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백제 고고학 (4) 부여 왕흥사 본문
사비(부여)도읍기(성왕-위덕왕- 혜왕-법왕-무왕-의자왕, 538~660년) 부여 왕흥사 목탑 터,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 발굴 내용을 알아봅니다.
부여 왕흥사 목탑 터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인 청동사리합과 은, 금 사리병이 출토되었고,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에서 지금껏 발굴된 백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습니다.
<26> 부여 왕흥사 목탑 터 발굴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가 이곳에서 출토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당시 왕흥사 목탑 터에서 사리기를 건져 올린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현장에서 만났다.
○ 우리나라 最古 사리장엄구, 모습을 드러내다
“뭔가 대칼(대나무 칼) 끝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 목탑 터 발굴 현장. 장마가 끝나고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 귀퉁이를 조사하던 강환구 연구원이 이규훈을 다급하게 불렀다. 조심스레 개흙을 제거하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탑에 사리기를 종종 묻어놓지만 심초석에 구멍을 내고 뚜껑돌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장기간 작업으로 지쳐 있던 발굴팀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아 손끝이 야무진 허진아 연구원이 들어가 서서히 돌을 들어올렸다. 모두 숨죽인 가운데 뚜껑돌을 올리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대와 달리 내부는 진흙과 물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흙탕물 속을 대칼로 찔러 보니 걸리는 게 다시 느껴졌다. 30분간 물을 빼내고 진흙을 제거하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원통형 그릇이 나왔다. 15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백제시대 청동 사리합이었다.
사리합 표면을 닦아내자 ‘정유(丁酉)년’으로 시작되는 한자 명문이 드러났다. 발굴팀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의 명문은 역사 해석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보존과학실 직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명문 해석에 돌입했다. 이때 안보연은 촬영한 명문 이미지를 바탕으로 글씨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원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이 명문을 보는 호사를 누려 행복했다”고 말했다.
○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잃은 왕의 슬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 두 개를 묻었는데 신묘한 조화로 세 개가 되었다.’
청동사리합 명문은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우선 왕흥사 창건 연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법왕 2년)보다 23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적힌 연대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용민은 “고고학자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횡재를 누린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명문이 얘기하는 왕흥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다. 위덕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을 여읜 인물이다. 부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한때 승려로 출가하려고 했던 그가 이젠 아들마저 잃은 것이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세운 아버지의 슬픔이 사리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백제왕의 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좌태자 이외에 위덕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가 별도로 존재했음이 사리기를 통해 증명됐다.
○ 홈쇼핑 만능렌치의 비밀
청동사리합을 발견한 것 못지않게 이를 여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보내 사리합 뚜껑을 열려고 1주일 동안 씨름했지만 청동 녹이 달라붙어 번번이 실패했다. 발굴팀은 내부를 찍은 X레이 사진만 언론에 공개하려 했지만,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열어볼 것을 지시했다. 발굴단원들이 골머리를 앓던 상황이었는데 답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홈쇼핑 광고를 본 전산 담당 직원이 이른바 ‘만능렌치’로 열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 철물점에서 구입한 7000원짜리 렌치로 아무 흠 없이 사리합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청동사리합 안에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조그마한 금 사리병이 들어있는 은 사리병이 나왔다. 금 사리병 내부는 명문에 적힌 사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발굴팀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분 분석을 했지만 순수한 물로 조사됐다. 이규훈은 “사리공으로 물이 샜다면 청동사리합이나 은 사리병에도 물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사리기에 적힌 신묘함이 여기서도 드러났다”고 말했다.
<주>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500년 전 백제 청동사리합, 아들 잃은 위덕왕 슬픔 고스란히|동아일보 (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동아일보 (donga.com)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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