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7) 1906년 서전서숙 → 1908년 명동학교 본문

1905년 11월 30일 한 선비가 종로 거리에서 울면서 운집한 시민들에게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일장 연설을 마친 그는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자결을 시도했다. 주위에 몰려있던 시민들이 이를 제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이 일화가 전한다.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의 이야기이다.
■ [줌인] 을사늑약에 분노 관직 접고 망명… 초기 독립운동 구심점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⑫ 진천 출신 헤이그 밀사 이상설
헤이그 밀사로 전세계에 독립 호소
민족계몽·외교독립·무장투쟁 시도
갖은 방법 분투… 해외 떠돌다 순국

1905년 11월 30일 한 선비가 종로 거리에서 울면서 운집한 시민들에게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일장 연설을 마친 그는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자결을 시도했다. 주위에 몰려있던 시민들이 이를 제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이 일화가 전한다.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의 이야기이다.

보재는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는 데 7세 때 같은 집안의 이용우에게 양자로 가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서울에 사는 이용우는 정3품 동부승지를 사람으로 형편이 넉넉했다.
보재는 25세 때인 1894년,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에 급제하며 관계에 입문했다. 27세에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됐고,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 법무부의 차관급인 법부협판에 올랐다.
보재는 1904년 일본이 대한제국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박승봉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그는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고 재물은 민생의 근본"이라며 반대했고, 보안회라는 시민단체까지 만들어 여론을 조성, 무산시켰다.

□ 고종에게 "나라가 망할 바에야 자결하라" 상소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려 하자 직접 반대행동을 벌인다. 5차례에 걸쳐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이 조약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둑질이며,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은 불법 조약이고, 매국노(을사오적)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고종에게 "그 약관(늑약)을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안 해도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死)하여… "라며 나라를 잃을 바에야 자결하라는 표현까지 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종로에서 대중연설을 한 뒤 자신도 자결을 시도했고 자결에 실패한 이후 곧바로 독립투쟁에 나선다. 고위관리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보재는 1906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용정에 정착, 서전서숙을 개설했다. 서전서숙은 역사 지리 수학 등의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을 병행했다. 그는 서전서숙의 초대 교장을 맡아 이동녕 여준 김우용 박정서 황달영 등의 애국지사와 함께 일했다.
직접 <산술신서>라는 교과서를 만들어 가르쳤으며, 교사 월급과 책값, 학용품 등의 비용을 댔다. 보재는 망명을 전후하여 양부에게 물려받은 서울의 저택과 고향 진천의 많은 전답을 처분했다. 일제의 내사 기록에도 이상설이 서전서숙 설립을 주도하고 운영자금도 댄 것으로 나와 있다.
1907년 보재는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다. 고종은 비밀리에 그를 특사의 우두머리인 정사,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임명했다. 헤이그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하여 열린 국제회의로 세계 각국이 군비축소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국제 중재재판소 설치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고종은 특사단에게 일제의 불법 강압적 행위를 널리 알리고 외교권을 회복하라고 명했다.
이상설이 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와 주최국 네덜란드의 외무장관을 만났으나 도움을 거절했고,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외면했다. 일제의 방해 때문에 본회의장에는 입장도 못했다.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담은 문서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신문에 알리는 것으로 임무를 대신했다.
헤이그 특사의 외교활동은 이준이 순국하면서 중단됐다. 보재는 7월 14일 이준이 건강악화로 갑자기 숨을 거두자 장례를 치른 뒤 활동을 그만두고 이위종과 함께 유럽 각국을 순방했다. 보재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돌며 일제 침략의 불법성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기관지 만국평화회보 1907년 7월5일자에 실린 특사단의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사진=독립기념관

□ 헤이그 밀사로 전세계에 대한독립 호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국내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대한제국에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행정과 사법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상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국내에 돌아올 길이 막힌 것이다.
보재는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미국 국민과 정부를 상대로 독립을 호소하고 동포사회에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애국동지대표회와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연해주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인 흥개호 주변에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했다. 한인 청소년을 모아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군대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1910년 6월에는 연해주와 국내의 의병을 통합, 십삼도의군을 조직했다. 도총재는 유인석이 맡았고, 이범윤 이남기 홍범도 안창호 등이 함께했으며 보재는 외교를 담당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를 조직,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를 불온하게 여긴 일제는 러시아에 제재를 요구했다.
러시아 정부는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대표 20여명을 체포했으며,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됐다가 이듬해 석방됐다. 한인사회 산업을 진흥시키자는 취지로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도 발행했다. 보재는 권업회의 창립총회에서 의장을 맡았고, 단재 신채호에 이어 권업신문의 주필과 사장직도 수행했다.
1914년에는 연해주를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정통령을 맡았다. 이 조직은 경술국치 이후 최초의 해외 망명정부로 노령·북간도·서간도 3개 지역에 산재한 군대의 업무를 총괄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고 연해주의 한인사회를 탄압, 권업회는 물론 대한광복군정부도 해체됐다.
1915년 상하이로 가서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묶은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 등이 참여한 혁명당은 국내외 군대를 연결하여 무장독립 전쟁을 추진했다. 이상설은 고종을 망명시켜 독립운동에 활용하려 했으나 서울에 파견한 성낙형이 일제에 체포돼 실패했다.

충북 진천 이상설 생가 옆의 숭렬사 경내에 세워진 보재 이상설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충북 진천의 보재 이상설 기념관. 2023년 3월 말에 문을 열었다.

□ 48세에 러시아서 순국… 기획 실천력 모두 갖춘 인재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보재는 1916년부터 병석에 누웠다가 1917년 4월 1일 우스리스크에서 폐질환으로 순국했다. 향년 48세였다.
이상설은 저물어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관리가 됐다가 망국을 겪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갔다. 광복을 위해 민족계몽과 외교독립, 무장투쟁 등 3가지 독립운동 노선을 모두 시도했다. 그의 생애에는 엄혹한 시절 갖은 방법으로 분투했던 독립지사의 눈물겨운 시간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일제의 심문에서 "이범윤과 같은 인물 만명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라며 존경을 표했다. 독립운동가들도 그를 '두뇌' '주뇌'라며 이론과 기획· 실천력, 전략적 사고까지 갖춘 최고 인물로 평가했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큰 역할을 해냈을 인재 중의 인재였다.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새로운 학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근대 수학을 정리한 <수리>라는 책도 내고 물리학 분야 <백승호초>, 화학 분야 <화학계몽초>를 저술하는 등 근대과학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조국 광복을 위해 해외를 떠돌다 순국한 그의 유언이 큰 울림을 준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제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1)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윤동주 애국혼 키워준 김약연과 명동학교

윤동주(1917∼1945)는 독립투쟁의 선봉에 서서 산화한 열사가 아니고 숱한 저작을 남기며 당대에 이름을 떨친 문사도 아니지만 이육사와 함께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 꼽히고 그가 남긴 '서시'는 오늘날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국인 애송시 1, 2위 자리를 다툰다. 맑은 영혼과 간절한 소망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그려낸 시구에다가 광복을 몇 달 앞두고 28살의 젊은 나이로 옥중에서 숨진 안타까운 사연이 더해져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생애 가운데서도 그가 조국 땅에 머문 기간은 평양 숭실중 1년과 서울 연희전문 4년을 합쳐 5년뿐이고 일본 체류 3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발자취는 중국 북간도에 남아 있다.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뜨거운 애국심과 순수한 감수성을 키운 것은 당시 북간도에 충만해 있던 독립정신과 온 집안이 믿어온 기독교사상 덕이었고 그 중심에는 '북간도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던 그의 외삼촌 김약연(1868∼1942)이 있었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김하규·문병규·남도전을 비롯한 네 가문의 가족 142명은 고향 함경도를 등진 채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으로 이주했다. 이들 가운데 지도자는 가장 젊은 김약연이었고 그의 일가는 장재촌에 터전을 마련했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도 1년 뒤 그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동방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동촌'(明東村)이라고 지었다. 윤하현 집안을 포함한 다섯 가문은 혼인을 통해 인척 관계로도 발전했다. 김약연의 누이동생은 윤하현의 아들 윤영석과 결혼해 윤동주를 낳았고, 김하규의 딸 김신묵과 문병규의 손자 문재린 사이의 아들이 문익환(1918∼1994) 목사다.
이들은 땅을 공동으로 사서 나누며 반드시 1%를 교육 자금 충당을 위한 학전(學田)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서당을 열었으나 이상설·이동녕·정순만·박정서 등이 1906년 10월 명동촌에서 40리 떨어진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짓고 신학문을 가르치다가 1년 만에 문을 닫자 서전서숙의 창설 이념과 교육 정신을 이어받아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에 참여한 박정서가 서숙 대표인 숙장, 김약연이 실무 책임자인 숙감을 맡았고 교무주임으로 정재면을 초빙했다. 정재면은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고 학교 이념도 기독교로 바꿨다. 1909년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개칭하고 김약연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중학교, 1911년에는 여학교도 생겨났다.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떠오르며 숱한 인재를 길러내던 명동학교는 1920년 들어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한인들을 살육하고 마을을 파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명동학교에도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1923년 건물을 복구하고 김약연이 다시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기독교 신자와 공산주의자들의 갈등에다가 이듬해 대흉년까지 겹쳐 1925년 소학교만 남기고 중학교는 문을 닫았다. 윤동주는 그해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와 윤영석의 여동생 윤신영 사이에서 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 한 살 아래인 문익환과 함께였다.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문학에 심취한 이들은 5학년 때 원고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1932년 윤동주·송몽규·문익환은 캐나다장로회가 세운 용정의 은진중에 진학했다가 송몽규는 뤄양(洛陽)군관학교로 떠나고 윤동주는 문익환을 따라 1935년 평양 숭실중으로 편입했다.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해 숭실중 교장이 파면되고 휴교에 들어가자 둘은 용정으로 되돌아와 친일계 광명학원을 다녔다. 그 뒤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최현배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손진태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우리말 글쓰기를 가다듬고 민족사관을 형성해갔다. 졸업 후에는 송몽규와 일본 유학을 떠났다.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를 거쳐 교토의 도시샤대를 다녔고 송몽규는 교토제대에 적을 두었다. 그러던 중 둘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2월과 3월 차례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늘날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들어서 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김약연이 쓰던 책상과 친필 편지, 교실과 교과서, 윤동주 친필 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인근 윤동주 생가터와 주변에도 118년 된 북간도 최초의 개신교회인 명동교회, 윤동주와 송몽규 고택, '서시' 등을 비롯한 윤동주 시비, 김약연·윤동주·송몽규의 묘소 등이 자리해 100년 전 애국지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과 기념관은 박제로만 남아 있을 뿐 이제 명동촌은 만주로 건너간 한인들의 제2의 고향이 아니다.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살던 동포 후손들은 한국이나 베이징 등 대도시로 떠나 공동화 현상을 빚고 있고 그나마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 김약연과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는 이들도 한국 관광객과 답사객뿐이다.
국내에서도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윤동주의 이름을 딴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고 문학관이 들어섰으며, 연희전문 후신인 연세대에도 윤동주 기념관이 꾸며졌다. 아밖에도 그의 시비는 교토 도시샤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유고시집이 발견된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물은 늘어나고 그가 지은 시구를 외는 사람도 여전히 많지만 정작 그가 찾고 지키려 했던 민족정신과 아름다운 우리말은 갈수록 흔들리는 느낌이다.
오는 30일은 윤동주가 탄생한 지 꼬박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내년은 김약연 탄생 150주년이자 명동학교 개교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준익 감독은 지난해 영화 '동주'를 통해 윤동주의 평생 동지인 송몽규의 이름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이제는 윤동주를 키워낸 김약연과 명동학교의 이름도 기억하면 좋겠다. 이와 함께 조선족 동포들이 이들의 친구이자 이웃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한번쯤 떠올리기 바란다.(2)
■ 윤동주와 명동촌, 그리고 조선족[이희용의 세계시민]
[이희용 언론인·이데일리 다문화동포 자문위원]
오는 16일은 윤동주가 순국한 지 80주년 되는 날이다. 그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으로 첫손에 꼽히고 그의 대표작 ‘서시’(序詩)도 ‘한국인 애송시’ 1, 2위를 다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맑은 감수성과 뜨거운 애국심으로 민족의 정서를 노래하다가 일제에 의해 젊은 나이로 옥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민족시인이지만 나고 자란 배경과 학교를 다닌 이력은 매우 복잡하다. 이주민인 중국 동포(조선족) 3세이고 일본 유학파다. 27년 남짓한 짧은 생애 가운데 조국에 머문 기간은 5년에 지나지 않는다.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그가 어떻게 남다른 민족의식을 키우고 빼어난 한국어 글솜씨를 갖출 수 있었을까.
비밀은 북간도 한인촌에서 찾을 수 있다. 김약연·김하규·문병규·남도전 등 네 집안의 가족 142명은 고향 함경도를 떠나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1년 뒤에 윤하현도 식구를 데리고 합류했다. 이들은 ‘동방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명동촌’(明東村)이라 이름 짓고 독립 정신과 기독교 사상이 넘쳐나는 공동체로 가꿔나갔다.
명동촌의 중심인물은 ‘북간도 대통령’이라고 불린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이었다. 주민들은 땅을 공동으로 사서 나누며 1%를 차세대 교육 자금에 충당했다. 처음에는 서당을 열었다가 1908년 신학문을 가르치는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해 이듬해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다섯 가문은 혼인을 통해 인척 관계가 됐다. 김약연의 누이동생은 윤하현 아들 윤영석과 결혼해 1917년 윤동주를 낳았다. 한 살 아래인 문익환의 부모는 문병규 손자 문재린과 김하규 딸 김신묵이다. 윤영석의 여동생 윤신영과 명동학교 교사 송창희 사이에서 난 윤동주의 동갑내기 사촌이 송몽규다.
윤동주는 송몽규·문익환과 함께 명동학교에 다녔다. 민족의식에 눈뜨고 문학에 심취한 이들은 5학년 때 ‘새 명동’이란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캐나다장로회가 세운 용정(龍井)의 은진중에 진학했다가 송몽규는 뤄양(洛陽)군관학교로 떠나고 윤동주는 문익환을 따라 평양 숭실중으로 편입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해 숭실중이 문을 닫자 용정으로 돌아와 친일계 광명학원을 졸업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일본 유학을 떠났다.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를 거쳐 교토의 도시샤대를 다녔고 송몽규는 교토제대에 적을 두었다. 둘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차례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광복 후 만주에 남은 동포들은 1952년 중국 국적을 얻고 나서도 우리말과 전통 풍속을 꿋꿋이 지키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이들이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반세기가 지난 1992년 한중수교 이후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가 급속히 얼어붙으면서 반중 정서가 확산하고 있다. 귀환 조선족을 보는 우리의 눈길도 차가워졌다. 이런 추세는 현 정부 들어 심해지다가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맞아 혐중 감정을 자극하는 온갖 괴담이 떠돌고 정치권도 이를 부추긴다. 한중관계는 물론이고 중국에 사는 동포와 재외국민에게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2018년 개봉한 조선족 3세 장률 감독의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는 조선족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편견과 이중적 태도가 잘 드러난다. 주인공 윤영(박해일)의 아버지(동방우)는 조선족 가사도우미(김희정)를 빨갱이라고 비난한다. 윤영은 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다가 윤동주 친척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서는 손을 부여잡고 반색하며 호감을 표시한다.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그가 중국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을 기억하고 조선족이 그의 이웃이자 친척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가 중국을 대하는 마음이 좀 누그러지고 조선족을 향한 시선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다.(3)
■ 조선, 500년 봉건시대를 종언하고 거친 근대로 가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2023. 4. 26. 03:03
341. 근대로 가는 길목⑥/끝: 을사조약과 김구 이상설 이승만

* 유튜브 https://youtu.be/WoYjzka26nQ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풍경1: 1904년까지 집행된 참수형
1898년 7월 8일 2대 동학교주 최시형이 처형됐다. 수감 생활을 했던 곳은 서울 서소문감옥서였고 처형된 곳은 종로3가에 있던 고등법원 교형장이었다. 처형 방식은 교수형이었다.(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서소문 옥중 생활과 처형 과정’, 동학학보 38호, 동학학회, 2016)
6개월 뒤인 1899년 1월 9일 입헌군주정을 주장한 만민공동회 사건에 연루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돼 서소문감옥서에 수감됐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 퇴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돌린 혐의로 체포된 이승만도 끼여 있었다. 며칠 뒤 이승만은 공범들과 함께 탈옥했다가 체포돼 재수감됐다. 종로에 신설된 한성감옥서로 이감된 이승만은 7월 10일 탈옥 및 상해죄로 태형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평리원 재판장은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였다. 이승만에 따르면 “정적(政敵)인 홍종우가 7개월 동안 쓰고 있던 형틀을 제거해 주고 생명을 살리려고 온갖 힘을 써줬다. 야릇한 인생의 역전이었다.”(이정식,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부록, ‘청년 이승만 자서전’, 권기붕 역, 동아일보사, 2002, p263)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사람들. 왼쪽 위부터 이승만, 이승인(이상재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아버지를 대신한 소년수. 아래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이정식. /이승만기념관
그가 한성감옥에 수감돼 있던 1904년 3월 15일 오후 10시 대한제국 마지막에서 두번째 참형(斬刑)이 집행됐다. 이날 참수된 죄인은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된 유동근이라는 인물이었다.(1904년 3월 15일 ‘고종실록’, ‘사법품보(司法稟報)’ 乙 43권) 마지막 참형은 1905년 5월 29일 역시 국사범 김형집에게 집행됐다.(1905년 5월 29일 ‘고종실록’. ‘황성신문’은 고종 윤허 전인 4월 25일 집행으로 보도했다) 참형은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형(身首異處·신수이처)’이다.(‘대명률강해’ 오형지도) 그 잔혹함 때문에 1895년 1월 갑오개혁 정부는 참형을 폐지했다. 하지만 1898년 11월 22일 고종은 자기 권력에 대한 도전이 잇따르자 갑오개혁을 무효화하고 역모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해 참형을 부활시켰다.
이러저러한 죄목으로 죄수 목을 베고 장대에 걸어 백성에게 보이는 조치를 ‘효수경중(梟首警衆)’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효수경중은 모두 142회 실시됐다. 이 가운데 53회가 1873년 고종 친정 이후 벌어졌다. 518년 조선왕조에서 벌어진 공개 참수형의 37%가 친정 33년 동안 집행된 것이다.
참수형 집행 5개월 뒤인 1904년 8월 7일, 그 무시무시한 야만의 시대 끝 무렵에 이승만이 특사로 풀려났다. 이승만은 그때까지 받았던 거친 수형 생활을 ‘황제로부터 받은 전화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승만은 고종을 “4200년 한국의 왕통계승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이 많았던 임금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1부2권, 나남, 2008, p234)

풍경2: 매국 혹은 망국 군주 고종
독립협회 간부들이 여전히 수감 중이던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졌다. 2월 17일 고종은 일본군 요청에 따라 창덕궁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사용하도록 칙허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23, 2.(144)창덕궁 일병 병사 사용칙허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제국 영토 어디든 임의로 일본군이 군사용지로 수용할 수 있게 된 협정이다. 2월 28일 고종은 본인과 순종, 영친왕 이름으로 백동화 18만원을 일본군 군자금으로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3월 18일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 친서를 들고 고종을 알현했다. 3월 22일 이토는 “군자금을 받은 답례”라며 일본화 30만엔이 입금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금 통장을 고종에게 헌납했다. 고종은 “거절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이를 수납했다.(영국외무성, Jordan to Lansdowne, 1904.3.31., FO/17/1659; 일본외무성, 앞 책, p297~298, ‘황실 금원 기증 시말’) 그해 5월 6일 일본군은 창덕궁 후원에서 러일전쟁 구련성 전투 승전 기념 파티를 열었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한 해 전인 1903년 8월 15일 이 황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었다. ‘전쟁이 터지면 응당 사람을 시켜 일본 군사 숫자와 거동을 정밀하게 밝혀내 귀국 군대 세력을 돕겠다.’(‘러시아문서 번역집’4(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자료총서), 24.국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 선인, 2011, p63) 이 모순된 상황을 두고, 일본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정세에 해박했던 지식인 윤치호는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1904년 5월 6일 ‘윤치호일기’)
1905년 5월 대마도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격침시켰다. 전쟁은 일본 승리로 끝났다. 그해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일본 손으로 넘어갔다. 강화조약을 주선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체결 1주일 전인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궁중 내탕금이 궁핍한’ 고종에게 이토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상납했다. 상납 형식은 무기명예금증서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 11.1~3(195) 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1월 29일 이토 히로부미가 득의양양하게 귀국했다. 전날 귀국 인사차 입궐한 이토에게 고종이 말했다. “경은 지금 수염이 반백이다. 이는 오직 국사에 매진한 결과가 아닌가. 이제 일본 정치는 후임 정치가에게 맡기고, 남아 있는 검은 수염으로 힘써 짐을 보필해 달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5, 7.(2)한국파견대사 이토의 복명서)
풍경3: 그날 이상설, 김구, 이승만
협상 실무를 담당한 대신들을 처단하고 조약을 취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체결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며 민간에 조약 파기 운동을 요구했다. 11월 23일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상소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 차라리 폐하가 사직을 위해 죽어(決志殉社·결지순사)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말라.”(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이토가 귀국하던 11월 29일 위정척사파 거두 최익현이 “자살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의리를 듣지 못했는가”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숱한 상소에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답했다.(1905년 11월 다수일 ‘고종실록’)
다음날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날, 김구는 종로에 있었다.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 구국기도회가 한창이던 11월 27일 김구와 다른 기독교인들은 집단 상소 투쟁을 결의하고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으로 몰려갔다. 그때 대안문은 현 태평로 한가운데에 있었다. 상소문은 이준(李儁)이 지었다.(김구, ‘백범일지’ 영인본, 한국교과서주식회사, 2016, p180) 상소 투쟁 나흘째인 11월 30일 김구 일행은 공개 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종로로 이동했다.
그때 종로에서 김구가 이상설을 보았다. ‘(민영환 상가에) 조상을 하고 큰길에 나서니 웬 사십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 바람으로 피 묻은 흰 명지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김구, 앞 책, pp. 181, 182)
민영환의 비극적 부고(訃告)에 이상설 또한 거리에 나와 연설을 한 뒤 바위에 머리를 던진 것이다. 연설은 이러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민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일조각, 1998, pp.45, 46)
김구가 남긴 기록에서 이상설에 대한 특별한 소회는 읽히지 않는다. 이상설과 민영환은 황실과 종묘와 사직을 지키던 근황파요 김구는 기독교를 통해 근대(近代)에 눈을 뜨고 있던 새로운 인격이었다. 김구가 살던 황해도를 포함해 조선왕조 내내 차별받던 서북 지역은 기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손세일, 앞 책, p263) 그렇게 1905년 11월 30일 서울 종로 거리 한복판에서 봉건과 근대가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1904년 10월 9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학원’ 개교식이 열렸다. 배재학당 출신 주시경이 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교장에는 두 달 전 출옥한 동문 이승만이 선출됐다. 이승만은 개교 3주 만인 11월 4일 미국으로 떠났다. 이승만에 따르면 “민영환, 한규설 제씨(諸氏)가 상의해 미국에 지원을 청하기로 했다.”(이승만, ‘독립정신(1945)’, 독립정신 중간에 붙이는 말씀’, 정동출판사, 1993, p298) 수중에는 황제 고종이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 편지가 들어 있었다. 공식 사절이 아니라는 뜻이다.(손세일, 앞 책, p235)
1905년 8월 5일 이승만은 뉴욕에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났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작성해준 청원서를 대통령에게 주고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힘을 동반하지 않은 외교 투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루스벨트 정권은 철저하게 일본과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면담 3개월 뒤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체결 11일 뒤인 11월 28일 주대한제국 미국공사 에드윈 모건이 대한제국에 공사관 철수를 통보했다. 외국 공관 가운데 첫 번째였다.(‘사료 고종시대사’ 28, 1905년 11월 28일 미국 공사 모건의 통지)
장구한 500년 세월을 버텼던 조선의 중세(中世)가 그렇게 멸망했다. 이승만은 이후 대학에서 공부와 외교 활동을 병행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까지 김구는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몰두했다.(김구, 앞 책, p182)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이어 1907년 대안문 앞 상소 투쟁을 벌였던 이준과 함께 고종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됐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5년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당수는 광무제 고종을 추대했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고종은 1919년 죽었다.




홍영식과 김옥균과 김홍집과 어윤중 같은, 새 시대를 열망하던 인물들은 거칠게 닥쳐오는 근대를 보지 못하고 처형됐다. 이제 전혀 새로운 주인공이 새로운 나라, 근대 대한민국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근대로 가는 길목’ 끝>(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50420180930670
(2) https://v.daum.net/v/20171226073011312
(3) https://v.daum.net/v/20250210072218293
(4) https://v.daum.net/v/20230426030340125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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