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8) 1938년~1945년 강제징용 본문

일제 실인원 200만명, 연인원으론 780만 강제동원 추산
죽창 들고 강제동원에 저항도..탄광·공사장이 가장 열악
정부 보상 2차례 실시, 액수 적고 못 받은 피해자도 많아
2012년 첫 대법 판결 뒤 6년 동안 정부 뒷짐만 지고 방관
정부 책임감 갖고 나서서 일본의 태도 변화 이끌어내야
문희상 '1+1+α'는 한-일 갈등 막자는 미봉책..해법 안돼
■ "강제동원 진상규명부터 제대로 해 '피해자성' 회복해야"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가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으로 떠올랐다. 문제 해결을 위해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일 기업과 일반인의 자발적 기금으로 위로금을 주는 이른바 ‘1+1+알파(α)’안을 내놓고 추진 중이다. 과연 강제동원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온 정혜경(59)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을 만나 물었다.
정 연구위원은 “먼저 정부가 나서서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진상 규명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중단된 피해 지원 접수도 재개해야 한다”며 “이렇게 책임 있는 자세로 나서야 일본도 ‘무조건 모른 척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의장의 ‘1+1+알파’에 대해선 “역사 문제를 한-일 관계 측면에서만 보고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역대 정부가 모두 이렇게 미봉책으로 접근했으니까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인터뷰는 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우선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강제동원, 강제징용, 강제노역이 있는데 어떤 게 정확한가?
“강제동원은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된 용어다. 강제로 끌려가는 과정에서부터 강제노동을 하게 된 것까지 모든 피해를 포괄한 용어다. 징용은 끌려갔다는 뜻에서 많이 쓰였다. 해방 이후 여기에 ‘강제’라는 말이 붙었다. 강제노역은 범위가 노동 현장으로 축소된 의미가 있다. 강제동원이 포괄적인 표현이다.”
―얼마나 끌려갔나?
“일제는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인력·물자·자금 등 3가지를 동원한다. 인력은 연인원 780만명이다. 군인·군속 27만명, 노무자 753만명이다. 위안부는 빠진 수치다. 연인원이니까 한 사람이 2~3번씩 간 것도 포함된다. 그럼 중복은 빼고 실인원은 몇명이냐. 그건 정확히 확인된 게 없다. 학계에서는 20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어떤 방법으로 강제동원을 했나?
“기업이 모집하는 방식, 관에서 알선하는 방식, 징용령에 따른 징용, 이렇게 3가지 방식이 있었다. 초기에는 모집과 관 알선을 많이 했다. 그런데 갈수록 모집, 관 알선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남편이 갔는데 생활비 송금을 안 해주니 굶어 죽게 생겼다느니, 아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 안 진다느니, 그런 항의가 빈발했다. 동원하러 가면 사람들이 낫을 들고 죽창 들고 경찰하고 대치하는 일도 생겼다. 그래서 나중엔 일본 정부가 징용 대상을 확대한 뒤 징용하게 된다.”
―강제동원은 합법적인 것이었나?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강제노동 금지 협약’을 1929년에 만든다. 일본은 1932년 비준했다. 스스로 비준한 국제협약도 어긴 것이다. 당시 끌려간 곳은 탄광, 군수공장, 공사장, 비행장, 항만, 제철소, 조선소 같은 곳이다. 남양군도와 만주엔 집단농장도 있었다. 농사를 지어 무수알코올 같은 원료를 군에 납품했다. 가장 많이 간 곳은 탄광이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어떤 상태였나?
“가장 열악한 곳이 탄광과 토목·건축 공사장이다. 원래 일본의 탄광은 죄수노동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노무관리가 거칠었다. 일반 공장은 상대적으로 근로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근로조건은 직종이나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비교적 괜찮은 조건에서 일한 분들도 있다. 탄광도 오래된 곳은 갱도가 좁고 조건이 열악했다.
규슈엔 특히 군함도 같은 해저탄광도 있고 작업이 매우 힘들었다. 반면 사할린은 근대 채탄시설도 갖춰져 있을 정도로 비교적 양호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는 허용이 안 되고 의무만 부여됐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어느 자료에도 ‘퇴사’란 표현이 없다. ‘도주’만 있을 뿐이고, 어디서나 도주자에겐 가혹했다.”
―한-일 간 민족차별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과거 조선인을 부렸던 경험이 있는 곳에서 차별이 심했고, 처음인 곳에선 차별이 적었다. 또 조선인 집단거주지가 가까운 곳에선 차별이 적은 편이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선 차별이 심했다.”
―정부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무상 3억, 유상 2억달러를 받고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겐 인색했는데.
“1970년대에 처음 보상했는데 사망자·행불자 8500여명에게만 30만원씩 줬다. 노무현 정부 때 또 이 문제가 불거지니까 위로금을 다시 지급했는데, 사망자·행불자 2000만원, 부상자 300만~2000만원이었다. 생존자는 의료지원금으로 1년에 80만원을 받는다. 모두 7만2000여명이 6000억여원을 받았다. 그런데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일제가 외국으로만 끌고 간 게 아니다. 국내 동원도 있었다. 예컨대 충청도 사람이 제주도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되는 식이다. 연인원 650만명쯤 되는데, 모두 제외됐다. 피해 신청도 까다로웠다. 그래서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안 받고 말겠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청 기간도 2008년 9월부터 2014년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한시적으로 운영하고 종료했다. 신청자가 급증해 재정 부담이 커지는 걸 우려해 소극 행정을 한 것이다. 강제동원 명부는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피해자가 추가로 확인되지만 이젠 신청할 수도 없다.”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급전직하인데.
“원래 이 판결은 2012년 5월에 대법원에서 처음 난 것이다. 그것이 고법으로 내려갔다가 이번에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와 확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부터 그동안 6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정부는 뭐 했냐’고 물어야 한다. 정부가 진즉 나서서 이렇게 논란이 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정부가 어떻게 했어야 하나?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는 위안부 문제로 한-일이 대립할 때 ‘돈은 우리가 줄 테니 너희는 사과하라’ 이렇게 당당히 나섰다. 그러니까 일본도 ‘아 우리도 뭔가 해야 하겠구나’ 하고 압박감을 크게 느꼈다고 한다. 당시는 그렇게 우리가 일본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잃었다. 많은 분들이 일본은 왜 독일처럼 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건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도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1953년 ‘야드바셈’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거기에서 유대인 학살, 강제노동에 관한 것을 조사했다. 그렇게 해서 자료가 축적되니까 1990년대 미국 유대인들이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 정부까지 나서게 되고 그 결과 독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 재단을 만드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게 독일의 ‘기억·책임·미래재단’이다. 대신 피해자들은 모두 소송을 취하했다. 이 재단에선 생존자에게 300만원 정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주로 나치 피해 등에 대한 교육·문화사업을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독일 국민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안 된 것인가?
“우리가 ‘피해자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성엔 진상 규명 의지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되면 우리 권리가 뭔지도 자연히 알게 된다. 또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재발 방지 의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피해자성이 없었던 것 아닐 것이다. 애초엔 세월호 가족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단체를 만들고 청원도 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됐다. 정부에서 가만히 있으라며 못 하게 한 것이다. 나서면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그러니까 피해자들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졌다. ‘우리 아버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세요’ 하고 물어볼 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재일동포들이 이분들을 모셔다가 소송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무슨 일을 겪었는지 관심을 가질 기회를 놓치고, 바로 소송해서 돈을 받아야지 하는 단계로 가버린 것이다. 이건 정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아버지 어디 갔는지 아세요’ 하고 물으면 조사도 해주고 또 ‘당신은 이런 권리가 있다’고 알려주고,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진상 규명도 하고 권리도 찾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까지 가는 것인데, 이게 다 엉켜버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피해자성 회복을 위해선 진상 규명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이건 정부가 나서야 한다. 강제동원 자료는 대부분 가해자인 일본에 있다. 이들 자료를 받아와야 하는데, 그건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실 소속으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다. 나중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로 바뀌어 2015년 12월 문 닫을 때까지 11년간 존속했지만, 피해자 신고 접수 처리 등 민원업무도 겸하는 바람에 충분한 진상 조사를 못 했다.
위원회 같은 기구를 다시 가동해, 진상 규명도 하고 지원금 제도도 운영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일본도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구나. 문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겠구나’라며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일본 정부는 기업에 보상금 지급을 막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기업에 아무 지침을 안 주는 것만으로도 일은 훨씬 잘 풀릴 수 있다.”
―지금 분위기에선 일본이 자료 제공에 협조 안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강제동원 관련 1차 자료는 대부분 일본이 생산한 자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료가 일본에만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일본에 연합군 포로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영국에도 자료가 있다. 국제적십자사가 있는 스위스에도 있다. 또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자료를 소각도 못 하고 땅에 묻고 도망갔는데, 그걸 얼마 전 중국 정부가 발굴했다.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끌려갔던 조선인 병사 1만여명 자료는 러시아에 있다. 또 개인적으로 이들 자료를 수집하고 추적한 분들도 있다. 이런 자료들부터 확보해가며 시작할 수 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1+1+알파’를 내놓았다. 한국과 일본 기업, 국민의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위로금을 주는 방안인데.
“이 제안에는 중요한 규정이 있다. 기금으로 돈을 받으면 다시는 권리 행사를 못 하는 것이다. 일본이 6월 한국 정부가 제안한 ‘1+1’안은 거부하면서, 문 의장 안은 환영하는 핵심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피해자 사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이 제안의 의도는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막겠다는 것이다. 역사 문제를 외교정책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역대 정권이 이렇게 미봉책으로 접근했으니까 아직 해결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말하면서도 실제 소송한 사람들의 의사도 묻지 않았다. 이렇게 시혜를 베풀 듯이 하면서 한-일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여기에 동의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론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 정혜경 박사는 누구?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2005년부터 11년 동안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조사과장으로 실무를 담당한 전문가다. 당시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 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작업 등에 참여했다. 강제동원과 관련해 <터널의 끝을 향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남긴 대일 역사문제 해법 찾기> 등 단행본을 10여권 출간했고 논문도 40여편 발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 역사 전공자였다. 199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일제하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연구: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도교수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강제동원을 알아야 한다’며 권유했고 이후 일본에서 활동가들이 피해자들을 만나러 국내에 오면 나에게 안내를 맡겼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1995년부터 일본의 활동가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인터뷰했다.
올여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미화한 ‘반일종족주의’가 논란이 됐을 때는 반론에 적극 나섰다. 그는 “반일종족주의를 본격 반박하는 반론서를 곧 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1)
대법원이 이날 손해배상 판결을 내놓은 강제징용 피해 기간은 대략 1939년부터 1945년까지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진 1944년부터는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동원했다.
이런 식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이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이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2500만명이었다.
■ 조선 인구 2500만, 해외 동원된 피해자 150만…강제징용 수난사
중앙일보 장은희 기자
입력 2018.10.30 16:55 업데이트 2018.10.30 18:02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운데)와 유가족들이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대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이날 손해배상 판결을 내놓은 강제징용 피해 기간은 대략 1939년부터 1945년까지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나마 일자리 제공이라는 명분으로 '모집'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업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농촌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거나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었다. 총독부는 지역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량을 정해줬고, 경찰이나 면장 등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 직접 나서 할당량을 채웠다.
전황이 불리해진 1944년부터는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동원했다.
이런 식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이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이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2500만명이었다.
강제징용된 이들의 생활은 혹독하고 비참했다. 사고로 숨지는 이들은 셀 수도 없었고, 견디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생겼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도 이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을 귀국시키는 적극적인 수단을 마련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했던 강제징용자들도 밀항하거나 자체적으로 배편을 마련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 중 실종된 이들도 적지 않다.
고국에서도 녹록지 않은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정부로부터 주어진 보상은 미미했다.
1975~77년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망자 8552명에게 30만원씩 25억6500여만원을 지급했다. 2007년에는 군인·군속 공탁금 10만8900여건(총액 9100만엔), 2010년 노무자 공탁금 6만4200여건(총액 3500만엔)의 명단을 일본 정부에게서 받아, 한국 정부 재정으로 배상했다. 환산 비율은 1엔당 2000원.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위로금은 수십만~수백만원에 불과했다.
피해자 진상조사도 전체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4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위가 발족하면서 한국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2)
■ 기록되지 못한 채 흩어져… 더 아픈 징용의 역사
입력 2019.07.20 04:40 수정 2020.06.15 16:39
박정희 정부 때 피해자들 제출 자료, 정부 관리 소홀로 분실
2005년부터 10년 남짓 진술 채록, 증거자료 있는 경우 20%뿐
日 압박할 사료 가치… 정부, 증언 기록ㆍ복원 연구 착수해야
일본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조선인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전범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첫 확정판결이 있던 지난해 10월30일. 13년 전 강제징용 피해자 네 명과 함께 시작한 소송이지만 이날 법정에는 이춘식(95) 할아버지만 홀로 출석했다. 나머지 세 명은 소송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춘식 할아버지는 “너이(넷)가 재판을 같이 했는데, 다 돌아가시고 혼자 허니까 눈물이 난다”며 “많이 슬프고 마음이 아프고 서운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강제징용 피해자 14명과 그 가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선고가 있던 지난달 27일. 재판부가 1심에 이어 또 한 번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법정에서 피해자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피해자 원고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홍순의 할아버지마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다 2015년 눈을 감고 말았기 때문이다.
미쓰비시중공업 항소심 재판정에는 대신 유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족들은 승소의 기쁨보다 고통을 호소했다. 홍순의 할아버지의 며느리 박영숙씨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남편이 소송을 도맡아왔는데 남편마저 세상을 뜨고 나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며 “들은 얘기도 없고, 남아있는 것도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원고단 단장인 박상복씨 또한 “소송 한 번 진행할 때마다 유가족들 재판 참여 독려하고, 필요한 서류 준비해서 제출해달라고 다그치느라 진이 다 빠진다”며 “문제 해결이 늦어지면서 후손들까지 고통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확정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배상과 사과는커녕 적반하장격으로 경제보복 카드까지 들고 나오면서 피해자들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 소송이 지연되면서 고령의 피해자들은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고통을 물려받은 유족들은 정확한 피해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일제의 강제동원령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 당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보전해 귀환한 징용 피해자는 대략 110만명. 해방되고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까지 합치면 300만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1939년 ‘국민징용령’으로 끌려가기 시작한 피해자 대부분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들은 대체로 90세를 넘었다.
강제징용 피해자진술 기록 채록. 강준구 기자
더 큰 문제는 민족의 아픈 역사를 증언해줄 피해자들이 속속 사라지는데도 일본의 만행으로 인한 피해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징용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제대로 된 역사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다. 활자화되지 못한 기억은 뭉개지고 희미해지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정부의 외면 속에 피해자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고 피해를 입증할 자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다. 1974년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뒤 77년까지 징용 피해자 신고를 받아 8,500여건에 대해 1인당 30만원씩 25억여원을 지급했다. 이어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고 대대적인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2006년까지 받은 피해 신고만 22만여건. 정부는 이를 토대로 피해 정도에 따라 1인당 최고 2,0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피해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데는 소홀했다. 74년 청구권보상법률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피해자 신고를 받았지만 당시 신고자들이 제출한 증빙자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아있는 건 신고인명부와 보상금 지급대장뿐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 대부분이 해방과 동시에 가까스로 작업장을 탈출하느라 증거자료를 거의 챙기지 못했고, 그나마 가져온 몇 안 되는 사진이나 일기 등의 기록을 정부에 제출했지만 막상 정부는 관련 자료 보관에는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2004년 재차 강제징용 피해 진상규명과 보상에 나섰지만 해방된 지 60년이 흘러 건질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은 많지 않았다. 진상규명위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2006년까지 접수한 신고 가운데 증거자료가 있는 경우는 약 20%에 불과했다.
80%는 피해 당사자나 가족의 기억에 의존해 피해사실을 주장할 뿐, 이를 뒷받침할 사진이나 문서는 갖추지 못했다. 진상규명위 기록관리팀에서 활동했던 김명옥 국가기록원 사무관은 “대부분 신고자들이 기록의 부재를 호소했다”며 “개개인의 주장은 신뢰성과 객관성 면에서 활자나 사진으로 남아있는 공식적이고 가시적인 기록이 가지는 증거력에 비해 공신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때문에 진상규명위는 일일이 신고자를 찾아 다니며 피해 진술을 채록하면서 기록화하는 작업에 나섰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2004년부터 2015년까지 활동한 위원회가 피해자 진술을 채록한 건수는 2,000여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위원회 활동이 활발했던 2010년까지는 생존자를 상대로 피해사실을 채록하는 작업이 매년 적게는 5건에서 많게는 1,000여건 정도씩 꾸준히 진행됐지만 2011~2013년에는 한 건도 기록되지 않았다. 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뒤로 생존자 구술을 채록하는 작업이 사실상 중단된 것은 물론이다.
외국 사례에 비춰보면 강제징용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역대 정부가 얼마나 소홀했는지가 도드라진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상대로 자행한 ‘홀로코스트’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는 무려 50년간 자료를 모았다고 한다. 정부가 직접 나서 피해 생존자의 구술을 청취하고 관련 기업들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를 확보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확보했던 피해신고 자료를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고 해방 60년이 지나 10년 남짓 생존자 진술 채록 작업을 진행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체계적으로 접근해 상당한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던 위안부 피해 진상규명 작업과 비교해도 강제징용의 역사 기록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위안부 피해 진상규명 작업이 강제징용 문제보다 조금 이른 90년대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접근 방법의 차원도 달랐다. 강제징용의 경우 피해자들의 기억을 복구하는 데 주력했다면 위안부 문제에서는 피해 현장 조사 등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배경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연구하는 작업이 동반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2016년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함께 진행한 위안부 기록발굴연구. 인권센터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선에 머물지 않고 실제 피해가 발생했던 지역을 방문해 자료 발굴 조사 등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증언을 구체화할 포로심문 자료, 기록 사진, 지도 등을 찾았고,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ㆍ태평양 전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영 교수 연구팀의 김소라 공동연구원은 “피해자들은 특정 장소에 고립돼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피해자 증언을 토대로 현장 조사를 실시하는 등 실증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내외 사례에 비춰보더라도 정부가 강제징용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강력한 조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물론 강제징용 피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복원하는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일본정부와 기업이 수십 년간 공개하지 않고 있는 우편저금 자료와 후생연금명부 등의 확보에도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없으면 어렵다는 것이다. 최용근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는 “대부분의 유가족들이 소송에 참여하려 해도 피해자가 어느 회사, 어느 지역으로 동원됐는지 등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아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가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제징용 기록은 단지 피해보상과 일본을 상대로 한 법정 소송에 사용할 증거자료의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과거사를 부정하며 보상은 물론 사과를 외면하고 있는 일본을 압박할 사료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 강제징용 문제를 장기간 연구하고 있는 정혜경 박사는 “기록이야 말로 피해자성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자 가해국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강조했다.(3)
■ 잊힌 강제징용자 800만…이제 8천명 남았다
연규욱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日해군부대 끌려갔던 선태수 옹의 눈물
예산없다, 피해입증 힘들다…평균 90세, 생존자 점점 줄어
"우리도 비극적 역사의 피해자, 日정부·기업 꼭 사과했으면"
◆ 광복절 71주년 ◆

벌써 7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1944년 대구직업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18세 청년 선태수 씨는 꿈 많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해 1월 20일 일본군의 포차에 강제로 실린 뒤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행 배를 타면서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훈련소에서는 일본 교관들한테 매일같이 두드려 맞기 일쑤였고, 이후 배속된 해군 정비부대에서는 1년간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그는 "힘든 노역에서 일본인 교관 눈 밖에 나면 내무반 전원이 밥을 굶고 얼차려를 받는 게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기지에 갑자기 미군 폭격이 떨어지면 조선인 동료들 시신이 사방으로 조각나 튀었고 이런 공포를 이기지 못해 끝내 스스로 목을 맨 동료도 있었다.
그의 삶은 해방 이후에도 순탄하지 않았다. 해방을 한 달 앞둔 상황에서 부대 내 비행기 폭발사고로 인한 머리 부상 후유증은 그를 오랜 시간 괴롭혀왔다. 또 대부분 심각한 전후 후유증을 겪었던 탓에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버거웠다.
선씨처럼 강제로 군부대에 징용되거나 일본 군수기업에 징용돼 착취당했던 노동자는 무려 800만명에 이른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이행에 따라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던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 사망·부상 피해자들에게 1인당 30만원씩 위로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때 혜택을 받은 이들은 전체 강제징용자의 0.1% 남짓한 85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이 보상금으로 내놓은 돈 3억달러(약 3300억원) 가운데 단 24억원만 징용 피해자들에게 돌아갔고 나머지는 국가 기간산업 육성에 사용됐다.
뒤늦게 정부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마련해 2008년부터 강제징용 피해자 신고를 다시 받아 총 11만3000여 건을 접수했다. 이 중 피해가 입증된 7만3000여 명에게 위로금이 지급됐다. 강제징용 중 사망자는 2000만원, 부상자는 장해 정도에 따라 300만~2000만원을 유족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모든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강제노역으로 인한 부상임을 직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전체 부상자의 단 0.1%만이 위로금을 지급받았다"고 설명했다. 선씨와 같이 강제징용을 당했더라도 특별법이 정한 장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부상인 경우에는 아예 위로금 신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선씨와 같은 생존자들이 정부로부터 받고 있는 것은 '의료지원금' 명목으로 1년에 한 번 80만원이 전부다. 그나마 2008년 당시 2만5000명이었던 생존자 수는 2016년 현재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나이가 들어 매해 수천 명씩 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현재 평균연령은 약 90세다.
선씨는 "보상은 둘째치고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월급'이라도 다시 되찾았더라면 우리 같은 강제노역 피해자의 삶이 이렇게 피폐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노역자들의 임금은 복무 당시 일본 은행에 강제적으로 공탁됐고 해방 후 대다수는 빈손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선씨는 "질긴 목숨이 지금껏 살아남아 또 한 해를 맞았지만 누구도 우리가 지옥 같은 곳에서 겪었던 피해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도 '일본군 위안부'처럼 일제의 강압에 의한 또 다른 비극적 역사의 '피해자'임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꼭 인정하고 사과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91210181604062
(2) 조선 인구 2500만, 해외 동원된 피해자 150만…강제징용 수난사 | 중앙일보 (joongang.co.kr)2018.10.30
(3) 기록되지 못한 채 흩어져… 더 아픈 징용의 역사 (hankookilbo.com)2019.07.20
(4) https://www.mk.co.kr/news/society/7465263
<참고자료>
‘조선인’ 피해자엔 일본정부 딴청만 ‘뼈’로나마 고향길 언제…
도쿄공습 맞을 때 내 나이 스물여섯 유골 된지 어언 63년
[이사람] “일본 정부·기업이 ‘억울한 넋’ 책임지게 해야죠” (hani.co.kr)2008.3.1
강제징용 조선인 유해 환국운동 도노히라 요시히코 주지
일제 강제연행 한국인 사망자 자료집 펴낸 日 사학자 | 서울신문 (seoul.co.kr)2007-09-17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 서울신문 (seoul.co.kr)2007-08-24
진상규명위 "日軍 마셜제도서 조선인 학살" | 연합뉴스 (yna.co.kr)
손들고 항복하는 사람도 기관총 사살-‘동아'(06.10.26) | 민족문제연구소 (minjok.or.kr)동아일보2006.10.26
사이판 징용 한인 추모비 이렇게 세운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1996.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