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53) 24人의 독립투사들, 남북이 함께 기린다 본문

■ 24人의 독립투사들, 남북이 함께 기린다
중앙선데이
특별취재단 강영진·이철희·정용수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자문위원=유영구·정창현
입력 2007.07.29 01:51
양세봉 열사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독립유공자로 기리는 대표적 인물이다. 1920년대와 34년 순국 때까지 남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32년부터는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남한에서는 62년 독립장이 추서됐고, 북한에서는 86년 애국열사릉이 설치되면서 이곳에 안장됐다.
양세봉 열사처럼 남북한이 함께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기리는 선열이 24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표 참조> 이 같은 사실은 중앙일보 특별취재단이 남한의 독립유공자 명단 1만185명과 북한의 3대 국립묘지인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 재북인사묘 안장자 명단 883명을 대조해 밝혀냈다.
24명 가운데 일제시대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한 사람이 10명이고, 임정 창립에 참여하거나 자금을 지원한 관련 인물이 2명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임정 요인 후손들이 추석 성묘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 명단이 알려졌다. 그러나 24명 전체의 명단과 묘역별 위치가 모두 파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주백 서울대 교수는 “북한 국립묘지를 방문한 학자들의 전언으로 우리 독립유공자가 북한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이 일부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안장 현황은 알려진 바 없다”며 “특히 최효일 열사, 오화영(북한에선 오하영으로 기록)·강제하·허영호 선생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찾아낸 24명 중 남한에 묘소가 있는 사람은 양세봉 열사와 정인보 선생뿐이다. 그러나 두 분의 남쪽 묘소는 가묘다. 양세봉 열사는 부인과 아들이 해방 이후 중국에 있던 무덤을 평양 으로 옮겼고, 납북돼 북한에서 숨진 정인보 선생은 국립현충원에는 위패가, 충북 청원군의 선산에는 가묘가 설치돼 있다.
또 국립현충원 내 무후 선열(후손이 없는 순국선열) 제단에 위패가 모셔진 16명 중 14명이 북한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정인보 선생 포함). 그 밖에 강제하·김상덕·김의한·장현식·최덕신·허영호 선생과 장철호·최윤구·최효일 열사는 남쪽에는 기록만 있고 묘소나 위패 등 추모 시설은 설치돼 있지 않다.
24명 중 최윤구·최효일 열사는 북한에서 최고로 치는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는 특별한 사례다. 혁명열사릉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했거나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160명이 묻혀 있는 곳.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과 김책 전 부수상, 김일 전 부주석 등 북한의 최고위 간부들도 묻혀 있다.
최윤구 열사는 양세봉 열사가 총사령으로 활동한 조선혁명군에서 30년대 초반 중대장, 제1연대장, 제2사령 등을 역임했다. 최 열사는 양세봉 열사가 순국한 34년 3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김일성 등 북한 정권의 중심 세력들이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고 38년 12월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했다.
최효일 열사는 북한이 펴낸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28년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30년 일제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32년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75년 처음 설치된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 산하 부대에서 활동하며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돼 32년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33인의 일원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간부로 활동한 오화영 선생이나 20년대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정의부 등에서 활동한 강제하 선생은 북한 애국열사릉에 각각 ‘반일애국지사’와 ‘애국지사’로 비문이 적혀 있다. 허영호 선생은 부산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으며 평양의 재북인사묘에 아무런 명칭 없이 안장돼 있다.
남과 북에서 모두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이들 24명은 20년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통합해 29년 만주에서 결성된 국민부와 그 산하 무장단체였던 조선혁명군, 또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독립운동사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면서 앞으로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남한 역사학계에는 이미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도 독립운동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것이 2005년의 독립유공 서훈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해 3월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이 서훈을 받았고 8월에는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1905~38),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 이론가 한위건 등 47명이 대규모로 독립유공 서훈을 받았다.
지난해 8월에도 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한 이재유(1905~44), 오산세(1907~32)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국장이 각각 추서됐다. 최근 서훈 인물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조선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한 최윤구 열사다.
그는 남한에서는 조선혁명군 활동 경력으로 독립장 서훈을 받았고 북한에서는 조선혁명군이 해체된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해 김일성과 함께 활동한 경력으로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민족주의 계열 무장단체와 사회주의 계열 무장단체에서 모두 활동한 경력으로 인해 논란이 빚어진 흔치 않은 사례다.
이와 관련, 그의 서훈 심사에 참여했던 한 학자는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논란이 있었지만 그가 조선혁명군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을 평가해 유공자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또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사회주의 활동을 했더라도 해방 이전으로 한정돼 있고 독립운동의 성격이 강하면 포상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역사학계도 90년대를 거치면서 과거에는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2005년 완간된 『항일무장투쟁사』 1~9권이 그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 연구서는 남한과 중국·러시아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 특히 과거 역사서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상해림시정부’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 산하 8로군과 함께 활동했던 조선인 부대)’ 등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북한 학계의 이런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북한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사를 민족주의 계열을 포함한 다양한 갈래의 활동을 배제하고 김일성 전 주석의 활동만을 중심으로 서술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골격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노력 가운데 과거에는 철저하게 배제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관심을 끈다.
북한이 중국 각 지역에서 활동했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를 전면 재평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외부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고 남한 학계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앞으로 남북 간 토론과 비판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북한의 독립운동사 서술의 변화는 의미가 있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주 지역의 다양한 항일 무장투쟁 조직들을 통합해 만든 단체. 중국인과 조선인의 합동 부대였다. 김일성·최현·김책·최용건 등 북한 정권 수립의 핵심 세력은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정치·군사간부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40년대 초반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소련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뒤부터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42년 7월 소련군이 조선인·중국인들을 묶어 새로 부대를 편성한 뒤에는 ‘88여단’으로 불렸다.(1)
<자료출처>
(1) 24人의 독립투사들, 남북이 함께 기린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2007.07.29
<참고자료>
[김효순칼럼] 모스크바에서 잠자는 문서들 (hani.co.kr)2008-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