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5) 1911년~1920년 신흥무관학교 본문

흔히 지식인의 유약성이 논의되지만, 우당은 조선 선비의 신분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이후 줄곧 신채호·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과 함께하였다. 죽음의 길이 된 만주행 역시 그곳 독립운동가들과 무장전쟁을 준비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사유의 세계는 문ㆍ무의 영역에만 갇힌 것도 아니었다. 해방 조국의 미래상으로 무강권, 비폭력의 아나키즘에 이르렀다. 관념이나 공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준비하였다.
■ 기득권 버린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회영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4. 12. 17. 15:09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31] 역사에서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겨레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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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6월 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에 신흥무관학교 107주년을 맞아 꽃목걸이가 걸려 있다. |
ⓒ 이희훈 |
1910년 12월 30일 한밤중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무리가 있었다. 남자들은 무거운 짐을 지개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그야말로 남부여대의 행렬이었다.
일본군 국방수비대의 검사가 있었지만 워낙 추운 날씨이고 초라한 행렬이라 그대로 보냈다. 당시 빚을 진 조선 농민들의 야반도주로 보았던 것 같다. 일제가 두고두고 개탄했던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일가의 망명길이다.
흔히 지식인의 유약성이 논의되지만, 우당은 조선 선비의 신분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이후 줄곧 신채호·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과 함께하였다. 죽음의 길이 된 만주행 역시 그곳 독립운동가들과 무장전쟁을 준비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사유의 세계는 문ㆍ무의 영역에만 갇힌 것도 아니었다. 해방 조국의 미래상으로 무강권, 비폭력의 아나키즘에 이르렀다. 관념이나 공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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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당 이회영 선생 |
ⓒ 우당기념관 |
삼한갑족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다른 양반집 자제들처럼 과거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서예와 시문은 물론 음악과 회화, 미술·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하였다. 청년시절에는 수학·역사·법학 등 신학문도 공부했다.
막역한 지우인 이상설, 친동생 이시영까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갈 때, 그는 관직보다 불평등한 봉건적 사회인습과 계급적 구습을 타파하려는 길에 나선다.
여기에는 조선말기의 대문장가이고 사상가인 이건창·이건승 형제로부터 배운 양명학의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형식보다는 실질을 중시하고 지행일치 즉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을 일치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집안의 머슴들에게 높임말을 쓰고 청상과부가 된 여동생을 부모 몰래 개가시켰다.
서울 상동교회 부설로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 교육에 전념하고, 안창호·신채호·노백린·이동휘·양기탁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동한다. 신민회는 최초의 공화주의 단체이다.
나라가 왜적에게 망하던 1910년 12월 말 6형제 가족 40여 명과 해방시켰으나 나가지 않고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노비 20여 명은 한밤중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
경학사에 이어 신흥강습소(후에 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총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들이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중심이 되고 김원봉 등 조선의열단·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의 핵심이었다. 그는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베이징에서 각급 독립운동 단체 조직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도 간부직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묵묵히 뒤에서 지원을 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공적을 포장하지 않았고,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는 지도자, 민족의 설움과 동지들의 아픔을 다독이며, 목숨에 여벌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목숨보다 공의와 대의를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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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서울 중구 남산 이회영 기념관에 전시된 우당 형제들 사진 모습 |
ⓒ 이회영 기념관 |
이회영은 1922년 베이징에서 이을규·이정규·유자명 등과 러시아의 맹인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에로센코를 초청하여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모순성을 토론하고 '행동하는 자유주의' 아나키스트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에는 신채호·김창숙 등이 참여하고,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문학가 루쉰, 그리고 타이완 출신의 판번량 등과 연대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운동의 표본으로 중국 후난성 양도천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그리고 신채호·김창숙·류자명·김원봉과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행동조직인 의열단을 후원하는 한편, 이을규·이정규·정화암·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하며 일제와 싸웠다.
우당은 중국에서 무장투쟁의 주도권이 점차 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모아 신흥학우단을 조직하고, 아들 이규학과 조카 이규준, 그리고 신흥학우단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밀 지하단체 다물단을 조직, 지휘했다. 다물단은 중국내 우리 독립운동 단체에 침투한 일제의 고등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우당의 활동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1927년 중국 푸젠성 천주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는 농민자위군운동에 참여하고, 더불어 중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상하이에 노동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양도천의 이상촌 건설이나 상하이의 노동대학 설립은 자금난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베이징 집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지역·계층·연령을 불문하고 독립운동가들이 베이징에 오면 으례히 그의 집에 들르고, 며칠 동안 심지어는 몇 달까지 머물렀다. 신채호·김창숙은 물론 소설 <상록수>의 작가가 된 심훈도 그 집의 신세를 졌다.
우당 내외는 재산이 바닥이 나서 궁핍한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흔연히 접대하고, 부인 이은숙이 몇 차례나 비밀리에 입국하여 친정에서 자금을 갖고 와서 남편과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부인은 심지어 마을의 텃밭에 배추를 심어 독립운동가들에게 김치를 담가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당은 그림 솜씨가 대단했다. 독립운동 자금이 떨어지면 난초를 쳐서 팔기도 했다.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화법을 배운 우당의 난 그림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지금 서울의 우당 이회영기념관에 몇 점이 보관되어 있다.
우당은 또 식량이 떨어지거나 괴로울 때이면 손수 만든 퉁수를 불면서 마음을 달래고 고향생각을 하는 젊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향수를 달래주었다. 그릇이 크고 인품이 고결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노선을 막론하고 그와 친교를 맺으려 하고 그의 곁으로 몰려왔다.
65세가 되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보산사건 등으로 만주 지역의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심한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다. 우당은 상하이·베이징 등으로 철수한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이어서 정화암·백정기·중국인 왕야차오 등과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한다. 산하에 흑색공포단을 만들고, 흑색공포단은 일본영사관을 폭파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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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영 흉상 우당기념사업회의 노력에 의해 2014년 서울 YWCA 옆 이회영 생가터 표지석 바로 옆에 세워졌다. |
ⓒ 홍윤호 |
1932년 11월 17일 침체된 독립투쟁을 다시 전개하기 위해 동지들과 비밀리에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상하이에서 다렌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밀정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다렌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수상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 끝에 뤼순감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67세 때이다. 망명 22년 만에 독립운동의 원로는 이렇게 순국한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할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이다. 우당은 애국심, 인간성이나 철학, 신뢰감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성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조선왕조의 황족이나 대신 대부분이 매국을 하거나 친일파가 될 때 그와 그의 일족은 모든 기득권을 던져버리고 해외로 망명하여 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고,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도하러 가던 줄 일제에 피검되어 순국하게 되었다.
그가 갇혔던 감옥은 안중근의사가 처형되고 신채호선생이 옥사한 뤼순감옥이다. 우당은 이 감옥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입을 다물고 만주 무장투쟁의 계획과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고문으로 숨지게 되었다. 우당은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고위직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을 갖고 헌신하라)를 실천한 겨레의 사표가 되었다.(1)
■ 신흥무관학교의 아버지 이회영, ‘캠벨하우스’에 깃들다
국민일보 장창일기자 2024. 7. 29. 13:42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인 우당, 사직동에서 다시 피어나
임시 개관한 ‘이회영 기념관’, 다음 달 11일 정식으로 문 연다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사직로의 좁은 골목을 걷다 ‘이회영 기념관’이라는 간판이 붙은 오래된 집을 만났다.
긴 세월 ‘캠벨 하우스’로 불렸던 이곳에는 20세기 초 화강암으로 지은 2층 높이의 양옥 두 채가 있다. 이 집은 서울시가 2019년 우수건축자산으로 지정했다.
미국 남감리회 파송을 받은 조세핀 캠벨(1853∼1920) 선교사가 이 집에서 살았다. 1897년 우리나라에 온 그는 배화여대 전신인 배화학당을 세워 근대 여성 교육의 문을 열었다.
독립을 꿈꾸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이회영 기념관’이 최근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이 곳으로 이전했다. 현재 화폐 가치로 6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선뜻 내놓았던 우당의 삶, 그리고 여성을 깨웠던 캠벨 선교사의 흔적이 한데 어우러진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인 우당은 미국 북감리회 소속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상동교회 교인이기도 했다. 그의 기념관이 캠벨 선교사의 집에 깃들면서 감리교인과 감리교 선교사가 한 데 모였다는 의미까지 더해졌다.

기념관 입구에는 우당의 흉상이 서 있었다.
마당으로 발길을 옮겨 도심 쪽을 바라보자 북악산이 서울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우당과 형제들의 이야기부터 그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이은숙(1889∼1979)이 쓴 ‘서간도 시종기’, 여러 점의 수묵화가 차례대로 펄쳐졌다.
독립군이 사용했던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권총과 같은 종류인 브라우닝 권총도 전시돼 있다.

우당 이회영은 독립운동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조판서 이유승의 넷째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다.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일하던 우당은 1907년 4월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했고 두 달 뒤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1910년 12월 일가 전체와 만주로 망명한 우당은 형제들과 함께 이듬해 5월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런 공로로 우당과 초대 부통령을 지낸 동생 이시영 등 여섯 명의 형제들은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2018년에는 부인 이은숙까지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이종걸 이회영 기념관 이사장은 “감리교인이던 우당의 기념관이 감리교 선교사이던 캠벨의 집으로 온 건 우연히 이뤄진 일이 아니라 뭔가 역사적인 이끌림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서 “독립을 위해서, 여성 교육·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삶이 한 공간에서 만나 희망의 미래를 그려 나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 이사장은 우당의 손자다.
그는 “강하지만 넓고 포용적이셨던 할아버지의 삶이 기독교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분이 기념관을 방문해 할아버지께서 남긴 정신적 유산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회영 기념관(왼쪽)이 이전한 '캠벨 하우스'의 전경.

기념관은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에서 931m 떨어져 있다. 매주 화~주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설·추석 연휴와 성탄절, 선거일에는 휴관한다.(2)
■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구국의 혼' 전한다
KBS 선재희기자 촬영기자:김제원 / 영상편집:김근환
2021. 3. 27. 21:36
https://tv.kakao.com/v/417772588
[앵커]
어제가 안중근 의사 서거일이었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무력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신흥무관학교인데요,
1920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올해 이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지 꼭 110년이 됩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의미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선재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영화 '명당' 중 (조승우) : "나라를 되찾을 인재를 만들기엔 더없는 곳이요. 신흥. 말 그대로 신흥이 어떠신가."]
중국 서간도의 옥수수밭,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곳입니다.
경술국치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이었습니다.
이듬해엔 학교를 확장, 이전해 산허리를 따라 18개의 교사가 줄지어 지어졌습니다.
[김 산/1905~1938 : "우리는 군대 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 등 3,500명이 배출됐습니다.
지청천 장군은 교장을 지냅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청산리 전투라든가 봉오동 전투의 승리의 주역이 됐고요. 그 후에도 국내 모든 독립 전쟁에 있어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라든가."]
신흥무관학교 재원의 상당 부분은 남양주의 자산가, 이석영 선생이 마련했습니다.
전 재산을 나라 되찾는 데 바치고, 그는 비참한 생활 끝에 굶어 죽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지 꼭 110년이 되는 올해, 이석영 선생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역사 체험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종찬/전 국정원장/이석영 선생 종손자 : "역사를 다시 재현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의 뜻을 여러 국민께 알려주는 계기가 되어서 저는 대단히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조동성/전 서울대 교수/안중근 의사의 조카 손자 : "사회에서 잊혀지거나 사회에서 찾아내지 못한 애국자를 동시에 기억하는,그들의 헌신과 이상을 기억하는 그런 자리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희생에 깃든 진정한 애국심을 느끼고 체험하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KBS 뉴스 선재희입니다.(3)
[책&생각] 무장항일투쟁 산실 신흥무관학교의 기록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
원병상 지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엮음 l 민족문제연구소 l 4만원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웠다.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무장항일투쟁의 주축에 섰던 독립군 3500여명을 배출한 핵심 기관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기록을 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는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이곳 교관까지 역임한 원병상(1895~1973)은 수기 두 편과 회고록 한 권을 남겨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원병상 회고록’은 유족 원건희(손자)씨가 2014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한 기록을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교주(校註)해 펴낸 책이다.
강원도 평해군 출신 원병상은 항일사상에 호응한 부모와 함께 서간도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4기로 졸업했고, 교관으로 복무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회고록에는 그 개인뿐 아니라 “무변광야”였던 만주를 벼농사가 가능한 “양전옥토”로 개간해내고, 경신참변 등 만주에까지 뻗친 일제의 폭압, 만보산 사건 등 마적당과 중국 군경의 횡포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당시 동포들의 치열했던 삶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1945년 일본 패전 뒤 원병상은 진공상태의 만주를 접수한 공산 세력이 민족사상자·토지소유자를 대상으로 벌인 탄압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친일 잔재와 이념 대립으로 혼란했던 해방공간에서 그는 53살 늦은 나이로 육군에 입대했고, 일군 출신들이 요직을 꿰찬 가운데 하급 장교로서 한국전쟁도 치렀다. “민족정기의 상징이었던 (신흥무관학교) 명의까지도 물가고 말살되고 만 것은 천추에 여한”이라 써둔 것이 눈에 띈다.(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41217150901595
(2) https://v.daum.net/v/20240729134223904
(3) https://v.daum.net/v/20210327213633929
(4) [책&생각] 무장항일투쟁 산실 신흥무관학교의 기록 (hani.co.kr)2023-08-18
<참고자료>
이회영기념관 개관 2주년·신흥무관학교 개교 113주년 기념 <나는 이은숙이다> 행사 개최 (siminilbo.co.kr)2023-06-09
https://v.daum.net/v/20230528175100062
https://v.daum.net/v/2023052918360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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