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유역에 있는 나주 복암리고분, 나주 영동리 고분, 나주 정촌고분, 함평 신덕고분, 광주 월계동 장고분 등을 알아봅니다.

 

나주 복암리고분, 나주 영동리 고분, 나주 정촌고분은 옹관(독널)묘인데, 이 옹관묘는 3~5세기 말까지 영암·함평·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유행했습니다. 특히 나주평야 한복판인 대안리·신촌리·덕산리 일대에 집중된 36기의 무덤군이 있는데, 이를 반남(潘南)고분군이라 합니다. 특히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확인됐는데, 이 일대를 다스리던 수장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이런 금동제는 백제식이 분명하지만, 왜계와 가야계 유물도 엿보입니다. 

 

함평 신덕고분과 광주 월계동 장고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도 한다)인데, 이 전방후원분은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6세기 때 절정에 이르며, 7세기 소멸하기까지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묘제라고 합니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일왕 무덤은 모두 이 형태입니다. 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 사망한 닌토쿠(仁德) 일왕의 무덤입니다. 그런 일본식 묘제가 영산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확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묘제는 50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맙니다.

 

한편 윤복현 저널리스트는 이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한강유역이라고 합니다.

 

전방후원분은 2-3세기경에 한강유역에서 발생해 4,5세기경에 성행하였고, 5세기말에는 한반도에서 소멸되었다. 전방후원분은 한강유역에서 비롯해 영산강유역·남해안·낙동강유역·경주 등지에 분포한다. 대개 대하천·해안에 인접한 구릉·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일본에는 홋카이도·오키나와를 제외한 전지역에 분포하며, 특히 긴키(近畿)지방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보고된 숫자가 약 2,600여 기에 이른다.
 
일본의 경우는 4세기까지는 우리 나라와 같이 산상이나 구릉에 만들었다. 전반부를 스커트형(潑形) 또는 긴 장방형으로 하고 후원부에 비해 낮게 만들었다. 그러나 5세기 이후에는 위치가 평야지대로 바뀌고 규모도 커져서 길이가 수백 m에 달하는 고분들도 출현하였다. 또 전방부의 높이가 올라가고 그 밑변이 넓어져서, 고분이 부채나 키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6세기 말∼7세기 초에 쇠퇴하고 8세기에는 소멸하였다.』(9)

 

 

 

‘아파트 고분’ 속 ‘모계 근친혼’ 흔적…1500년 전 영산강은 ‘여인천하’였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기자2024. 3. 7. 05:00

 

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을 발굴 중이던 전남대 조사단이 심상치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굴삭기로 쌓인 소나무를 정리하면서 흙을 걷어내다가 큰 판석(판자 모양의 큰 돌)들이 노출된 것이었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 주먹 크기의 틈새가 보였다. 고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흥분된 마음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함척(函尺·측량 자)을 넣어 보았다. 하염없이 들어갔다. 180㎝도 넘는 깊이였다.

영산강 유역인 나주 복암리와 영동리, 정촌 고분 등에서 ‘여성파워’, 즉 모계사회의 흔적을 잇달아 나타나고 있다. 40대 여성 지도자와 모계가 같은 남매끼리의 근친혼을 짐작할 수 있는 무덤과, 여성들만 보이는 여성전용 무덤의 흔적이 잇달아 나타나고 있다.|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동신대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금동신발을 신은 주인공

틈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독(옹) 같은 유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돌방무덤(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이 돌방무덤에 복암리 3호분 96석실(돌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의 대대적인 조사가 7월8일부터 두 달간 이어졌다.

발굴결과는 놀라웠다. 대형 독널(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노출됐다. 독널의 크기는 엄청났다. 2호 독널의 경우 큰 독(98.2㎝)과 작은 독(72.2㎝)을 합체한 크기가 150㎝ 정도에 이르렀다. 독널 한 기만이 놓인 4호는 1m에 가까웠다.

2005년 발굴된 나주 영동리 1호분 1호 돌덧널의 두 인골. 애초에는 강력사건으로 신고되었지만 1500년전 고분으로 밝혀졌다. 분석결과 두 인골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인 것으로 분석됐다. 만약 부부합장묘라면 근친혼 관계일 수도 있다.|동신대 영산강 연구문화센터 제공

 

또 ‘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둥근고리칼’과 각종 도기류, 철대도·철촉 등 철기, 말띠드리개·재갈·발걸이 등 말갖춤새가 쏟아졌다. 이것은 양념에 불과했다. 앞 오른쪽 독널(4호) 밑에서 진흙이 묻고 상당 부분 훼손된 금동신발이 노출됐다.

이 복암리 3호분에서는 ‘96석실’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봉분(3호분)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이 켜켜이 조성되어 있었다. 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발달한 독널무덤(옹관묘)부터 전형적인 백제식 돌방무덤(석실분·7세기)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이른바 ‘아파트형 고분’이라 할 만 하다. 가히 ‘고분박물관’이다.

그 중 대형 독널과 금동신발 및 고리자루칼 등 최고 위세품이 쏟아져 나온 96석실이 단연 돋보인다.

연구자들은 이 96석실의 주인공을 5세기말~6세기초 이 지역을 다스린 수장으로 추정한다.

영동리 1호분 2호 돌방에 안장된 7명 중 6명은 같은 모계 출신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다른 모계로 판단되는 남성 한 명은 다른 곳에서 장가온 데릴 사위일 가능성이 짙다.|동신대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유전자 분석의 결과

그런데 최근까지 이 복암리 3호분 96석실과 관련해서 간과된 ‘포인트’가 있다.

그것이 96석실에서 확인된 인골의 정체성이다. 1996년 발굴 당시 96석실에서는 모두 6개체분의 인골이 독널 3곳(1·2·3호)에서 확인됐다. 죽은 자들의 인골을 추려서 각 독널에 넣은 것이다. 그런데 발굴이 끝난지 5년 뒤인 2001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출토된 인골에서 채취한 시료 10편의 ‘미토콘드리아DNA’를 분석해보았다.

5기의 주검이 확인된 3호 돌방에는 5세 이하 유아이거나 성별 미상의 인골을 빼면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3호 돌방은 ‘여성 전용 고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설명·사진은 동신대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미토콘드리아는 동물세포 안의 호흡기관으로 존재하는 세포의 소기관이다.

원형의 이중나선을 지니고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약 99.9%를 난자로부터 형성하여 모계유전 된다.

형제, 자매, 남매 및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관계되는 모든 가족은 미토콘드리아 DNA가 일치하는 반복수를 지닌다.

인골 같이 오래되었거나 극히 미량인 시료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미토콘드리아 DNA의 반복수를 개인의 식별이나 가족 관계의 구명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4호 돌방에는 50대 남성과 40대 여성, 30대 여성이 묻혀 있었다. 50대 남성과 같이 묻힌 40대 여성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일 가능성이 짙다. 근친혼의 방증일 수 있다. 또 40대 여성에게는 출산흔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무덤에 묻힌 30대 여성은 50대 남성의 딸일 수 있다.|사진은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그림 및 설명은 김재현 동아대 교수

 

■예상밖 유전자 분석결과

연구소의 분석 결과 독널(옹관) 3호의 왼쪽 인골(남성)과 오른쪽 인골(여성)은 남녀로 판단됐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은 더욱 흥미로웠다. 두 인골은 모계 유전 간의 혈통관계로 추정됐다.

고변이부위 가운데 하나인 HV1의 염기배열이 16018~16378 베이스까지 서로 일치한 것이다.

이로써 모계 유전 간의 관계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복암리 3호분 96석실의 인골을 분석한 <보고서>는 ‘96석실=모계가 동일한 친족의 합장묘’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주 영동리 1호분의 발굴모습. 아래 위로 다양한 형식의 고분이 집중된 아파트형 고분이다.|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그런데 그 뒤에 붙인 ‘보고서 요약문’이 흥미롭다. “이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은 남매, 혹은 모자 등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상간(近親相姦) 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1500년 전 영산강 유역이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같은 모계의 남녀가 근친혼을 했다?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라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졌던 근친혼이 영산강 유역에서도 유행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딩시에는 이 분석 결과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만 나온 하나의 사례를 요란하게 내세우기가 왠지 ‘거시기’ 했던 것이다.

1996년 발굴된 나주 복암리 3호분. 아파트형 고분으로 조성된 나주 복암리 3호분. 영산강 유역에서 산 사람들이 400년 동안 대를 이어 켜켜이 조성한 무덤이다.|국립나주문화재욘구소 제공

 

■‘강력사건’(?) 신고전화

그런데 복암리 인골의 기억이 가물가물 사라졌을 무렵인 2005년 2월이었다.

복암리에서 2㎞ 정도 떨어진 나주 영동리의 둔덕에서 대나무 숲을 개간하던 주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112’ 전화를 걸었다.

“사람의 해골이 2구나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순간 강력사건을 떠올렸다.

‘백골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살인 혹은 시신 유기 사건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둘러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복암리 3호분 96석실(돌방)의 모습. 그 돌방에 안장된 독널 3곳에서 인골들이 출토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인골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나온 게 아니라 고분의 돌덧널(석곽) 안에서 노출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나주시로 유물 출토 사실을 신고했다. 연구자인 이정호 동신대교수가 달려왔다.

돌덧널 무덤 안에서는 2구의 머리뼈가 나란히 노출됐다, 그 아래로 몸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뼈만 남은 유골을 정리해서 재매장한 삼국시대 장례의식(2차장)으로 인식되었다.

복암리 3호 96석실 3호독널 무덤의 두 주인공은 남녀로 판단되었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결과 두 인골은 모계 유전 간의 혈통관계로 추정됐다. HV1의 염기배열이 16018~16378 베이스까지 서로 일치한 것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변을 살펴보니 이 1기 뿐이 아니었다. 이 무덤은 큼지막한 봉분의 윗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무덤들도 이 봉분 위에 박혀있었다. 일부는 파괴된 채 노출되어 있었다. 이제 강력사건에서 발굴조사(동신대박물관)로 바통터치 했다.

이후 4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나주 영동리의 고분에는 모두 7기의 무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중 조사된 5기의 고분에서 구덩무덤(토광묘)과 독널무덤(옹관묘)·돌덧널무덤(석곽묘)·돌방무덤(석실묘) 등이 계속 확인된 것이다. 인근 복암리의 아파트형 고분과 흡사했다. 그러나 복암리에서처럼 지체높은 분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도 출토유물은 독널(옹관)을 비롯해 모두 280여 점에 이르렀다.

복암리 3호분 출토 인골분석 ‘보고서 요약문’은 “이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은 남매, 혹은 모자 등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상간(近親相姦) 임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나란히 묻힌 남매

유물로 미루어보면 무슨 획기적인 발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영동리 고분의 ‘α와 Ω’는 역시 여러 무덤에서 확인된 인골이었다.

출토 양상도 심상치 않았고, 인골의 형질 및 미토콘드리아DNA 분석결과도 의미심장했다.

즉 대부분의 고분에서 어머니가 같은 계통인 모계가 묻힌 흔적이 역력했다.

 

우선 첫번째 조사에서 확인된 1호분만 봐도 그렇다. 아래 위로 1호 돌덧널무덤과 1~6호 돌방이 모여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같은 가문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중 1호 돌덧널에서 확인된 2구의 인골을 보자.

형질 분석 결과 여성은 20대 전반, 남성은 40대 전반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이 두 인골의 미토콘트리아DNA 분석은 모계(어머니쪽 계통)가 동일한 남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를 보였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남매를 왜 같은 자리에 사이좋게 묻어 주었을까.

20년 먼저 죽은 누이와 함께 묻혀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토록 우애가 깊은 남매였을까. 아니면 근친혼 관계였을까.

96식실 출토 금은장식 세 잎사귀 둥근고리칼과 금동신발. 복암리 3호분 96석실이 1500년전 영산강 유역을 다스리던 수장이었음을 웅변해준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여성 전용 무덤도

2호 돌방무덤은 어떨까. 무덤의 돌문짝을 열자 무덤방에서 ‘우르르’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

인골 2구의 머리뼈가 가장 안쪽 벽에 붙어 세워진채 나란히 놓여있었다. 양쪽 벽과 심지어는 입구 쪽에서도 머리뼈와 함께 뒤섞인 몸뼈가 확인됐다. 2호 돌방무덤에서만 모두 7구의 인골이 확인됐다.

분석 결과 7구 가운데 3구는 5살도 안된 어린이 인골로 추정됐다. 조사단의 분석결과 이 2호 돌방에 묻힌 주검은 2호 남성(50대)→1호 여성(60대)→3호 유아→4호 유아→5호 유아(이상 5세 이하)→6호 여성(40대)→7호 남성(30대) 순으로 묻힌 것으로 짐작된다. 묻힌 이들은 같은 모계 관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남성 한 개체(30대)는 다른 곳에서 장가온 데릴 사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영산강 유역의 모계 사회에 장가든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형질 및 유전자 분석결과 복암리와 영동리 출토 인골들의 특성은 모계가 같은 인물들이 한 무덤에 묻혔다는 것이다. 1500년전 복암리와 영동리가 모계사회였다는 방증자료가 된다.|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김재현 동아대 교수 설명

 

또 5기의 주검이 확인된 3호 돌방의 경우 1호 여성(60대)→2호 여성(20대)→4호 여성(10대 후반)→5호 유아(5세 이하)→3호 인골(미상)의 순으로 묻혔다. 그런데 5세 이하 유아이거나 성별 미상의 인골을 빼면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김재현 동아대 교수) 그렇다면 이 3호 돌방은 ‘여성 전용 고분’일 가능성도 있다. 또하나 착안점은 2호와 3호 돌방무덤에는 오로지 주검(시신)만 매장했다. 죽은 순서대로 인골만 추려 안장했다.

4호 돌방은 굉장히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다른 돌방무덤과 달리 두 개의 돌방을 이뤄진 ‘짝돌방(쌍실)’이다.

2014년 복암리 고분군에서 600m 떨어진 잠애산 구릉의 정촌고분에서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굴식돌방무덤이 확인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한 가운데 두꺼운 판석을 세워 두 개의 방으로 나눴다. 훼손이 심했던 한쪽 방의 유물 분석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쪽 방에서는 50대 남성과 40대 여성, 다른 공간에는 30대 여성의 유골이 남아있었다. 중요한 착안점은 50대 남성과 같이 묻힌 40대 여성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이들이 남매라면 역시 근친혼의 방증일까.

또 하나 특이점은 이 40대 여성에게는 출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함께 묻힌 30대 여성은 누구일까. 50대 남성의 딸일까.

3기의 나무관에서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다. 첫번째 인골은 5세기 3/4분기(450~475년)에 1차로 안치된 주인공으로 판단됐다. 3차 주인공이 안치된 때는 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475~525년)로 추정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착장한 주인공

이 대목에서 1996년 조사된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의 인골을 ‘급소환’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골의 미토콘트리아DNA 분석결과가 어땠나.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이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혼이라고 했다. 그런데 영동리에서까지 똑같은 사례가 확인됐다면 어떨까. ‘1500년 전 영산강 유역=모계 중심의 사회’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 두 곳의 발굴 사례로 100%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2014년 복암리 고분군에서 600m 떨어진 잠애산(해발 114m) 구릉의 정촌 고분에서 또한차례 의미심장한 발굴성과가 나왔다. 정촌 고분 역시 14기의 무덤이 조성된 ‘아파트형’이었다. 특히 너비 355㎝, 길이 480㎝, 높이 296㎝ 규모의 무덤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이 주목을 끌었다.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3차로 안장된 주인공 부근에서 확인된 금동신발. 주인공의 지위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무덤에는 3기의 나무관이 차례로 안치되었는데, 그 중에서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다.

부스러진 머리뼈와 정강이뼈가 확인된 1개체는 5세기 3/4분기(450~475년)에 1차로 안치한 나무관의 주인공으로 판단됐다. 또 머리뼈 등이 수습된 인골의 주인공은 3차(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475~525년)로 안장한 것으로 추정됐다. 또 3차 주인공의 부근에서는 금동신발과 다량의 유리구슬, 옥류 등이 확인됐다.

금동신발 속에서는 주인공의 발목뼈 조각 1개와 다량의 파리번데기 껍질이 확인되었다. 번데기 껍질에서 추출한 콜라겐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 ‘400~420년’ 사이였다. 무덤에서 출토된 도기와 말갖춤새 등의 연대는 450~475년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고분의 연대는 늦어도 ‘475년 전후’로 조성된 고분(1호분)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인근의 복암리와 영동리 고분과 비슷한 연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대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이 지역 수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말은 안해도 수장이라면 당연히 남성일 것으로 판단했다.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에서는 주인공의 발뼈와 함께 다량의 파리번데기 껍질이 확인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40대 여인

그러나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실시한 두 인골의 3차원 계측 결과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두 인골 모두 여성으로 추정된 것이다. 즉 1차 안장 인골의 경우 3차원으로 복원한 아래턱뼈의 앞뒤 길이와 아래턱뼈가지의 높이를 역시 3차원 공간에서 계측한 결과 75.96㎜와 60.26㎜였다.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두 인골의 3차원 계측 결과를 한국인의 성별 판별 공식에 대입해봤더니 모두 여성으로 판명됐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대략 45~47세 정도로 인식됐다.|가톨릭대 산학렵력단 자료

 

이 수치를 한국인의 아래턱뼈를 이용한 성별판별 공식에 대입해보니 ‘여성’으로 판별됐다. 이는 위팔뼈의 앞면을 바닥에 놓고 위팔뼈의 아래면을 관찰할 때 안쪽관절융기의 방향이 바닥면과 수평을 이루면 남성, 위쪽을 향하면 여성으로 추정하는 방법이다. 3차로 안장된 여성의 경우도 같은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여성으로 판단됐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45(3차 주인공 여성)~47세(1차 주인공 여성) 정도로 측정됐다.

또 3차 주인공 주변에서 출토된 금동조각(19점 이상 출토)이 금동관의 밑동 테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피장자는 금동신발은 물론 금동관을 착용한 채 묻혔다는 얘기가 된다. 5세기 후반~6세기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여성이 당대 백제 중앙정부로부터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사여받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과시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후반~6세기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여성이 당대 백제 중앙정부로부터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사여받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과시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글로벌 사회

이렇듯 복암리에서, 영동리에서, 정촌에서 잇달아 나타나는 ‘여성파워’, 즉 모계사회의 흔적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이제 역사를 공부할 때 섣부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따위는 벗어던져야 할 것 같다는….

단적인 예가 영동리에서 보인다. 영동리 3호분의 2호 석실에서 출토된 ‘세 발 달린 접시’(삼족배)와 ‘꼭지 달린 뚜껑’이 그 예다. 즉 ‘세 발 달린 접시’는 전형적인 백제 도기이다. 반면 이 ‘세 발 달린 접시’의 ‘꼭지 달린 뚜껑’은 신라만의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영산강 지역의 도공은 이 백제 접시에 신라 뚜껑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 구운 것 같다.

나주 영동리 3호분 2호 돌방에서 출토된 도기. 뚜껑은 전형적인 신라식이고, 세발 달린 그릇은 영락없는 백제식이다. 백제+신라 도기는 백제접시에 신라 뚜껑을 덮어두고 구운 흔적이 역력하다. 구울 때 들러 붙지 않게 깔아둔 이기재의 흔적이 보인다.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접시와 뚜껑에서 이기재(離器材·가마에서 그릇을 포개 구울 때 들러붙은 것을 방지하려고 그릇 사이에 두는 물질)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상할 수 있다. 백제 도공과 신라 도공이 이곳에서 만나 ‘백제·신라 합작 도기’를 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 뿐일까. 영산강 유역의 고분과, 그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백제 및 토착세력’이라는 핵심요소와, 가야·신라·왜와 같은 주변 요소가 섞여있다. 이를 두고 실체를 알 수 없는 ‘800년 마한론’을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지역고고학이다.

1500년 전인 5세기 말~6세기 초 영산강 유역이 상상 이상으로 ‘글로벌 사회’였던 것 같다. 나주 벌판처럼 확 트인 시야를 갖는게 어떠한가.(이 기사를 위해 동신대 이정호 교수와 이수진 교수, 김재현 동아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전용호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1)

 

<참고자료>

이수진, ‘나주 영동리 고분 발굴 이야기, 천오백년 동안의 잠을 깨우다’, <천오백년전 나주의 기억>,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엮음, 2023

이정호, ‘출토 유물로 본 영동리 고분 세력의 대외관계’, <6~7세기 영산강유역과 백제>(국제학술대회), 동신대문화박물관, 2010

김재현, ‘나주 영동리고분 출토인골에 대한 형질학적 연구’, <나주 영동리고분군>, 동신대문화박물관, 2011

민나영·최지혜·하그바슈렌·고영종·최재성·한성훈·이광호, ‘백제시대 나주 영동리 고인골의 분자유전자학적 분석>, <나주 영동리고분군>,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나주 복암리 3호분>, 2001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발굴조사보고서>, 2017

이규식·정용재·한성희·이명희·한면수·최동호, ‘출토 인골의 유전자분석-나주 복암리 3호분 옹관 인골을 중심으로’, <나주 복암리>(분석), 2001

오동선,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석실의 매장의례와 금동신발의 특징’,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신발과 금동관>(국제학술대회),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19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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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주 복암리 上 - 고대사의 블랙박스 열리다
 
입력 : 2008.08.08 17:31
나주 복암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영산강 유역 잊혀진 역사 ‘옹관’으로 모습 드러내다

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임영진 전남대 교수)

 

■ ‘처녀분이다!’

1996년 우연히 발견된 복암리 3호분의 96석실. 석실 안에는 4기의 대형옹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옹관 밑에는 금동신발과 환두도(둥근고리칼) 등 영산강 유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사(1, 2, 3호분)는 말 그대로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였다. 정식발굴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요식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3기의 무덤 주변에서 무덤 주위를 두른 주구(周溝·묘역을 구분하거나 배수, 혹은 신성불가침의 상징으로 만든 도랑 같은 유구)가 계속 확인됐고, 고분과 고분 사이에서도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기초조사에 이렇듯 중요한 변수가 생기자 나주시와 시공업체도 당황했다.

“정비사업은 96년 말까지 마무리돼야 했는데 유물과 유구가 잇달아 나오고…. 법적으로는 정식발굴예산을 받을 수 없었고…. 시공업체도 저도 고민이었죠.”

임 교수가 묘안을 짜냈다.

“조사를 제대로 해보려면 시간과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 시공업체에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어차피 복원을 하려면 남은 분구(봉분)의 표토를 걷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나중에 해야 할 표토제거작업을 미리 하는 셈 치자’고….”

다행히 시공업체도 인력과 장비는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표토였으므로 미리 파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남의 집 선산이었던 3호분 위에 있던 민묘들이 대거 이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6년 5월 어느 날, 현장에서 전남대 박물관 조교였던 조진선(현 전남대 교수)이 스승(임영진 교수)에게 달려왔다.

“3호분 남쪽 중앙부분에 베어낸 소나무들이 쌓여 있었어요. 포클레인이 그 나무들을 정리하면서 표토를 살짝 걷어냈는데 바로 큰 판석들이 보였어요. 포클레인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바로 물러났습니다. 천만다행이죠. 그런데 판석들 사이에 아귀가 맞지 않았는지, 그 틈 사이에 조그만 돌들을 끼워놓았어요. 그런데….”(조진선)

틈새에 박아놓은 조그만 돌이 포클레인 작업의 충격에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작은 틈이 보였다.

 

“주먹 두 개 크기의 틈이 노출됐습니다. 손전등으로 내부를 비춰봤는데 잘 안 보였어요. 그래서 함척(函尺·측량을 위해 쓰는 자)을 넣어 봤는데, 아 글쎄, 하염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깊이가 180㎝도 넘었습니다. 곧바로 임 선생님께 달려갔습니다.”

27살 박물관 조교가 감당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리나케 현장으로 뛰어 올라간 임영진 교수는 돌 틈 사이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옹관인지, 뭔지 여하간에 유물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숨이 멎는 듯했다.

‘처녀분이다!’

임 교수는 첫눈에 이 석실분이 도굴되지 않은 ‘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우선 어느 가문의 선산이잖아요. 가문이 제대로 관리해온 선산이었기에 도굴의 위험은 없다고 봐야죠. 그리고 토사가 퇴적된 상태에서 노출됐잖아요. 토사가 쌓여 있었으니 도굴은 없었다고 봐도 됩니다.”(임 교수)

임 교수는 흥분에 휩싸였다. 영산강 유역은 369년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에 병합되었고, 5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영향을 받은 석실분이 유행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석실분이 차지하는 의미는 컸다.

“우리 고대사에서 수수께끼의 영역이 워낙 많지만 특히나 영산강 유역은 공지나 다름없지. 삼국사기 같은 사료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지. 이 일대에 산포된 고분들만이 유일한 자료예요.”(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것도 석실분의 경우 발굴을 통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함평 신덕고분이나 광주 월계동 고분, 해남 조산 고분 등 모든 고분들이 도굴로 파헤쳐진 상태여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임 교수)

그런 상황에서 도굴되지 않은 석실분이 확인되었으므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임영진 교수는 정식발굴을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비계획은 예정대로 96년 말까지 끝내야 한다고 하고…. 그러나 학자의 양심상 이 중요한 유적을 그냥 둘 수 없고…. 이미 노출된 유적이므로 도굴에 대한 보안대책도 세워야 하고….”

조바심이 난 그는 한병삼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위원장(작고)을 어렵사리 복암리 현장으로 ‘모셨다.’ 당시 한병삼은 “이런 유적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이 맡아야 한다”면서 국가 차원의 발굴을 강조했다.

이 조치로 7월8일부터 2개월 동안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 합동조사가 시작되었다.

 

■ 금동신발의 출현

역시 큰 발굴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전남대 박물관팀과 함께 문제의 석실분(96석실분이라 명명)을 조사한 당시 윤근일 문화재연구소 학예관(현 기전문화재연구원장)의 회고.

“임영진 교수가 확인한 문제의 96석실분을 조사하기 전이었는데, 갑자기 집중호우가 내려 돌 틈사이로 쏟아지는 거예요. 얼마나 진땀이 나던지….”

드디어 석실을 열고 들어가자 윤근일을 비롯한 조사단은 깜짝 놀랐다.

“대형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있잖아요. 옹관은 남은 길이 98~180㎝ 정도였어요. 옹관 안에는 6구의 인골이 확인되었고, 금은장삼엽환두도(金銀裝三葉環頭刀·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모양의 둥근고리칼)와 각종 토기류, 철대도·철촉 등 철기, 행엽(杏葉·말띠드리개)·재갈·호등(壺등·발걸이의 일종) 등 마구(馬具)가 쏟아졌어요.”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무덤방의 앞쪽 오른쪽(연도 동쪽) 옹관 밑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포착된 것이다.

“진흙 속에 묻힌 유물이 노출됐는데, 그것이 금동신발임을 직감했어요. 이미 익산(입점리)에서도 비슷한 금동신발을 발굴해본 적이 있었으니까….”(윤근일)

하지만 큰 난관에 봉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어느 신문 기자가 현장을 찾아와 ‘호시탐탐’ 특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문화재 담당기자들의 취재경쟁은 대단했지. 예전에 천마총 발굴 때 일이었어요. 그렇게 보안을 지켰는데, 마치 현장중계하듯 발굴기사가 어느 신문에만 나갔잖아. 발굴단원끼리 서로 의심하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아 글쎄 나중에 보니 경주 우체국교환실장이 그 신문기자의 부인이잖아요. 당시 발굴단이 문화재관리국에 전화로 보고할 때는 우체국 교환을 통해야 했으니까…. 그랬으니 발굴기사가 라이브로 신문에 중계됐지. 허허.”(조 관장)

“맞습니다. (복암리 발굴 때도) ○기자가 얼마나 현장 앞을 서성대는지…. 살 수가 있어야죠. 석실 안에는 금동신발은 노출돼 있는데, 기자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요즘엔 특히 보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윤근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기자)

“한 가지 꾀를 냈지. 기자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랬지. ‘○기자, 더운데 뭐 그렇게 버티고 있어요. 아무것도 없으니 바람이나 좀 쐬고 와요’라고. 그러자 그 기자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전거를 빌려 나주 시내로 바람 쐬러 나갔어요. 거짓말을 한 셈이니 미안한 일이었어요.”

기자를 따돌린 뒤 윤근일은 속전속결, 작전을 펼친다.

“함석판을 이용해서 금동신발이 묻힌 진흙을 고스란히 떠서 석실에서 나왔어요. 그러고는 렌터카를 불러 직원편으로 금동신발을 서울로 보냈어요. 바로 보존처리실로 직행했지.”(윤근일)

윤근일은 지금도 그 기자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그 외에도 에피소드는 줄을 잇는다.

 

■ 대형 옹관이 남긴 해프닝

“옹관의 경우 어떤 것은 하나의 옹관으로 된 단옹식(單甕式)이고, 어떤 것은 대옹과 소옹을 만들어 접합한 합구식(合口式)입니다. 합구식의 경우엔 밖에서 작은 옹관과 큰 옹관을 따로 만들어 무덤에 들어간 뒤에 하나로 맞춰 놓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물 수습단계에서는 이 두 옹관이 빠지지 않았어요. 얼마나 큰지. 그래서 한꺼번에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키가 170㎝이 넘는 옹관(대옹 98.2㎝, 소옹 72.2㎝)이 무덤길에 걸려 나오지 못했어요.”

발굴단은 하는 수 없이 나주의 석공(石工)을 불러 무덤길(羨道)에 조성된 기둥을 갈아서 길을 넓힌 후에야 옹관 4개를 무사히 빼낼 수 있었다. 96석실에서 발굴한 옹관 4기는 양념에 불과했다. 복암리 3호분 전체에서 대형옹관이 쉴 사이 없이 쏟아졌다.

“28기나 되는 대형옹관이 나왔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합구식 옹관 중에는 3m에 가까운 경우(15호 옹관·284m, 대옹 152㎝ 소옹 136㎝)가 있었고, 단옹인데도 2m에 가까운 것(11호 옹관·194㎝)이 있었어요.”(윤근일)

대형옹관과 관련된 해프닝이 1998년 옹관의 복원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줄을 잇는다.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김낙중(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의 회고.

“복암리 현장에서 복원작업을 벌였는데요. 옹관이 너무 크고, 또 수가 많아서 대형 컨테이너 두 대를 붙여 가설 사무실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작업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복원한 뒤였다.

“11호 옹관(194㎝), 2호 옹관(190㎝) 같은 대형옹관(단옹)을 복원하기는 했는데, 아 글쎄, 이걸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는 거예요. 컨테이너 문 높이가 180㎝밖에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죠.”

“그래서 기중기로 컨테이너를 통째로 들어 트레일러에 싣고 그대로 박물관으로 옮겨왔잖아. 허허.”(조 관장)

“트레일러에 실을 때는 컨테이너를 다시 반으로 절개했어요. 어떤 옹관의 경우 무게가 400㎏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옹관을 28기나 복원했으니 무게가 어떻겠어요. 기중기로 옮길 때 컨테이너 밑이 빠질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김낙중)

이런 우여곡절, 천신만고를 겪은 끝에 이 복원옹관들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해프닝들은 그야말로 추임새에 불과했다. 복암리 3호분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거대한 블랙박스였으니 말이다.(2)

 

 

 

(9)나주 복암리中- 무덤박물관이 던진 고대사 실마리

 

마한·백제 고분 틈새 일본식 무덤의 정체는?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하나의 분구(봉분)에 41기의 무덤이 아파트처럼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동일집단이 3~7세기 사이 400년 동안 조성했다. 마한계 옹관묘에서 왜계로 평가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 그리고 백제 석실분까지 차례로 조영됐다. 고분박물관으로 일컬어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이 나왔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뭐 이런 식으로 줄줄이 나왔어…. 어때요. 옛 사람들이 후손들을 생각해서 타임캡슐을 묻어둔 것 같지 않아?”(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러고 보니 옹관의 생김새가 마치 캡슐 같기도 하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 무덤의 박물관

“전용옹관 발생단계인 3세기 옹관묘에서부터 7세기 백제의 전형적인 석실분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것이잖아요. 가히 고분박물관이라 할 수 있어요.”(윤근일 기전문화재연구원장)

“사실 우리 고대사에서 영산강 유역은 공지(空地)나 다름없어요. 삼국사기 등 어떤 사료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은 없거든….”(조관장)

다만 이 일대는 마한의 영역이었고, 백제 근초고왕 때(369년) 병합되었을 것이라는 통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도 사료에 분명하게 나온 게 아니라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즉 “(왜가) 병사를 일으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고, 근초고왕 부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맞이했다”는 기록이다. 두계 이병도는 왜의 기병(起兵) 기사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방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소탕했다는 부분은 사실로 보았으며, 이후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남만의 침미다례’를 마한 연맹체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소국(해남 혹은 강진으로 추정)으로 본 것이다. 이 통설에 따라 5세기 말까지 이 지역만의 특징으로 남아 있는 대형 옹관묘도 백제 간접지배의 배경 아래 유지된 토착사회의 특징으로 해석됐다. 또한 5세기 말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석실분은 백제의 직접통치에 따라 파견된 백제관리의 묘제라는 것도 통설이었다.

■ 수수께끼로 가득찬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

그런데 복암리 3호분과 영산강 유역의 수수께끼를 풀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두 가지 착안점이 있다. 우선 앞서 잠깐 언급했듯 3~5세기 말까지 영암·함평·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유행한 대형옹관고분이 첫번째 착안점이다. 특히 나주평야 한복판인 대안리·신촌리·덕산리 일대에 집중된 36기의 무덤군이 있는데, 이를 반남(潘南)고분군이라 한다.

특히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확인됐는데, 이 일대를 다스리던 수장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런 금동제는 백제식이 분명하지만, 왜계와 가야계 유물도 엿보인다. 과연 반남고분군은 당대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백제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또 하나, 착안점은 대형옹관고분(반남고분 등)이 쇠퇴하는 5세기 말에 등장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이다. 이는 백제식 석실분과는 다소 다른, 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특히 5세기 말~6세기 초, 즉 갑자기 등장했다가 50년도 안 돼 홀연히 사라지는 전방후원분의 존재는 한·일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도 한다)이 무엇인가.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6세기 때 절정에 이르며, 7세기 소멸하기까지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묘제가 아닌가. 그런 일본식 묘제가 영산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묘제는 50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만다. 수수께끼다. 영산강 유역에 무슨 일본식 묘제이며, 왜 단 50년도 안 돼 사라졌을까?

어쨌든 일본인이 영산강 유역에 진출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임나일본부설도 모자라 이제는 영산강 유역까지 왜가 장악했다?

역사기록은 불충분한데 심상치 않은 고고학 자료는 나오고…. 논점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장악시기와, 이른바 마한 혹은 마한의 잔존세력이라 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 그리고 이 일대에서 등장하는 왜계의 무덤과 유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 마한이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복암리 3호분이 발굴된 것이다.

“동일집단이 400년간 옹관묘(3세기 중엽~5세기 중엽·마한계)→초기 횡혈식 석실분(5세기 후엽~6세기 초·일본 규슈의 전방후원분과 유사)→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7세기)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무덤을 구축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윤근일 원장)

복암리 3호분 발견을 계기로 공지였던 영산강 유역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뤘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형국으로 쏟아놓은 연구성과인지라 들춰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질 지경이다. 곤혹스럽지만 한 번쯤 정리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이 백제식 석실분이 도입되는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독자세력의 역사적 실체는 ‘마한’이라는 것이다. 이는 AD 500년대까지 영산강 유역은 백제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며, 369년 근초고왕대의 마한 완전 합병이라는 통설을 깨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석실이 대부분 하천에 인접한 평지 혹은 저구릉상에 자리잡고 있고, 평면형태가 세장방형(가는 직사각형 형태)으로 변화하고 연도의 위치가 중앙에 자리잡으면서 문틀 같은 시설을 갖추는 것 등을 꼽는다. 그런데 이는 백제식이 아니라 북규슈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세밀한 해석을 내린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백제의 마한 합병은 3차례에 걸쳐 이뤄진다고 봅니다. 3세기 후엽과 4세기 중엽, 6세기 중엽인데요. 이 과정에서 백제에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일부 세력이 일본(규슈)으로 망명했을 겁니다. 그런데 5세기 4·4분기에서 6세기 2·4분기의 일본 규슈지역에서는 정치적인 파동이 일어납니다.”

즉, 규슈지역에서 아리아케해(有明海) 일대에 존재하던 지쿠시군(筑紫郡) 세력이 북규슈로 세력을 확대했다가, 오사카·나라·교토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大和) 왕권에 통합되는 격동기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백제의 핍박을 피해 망명했던 북규슈 지방의 마한인들이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U턴했다는 얘기다.

함평 신덕고분. 영산강 유역에는 5세기 말부터 약 50년간 이런 일본식 묘제라 할 수 있는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축조자는 토착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백제의 압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인들은 같은 뿌리의 영산강 유역권의 마한세력과 지속적으로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분포된 장고분(전방후원분)들은 바로 그런 망명 마한인들이 귀향해서 남긴 무덤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왜계 무덤을 썼던 거고.”(임교수)

그런데 이 장고분들은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권인 나주 반남에서 벗어난 외곽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장고분은 단 50년가량만 유지된 채 소멸되고 만다.

“본향으로 돌아온 마한인들은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세력의 승인을 받아 중심이 아닌 주변에 땅을 빌려 살았겠죠. 그러다 현지에 묻히고, 무덤도 1회성으로 끝나고….”

백제의 남하→마한세력 일부 규슈 망명→영산강 유역에는 여전히 마한 존재→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 발생→망명한 마한 세력들 본향으로 귀향. 그럴듯한 해석이다.

임영진 교수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6세기 중엽까지 여전히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는 ‘별도의 정치체’인 마한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 말부터 유행한 왜계 횡혈식 석실분(전방후원분 등)은 백제의 남하에 망명한 일부 마한세력이 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에 휘말려 다시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귀향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분명 백제와는 다른 문화가 6세기 중엽(이때부터 백제의 직접통치가 시작됐다고 함)까지 이어진다는 것. 또 그 과정에서 왜계 성향의 묘제와 유물이 나온다는 점 때문에 임교수의 주장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 과연 백제는 없었을까

하지만 100% 옳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전문가들도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의 요소가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지역의 핵심요소인 백제의 영향과, 주변변수인 가야와 신라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암리 3호분에서 보듯 옹관묘를 쓰던 토착세력이 왜계 구조를 지닌 석실분(5세기 후엽)을 쓰고, 다시 백제석실분(6세기 중엽)을 씁니다. 그리고 일본식 묘제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에서도 백제의 요소가 분명히 보입니다. 나주 신촌리 9호분 단계(5세기)에도 금동관과 환두대도, 목관 같은 백제의 요소가 보이고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인 금동관과, 전방후원분인 함평 신덕고분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흔적, 그리고 월계동 1호분 출토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 등도 역시 백제계입니다.”(김낙중 국립부여연구소 학예관)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형태만 전방후원분일 뿐 이른바 위세품(세력을 과시하는 물건)은 백제나 가야의 것이고, 일반유물은 토착세력의 사용품들입니다.”(이정호 동신대 교수)

“복암리 3호분을 봐요.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뜻이지. 3호분 96석실분처럼 왜계의 석실분인데 그 안에는 마한의 옹관묘를 썼고, 후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는 데도 그 안에는 옹관묘 전통인 다장(多葬·무덤에 시신을 여럿 안치하는 장례풍습)이잖아.”(조유전 관장)

영산강 유역의 문화를 이룬 사람들은 결국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왜와 신라·가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은 토착세력이지, 왜계의 묘제와 유물에만 너무 경도되어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2008년 7월 초.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남도의 폭염을 뚫고 타임머신을 탔다. 2000년 전 무역항(해남 군곡리)에서 출발한 여행은 1700년 전 마한계 수장의 무덤(반남고분군)을 지나,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장고분(전방후원분) 가운데 하나인 해남 용두리 고분을 거친 다음 1700년 전부터 400년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나주 복암리에서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다. 1996년 복암리에서 고대사의 블랙박스가 열렸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12년이 지났는 데도 뿌연 안개 속을 헤맬 뿐이다. 자칫하면 블랙박스를 연 것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 될 수 있다. 온갖 설만이 난무하는….

“어렵지. 사료는 너무 없고, 학자들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갖가지 주장을 펴고 있고…. 무엇보다 고고학 자료로 수수께끼로 가득찬 고대사를 과연 100%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게 어렵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돼요.”(조관장)

과연 마한의 실체는 무엇일까. 마한이 일각의 주장대로 6세기 중엽까지 전남지역에서 백제와는 무관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는? 쉽지 않겠지만 영산강 유역 문화에 큰 파동이 일었던 5세기 후엽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리고 논란의 핵심에 놓인 마한의 역사에 대해 한번 더듬어보자.(3)

 

 

 

(10)나주 복암리 下 - 마한의 수수께끼

 

백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이들의 역사

“마한의 시작은 BC 3세기 무렵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를 유지하며 AD 6세기까지 존재했다.”

이것이 이른바 최근 대두되고 있는 마한론의 실체이다. 나주 복암리 등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나는 주구토광묘(도랑을 두른 무덤)와 옹관묘, 그리고 전방후원형 고분을 중심으로 한 초기횡혈식 석실묘 등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고대사다.

AD 3세기 무렵부터 전남 반남면 일대(신촌리·대안리·덕산리)에는 대형옹관묘를 쓰는 이른바 반남고분세력이 강성했다. 하지만 한성백제 멸망(475년) 직후 영산강 유역의 주도권은 인근의 나주 복암리 세력 등으로 넘어가지만 결국은 백제의 직접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나주 | 이기환 선임기자

 

결국 마한은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해온 고대국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제와는 다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 즉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제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800년간이나 정치체를 유지했다면 왜 마한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없을까.’

 

차근차근 풀어보자. 마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살펴보자.

 

■ 마한의 역사가 800년이라고?

“마한은 BC 2세기 무렵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 흡수됐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

이 통설은 두계 이병도가 일본서기에 나온 반설화적 기록을 해석한 이후 구축됐다.

“(왜가) 침미다례(枕彌多禮·전남 지방의 마한 소국으로 해석)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다. 왕 초고(肖古·근초고왕)와 왕자 귀수(貴須·근수구왕)가 군사를 이끌고 맞으니….”(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369년)

이병도는 이를 토대로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역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했다고 보았다. 이후 백제가 직접통치보다는 간접통치라는 형식을 취해 영산강 유역을 다스렸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하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나주 복암리 고분의 예에서 보듯 전형적인 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이 나타나기 전까지 백제와는 전혀 다른 묘제의 전통을 유지했다는 점을 중시했다. 통설이 달리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마한 800년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역적인 욕구와 맞물려 이른바 ‘마한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풍납토성 우물터에서 켜켜이 쌓인 채 확인된 215점의 토기류. 토기의 아가리 부분이 의도적으로 파괴된 채 확인됐는데, 이는 제사의식의 한 형태다. 이 가운데는 5세기 초 제작된 영산강 유역의 토기류가 보인다. 한성백제 중앙이 지방세력을 서울로 불러모아 제사를 지낸 뒤 복속의례 차원에서 토기를 매납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신대 박물관 제공

 

“과연 고고학 자료가 마한의 실체를 제대로 100% 증거할 수 있는가. 자칫하면 이른바 지역고고학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까.”(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렇습니다.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마한론은 근거가 빈약하고, 위험천만한 학설입니다.”(최성락 목포대 교수)

■ 믿을 수 없는 삼국사기?

무슨 얘기인가. 우리 측 정사인 삼국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던 기자의 눈에 밟히는 대목이 있다.

“(AD 8년)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1년 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백제본기 온조왕조)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이 이미 AD 9년 망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 역사학계가 이 삼국사기 기록을 믿지 않는 것이다.

“역사학계는 마한 멸망기록을 후대에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소급해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했지. 이 대목을 54국 마한 연맹체의 우두머리격인 목지국(目支國)의 멸망기록이라고 보는 거지. 잔존 마한세력은 백제의 핍박을 피해 점차 한반도 서남부로 내려갔다고….”(조 관장)

“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 측 기록 때문이죠. 특히 진서에는 277~290년까지 마한이 진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최 교수)

이병도는 바로 이 중국 사료와 일본서기의 반설화적 내용을 차용, 백제의 마한 병합시기를 근초고왕대인 369년으로 본 것이다.

“너무 견강부회가 아닌가요? 일본서기의 반설화적 내용을 마한 병합의 통설로 활용한 것이 어쩐지 무리스럽기도 하고….”(기자)

“학계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지. 우리 측 사료보다는 중국·일본 사료에 기대는 측면도 강하고…. 곁들여 말하자면 두계(이병도)의 학설을 절대 깰 수 없는 금과옥조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고….”(조 관장)

 

■ 마한론과 모한론의 위험천만한 동거?

어찌됐든 이렇게 굳어진 정설인데, 이 정설마저 새롭게 대두된 마한론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즉 정치체로서의 마한이 AD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존재했다는 새로운 주장까지 등장한 것이다. 우리 측 정사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AD 9년 망했다는 마한이 실은 AD 6세기까지 존재했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운 것인가.

“AD 369년 멸망했다는 역사학계 정설도 의아스러운데, 마한의 역사가 800년이라? 좀 무리스럽지 않나요? 게다가 영역과 문화는 다르지 않나요.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고 해서 한꺼번에 깡그리 백제의 문화가 유입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기자)

“물론이죠. 지금도 지역색이 있잖아요. 중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지역색 강한 문화가 유지되는데….”(이한상 대전대 교수)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 하더라도 기층문화는 있었을 겁니다. 그곳의 민중은 비록 백제의 영역에 살았지만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던 토착세력, 즉 마한 연맹체의 유민이었을 것이고 그 문화도 유지했겠죠.”(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

더욱이 섣불리 마한론을 개진하다 보면 위험천만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모한론(慕韓論)이 바로 그것이다. 송서(宋書) 왜왕조를 보면 438년 왜왕은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등 6국에 대한 통솔권을 자임한다. 송나라는 451년 집요한 왜의 외교에 백제를 빼고 가라(加羅)가 첨가된 6국의 안동대장군이라는 가호를 준다. 일본학자 가운데는 여기에서 보이는 모한을 백제와는 다른, 영산강 유역의 독자세력으로 보고 이를 왜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다.

즉 모한=마한이며 이것은 왜의 식민지라는 것이다.

“모한을 인정하면 임나와 가라, 신라, 진한을 인정해야 하지. 그렇게 되면 이들이 모두 왜의 식민지라는 소리가 됩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지.”(조 관장)

“위험천만한 외줄타기죠. 마한을 잘못 강조하다 보면 자칫 일본학계가 쳐놓은 덫에 걸릴 수 있어요. 478년까지 한반도에는 삼국이 아니라 삼한 즉 모한, 진한이 남아있다는 괴상한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최성락 교수·이정호 동신대 교수)

■ 백제를 극복하지 못한 영산강 세력

한 가지 더. 기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 기록에 눈이 갔다.

“498년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자 중지했다.”

무진주는 지금의 광주, 즉 영산강 유역이다. 백제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영산강 유역까지 내려갈 정도였다면 이곳은 이미 백제의 명실상부한 영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영산강 유역에 분명히 존재했던 대형옹관고분 세력(반남고분 세력)과 복암리 세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산강 유역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일본 규슈로 이어지는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습니다. 3세기부터 토착묘제인 대형옹관묘를 썼던 이른바 옹관고분사회가 5세기 이후 반남고분세력(나주 신촌리·대안리·덕산리)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475년 한성백제가 속절없이 망하면서 영산강 유역에서 큰 파동이 일어났겠죠. 백제왕권이 약해지자 그 틈을 이용하여 복암리 세력을 비롯한 반남고분 주변의 다른 세력들이 성장했던 것이고….”(김낙중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관)

하지만 영산강 세력은 ‘정치체로서 마한’의 기치를 올릴 만큼 강성하지는 못했다. 김낙중 학예관은 “국가단계의 지표는 궁궐과 성벽 등인데 영산강 유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정호 교수도 “마한을 독립세력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마한이 정말 강했다면 한성백제가 멸망했던 그 어수선한 시기에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독립을 선언했겠죠. 하지만 한성백제의 지배질서에 편입되었던 반남고분 세력은 쇠퇴했고, 복암리 세력 등이 우후죽순 격으로 떠올랐어요. 그러나 그 역시 웅진(475년)-사비(538년) 천도의 격동을 겪은 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백제에는 대항하지 못했고….”(이정호 교수)

기자는 한성백제 멸망기(475년)에 등장한 장고분(전방후원형 고분)이 50년도 안돼 홀연히 사라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요. 마한은 54개국이 맺은 느슨한 연맹체였다는 것과, 마한이라는 명칭도 (백제와 신라와 같이) 스스로 정한 국가명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불러준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최성락 교수)

■ 삼국사기로 돌아가자

지난 6월30일. 나주 복암리에서 숱한 수수께끼를 안고 돌아온 기자는 풍납토성에서 5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성백제 우물터를 보았다. 이 우물터에는 무려 215점에 달하는 토기들이 완형의 상태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토기들은 아가리 부분을 의도적으로 깬 형태였다. 제사를 위한 파괴의식이 분명했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의 해석은 흥미진진했다.

“영암 만수리, 광주 하남지구 등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장군(액체를 담는 그릇)과 같은 토기들이 있네요.”

5세기 초반이면 한성백제가 멸망하기 전이다. 그때 이미 백제는 전라도 지역까지 완전히 아우르고 있었으며, 백제 중앙이 지방세력을 서울로 불러모아 제사를 지낸 뒤 복속의례의 차원에서 지방산 토기들을 차곡차곡 매납한 증거가 아닌가.

7월 초에는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복암리 3호분 바로 곁에서 귀중한 고고학 자료를 발굴했다.

“사비기(538~660년) 백제가 이곳에 관영제철소를 운영했고, 치밀한 인력관리시스템을 펼쳤음을 알 수 있는 왕희지체 명문 목간(木簡)을 확인했습니다.”(이종훈 학예관)

자,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얼추 복원해보자.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었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지방통치 아래 간접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한성백제가 망하자 일시적으로 파동이 일었지만(AD 475년) 독립국을 이룰 힘이 없었는지(아니면 의지가 없었는지), 다시 백제의 직접통치 아래 놓인다.

이렇듯 복암리 고분은 고대사 수수께끼를 풀어줄 실마리를 계속 던져주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풀기엔 여전히 역부족인 듯 싶다.

기자가 운을 뗐다.

“삼국사기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왜 우리는 삼국사기보다는 주변국의 역사서에 눈길을 줄까요.”

“우리 스스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걸 믿지 않으니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외국 역사서와 고고학 자료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최성락 교수)

“고고학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요. 사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고고학자가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니잖아요. 적은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스스로 너무 정밀한 해석을 내려버리면 훗날 새로운 자료가 나왔을 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이 되지요.”(조유전 관장)(4)

 

 

마한 심장부의 생뚱맞은 백제고분 주인공은 성왕이 '담로'에 파견한 왕족?

이기환 선임기자2019. 7. 25. 09:16

[경향신문]

나주 송제리고분 돌방에서 수습한 은제관식과 하단 고정 못. 6세기 전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복식(옷과 장식)인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인가.’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관(독널)을 묻은 묘제를 일컫는다. 옹관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문화권임을 상징하는 묘제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형옹관의 핵심분포권인 반남고분군 인근에 옹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고분이 버티고 있다.

돌방 평면과 유물 출토 상황. 도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 최상위급 무덤에서 나오는 최상급의 유물이 세트로 출토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전혀 어울리지못한 고분

영산강 지류인 금천과 만나는 전남 나주 세지면 송제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송제리 고분이다. 예부터 ‘동산’이니 ‘고려장’이니 하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1987년 도굴을 당한 채로 발견됐다. 하지만 1999년 실측조사로 무덤의 형태를 살펴보니 백제식 돌방무덤(석실분)이었다. 천장은 궁륭형(활이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태)이었다. 이것은 마한의 핵심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백제식 무덤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만약 마한인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반남고분군의 영역 내에 무덤을 조성해야 한다. 그런데 송제리 고분은 마한인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도 외톨이처럼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에서 출토된 은제 관식, 은제 허리띠 장식, 은피 관못, 청동제 잔 등. 청동제 잔과 은장도 등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똑같을 정도로 수준이 뛰어났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학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형적인 백제고분이 ‘마한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왜 어울리지 못한 모습으로 조성됐을까. 무덤은 5세기 것인가, 6세기 것인가. 백제가 직접 파견한 관리의 무덤인가. 아니면 백제 중앙의 간접지배를 명받은 토착 마한 수장의 무덤인가. 이 고분의 축조배경과 시기, 성격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돌방 출토 은제 허리띠 장식(교구, 허리띠 끝장식) 앞뒷면이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 왕릉급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1월부터 고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이미 무자비한 도굴을 당한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조사해본 결과 놀랄만한 성과를 얻어냈다. 지름 20m, 높이 4.5m의 돌방무덤에서 은제관식(은으로 제작한 관 장식)과 은제 허리띠장식, 은제 관못, 관고리, 청동제 잔, 호박 옥 등과 토기편 200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전용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25일 “무덤의 주인공이 6세기 전반에 걸쳐 백제 중앙의 복식(옷과 장신구)을 받았던 증거”라고 밝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유물의 구성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제품의 관식과 허리띠 장식 등 최고급 백제유물이 세트로 현현했습니다. 무엇보다 허리 부근에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똑같은 은장도(손잡이 끝부분과 칼집장식 출토)가 보였습니다. 또 청동잔 역시 무령왕릉에서 나온 청동잔 5점과 똑같았습니다. 무령왕릉 것과 같은 공장에서 제작된 은장도와 청동잔으로 보였습니다.”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그릇받침 등 토기편.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되는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나온 그릇받침을 연상시킨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한상 교수는 “526년 승하한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되는 공주 정지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그릇받침 등과 거의 똑같은 토기들이 보였다”고 덧붙였다. 무령왕릉과 무령왕비의 빈전(정지산)에서 쏟아진 유물과 비슷한 등급이라면 무슨 뜻인가. 이한상 교수는 “유물의 구성상 왕이나 왕비, 왕족에 비길 수 있는 높은 신분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교수는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은장도는 무령왕릉 조성시기(523~525년)와 비슷하고, 허리띠는 무령왕릉 조성시기~부여 능산리 사지 조성시기(567년)보다는 앞선다”고 보았다. 이교수는 “따라서 송제리 고분은 523(무령왕 승하)~567년(능산리 사지 조성) 사이의 공백기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출토된 은제 허리띠 장식. 하트형 과판의 앞 뒷면과 연결고리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목되는 백제 성왕

그렇다면 송제리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누구일까.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반남고분군 등 재지세력의 무덤과 떨어진 곳에 홀로 조성된 백제식 고분이 아니냐”면서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의 무덤은 아닐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지에서 호흡을 나눈 토착세력이라면 나주 복암리 고분이나 반남고분에서처럼 한 곳에 무덤들을 계속 조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제리 고분은 반남고분과 신촌리 고분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고 외롭게 서있다.

최 교수는 또 “신촌리 고분 등에서 박혀있는 원통형 토기가 송제리 고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서 “재지적인 전통이 없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국왕이 파견한 왕자나 왕족이 아닐까. 그래서 재지세력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 것이 아닐까. 혹은 높은 신분을 과시하며 독야청청한 것일 수도 있다.

1980년대 도굴된채 발견된 나주 송제리고분. 그래도 발굴결과 무덤방 바닥에서 6세기 백제의 지방지배를 알 수 있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 제공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뒤를 이은 성왕(재위 523~554)을 주목한다.

이번에 확인된 ‘은제관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은제관식’이야말로 이번 발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을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의 ‘대표 유물’은 ‘은화관식’(은으로 만든 꽃모양의 관 장식)이다. 전형적인 은화관식은 사비백제 시기(538~660)의 고분인 나주 복암리 고분과 흥덕리 고분 등을 비롯, 충남 논산과 부여, 전북 익산·남원, 그리고 경남 남해 등에서 총 13점 출토된 바 있다.

은화관식은 사비 천도(538년)를 단행한 성왕이 정비한 담로제에 따라 파견된 백제 지방관(6품인 나솔 이상의 고위관료)이 이마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알려져있다. 은화관식은 은판을 접어서 상단은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1쌍이나 2쌍으로 대칭하고 하단은 특수하게 제작된 틀에 꽂아 고정하는 형태로 제작된다.

나주 송제리 고분. 송제리 고분은 마한의 핵심지역인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백제 돌방무덤이다. 6세기 전반 백제중앙 정부가 파견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은화관식과 은제관식의 차이

물론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전형적인 은화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가운데 대가 있는 것은 은화관식과 같지만 양쪽에 꽃과 같은 장식은 없고 세 개의 가지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재질(은제품)과 제작기법(좌우 대칭과 은판을 오린 다음에 접어 만든 기법)에서 ‘은화관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은제관식’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이런 은제관식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이 은제관식의 은판은 고정못을 박도록 했는데, 이것은 천으로 끼우도록 한 은화관식 보다는 고식(古式)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은제관식은 백제중앙정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파견되는 지배층에게 하사한 ‘은화관식’의 과도기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 무덤의 조성시기를 웅진백제(475~538) 말기와 사비백제(538~660) 초기, 즉 500~550년 사이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사비천도를 단행하고 담로제를 정비한 성왕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돌방에서 출토된 호박제 관옥.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유물이 나왔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따라서 나주 송제리 고분의 주인공은 성왕이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왕자나 왕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경우 성왕이 정비한 ‘담로’를 다스리던 왕자나 왕족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백제 중앙정부가 영산강 유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재지세력의 수장을 백제의 왕족급으로 극진하게 예우해준 사례일 수도 있다. 이한상 교수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만약 백제 왕족이었다면 죽고나서 원래의 본거지(웅진이나 사비)로 돌아가 묻히지 않았겠느냐”고 보았다.

충남 부여 능산리 36호묘에서 확인된 전형적인 모습의 ‘은화관식’. 백제가 나솔(6품) 이상의 고위관료에게 내려준 위세품이다.|사진출처:오은석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사논문 ‘백제 ‘銀花冠飾’의 기능과 의미‘에서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가야와 신라지역과 교류한 증거라 할 수 있는 발걸이(등자·등子)와 안장 고정구가 출토됐다. 발걸이는 철제로 발을 딛는 부분이 세장방형으로 갈라져 있고, 그 윗면에는 방형의 요철이 연속되는 형태이다. 안장 고정구(안장과 말의 가슴 부위를 가죽끈으로 연결해주는 장치)는 원형 철판 중앙에 교구(고정장치)가 부착된 형태이다. 임승경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런 형태의 유물은 의령 경산리와 진주 옥봉 고분군 등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바 있다”고 밝혔다.(5)

 

 

30년전 '쉬쉬'하며 감췄던 일본식 고분..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2021. 8. 24. 05:00
[경향신문]
1991년 장고분 가운데 처음으로 내부구조를 밝힌 전남 함평 신덕고분. 전형적인 일본식 고분(장고분 혹은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발굴조사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아니 이건….” 1991년 3월 26일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찾은 국립광주박물관 조사팀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분의 원형부 서쪽에 드러난 도굴구덩이가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 도굴구덩이는 불과 며칠 전에 판 흔적이 분명했다.

“팠다가 다시 메운 구멍에는 부러뜨린 소나무 가지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갓 베어진 소나무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는 약간의 철기 부스러기와 도자(刀子·작은 칼)편이 흩어져 있었습니다.”(성낙준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회고)

함평 신덕고분의 도굴흔적. 국립광주박물관이 실측조사하기 불과 며칠전 도굴당한 흔적이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생생한 도굴 흔적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도굴 흔적이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강도높은 검찰 수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관람객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에 포장상자를 잠시 맡겨놓고는 사라졌다. 맡긴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그 포장상자를 뜯어보니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철기류’ 였다. 도굴범들은 2년 6개월 뒤인 1993년 9월 검거됐다.

그러나 이미 도굴품 중 상태가 좋은 65점은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뒤였다. 당시 신문은 ‘신덕고분은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이며, 도굴범이 팔아치운 유물 중 5~6점은 국보급’이라고 소개했다.

함평 신덕고분의 원경. 신덕고분은 1980년대부터 존재가 알려졌다. 도굴이 됐지만 1991년 장고분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부구조가 밝혀졌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처음 조사된 일본식 고분

검찰수사와는 별도로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4월부터 40여일간 본격 발굴을 펼쳤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발굴이 마무리되면 학술자료 축적을 위해 발굴조사보고서를 펴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국립광주박물관은 고심 끝에 신덕고분의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보고용 행정보고서만 만들었을 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공식 조사된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한다. ‘앞은 네모나고’(前方) ‘뒤는 둥근’(後圓) 형태라 해서 이름붙은 무덤(墳)이다. 한국에서는 ‘장고’와 닮았다고 해서 ‘장고분(長鼓墳)’이라 한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일왕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 사망한 닌토쿠(仁德) 일왕의 무덤이다.

신덕고분은 비록 도굴됐지만 금동관과 금동신발 조각들이 여러 점 확인됐다. 무덤의 주인공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금동관은 일본풍이 역력하지만 백제의 제작기법도 더러 보인다. 금동신발은 백제산일 가능성이 짙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터부시된 장고분 논쟁

신덕고분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일부가 전남 나주 덕산리와 신촌리 등의 고분 중에 장고분(전방후원분)과 유사한 고분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국내학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1972년 윤세영 고려대 박물관 주임과 황용훈 경희대 교수 등이 “충남 부여에 장고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긴급 문화재위원회가 소집되어 윤세영·황용훈 두 사람의 발표를 청취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허황된 이야기니만큼 발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된 토기류. 뚜껑 접시 56조가 무덤입구에 깔려있었다. 굽다리 접시와 짧은목항아리 등도 보였다. 영산강 유역에서 제작된 토기가 다수인 것으로 파악된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그로부터 12년 뒤인 1983년 6월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한발 더 나간다.

“경남 고성 등과, 전남 나주·영암·무안·함평 등 여러 곳에서 장고분이 보인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강교수의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강교수가 거론한 고분 중 가야 지역에 존재한 고성 송학동 1호분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물론 강교수는 “‘전방후원분’(장고분)은 일본의 고유묘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학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주로 원로학자들은 일왕 가계의 것으로 신성시되는 무덤형태가 한반도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과 화살통장식, 나무 널. 손잡이가 꼰 형태의 고리자루큰칼과 관재로 쓰인 나무(금송)는 일본제로 보인다. 화살통 장식의 제작지는 일본일 수도, 백제일 수도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그러나 ‘한반도 장고분’을 임나일본부와 연결짓는 이들이 생겼다. 일부 소장파는 장고분이 특히 고성 등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강교수의 주장에 흥분했다. 이거야말로 임나일본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후 전남 해남의 장고산 고분과 용두마을의 말무덤고분 등 장고형 고분의 존재가 계속 알려졌다.

반전의 과정도 있었다. 1970년대 ‘장고분’ 논쟁의 출발점이 된 충남 부여의 ‘추정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1호분도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최종 판명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속속 알려진 장고분은 학계로서는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자칫 임나일본부의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되는 구슬류. 이런 유리구슬류는 백제산이거나 일본에서도 백제관련 유적에서 출토된다. 신덕고분 구슬류는 백제를 통해 유입됐을 것이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왜색 고분의 충격

그런 상황에서 또하나의 장고분으로 알려진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된 것이다.

과연 일본의 고분형식이라는 장고분이 맞았다. 무덤 내부에서도 일본색이 보였다. 천정과 4벽, 문의 안쪽에 모두 주칠(朱漆)이 되어 있었다. 빨갛게 칠했다는 얘기다. 출토된 대형 칼의 경우 손잡이 구멍이 일본 후나야마(구마모토현·熊本縣) 고분의 유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쓰인 금송제 관의 흔적이 보였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파편도 여러점 출토됐다.

국내에서 처음 내부구조가 밝혀진 일본식 장고분인 것도 모자라 대단한 위상까지 갖췄다니…. 아니 그런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다는 것인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발굴조사를 맡은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쉬쉬하며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뭐 시쳇말로 두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 연구자가 전무한 형편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덜컥 보고서를 냈다가 일본 학계에 이용만 당할 수 있지 않은가.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말갖춤새. 웅진기 후반을 대표하는 백제산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단적인 예가 있다.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1면 주요기사가 눈에 띄었다.

“한국 광주의 명화동 고분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

기사는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장고분인 명화동 고분의 주위에 50㎝ 간격으로 원통형 토기가 세워져 있다는 것에 주목한 기사다. 원통형 토기(하니와)는 고분 주위에 세운 토기로 일본식으로 알려진 무덤조성방식이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보도 된 다음날(21일) 명화동 고분을 발굴한 국립광주박물관은 큰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전화를 걸어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냐”면서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주문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거리가 생겼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언론이 주요 기사로 다뤘으니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철기와 갑옷 등 철유물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속속 확인되는 장고분의 존재

이후 신덕 및 명화동 고분 뿐이 아니라 전남 영암 자라봉, 함평 장고산, 영광 월산리,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됐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였던 것이다. 그것도 5세기말~6세기초까지 딱 50여년간….

장고분 발굴이 이어져 자료가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 또한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백제인(혹은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학계는 “네모 지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 자생설을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이 주구묘가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한국과 가까운 규슈(九州)에서는 고훈(古墳) 시대(3세기 중반~7세기) 초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원 전후에 조성된 주구묘(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한반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 만약 주구묘가 장고분의 전신이라면 외려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14기만 확인됐지만 일본 전역에는 2,000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반짝(5세기말~6세기초)했지만 일본에서 300년 넘게 대유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왼쪽은 1972년 7월18일 동아일보에 실린 전방후원분 관련 기사. 부여에서 전방후원형 구릉이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1983년 7월11일 경향신문 기사.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등 영산강과 낙동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 일본인?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5세기말 6세기초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왜(일본 규슈 지방)와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묘제(장고분)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5세기 말이라면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국세가 약화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마한 출신 토착세력이 왜의 묘제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또는 영산강 유역에 살고 있다가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 관료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도 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들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의 신분이 되어 본향(전남)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백제인이든 마한 출신이든)이라면 원천적으로 임나일본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는 4세기말~6세기초까지 2세기 가량 한반도 남부에 경영했다는 식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고분은 50년여간 반짝 유행했다. 그것도 겨우 14기 정도만 확인된다.

이 정도로는 왜가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주무대인 영남 지방에서 장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백제가 외국인 채용 방침에 따라 조정에 출사시킨 왜인의 무덤이라 해도 임나일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 확인된 원통형 토기열.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은 “한국 광주의 명화동 전방후원분에서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고 보도했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촌스러워진 국적논쟁

최근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1991년 기껏 조사해놓고도 ‘쉬쉬’하며 보고용 행정보고서로 만족해야 했던 신덕고분 발굴보고서가 30년만에 발간됐다. 이에 발맞춰 10월24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라는 제목으로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 장고분을 다룬바 있다.

당시 몇몇 연구자가 복사본으로 갖고있던 행정보고서를 입수해서 그걸 토대로 학계의 입장을 취재한 바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신덕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의 발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필자는 보고서에 실릴 한·일 연구자들의 논문을 미리 받아보고 20년 남짓만에 장고분 공부를 다시 해봤다. 그런데 기원 및 국적논쟁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딴은 그렇다. 무령왕릉처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국적 논쟁은 영영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장고분 주인공의 국적을 따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학계의 분위기도 달라진 것도 같다.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고 국적을 딱 잘라 주장하는 것을 약간 촌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장고분(전방후원분)인 닌도쿠(仁德)왕릉.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보고서 논고 가운데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글(‘신덕고분의 분구와 석실’)은 “신덕고분은 일단 왜의 규슈(九州) 세력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서술했다. 고분 형태나 매장시설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 주위를 두른 도랑(주구)과 돌뚜껑을 덮은 무덤길 항아리, 띠모양으로 얇게 깐 돌(즙석), 원통형 토기(하니와)를 두르지 않은 점 등은 또 전형적인 일본식이 아니다.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 등은 백제 중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어떤가.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고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을 왜계와 백제계, 왜+백제계, 재지계(마한 출신 토착세력) 등으로 도식화했다.

다카타에 따르면 왜계는 장고형 분구와 규슈계 돌방, 그리고 꼰 모양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등이다. 백제계는 장식 목관과 말갖춤새 세트, 구슬류와 신발 등의 장신구, 그리고 목관의 안치방식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왜+백제’는 금동관과 은제장식, 삼각형 철모(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무기) 등이다. 이밖에 무덤길 제사에 사용된 토기류는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요소가 보인다.

그러나 다카타의 견해 중 금동관의 경우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라는 견해(이한상 대전대 교수)도 있다.

게다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도굴범이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중국제 자기와 초두(조리기구·솥)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일 3국의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1980년대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일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논쟁이 일었다. 그러나 이 고분은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판명되었다.


■아직 회수되지 않은 신덕고분 유물들

비단 신덕고분만이 아니다. 고분을 구성하는 이런 복잡한 속성이야말로 영산강유역 ‘장고분’ 뿐 아니라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정촌고분 등 토착세력의 고분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분석한 다카다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특정 정치체의 정치·경제적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마무리했다.

당시 영산강 유역 사회의 다각적인 대외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만에 펴내는 보고서 내용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한국인이라는 거냐, 일본인이라는 거냐 분명하게 언급하라고 채근한다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5세기 말~6세기 전반 영산강 일원은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을 방문한 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을 보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무덤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또한 ‘외국인 우대정책’을 편 백제의 조정에 출사해서 백제 관료 혹은 귀족이 된 왜인의 무덤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지금 이 순간의 민족 감정으로 1400년 전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

또하나, 검거된 신덕고분의 도굴범들은 도굴품 중 최상품 65점을 팔아넘겼다고 진술했다.

수사과정에서 국보급 유물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점 당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판 유물들은 3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굴품인줄 알고도 사들였다면 그것은 장물이 분명하다.

물론 몇단계를 거쳐 유통되었다면 지금 소장자는 도굴품인지도 모르고 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선의취득’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굴품은 이제 유통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안에 떨면서 그와같은 도굴품을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신덕고분 도굴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1991년 도굴범이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 갖다놓았던 전례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1400년전의 수수께끼 같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이 기사 작성을 위해 박경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권오영 서울대·이한상 대전대·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6)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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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금산리에 있는 일본식 고분의 미스터리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⑩ 한반도의 일본식 유적

길이 60m의 왕릉급 함평 고분
일본식 흙조형물, 토기 발견돼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 15기도
고대 일본에서 유래한 것 분명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 ‘도래인’
열도 문명·사회 발전에 큰 영향
왜인들도 백제·가야 정착 많아

한반도-일본 활발한 교류 증거를
상대방 정복·지배로 해석해선 안돼

  • 수정 2019-03-24 09:26 등록 2019-03-24 09:26

 

외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심리 상태는 공간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지구 곳곳에 유사한 유적과 전승을 남겼다.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하데스가 통치하는 지하세계에 들어간 트라키아의 오르페우스가 일본에서는 이자나기노미코토(伊?諾尊)로 나타난다. <일본서기> 신대편(신들의 이야기)과 <고사기>에 등장하는 이자나기노미코토(이하 ‘이자나기’)와 그 누이이자 부인인 이자나미노미코토(伊??尊: 이하 ‘이자나미’)는 천지창조의 주역이다. 둘은 일본열도와 산천초목, 해와 달, 바람과 바다를 낳았는데, 마지막으로 불의 신을 낳던 이자나미는 그만 화상으로 죽게 된다. 이자나기는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황천에 가서 마침내 그녀를 만나게 된다. 이자나미는 남편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책망하면서 자신은 이미 황천의 음식을 먹었고 이제 누워 쉬려고 하니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이자나기는 말을 듣지 않고 횃불을 들어 이자나미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이미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져서 구더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깜짝 놀란 이자나기는 되돌아 나오려 하였고, 이자나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남편을 원망하여 그를 추격하였다. 긴 추격전 끝에 이자나기는 겨우 황천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설화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도입되면서 추가장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망하여 무덤방에 안치되어 있는 시신을 보게 된 친지의 반가움과 두려움을 반영한다. 이자나기가 지하세계인 황천으로 내려가는 과정은 땅속에 마련된 굴식 돌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고, 이자나기가 도망쳐 나오는 과정은 돌방에서 긴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상징한다. 컴컴한 돌방 안에서 부패되어 있는 시신을 본 뒤, 그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는 제법 담력이 있는 자라도 뒷덜미가 서늘했을 것이다. 황천의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이미 황천의 사람이 되어서 나갈 수 없다는 이자나미의 말은 저승의 음식을 먹으면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황천의 관념을 반영한다.

한반도 남부 출신의 고대 도공들이 오사카에서 만들기 시작한 스에
영산강 유역 이주민이 정착한 일본 오사카의 시토미야키타 마을에서 발굴된 말의 전신골. 일본에는 원래 말이 없었다. 백제에서 말을 보냈다는 문헌기사는 이 발굴로 사실로 증명됐다. 권오영 교수 제공

 

중국→한반도→일본으로 퍼진 기나이형 석실

5세기 후반부터 일본열도의 심장부에 해당되는 기나이(오사카, 나라, 교토) 지역에는 새로운 무덤이 등장하였다. 시신을 위에서 아래로 넣고 한번 매장하면 그걸로 종료되는 종래의 장법에서, 다듬은 돌로 방을 만들어 부부나 친족 등 복수의 사람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기나이형 석실(돌방)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묘제가 도입된 것이다. 이런 무덤에서는 소형 취사용기(솥, 시루, 자배기, 부뚜막 등)와 반지, 팔찌, 비녀 등 귀금속제 장신구를 넣는 풍습이 자주 확인된다.

종전 일본학계의 입장은 기나이형 석실은 백제의 영향이지만 귀금속제 장신구와 취사용기를 껴묻는 풍습은 중국의 영향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취사용기의 부장은 무덤 안에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는 황천국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이승과의 인연이 단절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백제의 무덤에서는 취사용기와 귀금속제 장신구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기나이형 석실의 직접적인 기원지로서 백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에서 60기가 넘는 백제의 돌방무덤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그리고 흙으로 빚은 소형 취사용기가 많이 발견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일본 기나이형 석실과 장법의 원류가 백제 고분에 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치 않다. 무덤 안에 취사용기를 넣는 풍습은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낙랑, 나아가 한나라의 무덤에서도 수많은 예가 확인된다. 황천국의 사상 자체가 중국에서 만들어지면서 이와 관련된 저승관, 장례 풍습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퍼진 것이다. 이런 해석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삼최(三最: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 가장 훌륭한 최고(最高), 가장 큰 최대(最大))에 연연한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래된 문화는 대서특필하면서도 그 문화의 원천이 중국을 비롯한 외부였다는 사실의 인정에는 매우 인색하다. 외부의 영향을 인정하는 순간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2018년 12월26일,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가 열렸다. 전남 함평 금산리에 소재하는 한 변의 길이 60m급의 대형 무덤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통틀어도 왕릉급 규모이다. 신라의 황남대총 북분과 남분은 각각 그 직경이 70m 정도, 고구려의 장군총은 한 변이 30m, 태왕릉은 63m, 백제의 석촌동 3호분은 50m 정도이다. 무덤의 규모와 국가권력의 강도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규모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영산강 유역에서 최대급인 금산리의 고분은 삼국의 왕릉에 견주어도 그 규모가 처지지 않는다.

전남 함평 금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사람 모양의 토제품. 권오영 교수 제공
일본 미야자키현 이키메 5호 전방후원분의 외면이 즙석으로 덮여 있는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이 무덤은 바깥 전면에 돌을 타일처럼 입혔는데, 즙석(이음돌)이라고 불리는 이런 시설은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일본열도에서 발달하였다. 무덤의 외부에서는 흙으로 빚은 인물, 닭, 말 모양의 형상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일본열도의 고분 외부에 세워지는 하니와(埴輪)를 쏙 빼닮았다. 발견된 토기 중에는 일본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스에키(백제와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만든 회색의 단단한 토기)도 있었고, 중국 남조에서 생산한 도기와 자기도 여러 점 발견되었다.

그런데 유적 조사의 성과를 소개하는 자리가 영 어색하였다. 한반도 서남부에서 왜색이 짙은 무덤과 유물이 나왔으니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발굴 담당자는 “6세기 전반까지도 백제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던 마한세력의 활발한 국제교류의 흔적”이라 하면서,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이 조사와 전혀 무관한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없다”라고 마무리하였다. 담당자들의 곤혹스러움이 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배어났으며, 그 흔한 전문가의 멘트도 없었다. 그 누가 영산강 유역에서 왜색이 짙은 고분이 나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돌팔매질을 당하려 하겠는가?

2012년에 순천 운평리에서 전형적인 대가야 고분이 발굴조사되었을 때에도 언론이 뽑은 제목은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유물 대거 출토”였다. 사실은 “섬진강 유역까지 대가야 고분문화 확산 증거 발견” 정도가 정답일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일본식 전방후원형 고분이 15기가 남아 있다. 반대로 일본에는 백제가 기원인 기나이형 석실 고분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이런 유적과 유물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일 뿐 서로 상대방을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근거는 아니다. 사진은 광주 광산구 월계동의 전방후원형 고분 모습.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

 

백제 동성왕 호위한 왜인 용병

우리 사회는 식민사학의 폐해로 인하여 지나치게 위축되고 한편으로는 격앙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가야사나 한일관계사 연구의 최종 목표는 언제든지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왜계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와 해석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자료의 공개나 연구를 꺼리는 분위기마저 형성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조사된 전방후원형 고분 중 아직 공식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것이 절반 정도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학계의 든든한 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모든 해석을 한가지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경향은 비이성적이다. 가야사를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황국사관을 용서할 수 없듯이, 일본 고대사를 한국인의 일본열도 정복사로 치부하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 한반도계 이주민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흔적과 그 의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왜인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활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때로는 신라를 침략하고 때로는 백제의 용병으로 고구려와의 전투에 동원되었다. 백제의 동성왕을 호위하여 웅진으로 들어온 왜인도 있었으며, 동북아시아의 해상 교류에 참여하여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오간 상인과 선원도 있었다. 그중에는 죽어서 한반도에 묻힌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광주 월계동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나온 하니와형 토제품(양쪽 옆)과 목제품(가운데). 권오영 교수 제공
백제 멸망 뒤 일본에 정착한 백제 왕족들의 정신적 지주다. 권오영 교수 제공

 

앞쪽은 직사각형, 뒤쪽은 원형인 전방후원분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외관의 고분은 일본의 나라 지역에서 3세기 중반 무렵부터 나타나서 6세기 말까지 수백년간 발전하였다. 지금까지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의 수는 5천여기에 달한다.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된 사실은 분명한 팩트이고 그 수는 15기 정도, 시기는 5세기 말~6세기 전반 무렵에 국한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한반도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뿌리라고 볼 수는 없다. 한반도가 발생지라고 강변할 필요도 없다. 일본에서 유래한 전방후원형 고분이 왜 한반도 서남부에 남아 있는지, 그 국제적인 계기는 무엇인지, 그 안에 묻혀 있는 인물의 정체는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열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고분문화,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자유로워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화산학과 고고학의 학제 간 연구에 의하여 순식간에 벌어진 일본 군마지역 일가족의 비극을 묘사하려는 지난 3월9일치 연재도 필자의 의도와는 동떨어지게 “백제의 선진기술이 미개한 일본열도를 깨우쳐준” 사건 정도로 치부되고 이에 환호하는 것이 우리의 냉정한 현주소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실상은 무엇일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고대 한국인의 일본열도 정복의 역사도 아니고, 야마토 조정의 한반도 남부 지배의 역사도 아니란 것이다. 극단적 주장은 실상을 호도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고대 국가들과 일본열도의 여러 정치체들은 각각 자국, 혹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바다를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그 이익은 정치, 외교적인 이익일 수 있고 경제적인 이익일 수도 있다. 일본열도에 이주 정착한 한반도계 이주민의 수는 어마어마하고 이들이 일본의 문명과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왕실에 한반도계 주민의 피가 섞여 있음도 사실이고, 유력한 지배집단 중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주민이 중심이 된 경우가 많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백제왕신사로
철 지난 ‘임나일본부설 타도’

 

일본학계에서 도래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일본의 장수들에 의해 노예사냥 당하듯이 포로로 잡혀 오거나, ‘천황’의 덕을 흠모하여 자발적으로 귀화하였다는 과거의 견해는 이미 부정되었다. 전쟁 포로로 잡혀 온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를 피해 이주하거나 선진 기술과 문화를 갈구하는 일본 지배층의 간청에 의해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초래한 475년 백제 한성의 함락, 663년 백강전투의 패배로 인한 백제 부흥운동의 종말은 한반도 남부의 주민 집단이 무리를 이루어 일본열도로 정착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 결과 일본열도 곳곳에는 한반도계 이주민과 관련된 지명, 전승, 유적과 유물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이다. 그 양은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왜계 유적, 유물의 수백배는 될 것이다.

21세기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무대로 전개되던 수많은 집단들의 다양한 형태의 교류(전쟁, 혼인, 이주, 교역)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철 지난 “임나일본부설의 타도”를 외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이주민의 역사를 오롯이 복원하는 작업에 몰두하여야 한다. 일본 땅속에서 출토된 한반도계 이주민의 수많은 흔적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7)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열쇠구멍 닮은 ‘장고분’… 고대 韓日교류 비밀의 문 열까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12월 14일 09시 28분 
 

<22> 광주 월계동 ‘장고분’ 발굴  임영진 전남대 교수

9일 광주 월계동 ‘장고분’ 1호분 앞에서 임영진 전남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석실 입구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9일 광주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 사진기자가 띄운 드론이 1호분 위로 날아오르자 열쇠구멍 모양의 봉분이 모니터에 잡혔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봉토가 연결된 일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았다. 무덤 길이가 45m에 이르다 보니 지상에서는 모양을 가늠하기 힘들다. 장고분은 5세기 말∼6세기 초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고분을 발굴한 임영진 전남대 교수(61)는 “20여 년 전 처음 왔을 때 이곳은 농가와 논밭으로 둘러싸여 주민들도 무덤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회고했다.
 
○ 장구마을의 비밀

 광주 첨단과학산업단지 개발이 진행되던 1992년 12월. 지표조사에서 무덤 석실이 발견된 ‘장구촌(杖鼓村)’으로 임영진과 제자들이 현장조사를 나갔다. 전통악기 장구처럼 생긴 언덕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장구촌이었고, 임영진도 고분 이름을 한자 발음대로 ‘장고분’으로 지었다. 그가 목격한 장고분의 파괴 상태는 심각했다.

 “봉분은 이미 절반쯤 사라졌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석실은 남아 있었는데 오른쪽 벽 일부가 뚫려 있더군요.”

 석실 내부에는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감자 등이 저장돼 있었다. 여름에 석실 안이 시원해 농산물 창고로 주로 활용했던 것. 당시 집주인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 도굴이 돼 내가 살기 시작했을 때 석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미 도굴된 폐고분이었지만 학술적 가치는 높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임영진은 발굴보다 보존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산업단지 시행자인 당시 한국토지공사 부사장이 이전 복원을 요구했지만 그는 “1600년 전 조성된 장고분의 역사적 가치를 지키려면 현지 보존이 원칙”이라며 버텼다. 결국 보존으로 결정돼 이듬해 5월 3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 저습지에서 건진 보물

 보존구역을 설정하려면 정확한 유구 범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발굴팀은 봉분부터 파지 않고 주변에 트렌치(시굴갱)부터 팠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봉분으로부터 7∼15m 떨어진 외곽에서 무덤 주위를 둘러싼 구덩이가 발견된 것. 고대 무덤에서 종종 보이는 주구(周溝·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였다.

9일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촬영한 광주 광산구 월계동 고분(위 사진). 열쇠구멍 모양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다. 오른쪽에 있는 큰 고분이 1호분이다. 고분을 둘러싼 주구에서는 원통 모양의 분주토기(아래 사진)와 분주목기가 발견됐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임영진 교수 제공 
 
 
주구 주변은 개흙투성이여서 발굴이 쉽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개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해 나무 같은 유기물질이 썩지 않았던 것. 1.5m 깊이의 주구에서 다양한 목기(木器)들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토기와 목기의 형태, 색, 무늬 모두 독특해 또 한번 놀랐다. 특히 바닥이 뚫린 원통형 토기는 당시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하니와(埴輪·봉분 주변을 장식하는 토기)와 거의 같았다.

 “이 토기와 목기들은 일본 하니와를 한반도에서 재현한 겁니다. 장고분의 독특한 구조와 더불어 무덤 주인이 왜인(倭人)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죠.”

○ 장고분 주인은 한민족인가 왜인인가

 학계는 장고분 주인을 놓고 왜와 교류한 토착세력, 왜에서 파견된 유력층, 백제에 파견된 왜인 관료 등 다양한 학설을 제기했다. 임영진은 일본 내 정치 변동으로 인해 한반도로 망명한 왜인으로 본다.

 그는 장고분을 비롯한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의 입지와 구조를 주목하고 있다. 5∼6세기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은 나주 반남 고분 일대인데, 왜계 전방후원형 고분은 이곳에서 떨어진 외곽에 여기저기 흩어진 단독분 형태로 존재한다. 입지나 규모로 봤을 때 이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배층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고분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교역 목적으로 일본에서 파견한 왜인으로 보기도 부자연스럽다.

 임영진은 이 무렵 일본에서 야마토(大和) 정권과 이와이(磐井)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북규슈 일대를 장악하던 세력이 떠밀려 한반도로 망명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월계동 고분 등이 북규슈 무덤의 석실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한 마한은 북규슈 세력과 오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다만 왜인들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각지로 분산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8)

 

 

세계 최대 규모 한강지역 '전방후원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분포된 전방후원분의 실체는 무엇인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9/13 [04:36]

 

A 한.일 역사논쟁으로 부각된 미스테리의 '전방후원분'
 

▲ 단군3조선의 영역(마조선:한반도+일본열도:왕검성=북한 평양)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먼저 단군3조선 중에서 한반도는 마조선(마한)지역으로 당시 마조선의 영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바다를 매개로 한반도와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된 일본열도까지 포함되었다는 역사인식을 깔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분포된 '전방후원분'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전방후원분은 2-3세기경에 한강유역에서 발생해 4,5세기경에 성행하였고, 5세기말에는 한반도에서 소멸되었다.전방후원분은 한강유역에서 비롯해 영산강유역·남해안·낙동강유역·경주 등지에 분포한다. 대개 대하천·해안에 인접한 구릉·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일본에는 홋카이도·오키나와를 제외한 전지역에 분포하며, 특히 긴키(近畿)지방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보고된 숫자가 약 2,600여 기에 이른다.
 
일본의 경우는 4세기까지는 우리 나라와 같이 산상이나 구릉에 만들었다. 전반부를 스커트형(潑形) 또는 긴 장방형으로 하고 후원부에 비해 낮게 만들었다. 그러나 5세기 이후에는 위치가 평야지대로 바뀌고 규모도 커져서 길이가 수백 m에 달하는 고분들도 출현하였다. 또 전방부의 높이가 올라가고 그 밑변이 넓어져서, 고분이 부채나 키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6세기 말∼7세기 초에 쇠퇴하고 8세기에는 소멸하였다.
 
전방후원분은 고분군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나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규모나 부장품도 특출하므로, 주로 지배적 인물을 매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일고대사에서 미스터리로 불려왔던 백제 초기의 한성문제에 큰 분수령이 있을 듯 하다. 전에 뉴스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바로 서울 강동구 한강변 일대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의 10여개의 전방후원분 고분의 발견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작은 동산, 야산, 구릉 정도로 보아왔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 고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연대도 기원 4세기인 일본의 전방후원분 시기보다 더 빠른 시기인 기원 1세기다. 서울 한강변 전방후원분의 내부를 레이저로 매장물 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하 3미터 지점에서 돌로 만든 방, 즉 석실이 발견됐고, 그 안에는 유물이 확인됐다. 붉은 부분은 금과 동으로 만든 유물을 나타내고, 하늘색 부분은 토기나 자기 등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 전방 후원분은 그 동안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남 영산강 지역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16기가 발견됐지만 모두 일본보다 규모가 작고 나중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일본학계는 이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일본의 분묘 문화가 한반도로 수출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까지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서울 한강변에서 발견된 초대형 고분은 이같은 일본의 논리를 뿌리채 흔드는 결정적인 고고학적인 근거다.

▲ 세계 최대 규모의 서울 강동구 한강변의 전방후원분(위성사진) &nbsp; &nbsp;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기원3-4세기 당시 일본은 한반도 백제황족들이 건너가 살면서 일본열도의 왕노릇을 하며 백제본국의 통제를 받는 담로지역으로 백제의 영역이나 마찬가지 지역인 한반도 남부지역을 침략하여 점령할 자체 능력도 없었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은 마땅히 해당사항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단군3조선 붕괴이후 마한(서남부).진한과 번한(동남부) 등 한반도3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왜>관련 문헌내용은 당시 한반도 남부해안 지역의 해상세력을 의미하지 일본열도세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일간에 비문조작이니하면서 역사논쟁이 되고 있는 광개토태왕비문내용과 관련하여 마한을 복속한 백제.번한을 복속한 가야.진한을 복속한 신라지역을 침범하여 영토를 점령했다는 내용또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역사주역은 일본열도로 완전히 이주해 가기 전에 해상활동을 했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 마조선인들이며 북방 기마세력에 해당하는 진.번조선 유민들에게 빼앗긴 토착 마조선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독립전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일본사학자들이 일본열도 중심으로 해석하는 인식론은 당시 왜에 대한 이해해족에서 오는 왜곡된 역사분석이라 할 수 있다. <왜>는 당시 해상활동을 했던 한반도 토착민들(마조선인들) 체구가 왜소한데서 붙인 용어다. 유순했던 한반도 마조선인들은 부여.흉노족 등 북방의 단군조선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기마세력에게 밀려 결국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면서 <왜>로 통칭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이주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화해와 소통이 되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역사인식만이 발전적인 한일관계 복원의 길이다.

▲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과 그의 세력들이 살았던 오사카 간논즈카의 고분규모에 비추어 당시 곤지계가 규슈,오사카 일대를 무대로 야마토 왜의 주요 정치세력일 가능성을 주장한다.그렇다면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녕왕은 백제가 파견한 왕자들로서 야마토 왜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본국 백제가 위험에 빠지자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nbsp;&nbsp;&copy; 윤복현 저널리스트


그러면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하여 개로왕이 죽고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무녕왕을 임신한 황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던 중에 무녕왕(이름:사마)을 낳게 되고 수도 서울이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황급히 서울에서 공주로 수도를 이전한 백제시대에 일본열도와 백제와의 관계성과 관련한 [일본서기]기록을 보자.

[일본서기 웅략23년에 보면 "4월 왕(백제 문주왕)이 죽었다.곤지왕의 다섯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유년에 총명하므로...군사500을 자기나라(백제)에 호위하여 보냈는데,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기록내용과 관련한 당시 한반도 백제본국의 상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백제 공격으로 父王 개로왕 전사=>웅진(공주) 천도.정치적 불안 끝에 호족반란으로 개로왕 동생 문주왕 피살 및 정국 혼돈 상태=>개로왕이 죽자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개로왕의 황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여 무녕왕(사마)을 친아들처럼 키운다. 문주왕이 피살당하자 일본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은 자신의 친아들 동성왕 (479-501)을 왜군500명을 호위하게 하면서 한반도 백제본국의 황제로 보낸다.=>동성왕도 귀족에게 피살당하자 일본열도에서 자란 개로왕의 아들 사마가 역시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한반도 백제본국의 황제로 등극하니 바로 무령왕(501-523)이다. 이후 백제의 국력이 회복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를 보좌하는 백제황족의 나라였던 것이다.

▲ 일본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전방후원분(닌토쿠능 고분)&nbsp;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따라서 한반도에 일본보다 시기가 늦은 전방후원분의 무덤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백제를 보좌한 일본의 백제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그래야 전남 영산강 지역의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의 분포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열도와 활발한 무역과 교류관계을 가지고 있던 서남해 지역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토착마한세력(토착 마조선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이동한 이후 제압하고 복속시켜야 할 세력이였다는 의미가 된다.

1991년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장년리 장고산 마을에서 전체 길이가 70m에 이르는 대형 무덤이 발견됐다. 이 마을 사람들은 무덤을 장고 모양의 산이라 여겨 장고산이라 불러왔다. 이런 이유로 이와 구조가 같은 무덤의 명칭이 ‘장고형 무덤’이라 정해졌다. 해남 지역의 장고형 무덤은 공식 측량 결과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불리는 무덤과 같은 양식으로 밝혀졌다. 전방후원분은 글자 그대로 앞은 직사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무덤이다.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장고형 무덤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반대로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 일본 고대사의 핵심 유적으로 본다. 일본에게 전방후원분은 왕의 무덤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 전남 광주의 전방후원분.원 안은 시체를 안치하는 곳이고 사각 안은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추정된다.&nbsp;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호남지역의 영산강유역에선 일본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많이 발견된다. 영산강 유역에선 장고형을 비롯한 삼각형, 원형, 타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어 장고형 무덤의 원류가 한반도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무덤은 일본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만일 일본에서 전해진 무덤이라면 영산강 지역을 일본의 지배지로 해석할 수도 있어 한일 고대사의 논쟁점이 되고 있다.
 

▲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 분포지역&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B.전방후원분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논쟁사항
 
1. 도입

영산강 일대에 나타나는 장고모양의 고분군들(14기)의 기원과 그 주인에 대한 문제는 한.일 양국의 논쟁거리다. 일본은 이 무덤양식이 일본의 보편적인 양식인 전방후원분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을 들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고대사 문제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2. 일본 측의 주장

1) 형태

전남 함평의 신덕 고분을 비롯한 영산강 일대의 장고형 무덤은 일본 고대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전방후원분과 형태 면에서 유사하며, 그 규모로 볼 때 거대국가권력인 4세기 후반의 야마토조정과 연관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또한 내부가 붉은 색인 것도 일본고분의 주요특징이다.

2) 출토품

한국 검보다 20 센티 정도 긴 일본형 대도가 발견되었고, 1994년 발견된 광주 명화동 고분의 경우 일본 하니와 토기의 특징인 몸체에 구멍이 난 원통형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본의 이 지역 지배의 흔적으로 볼 수 있고,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이다.

(임나일본부설:2000년에 경남 고성의 송학동 고분이 발굴되었다. 그 모양과 내부의 붉은 칠, 그리고 출토된 토기가 일본 고분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는 사슴뿔재료로 만든 칼자루 또한 발견되자, 일본은 이를 근거로 일본이 옛 가야시대에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 일본 교과서 중에는 임나일본부설을 채택한 것들이 적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송학동 고분은 옛 가야의 고유한 무덤 형태인 삼봉 형식의 무덤이 가운데 부분이 주저 앉으면서 전방후원분의 형태로 변형된 것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3)무덤의 주인

고분전문가 동지사 대 모리 고이찌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한(마한)'이라는 지역이 영산강 일대였을 것이며 이 지역은 백제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구역으로 일본인들이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중간기착지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덤의 주인은 막강한 세력을 가진 독자적 성격의 외래 일본인이었다는 주장이다.

3. 한국 측 반론

1) 형태

일본사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유한 고대무덤양식인 방형주구묘의 영향을 받은 일본만의 독특한 무덤형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주구묘의 오래된 형태가 한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고 있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서 발굴된 주구부 석관묘(도랑이 있는 석관묘) 15기의 경우 삼각만입석촉, 이단경식석촉 등 유물로 보아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된 일본 효고(兵庫)현의 주구묘(기원전 445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도 최대인 것으로 밝혀졌다. 주구묘는 주위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봉분을 쌓기 위해 흙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덤 주위의 흙을 파낼 수 밖에 없는데 이 때 도랑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구묘가 일본 무덤 만의 특수한 형태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2) 출토품

위의 일본측의 주장처럼 일본의 특성을 지닌 물건들이 출토된 것이 사실이나, 백제산 금관과 장신구들도 발견되었다. 이 물건들은 백제에서 봉신이나 제후에게 하사했던 물건들이었다.

3) 무덤의 주인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무덤을 축조했던 사람들은 일본에서 온 외래무장세력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의 관계성이 없는 독자세력이기 보다는 일련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미 4-5세기에 백제인들이 일본에 진출했다는 증거들이 있다.

일본의 나라와 오사카 인근에 소재한 와카야마 시 주변에는 백제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이 전체 450기 무덤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발굴된 토기와 기와들은 영산강 일대의 출토품들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일본 서기에는 '기 씨'와 '시나노 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러한 언급 중에 백제의 벼슬인 나솔, 시덕, 덕솔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벼슬이 나타내는 신분은 최고 귀족과는 거리가 있는 일반적인 성격의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가?

이 지역은 고야산 금송으로 유명하였으며 이는 황족 목관 제조에 사용되었다. 또한 나가노 지역은 시나노 씨의 본거지로서 전 일본 말 사육지 40개 중 20개가 여기 분포할 정도로 말생산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말 사육형태가 백제식이었음이 밝혀졌고 발견된 시신에 대하여 인골 유전자 감식을 시행한 결과 50세 전후의 한반도 도래인임이 밝혀졌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 갔던 백제관료들이 이미 이 시기에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야마토 조정과 백제 사이를 매개하면서 일본의 특산품을 백제에 공급하는, 백제의 이익을 위한, agent 역할을 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벼슬명과 금동관 및 장신구 등 백제의 하사품 발견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일본이 아닌 영산강 지역에 자리를 잡고 무덤을 축조하였는가?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의 한반도의 정세를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고구려의 남하정책(475년)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밀려나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그 때 영산강 지역에는 백제에 저항하는 마한(한반도 토착마한세력)의 잔존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분발굴 시 전방후원분 외의 다른 형태들이 발견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 때 백제는 고구려와의 경쟁 외에 마한세력으로부터의 위협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본에 있던 백제계 유민들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영산강 일대를 제압 관할하게 하였던 것이다.

C.종합분석-전방후원분의 실제 주인은 마조선(마한)인들
 
원래 전방후원분 이전의 우리 나라 고분들은 방형 분구를 가졌었다. 뒤에 일찌기 동이족의 역사터전이였던 양자강 유역과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성행한 토돈묘(土墩墓)와 방총(方塚)·원분(圓墳)의 요소가 해류(해양무역루트)를 타고 황해를 건너와 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서해안지역에 상륙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 방분과 원분이 결합하고, 방분쪽의 제단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전방후원분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륙을 통해 낙동강유역과 경주지방에 전파되었다. 이 중 남해안지역의 것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전파되어 크게 발달되었다. 결국 전방후원분은 고대 해상활동을 활발히 했던 한반도 마조선 해양세력(특히 영산강 지역을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세력)의 문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사유체계를 반영한 고고학적 자료라 할 것이다.

▲&nbsp;단군3조선 중 마조선(마한)의 영역은 일본열도를 포함하고 있었고, 단군3조선의 붕괴이전까지 한반도와 일본열도는&nbsp;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간으로써 해상을 매개로 문화를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군3조선의 붕괴이후 북방 기마세력(진.번조선 유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토착 마한인들은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현대 일본인들의 조상이 되었다.&nbsp; &copy; 윤복현 저널리스트

 

백제가 영산강이남까지 통합한 시기는 백제가 서울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4-5세기로 봐야 한다. 영산강지역 전방후원분 무덤에서 백제관료들의 장식구가 출토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4-5세기 이전에는 충청도이남은 마한지역이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여기서 마한이라고 할 때는 중국 요서지역에 위치한 기자조선이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세력이 해로를 따라 남쪽(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내려와 스스로 한왕(한반도 왕)이라 칭하고, 개국한 마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래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 마한세력은 기자조선세력에 밀려서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본토 한반도를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해양활동을 하던 토착 마한세력과 연합하여 초기 백제.가야.신라시기에 자주 공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장고무덤양식은 바로 이들 토착마한세력의 무덤양식이라고 해야 맞다. 일본열도의 초기 장고무덤은 쿠슈지역에서 발견된다. 쿠슈지역은 일찌기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던 토착마한 해상세력이다. 이들을 [후한서]에서는 한반도3한과 경계를 하고 있는 한반도 남부해안지역의 <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한반도 서남해 해상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역적으로나 거리상으로도 일본문명은 한반도문명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의 하나의 네트워크공동체로 단군3조선 중 평양을 왕검성으로 삼는 마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단군3조선이 붕괴되기 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해상을 통하여 문화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중에서도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교류했고, 가장 먼저 영산강문화가 직수입되는 곳이 바로 큐슈(구주)지역이다.

따라서 단군3조선이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활발히 교류하다가 단군조선이 붕괴되고 마한(한반도)통치체제도 자체 붕괴되면서 중국 요서지역에서 최씨 낙랑국이 북한 평양으로 이전하였고, 옥저도 함경도지역으로 이전하였고,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조선세력도 요서지역에서 서해를 건너 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전하여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고 마한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마한으로 개국하고 54개 소국(읍단위:총 인구 50-60만 정도)이 분포된 한반도 서부지역을 장악했다. 이 때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마한세력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장고무덤은 토착마한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교류했던 구주(쿠슈)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일본전역에 확산되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기준세력은 대가 끊어져 다시 마한인이 진왕이 되었다고 기록된 점으로 마한토착세력은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韓傳>에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한 후 남은 무리 수천인과 같이 바다 길로 도망하여 (한지로 가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 후는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결국 기자조선세력은 토착마한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일본열도는 오래전부터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세력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제를 도왔던<왜>로 기록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토착마한세력은 바다를 지배하는 강력한 세력이였음이 분명하다.

▲&nbsp;소서노가 개국한 어하라 지역(진.번조선 경계지역=현재 요동반도)&nbsp;. 소서노가 온조를 따라 한반도(마한)땅으로 이주하면서 비류가 다스렸으나&nbsp; 추종세력이 적어 결국 비류세력도 온조가 한반도 마한땅에 개국한 십제로 통합되었다.&copy; 윤복현 저널리스트

 

[후한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54개 속에 백제국이 들어 있다. 이 때 백제는 어하라(비류백제)지역에서 마한지역으로 들어와 마한왕에게 거주할 땅을 분양받은 고추모 아들 온조세력의 <십제>라 할 것이다. 나중에 어하라(진.번조선의 경계지역으로 지금의 요동반도에 해당)지역에서 비류세력이 온조세력에게 통합되고, 서울 한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요서지역에서 고구려 고추모세력과 전쟁을 벌이던 고두막후예 중 구태세력이 100가족을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평안도 지역(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진짜 백제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잔>으로 기록된 구태세력은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잔>으로 기록된 온조의 십제를 통합하는데, 그 시기가 국가의 기틀을 잡은 고이왕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문헌에는 백제시조는 구태이고 구태가 동이강국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삼국사기-백제본기>에 온조는 아버지 동명성왕(고추모)과 국모 소서노를 시조로 제사지냈다. 제사의 대상인 시조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권력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구태세력이 온조.비류세력을 완전히 통합하고 백제를 개국하고 제사의 대상을 구태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백제의 성장과 대외확장.한강지역에 터전을 잡았던 고구려 고추모의 아들&nbsp;온조의 나라-십제(마한의 제후국)를 통합한 백제(구태세력)는 서해와 연결된 한강.금강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국력을 뻗쳐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해 나갔다.&nbsp; 세계 최대규모의 한강지역 전방후원분은 기원2-3세기 무덤으로 강력한 법령반포 등 국가기반을 다지고 성장과 대외확장이 시작되는 백제시기와 맞아 떨어지는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다.요서.산동지역은 번조선의 영역으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에 한반도 서남부로 이주하여 마한을 개국한 기자조선유민들의 고향이며, 백제(구태세력)의 선조 고두막 칸(동명성왕)이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 번조선유민들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지역으로 백제는 이들 기자조선(번조선)유민들의 꿈을 실현해 주는 동시에 부여의 정통성을 두고 고구려와 패권을 겨루던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그런데, 광개토태왕비문에 부여의 주인자리를 놓고 고구려와 구태백제(백잔)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일 때 백잔을 보좌하는 세력이 <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왜>라고 할 때는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열도의 토착마한세력을 의미한다. 한나라 군대와 전쟁할 때 번조선지역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의 조선유민들과 연합하여 승리로 이끈 고두막후예인 구태세력은 마땅히 한반도 마한지역으로 이주해 온 기자세력과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당시 일본열도세력을 후원군으로 삼고 있던 서남해 해상세력은 구태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왜는 백잔의 보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왜>는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세력으로 단군3조선 당시 마조선인들 중에서도 한반도 해상세력을 의미한다. 단군3조선 당시 마조선은 한반도전체와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영역이였다. 단군3조선 붕괴이후 마조선 지역(한반도)으로 이주해 온 북방 기마.유목세력들(진조선.번조선인들)이 유입되기 전까지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역이였다. 그러나, 한반도지역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난 북방 기마.유목세력의 이주지가 되어 버리자, 유순했던 마조선인들은 일본열도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방 유목.기마세력이 차지한 한반도는 마조선인들로 세워진 일본열도와 구분되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해양제국 대백제제국의 영토.&nbsp;1) 2차례에 걸쳐 백제 동성황제에게 참패를 거듭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는 힘으로 강경책을 쓰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정책을 바꾸어&nbsp;중국 변방의 세력들을 중국인으로 동화시티는 정책을 펴니, 그 때부터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주위의 모든 세력들을 융합한 대동연합국가로 서서히 변하여&nbsp; 갔다. 2)백제는 이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여 명실공히 대해양제국(大海洋帝國)을&nbsp; 건설하였다. 3)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영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를 포함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가우리 국경까지, 남쪽으로&nbsp;바다 건너 왜국(倭國)을 포함하여 다 백제의 땅이다.&nbsp;백제는 동,서&nbsp;두 곳에 서울을 두었다."&nbsp;두 서울이란 서백제의 중심지 요서지역과 백제본국 한반도지역(서울=>웅진)이다.&nbsp; 4)삼국사기(三國史記)의 최치원전(崔致遠傳)에 따르면, 백제는 전성기에 백만대군으로 오(吳), 월(越), 연(燕), 제(齊), 노(魯)나라를 다 장악했다 하였다.5)주서(周書)의 백제전엔, 동진(東晋)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 나라[奈浪]때까지&nbsp;백제는&nbsp; 양쯔강 양쪽을 다 점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 따르면, 금주(錦州), 의주(義州), 애춘(愛瑃)을 포함한&nbsp;지역을&nbsp;다 백제의 강역이라했다.&nbsp;&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구태세력은 이 <왜>세력을 등에 업고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온조세력과 혈통적으로 친척인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서울 한강변(강동구)에는 10여기의 세계 최대의 장고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구태백제세력이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 토착무덤양식을 수용,변형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방후원분의 특징은 주구묘다. 주구묘는 주위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데, 전방후원분이 바로 주구묘의 형태다. 주구묘는 한반도무덤양식으로 일본열도보다 시기가 앞선다.
 
문화재청은 조속히 서울 강동구 한강변의 세계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을 발굴하여 백제사의 진실을 고고학적으로 밝힘과 동시에 전방후원분을 사용했던 일본천황가의 뿌리가 백제라는 역사적 진실을 만 천하에 공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 피라미드(물론 고대 한국인들이 건설의 주역)처럼 관광상품화함으로 우리 민족문화유산을 세계에 소개해야 할 것이다. 오직 민족주의 권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친일권력은 할 수 없는 중대한 민족양심의 문제이다.

 

그러면 결국 장고무덤(전방후원분)의 실제 주인은 전방후원분의 전신인 주구묘를 변형시킨 토착 마조선인들의 무덤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수의 구태세력은 엘리트집단으로 지배층을 이루고, 서남해 해상세력은 백제의 기반세력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구태세력과 서남해 해상세력이 권력적으로 융합하다 보니 친척이 되고 가족이 되어 결국 마조선의 영역이였던 일본열도도 백제의 담로가 되어 버렸다고 본다. 그리고, 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며 22담로를 설치할 정도로 대백제로 성장한 기반에는 항해술과 선박술에 뛰어난 서남해 해상세력(왜)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초토화면서 무기력해진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이전하면서 협력공존세력이였다고 볼 수 있는 호남지역의 토착마조선세력은 무기력해진 한반도 백제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백제내부에서 느껴졌을 것이며,
 
결국 백제를 보좌하는 일본열도의 백제담로군대(왜)를 동원하여 토착마한세력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영산강 주변지역으로 주둔시키는 과정에?백제관료들의 장식구와 일본검들이 출토되는 전방후원분이 생기고 전방후원분에 일본열도에 거주한 백제계 관료가 묻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후기 백제수도였던 공주지역에서도 일본식 무덤은 발견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며, 전남.경남지역에 분포한 전방후원분과 관련하여 당시 백제의 담로지역에 불과한 일본이 침략하여 지배했다는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의 지배를 받는 담로지역이기 때문에 일본자체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하여 지배할 수도 없는 상황이였기 때문이다.(9)

 

 

 

<주>

 

 

(1) ‘아파트 고분’ 속 ‘모계 근친혼’ 흔적…1500년 전 영산강은 ‘여인천하’였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이기환 기자2024. 3. 7. 

 

 
 
 

 

 

(5) 마한 심장부의 생뚱맞은 백제고분 주인공은 성왕이 '담로'에 파견한 왕족? (daum.net)2019. 7. 25. 

 

(6) 30년전 '쉬쉬'하며 감췄던 일본식 고분..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21. 8. 24. 

 

 

(7) 함평 금산리에 있는 일본식 고분의 미스터리 (hani.co.kr)

 

 

(8)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열쇠구멍 닮은 ‘장고분’… 고대 韓日교류 비밀의 문 열까|동아일보 (donga.com)

 

(9) 세계 최대 규모 한강지역 '전방후원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윤복현 저널리스트,기사입력 2009/09/13

 

 

 

 

<참고자료>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 (daum.net)노형석 2021. 3. 18.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술렁
일본 고분 닮은 얼개·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 받은 왜인?
일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남해군서 신라 아닌 백제 무덤 발견 (hani.co.kr) 2014-01-09 20:27

 

 

 

전북 남원서 백제 청동거울 출토 (daum.net)2013.08.12.

 

 

 

백제 금동신발 출토된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 (daum.net)2013.08.12.

 

 

 

용인 할미산성서 백제 원형 구덩이 다수 확인 | 연합뉴스 (yna.co.kr)2012.12.18

"성벽은 신라가 축조한 듯..6-7세기 유물 다량"

 

 

 

지하궁전형 백제 횡혈식 석실분 또 출현 (naver.com)2008년 1월 4일 

 

 

 

<키 84㎝ 장독과 47㎝ 시루가 증언하는 백제> (naver.com)2007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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