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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8) 1911년 경학사(耕學社) → 1912년 부민단(扶民團) → 1919년 한족회(韓族會)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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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8) 1911년 경학사(耕學社) → 1912년 부민단(扶民團) → 1919년 한족회(韓族會)

대야발 2025. 5. 3. 18:44

 

 

 

 

 

 

 

■ 만주에서 자치기관 경학사 설립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3. 5. 20. 17:24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8] <경학사 취지서> 를 발표하여 조국광복의 방략을 내외에 반포하였다

 

 

  경학사 창립군중대회가 열렸던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 현재 모습
ⓒ 박도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려는 것은 지리적으로 국내와 가깝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고대로부터 한민족의 강역이었다는 '고토(古土)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만주는 단군 성조의 영토이며 고구려의 강역이라, 비록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복식과 언어가 같지는 않지만 선조는 동일종족인즉, 이역(異域)이라고 할 수 없다."(<석주유고>)

 

 

그러나 현실은 막막했다.

예상보다 겨울 추위가 혹독하고 농지는 비좁았다. 토착민들의 외래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상룡과 일가는 이같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림터를 일궈야 했다. 

 

 

이즈음 신민회의 멤버인 이회영 6형제가 역시 솔가하여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에 자리잡았다. 또한 같은 안동출신 김동삼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큰 인물들인 이동녕·김창환·여준·주진수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들은 1911년 4월 삼원보 대고산에서 이주동포 300여 명이 모여 노천대회를 열었다. 국내에서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 속했던 이들이어서 이주 동포들이 함께 참여하는 일종의 군중대회(노천대회)를 열고 향후 과제를 논의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서간도지역 최초의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 설립에 합의한다. 경학사는 이후 독립운동 단체의 모태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논의한 내용은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한 생계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할 것 등이 합의되었다. 

 

 

5개 항에 뜻을 모은 이날 노천대회는 이어서 경학사 사장에는 이상룡을 추대하고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을 선출하였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농사를 지어 주민들의 생계를 도모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곳이었다. 다만 '밤의 공부' 중에는 야간 보행을 비롯하여 군사훈련이 따랐다는 점이 달랐다. 낮에 군사교련을 하다가는 중국 측의 공연한 오해를 살 것이기에 야간을 택해 실시한 것이다.

 

경학사를 설립하면서 <경학사 취지서>를 발표하여 조국광복의 방략을 내외에 반포하였다. 취지서는 사장인 이상룡이 집필한 것이다.  

 

 

<경학사 취지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경술국치 이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민족은 문화민족이며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피의 항쟁을 전개하여 물리치고 오늘에 이르렀음을 강조하였다.

 

둘째는 한민족이 나라를 잃어 생존의 터전이 없어졌음을 한탄하고 그 책임은 민족 개개인에게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절박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결과 같은 소극적인 방법은 침략자 일제에게 유리함을 줄 뿐임으로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듯이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 방략은 삼태기로 흙을 날라 태산을 만들 듯이 점진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셋째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와신상담해 힘을 길러 독립전선에 앞장 설 것을 주장하였다.

 

넷째는 재만 한인들이 이와 같은 정신으로 경학사를 중심으로 단결하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경학사 취지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뜻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지만, 비록 영웅이라 할지라도 팔짱끼고 가만히 있으면 상제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산하를 향해 슬퍼 노래하면서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장강에 임해 맹세하기를 국가가 깨끗하지 않으면 고국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언어가 다르다고 하나 그래도 동족들이니 우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사정을 다 말하기 어렵고 때로는 동병상련하지 못하는 바도 있으나 희망을 양식으로 삼으면 음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며, 곤란을 초석으로 삼으면 마침내 집을 건축할 것이다.

이에 남만주 은양보(恩養堡)에 여러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을 합해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니 이름을 경학사(耕學社)라 한다. 경(耕)이라 하는 것은 다만 인명을 보전시켜 줄 뿐만 아니라 민지를 개발하는 것이기에 경(耕)과 공(工)과 상(商)은 비록 다르지만은 통틀어서 실업계의 부속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체력과 덕력을 겸비케 함으로써 스스로 가르침의 과조(科條)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앞길이 너무 멀다고 근심하지 말지어다. 한걸음이 끝내는 만리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규모가 이제 만들어짐을 슬퍼하지 말 것이니 삼태기의 흙이 쌓여 태산이 되는 것이다.(<석주유고>)(1)

 

 

 

부여 옛 땅에 후예들이 <부민단> 창설

김삼웅2023. 5. 24. 15:42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12] 만주의 허허벌판은 흰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하얗게 덮여갔다

 

 

경술국치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옮겨왔다. 왜적의 종살이를 거부하는 우국충정의 이주민들이 있었고, 그냥 먹고살기 위해 떠나온 유랑민들도 있었다. 다달이 다르게 이주동포 숫자가 늘어나면서 곳곳에 한인촌이 생겼다. 허은 여사의 기록이다. 

 

만주의 허허벌판은 이 때부터 흰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하얗게 덮여 갔다. 멀리서 서로 쳐다만 봐도 든든했다. 이렇게 되자 애국지사들이 한인자치단체를 만들어 엄중한 규율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을 때까지 만주땅에다 한 개의 작은 나라를 만들어 운영한 셈이었다. 


 

  중국 지린성 광화 합니하의 옛 신흥무관학교 옛 터, 지금은 벼논과 포도밭으로 변해 있었다.
ⓒ 박도

 
소학교는 거리따라 많이 세우고 중학교는 드문드문 세웠다. 자연히 집과 거리가 먼 사람이 많았지. 집이 멀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애국지사들이 각 집에 나누어 맡아 하숙을 시켰다. 우리나라 사람 자식 가르치는 일에 대한 열성은 그때도 여전해서 여기저기에 크고작은 교육기관들이 많이 생겨났다. 어쨌든 많이 배워야 사람된다고 했다.

 

서간도에만 해도 학교가 200여 개는 된다고 들었다. 북간도에도 서간도 못지않게 학교들이 세워졌다고들 했다.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들었다. 동홍중학교, 대성중학교 등이 들어본 이름들이다. (주석 3)

 

 

이상룡과 한인지도자들은 이주한인이 많아지면서 풍화시엔(通化縣)을 중심으로 서간도 일대에 본격적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서둘렀다. 경학사가 해체된 이후 한인사회의 자치와 산업의 향상을 지도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2년 가을 부민단(扶民団)이 조직되었다.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이 담겼다. 이와 다른 의미의 기록도 있다.

 

'부민단'을 처음 창설하기는 성산어른[(性山)은 허로(許魯)의 호, 왕산 허위의 동생, 의병투쟁에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 중이었다. - 필자 주]이 하셨다. 신흥무관학교의 창립 핵심인물인 석주어른과 이회영 형제분이 만든 '경학사'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조직을 더 강화하여 새 단체를 만들려고 할 때였다. 

 

성산할아버지가 식구들 다 있는 자리에서 "새 단체 이름을 뭘로 하면 좋을까" 하셨다. 옆에 계시던 왕산할머니께서, 그러니까 성산어른의 제수씨가

 

"부민단이 어떻겠는가?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으로."

 

라고 하자 다들 좋다고 하여 그 이름이 지어졌다. 2대 단장은 석주어른이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석주어른께 들으니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도 의미 깊은데다 만주땅에 세운 부여(扶餘) 민족, 즉 우리 민족의 단체라는 의미도 된다고 하셨다. (주석 4)

 

 

  합니하 옛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오늘의 광화 모습
ⓒ 박도

 

 

부민단은 본부를 통화시엔 합니하(哈泥河)에 두고 활동하였다.

초대 총장은 의병장 허위(許蔿)의 형인 허혁(許赫)이 맡았으며, 곧 이어서 이상룡이 선임되었다. 부민단에는 서무·법무·검무(檢務)·학무·재무 등의 부서가 있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조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단장 1인과 각 부서 주임을 두었다. 지방에는 천가(千家) 및 큰 촌락에 조직되며 천가장(千家長) 1인을 두었다. 구(區)에는 약 1백가(百家)로 구단(區團)을 설치하여 구장(區長) 혹은 백가장(百家長) 1인을 두었다. 그리고 패(牌)에는 10가호(家戶)에 패장(牌長), 혹은 십가장(十家長)을 두었다.

 

1914년 류허시엔 부민단의 경우 현(縣) 내를 4개구로 나누어 제1구 부민단은 대사탄(大沙灘)에, 제2구 부민단은 대화사(大花斜)에, 제3구 부민단은 대두자구(大肚子溝)에 그 소재지를 두었다. 한편 제4구 부민단의 경우 존재는 확인할 수 있으나 소재지는 알 수 없다.(중략)

 

부민단의 표면적인 사업은 재만 한인의 자치를 담당하고 재만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을 재결(載決)하는 것과 재만 동포들을 대신하여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맡아서 처리해 주는 것, 재만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재만 한인의 토대 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한편 부민단에서는 신흥강습소를 통하여 독립군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흥강습소의 이러한 활동은 그 지역 토민들의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부민단에서는 "나의 동포 잃었으니 이웃동포 내 동포요", "나의 형제 잃었으니 이웃 형제 내 형제라"라고 하는 표어를 내걸고 토민들에게 양해를 구하였다. (주석 5)(2)  

주석
3> 허은, 앞의 책, 67쪽.
4> 앞의 책, 82쪽.
5> 박환, <부민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3)>, 626~627쪽.

 

 

 

 

■ 한족회와 군정부조직 책임 맡아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3. 6. 9. 15:18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28] 이상룡을 대표로 하는 한족회의 중앙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 이항증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뒤이어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 그리고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이 서울에서 선포되었다. 병탄 9년 만에 그야말로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항일 자주독립의 만세시위는 국내뿐만이 아니었다. 한인이 사는 해외에서도 전개되었다. 만주 서간도의 중심지역인 삼원포 통화현에서는 3월 12일, 북간도의 중심지역인 용정에서는 13일, 훈춘에서는 20일, 봉천에서는 21일 각각 시위가 있었으며, 그밖에도 교민이 사는 중국 여러 곳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 

 

 

3.1혁명 후 서간도에는 많은 한인들이 국경을 넘어왔다. 어느 때보다 조국독립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상룡이 노심초사 기다리던 때가 오고 있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렀다. 

 

 

이상룡은 서간도 각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을 삼원포로 불렀다. 이들은 며칠 동안을 협의하고 숙고한 끝에 각 단체를 해체하고 하나의 대단위 단체를 만들어 그를 중심으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를 이끌어가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탄생한 것이 한족회(韓族會)였다.

 

 

한족회는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두고 중앙에는 총장을, 지방에는 총관을 임명하여 단체를 이끌어 가기로 하였다. 중앙에는 서무·외무·법무·학무·재무·군무 등 조직을 분담해 효율적으로 이끌어 갈 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유하·통화·환인·홍경·집안·임강·해룡 등 한인이 살고 있는 서간도 전 지역에 지방조직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규모에 따라 구(區), 소분구(小分區) 등을 만들어 관리하기로 하였다. (주석 1)

 

 

본부를 삼원포에 둔 한족회는 과거 이상룡이 이끌었던 부민단·자신계 등의 조직을 통합·흡수하여 서간도지역의 거대한 한인 자치기구로 출발했다. 신흥학교 출신들도 다수 참여함으로써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이주한인사회의 결속을 위해 기관지 <한족신보>를 발행했다. 얼마 후 <새벽달>로 제호를 바꾸었다.

 

 

이상룡을 대표로 하는 한족회의 중앙부서는 다음과 같다.

 중앙총장 : 이탁
 중앙위원회위원 : 이상룡·박건·주진수·왕삼덕·정무·윤복단·김정재·이휘림·김창무·안동식
 총무사장 : 김동삼
 총무차장 : 김자순
 학무사장 : 양규열    
 학무차장 : 윤기섭
 외무사장 : 곽문      
 외교원 : 허식
 사판사장 : 이진산    
 사판차장 : 남정섭
 검무사장 : 최명수    
 검무차장 : 안동원
 검독 : 성인수        
 검찰 : 안병모
 한족신보 주필 : 이시열 (주석 2)

 

 

이상룡은 이어서 1919년 4월 초순 고산자에서 기존 단체들을 바탕으로 준정부 수준의 군정부(軍政府)를 발족했다. 국내외에서 항일의기가 흘러넘치는 시기에 무장전쟁의 전위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영향은 곧 만주지역에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초순에는 류허시엔 고산자에서 독립전쟁을 실현할 군사정부인 군정부(軍政府)가 이상룡 등에 의하여 기존단체를 바탕으로 하여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군정부는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정부였으며, 따라서 군정부에서는 군대를 편성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할 계획을 수립함은 물론,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체계도 완비하였다.

 

그 결과 이상룡이 최고 책임자인 총재에 임명되었고, 여준(呂準)이 부총재, 그리고 이탁 (李沰)이 참모장을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군정부는 재만 동포들의 자치기관을 설치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이 기관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주석 3)(3)

주석
1> 채영국, <서간도 독립정신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 140~141쪽.
2> 김병기, <만주지역 통합운동의 주역 김동삼>, 86쪽, 독립기념관, 2012.
3> 박환, <서로군정서>, <한국독립운동사사전(5)>, 83쪽, 독립기념관, 200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30520172401501

 

 

(2) https://v.daum.net/v/20230524154203357

 

 

(3) https://v.daum.net/v/20230609151806420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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