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2. 백제의 강역 (2) 백제의 대륙 영토 본문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온조왕조에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한국고대사료DB,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190)
이 때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면 백제 동쪽에 신라가 있고, 북쪽에 낙랑국(식민사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낙랑군 또는 대방군)이 있어야하는데, 이 기록에는 백제 동쪽에 낙랑, 북쪽에 말갈이 있으므로 백제의 위치가 반도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열전 제6 최치원전에 고구려 · 백제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중국을 침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 · 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 오·월을 침략하였고, 북쪽으로 유주 지역의 연·제·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큰 해[巨蠹]가 되었습니다. 수(隋) 황제가 통제를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한국고대사료DB,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46r_0030_0110)
오 · 월은 중국 양쯔강 지역이고, 유 · 연은 북경(베이징)이 있는 하북성 지역, 제 · 노는 산동성 지역입니다.
이러한 《삼국사기》 기록만 봐도 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백제가 중국의 요서와 산동반도, 왜의 규슈 지방에 진출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 [사진설명] 4세기 백제의 발전도. 고등학교 『국사』에는 4세기 백제가 중국의 요서와 산동반도, 왜의 규슈 지방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는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기록이 더 많습니다.
《송서》(488년)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남제서(南齊書)》(537년 이전)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539년)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629년)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659년)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801년)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
중국 사서에 백제의 위치가 요서와 진평으로 나오는 데요,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가 2002년에 지은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 나오는 한반도 고대 천문관측지도에
《삼국사기》에 나온 일식의 기록을 통해 3국의 천문현상을 관측한 위치(수도로 비정)가
놀랍게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안으로 나왔는데요,
백제는 중심지 위치가 요서 지역입니다.
역사 사서 기록과 이러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근구수왕 때(백제 14대, 재위: 375~384년)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지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고 보았습니다.
『근구수왕은 서기 375년에 즉위하여 10년간 재위했다. 그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겨우 한 차례 평양을 침공했다. 하지만 그는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전진(前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지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런 이야기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없지만, 《양서》 및 《송서》에서 “백제가 요서군·진평군을 빼앗았다”라고 하고, 《자치통감》에서 “부여는 처음에는 녹산(鹿山)에 거점을 두었지만, 백제에 패배한 뒤 서쪽으로 옮겨가 연나라에 가까워졌다”라고 한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근구수는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사와 국정의 대권을 처리했다. 그는 침입한 고구려를 격퇴한 뒤 반격에 나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병합했다. 이후 해군을 확충하여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을 침입했다. 그는 모용씨를 쳐서 요서 지방과 북경을 빼앗고 요서·진평 2군을 설치했다. 또 녹산 즉 지금의 하얼빈까지 들어가서 부여 수도를 점령했다. 이 때문에 북부여는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게 됐다.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에서 전진왕 부견이 강성해지자, 근구수는 지금의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전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또 남쪽으로는 지금의 강소·절강 등을 보유한 진(晋)나라를 쳐서 어느 정도의 지역을 빼앗았다. 그래서 여러 역사서에 그의 중국 진출에 관한 사실이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구수왕 즉위 이후의 해외경략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또한 동성대왕 때(백제 24대, 재위 : 479~501년)는 근구수왕 때보다 훨씬 더 넓었다고 보았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에 영토를 둔 때는 백제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두 시대뿐이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훨씬 더 넓었다.
《구당서》 〈백제 열전〉에서는 백제의 영토에 관해 말하면서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도달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고려에 도달하며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에 도달한다”고 했다.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다.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월나라왕 구천의 옛 도읍을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 땅”이라고 한 것도 이것을 가리킨다.
‘고려’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명사였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서의 서쪽 즉 지금의 봉천성 서부는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에서 “금주·의주·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서 인용한 《구당서》의 구절에 의하면 당시의 일본 전역이 백제의 속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제는 이 같은 해외 식민지들을 언제 잃었을까? 성왕 초년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 패해 국세가 약해졌으니, 이때 해외 식민지를 거의 다 잃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성대왕의 해외 경략과 중도 사망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383쪽)
윤내현교수는 백제가 246년부터 589년까지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하였다고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하였다. 백제가 중국에 처음으로 진출했던 지역은 요서군과 진평군 지역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기록에 요서군과 진평군으로 지칭된 곳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서 서남으로 하북성 중부의 안평 지역까지와 광서장족자치구의 옹녕현 지역이었다.
난하 유역에서 하북성 중부까지를 차지하고 기반을 닦은 백제는 그 세력을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의 산동성 지역을 거쳐 강소성 남부 양주 지역까지를 장악하였다.
백제는 지금의 절강성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분명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어느 시기까지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이 지역은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으로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본국으로부터 관리와 연락이 쉬운 지역이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한 시기는 서기 246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이미 당시의 요동(지금의 난하 유역)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백제는 서기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바로 전까지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요동진출과 백제의 동부 해안지역 진출은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고 지난날 고조선의 영토를 침략한 중국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조선시대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난하 유역에 있었으므로 이는 고구려의 옛 땅과 백제 왕실 조상들의 옛 땅을 수복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416-418쪽)
본지가 그려본 서기 488년 당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지역과 양군의 진격로를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출처;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4.01.27 ))
■ 백제 · 북위 전쟁
북위는 중국 5호 16국시대 말기 탁발선비족이 세운 왕조로 386년부터 534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제3대 세조 태무제때 화북을 통일하고 남북조시대를 형성했으며, 후대의 수·당의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북위와 백제 사이에 488년과 490년에 전쟁이 있었는데요, 이 전쟁에서 백제가 승리했습니다.
"『남제서』〈백제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북위가 백제의 지경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된 이 전쟁도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중국으로 원정군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고는 볼 수 없다. 490년 전쟁에서 북위는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했다고 했는데 당시 북위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려면 이들을 운송시킬 대함선이 필요하다.
해로를 통해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북위가 강성한 고구려(장수왕 시대)의 영토를 통하여 백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 고구려가 순순히 허락했을 리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통과하려면 고구려와 북위가 상당한 조약을 맺거나 혈전을 치렀어야 하며 이럴 경우 북위에서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해달라고 남제에 청했다. 동성왕이 부하 장군들의 임명을 요청한 영토들은 남제가 북위에게 빼앗겼던 땅으로
광양은 오늘날 북경 부근 대흥현 또는 밀운현,
청하는 북위 때에 하남성 상현 부근,
광릉은 광소성 회음현 동남 지역,
성양은 강소성 또는 하남성 신양현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일부 지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백제와 북위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인 산동반도는 요서영유(설)의 지역과는 다른데 백제가 언제부터 산동에 거점을 잡고 있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요서지역에 진출했던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전진의 연합에 의해 공격당하자 남쪽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이종호2008/03/17)
서기 488년 1차 백제-북위 전쟁이 끝난 후 동성왕이 단행한 논공행상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백제의 영토는 오늘날 중국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출처;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4.01.27 )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논공행상 내용이다.
저근은 본래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이었는데 이 전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으로 봉해졌다.
또 부여고(扶餘古)는 전쟁 전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였다가 전쟁 후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으로 봉해졌다.
그 밖에 전쟁 전 건위장군이었던 부여력은 전쟁 후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으로 봉해졌고
전쟁 전 광무장군(廣武將軍)이었던 부여고(扶餘固)는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로 봉해졌다.
즉, 동성왕이 백제 장군들을 왕과 제후로 봉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이 말은 곧 백제의 임금은 황제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백제가 제국(帝國)이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2024.01.27 )
■ 양직공도
양직공도에 진晉말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영유했다는 기사와 함께 읍을 담로라고 하는데 중국의 군현에 해당하며 22개 담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출처; 대륙백제의 위치 그곳은 어디? https://youtu.be/OZyyt3JZVSI?list=PLRAmvpNm4pmkb79w9GBQuCQNE_Bhy2HBm 캡처)
https://youtu.be/OZyyt3JZVSI?list=PLRAmvpNm4pmkb79w9GBQuCQNE_Bhy2HBm
<참고자료>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3/200409230500060/200409230500060_6.html
백제.신라가 대륙이면 한반도의 주인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성훈. 2008/06/17
[역사이슈]놀라운 '남제서(南齊書)'의 대륙백제 기록: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10/06
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620§ion=section78성훈 2008/05/19
대륙백제.. 한반도 '백제' 성씨가 없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7700§ion=section78§ion22007/11/03 [00:10]
[단독]"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http://www.pluskorea.net/63392007/09/08
[공유] 대륙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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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삼국의 위치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대륙삼국의 증명(천문기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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