분강개형 투사만도 아니었다. 세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1910년대, 광복회는 뒷날 독립운동이 갈 길을 먼저 걸어간 조직이 아니었을까.

 

 

결국 1918년 1월 충남 도고면장 박용하가 광복회에 의해 처단되고 현장에서 광복회 명의 경고문이 발견되면서 박상진은 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 1심 선고는 다음 날 팔도를 뒤흔든 만세운동으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총 여섯 차례 재판을 거쳐 사형이 확정된 박상진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딱 100년 전이다.

 

 

스승 허위가 서울 서대문형무소 처형 1번이었고, 제자 박상진은 대구형무소 처형 1번이었다. 그가 이리 썼다. ‘이룬 일 하나 없이 가려 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찡그린다(無一事成功去 靑山嘲綠水嚬·무일사성공거 청산조녹수빈)’(박상진, 옥중절명시)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울산 생가로 돌아와 사는’ 증손자 박중훈(67)이 말한다. “할아버지 본인은 원치 않았더라도 시대가 원했기에 기꺼이 격랑 속으로 들어가셨다.”(2)

 

 

 

■ "친일파 처단" 첫 의열투쟁 단체 대한광복회, 1호 대상은 칠곡 부자 장승원

한국일보 박소영2019. 3. 26. 04:42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7>日총독 암살 모의한 한훈

 

 

대한광복단이 처음 결성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의 추모탑. 박소영기자

 

 

 

대한광복회는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첫 번째 전국단위 단체로 꼽힌다.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경북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단원이 함께 만든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라는 강령을 두고 독립전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목표로 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 지린(吉林)에도 광복회만주지부를 설치했다. 총사령은 조선국권회복단 출신 박상진이 맡았지만 부사령은 해외 인사로 선정했다. 군자금을 모아 만주에 군대를 육성할 사관학교를 세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무관학교 출신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의 두 번째 부사령으로 임명돼 만주로 파견됐다.

 

 

1915년 결성돼 1918년 와해되기까지 3년여간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친일 부호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금과 세금 수송마차 습격, 친일 부호 처단으로 나눌 수 있다. 대한광복회의 첫 번째 활동은 광복회 이름으로 대구 부호 정재학, 이장우, 서우순 등에게 군자금 협조 공문을 발송한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경주에서 세금운반 우편마차를 습격해 군자금 8,700원을 빼앗고 강원 영월의 상동광산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는 등 활동의 범위는 전국적이었다.

 

 

 

경북 풍기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에서 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발족한 대한광복회의 조직도를 설명한 부분. 박소영기자[저작권 한국일보]

 

 

 

1917년 들어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금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자 대한광복회는 친일 부호 처단이라는 극단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첫 번째 대상이 바로 경북 칠곡 부호 장승원이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지내며 좌익 척결에 앞장섰고 정부 수립 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박상진의 스승인 허위의 도움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오른 장승원은 후일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20만원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허위의 순국 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 강순필, 임세규, 유창순 등이 나서 장승원을 처단했다.

 

 

대한광복회의 두 번째 처단 대상은 충남 아산의 도고 면장 박용하였다. 박용하는 당시 도고 지역에서 지역주민을 괴롭히는 친일 면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1918년 1월 24일 우재룡으로부터 권총을 받은 충남지부장 김한종, 장두환, 김경태, 임세규 등이 박용하 처단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르면 이번에도 이들은 '본 회의 지령을 위반하였으므로 사형에 처하니 우리 동포는 경계할지니라, 경계할지니라, 광복회 지령원'이라는 내용의 사형선고문을 작성했다.

 

 

박용하 처단이 끝난 후에는 그 집 처마 끝에 선고문을 묶어놓고 나왔고, 이로써 대한광복회 수사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사흘 뒤 장두환이 체포된 데 이어 2월 초에는 총사령 박상진이, 6월에는 채기중이 경찰에 붙잡혔다. 박상진과 채기중이 1921년 8월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와해됐다.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스승으로 의열단의 고문을 맡았던 황상규 지사. 위키백과

 

 

 

대한광복회는 사라졌으나 사람은 남았다. 한훈을 비롯해 체포를 피한 대한광복회 단원 중 다수가 일생을 바쳐 무장 의열투쟁을 지속했다. 의열단에 가입한 대원들도 여럿이었다.

 

대한광복단과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황상규 약산 김원봉의 스승이자 고모부였다. 황상규는 1919년 의열단이 결성될 때 고문을 맡으며 의열단에 투쟁 방략을 전수했다.

 

김상옥 역시 의열단에 가입,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키는 등 의열투쟁 노선의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력 초반에는 대한광복회가 있었다.(3)

 

 

 

■ 서울에서 왜경 400명과 시가전 김상옥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5. 1. 1. 17:30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46] 일제강점기 가장 통쾌한 의열투쟁 중 하나

 

 

▲ 김상옥 의사 김상옥 모습
ⓒ 박용규
 
 
 

일제강점기 가장 통쾌한 의열투쟁은 안중근의사의 이토처단, 윤봉길의사의 사라기와 처단, 그리고 김상옥의사가 단신으로 왜경 400명과 서울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인 투쟁이 아닐까 싶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경,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졌다. 폭탄의 성능이 약했던지 크게 폭파하지는 않았으나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 앞을 지나던 기자 등 7명이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총독부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투탄자가 누구인지, 행방이 묘연하였다.

 

서울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총독부에 버금가는 원부였다. 황포탄 의거의 일원인 김익상을 잡아다 사형한 것도 그곳이었다. 의열단으로서는 마땅히 파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3·1혁명 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책'의 미명하에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만세시위로 수감된 시민·학생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한층 악명을 날렸다.

 

 

종로경찰서 투탄은 의열단과 임시정부의 합작품이었다.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이동휘·김구·조소앙 등은 1922년 11월 중순 조선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중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적임자로 의열단원 김상옥과 안흥한이 선정되었다. 스스로 지원한 것이다.

 

 

김상옥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였지만 심지가 곧고 의협심이 강하여 청년시절부터 대한광복단에 들어가 활동하고, 3·1혁명 때는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북한산 정상에 꽂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김상옥은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만났다. 특히 김원봉의 항일정신에 감명을 받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들어오면서, 거사용으로 의열단에서 준비한 권총 3정과 실탄 500발, 살포용 <의열단선언>을 휴대하고 1922년 겨울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밤중에 걸어서 건넜다.

 

 

그리고 경의선 간이역에서 석탄수송차에 몸을 숨기고 12월 1일 일산역에서 하차, 서울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거사용 폭탄은 의열단원을 통해 별도로 전달받기로 약조되었다.

 
 
 
▲ 김상옥의 폭탄  독립운동가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할 때 사용하고 남은 폭탄 6점. 당시의 폭탄 종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독립기념관
 
 

 

김상옥은 총독 사이토가 업무차 도쿄로 간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삼고 그가 기차를 타게되는 서울역을 은밀히 답사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렸다. 1월 17일 저녁, 이날도 서울역사와 주변을 돌아보고 은신처에서 막 잠이들려고 할 때 문틈으로 내다보니 일본 경찰이 떼지어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종로경찰서 투탄자가 김상옥임을 파악한 일제가 경찰을 풀어 그의 행적을 뒤쫓아 은신처를 포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상옥은 망설이지 않았다. 권총을 뽑아 맨 앞에 온 자를 쏘았다. 종로경찰서 형사 다무라였다. 이어서 종로서의 이마세 경부, 동대문서의 우메다 경부가 차례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종로서 투탄사건이 일어난지 5일만의 일이다.

 

김상옥은 뒤쫓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남산으로 올라갔다. 남산은 온통 눈으로 덮혀있었다.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뛰어 일경의 눈을 피하는 지혜를 발휘하여 간신히 또 다른 은신처에 잠복하였다. 일경의 추적은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일제는 김상옥의 가족과 지인들의 뒤를 밟아 마침내 은신처를 알아내고 1월 11일 새벽 400여 명의 무장경찰대를 풀어 효자동 일대를 뒤졌다, 그리고 그가 은신한 동지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선발대·형사대·기마대·자동차대까지 동원된 엄청난 병력이 동원되었다.

 

김상옥은 망설이지 않았다. 양손에 권총을 쥐고 이들과 대치하였다. 1대 400여 명의 대결이었다. 서부 활극에서도 보기 어려운 구도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와 일제가 서울 한복판에서 무장대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김상옥은 쌍권총에서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효제동 골목을 누비며 일경에 총탄을 퍼부었다. 3시간 동안의 시가전 끝에 총탄이 떨어지자,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한 방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 순국하였다. 이때 일경 15명 가량이 숨졌다. 의거 후 총독부 검의관이 검시한 결과 김 의사의 몸에서는 수 십발의 총탄이 박혀 있었음이 드러났다. 수십 발의 총탄을 맞고도 최후까지 총을 놓지 않고 일제와 싸운 의열단원의 치열함을 보여준 것이다.

 
 
 
▲ 암살단의 체포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하기 전에 일제에 의해 김상옥과 한훈이 조직한 육혈포암살단과 임정에서 조직한 광복단군영이 검거되었다. 출처 : 동아일보(1920년 08월 29일)
ⓒ 이병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김상옥이 아닌 황해도 출신의 김상환이라는 지적도 있다.(<사상계>, 제146호, 유광열). 하지만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김상옥이라는 데 모아진다. 김상옥을 도왔던 친지·지인·동지들이 일경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임시정부와 의열단의 국내 조직이 와해되었다. 김상옥 의사의 결전 상황을 의열단 부장 이종암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상옥은 할 수 없이 근처 변소로 들어가서 응전했다. 왜경들은 변소를 향해 일제 사격이다. 상옥은 그 속에서도 응전했다. 그러나 탄환이 없어졌다. 꼭 두 개 밖에 없다. 할 수 없이 제 머리를 제 손으로 쏘아 자결했다.

 

서울 한 복판에서 단신으로 수백의 무장경관을 상대로 싸우다 죽은 것은 김상옥 이외에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피투성이가 된 유해를 친족들이 염(殮)하는데 몸에 수십 발의 총상이 있었고 특히 다리 아래 많았다. 사로잡기 위해서 왜경들이 주로 아래를 쏜 것이리라.(…) 김상옥의 유족으로는 70이 된 노모와 아우 김춘원, 부인 정씨와 1남1녀가 있었다 한다.

 

김상옥의 6일간의 항전은 조선천지를 울렸다. 그 용감무쌍한 정신은 우리 민족의 뼈에 사무쳐 있고 피에 섞여 흐르고 있으리라. (이종범,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전>, 광복회, 1970.)(4)

 

 

 

 

■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매년 2월6일 광복단 창단 기념할 것”

서믿음2023. 2. 7. 08:24
 

[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는 대한광복단 창단 110주년을 맞아 1913년 계축(癸丑)년 당시 설날이었던 양력 2월6일을 ‘대한광복단 창단기념일’로 선포하고 6일 선포식을 진행했다.

 

 

 

 

 

선포식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대한광복단기념공원 추모탑 앞에서 열렸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회원 40여명이 참여했다.

그간 대한광복단의 창단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창립 단원 한훈 선생이 저서 ‘광복단약사’에 밝힌 “계축년(1913년)에 채기중 선생을 중심으로 유창순, 유장열, 한훈, 강병수, 김병연, 정만교, 김상옥, 정운기, 정진화 등이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했는데...”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창립 연도를 1913년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초대 단장 채기중 선생의 동지이자 사돈이었던 양제안 의병장에 관해 그의 차남 양한위가 기록한 ‘양벽도공제안실기’에 “채기중이 (김봉초, 정성산, 채기중) 세 가정의 재산을 합쳐서 비밀혁명기관을 풍기에 설치(...) (그리고 양제안)공은 계축년 정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라는 내용이 있어 정월에 창립된 것으로 간주됐다.

 

이에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는 대한광복단 창단일이 1913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매년 2월6일을 창단일로 기념하기로 했다.(5)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30724083000254

 

 

(2) https://v.daum.net/v/20210825030625810

 

 

(3) https://v.daum.net/v/20190326044233958

 

 

(4) https://v.daum.net/v/20250101173001529

 

 

(5) https://v.daum.net/v/20230207082424116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6874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A%B4%91%EB%B3%B5%EB%8B%A8

 

 

 

http://www.kwangbokdan.com/ko/main.do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대한광복단기념공원

www.kwangbokdan.com

 

 

 

https://v.daum.net/v/20220805110755960

 

 

https://v.daum.net/v/20250227133308862

 

 

https://v.daum.net/v/20250418220814182

 

 

https://v.daum.net/v/20241003162401716

 

 

https://v.daum.net/v/2024093012330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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