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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3. 신석기시대 고고학 (7) 사해(차하이)문화, 흥륭와(싱룽와)문화, 신락(신러)문화 - 8천년전 본문

환국시대/환국

3. 신석기시대 고고학 (7) 사해(차하이)문화, 흥륭와(싱룽와)문화, 신락(신러)문화 - 8천년전

대야발 2025. 1. 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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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발해문명권을 연구해온 이형구 선문대 교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선양을 출발하여 8000년 유적인 차하이(査海·사해)~싱룽와(興隆窪·흥륭와) 탐사에 나서는 길.

중국인들이 ‘중화 제1촌(차하이)’, ‘화하(華夏) 제1촌(싱룽와)’이라 하여 중국 시조의 마을로 떠받드는 곳이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발해문명. 즉 우리 민족뿐 아니라 중국·일본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문명의 여명을 열어젖힌 곳이 아닌가.

 
 
 
 
 
 

 

# 8000년 전의 용(龍)

 

 

 

다링허 상류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차하이 유적에서 확인된 돌무더기 용의 형상이다. 주거지와 주거지 사이에서 발견됐으며, 용 신앙의 시원으로 평가된다. <차하이/김문석기자>

 

 

 

뻥뻥 뚫린 채 방치된 수풀이 무성한 발굴 흔적 너머로 인공 울타리가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돌무더기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해놓았다. 차하이 유적에서 가장 그럴 듯하게 보전해놓은 것이다.

 

“이 기자, 잘 보세요. 이게 용 형상의 돌무더기입니다.”

“저, 여기가 머리, 여기는 갈기, 여기는 발, 여기는 꼬리부분….”

 

이형구 교수가 돌무더기 형상 주변을 돌며 언뜻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내지 못하는 기자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준다. 정말이다. 용 머리와 용 몸 부분의 돌무더기는 두껍고 조밀하게 용을 표현했다. 반면 꼬리부분의 돌무더기는 느슨하게 흩어져 있다. 용은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몸을 뒤틀고 있다.

꼬리는 숨긴 듯 드러나게 해서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느낌이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m이고, 몸의 폭은 1.9~2m에 달합니다.”

 

희한한 것은 이 용 형상의 돌무더기가 마을의 중심부에 있다는 점이다. 사방에 60기에 가까운 주거지가 둘러싸여 있고, 용의 머리 앞에는 10여기의 무덤이 있었다. 용 모양의 방향인 215도였는데, 이는 주거지의 건축 방향과 일치한다. 1982년, 랴오닝성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 때 주거지와 함께 이 용 형 돌무더기를 확인했다.

 

 

 

# 용의 고향은 발해만

발굴자는 깜짝 놀랐지만 처음엔 무척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하이 주거지 유적의 탄소측정 연대는 7500년 전. 그러나 수륜교정 연대(나이테를 분석한 연대)에 따르면 8000년 전까지 올려볼 수 있다. 만약 8000년 전 차하이 마을 사람들이 이미 용을 형상화하고 신성시했다면….

 

그때까지 알려진 가장 원시적인 형태, 즉 돌로 쌓아 모양을 만들어간 용 형상은 허난성(河南省) 푸양(푸陽)과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룽(黃梅龍)이었다. 연대는 6000년 전이다.

 

그런데 그보다 2000년이나 앞선 8000년 전에 중국 동북쪽,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폄훼했던 발해만 연안의 동이지역에서 용이 발견되다니. 이 돌무더기는 과연 인간이 어떤 뜻을 갖고 쌓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연스러운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인가.

 

중국학계는 술렁거렸다. 중국 사상의 원형인 용신앙은 과연 중원이 아니라 발해만에서 태어난 것인가. 그러나 종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용신앙의 원천이 차하이 유적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잇달아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즉 토기 위에 부조로 장식된 용의 문양이었다.

 

이 용문양 토기편은 역시 차하이 유적의 주거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편이다. 기자는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된 용문양 토기편 2점을 보았다. 하나는 감아도는 용의 몸뚱이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 오르는 용의 꼬리가 맞았다.

 

“봐요. 몸의 표면에 벌집처럼 빽빽하게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마치 용의 비늘 같잖아요. 용을 그릴 때의 기본적인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어요.”(이형구 교수)

 


용 혹은 뱀이 두꺼비를 삼키는 모습을 새긴 빗살무늬 토기(위)와 용을 새긴 토기편. 모두 차하이에서 발견됐다.

 

 

 

# 중국인만 용의 자손?

더욱 재미있는 것은 완형의 원형도관(圓形陶罐) 표면에 선명하게 새겨놓은 두꺼비와 뱀의 형상이다. 이는 뱀이 두꺼비를 입에 물고 삼키는 극적인 장면을 표현했는데, 8000년 전 사람들의 사실적인 표현력을 알 수 있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이런 것들은 모두 용의 형상을 표현하는 수법이며 강렬한 신비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다. 궈다순은 더 나아가 “이런 수법은 분명 제사와 관계 있는 것이며, 용 숭배 사상이 8000년 전 차하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차하이 박물관 전시실은 ‘중국 제1용’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고 있다.

 

“차하이는 농업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는데, 용은 원시종교와 원시문화의 산물이다. 차하이 사람들은 허무적인 용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사람들이다. 차하이 용은 우리나라(중국) 최초의 용이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용은 과연 중화민족만이 사랑하고 숭배한 영물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용의 자손이라 했고 용을 신앙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차하이에서, 그리고 곧 방문할 싱룽와에서 보이는 문화의 양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4) 동이의 본향, 차하이' 2007.10.26. (1)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서쪽으로 200㎞ 떨어진 싱룽와(흥륭와·興隆窪)로 향하는 길이다. 싱룽와는 ‘중화시조취락(中華始祖聚落)’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입니다.

 

 

 

도시처럼 계획된 ‘8000년전 東夷마을’

 

 

 

 

# 중국 100대발굴

 

 

 

천신만고 끝에 찾은 8000년전 싱룽와 마을. 175가구의 집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했다.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나왔다. 지금은 발굴이 끝나 덮었으며 중국 사적으로 지정됐다. <싱룽와/김문석기자>

 

 

싱룽와 유적. 네이멍구 자치구 우한치(오한기·敖漢旗) 바오궈투(寶國吐)향 싱룽와 촌에서 동남쪽 1.3㎞에 자리잡고 있다. 82년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중국 고고학 역사상 100대 발굴 중 하나로 기록됐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다. 96년에는 우리로 치면 사적(전국중점보호단위)으로 지정됐다.

 

 

발굴이 끝나 지금은 유적을 덮어놓은 상태. 풀밭과 옥수수밭으로 남게 되었으니 힘겹게 찾아온 사람들은 다소간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지류인 왕뉴허(牛河)와 맞닿은 싱룽와 유적이 갖는 의미는 같은 다링허 지류에 속한 차하이 못지 않다.

 

 

탐사단이 먼저 가본 차하이는 용의 고향이며, 그곳에서도 옥과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다. 기자는 차하이를 설명하면서 ‘용’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옥과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쓰지 않았다.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차하이와 같은 시대인 싱룽와 유적, 옥에 대해서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잇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면서 하기 위함이었다.

 

 

# 8000년 전의 계획도시

 

 

 

 

그런데 싱룽와는 왜 ‘중화시조취락’이라는 명성을 얻었을까. 83~94년 사이 7차례나 발굴한 조사단은 깜짝깜짝 놀랐다. 무려 175기의 집자리가 마치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주택단지의 형태로 고스란히 확인된 것이다.(차하이에서도 55기의 주거지가 발견됐지만, 싱룽와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중국에서 가장 넓고 보존이 잘된 신석기 시대 대규모 취락이다. 4만㎡에 달하는 마을은 환호(環壕·적의 침입을 막으려 도랑으로 두른 것)로 보호돼 있었다. 집자리의 규모는 보통 60㎡(약 18평)인데, 가장 큰 두 곳은 140㎡(약 42평)를 훌쩍 넘었다. 중국학자들은 바로 이 대목을 주목한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두 개의 집자리엔 영도자가 살았거나, 회의 혹은 원시종교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000년 전의 마을에 벌써 2개의 씨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학계는 이 원시마을에 약 3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각 방의 모습을 보면 취사용구뿐 아니라 생산도구, 심지어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는 가정마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또한 마을은 10개 정도의 열(列)을 지어 일정하게 구획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같은 배열에 살았던 가정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개 마을의 최소단위인 가정과, 같은 열에 사는 혈연관계로 맺은 가까운 친척, 그리고 마을 안에서 함께 살았던 먼 친척까지 하나의 씨족마을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 싱룽와 마을의 비밀

 

 

싱룽와에서는 사람과 돼지가 함께 순장된 장례풍습이 확인됐다.

 

 

 

“차하이 유적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한 점은 무덤이 주거지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죠. 옛날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고 믿었나봐요.”(이형구 교수)

 

 

무덤에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기, 골기 등과 함께 사람과 돼지를 합장한 흔적도 보였다. 이것을 순장(殉葬)이라 한다면 훗날 동이족의 나라인 상(은)도 순장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사용 구덩이에서도 돼지뼈가 다수 발견됐는데, (지금의 돼지머리처럼) 돼지는 8000년 전에도 제수용품으로 사랑받은 게 분명하다. 돼지 외에도 사슴뼈와 물고기뼈가 대량으로 나왔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돼지사육과 돼지숭배는 원시농업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서이므로 차하이-싱룽와인들은 어렵과 수렵을 주요 생산활동으로 하면서 농업을 막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차하이 옥결, 싱룽와 옥결, 고성 문암리 옥결(왼쪽부터)

 

 

 

사족을 달면 차하이와 싱룽와는 200㎞나 떨어져 있지만 연대와 문화양상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라는 용어로 묶는다.

 

 

차하이-싱룽와 유적이 중요한 것은 용(차하이)이나 취락의 규모(싱룽와) 때문만은 아니다. 차하이, 싱룽와에서 동시에 출토된 옥과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 덕분이다. 또한 확인된 175기의 주거지 가운데 5기가 동이의 문화인 홍산문화 주거지라는 점이다. 이것은 홍산문화(BC 4500~BC 2000년)가 싱룽와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었음을 웅변해준다.

 

 

옥 문화에 관해서는 옥 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홍산문화를 다룰 때 다시 언급하겠다. 다만 차하이·싱룽와에서 발견된 옥결(玉결·옥귀고리)과 똑같은 것이 최근 한반도 중부(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7000년전 유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우선 언급해두고 싶다.

 

 

여기서는 빗살무늬 토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차하이와 싱룽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를 두고 “(발해문명을 꽃피운) 홍산문화의 근원이 중국중원에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중원(황허)과 동북(싱룽와)의 신석기문화는 서로의 특색을 지닌 채 발전했으며, 두 곳의 공통점은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점이며 모두 영도자가 살았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했다.

 

 

하지만 빗살무늬 토기 문화는 주지하듯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해연안에 있는 차하이-싱룽와는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영역이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2007.11.09 (2)

 
 
 

기자는 선양 신러(新樂) 유적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고 지울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 하나의 단서를 움켜잡았습니다.

차하이에서 140㎞ 정도 떨어진 신러 유적은 차하이보다 약 500년 늦은 7500년 전 유적입니다.

 

용과 새는 동이족 상징 아닐까

 

‘사기 고조본기’에 한나라 창업주 고조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다.

“고조(유방)의 어머니 유오가 연못가에서 잠깐 잠든 사이…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때 아버지 태공이 달려가보니 교룡(蛟龍·큰 물을 일으킨다는 용)이 부인의 몸에 올라가 있었다. 얼마 후 유오가 임신하여 고조를 출산했다."

 

한마디로 한고조 유방은 용(교룡)의 자손인 셈이다. 고조본기는 한술 더 떠 “고조는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와 용을 닮았다(隆準而龍顔)”고 했다. 임금의 얼굴을 뜻하는 용안의 유래다. 젊었을 때 무뢰배였던 고조는 동네 술집에서 외상술을 먹고 술에 취해 드러눕기 일쑤였는데, 그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고조가 외상술을 먹는 날이면 그 주막의 매상이 몇 배나 올랐다.

 

비단 고조뿐이 아니다.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인 신농씨(염제)의 탄생 전설 가운데도 용이 나타난다.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은 볕을 쬐려고 나들이에 나섰다가 신비로운 용을 보았다. 여등은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임신한 것이다. 여등은 열달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염제 신농씨다.

 

 

#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

 

예를 더 들 것도 없이 ‘용=황제’이며, 중국 민족은 용의 자손으로 굳게 믿어왔다. 용은 봉황과 기린, 거북과 함께 ‘4령(靈)’의 하나였는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물의 제왕이며, 농경중심사회에서 치수를 담당하는 지배자는 용으로 비유됐다.

 

중국문헌인 ‘광아(廣雅·위나라 장읍이 편찬한 자전)’의 익조(翼條)를 보면 아홉가지 짐승의 장점만을 다 땄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입 주위에 긴 수염, 턱 밑에 명주, 목 아래는 역린이… 있다.”

 

용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상나라(BC 1600~BC 1046년) 때는 악어와 뱀, 제비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서주(BC 1046~BC 771년) 때는 입을 벌리고 있고,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의 특징이 나타난다. 진나라(BC 221~BC 206년) 때는 봉황, 악어, 도롱뇽, 뱀이 복합된 응룡(應龍)이 등장한다.

 

‘용의 후손’인 고조가 세운 한대(BC 206~AD 220년)에는 사방신(청룡·백호·주작·현무)의 하나인 청룡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발톱이 세 개인 용의 모습이 고착화한다. 이렇게 용은 중국인의 상징으로 여겼다.

 

 

 

 

 

 

# 차하이 용의 수수께끼

 

그런데 8000년 전 마을인 차하이에서, 즉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고향인 발해만 연안에서 용 형상 돌무더기와 용이 부조된 토기들이 발견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중국의 마지노선으로 여겼어요. 만리장성을 쌓은 까닭이 무엇이겠어요. 장성을 넘으면 그것은 중원이 아니고 오랑캐의 땅이라 여겼거든….”(이형구 선문대 교수)

 

그런 가운데 8000년 전 유적인 차하이에서 용이 발견되니, 숱한 격론을 벌인 끝에 차하이를 ‘중화 제1촌’, 즉 중화의 본향으로 인정하는 고육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용신앙은 중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용과의 관계는 뿌리 깊다.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용 유물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용이 설화의 중요한 화소(話素)로 등장하며 물의 신, 시조의 어버이, 제왕, 호국·호법의 신, 예시·예언자적인 존재로 나타난다”면서 “천후(天候)의 다스림이 절대 필요한 농경문화권에서는 용과 군왕이 자연스레 결합된다”고 말했다.

 

우선 삼국유사 북부여조를 보면 “BC 58년 4월8일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창업했다”고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을 낳은 것은 계룡(鷄龍)이며, 신라 4대왕 석탈해는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 왕의 아들이었다.(삼국유사)

 

또 백제 30대 무왕은 과부(寡婦)인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삼국유사)이며, 소정방은 백마강의 용을 잡고서야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 우리나라 용이 호국·호법의 상징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가장 특이한 점이다.

 

삼한 통일의 대업을 문무왕은 평소 “죽으면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문무왕은 그 말대로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됐으며, 아들 신문왕은 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다. 용(문무왕)의 출입문으로 말이다.(삼국유사 만파식적조)

 

수호신으로서 용 이야기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만도 86편이나 기록돼 있을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최소한 23건, 삼국유사엔 24건의 용 관련 기록들이 나타난다. 고려 창업주 왕건도 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려사)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바다 한복판에서 부처로 변신한 여우에게 핍박을 당하는 용왕을 구해주고 그의 딸 용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작제건과 용녀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이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이다. 그러니까 왕건의 할머니가 용인 것이다. 용이 국가 권력의 신성성을 인정해주는 보증수표였던 것이다.

 

용 관련 유물들도 차고 넘친다. 고구려의 경우 무용총, 삼실총, 장천1호분, 약수리 벽화분, 덕화리 1호분, 호남리 사신총, 강서중묘 등에 사신도의 일원으로 청룡이 등장한다. 신라의 경우도 고리자루칼, 청동초두, 허리띠 장식, 와당, 서수형 토기 등에 용이 표현됐다. 백제도 무령왕릉의 팔찌, 동탁은잔, 고리자루칼, 금동대향로 등에서 용을 썼다.

 

 

 

# 용의 몸을 지닌 새(鳥)

 

 

용과 새가 한꺼번에 표현된 유물(지팡이)가 출토된 선양 신러유적. 사진은 유적을 복원해놓은 모습이다. 새는 홍산문화의 옥에서도 잘 표현됐다. 신러/김문석기자

 

 

 

 

 

그런데 ‘차하이(査海) 용’을 보던 기자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전통적으로 용은 중국 민족의 상징이라고 하고, 동이족의 토템은 ‘새’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이의 상징이라는 ‘새’는 어찌된 걸까.

 

 

2400년 전 유적인 대전 괴정동에서는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려넣은 농경문청동기가 확인됐는데, 청동기 뒷면엔 새 한 쌍이 마주보는 솟대가 보였다. 그만큼 새 신앙의 역사가 뿌리 깊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때까지는 용이 임금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봉황이 대통령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기자는 7월30일 선양 신러(新樂) 유적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고 지울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 하나의 단서를 움켜잡았다. 차하이에서 140㎞ 정도 떨어진 신러 유적은 차하이보다 약 500년 늦은 7500년 전 유적이다.

 

“자, 이 유물은 권장(權仗·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이라는데, 새 모양이잖아요.”(이형구 교수)

 

 

38.5㎝의 나무 지팡이는 신러 유적의 가장 큰 주거지에서 발견됐다. 발굴자는 이 유물은 나무로 새의 부리와 머리, 눈, 코, 꼬리를 조각한 것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는 씨족이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하이의 ‘용’과 신러의 ‘새’라. 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자는 궈다순(郭大順)의 책, 즉 ‘용은 랴오허에서 태어났다(龍出遼河源)’를 들춰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궈다순은 이 새 모양의 지팡이를 용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새의 몸을 자세히 보면 용의 비늘 같은 문양이다. 즉 용을 나무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은 권장일 수도 있지만 비녀로 볼 수도 있다. 민족지 자료를 보면 비녀는 계급을 나타내는 예기(禮器)이다. 신러에서 발견된 유물은 여인이 실제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운 크기다. 예기였다는 증거다.”

 

 

 

# 용과 새는 동이의 상징

 

 

 

 

궈다순의 해석처럼 이 유물이 권장인지, 아니면 비녀인지, 그리고 그것이 용을 표현한 것인지, 새를 표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용의 몸을 하고 태어난 새. 즉 용과 새를 한꺼번에 표현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형구 교수가 의견을 내놓는다.

 

“결국 7000~8000년 전 발해만에서 살던 사람들은 용과 새를 함께 모신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교수는 차하이·싱룽와(興隆窪)-신러문화의 뒤를 잇는 홍산문화에서도 용과 새 문양의 옥제품이 섞여 나오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용과 새를 함께 모신 사람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앞서 우리 민족과 용의 밀접한 관계를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로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과 새의 관계 또한 두껍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든 부여 창업주 해모수와 신라 박혁거세, 석탈해 신화는 용은 물론 새가 상징하는 천강(天降·하늘에서 내려오는) 신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용과 새가 같은 신화 안에 공존한다는 뜻이다.

 

백제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는 용이 입을 벌린 채 향로를 받치고 있고, 맨 꼭대기에는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봉황이 서있다.

 

이형구 교수는 “용은 물을 상징하지만,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에 천계를 넘나드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인들은 용을 신앙으로 삼지만 새는 그렇게까지는 신성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천진기 과장은 “물론 봉황을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라고 하지만 용처럼 그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동이의 나라인 상나라만이 난생신화를 건국신화로 삼고 있다. ‘사기’ 은본기에는 “은(상)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임신한 뒤 낳은 이가 바로 설(契)이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결국 용과 새를 동시에 신성시한 종족은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는 뜻이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5) 신러유물 권장(權仗)의 비밀. 2007.11.02.

 
 
 
 
 

 

 
 
 
 
 
 
 

 

 
 
 
 

 

<자료출처>

 

 

 

(1) [코리안루트를 찾아서](4) 동이의 본향, 차하이 - 경향신문 (khan.co.kr)  2007.10.26

 

 

(2) [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 경향신문 (khan.co.kr)  2007.11.09

 

 

(3) [코리안루트를 찾아서](5) 신러유물 권장(權仗)의 비밀 - 경향신문 (khan.co.kr)  2007.11.02

 

 

 

 

<참고자료>

 

 

 

싱룽와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러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흥륭와문화

 

 

신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사해문화

 

 

 

서기전 7200년~600년 경 요동·요서지역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 청동기~초기철기시대 한반도 남부로 이어져   - K스피릿 (ikoreanspirit.com)

 

 

북만주 소남산 옥기, 홍산 문화보다 3천 년 앞서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내몽고 신석기토기 인사동서 본다> | 연합뉴스 (yna.co.kr)2010-07-13 

 

 

고고학적 측면에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민족학연구 - 한국민족학회 - KISS (k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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