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 (52)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제 제 3 · 4 대 주석 이승만( 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1947년 9월 ~ 1948년 8월 15일) 본문
대한민국임시정부 (52)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제 제 3 · 4 대 주석 이승만( 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1947년 9월 ~ 1948년 8월 15일)
대야발 2025. 5. 21. 19:13

■ 백범 가라사대..

백범 김구는 해방 공간에서 정세 판단과 정치적 선택에 따라 여러 차례 노선의 변화를 꾀했다.
1947년 말 단정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합작하기로 한 뒤 1948년 1월 '6개항 의견서'를 내어 미소 양군 철수 뒤 전국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밝힌 게 대표적인 보기다.
그는 1948년 3월21일 <신민일보> 신영철 사장과 대담에서 이와 관련된 해명을 요청받는다. 이런 변화가 정의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권을 잡기 힘들어 택한 정략적 결정이 아니냐는 질문에 백범은 당시까지만 해도 이승만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봤다고 항변했다.
창원대 사학과 도진순 교수가 엮고 보태어 최근 펴낸 <백범 어록>(돌베개)은 해방 공간 백범의 정치적 선택과 그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까지 각종 신문과 잡지 방송 등을 통해 드러난 백범의 연설 기고 인터뷰 등을 모았다.
앞선 책들과 다른 점은 어록에 대해 도 교수가 전·후 정치 사회적 맥락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어록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 셈이다.
특히 이 책의 상당 부분은 1948년 이후 어록을 다루고 있어 통일민족주의자 백범의 진면목 이해에도 도움이 될 듯하다. 1948년을 기점으로 백범은 반탁운동의 선봉장에서 굳건한 통일민족주의자로 대전환을 하게 된다. 백범이 전국 총선을 주장하자 한민당 등은 백범을 '크레믈린궁의 한 신자'라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백범은 단정 세력과 그들을 두둔하는 <동아일보>를 '태양을 싫어하는 박테리아'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백범이 말년 강좌 등을 통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물고기를 뜻하는 '역수어'의 뜻을 강조하거나 헤게모니 싸움인 '쟁두운동'이 아니라 다리가 되고자 하는 '쟁족운동'을 펼쳐나가자고 제안한 대목도 흥미롭다.(1)
■ 백범의 "죽여도 되는" 반민족 '칠가살(七可殺)'
[백범기념관 학술회의] "백범은 반민특위의 방패막이였다"
정치권에서 친일진상규명법 논란이 계속되는 있는 가운데, 해방정국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친일파 청산 노력을 소개한 연구보고서가 발표돼 주목된다.
<친일파 청산·반민특위와 백범>이란 제목의 이 연구보고서는 이강수 국가기록원 학예연구사가 집필, 1일 백범기념관 개관 2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됐다.
***백범의 "죽여도 되는 칠가살"**
이강수 연구사는 "백범과 임시정부 계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1920년대부터 확인된다"며 "백범의 친일파 청산 기본 기조는 중간파 세력은 물론 이후 반민특위 구성 및 활동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했다.
이 연구사에 따르면,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는 1920년대 칠가살(七可殺)을 선언, 처단대상으로 ▲일본인 ▲매국적(賣國賊) ▲고등경찰 및 형사·밀고자 ▲친일부호 ▲적의 관리(官吏) ▲불량배 ▲배반한 자 등으로 구체화했다. 또 1941년에 발표한 <건국강령>에서 "적에게 부화(附和)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한다"고 규정, 친일파에게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또 <건국강령>에 나타난 친일파 배제원칙은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과 9월 백범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당면정책>과 김구의 성명서에서 친일파 청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면서 친일파의 사회·경제적 기반 제거를 주장했다.
당시 발표된 <당책>의 주요내용을 보면 ▲적산(敵産)은 무조건 몰수뒤 국유화시키고(25조) ▲매국적(賣國賊)과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를 징치(懲治)하고 그 재산은 국유화시키며(26조) ▲봉건 파시스트 등의 일체 반민주주의 경향을 숙청할 것(27조)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연구사는 <당책>에 대해 "<건국강령>을 이어받아 임정의 정권창출 방안으로 제안된 것으로 귀국 후 임정계열 정치활동의 직접적인 지침서였던 점을 감안하면 친일파 청산 문제는 단순한 선언만은 결코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백범, 반민특위 추진세력의 방패막이"**
백범 김구는 해방정국에서 남북분단이 가시화되자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제1의 과제로 설정, 1948년 해방이후 처음 실시된 5.10 총선거에서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계열이 불참하면서 이승만으로의 권력 이동이 가속화된다.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사는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의 5.10 선거 불참을 너무 도식화시켜 1948~50년 한국사회의 상을 속단해서는 안된다"며 "오히려 (총선거 이후 구성된) 제헌국회의 소장파의원들은 여전히 백범 김구의 노선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백범 김구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즉 백범 김구 및 임시정부계열이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을 중심으로 한 반민특위 등 친일파 청산 시도는 백범 김구의 노선 위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연구사는 그 근거로 ▲ 소장파 의원들이 발표한 <평화적 남북통일 전취와 균등사회 건설에 초연 매진>한다는 성명서의 내용이 백범 김구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 반민특위법을 제정한 소장파 의원 중 김상덕·신성균·오택관·이문원 등은 임시정부계열이거나 한국독립당에 참여한 경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 연구사는 따라서 "반민법(반민족행위자처벌법)은 백범과 임시정부계열이 참여한 가운데 제정되어 이승만 정권을 압박했고, 백범은 이승만 정권의 반민법 개정을 반민특위를 방해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등 반민특위 추진세력의 방패막이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백범 암살후 반민특위 해체**
이승만 정권은 당시 장관 중 4명, 차관 중 15명이 일제관료 출신이었다. 따라서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법은 정권의 통치조직을 뒤흔들만큼의 강한 위협이 됐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소위 '1949년 6월 총공세'로 불리는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그리고 백범 암살로 이뤄지는 일련의 공작정치를 추진하게 된다.
결국 대표적 친일·극우세력인 장은산(포병사령관, 만주군관학교 출신), 김창룡(특무대장, 헌병 오장 출신), 전봉덕(헌병사령관, 조선총독부 경시과장 출신) 등으로 구성된 '88구락부'에 의해 백범 김구는 암살되고, 반민특위는 와해된다.
이 연구사는 이와 관련, "백범의 암살은 반(反)이승만세력의 총본산의 제거와 같은 의미이면서 동시에 반민특위 추진세력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지막 방패막이의 제거와 같은 의미"라며 "(백범암살이후) 반민특위의 와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사실상 반민특위가 와해된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반민법이 완전폐지에 이르기까지 친일청산의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러나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계열의 친일파 청산노력은 60여년이 지난 현재 논의중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친일진상규명법)'제정으로 다시 계승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연구사의 연구보고서는 해방정국과 건국 초기 당시 친일파 청산 시도가 어떻게 좌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친일파 청산의 역사적 의의 나아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관련 사회적 논란의 맥락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커 보인다. 특히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에 대해 단순한 정치공학적 관점 혹은 정치음모론적 주장만 횡행하는 현재,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2)
효창공원은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유서깊은 장소다. 용산구 효창동 일대에 16만 924㎡ 규모로 조성돼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삼의사, 임정요인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 애국선열 7명 유해가 안장됐다.
또 삼의사 묘역엔 향후 유해 봉환에 대비해 안중근 의사 가묘도 조성돼 있다. 여기에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와 백범 김구 기념관, 이봉창 의사·원효대사 동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효창공원은 ‘독립운동 성지’로 불리며 1989년 6월 8일 국가지정유산(사적 제330호)으로 지정됐다.
■ 김구 선생 잠든 '독립운동 성지'…용산구 효창공원[서울곳곳]
의열사와 백범김구기념관 등 사적 제330호 지정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삼의사 묘역·안중근 의사 가묘
김구 선생과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 묻혀
소나무숲과 묘역 사이 산책로엔 주민들 많이 찾아
“어명이다. 김창수(김구 선생 본명)의 사형집행을 즉시 중단하라.”
지난 24일 오후 2시 30분께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정문에서 약 250m 떨어진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자, 1층 중앙홀에 김구 선생의 대형 좌상(座像)에 한눈에 들어왔다. 기념관 내부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활동, 백범일지, 가족 관련 자료, 서거 및 추모 관련 공간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이곳에선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서거 당시 입고 있던 옷인 ‘혈의(血衣)’도 직접 볼 수 있다. 또 ‘김구를 살린 전화’란 이름으로 전시된 옛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면, 1896년 10월 2일 김구 선생의 사형을 중단하란 고종의 어명을 전하는 다급한 목소리를 재연한 통화 내용도 들어볼 수 있다.

효창공원은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유서깊은 장소다. 용산구 효창동 일대에 16만 924㎡ 규모로 조성돼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삼의사, 임정요인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 애국선열 7명 유해가 안장됐다.
또 삼의사 묘역엔 향후 유해 봉환에 대비해 안중근 의사 가묘도 조성돼 있다. 여기에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와 백범 김구 기념관, 이봉창 의사·원효대사 동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효창공원은 ‘독립운동 성지’로 불리며 1989년 6월 8일 국가지정유산(사적 제330호)으로 지정됐다.
효창공원은 원래 조선시대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등 왕가의 묘를 모신 곳으로 ‘효창원’으로 불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되기 시작했고, 1944년엔 일제에 의해 왕가의 묘들이 강제로 서삼릉(경기도 고양시)으로 이장된 후 공원으로 조성됐다. 광복 이후엔 1946년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1948년엔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 1949년엔 김구 선생이 각각 안장됐다.

효창공원 내에는 애국선열의 묘역과 소나무숲 사이로 총 2㎞ 길이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인근 주민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이날도 효창공원 내부를 산책하는 방문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근에 살고 있어 효창공원을 거의 매일 찾는다는 50대 이모씨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 묘역은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소나무 숲 사이를 연결하는 나무 데크와 산책로도 잘 만들어져 있어 걷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한편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 기념관 운영시간은 매년 3~10월엔 오전 10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11~12월엔 오전 10시~오후 5시(입장마감 오후 4시) 등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정기휴관일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등이다.(3)
<자료출처>
(1) 백범 가라사대.. (daum.net)한겨레 2007.11.15
(2) 백범의 "죽여도 되는" 반민족 '칠가살(七可殺)' (pressian.com)
(3)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공원’ 조성…“대한민국 정통성 세우는 일” (hani.co.kr)2018-08-17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240925131856883
백범 휘호 ‘광명정대’ 귀환 - 경향신문 (khan.co.kr)2018.08.13
백범 김구가 1947년 결성한 모임 '보인계' 자료 공개 | 연합뉴스 (yna.co.kr)2018/04/1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온라인서 소장품 1만5천여건 정보 추가 제공
'경교장·이화장 옛모습 되찾는다' 6곳 복원 추진 (sbs.co.kr)2009.12.26
[한겨레프리즘] 김구 선생이 그리운 이유 / 권복기 (hani.co.kr)한겨레 2007.11.28
백범 묘소 '효창원' 성역화는 소극적 (daum.net)한겨레 2007.11.23
‘백범 암살 배후’ 끝내 못밝히고… (hani.co.kr)한겨레 2007.11.19
권중희씨 별세…암살범 안두희씨 찾는 등 평생 노력
새 지폐 인물선호도 김구·신사임당·유관순·정약용 順 - 경향신문 (khan.co.kr)2007.08.10
[기고]백범 58주기, ‘원로 백범맨’ 살리자 - 경향신문 (khan.co.kr)2007년 0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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