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4)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사 의거 본문

■ 일제수뇌폭살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36]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선구자

25세의 대한 청년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뤼순공원)에서 열린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 일제 고위 장성 등 여럿이 폭사하거나 부상 당했다.
의거의 주인공은 바로 윤봉길의사이다. 이 의거는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주고, 특히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 총통이 "5억 중국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윤봉길 의거가 없었다면 중국 내의 우리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들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 의사는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선구자이다.
윤봉길(尹奉吉)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 178번지의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큰아버지 윤경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11세가 되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서울에서 3·1혁명이 시작되고 만세 시위가 지방으로 번지자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윤봉길은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며 학교의 문을 박차고 나와 자진 퇴학했다. 어릴 때부터 대단히 심지가 굳고 용기가 있었다.
집안 어른들의 설득으로 1년여 뒤 서당에 다니기로 하고 마을에서 학식이 높은 최병대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 봄에는 마을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서치의숙(학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의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서 다양한 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5년간의 서치의숙 생활을 마치고,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명성이 높은 당진군 면천의 유학자 박생원과, 당고모부가 되는 신양의 차 선생을 차례로 마을로 모셔와 공부했다.

윤봉길은 19세 때부터 직접 농민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당을 차리고 마을 주민들의 문맹 타파에 나섰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갑·을 두 반으로 나누어 한글과 역사·산술, 과학·농업지식 등을 가르쳤다. 독서회를 열어 많은 사람이 책을 읽도록 하고, 이웃 마을을 순회하면서 월례 강연회도 열었다.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독서회와 강연회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20세 때에는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직접 지었다.
윤봉길이 국내에서 농촌계몽 활동을 접고 망명 길에 오른 것은 1930년 3월, 23세 때이다. 길을 떠나면서 "대장부가 집을 떠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글을 남겼다. 윤봉길은 평안도 선천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한 달 가량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만주 일대를 헤매다가 다롄을 거쳐 칭다오에 머물면서 이듬해 상반기까지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세탁소의 경리로 일하면서 중국의 정세를 살폈다.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31년 5월 8일이다. 도착 즉시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찾아 그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생계를 위해서 동포가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하면서 '한인공우 친목회'를 조직했다. 노동쟁의를 도모하고 일제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1932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래 틈틈이 거리를 익히고 각종 정보를 취득한 다음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상하이지역 한인 교포단장인 김구를 찾아가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김구는 윤봉길을 만나 그의 인품과 애국심을 알아보고 "노소의 차이가 있을 뿐 민족혁명 대업을 위한 다시없는 큰 동지를 얻었다"며 그를 한인애국단에 가입시켰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결사대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윤봉길이 가입하기 전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이봉창도 한인애국단원이었다.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더욱 의기충천했다. 김구가 별도로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은 외적을 상대로 의열투쟁이 자칫 임시정부의 위상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
윤봉길은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에 중국군 제19로군 정보국장 겸 병공창 주임인 한국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주선으로 일본군 병기창 폭파계획에도 참여했다.
중국 신문에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실렸다. 윤봉길은 하늘이 준 기회로 생각하면서, 다시 임시정부로 김구를 찾아가 거사 계획을 밝혔다. 김구는 비밀조직 참모격인 김홍일에게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성능 좋은 폭탄 제조를 지시했다. 일제는 모든 행사장에 참석하는 일본인에게 반드시 물통과 도시락을 지참토록 했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이봉창이 일왕이 탄 마차에 던진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탓에 일왕을 죽이지 못한 것을 개탄한 김구와 김홍일은 상하이 중국군 비밀 공병창에서 성능이 뛰어난 폭탄을 만들어 성능실험까지 마쳤다.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와 만나 세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김구의 비밀 아지트인 상하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거행했다. 윤봉길은 태극기 앞에서 폭탄과 권총을 들고 다음과 같이 선서한다.
"나는 적성(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다음날 태연한 모습으로 행사장을 돌아보고 와서 짧은 자서전과 <거사가>, <조국의 청년제국에게>그리고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썼다.
마침내 운명의 날 4월 29일이 밝았다. 윤봉길은 '최후의 만찬'이 아닌 '최후의 아침'을 김구와 함께 먹고, 김구가 차고 있던 낡은 시계와 자신의 새 시계를 바꿔찼다. 자기의 시계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오전 11시 50분(한국시간 12시 40분경), 일본군의 천장절과 전승 축하행사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은 연단 중앙을 향해 폭탄을 힘차게 던졌다. 순간, 폭음이 터지고 참석한 일제의 요인들이 추풍낙엽처럼 거꾸러졌다. 시라카와 대장, 카와바타 상하이 거류 일본인 민단장은 폭사하고, 노무라·우에타 중장, 시게미쓰 주 상하이 공사, 무라이 상하이 총영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폭탄이 적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순간,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다.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윤봉길의사는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공병 작업장에서 일본군의 총살형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의 지시를 받은 박열·이강훈이 주선하여 1946년 6월 30일 고국으로 돌아와 용산의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짧은 생애지만 보통사람의 500년보다 훨씬 값진 생애였다. 윤 의사의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1)
■ 흐드러진 매화가 쓸쓸한, 상하이 윤봉길 의사 기념관 [MZ가 바라본 중국]

중국에는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하이를 시작으로 충칭, 항저우, 하얼빈, 진장, 창사, 류저우 등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꼽힌다.
상하이는 중국 정부와 공동 항일 전선을 강화한 요충지로 황푸구 신천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를 진행한 목은당(沐恩堂·모이당) 등 독립운동 발자취를 시 중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훙커우 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일본 주요 인사를 제거한 장소로, 대중들에겐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만들어 의거를 감행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윤봉길 의사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농촌에서 야학, 독서회 등을 열면서 계몽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농촌 계몽 운동의 한계를 느껴 활동 범위를 중국으로 옮겼고 칭다오를 거쳐 1931년 5월 상하이로 이동했다. 스물여섯 살에 나이로 한인 애국단의 일원으로 훙커우 공원 의거를 지원했다.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사오싱, 항저우, 류저우 등으로 거처를 옮겨갔으며, 중국 정부와 공동 항일 전선을 강화해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한중 한일 투쟁을 이어갔다.

3·1절을 맞아 찾은 훙커우 공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의 정식 명칭은 ‘매원-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다. 윤봉길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을 반영하듯 매화가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아준다. 추운 겨울에도 활짝 핀 꽃을 보러 오는 중국 관광객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훙커우 공원은 중국 문호인 루쉰이 즐겨 산책했던 곳으로 현재는 루쉰 공원으로도 불린다. 훙커우 축구 경기장과 주변 쇼핑몰들이 함께 있고,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루쉰 기념관을 포함해 내부를 유원지처럼 조성해 두어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올해 3월부터 중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축소 운영할 계획이다. 현재 15위안(3000원) 정도의 입장료는 받고 있지만 오랜 기간 적자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LG 하우시스 등 한국 기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후원을 했지만 방문객이 적다 보니 연간 관리비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경절, 춘절 등 연휴 기간에 훙커우 공원을 오가는 유동 인구는 하루 1만 6500~2만 5000명이지만 중국 입장에선 국외 항일인사의 기념관이고 접근성이 썩 좋지 않은 탓에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질 않고 입장료 수입도 턱없이 부족하다.

난세에 나타난 영웅이란 말이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굳은 의지와 판단력으로 본연의 것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외세의 침략에도 국내외로 나라를 지켰던 독립운동 인사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한국은 지난해 말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정세 속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조선을 위해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2)
■ 200억원 현상금 마다하고 김구 살린 한중 우정 (4)
자싱(嘉兴).
상하이에서 차량으로 항저우 방향으로 1시간 40분 정도 가면 저장성 자싱에 도착할 수 있다. 자싱은 한국 관광객들에게 다소 낯선 곳이다. 난후(南湖)가 그나마 알려진 호수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을 선언한 곳으로 유명하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망지로(望志路) 106호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됐다.
7월 30일 저녁, 한 낯선 사람이 회의장을 기웃거렸다. 경찰의 첩자로 생각하고 참석자들이 상하이 외곽에 있는 자싱으로 급히 피신했다. 다행히 한 참석자의 아내가 난후 주변의 소도시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유람선 한 척을 빌렸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이런 자싱을 찾은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더듬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김구를 포함한 이동녕‧박찬익‧엄항섭‧김의한 등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싱으로 왔고 이곳에서 1932년 5월부터 1936년 2월까지 머물렀다. 실제로 거처한 기간은 2년 정도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싱‧항저우‧난징 등으로 옮겨 다녔다.

이들이 여기에 온 것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데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일단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더는 피치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피치 목사는 운전사로 위장한 뒤 김구를 서양인으로 화장시키고, 자신의 아내를 김구의 아내로 가장해 자동차로 피신했다. 김구 일행은 상하이 기차역에서 자싱을 향한 기차를 타고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싱에서 이들을 반겨준 사람은 추푸청(褚輔成, 1873~1948)이다. 추푸청은 자싱 출신으로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저장성 국민정부 주석을 역임했고 윤봉길 의거 당시는 상하이 법학원장‧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국민당 원로로 초기 중국 공산당 핵심 인물인 천두슈(陈独秀)가 국민당에 체포됐을 때 그를 변호한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이 비록 국민당의 원로이지만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자싱에 만들어진 이유다. 그런 추푸청과 김구는 어떻게 연결됐을까?
김구가 자싱으로 피신한 데는 박찬익의 역할이 컸다.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을 맡는 등 임시정부 항일 외교의 최전선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대중국 외교교섭을 담당했으며 중국 국민당에 들어가 국제부 선전과에 근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국 국민당과 최접점의 외교통으로 활동했다.
박찬익은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중앙조직부에 근무하는 샤오정(蕭錚)을 만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샤오정은 천궈푸(陳果夫) 부장에게 보고했다. 천궈푸는 샤오정에게 “추푸청 선생을 찾아가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제공해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 박찬익과 추푸청은 이전부터 친한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이런 도움으로 김구 일행은 자싱에 올 수 있었다. 김구는 추푸청의 수양아들 천둥성(陳桐生)의 별채인 자싱 매만가 76호에 머물렀다. 지금은 건물 입구에 ‘김구피난처 金九避难处’로 한글과 중국어로 함께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2005년 저장성의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고 2006년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2층 목조주택이며 침실로 사용한 2층 방 한쪽 구석에는 긴급할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비상 탈출구가 있었다. 비상 탈출구를 통하면 배 한 척이 나오는 데 위험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김구는 당시 중국 광둥 출신의 상인 ‘장진구(張震球)’라는 가명을 쓰며 다녔다. 그러다가 1933년 여름 외출 중 신분이 광둥인이 아닌 것이 알려져 중국 경찰에 붙잡혔다. 다행히 천둥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 이후 천둥성은 집안일을 하던 주아이바오(朱爱宝)에게 뱃사공을 하며 김구의 안전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김구는 낮에 주아이바오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갔다가 어둑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힘든 생활을 했다.
김구의 피난 시기를 배경으로 주아이바오와 김구와의 관계를 조명한 ‘선월(船月)’이라는 소설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와 중국의 평범한 뱃사공을 통해 항일전선에 함께 연대한 한‧중 간의 우의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샤녠성(夏辇生)으로 윤봉길 의사의 전기 『회귀천당(回歸天堂)』도 썼다.

자싱으로 온 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 등은 김구피난처에서 200m 떨어진 일휘교 17호에 머물렀다. 추푸청이 김구의 안전을 배려한 것이다. 김구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추푸청‧박찬익‧엄항섭뿐이었다. 일휘교 17호에 들어서면 1층 전시실이 나온다. 그곳에 김구를 비롯해 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의 가족들과 자싱 피난 생활에 큰 도움을 준 추푸청 가족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 사진을 쳐다보면 잠시 뭉클해진다. 추푸청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일제의 압박을 피해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김구에 걸린 현상금은 무려 60만 위안. 현재 한화로 환산하면 200억원 정도. 천궈푸의 부탁이었지만 거절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각되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추푸청 가족은 200억원에 눈이 멀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김구피난처 옆에 있는 추푸청사료진열실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진열실 2층에 가면 추푸청의 밀납 인형 뒤에 글귀가 있다. 추푸청이 고대 한자 서체인 전서(篆書)로 쓴 글이다. 그것을 읽으면 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여유경동망불길(汝唯敬動芒不吉)
네가 오직 공경히 행동하면 길하지 않은 일이 없고
약유유용현기능(若有猷用懸其能)
만약 꾀를 부리려 한다면 능력이 헛되이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임정 요인들을 도왔던 추푸청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감사의 마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 가면 ‘독립운동을 도와준 외국인들’이라는 코너가 있다. 12명의 사진이 있는데 장제스‧쑹메이링‧저우언라이 등이 있다. 그들과 함께 천궈푸‧추푸청‧피치 등도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3)
<자료출처>
(2) https://v.daum.net/v/20250307170105266
(3) https://v.daum.net/v/20240813060035753
<참고자료>
“윤봉길 의거 지휘 백범 김구를 암살하라” 日帝, 3차례 비밀공작|동아일보 (donga.com)2018-03-21
https://v.daum.net/v/20240826050351955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11/09/VKEZXL7CBJAEPGXVBUHI3SIILE/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2/01/CMTGRY4N4ZBNRFA2MRBBVF2I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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