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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11) 1909년~1915년 13도 의군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11) 1909년~1915년 13도 의군

대야발 2025. 5. 5. 12:28

 

 

 

 

 

 

■ [1919 한겨레] 각지 독립운동가는 왜 연해주에 모였나

한겨레 최하얀기자 2019. 2. 26. 07:16
 

 

의병·지사 대거 망명한 최대 한인 거주지
경술년, 만국에 「병합 무효 선포」 주도
경제조합 변장한 「권업회」로 독립운동
「대한광복군」 망명 정부도 만들었지만
로서아 정부, 건건이 탄압

 
 
의병장 유인석과 홍범도.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각지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로서아(러시아) 원동 연해주로 모여든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지역은 국외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자, 일찍이 일본과 맞선 조선의 의병과 지사들이 망명한 뒤 후사를 도모해온 곳이다. 1914년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로서아와 일본이 동맹함에, 한동안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이 활개를 칠 수 없었다. 그러나 작년에 세계대전이 종전하였고 그 전에는 1917년 2월 로서아의 혁명으로 차르 황제의 제정 로서아가 붕괴되면서 형편이 바뀌었다.

 

 

두만강 넘어 로서아로 한인이 처음 이주한 시기는 1863년이라고 한다. 양강도 혜산시 경흥의 13가구가 연해주 얀치헤(추카노보) 지신허에 정착했는데, 이들을 따라서 함경도와 평안도의 빈궁한 농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주를 시작하였다. 기미년(1919)에 와서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연추(크라스키노), 묵허우(포시예트), 수청(파르티잔스크), 추풍(수이푼), 허발포(하바롭스크), 니항(니콜라옙스크), 소왕령(우수리스크) 등 여러 도시와 농촌에서 한인들이 상부상조하고 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겁박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부터 활개하였다.

국내와 간도에서 활약하던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에 당도해 국내 진공작전을 결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63)씨가 함경도 일대의 포수를 모아 조직한 충의대를 이끌고 중국 훈춘을 거쳐 1906년 연추에 당도하였다.

어려서 연해주로 이주해 로서아 군대에 무기와 소고기를 팔아 흥한 재력가 최재형(59)씨가 이씨의 의병 조직을 지원하였는데 한때 그 규모가 3천∼4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 유인석(77)씨도 연해주로 왔고,

함경남도에서 활약한 의병장 홍범도(51)씨는 간도를 거쳐 1908년 연해주로 건너왔다.

이들은 연해주의 의병들을 통합해 1910년 6월21일 유인석씨를 도총재로 하는 ‘십삼도의군’을 결성하였다.

 

 

1910년 8월23일 연해주의 한인들이 해삼위 한민학교에서 대회를 열어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고 외치고 성명회를 조직한 것은 진정으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외국 신문을 통하여 일본이 곧 한국을 병합할 것을 알게 된 한인 지도자들이 분개해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의 조직을 만들고 세계 만국에 ‘병합 무효’ 선언서를 발한 것이다. 선언서에는 각지 한인 사회 지도자 8624명이 서명해, 불란서(프랑스)어로 적힌 것은 서명자 명단만 112장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를 받은 로서아 정부는 강제로 성명회를 해산시키고 이범윤씨 등 7명을 체포해 멀리 떨어진 이르쿠츠크에 유배하였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 정부도 망각해서는 안 될 터이다. 일본의 눈치를 본 로서아 정부가 건건이 탄압하자, 연해주 한인들은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경제 조합인 것 같은 조직을 구성하였다. 최재형씨가 회장을 하고 홍범도씨가 부회장을 했는데, 명칭과 달리 기실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자치 조직이었다. 나날이 세가 불어 1914년에는 회원이 6405명에 이르렀고, 기관지 <권업신문>과 해삼위 신한촌의 한민학교 등을 만들었으며 1914년 비밀리에 망명정부로서의 대한광복군정부를 만들었지만 탄압당해 해체되었다.(1)

 

 

 

 

■ [나눔의 리더십] 국난에 '붓 대신 칼', 의암 류인석

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2017. 1. 17. 07:08

 

 

대학자·의병장으로 국권회복 등불..실천하는 지식인

 

"한결같은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대대로 피맺힌 원수 왜적을 이겨 없애야 합니다…인석은 다만 죽음을 무릅쓰고 영원히 의병의 깃발을 굳게 잡을 뿐입니다."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1842∼1915)의 순국 100주년 기념 어록비에 새겨진 글이다.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유적지에 '의암 류인석 선생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구한 말 대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던 류인석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붓 대신 칼을 잡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의병 3천여 명을 지휘하는 의병장이 된 의암은 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과 일본 앞잡이가 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본군과 친일 관군의 반격에 일부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으나 중국 요동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산과 들을 누비며 목숨을 걸고 구국 투쟁을 전개했다.

 

원영환 의암학회이사장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조선 말과 대한제국 시기 위대한 유학자로 항일 의병 항쟁을 선구적으로 주도한 의암 류인석(1842∼1915) 선생의 영정. [국립춘천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 인격과 학식 갖춘 '진정한 지식인'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우계에서 태어난 의암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옳은 일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았다.

 

선생은 18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과거장 입구에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가 음식을 사 먹였고, 아이가 고아인 것을 알고는 그 길로 과거시험도 포기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9세에는 마을 사람 소가 그의 논에 들어가 벼를 뜯어 먹자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소를 끌어다가 시원한 곳에 매어뒀다. 소 주인이 미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날이 저물 때까지 소를 끌어가지 못하자 의암은 하인을 시켜 소에게 풀을 먹여서 주인에게 끌어다 줬다.

 

어느 날은 깊은 밤 뜰 앞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훔치려는 도둑이 있었다. 선생은 도둑이 놀라 나무에서 떨어질까 염려해 소리 지르지 않고 주인이 자지 않는다는 인기척을 내어 도둑이 다치지 않고 도망가도록 했다.

이런 일화들은 선생이 얼마나 높은 인격과 학식을 갖춘 선비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인정 많고 넓은 아량과 용기를 지닌 그는 매사에 남보다 앞서 실천하는 지식인 그 자체였다는 평가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큰 활약을 벌였던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의병장의 친필 유묵. 당시 류인석 의병장의 강한 민족의식을 읽을 수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 54세에 의병대장 취임…'신출귀몰' 위대한 장군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의암은 제자들과 친한 사람들에게 대처방안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 원수를 소탕하거나, 해외로 망명해 선비로서 전통문화를 지키거나, 자결해 목숨을 나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54세 나이에 호좌의병대장에 취임하며 문인에서 무인으로 변신한 그는 의병대장이 된 지 하루 만에 일본 첩자를 찾아내 처형했다.

 

이후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동시에 보는 신통력을 가진 위대한 장군'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의병 3천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영월과 충북 제천, 청풍, 단양 등을 점령하며 친일 지방관들을 처형했다.

친일 관료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 관아에 쌓은 곡식과 재물은 의병들에게 나눠줬다.

 

 

구한말 위정척사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화서학파의 본거지로 의병운동을 이끌었던 강원 춘천시 가정리 의암 류인석 선생의 고향에 조성된 유적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후 그는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존화양이와 위정척사 사상을 민족정신으로 승화하는 강회 활동과 향약 운동을 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 힘썼다.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도 류인석이 연설하면 수백 명에서 1천여 명이 운집할 정도로 대학자이자 의병장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선생은 평생 주창하고 실천한 애국애족 이념과 학문, 사상 체계를 집대성하기 위해 1915년 망명지인 중국 서간도 관전현 방취구(芳翠溝)에서 최후 저술인 '도모편'을 저술하다 74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전파한 나라 사랑 정신이 어디까지 스며들었는지는 백범 김구의 고유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백범은 1946년 8월 17일 류인석의 묘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옛 고향을 찾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아니하오리까, 향불을 피우며 무한한 심사를 하소연하오니 영령께서는 앞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했다.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는 고유문을 읊은 김구가 류인석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대한민국은 그를 기리고 선양하고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묘역을 정화해 유적지로 만들고 문화재로 지정했다.

 

 

2016년 6월 1일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유적지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암 류인석 선생의 순국 101주년을 맞아 '제32회 의암제'가 열려 참석인사들이 제례행사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1년 창립된 의암학회는 류인석의 학문과 사상, 항일 투쟁사를 연구해 학술회를 개최하고 책을 펴내는 등 선양사업을 벌이고 있다.

 

원영환 의암학회이사장은 "의병 해산 뒤에도 평생 일관되게 끝까지 싸웠던 분은 류인석 선생이 유일하다"며 "그의 족적, 정신, 항일투쟁은 독립운동으로까지 흘러들어 갔고, 우리는 지금도 그의 삶과 정신을 깊이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2)

 

 

 

<자료출처>

 

 

(1) [1919 한겨레] 각지 독립운동가는 왜 연해주에 모였나 (daum.net)

 

 

(2) [나눔의 리더십] 국난에 '붓 대신 칼', 의암 류인석 (daum.net)

 

 

 

<참고자료>

 

 

13도 의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유인석 - Daum 백과

 

 

의병장 류인석 활동 담긴 ‘한말 의병 관련 문서’ 최초 공개 (daum.net)

 

 

류인석 선생, 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 배후 주장 재조명 (daum.net)

 

 

이범윤 - Daum 백과

 

 

마침내 우뚝 선 '고려인의 자긍심'[이희용의 세계시민]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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