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9) 1909년 대한인국민회 본문

■ '대한인국민회' 미국 내 한국 임시정부 기능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2015. 12. 24. 09:53

상하이 임시정부 기틀 마련…뉴욕한인교회 발굴 사료 눈길
중국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었다면 미국엔 대한인국민회가 있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독립운동단체였다. 상하이 임시정부보다도 빨리 설립된 이 단체는 한반도가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미국 내에서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벌이며 외교와 행정 업무를 하는 등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맡았던 사실이 23일 뉴욕한인교회 사료 발굴을 통해 처음 밝혀졌다.
미국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의 연합으로 창설되었던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동보국회와도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는 확대회의를 통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상항(샌프란시스코)지방총회, 하와이지방총회, 만주리아지방총회 서백리아(시베리아)지방총회를 샌프란시스코에 조직함으로써 조직의 범위를 넓혔다.
뉴욕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혹은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이름으로 활동한 이 단체는 한국 최초의 세계적인 조직이었다. 1915년, 신한민보 이대위 목사가 한글 식자기를 발명한 것을 계기로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간행하여 일제에 의해 억압된 민족 언론을 되살리는 동시에, 언론을 통해 항일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국 정부로부터 국권을 잃은 한국의 '대사관'에 준하는 예우와 대표성을 인정받았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미 국무부와 캘리포니아주 정부로부터 자치단체의 자격과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한일 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던 많은 우국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대한국민회의 보증만으로 망명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하고 영주권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1919년 3월1일 본국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각 지방의 대표들이 3월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동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안창호를 상하이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하고, 김호는 미 서부 지역을 순회하여 본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게 하여 모금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해 12월 국민회가 모집한 독립자금은 8만8013달러로 집계되었는데, 특히 국민회에서 보내온 2만5000달러를 상하이의 프랑스조계 마장로 보강리에 전셋집을 얻어 임시정부 청사로 쓰기로 하는 등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기 기틀을 마련하였다.
미주 한인들을 위한 모국어 교육에도 나섰다. 1915년에는 클래어몬트 한인국어학교(학생양성소)를 발전시켜, 한인 2세에게 잊혀져 가는 모국어를 교육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계승·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17년 1월 대한인국민회 동지들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농업경영에 착수하여 민족기업을 일으키는 한편, 국제무역에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1927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이밖에 소년병학교와 숭무학교, 국민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사관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기타 외교 활동으로는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되는 '소약소국동맹회'에 박용만을 대표로 참석케 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했다.(1)
■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제87주기 추모식 10일 개최
대한민국 자주독립을 위한 계몽운동에 헌신한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제87주기 추모식이 10일 서울 강남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 열린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개최되는 추모식에는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김재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한다.

1878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됐다.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창립, 초대 회장으로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 후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등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안창호 선생을 내무총장에 선임하자 상해로 건너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했다. 이후 연통제를 실시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중병이 들어 보석으로 출옥했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8년 3월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2)
■ 안창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1)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4. 12. 27. 15:42
트럼프 주의로 상징되는 격동을 겪고 있는 미국. 그 뿌리를 찾아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2024년 말 두 달간 2만9000㎞를 달려 답사한 ‘미국사 뒤집어보기’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리버사이드. 미국 남캘리포니아의 중심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으로 100㎞쯤 떨어진 작은 도시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찾자마자 2시간을 달려 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중심가에는 아프리카계 민권운동의 대부인 마틴 루서 킹, 멕시코계 노동운동의 대부인 세사르 차베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길 건너편에도 비폭력저항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인도의 간디 동상이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이들 운동가 사이에 친숙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반갑게도 한글이 보였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 동상의 주인공은 안창호(1878~1938)였다. 우리 독립운동가가 킹 목사, 차베스, 간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한 말의 격동 속에 ‘민족 대이주’, ‘코리아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그중 한 곳이 미국이다. 1903년 1월 13일 인천에서 갤릭호에 몸을 실은 121명의 젊은이가 사탕수수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첫 미국 이민이다. ‘기회의 땅’ 미국을 찾는 한인은 계속 늘어나 미국 내 한인은 미국 인구국이 집계한 합법적 인구만 2017년 기준 19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서울특별시 나성구’라는 별명을 가진 로스앤젤레스에는 23만명이 살고 있고, 거대한 코리아타운이 있다. 이보다 앞서 최초의 코리아타운은 로스앤젤레스가 아니고 리버사이드에 세워졌고, 이를 주도한 사람이 독립운동가 안창호였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도산은 1894년 서울로 이사해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다. 1902년 결혼한 도산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우여곡절 끝에 오렌지농장으로 돈이 넘쳐나고 일자리가 많았던 리버사이드에 왔다. 여기에 정착한 그는 이곳에 많은 한인을 불러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본 영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한인들을 불러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정직이 우리의 무기다.” 도산은 일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일본 노무 관리관의 훼방에도 한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는 길은 성실하게 일해 백인농장주들의 신임을 얻는 것으로 판단했다. “오렌지 하나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그는 솔선수범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다른 한인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말을 따랐다.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백인농장주들은 한인을 대거 고용하기 시작했고, 한인 노동자들을 전담할 한인노동국도 만들었다.


작업복 차림으로 오렌지를 가득 따는 도산의 사진이 누구보다 솔선수범한 그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옆에는 오렌지를 따는 그의 모습 등을 새긴 동판이 있다. “아니 왜 오렌지 따는 작업복 차림의 안창호가 아니라 양복을 입은 동상을 만들었지요?” 한인 미주 이민사와 안창호 연구의 권위자로 공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리버사이드의 장태한 교수의 답변이 충격적이다. “원래 작업복으로 하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양복으로 하라고 해서.” 한심한 관료주의라니! 다행인 것은 장 교수 주도로 미주교포들이 모금해 동상을 오렌지 따는 안창호 동상으로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번 답사를 위해 사전 조사를 하기 전에는 ‘실력양성론’ 등의 문제점 등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창호를 아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전 조사와 답사를 통해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됐다. 과연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안창호처럼 직접 노동자로 일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운동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노동 현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조직했던 조선공산당 핵심 등 좌파운동가들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교민들이 낸 애국헌금을 가지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는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부 대부분도 안창호와는 달랐다.
“여기가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파차파 캠프입니다.” 장 교수는 나를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으로부터 2㎞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안내했다. 세월이 100년 이상 지난 만큼 코리아타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리버사이드시 문화관심장소 파차파 캠프’라는 팻말이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팻말을 보고 있자니 조국을 잃고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이곳에 와 자리 잡아 고된 농장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오렌지 따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것이라 생각했고, 어렵게 번 돈을 조국 독립운동에 기꺼이 내놓았던 옛 선조들의 체취가 느껴져 울컥했다.

이곳은 원래 유니온 퍼시픽 철도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일종의 판잣집 동네로 철도에 가까워 매우 시끄러웠고, 1층 목조건물이 20여 채 있었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파차파캠프가 가족중심의 공동체였으며 자치와 민주주의 교육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술, 도박, 아편 금지’ 등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내게 했고, 자치를 했다. “이 캠프는 ‘민주주의 한인공동체’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공화주의의 실험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 교수의 평가다.

‘김태석의 묘, 1898-1925’. 장 교수가 안내한 가까운 공동묘지에도 낯익은 한글이 나타났다. 리버사이드 이민 1세대의 묘지였다. 격동의 19세기 말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어린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 리버사이드로 온 그는 오렌지 농장에서 고생하다가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이곳 먼 이국땅에 묻히고 만 것이다.
리버사이드 코리아타운이라는 첫 답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떠오른 것이 비극적인 도산의 이후 삶이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설립 움직임이 생기자 가족들은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성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4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린 것은 ‘빨갱이’, 정확히 표현해 ‘볼쉐비스트’라는 투서였다. 그는 결국 추방당하고 만다. 이후 상하이에서 일제에 잡혀 와 투옥됐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세상을 떠나야 했다.
투서의 배후와 관련해 연구자들은 이승만이 미주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창호 등을 평소 모함했다는 사실, 이승만이 평소 안창호·박용만·김규식을 공산주의자라고 미국 정보기관에 통고했다고 자랑하곤 했다는, 이승만과 함께 활동했던 한 구미위원회 위원의 증언에 주목한다. 한국 정치의 비극인 ‘정적 빨갱이 만들기의 원조’가 바로 미국이고, 안창호가 그 첫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나는 씁쓸하게 리버사이드를 떠났다.(3)
미국 친일외교관 스티븐스 처단한 장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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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인환 의사 |
ⓒ 자료사진 |
장인환(張仁煥, 1876~1930)은 평안도 평양부 대동강면 선교리에서 아버지 장영구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잡화점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자립하게 되었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폐업하고 말았다.
18세에 평양부 중앙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학으로 숭실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04년 11월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1년 여 일하며 돈을 모아 미국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철도공사가 한창이어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후 식당에서도 일하였다.
아시아인들의 급격한 이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주민들의 반감이 심해지면서 알래스카로 이주했다가 1년여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1907년 교포들의 모임인 대동보국회에 참여하면서 국내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고국이 위기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1908년 3월 20일) 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무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알았다.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는 워싱턴 DC 컬럼비안대학교와 하워드대학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졸업 후 미국 국무부의 외교관이 되고 1873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 미국공사관 서기로 근무하면서 일본과 인연을 맺었다. 한 때 주일 대리공사를 지내기도 하다가 미국 워싱턴 소재 일본 외무성의 촉탁,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면서 1885년 조선에 파견되어 한성조약을 지원했다. 일본 황실로부터 훈고등서보장을 받은 골수 친일파다.
고종은 일본이 추천한 그를 외무고문으로 위촉했다. 외교에 관한 업무 일체를 그의 의견을 들어 실시한다는 제1차 한일협약에 따른 조처였다. 월급을 조선에서 받은 스티븐스는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의 청에 따라 미국 언론을 상대로 극도의 친일과 반한 발언을 쏟아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 어려운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 일본 간의 조약체결은 정당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 조선은 일본의 도움을 받는 혜택을 얻었다."
<샌프란시스코 콜>지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필리핀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대한제국에서 한 일을 위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관료들은 그렇지 않은 반면에 농민들은 일본을 환영하였으며 그런 관료들 조차도 자기 나라의 유일한 희망을 옛 제도의 개혁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각 매체를 통해 조선을 무지한 민족이라 매도하고 일본을 찬양했다. 현지의 교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미주 한인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1908년 3월 22일 회합을 갖고 최정익·정재관 등 4인 대표를 스티븐스에게 보내 신문보도의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오만방자하게 모독적 언사를 계속했다. 정재관이 스티븐스를 거꾸러뜨리고 일행은 의자를 들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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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조양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인환, 전명운 지사의 사진이다. 두 지사는 1908년 3월 22일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처단했다. |
ⓒ 조양회관 |
한인의 두 단체는 대책회의를 열어 방법을 논의했다. 다음날인 3월 23일 오전 9시경 스티븐스가 대륙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오클랜드 폐리부두 선창으로 갈 것이라는 정보였다. 정보는 정확했다. 이 시각 그는 일본총영사 고이케의 안내를 받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자동차에서 내릴 때 전명운이 뛰어나가 총을 쏘았으나 격발되지 않았다. 전명운은 당황하지 않고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구타했다.
체구가 큰 스티븐스가 전명운을 가격하려 드는 순간, 장인환의 권총이 불을 토하였다. 첫 발은 전명운의 가슴에, 두 번째, 세 번째는 스티븐스의 어깨와 하복부에 적중했다. 총을 맞은 전명운은 쓰러지고 스티븐스는 절룩거리며 자신의 차량 쪽으로 걸어 나갔다. 경찰이 달려와 장인환과 전명운을 체포하고 스티븐스는 이틀 후 절명하였다.
장인환은 유치장에서 간수가 "총을 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묻자 "스티븐스는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겼으며 한국인의 원수다. 마땅히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재판에 넘겨졌다.
두 의사의 의거는 한국사회는 물론 미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오클랜드 의거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이듬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으로 이어졌다. 두 의사의 재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한국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7,390 달러가 모아졌다.
법정의 통역으로 경찰서 심문 때부터 수고한 양주삼 전도사 대신 하버드대학에서 유학중인 이승만을 초청했다. 하지만 "1908년 7월 16일에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하고 동 8월 25일 동방으로 갔다." (주석 1)
이승만이 내세운 이유 중 학생신분으로 '시간 관계'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고 치더라도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대목은, 그의 역사인식과 애국심에 적지 않게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어려운 살림의 교포들이 푼푼이 모아 보낸 비용으로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 버린 것이다.
재판은 계속되어 1909년 1월 2일 장인환에게 25년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샌쿠에틴 주립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였다. 변호인단이 세 차례 가석방 청원서를 내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등의 보석 요청이 있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1919년 1월 1일 교도소 측의 가석방으로 10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장인환 의사는 석방되어 감옥에서 배운 세탁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 23년 만에 귀국했으나 요시찰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그해 10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입원 중 1930년 5월 22일 병원에서 투신 절명하였다.
미주 한인사회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사이프러스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5년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추서했다.(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51224095355485
(2) https://v.daum.net/v/20250309105548809
(3) https://v.daum.net/v/20241227154204278
(4) https://v.daum.net/v/20241203152400304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4d3415a
https://namu.wiki/w/%EC%95%88%EC%B0%BD%ED%98%B8
https://v.daum.net/v/20200813160609821
https://v.daum.net/v/20241002103901708
https://v.daum.net/v/2018110911384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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