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부여)도읍기(성왕-위덕왕- 혜왕-법왕-무왕-의자왕, 538~660년) 부여 왕흥사 목탑 터,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 익산시 왕궁리유적, 익산시 미륵사지, 익산 쌍릉 발굴 내용을 알아봅니다.

 

부여 왕흥사 목탑 터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인 청동사리합과 은, 금 사리병이 출토되었고,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에서 지금껏 발굴된 백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습니다.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이고,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에서 왕궁 정원터와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구를 발견하였습니다.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에서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 청동합(靑銅盒),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한편 사리봉영기 명문에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으로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익산 쌍릉에서 2018년 쌍릉 재발굴 때 나온 뼛조각을 고고, 역사, 법의학자 등이 공동 연구하여 과학적 접근으로 “무왕 왕릉”임을 확정하였습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1500년 전 백제 청동사리합, 아들 잃은 위덕왕 슬픔 고스란히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2월 8일 03시 00분 

김상운 기자

<26> 부여 왕흥사 목탑 터 발굴

1일 충남 부여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과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왼쪽부터)가 왕흥사 목탑 터에서 발굴된 돌 뚜껑과 금, 은 사리병(복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아래는 왕흥사 터를 공중에서 찍은 사진. 하단의 길쭉한 석축은 왕이 행차하던 어도로 추정된다. 부여=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일 충남 부여군 왕흥사 터. 백마강 너머로 백제 멸망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낙화암이 멀리 보였다. 백제 위덕왕은 자신이 지은 화려한 왕실 사찰을 드나들며 보았을 낙화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나 했을까. 도도히 흐르는 저 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펼쳐진 셈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가 이곳에서 출토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당시 왕흥사 목탑 터에서 사리기를 건져 올린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현장에서 만났다.

○ 우리나라 最古 사리장엄구, 모습을 드러내다


“뭔가 대칼(대나무 칼) 끝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 목탑 터 발굴 현장. 장마가 끝나고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 귀퉁이를 조사하던 강환구 연구원이 이규훈을 다급하게 불렀다. 조심스레 개흙을 제거하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탑에 사리기를 종종 묻어놓지만 심초석에 구멍을 내고 뚜껑돌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장기간 작업으로 지쳐 있던 발굴팀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아 손끝이 야무진 허진아 연구원이 들어가 서서히 돌을 들어올렸다. 모두 숨죽인 가운데 뚜껑돌을 올리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대와 달리 내부는 진흙과 물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흙탕물 속을 대칼로 찔러 보니 걸리는 게 다시 느껴졌다. 30분간 물을 빼내고 진흙을 제거하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원통형 그릇이 나왔다. 15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백제시대 청동 사리합이었다.

사리합 표면을 닦아내자 ‘정유(丁酉)년’으로 시작되는 한자 명문이 드러났다. 발굴팀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의 명문은 역사 해석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보존과학실 직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명문 해석에 돌입했다. 이때 안보연은 촬영한 명문 이미지를 바탕으로 글씨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원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이 명문을 보는 호사를 누려 행복했다”고 말했다.
 
왕흥사 목탑 터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합과 은, 금 사리병(왼쪽부터). 청동사리합 내부에서 금 사리병이 들어 있는 은 사리병이 발견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잃은 왕의 슬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 두 개를 묻었는데 신묘한 조화로 세 개가 되었다.’

청동사리합 명문은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우선 왕흥사 창건 연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법왕 2년)보다 23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적힌 연대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용민은 “고고학자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횡재를 누린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명문이 얘기하는 왕흥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다. 위덕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을 여읜 인물이다. 부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한때 승려로 출가하려고 했던 그가 이젠 아들마저 잃은 것이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세운 아버지의 슬픔이 사리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백제왕의 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좌태자 이외에 위덕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가 별도로 존재했음이 사리기를 통해 증명됐다.

○ 홈쇼핑 만능렌치의 비밀

청동사리합을 발견한 것 못지않게 이를 여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보내 사리합 뚜껑을 열려고 1주일 동안 씨름했지만 청동 녹이 달라붙어 번번이 실패했다. 발굴팀은 내부를 찍은 X레이 사진만 언론에 공개하려 했지만,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열어볼 것을 지시했다. 발굴단원들이 골머리를 앓던 상황이었는데 답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홈쇼핑 광고를 본 전산 담당 직원이 이른바 ‘만능렌치’로 열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 철물점에서 구입한 7000원짜리 렌치로 아무 흠 없이 사리합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청동사리합 안에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조그마한 금 사리병이 들어있는 은 사리병이 나왔다. 금 사리병 내부는 명문에 적힌 사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발굴팀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분 분석을 했지만 순수한 물로 조사됐다. 이규훈은 “사리공으로 물이 샜다면 청동사리합이나 은 사리병에도 물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사리기에 적힌 신묘함이 여기서도 드러났다”고 말했다.(1)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용꿈꾼 날 건져올린 백제 최후의 걸작 ‘금동대향로’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2월 17일 09시 54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2회> 신광섭 울산박물관장

신광섭 울산박물관장이 15일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며 1993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향로 위쪽의 산봉우리 부분을 평면에 펼친 전개도(맨아래 그림)에 각양각색의 신선과 동물들이 보인다. 부여=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여보, 간밤에 용꿈을 꿨지 뭐예요.”

“당신 늦둥이라도 낳으려는가. 하하.”

1993년 12월 12일 오후 8시 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 발굴 현장에 있던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65·현 울산박물관장)은 이날 아침 출근길에 아내와 나눈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거대한 용이 온몸을 비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용의 아가리 위로 연꽃이 피고 다시 그 위로 첩첩산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펼쳐졌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15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신선 세계 묘사한 백제의 특급 문화재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껏 발굴된 백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얼마나 귀한지 국외 반출 금지 문화재로 지정돼 지금껏 한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향로는 백제 후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높이 61.8cm, 무게 11.8kg에 이르는 이 대형 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예술성이나 규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꼭대기에 봉황이 달린 향로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다섯 겹에 걸쳐 이어져 있다. 봉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활을 쏘는 무사부터 머리를 감는 선인(仙人), 각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樂士)들까지 총 18명의 인물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뿐인가. 호랑이와 사슴, 사자, 반인반수(半人半獸) 등 65마리의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광섭이 꼽는 백미는 향로 전체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용이다. “역동적인 용틀임은 누가 봐도 힘이 넘쳐요. 특히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은 ‘연화화생(蓮華化生·연꽃에서 만물이 탄생한다는 세계관)’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직후의 모습(맨 위). 신광섭 관장(맨 아래)과 조사원들이 막 꺼내온 향로의 이물질을 닦아내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 1500년 깊은 어둠을 뚫고 다시 세상으로

향로가 출토된 과정은 용꿈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발굴팀은 당시 신광섭을 비롯해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김정완(현 국립대구박물관장), 학예연구사 김종만(현 국립공주박물관장) 등으로 구성됐다. 부여군이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 사이에 관람객을 위한 주차장을 짓기로 함에 따라 1993년 마지막 발굴이 시작됐다. 여건상 예산이 부족한 데다 시간에 쫓겨 자칫 능산리 절터는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부여 토박이인 신광섭은 예부터 이곳에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에 주목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왕릉(능산리 고분)과 나성에 인접한 곳이라면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을 것 같다는 감이 왔어요.”

신광섭은 박물관계에서 ‘불도저’로 통한다.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노태섭 기념물과장(전 문화재청장)을 만났다. 발굴 현장을 많이 다녀본 노태섭도 남다른 감을 갖고 있었다. 과장 전결로 2000만 원의 예산 지원이 즉시 이뤄졌다. 신광섭은 한발 더 나갔다. 당초 시굴(발굴에 앞서 유구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만 파보는 것)로만 발굴 허가가 났지만 과감히 절터 서쪽 건물터(나중에 공방 터로 밝혀짐)에 대한 전면 발굴에 나섰다. 발굴 성과가 제때 나오지 않으면 주차장 공사가 강행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왔어요. 여기서 향로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현장을 지휘한 학예연구사 김종만이 향로를 처음 발견했다.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것이다.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기와 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다. 김종만의 보고를 받은 신광섭이 곧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인부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손수 기와를 하나씩 빼냈다. 웅덩이 안에서 솟구치는 물을 스펀지로 계속 닦아 내야 했다. “유물이 다칠까 봐 몇 시간 동안 맨손으로 파냈어요. 추운 겨울 저녁에 연신 손을 찬물에 담갔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집디다.”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다.

고고학계는 백제 말기인 사비시대에도 문화예술이 고도로 융성한 사실을 금동대향로가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종래는 백제의 공예 기법이 무령왕릉이 조성된 웅진시대에 절정에 달한 뒤 사비시대부터 점차 쇠퇴한 것으로 봤다. 특히 금동대향로를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봤던 견해는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2007년과 2009년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각각 출토된 사리장엄(舍利莊嚴·사리를 봉안한 공예품)은 백제가 금동대향로와 같은 고도의 예술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췄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2)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

 

동아일보

업데이트 2017년 1월 11일 09시 19분

 

<24>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전용호 학예연구사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가운데)과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오른쪽), 전용호 학예연구사가 9일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내 백제시대 ‘왕궁 정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이들 발아래에 있는 직사각형 돌이 석축 수조로, 조경용 괴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 사진은 당시 정원을 상상 복원한 그림.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9일 찾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했다.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였다.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을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60),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 전용호 학예연구사(43)와 함께 석탑과 금당, 강당을 거쳐 후원(後苑)으로 들어갔다. 사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옛 백제의 화려한 왕궁 정원이 펼쳐졌다. 얕은 구릉의 정원 터에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괴석(怪石)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길을 따라가자 직사각형 모양의 석축 수조가 나온다. 졸졸 흐르는 물이 괴석을 지나 수조에 넘쳐흐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운치를 더했다. 최맹식은 “1992년 3월 왕궁리 유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왕궁 정원은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 백제시대 ‘수세식 공중화장실’ 발견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곡식이 썩었더라도 이 정돈 아닐 텐데… 희한하게 구린 냄새가 참 심합니다.”

 2003년 여름 발굴팀은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기다란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 밑 유기물 층에서 나무막대와 씨앗, 방망이 등이 출토됐는데 유독 냄새가 심했다. 발굴팀은 곡식이나 과일을 저장한 구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이홍종 고려대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구 양상이 일본 고대 화장실 터와 비슷하다”며 유기물 층에서 흙을 채취해 생물학 분석을 의뢰했다. 조사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확인됐다. 삼국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조사 결과 발을 올릴 수 있도록 구덩이에 나무기둥을 박고, 내부 벽을 점토로 발라 오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는 게 확인됐다. 특히 왕궁리 화장실은 첨단(?) 수세식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화장실 서쪽 벽에 수로를 뚫어 경사를 이용해 오물을 석축 배수로로 빠지도록 한 것.

 이와 관련해 ‘자’로 추정된 나무막대기가 실은 대변을 본 뒤 뒤처리용이라는 사실이 이주헌에 의해 밝혀졌다. 이른바 ‘측주((치,칙)籌)’라고 불리는 나무막대기로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된 도구였다. 왕궁리 화장실 터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이 검출되지 않은 반면,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주로 감염되는 회충이나 편충이 집중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2004∼2007년 발굴된 정원도 왕궁리 유적 중 백미로 꼽힌다. 특히 2006년 11월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하다. 어린석을 발굴한 전용호는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걸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사찰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 있었다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왕궁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28년 동안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 발굴 유적이다. 그만큼 규모가 큰 데다 백제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지대하다. 오랫동안 발굴된 곳답게 유적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발굴 초기엔 유일하게 남은 지상건조물인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왕궁리가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소수설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익산에 세운 보덕국 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왕궁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3년 8월 최맹식의 목탑 터 발견이었다. 그는 당시 오층석탑 동쪽, 지표로부터 1m 깊이에서 목탑을 올리기 위해 목봉(木棒)으로 땅을 다진 흔적을 찾아냈다. 이어 목탑 터 아래서 백제시대 왕궁 건물 터를 추가로 발견했다. 왕궁을 지은 뒤 어느 순간 이를 폐기하고 목탑을 올렸다가 또다시 이를 허물고 석탑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최맹식은 “왕궁 건물 터를 파괴하고 중심부에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걸 감안하면 통일신라 이후 사찰이 조성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왕궁리에서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대형 정전(正殿) 터와 정원, 공방, 수세식 화장실 등이 잇달아 발굴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 조성된 사실은 확실히 굳어지게 됐다.(3)
 
 
 
 

석탑 해체 중 새어 나온 1370년前 황금빛에 모두가 ‘동작 그만’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4월 13일 05시 06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6회>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 발견…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 보수 현장에서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탑의 심주석을 가리키고 있다. 7년 전 첫 번째 심주석 안에서 백제시대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익산=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솔직히 다보탑이나 석가탑 해체보수 때에도 느끼지 못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실수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보수 현장. 석탑 1층 기단 위에서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을 바라보던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6)은 떨리는 목소리로 7년 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발견 당시를 회고했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모시게 된 경과를 기록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 소장이 “여기서 희대의 유물이 나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다”며 옛 기억을 되짚는 동안 현장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목봉(木棒)을 내리쳐 상층 기단부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2009년 1월 14일 오전에도 이곳은 해체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순간 배병선(당시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됐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황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장엄구였다. 통상 심주석 아래 심초석(心礎石)에 들어 있는 사리장엄구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미륵사지 서쪽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맨위 사진)와 사리호(아래 사진). 사리봉영기 금판 위에 붉은색 주칠이 칠해져 글자가 선명하다. 이 중 ‘백제 왕후는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명문은 백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배병선은 유물 촬영 사진을 들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최맹식 당시 고고연구실장(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난영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규식 보존과학연구실장(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등 전문가 29명으로 ‘유물 수습팀’이 구성돼 현장에 급파됐다.

심주석 안 26.5cm 깊이의 구멍(사리공)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호가 온갖 구슬들에 파묻힌 상태였다. 첫눈에 봐도 지금껏 발굴된 백제 금속 유물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수습팀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유물을 꺼내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사리공에는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 청동합(靑銅盒),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안치된 순서와 반대로 유물을 꺼내야 손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워낙 좁은 공간에 유물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굴절거울 등을 동원해도 안치된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사리호와 사리봉영기 가운데 무엇을 먼저 꺼낼지 의견이 엇갈렸다. 배병선은 고민 끝에 사리호부터 꺼내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사리봉영기가 사리공 벽면에 걸쳐 있어서 밑이 살짝 뜬 상태였어요. 금판에 새긴 글자 위의 주칠(朱漆·붉은색 옻칠)이 떨어져 나갈까 봐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사리호랑 직접 붙어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금 구슬을 꺼낼 땐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하나씩 건져 올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외부 공기에 노출된 유물의 손상을 막으려면 신속한 수습이 필요했다. 이틀에 걸쳐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강행군을 벌였다. 배병선은 발견부터 수습 완료까지 사흘 동안 6시간만 자고 버텼다.

사리봉영기의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꿨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확인시켜 줬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백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4)
 
 
 
 

“백제 무왕이십니다”…뼛조각에 학자들 고개 숙이다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⑧ 뼈가 말하는 고대사 (하)
익산 쌍릉 주인 놓고 오랫동안 논란
2009년 미륵사탑 사리봉안기 발굴로
<삼국유사>의 ‘무왕-선화공주설’ 깨져

2018년 쌍릉 재발굴 때 나온 뼛조각
고고, 역사, 법의학자 등 공동 연구
과학적 접근으로 “무왕 왕릉” 확정

  • 수정 2019-02-23 09:14 등록 2019-02-23 09:14
전북 익산에 있는 쌍릉 중 대왕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특히 “미륵사 서탑은 사택적덕의 따님이 만들었다”는 사리봉안기가 2009년에 발견되면서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에 기반했던 무왕 왕릉설이 미궁에 빠졌다. 그러나 2018년 무덤에서 나온 뼈 분석 등을 통해 익산 대왕릉은 무왕 것임이 밝혀졌다. 사진은 돌방으로 된 대왕릉의 내부 모습.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대왕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백약이 무효였다. 왕후의 극진한 간호도, 불공도 소용이 없었다. 젊었을 때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허리로 인해 보행에 조금 불편함이 있었는데 고령에 접어든 요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척추의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사택씨 출신의 왕후는 거금을 들여 미륵사 서편에 웅장한 석탑을 건립하였다. 639년 1월29일 석탑의 심초석(탑의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의 기초가 되는 돌) 안에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에서 들여온 온갖 진귀한 보물과 고위관료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보물들, 그리고 부처님의 사리를 함께 모셨다. 왕후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순금제 판의 앞뒷면에 총 193자를 새겼다. 그 내용의 핵심은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은 긴 세월 동안 선행을 쌓아서 지금 생에서 특별한 보답을 받으셨습니다. …(중략)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처럼 굳건하고, 보위는 천지처럼 오래가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후략)”란 글귀였다. 그러나 2년2개월이 지난 641년 3월 대왕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붕어하셨다. 재위한 기간만 40년이 넘고 60살을 넘기셨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편이지만, 젊을 때 산을 뒤져 마를 캐면서 얻은 건강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유사>는 마를 캐서 팔던 이 청년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을 부인으로 얻고 백제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출생에서부터 왕이 되는 과정이 수수께끼투성이인 무왕(600~641년 재위)이 바로 그분이다.

대왕의 장례는 왕실에 퍼져 있던 유교식 의례에 따라 치러졌고, 가장 좋은 재질의 돌로 잘 가공한 판석을 조립하여 대왕릉에 걸맞은 커다란 돌방무덤(석실묘)이 만들어졌다. 그 위치는 선대왕들을 모신 웅진이나 사비가 아니라, 대왕이 살아생전 온 힘을 다하여 건설한 새로운 왕도 금마저로 정해졌다. 일본에서 가져온 최고급 금송을 가공한 판재에 검은 옻칠을 하고, 금동판으로 장식하고 금동제 못으로 조립하였다. 대왕의 시신을 모신 관은 무덤 중앙에 큰 판석 1장으로 만든 관 받침 위에 모셔졌다. 왕릉의 문이 닫히면서 장례는 종료되었다.

학문 간 공동 연구를 통해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확인된 전북 익산 쌍릉의 외부 모습.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사리봉안기. 639년 사택적덕의 따님이 대왕(무왕)의 건강회복을 위해 사리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선화공주 얘기는 신화인가?

백제의 금마저에 해당되는 전라북도 익산에는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대왕릉과 소왕릉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큰 무덤이 알려져 있었다. 쌍릉이라고도 불리는 이 무덤들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1327년경에는 대왕릉 도굴사건이 벌어져서 범인들이 수감되었으나 2년 만에 탈출하여 사회문제를 야기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쌍릉에 백제 무왕 부부가 묻혀 있다고 생각되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지난 1917년 12월 한겨울에 야쓰이 세이이치란 일본인 고고학자가 대왕릉의 문을 열었다. 이미 오래전에 자행된 도굴로 인해 무덤 내부에는 부장품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고 무덤의 문은 다시 닫혔다. 하지만 무덤의 규모가 워낙 대단하였기 때문에 백제 말기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란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이때 수습된 사람의 어금니 몇개와 목관의 잔편, 그리고 목관 장신구 몇점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쌍릉에 묻힌 사람은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 즉 선화공주임이 이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전북 익산의 대왕릉에서 나온 인골이 지난해 7월18일 오전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뼛조각은 연대 측정 등을 통해 백제 무왕의 것으로 추

 

2009년 미륵사지 서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 사리봉안기는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이고, 두 분의 발원에 의해서 미륵사가 조영되었다는 <삼국유사> 기사에 기초한 13세기 이래의 정설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백제 왕후가 사택적덕의 따님이고 이분에 의해 639년 서탑에서 사리 봉안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학계는 이윽고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는 허구인지, 미륵사 창건의 주체는 누구인지를 둘러싼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연히 쌍릉 중 왕비의 무덤이라고 하는 소왕릉에 묻힌 분이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도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국립전주박물관 관장이던 이주헌은 대왕릉에서 출토된 어금니를 분석한 결과 여성의 것이라고 판정되었기 때문에 이 무덤은 결코 무왕의 무덤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대왕릉이 사택왕후, 소왕릉이 무왕의 무덤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미륵사 창건과 쌍릉의 피장자를 둘러싼 대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재발굴조사에 들어갔다. 2018년 3월 대왕릉의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간 조사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관 받침 위에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작게 조각난 사람의 뼈가 소복이 담겨 있었다. 야쓰이의 조사에서는 전혀 발표되지 않았던 이 유골함과 뼈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화공주의 것일까? 사택왕후의 것일까? 대왕의 것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후대의 엉뚱한 사람의 뼈일까?

 

골반뼈에 남은 무왕의 낙상 흔적

이번에는 가톨릭대 응용해부연구소가 나섰다. 작게 조각난 뼛조각들을 컴퓨터단층촬영 하고, 형태적으로 구분되는 102개 정도를 집중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드디어 2018년 7월17일 오후 가톨릭대 병원에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였다. 부검용 테이블 위에는 실제의 인골, 그리고 약해진 인골의 상태를 고려하여 입체(3D)프린팅한 모형이 함께 놓여 있었다. 연구를 주도한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실장의 취지 설명에 이어 인골감정을 실시한 이우영 가톨릭대 의대 교수의 분석 발표가 이어졌다. 이 뼛조각들은 여러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것이며, 키가 161~170㎝ 정도로서 상당히 큰 편인 육십대 이상의 남성, 생전에 낙상한 결과 골반뼈에 골절이 생겨 후유증을 앓은 사실, 늙어서 ‘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DISH, Diffuse Idiopathic Skeletal Hyperostosis)이라는 병에 걸려 척추에 극심한 통증을 안고 살았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병은 인대가 골화(뼈처럼 되는 현상)되는 희귀질병으로서 50살 이상의 남성에게 발병할 가능성이 높으며, 원인이 분명치 않으나 어패류를 장기간 다량 섭취한 결과로 생길 수 있다는 부연설명도 덧붙였다. 법의학자들은 종전 연구에서 어금니를 여성의 것으로 본 주장에 반대하고 연령이 많은 점은 분명하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연대측정을 담당한 팀은 정강이뼈에서 떼어낸 시료를 분석하여 이 인골의 주인공이 숨을 거둔 시점은 620~659년 사이일 가능성이 68%라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임산공학 전문가는 유골함의 수종이 1917년 야쓰이가 조사 종료 후 돌문을 닫을 때 사용한 나무쐐기와 같은 수종임을 밝혀냈다. 야쓰이가 흩어져 있던 인골을 수습하고 부랴부랴 제작한 나무함에 넣어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공주대 정재윤 교수는 이 인골의 주인공이 노년에 ‘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으로 고생한 사실과 사택왕후의 기원이 담긴 금제 사리봉안기에서 유독 대왕의 건강을 기원한 사실이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고고학 전공자들이 가세하였다. 대왕릉의 규모는 왕릉급임이 분명하고 그 연대는 7세기 전반 무렵으로 비정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모든 의견을 종합해 보았다. 7세기 전반에 사망한, 평균 이상으로 큰 키의 노년 남성, 고급스러운 음식을 장기간 섭취한 결과 발생한 질병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으로 장기간 투병한 병력, 익산이란 신도시에 묻힌 백제의 왕.

무왕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이상준 소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인골을 백제 무왕의 것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모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네.” 발굴조사를 주도한 원광대 최완규 교수가 나지막이 말하였다. “여러분, 백제 무왕이십니다. 예를 표하시죠.” 참가자들은 뼛조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무왕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표하였다. 다음날 오전 모든 언론에서 ‘백제 무왕의 무덤 확인’이란 제목의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었고, 이 사건은 2018년도 고고학, 고대사 연구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었다. 이 과정에 참여하였던 필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고대사 최대의 난제를 해결하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곤 한다.

올해에는 소왕릉에 대한 발굴조사가 계획되어 있고, 자신의 견해를 가다듬은 이주헌의 본격적인 반론도 제기될 예정이다.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허구일까? 선화공주와 사택왕후의 관계는? 두 분이 모두 부인이었을까? 백제사 최고의 미스터리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을 기대해 본다.

인골 연구를 통하여 특정 인물의 신원을 정확히 밝힌 무왕의 경우는 매우 극적이며,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 신원 파악에 실패하더라도 고인의 직업이나 생전 습관을 파악할 수 있는 경우는 많다. 남해안의 통영 욕지도란 섬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사람 뼈에서 외이도골종이 확인된 적이 있었다. 장시간 잠수를 한 결과, 수압으로 인하여 뼈에 생긴 염증이 점점 딱딱해지면서 외이도를 막는 병이다. 잠수부와 해녀에게 많이 발생하는데 지금이야 외과수술로 치료가 되지만 당시에는 심한 난청에 시달렸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직업병 중 하나인 셈이다.

 

출토된 뼈의 콜라겐으로 식습관 분석

고인골 전공자인 서울대 이준정 교수는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하여 흥미로운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안정동위원소 분석이란 살아생전 섭취한 식료의 종류에 따라 특정한 안정동위원소 정보가 뼈와 치아에 기록되며, 시간이 흘러도 그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따른 분석이다. 전북 완주 은하리의 6세기 무렵 백제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한 남성의 뼈에서 콜라겐을 추출하여 분석해보니 벼, 보리, 콩 등의 식물성 식료는 많이 섭취한 반면 육식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덤의 규모를 볼 때 상당히 높은 귀족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무언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까다로운 식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으나, 당시 백제 사회에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29대 법왕은 599년에 명령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사냥용 매를 풀어주고,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는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살생 자체를 금지한 셈이니 육식문화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고위 관료들은 왕의 명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당진 우두리에서 역시 6세기 대의 돌방무덤들이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인골들은 어패류를 다량 섭취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지리적 장점을 한껏 살린 것이다. 반면에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한 또 다른 무덤에서는 여러 명이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었는데 두개골 외상, 쇄골 골절, 견갑골 탈골 등 다양한 부상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로 인해 뼈가 변형된 양상도 나타났다.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보건·위생 환경에 처해 있었던 셈인데, 어패류 섭취는 매우 적고 반대로 육상동물을 많이 섭취한 모습을 보인다. 신분이 낮은 집단은 사냥을 통하여, 그보다 높은 집단은 어패류를, 더 높은 귀족은 채식만 하던 이상한 식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뼈는 1000년이 지난 과거의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털어놓는다. 단, 우리가 그 비밀을 들을 적극적인 자세와 치밀한 준비를 갖추었을 때만이다.(5)

 

 

 

 

<주>

 


(1)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500년 전 백제 청동사리합, 아들 잃은 위덕왕 슬픔 고스란히|동아일보 (donga.com)

 

 

(2)  용꿈꾼 날 건져올린 백제 최후의 걸작 ‘금동대향로’|동아일보 (donga.com)

 

 

(3)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동아일보 (donga.com)

 

 

(4) 석탑 해체 중 새어 나온 1370년前 황금빛에 모두가 ‘동작 그만’|동아일보 (donga.com)

 

 

(5) “백제 무왕이십니다”…뼛조각에 학자들 고개 숙이다 (hani.co.kr)

 

 

 

 

<참고자료>

 

 

 

백제의 '마지막' 흔적일까…부여 관북리 유적서 옻칠 갑옷 확인 (daum.net)2024. 2. 27.

 


도굴 안된 백제 귀족 무덤서 인골·금동 귀걸이 확인 (daum.net)2021. 07. 02.

 

 


부여 화지산 유적서 사비 백제시대 건축 양식 확인 - 노컷뉴스 (nocutnews.co.kr)2019-09-09

 

 

 

부여 화지산 유적, 사비백제 초석 건물지·계단식 대지 확인 (daum.net) 2019.07.11.

 

 

 

부여 능산리 고분군서 용문양 금제 장식 출토 | 세계일보 (segye.com)2018-07-04 

 

 

 

'능산리 고분군' 100년 만에 재발굴 (daum.net)2018. 7. 4. 

 

 

예산 산성서 백제 지방 산성 첫 대형 석벽 건물지 발견 | 한국경제 (hankyung.com)2018.12.10 

 

 

 

중국인이 왜? 백제 무덤서 찾은 ‘다문화 흔적’ :  한겨레 (hani.co.kr)2018-08-19

 

 


고흥 백치성 발굴 현장설명회..배수시설 확인 (daum.net)2016. 10. 11. 

 

 

 

 

 

 

 


익산 쌍릉 소왕릉 재정비…훼손 지형 복구·탐방로 개설해 공개 | 연합뉴스 (yna.co.kr)
2021.04.01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55년 만에 익산 품으로 (daum.net)2020. 1. 6. 

 

 

익산 쌍릉 소왕릉서 1m 넘는 백제 묘표석 2점 발견 | 연합뉴스 (yna.co.kr)2019.09.19. 

 

 

 

익산 쌍릉, 발굴 뒤엔 어떻게 하나 | 연합뉴스 (yna.co.kr)2018/04/24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성인 여성 치아 4점 출토 | 연합뉴스 (yna.co.kr)2016.01.26

 

 

익산(益山) 왕궁리 유적서 고대 성곽, 건물터 발굴 (daum.net)1995.11.17

 

 

 

 

 

백제문화유산주간-익산왕궁리유적 2018.07.12.

https://news.v.daum.net/v/20180712084459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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