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씨가 주워온 것은 길이 8.5㎝, 촉 3㎝, 두께 1㎝나 되는 큰 석창(돌로 만든 창) 1점과 긁개 1점(길이 4.3㎝)이었다. 석창과 긁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제작 기법인 잔잔한 눌러떼기 수법으로 성형했다. 지표조사 결과 마제석부(자갈들을 때려 다듬은 다음 날부분과 몸통부분을 부분적으로 간 것) 1점과 각편석기 1점을 추가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후 7개월이 지난 88년 1월, 영남대 대학원생이던 강창화씨(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한번 조사해보고 싶었어요. 겨울 바람을 헤치고 이리저리 헤맸죠.”
그의 눈에 띈 곳은 수월봉(해발 65m)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국토방위군이 파놓은 참호였다. 그런데 참호의 단면 50㎝ 바닥 가까이에서 뭔가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조심스레 파보니 그것은 융기문토기(隆起文·덧띠새김무늬)였다. 덧띠의 문양은 첫 줄은 수평을 이루지만, 둘째줄과 셋째줄은 일정한 간격마다 S자와 포물선으로 크게 휘어진 형상이었다.
농부 좌정인씨가 수습했던 석창과 긁개. 문화유산은 이렇게 이름없는 백성들 덕분에 찾고 보존된다.
“이런 석창과 긁개, 마제석부, 그리고 융기문 토기의 잇단 발견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저 몇 점 수습했을 뿐인데, 후기 구석기 말~신석기로 이행하는 단계의 유물(석창과 긁개 등)과, 신석기 초기 유물(융기문 토기)가 나왔으니까요.”(강창화씨)
이렇게 뜻깊은 단서가 나오자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제주대박물관은 91~92년 겨울 약 6000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이어 94년부터 98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졌으며, 모두 10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졌다.
■그들은 ‘맥가이버’였다
이쯤해서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전환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말해 고산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즉 1만2000~1만년 전의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어요. 물론 연대에 관해서는 다소간 논란은 있겠지만….”(조유전 관장)
고고학적인 설명을 가하자면 동북아 후기 구석기의 전형적인 문화는 이른바 세형돌날문화(좀돌날문화)이다. 작은 몸돌에서 눌러 떼어낸 아주 자그마한 돌날과 긁개, 조각도, 석촉, 창끝, 양면석기, 송곳 등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동북아 후기 구석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기가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5㎝가 될까 말까 한 몸돌에서 맥가이버처럼 아주 다양한 도구들을 척척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5㎝도 안되는 몸돌을 깎아 다양한 도구를 만든 구석기 최말기를 풍미한 사람들. ‘맥가이버’란 별명을 들을 만하다. <강창화씨 제공>
그런데 1만년 전을 전후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도구,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농경과 간석기, 그리고 토기의 출현을 신석기혁명이라 하지. 그런 점에서 이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의 세형돌날 문화와 신석기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古土器)가 속출했고,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출현을 알리는 토기 즉 융기문 토기가 나왔다는 게 의미심장해요.”(조유전 관장)
부연 설명해보자. 고산리에서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의 전통이 밴 세형몸돌, 세형돌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 양면 석촉(돌화살촉) 등이 속출했다. 또한 신석기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 조각도 2500여점이나 확인됐다.
“고산리에서는 특히 문양이 없는 원시 고토기 즉 식물성 섬유질이 혼입된 고토기가 전체 수량의 85% 이상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토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세형돌날문화(1만1000~1만년 전)에서 보이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여명기에 출현하는 고토기와 흡사한 모습입니다.”(강창화씨)
이런 고토기는 인류가 토기라는 것을 처음 만들면서 450~600도에서 구운 저화질 토기이다. 구울 때 성형(成形)을 위한 보강재로 식물의 줄기를 섞었다. 연한 억새풀 같은 것을 짓이겨 썼다. 그런데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두개 있다. 우선 첫번째.
“희한한 것은 이런 고토기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조유선 관장)
“예. 그래서 학술적으로 이 고토기를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게 되었지요.”(강창화씨)
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은 고토기가 제주도에서는 보일까. 두번째 수수께끼. 이런 고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8000년 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구석기와 신석기에 넘나든 경계인
“제주도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곳, 즉 1만1000~1만년 전의 유적은 고산리 한 곳밖에 없다는 겁니다.”(강창화씨)
반면 8000년 전부터로 편년되는 융기문(덧띠무늬) 토기문화가 제주도에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다. 또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본향에서 흔히 확인되는 지(之)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지(之)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지그재그형의 사선으로 짧고 깊은 문양을 보인다.
기자는 이쯤해서 지난해 발해문명의 시원지, 즉 동이(東夷)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을 비롯, 다링허(大凌河)·랴오허(遼河) 유역에서 기자의 손으로도 숱하게 수습할 수 있었던 융기문·빗살무늬 토기들을 떠올렸다.
또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확인된 강원 고성군 문암리와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도….
“융기문 토기는 시대의 선후는 있을지언정 문암리·오산리 등 동해안뿐 아니라 남해안, 충청내륙, 남해안 도서지방에서도 확인되지.”(조유전 관장)
강창화씨는 특히 제주도산 태토로 만들어진 융기문 토기가 제주도와 가까운 여서도에서 확인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융기문 토기와 지(之)자문 토기를 포함한 빗살무늬 토기는 발해문명, 즉 동이족의 문화라고 하지 않았나.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고산리 유적을 발굴 중인 조사단. 인공석인지, 자연석인지 구별이 어려운 구석기 발굴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고산리 유적에서 강(창화) 선생이 수습한 융기문 토기와 고산리식 토기는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요.”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인 세형몸날문화+고산리식 고토기와, 초기 신석기 문화의 지표유물인 융기문 토기가 함께 나왔다면 문화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기자는 바로 그 점을 물은 것이다.
“제가 88년 1월 고산리 인근 참호에서 발견한 융기문 토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그곳에서 융기문 토기 1개체분을 확인한 뒤 무려 165㎡(50평) 이상을 더 팠습니다. 하지만 고산리식 토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떨어진 문화라는 뜻, 바로 융기문토기와 고산리식 고토기(식물성 고토기)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의미죠.”(강창화씨)
강씨는 제주도 삼양동 유적의 예를 든다. 즉 이곳에서는 신석기 초기의 토기인 세선(細線) 융기문토기(가는 선으로 덧띠를 만든 토기)와 함께 어로용 도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고성 문암리, 양양 오산리 유적과 닮은꼴이었다.
자, 다시 요약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만1000~1만년 전 중국 동북과 연해주 사이인 아무르 강에서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 지금의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치자. 그들은 세형돌날문화와 식물성 섬유질을 보강한 고토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의 여명기, 즉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풍미한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 뒤 융기문과 지(之)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 이때가 8000년 전 쯤이다. 이후 제주도는 광범위한 동이의 문화권이 되어 문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지금에 이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6월 말, 기자는 숱한 호기심을 품고 조유전 관장과 함께 고산리 유적을 찾았다. 역시 제주도다웠다. 비바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다. 할 수 없이 철수하고 오후에 다시 찾아갔다. 우리를 안내한 탐라매장문화재연구원의 윤중현 연구원이 협재해수욕장 쪽에 있는 섬 하나를 가리켰다.
“비양도인데요. 제주도에서 가장 최근인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화산폭발이 일어난 곳입니다.”
새삼 제주도가 화산섬이라는 느낌이 가슴에 와닿는다. 다시 찾은 고산리 현장. 비바람에 쫓긴 아침엔 몰랐는데, 현장은 한장밭이라 일컬어질 만큼 해발 고도 15~20m 가량의 평탄대지다.
“이런 평탄대지이니 삶의 터전을 마련했겠지. 예나 지금이나 좋은 터와 경관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가지인 거야.”(조유전 관장)
조 관장과 기자는 인근 수월봉을 찾아 유적의 경관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절경이죠. 저기 보이는 차귀도와 이곳 수월봉, 그리고 저쪽의 당산봉(해발 148m)은 이른바 기생화산(오름)인데요. 저기 당산봉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중국의 상하이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중국과 가깝습니다. 이곳은 아직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 절경 중 하나입니다.”(윤중현 연구원)
기생화산은 주로 10만년~2만5000년 전에 이뤄졌는데, 특히 고산리 현장을 품고 있는 수월봉 일대는 현무암 덩어리가 섞인 화산재로 이뤄졌다.
“얕은 바닷속에서 분출한 수중폭발화산이라 이런 모양입니다. 1000도가 넘는 뜨거운 용암이 물을 만나 폭발하는데, 물과 용암의 비율이 1 대 1이면 폭발이 가장 커서 경사가 거의 수평에 이르는 응회암(수월봉처럼)을 이룹니다. 성산일출봉과 비슷한 형상입니다.”(강창화씨)
그렇다면 1만1000~1만년 전 제주도에 닿은 인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절경을 찾았을까. 2000여년의 세월을 풍미한 그들은 왜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떻게 융기문 토기문화를 지닌 동이의 문화가 제주도에 안착했을까. 그 미스터리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1)
후기 구석기 최말기(세형돌날문화)~신석기 여명기(고토기문화)를 산 경계인들이었다. 출발지는? 고산리 신석기 유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는 지금의 아무르 강 유역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식물성 고토기의 모양이 아무르강 유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을 꼽는다. 그들은 어떻게 이 머나먼 제주 땅까지 왔을까.
■ 육지였던 황해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단은 1만년 전의 기후나 지형을 한 번 살펴봐야겠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예,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를 연구해봤습니다.”(강창화)
결론적으로 말해 1만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으며,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는 게 강창화의 결론이다.
“지금으로부터 2만~1만8000년 전이 마지막 빙하기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서해안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150m 아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의 중국 동부해안과 서해안이 하나의 육지, 즉 황토층이었다는 것입니다.”(강창화)
“어디 황해뿐인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베리아 최동단 추코카(Chukotka) 반도와 알래스카의 최서단 스워드 반도가 서로 연육되었다잖아.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곳을 베링육교라 하지.”(조 관장)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고산리에 정착한 사람들은 육지였던 황해가 해수면 상승으로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는 과정에서 막차를 탄 셈입니다.”(강창화)
“1만1000~1만년 전 사이, 즉 1000년 동안 해수면이 급속도로 상승했다는데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기자)
“수렵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은 사냥감을 찾아 하루에 최고 50㎞씩 이동했다는 분석도 있기는 해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는 얘기죠.”(조 관장)
“급속도로 해수면이 증가했다지만 1000년이라는 세월이잖아요. 하루 아침에 물이 불어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물이 서서히 불어났을 겁니다.”(강창화)
■ 지구온난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제주 고산리에서 확인된 식물성 고토기(사진 오른쪽). 아무르강 유역의 고토기(왼쪽)와 유사하다. 오른쪽 지도는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화산이 빚어낸 빼어난 절경의 제주 땅 고산리에 둥지를 튼다. 식물성 섬유질 토기와 세석기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도구를 사용하면서….
그러나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땅은 외딴 섬으로 고립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환경변화로 인해 고산리 사람들의 삶도 정체되고 만다. 이윽고 2000여년이 지난 BC 6000년 쯤부터 섬이 된 제주도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다.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땅을 밟기 시작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융기문 토기(덧띠무늬)와 지(之)자문 토기를 쓰는 사람들이며,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동이족의 후예였다.
“토기에 융기문, 빗살무늬 문양을 넣을 줄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죠. 토기의 표면을 화폭 삼아 다양한 무늬를 덧대거나 새기거나 그리지요.”(조 관장)
새로운 이주자가 도착하자 고산리 문화는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고산리식 토기와 석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엔 지구온난화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그렇죠. 지구온난화의 산물이라 해석해도 되겠죠. 아직도 남는 수수께끼는 있어요. 고산리 사람들과 융기문 토기를 쓴 사람들은 과연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족인지….”(강창화)
여하튼 절해고도가 된 제주땅을 차지한 융기문 토기인들은 왕성한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제주땅을 풍미한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의 문화가 이어집니다. 중산간지역에 폭넓게 발견되는 융기문 토기문화가 그 예입니다.”(강창화)
이후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파상적으로 밀려들어온다.
지난 6월 말이었다.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제주 삼양동 유적(사적 416호)을 찾았다. 230여기 집자리가 확인됐고,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지, 즉 뭍의 문화가 성행했음을 증거하는 마을유적이다.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확인되어 그 이름을 얻은 송국리형 주거지는 원형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의 구멍을 파고 기둥 두 개를 세우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이다. 강창화가 들려주는 여담 하나.
제주 무릉리에 복원된 송국리형 집자리. 제주의 거센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제공>
“원형 집자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예를 하나 들까요. 제주의 비바람은 유명하잖아요. 몇년 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지붕까지 날릴 정도였는데…. 저희 재단(제주문화예술재단)이 무릉리 폐교 운동장에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복원했는데, 월드컵경기장 지붕을 날린 비바람이 불어닥쳤을 때도 이 복원된 집자리는 끄떡없었습니다.”
2000년 전 기법대로 축조한 집자리는 끄떡없고 21세기 최첨단 시설물은 바람에 날아가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각설하고 제주의 송국리형 주거지는 BC 3세기를 상한으로 해서 기원전후를 중심연대로 갖고 있다. 그런데 삼양동 대형집자리에서는 옥환(玉環), 청동칼 조각, 유리환옥 등 중국 및 한반도산의 흔적이 보인다. 옥은 두말할 것 없는 발해연안 등에서 확인되는 동이문화의 원형이다. 또한 화폐도 엿보인다. 제주 산지항과 금성리 패총유적의 예를 보면 오수전(五銖錢·BC 118년부터 주조된 중국돈)과 화천(貨泉)·화포(貨布·기원 직후에 주조된 중국 돈) 등이 확인되었다.
이제 역사로 되돌아 가보자.
■ 탐라시대의 개막
“그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하는 ‘주호(州胡)’시대와 연결될 수 있을까요?”
삼양동 유적과 관련, 이청규 영남대 교수에게 물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진수(陳壽·233~297년)가 삼국지를 쓴 것이 AD 3세기잖아요. 삼국지에 쓰여진 내용은 저자인 진수보다 앞선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많으니까 삼양동 유적이 주호시대와 얼추 맞을 수도 있겠네요.”(이청규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자.
“ ‘주호’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다.”
제주도에는 BC 200~AD 200년 사이에 한반도 남부, 즉 해남 군곡리와 사천 늑도에서 확인되는 덧띠무늬와 마한계 토기들이 엿보인다. 이는 마한과의 교역상을 입증해주는 자료이다. 삼국사기에는 AD 5세기 말에 탐라국(耽羅國)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문주왕 2년(476년) 탐라국이 방물을 바쳤다.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恩率)로 임명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조)
탐라 사신이 받은 은솔 관직은 백제 16관등의 하나이며, 좌평(佐平)·달솔(達率)에 이어 세번째인 고위직이다.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지요. 백제의 위세가 당대 대단했으니 탐라가 백제의 조공국을 자청했다는 뜻도 되고…. 또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탐라가 조공을 자청하니 백제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겠지요. 제3품 고위직을 내줄 정도로….”(조 관장)
백제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보이는 사료는 동성왕 20년(498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동성)왕이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친히 치고자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백제본기 동성왕조)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는 무진주는 오늘날의 광주 일대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뜻을 안고 있는 기록이다. 즉 백제왕이 군사를 이끌고 광주에 이르렀다는 것은 백제의 영역이 확고하게 광주, 아니 전라도 남부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동시에 탐라가 문주왕 이래로 시세에 따라 조공을 잇고 끊고를 거듭하는, 이른바 밀고당기는 외교를 펼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국(백제)과 소국(탐라)의 관계였던 셈이죠.”(이청규 교수)
“탐라가 백제의 속국은 아니었던가요?”(기자)
“삼국사기 어디에도 탐라가 백제의 속국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요.”(이 교수)
“그렇지요. 탐라국이 동성왕에 사죄했다는 것이 바로 속국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독립국의 위상을 갖고 있으면서 조공을 바치는 사이, 뭐 그런 정도가 아니었을까요?”(조관장)
이는 백제의 멸망(660년) 직후를 기록한 당나라 역사서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 소국의 생존전략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신라·백제·탐라·왜 등 4개국 사신을 거느리고 당으로 건너가~제사를 지냈다.”(당회요·唐會要)
이근우 부경대 교수는 이런 사료를 토대로 “당나라는 탐라의 사신을 초청할 정도로 독립된 정치체로 간주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 탐라는 백제멸망 후 2년 만인 신라 문무왕 2년(662년) 신라에 복속된다.
“탐라 국주(國主)인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했다. 탐라는 무덕(武德) 연간 이래 백제에 신속(臣屬)되었기에 좌평(佐平)의 이름을 삼았는데, 이제 우리(신라)의 속국이 되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무슨 말인고 하면 탐라는 무덕(당나라 고종의 연호) 연간(618~626년) 사이에 비로소 백제의 속국이 되었고, 탐라왕의 벼슬도 백제의 최고관등인 좌평을 받았는데, 백제멸망 후 2년 만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문무왕 19년(679년) 사신을 보내 탐라를 위무했으며, 애장왕 2년(801년) 탐라의 사신이 조공을 보냈다는 삼국사기 기사를 토대로 보자. 이것은 속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기보다는 종주국과 조공국의 사이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탐라는 이후 고려중기까지도 독립국의 위상을 유지하다가 숙종 10년(1105년) 고려의 군으로 편입됩니다. 1만년 전부터 시작된 제주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셈입니다.”(강창화)
“고산리 유적이 담고 있는 함의는 크네요. 제주역사가 한낱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제주는 화산이 낳은 자연유산으로만 알려질 수 없다는 것…. 또 하나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라는 극적인 환경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네요.”(조 관장)
조 관장의 말마따나 요즘의 지구온난화에 대비하려면 1만년 전 제주 고산리를 연구해보면 어떨까. 다만 1만년 전의 지구온난화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이었다면, 요즘의 지구온난화는 사람이 뿌린 불행의 씨앗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2)
옥 귀걸이는 7000년 전 ‘흥륭와 문화’와 교류한 흔적
중앙선데이 입력 2012.06.30 22:14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신석기 유물들. 신석기 조기(早期)의 융기문 토기와 돌칼, 돌 도끼, 돌 낚시 등이다. 그 가운데 옥 귀걸이(가운데 붉은 원 내)는 BC 5000년쯤 내몽골 흥륭와 문화와 교류한 증거로 추정된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년대 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인근 동해안에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해변에 뒹구는 토기 파편들이 발견됐다. 신석기 전기의 융기문ㆍ압날문 토기 파편이었다. 98년 발굴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신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는 유물들이 나왔다. 2001년엔 사적 제426호로 지정됐다. 2002년부터 조기(早期) 신석기 유적이, 2010년부터는 중기 유적들이 나왔다(동해안의 경우 신석기 조기는 BC 6000년, 전기는 BC 5200~4600년, 중기는 BC 3600~3000년이다).
98년과 2002년엔 전기ㆍ조기의 유물인 융기무늬 토기와 오산리식 토기 등 신석기 전기의 대표적 유물이 나왔다. 2010년부터는 주로 중기에 집중돼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다. 최근 문암리에서 발견된 동아시아 최초의 밭 터는 한국 신석기사를 BC 3000년으로 1500년쯤 앞당겼다. 지금까지는 청동기 시대(BC 1500~400년)가 최초로 간주됐다.
BC 5000년쯤 두 곳에서 각각 만들어진 옥귀걸이. 위는 내몽골 흥륭와, 아래는 강원도 문암리의 귀걸이다.
그런데 문암리엔 신석기의 비밀을 간직한 유적들이 밭 말고도 더 있다. 신석기인들은 문암리에 밭을 만들고 곡물을 재배하며 오래 살았다. 조기에는 모래 없는 구릉, 전기엔 모래가 쌓인 구릉, 중기엔 모래가 더 쌓인 곳이 거주 터였다. 98년 2기, 2002년 3기, 2010년 1기, 2011~2012년 5기 등 발굴된 10기의 주거지가 그걸 말해준다. 그러다 돌연 문암리는 선사시대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파괴행위로 폐허가 됐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청동기ㆍ철기 시대의 유물도 없다. 범람이건 해일이건 물에 실려온 모래에 가라앉았을 뿐이다. 최소 2000년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현장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홍형우(작은 사진·49) 학예연구관을 만났다. 우선 밭에 대해 물었다.
-밭의 의미가 그렇게 큰가. “신석기의 밭이 탄화된 조와 함께 나온 적이 없어 그렇다. 우리도 처음엔 이 밭이 신석기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랑과 고랑 형태를 띤 경작지가 나와 알게 됐다. 경기도, 황해도, 경상남도 등지에서 일찍이 탄화된 조ㆍ기장 같은 것이 나왔고 그래서 신석기 때 이 곡물을 재배하는 농사가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럼에도 밭에서 농사의 직접 증거가 발견되지 않다가 이번에 탄화된 조가 있는 밭이 발굴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처음이다. 유럽 고고학계는 농경이 신석기 초기에 시작됐지만 동아시아, 특히 동북 아시아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그런데 문암리엔 밭의 의미를 뛰어넘는 유물도 있다. 옥 귀걸이다. 귀걸이의 배경은 30년 전쯤으로 돌아간다. 80년대 후반 중국 동북부 네이멍구 자치구, 랴오닝성에서 희귀 신석기 유물들이 속속 발굴됐다. 옥(玉)ㆍ용(龍)ㆍ복골(卜骨)ㆍ봉(鳳) 같은 것이 여러 지역, 여러 지층에서 발굴됐다. 이 전체를 요하 문화 혹은 홍산 문화라고 부른다. 발굴 지역에 따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소하서 문화(BC 7000~6500년), 흥륭와 문화(BC 6200~5200년), 사해 문화(BC 5600년~5200년), 부하 문화(BC 5200~5000년), 조보구 문화(BC 5000~4400년), 홍산 문화 등이다. 중국 학계엔 충격이었다. 인류 최고 문명인 황하문명(BC 5000년)보다 앞선 문화가 북방민족의 활동 무대로 여겨져온 중국 동북부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4년 7월 24~28일 네이멍구 적봉에서 제1회 홍산 문화 국제학술연토회가 있었다. 거기서 ‘흥륭와에서 발견된 옥 귀걸이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귀걸이’라는 내용이 발표됐다. 문암리 미스터리의 시작이다.
문암리는 98년~2002년 3차에 걸쳐 발굴됐다. BC 5000년 지층에서 주거지와 무문양 토기가 출토됐는데 함께 옥 귀걸이 한 쌍(사진)이 함께 출토됐다. 홍산 문화 전문가인 항공대 우실하 교수에 따르면 문암리 옥 귀걸이의 모양은 흥륭와 옥 귀걸이와 모양이 거의 같다. 옥 귀걸이를 고리로 한반도 동해안의 문암리가 중국 동북부 흥륭와~사해~부하 문화 시대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지금부터 7000년 이전,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두고 비슷한 모양의 옥 귀걸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두 귀걸이가 비슷한 걸 어떻게 해석하나. “한쪽이 터진 도너츠 모양의 절상이식 방식인 옥 귀걸이는 독특한 데다 흔히 나오는 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홍산 문화와 교역ㆍ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뿐이어서 활발한 교류로 보기는 어렵다.”
-그 옛날 어떻게 네이멍구와 강원도 문암리의 교류가 가능한가. “그게 의문이고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런 문제는 구석기 시대 한반도 석기를 둘러싸고도 나온다. 흑요석 산지는 백두산, 캄차카 반도인데 거기까지 가서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과 비슷하다. 중간에 전달된다고 볼 수도 있다.”
-대만의 옥기 전문가인 장경국·진계현은 1.7㎝ 두께의 옥에 구멍을 뚫는 실험을 했는데 31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이런 귀한 옥 귀걸이를 쓴 사람은 최고지도자나 샤먼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문암리에 권력 집단이 있다고 가정할 수 없나. 그리고 그 집단은 홍산 지역에서 이동한 북방 민족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가능할 수 있지만 옥 귀걸이만으론 어렵다. 이를 홍산 지역 주민이 이동해 이곳에 와 살았다고 보려면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주거지를 만드는 방식이나 사용했던 석기, 토기도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차이가 크다. 특히 토기가 그렇다. 홍산 문화의 토기는 지자문 토기다. 크게는 빗살무늬지만 세부적으로는 많이 다르다. 문암리 토기는 홍산보다 두만강 토기와 닮았다. 홍산에는 문명이라 말할 수 있는 여신, 제단, 용 같은 세트가 나오고 신전사회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암리엔 무덤과 주거지밖에 없다.”(3)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식물고고학을 통한 선사 시대 농경화 연구'의 하나로,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시행한 '양양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壓痕, 눌린 흔적) 조사'에서 농경과 관련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의 팥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팥의 압흔은 신석기 조기(8000~6500년 전)와 중기(5500~4500년 전)에 각각 1점이 확인되었다. 팥 압흔의 크기는 각각 2.2㎜, 2.8㎜ 정도로 현재의 팥(4~8㎜)보다는 작으며 팥 압흔이 확인된 토기 표면의 탄화유기물을 미국 베타연구소(Beta Analytic)에서 연대 측정한 결과,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팥을 이용한 시기로는 5000년 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번 가장 오래된 판 흔적 발견 결과로 인하여 2000년 더 이른 시기에 팥이 이용됐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특히, 신석기 조기부터 중기에 걸쳐 팥이 이용되는 과정에서 크기가 점차 커지는 재배화 경향까지 확인되어 농경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는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이 확인되었다. 농업 해충으로 알려진 노린재목(학명: Hemiptera)에 속하는 곤충으로, 선사 시대 농경과 관련해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곤충 압흔이 발견된 점토 덩어리와 함께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 등도 확인되었다. 이는 신석기 중기에 와서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석기 시대 식생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번에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양양 오산리와 송전리 유적은 지난 2006년 (재)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 조~중기에 해당하는 주거지, 야외노지, 저습지 등이 확인되면서 중부 동해안 지역 신석기 시대 문화상 연구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 곳이다.(4)
국내 最古 신석기 주거지.토우 출토
2007. 6. 23. 13:44
【대전=뉴시스】
강원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신석기 유적에서 국내에서 조사된 주거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기원전 5570~5480(보정연대)의 주거지 5동과 곰 등 동물 모양의 토우(흙인형)가 확인됐다.
(재)예맥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 중인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72-2번지 일원의 양양 여운포~송전 간 도로개설부지 내 유적에 대해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의 조사한 결과 신석기시대 조기와 전기에 속하는 주거지 5동과 중기에 속하는 주거지 1동, 야외노지 2기가 발견됐다고 23일 밝혔다.
조사지역은 해발 5m 내외의 황갈색점토층(고토양층)으로 이뤄진 저위 구릉 상면에 형성된 사구지역과 남쪽의 습지지역으로 나눠 진다.
현재까지 조사된 유구는 신석기시대 조기와 전기에 속하는 주거지 5동과 중기에 속하는 주거지 1동, 야외노지 2기가 조사됐다.
조사된 주거지 중 6호 주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5기는 신석기시대 조기와 전기의 주거지로 판단되고 있으며 전기 주거지 중 시기가 가장 늦은 1.2호 주거지의 면적은 48㎡(15평), 53㎡(17평)으로 신석기시대 전기 주거지의 면적으로는 대형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조사지역 북쪽의 해발 4m 내외의 사구지대에 위치한 5호 주거지는 출토유물이 없어 성격규명에 어려움이 있으나 토층상 이번에 조사된 신석기시대 조기와 전기 주거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화덕자리에서 채취한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도 BC 5570~5480(보정연대)로 확인돼 국내에서 조사된 주거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 문화층은 크게 3개의 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층은 침선문 토기를 공반하는 신석기시대 중기 문화층이며, 중층은 융기문 토기를 공반하는 신석기시대 전기 문화층으로 다시 상.하의 2개층으로 세분된다.
그리고 하층은 융기문토기가 포함되지 않은 신석기시대 조기 문화층으로 황갈색점토층 상면에 분포하고 있다.
하층의 출토유물 중 토기류는 무문양 토기와 함께 압날점열구획 주칠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무문양토기는 제주 고산리 유적, 청도 오진리 유적 등에서 출토된 고식토기로, 우리나라 토기문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 앞서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기류는 석부, 결합식 낚시, 석촉류 등의 간석기와 어망추, 새기개, 몸돌, 좀졸날 몸돌 등의 뗀석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층 출토 결합식 낚시는 오산리식 토기와 융기문 토기가 출토되는 중층 문화에 비해 크기가 작고, 고식으로 판단되며, 어망추도 소형에 해당된다.
또한 구석기시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뗀석기들이 공반돼 출토되고 있으며, 중석기 혹은 후기구석기 최말기의 대표적인 지표유물인 좀돌날 몸돌 및 좀돌날이 소량이기는 하지만 출토되어 구석기시대의 문화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출토유물 중 곰 등의 동물을 형상화한 토우가 출토됐으며 이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예술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토우 등의 출토는 선사시대의 토템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 신석기시대 조기 및 전기 문화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재)예맥문화재연구원은 현재까지의 조사결과와 향후 발굴조사 방향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한 관계전문가 지도위원회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현장설명회를 25일 오후 1시 진행한다.(5)
14일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에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나뭇조각 등 유기물질이 남아있는 저습지 유적을 처음 본 순간 대박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창녕=김경제 기자kjk5873@donga.com “저 논바닥 보이죠? 이곳이 8000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14일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전시관 앞.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11년 전 발굴 현장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나무배를 비롯해 첫 ‘똥 화석(분석·糞石)’,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등이 출토된 대표적인 선사 유적지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배(비봉리 1호)는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조몬 시대 목선에 비해 2000년 이상 앞선다.
발굴의 ‘구루’들에게는 상서로운 꿈자리가 따르는 걸까.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직전 아내가 용꿈을 꾼 신광섭 울산박물관장(본 시리즈 2회)처럼 2005년 발굴 당시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던 임학종 역시 기묘한 꿈을 꿨다. ○ 우리나라 최고(最古) 나무배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나무배’.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발굴을 위해 십자형으로 둑처럼 쌓은 곳에 돼지꼬리 모양의 끈이 달려 있는 꿈을 꿨어요. 느낌이 심상치 않으니까 뭔가 납작한 판이 나오면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내게 보고해 주시오.”
2005년 6월 초순 임학종은 김해박물관 조사원들에게 느닷없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는 꿈에서 본 끈을 배를 접안시킬 때 사용하는 밧줄로 해석했다. 주변에서 온갖 물고기 뼈와 조개, 대형 어망추 등이 출토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이곳은 수천 년 전 바닷가였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배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나무배가 130척이나 출토됐지만 국내에서는 신석기시대 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조사원들은 ‘더위를 드셨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달 24일 오후 3시 유적 북쪽 끝 개흙. 지표로부터 6m, 땅속의 가장 아래 패각층까지 드러난 지점에서 굴착기 기사가 “그만 파자”고 했지만, 임학종은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긁어 보자”고 채근했다. 삽날로 지면을 살짝 긁는 순간, 노란 선이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윤곽선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뛰어 내려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판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흙 속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쑤셔 넣고 쭉 훑어봤는데 한참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야. 이 정도 크기의 나무판이라면 100% 배가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순간 몸에서 전율이 일어납디다.”
발굴단이 1시간에 걸쳐 개흙에서 파낸 나무배는 길이 310cm, 너비 62cm 크기였다. 발굴단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유적 위에 천막을 치고 나무배 전체에 중성지를 덮었다. 변조와 부식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나무 특성상 현장에서의 보존이 관건이었다. 배에서 조그만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을 박성진 경북대 교수(임학)에게 자문한 결과 수령이 약 200년 된 소나무로 판명이 났다.
발굴단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급파된 목재 보존 전문가 2명과 함께 주변 개흙과 한꺼번에 퍼낸 나무배를 특수 제작된 나무상자 안에 넣고 무진동 특수차량에 실어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배는 올해로 12년째 보존 처리가 진행 중이다.
○ 첫 ‘똥 화석’ 찾아내려 지극정성
비봉리 유적에서 발견된 ‘도토리 저장 구덩이’(위쪽사진)와 ‘똥 화석’. 온전한 형태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87개를 무더기로 발굴해 낸 것도 큰 성과다. 이전에 발굴된 것들은 수도 적고 형태도 온전치 않아 정확한 기능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학종은 이른바 ‘어깨선’(유적 조성 당시의 지층)을 찾는 데 성공해 저장 구덩이의 본래 크기를 밝힐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은 채집한 도토리의 떫은맛(타닌 성분)을 없애기 위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에 일정 기간 보관한 뒤 먹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안가에 구덩이를 판 이유다. 따라서 도토리 저장 구덩이의 개별 위치를 파악하면 신석기시대 당시의 해안선을 그릴 수 있다. 비봉리 일대 내륙이 신석기시대 바다였다는 사실은 자연과학 연구로도 입증됐다. 바다에서만 서식하는 규조(硅藻)류가 비봉리 토층에서 검출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똥 화석도 의미가 작지 않다.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 발전한 일본에서는 똥 화석을 선사인의 영양 상태와 당시 식생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임학종은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똥 화석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며 “비봉리 발굴 현장에서 퍼낸 모든 흙을 삼중(三重) 채로 일일이 걸러 똥 화석을 찾아냈다”고 말했다.(6) 창녕=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모두 353점의 그림이 확인됐다.
“저기 무슨 그림일까.” 지금으로부터 48년전인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울산 울주군 언양읍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특히 천전리와 대곡리 일대의 계곡에서 원효대사가 양지의 도움을 받아 <초장관심론>과 <안신사심론> 등을 저술했다는 반고사터를 찾고 있었다. 반고사터로 추정되는 반구대 마을에는 절터는 물론 정몽주의 유배를 기념하는 사당터도 있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마을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강가의 절벽엔 조선의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그 기념으로 새긴 한시와, ‘나 여기 다녀갔소’를 알린 사람의 낙서, 그리고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있었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도. 성기를 노출한 인물상(왼쪽)과 마치 감전된 듯, 접신한 듯 사지를 좍 편 인물상이 보인다.
■흑판 같은 수직절벽에 새겨진 그림
그러나 조사단은 답사의 목적이었던 절터를 찾지못해 실망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 어른들을 찾아 탐문조사를 계속해나갔다.
그때 한학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던 최경환이라는 마을노인이 희망을 던져주었다.
“저 물길을 따라 (1㎞ 쯤) 올라가면 탑거리라는 곳이 있었지. 그곳에 탑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지 아마….”
조사단은 최노인을 앞세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탑거리 바로 못미치는 곳에서 최경환 노인은 바위를 겨냥했다.
“저기 바위에도 학같은 그림이 있는데 무슨 그림인지 도통 알 수 없어요.”
최노인이 지목한 곳은 네모 반듯한 흑판 같은 수직절벽이었다. 절벽은 강가에 바로 붙어있었다. 조사단은 원래 목적인 탑거리를 조사하고 난 뒤 다시 문제의 잘벽 아래로 내려와 암벽을 살펴보았다. 바위를 뜯어보던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래를 잡는 듯한 형상의 그림. BBC는 2004년 고래잡이 역사의 시원을 암구대 암각화에서 찾았다. |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 대원사, 2004에서
■화랑들의 명소에 새겨진 비련의 사연
대체 이 그림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끼로 뒤덮힌 바위면에는 마름모꼴과 소용돌이 무늬가 보였다.
또한 그 위로 여기저기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유독 ‘랑(郞)’자가 많아 보였다. 문첨랑, 영랑, 법민랑…. 화랑 이름이 분명했다. 법민랑이 누구인가. 삼국을 통일한 김법민, 즉 문무왕의 화랑시절 이름이 아닌가. 이곳은 화랑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 문장이 흥미로웠다.
“을사년(525년)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었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계곡을 ‘서석곡’이라 하고 글자를 새기게 했다. 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이 죽었다. 그 비 지소부인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월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가 함께 왔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그림이 가장 많다. 하늘로 치솟는 고래 떼들이 보이고, 고래잡이 배가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형상처럼 보인다.
명문 내용은 예사롭지 않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누이인 어사추여랑과 연인관계였다. 둘은 537년 천전리 계곡을 찾아 사랑을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갈문왕은 어사추여랑과 백년가약을 맺지 못한다. 갈문왕은 형님의 딸(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부인과 혼인한다. 그런데 갈문왕은 왕위를 잇지못한채 537년 죽고 만다. 갈문왕의 부인은 죽은 남편을 기리며 생전에 남편이 어사추여랑과 천전리 계곡을 찾아와 새겨놓은 명문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 위로 둥실 떠가는 듯한 배의 형상.|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에서.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
신라시대 명문이 눈에 도드라지기는 했지만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 기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 등 또한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기하학 문양은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다. 새겨진 동물 가운데는 사슴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었다. 특히 상부에는 도안화한 얼굴의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었다.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도 있는데,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된다. 윗부분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 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이 천전지 각석은 가장 먼저 발견된 한국의 암각화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인 가치가 대단했다. 천전리 각석은 국보 147호로 지정됐다.
크리스마스에 발견된 한국의 첫번째 선사 암각화를 두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이라 입을 모았다.
성기를 내놓은채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상.|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에서
■크리스마스 날의 낭보
그러나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천전리 암각화를 발견한 지 꼭 1년이 되던,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날이던 1971년 12월25일, 문명대 교수는 다시 천전리를 찾았다.
이번에는 연세대박물관 연구원이던 이융조 교수와 고려대 김정배 교수(사학과)가 동행했다. 마침 극심한 겨울가뭄으로 사연댐의 수위가 5~6m 정도 내려가 있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낮아진 댐 수면 덕택에 이전에 조사할 수 없었던 하류 유역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사람은 지난해 조사 때 마을 사람들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반구대 아래쪽에 호랑이가 새겨진 절벽이 있다”는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사람은 배를 빌려 타고 하류로 천천히 내려가면서 주변의 암벽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구대 마을에서 약 800m 가량 내려왔을 때였다. 절벽이 이어진 오른쪽에 마치 대패로 깎은 듯 반반한 바위면이 눈에 들어왔다. 세사람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바로 저거야!”를 외쳤다. 맞았다. 배가 바위면 가까이 다가가자 각종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가벗고 성기를 앞으로 세운 남자가 춤을 추고 있고, 그 옆으로 떼지어 올라가는 고래와 거북, 호랑이 등의 동물이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발견됐다고 해서 ‘크리스마스의 기적’ 혹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 했다. 이때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다. 선사시대 국보 암각화가 1년 사이 우연히도 크리스마스 이브(천전리)와 크리스마스(대곡리 반구대)에 발견된 셈이다.
대곡리 암각화에서 보이는 가면형상의 얼굴상.
■과장된 성기를 내놓은 남자는 누구?
반구대 암각화는 7000년전 신석기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최근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전연구소의 실측보고서에 따르면 새겨진 그림은 모두 353점에 이른다. 그 중 성기를 노출한 사냥꾼과 어부, 제사장 등 인물상이 16점이다.
암각화의 제일 위쪽에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약간 굽혀 춤추는 모습을 한 인물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인물의 성기는 크게 과장되게 표현됐다. 이 인물 뿐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인물 대부분은 춤추는 모습에 성기를 과장한 경우가 많다.
왼쪽 맨 아래에는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린 인물상이 있다. 이 인물은 두 팔과 다리가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있고, 5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과장해서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는 제사장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손·발가락을 쫙 편 인물상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보이는데, 신들린 상태, 즉 접신의 경지에 접어든 샤먼(무당) 같기도 하다. 긴 성기를 앞세우고 선 채로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도 인상적이다. 사람의 얼굴만을 묘사한 그림이 두 개나 된다. 하나는 얼굴의 윤곽선이 역이등변 삼각형과 흡사하고 눈이나 코, 입 등도 거의 직선으로 표현됐다. 특히 이마 부분이 잘려있다. 가면을 표현한 것 같다. 혹자는 이를 두고 ‘탈’의 원형이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그림 중에는 호랑이 14점을 포함한 육지동물이 105점이 보인다.
대곡리 암각화 탁본. 1965년 사연댐의 축조되면서 암각화는 갈수록 훼손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임신한 고래, 작살맞은 고래, 고래잡이 배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48점에 달하는 고래그림이다. 고래 그림 중에는 새끼를 밴 것 같은 고래가 보인다. 혹자는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라고 하고, 혹자는 고래에 기생하는 물고기라고 한다. 전체 길이가 80㎝에 달하는 고래도 있다. 이 고래는 흰긴 수염고래로 추정된다. 암각화를 그리는 집단에서도 이런 큰 고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작살을 맞은 불행한 고래도 선명하게 보인다. 배 그림도 4곳이나 보인다. 가운데 암각화 군의 맨 위쪽에 있는 배가 가장 선명하며 길이가 19㎝에 이른다.
이 배 그림은 모든 그림을 아래에 두고 하늘에 오르듯 경쾌한 모습으로 둥실 떠 있다. 중심 바위 면에 두 척의 배가 더 있다. 고래 떼 사이에 한 척이 있고, 그보다 가늘에 처리된 또다른 배가 보인다. 이 배의 길이는 18.5㎝이며, 배에 탄 인원만 20명 가량 된다. 전문가들 은 고래잡이 배나 제사를 행하는 배, 혹은 영혼을 싣고 하늘로 가는 샤머니즘의 상징물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한다.
중심 바위 서쪽 면에 떨어진 배는 확실히 고래잡이 배로 보인다. 배 밑에 고래의 꼬리가 묘사되어 있어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고래잡이배로 해석된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모습은 전세계 학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2004년 BBC 인터넷판은 “반구대 암각화엔 배 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고래사냥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 고래그림을 그린 사미족이 고래잡이의 시원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엎었던 것이다.
임신한 고래와 작살 맞은 고래 형상이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
■물고문에 녹아내리고 떨어지는 진흙바위
그러나 47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홀연히 출현한 반구대 암각화는 위기에 빠져있다.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암각화가 침수와 노출을 반복하면서 암각화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기 때 사연댐 최대높이는 66,4m에 육박하는 63.2m에 달한다. 이때는 반구대 암각화 가장 윗부분(해발 55.2m)까지 물에 잠긴다. 사연댐의 상시 담수로 말미암은 수위도 60m에 이른다. 반구대 암각화의 80% 가량은 해마다 3~4개월 동안의 노출과 8~9개월 동안의 수몰을 반복해왔다. 최근에는 물에 잠기는 회수가 뜸해졌다지만 2014년과 2016년에도 한 달 이상씩 물에 잠겼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진흙이 굳어져 변성화한 이암(泥岩)으로 구성돼있다. 기본적으로 진흙 성분이다보니 물에 취약하다. 반복적으로 물에 젖으면 암석이 녹게되고 급격한 풍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암벽표면이 계속적으로 탈락되었고, 암면의 전체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표면이 닳아서 암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있다. 무문별한 탁본도 훼손을 가속시켰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주변환경도 급속히 훼손 오염됐다. 그 때문에 암각화는 급격히 망가지고 있다. 새겨진 그림들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건너편 전망대의 망원경으로도 고래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곡천을 직접 건너가 눈앞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옛 탁본이나 사진을 들이대고 비교해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반구대 암각화를 반복되는 물고문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현재 60m인 사연댐의 수위를 52m 가량으로 낮춰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울산 시민들은 식수공급에 타격을 입는다면서 대안으로 청도 운문댐의 사용을 주장했다. 하지만 운문댐을 식수로 사용해온 대구시가 ‘무슨 소리냐’고 반대했다. 대구시는 낙동강취수원을 상류지역인 구미산업단지 위쪽으로 옮기는 것을 전제로 운문댐의 울산시 분담 사용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구미시의 반대에 직면했다. 취수원이 구미 쪽으로 옮길 경우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고, 그렇게 되면 토지운용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이렇게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제대로 된 회생방안을 찾지 못해왔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천전리에서 확인된 암각화(국보 제147호) 부분. 세로 3m, 가로 10m 바위에 신석기~신라 말기까지의 문양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석호의 <천전리 각석 시측조사보고서>, 2003에 수록된 도면.
■7000년의 선물, 50년만에 망가뜨리나
최근들어 이낙연 국무총리 주도로 반구대 암각화 살리기 방안이 새롭게 나왔다. 해당 지자체와 관계기관이 모여 첫번째로 도출한 원칙은 반구대 암각화와 그 주변에 인위적인 구조물의 설치없이 사연댐의 수위를 낮춰 보존하겠다는 것과, 그를 위해 청도 운문댐의 물을 울산에 공급하는 방안을 세운 것이다. 무엇보다 유적 보존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수위조절안을 채택했다는 것도 평가해줄만하다. 그러나 두번째인 운문댐의 울산 분담 공급 방안이 해결되려면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갈 길이 먼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의 훼손은 전형적인 인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7000년 이상 잘 보존된 선사인들의 체취가 불과 50여 년 만에 망가뜨리는 못난 후손이 될 것인가.(7)
동삼동 패총 토기조각(첫번째 사진)과 반구대 암각화(두번째 사진)에 새겨진 사슴 그림. 사다리꼴모양의 몸통과 선으로 간략히 묘사된 뿔, 얼굴, 다리 등이 서로 유사하다. 반구대 암각화를 신석기인이 처음 그렸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하인수 관장 제공
《 한적한 어항(漁港), 배를 수리하는 어부들이 보인다. 8000여 년 전에도 고래와 물고기, 조개를 잡아 올린 어부들이 여기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데자뷔인가.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조개무지) 유적에서니 코앞에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선사(先史)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더기를 이룰 만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음식물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1999년 하인수 당시 부산 복천박물관학예연구실장(57·현 부산근대역사관장)의 손을 통해 집터와 무덤(옹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다. 기원전 6000년∼기원전 2000년 약 4000년에 걸쳐 신석기인들이 먹고 자고 버린 생활 흔적이 패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 ‘반구대 암각화’ 미스터리 풀 열쇠
“이기 뭐꼬? 그림 아이가?” 2004년 2월 초 부산박물관 연구실. 5년 전 동삼동 패총에서 손수 발굴한 토기조각들을 정리하던 하인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음각선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토기 표면은 붉은색이 완연했다. 대충 만든 게 아니라 채색까지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서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이 사슴 그림이 새겨진 토기조각을 살펴보고 있다. 하 관장은 2004년 유물 정리 과정 에서 사슴 그림을 우연히 발견했다. 부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철로 만든 핀으로 토기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내자 사다리꼴을 그리던 음각선은 다시 위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눈은 점점 커졌다. 처음 눈에 들어온 사다리꼴은 몸통, 윗선은 머리, 아랫선은 다리가 분명했다. 그것은 신석기인들이 그린 한 마리 사슴이었다. 하인수의 회고. “다른 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조잡한 선이 아니었어요. 보는 순간 조형미가 느껴졌습니다. 사슴 그림이란 걸 알고서 온몸에 전율이 흐릅디다.”
그때까지 신석기시대 그림은 이것이 유일했다. 선사시대 그림은 매우 희귀한 데다 선사인들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유추할 수 있는 핵심 자료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총 2만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토기조각에서 그림을 찾아낸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1차 조사에서 무늬가 없는 걸로 분류된 토기들을 모아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건져낸 월척이었다.
무엇보다 동삼동 사슴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미스터리를 풀 열쇠였다. 당시 학계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 등을 근거로 청동기시대 후기 유물로 봤다. 석기로 고래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하인수의 생각은 달랐다. 암각화와 동삼동 패총 토기에 새겨진 사슴 그림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몸통을 사다리꼴로 표현했으며 몸통에서 이어진 선으로 다리를 표현하는 방식 등이 서로 유사했다. 더구나 뼈로 만든 화살촉이 박힌 고래 뼈가 울산 황성동에서 발견돼 신석기인들의 고래 사냥이 증명됐다. 이에 따라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인들이 처음 그렸다는 하인수의 주장은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 ‘신석기인은 원시적’ 편견 깨다
1930년대 일본 학자를 비롯해 1960, 70년대 미국 학자 A 모아와 서울대, 국립박물관이 동삼동 패총을 잇달아 발굴했지만 누구도 집터와 무덤을 찾지 못했다. 조개무지라는 선입견에 갇혀 내부에 다른 유구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인수는 속단하지 않고 토층 조사를 치밀하게 진행해 신석기시대 집터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옹관을 동시에 발견했다.
신석기인들은 수렵·채집에만 의존했다는 편견을 버린 것도 중요한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패총 집터 안에서 기원전 3300년 무렵의 탄화된 조와 기장이 나왔고, 출토 토기에서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의 압흔(壓痕·눌린 흔적)이 발견됐다. 하인수는 “이는 이미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 기장 등 밭농사가 보편화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 팔찌’들. 조개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장신구다. 부산박물관 제공한발 더 나아가 동삼동 패총 신석기인들이 해외 교역까지 한 정황도 포착됐다. 조개 팔찌 1500여 점과 일본산 흑요석, 조몬(繩文) 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조개에 구멍을 내 장신구로 만든 조개 팔찌는 워낙 가공이 힘들어 귀한데,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한반도산 투박조개 팔찌가 90여 점이나 발견됐다.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흑요석들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일본 규슈 고시다케(腰岳)가 산지(産地)인 걸로 조사됐다. 하인수의 설명.
“동삼동 패총에선 배 모양 토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곳 신석기인들은 배를 타고 일본 열도까지 건너가 조개 팔찌와 흑요석을 교환한 걸로 보입니다. 한일 교류사는 멀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죠.”(8)
10월15일 가을 한낮. 더위 먹은 가을인가. 햇살이 따가웠던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전시관. 전시관 직원 최정혜씨의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기자가 밖으로 나왔다. 조 관장이 스물여덟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1999년 부산박물관의 발굴현장 설명회 모습.
어느 고고학자의 회상
“1969년 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잡은 것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었지. 그런데 7개월 만인 8월 초년병 햇병아리 학예사인 나는 동삼동패총 발굴을 ‘명’받고 내려왔어요.”
조 관장의 추억담을 들으려는데, 급경사가 진 전시관 밖에 웬 젊은이들이 긴 줄을 선다.
“저 친구들은 뭐지요?”
“국립해양대 학생들인데, 저기 학교에 가는 왕복버스를 타려고 하는 겁니다.”(최정혜)
그러고 보니 전시관 왼쪽으로 기다란 길이 통했고, 그 끝에 국립해양대 건물이 보인다.
“원래는 저기가 조도(朝島)라고 해서 섬이었는데 74년 해양대가 저곳으로 이전하면서 연륙되었어요.”
다시 조 관장의 옛이야기가 계속된다.
동아대가 찍은 발굴현장 항공사진.
“여기 동삼동 패총 유적은 보시다시피 해변에 있잖아요. 당시 유적 앞바다에서는 이상한 물고기가 낚싯대에 걸렸는데…. 주둥이와 머리가 꼭 쥐처럼 생겼고, ‘찍찍’하는 소리를 내며 올라왔어요. 꼭 쥐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못먹겠더라고…. 나중에 들으니 그걸 쥐고기, 즉 쥐치라 해서 쥐포를 만들어 맥주 안주로 먹는다고 하더군.”
“숲도 나무도 없는 8월의 뙤약볕에서 얼마나 더웠는지…. 바닷물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는데 그럴 수는 없었고…. 그렇지만 흙으로 빚은 완형의 각배(角杯)와 석기, 패천(조개로 만든 팔찌)을 내 손으로 발굴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런데 조 관장의 회고담은 파란만장했던 동삼동 패총 발굴의 역사에서 하나의 가십거리일 뿐이다. 이 동삼동 패총에는 당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원로와 그리고 당대 고고학계의 자화상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조 관장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 고고학계를 주름잡는 1세대 고고학자들의 ‘젊은 날의 초상’도….
이 패총은 1929년 동래고보(현 동래고) 교사인 오이가와 다미지로(及川民次郞)가 처음 발견했다. 이듬해인 1930년과 32년 두 차례씩 모두 4차례 시굴조사를 벌여 빗살무늬 토기와 흑요석 등 신석기 유물들을 발굴했다. 일본인에 의한 발견과 조사. 여기까지는 일제시대 때 흔히 있었던 발굴 역사의 레퍼토리일 뿐이었다.
어느 미국인 부부가 밝혀낸 한국 신석기 문화
미국인 모아·샘플 부부가 발견한 토기들.
그런데…. 해방이 되고도 17년이 지난 62년, A. 모아와 L.L 샘플이라는 미국인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부부는 좀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남편인 모아는 대학 졸업 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40대 초반의 나이로 고고학에 눈을 떴는데, 관심 분야가 바로 한국 선사 고고학이었던 것이니….
“모아가 일본을 둘러보고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었어요. 이미 일본 선사시대 관련 연구는 차고 넘쳤지만 한국 선사시대, 그것도 신석기시대는 연구의 불모지라는 걸 알았던거지. 그래서 한국 신석기를 전공으로 택한 거지.”(정영화 전 영남대 교수)
‘늦게 배운 고고학에 날새는 줄 몰랐던’ 모아부부는 미국 과학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했고, 급기야 2만달러라는 거금을 받고 한국에 온다.
“서울 집 1채 값이 달러로 쳤을 때 한 900달러 정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2만달러라면 집을 20채 이상 살 수 있는 거금이었어요.”(정영화교수)
1969년 국립박물관의 1차조사때 출토된 융기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
어쨌든 부부는 곧바로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을 찾아 “동삼동 패총을 한 번 발굴해보고 싶다”면서 도움을 청했다.
잠깐 참고사항 하나. 당시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두가지 큰 변화(진전)가 있었다. 하나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61년 서울대에 고고학과를 개설한 것이고, 두번째는 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법에 따르면 유적 발굴은 반드시 문화재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김재원 관장은 당시 김원룡 서울대 주임교수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달았다.
“모아씨. 단독발굴은 안됩니다. 하려면 서울대와 공동으로 하십시오.”
하지만 김원룡 교수는 모아의 발굴을 묵인했다. 도리어 모아 부부에게 방까지 만들어주고 서울대 고고학과 1기생(당시 3학년)인 정영화와 임효재 등 두 사람을 아르바이트 겸 조교로 붙여주었다.
“김원룡 선생은 이 기회에 걸음마 단계였던 고고학 발굴 기술을 배우자는 뜻도 있었을 겁니다. 동삼동 패총 발굴은 이 때문에 사실상 모아 부부의 단독발굴이었어요. 임효재나 저(정영화)나 영어도 배우고 외국의 선진 발굴기술도 배우고…. 남들이 부러워했죠. ‘저 친구들은 유학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정영화 교수)
미국인 모아·샘플 부부가 발견한 토층도.
하지만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만다. 모아가 동삼동을 파고 있다는 소식이 돌고 돌아 김재원 관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김 관장은 삼불(김원룡 교수의 호)을 불러 “왜 외국인에게 단독발굴을 시켰느냐”고 호되게 꾸짖었고, 불똥은 모아에게 떨어졌다.
“지금도 생생해요. 삼불 선생님 성격이 불 같으시거든. 저희가 옆방에 있는데, 선생님이 모아에게 뭐라 큰소리치고 모아 역시 지지않고 대들고…. 잠시 후 보니 두 사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더라고….”(정영화 교수)
이 일로 삼불과 모아는 결별하고 만다. 화가 난 모아는 동삼동에서 발굴한 유물보따리를 들고 연세대를 찾는다.
“서울대 고고학과 입장에서는 사실 안타까운 일이었지. 만약 모아가 계속 있었으면 서울대가 주도적으로 동삼동 패총을 발굴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별로 서울대로서는 또 한번 쓰라린 일이, 연세대로서는 뜻하지 않은 ‘기화(奇貨)’를 얻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모아는 동삼동 패총을 조사하던 도중 틈틈이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했는데, 공주 석장리에서 첨두기(尖頭器) 같은 구석기 유물들을 수습한다. 정영화 교수의 회고.
“동삼동 패총 조사 도중에도 모아는 우리들에게 석장리에서 수습한 후기 구석기 유물들을 보여주었어요. 한국에 구석기 유적이 있다고…. 우리들은 무슨 구석기냐고 일축했어요. 한국 구석기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모아가 그래요. ‘왜 너희들은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고 부정하느냐’고…. 난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학문을 하는데 부정적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평생 교훈으로 삼았어요.”
어떻든 모아는 이 석장리 구석기 자료 역시 연세대로 가져갔다. 당시 손보기 연세대 교수는 그 자료를 토대로 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했다. 손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구석기 유적을 확인함으로써 구석기 발굴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모아는 66년 일본 덴리대(天理大)가 발행하는 한국학 관련 학술지(조선학보)에 동삼동 패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여 중간보고 형식으로 발표한다. 이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동삼동 패총 맨 밑바닥에서 채취한 목탄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가 BC 3000년 전후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충격 그 자체였지. 획기적이라고 했던 리비의 탄소연대측정 방법이 소개된 게 50년대였거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개념도 잘 몰랐던 때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연대가 그때만 해도 가장 첨단의 측정 방법으로 BC 3000년까지 올라간다는 결과를 얻었으니….”(조 관장)
발굴의 기초를 배우다.
사실 모아 부부가 남긴 유산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발굴기법을 잘 모르던 당시, 우리는 선진 발굴의 기법을 고스란히 배웠습니다. 깊이 20㎝의 2m×4m짜리 피트를 두 곳 파서 층위를 구분하는 방법을 찾고…. 토기편 등을 넘버링하면서 분류하는 방법, 유적 명칭을 정하는 방법 등등…. 당대 선진발굴 기법의 ABC를 모아에게 배웠다고 봐야지.”(정영화 교수)
모아의 발굴로 비상한 관심을 끈 동삼동 패총의 가치는 69~71년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와 공동발굴)의 3차례 발굴로 더욱 구체화한다.“동삼동 패총 발굴은 유적의 가치뿐 아니라 한국고고학계에도 엄청난 획을 그은 조사였어요. 현재 한국 고고학계를 이끄는 분들이 한결같이 동삼동에서 배운 발굴 기법으로 저마다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거든.”(조 관장)
김원룡 당시 박물관장을 단장으로 박물관에서 윤무병·김정기·한병삼·김종철, 서울대 고고학과 출신인 김병모·임효재·정영화·조유전·지건길·최몽룡·이종선·전경수, 그리고 동아대 김동호 등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71년 3차 발굴에 참여한 부산대 출신 정징원 교수(부산대 명예교수)의 일화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전 당시 부산대박물관 조교였는데요. 얼마나 동삼동에 가고 싶은지 몸살을 앓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여의치 않았죠.”
스승인 김정학 부산대 교수와 서울대가 주도한 국립박물관 쪽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정학 교수만 해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명망있는 학계 원로였다. 당시 김원룡-손보기-김정학 교수 같은 이들은 한치의 양보 없이 자존심 싸움이랄까 하는 경쟁구도로 이른바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학 교수의 텃밭인 부산에서 진행 중인 발굴에 부산대가 참여하지 못했으니….
“발굴에는 참여하고는 싶은데 (스승 눈치보느라) 갈 수는 없고…. 묘안을 냈어요. 국립대학 박물관 조교니 공무원 신분이잖아요. 그래 휴가원을 내고 동삼동으로 뛰어간거지. 스승님(김정학 교수)이 가끔씩 출토유물을 보러 동삼동 현장에는 오셨는데요. 그때마다 저는 선생님 눈에 띌까 숨어버리고….”
그렇게 어렵게 배운 패총에 대한 발굴 기법은 정징원 교수의 학문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이렇듯 부산 앞바다의 한적한 영도에 자리잡고 있는 동삼동 패총은 우리 고고학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고학자들의 영욕과 애환을 담고 있는 동삼동 패총이 주는 고고학적,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정징원 교수가 정리한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유적 연대가 모아의 탄소연대측정 연대, 즉 BC 3000년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발굴 결과 연대는 계속 올라갔고, 결국 이 유적은 BC 6000년, 즉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무려 4500~5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는 고고학적 자료가 나온거지. 말하자면 동삼동 패총은 신석기 문화의 전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 동남부 끝자락인 부산에서 이른바 중국 발해연안인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과 한반도 동부 고성 문암리 유적과 동시대라 할 수 있는 신석기 유적이 나온 것이다. 또한 이 동삼동인들은 4500~5000년간 지금으로 치면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잡은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그 증좌를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자.(9)
최고급 장신구 ‘투박조개 팔찌’ 유물 무더기로 출토 일본 흑요석 수입해 석기제작 왕성한 교역거점 추정 조개가면·토우 등도 발견… 한국 고고학계 산실로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인 셈이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닷가에 모여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삶의 흔적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酸性)이 많이 함유된 특징 때문에 동물이나 물고기뼈를 비롯한 유구와 유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백골이 진토(塵土)된다”는 말이 딱 맞다. 하지만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토기와 석기, 뼈연모, 토제품 등 생활도구는 물론 무덤과 집자리, 화덕시설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지금처럼 ‘유난을 떨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면? 우리는 선사시대가 남긴 숱한 삶의 정보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 현명한 우리의 선사인들이여!
곰 신앙의 정체
“특히 동삼동 패총은 선석기 초기인 BC 6000년부터 말기인 BC 2000년까지 4000년 동안 신석기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어요.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패(貝)제품, 토제품, 의례품을 포함해 그때의 자연환경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신석기시대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찬찬히 뜯어보자. 먼저 이곳에서 숱하게 출토된 덧띠무늬(융기문) 토기들은 연대 측정결과 유적 조성연대가 BC 6000년임을 알려준다. 울산 세죽유적과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띠무늬 토기와 같은 시기임이 판명되었다.
“강원 고성 문암리라든가, 중국 동북방 발해연안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 등 BC 6000년 유적과 같은 시대임을 알 수 있어요. 또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토기류가 쏟아졌는데, 토기에 이렇듯 갖가지 문양을 새기면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조 관장)
출토 유물 가운데 재미있고 의미있는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종교의례와 관련된 유물들.
동삼동에서 확인된 사람 얼굴 모양의 조개가면.
조개가면은 크기가 12.9㎝, 11.8㎝ 정도인데, 국자 가리비에 사람의 눈과 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형상이다. 집단의 공동체 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했거나 혹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주술구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흙으로 만든 곰(熊) 모양의 토우(土偶)도 의미심장하다. 이 유물은 BC 4500~BC 3500년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기자는 이 토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유적지인 중국 뉴허량(牛河梁) 유적에서 발굴된 곰이빨과 흙으로 만든 곰 소조상, 곰 모양 옥기(玉器)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훙산문화 시대는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
뉴허량 유적은 제단(壇)·신전(廟)·무덤(塚·적석총)이 결합된 제사유적. 그런데 바로 여신을 모셨던 신전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적석총 등에서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이로써 훙산인들의 곰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기자의 시선을 더욱 붙잡은 것은 동삼동 출토 곰 토우의 연대가 훙산문화와 같은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시 지금의 중국 동북방과 한반도 최동남단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증거해주는 단서이다.
사슴그림의 비밀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의 탄생비화. 2003년 어느 날,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현 복천박물관장)은 동삼동 패총에서 쏟아진 유물정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동삼동 패총에 대해 설명하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조 관장은 1969년 햇병아리 고고학도 신분으로 동삼동을 발굴한 바 있다. <부산 | 이기환 선임기자>
“1999년 동삼동 패총을 발굴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런데 출토된 토기가 편을 합해 유물상자로 300상자가 됐어요. 그야말로 ‘흙 반 유물 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어요. 그걸 스폰지나 칫솔 같은 도구로 토기에 묻은 흙을 씻어내느라 죽을 힘을 다했는데….”
기형과 문양별로 토기를 분류·정리해야 무문토기인지, 덧띠무늬 토기인지, 빗살무늬인지 알 수 있고, 빗살무늬라도 세부 문양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문화양상과 시대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어느 토기편(길이 8.7㎝, 너비 12.9㎝)에 눈이 한번 더 갔어요. 뭔가 선각(線刻)한 듯한 문양이 있는데, 왠지 단순한 문양이 아닌 것 같았어요.”
일일이 칫솔로 토기편을 씻어내던 하인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사슴그림이 분명했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사슴 그림은 뼈나 대칼 같은 도구로 폭 2~3㎜의 선각으로 그렸다. 세밀한 형상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특징만 잡아 추출 묘사함으로써 대상물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형상화했다.
“처음 길게 그은 선의 3분의 1 지점에 수직으로 선을 내려 사슴의 목과 몸체를 구분하고, 몸체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묘사했어요. 이 그림은 걸어가고 있는 사슴의 형상이 분명합니다. 신석기인이 이토록 첨단의 미술기법을 발휘하다니….”
반면 경주 출토로 알려진 견갑(肩甲)형 청동기와 아산 남성리 석관묘 출토 검파(劍把·칼자루)형 청동기 등에 보이는 청동기시대 회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곧 정신을 차린 하인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주목했다.
동삼동에서 확인된 곰형 토우(土偶).
“반구대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암각화 제작에 고래 사냥에 표현된 작살의 형태가 청동기일 것이라는 추정을 토대로….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전문적인 고래사냥 또한 청동기 시대 때 일어난 일이라고 보았고….”
하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보인 사슴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사슴과 미술사적으로 동일한 양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바로 고래사냥입니다. 지금까지는 신석기 시대에는 고래사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정설이었는데요. 문제는 동삼동 패총의 전 문화층에서 고래뼈가 다량으로 출토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해안 유적에서도 고래 유존체와 함께 대형석제 작살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그것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사냥이 성행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수출용 팔찌를 생산한 산업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인수가 또 주목한 것은 1999년 조사에서 확인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와, 발굴조사 때마다 보이는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발굴된 1500여점을 유심히 보면 완제품은 물론 파손된 제품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제품 등이 섞여 있어요. 출토 팔찌의 70~80%는 중간단계에서 파손됐고, 일부는 마연 및 마무리 단계에서 깨졌어요. 조개팔찌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종합하면 동삼동에는 대규모 ‘팔찌공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팔찌의 재료가 밤색무늬조개과에 속하는 투박조개(90%)라는 점. 이 투박조개는 수심 5~20m 사이의 모래밭에서 서식하는데, 바위가 많은 일본 대마도에서는 볼 수 없다. 하인수는 투박조개가 서식한다는 동해안 죽변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수시로 답사했다.
“투박조개가 어떻게 서식하고 잡히는지 직접 잠수복도 입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채집까지 해봤어요. 그래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동삼동 패총의 조개팔찌는 광안리산 투박조개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투박조개는 매끌매끌하고 워낙 단단해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지만 그만큼 가공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조개팔찌를 만드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셈이다. 덧붙이면 실패율이 그렇게 높았어도 투박조개만 고집한 것은 투박조개 팔찌가 최고급 장신구였음을 시사해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팔찌 113점 가운데 투박조개 팔찌가 84%(95점)나 된다는 점. 대마도에서는 나지 않는 투박조개 팔찌가 왜 대마도에서 다량으로 나오는가. 그리고 일본산 팔찌의 제작방법과 형태, 속성이 동삼동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것은 ‘동삼동산 조개팔찌’가 대마도와 일본 규슈로 대량 수출됐다는 이야기다.
일본산 흑요석의 의미
그렇다면 수입품은? 하인수는 그것을 일본산 흑요석이라 본다.
“석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정도에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동삼동 패총을 비롯, 남해안 패총 유적 18곳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은 대부분 일본 규슈 고시다게(요악·腰岳)산입니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제작된 조개팔찌(패천)와의 교역품일 가능성이 큰 일본산 흑요석.
또하나, 하인수는 대마도에서 확인된 고시다카(越高) 유적을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한반도산 융기문 토기가 2600여점 쏟아진 반면, 일본계 유물인 승문(繩文·새끼줄 문양)토기는 단 7점에 불과했다.
“곧 대마도에는 동삼동 등 한반도에서 건너가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집단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반도인들은 대마도에 둥지를 틀고 동삼동산 최고급 조개팔찌와 일본산 흑요석을 물물교환이나 아니면 다른 교역의 형태로 거래한 것입니다.”(하인수)
“그런데 수입된 흑요석의 경우엔 완제품도 있었겠지만 원석도 있지?”(조 관장)
“예. 통영 연대도 패총에서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길이 4.8㎝, 너비 3.3㎝, 두께 2.5㎝, 무게 43.6g의 흑요석 원석이 확인됐어요. 그것은 한반도 사람들이 원석을 가져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는 얘기입니다.”(하인수)
결국 동삼동은 당대 최대의 수출용 팔찌를 제작한 ‘산업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흑요석이 집중 출토된 부산 범방패총, 통영 욕지도·연대도 패총 등은 수입된 흑요석으로 석기를 제작한 거점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슴그림이 새겨져 있는 토기편(왼쪽). → 세부모양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사슴의 특징만을 따서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사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제주도 간 교역은 이미 구석기말~신석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동삼동에서 제주 북촌리식 토기와 규슈산 승문토기 등이 보이는 이유이다.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열도 서북 사이는 200㎞ 정도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8000년 전부터 이런 교역이 이뤄졌냐고요? 해양학을 전공한 윤명철 교수(동국대)의 연구에 따르면 항해도구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선사시대에도 기본적인 항해수단만 있으면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해요.”
예컨대 규슈해안~한반도 남해안에 닿으려면 대마도 남서해안에서 북서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대한해류를 타고 항해할 경우 동남해안인 부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유전 관장이 동삼동 패총 유적을 정리한다.
“동삼동 패총은 한국 고고학계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유적입니다. 한국 고고학이 걸음마 단계일 때 실습장이 되어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의 산실이었고…. 고고학자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 신석기 문화 4000년’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유적이라 할 수 있지.”(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