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도읍기(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 475∼538년) 무령왕릉, 공주 왕릉원 6호분, 공주 정지산유적, 공주 공산성유적 등을 알아봅니다.

무령왕릉은 전축분(벽돌무덤)으로 지석이 나와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었고, 유물 4600여 점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 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공주 왕릉원 무령왕릉 옆에 있는 6호분에서는 “양나라 관아의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나 혹은 “양나라 사람인 선이 고분 축조를 감독했다(梁宣以爲師矣)”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진 전돌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공주 정지산유적은 무령왕릉 지석으로 무령왕비의 빈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주 공산성에서는 최고급 옻칠 갑옷이 나왔습니다.

 

 

귀신 홀린 듯 가마니에 퍼담았다..1박2일 아수라장 무령왕릉

강혜란2021. 2. 24. 11:00
[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⓶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 입구의 막음돌 개봉 작업 중인 모습.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 모자를 쓴 이가 지건길 당시 학예사보다. [사진 지건길 제공]
 


“시간에 쫓겨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마는, 그런 최악의 발굴을 거쳐서 최선의 유적이 나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죠.”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지건길(78)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회고다. 당시 28세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소속 학예사보였던 그는 7월6일 긴급 호출을 받고 충남 공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휘몰아쳤던 2박3일을 그는 “얼얼하고 몽환적인 순간들”로 기억한다. 최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을 때 “한국 고고학사의 기념비적 발굴이지만 또 한편으로 두고두고 욕먹게 한 아픈 실패담”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설마 했는데, 도굴되지 않은 백제왕릉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단 본 기사에 곁들인 지 전 관장의 육성 인터뷰를 들어보자.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참변이 종합됐다. 첫째, 현장 공개. 둘째, 성급한 수습. 셋째, 준비 미흡이다. 반세기가 지난 2021년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같이 금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러모로 미숙했던 시절, 그들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최악의 수를 잇따라 뒀다. 당시 발굴단장이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생전에 “여론에 밀려 이틀만에 무령왕릉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수치”라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을 정도다.

지난 1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난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계추를 돌려 1971년 7월5일로 가자. 공주 송산리 5·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인부의 삽날에 느닷없이 벽돌이 걸렸다는 소식이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로 긴급 보고됐다. 김원룡 단장을 필두로 한 발굴단이 현장을 찾은 때가 7일 오전. 긴가민가하며 파들어간 무덤 입구가 완연히 드러나자 바로 옆 6호분과 똑같은 양식의 전축분(벽돌무덤)임이 분명해졌다. 눈치를 챈 한국일보 기자가 공주 현장에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기사를 8일자 1면 톱으로 냈다. ‘물 먹은’(낙종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 기자들이 도처에서 몰려들었다. 아기를 들쳐 업은 새댁까지 공주 시민 수백명도 고분 주위를 에워쌌다. 부풀어오르는 흥분과 기대감. 8일 오후 상황에 떠밀리듯 위령제를 지내고 무덤 진입을 시도할 즈음, 발굴단은 이미 현장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김원룡 단장께 ‘이래선 안 됩니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해야 됩니다’라고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하늘같은 스승님이 서두르는데 방법이 없었다(두 사람은 서울대 사제지간). 학문으로 배운 것과 현장은 너무 달랐다.”(지건길)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 무덤 입구 개봉에 앞서 발굴단이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요즘은 발굴 시작 전 위령제가 관례이지만 당시 경황 없이 진행된터라 작업 중에 뒤늦게 제상을 차렸다. 당시만 해도 무덤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를 때다. 제상엔 북어 세마리와 수박 한덩이가 올랐다고 한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이 같은 ‘판단 착오’엔 발굴단의 경험 부족도 한몫했다. 한반도 고분이 본격 조사된 것은 알려진대로 일제강점기다. 광복 후 신라 호우총 발굴(1946) 등이 이뤄지긴 했어도 일본인·미국인 전문가의 조력을 얻어야 했다.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조유전 박사는『발굴 이야기』(1996)에서 “1970년대만 해도 한해 유적 발굴 건수가 많아야 20건 안팎이었지만 80년대 들어 50건 넘었고, 90년대 들어선 100여건에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이들 대부분이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도로 개발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구제발굴(방치할 경우 파손 위험이 있는 유적을 발굴)이었다. 지 전 관장도 공주 파견에 앞서 소양강 댐 구제발굴을 마치고 온 터였다. 1971년만 해도 학술 혹은 문화재 조사 목적 하에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접근하는 고고학적 발굴 방식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단 얘기다.

 


삽으로 퍼서 가마니에 담아 유물 수습
게다가 발굴단이 설마 하며 들어가 본 무덤은 1500년 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노다지’ 그 자체. 도굴되지 않은 백제 고분만 해도 기적인데, 널길 위에 놓인 지석은 심지어 무덤 주인공이 제25대 무령왕이라고 알려줬다. 당시만 해도 무령왕에 대한 정보가 많진 않았지만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를 감행한 26대 성왕의 아버지란 사실만으로도 흥분할 만했다. 맨 먼저 무덤에 들어갔던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이 그야말로 얼이 빠진 안색으로 나온 이유다. 꽁무니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 전 관장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구나 직감”했고. 기자들 역시 난리가 났다. 서로 먼저 내부를 찍겠다고 나서는 통에 발굴조사상 전무후무하게 ‘실측조사에 앞선 사진기자들 입실’이 이뤄졌다.

1971년 7월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내부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이들을 맞은 석수(진묘수). 그 앞에 지석(묘비석)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무덤 주인공이 백제 25대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뒤쪽으로 150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내린 관재가 보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한바탕 야단법석 끝에 이제야 발굴단 차례. 이미 흐트러진 무덤 안에서 촬영도, 실측도, 유물 수습도 정석대로 이뤄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바깥의 아우성에다 일생일대의 ‘대박’을 만난 전율에 발굴단은 유물을 쓸어담다시피 싸고 날랐다. 밤샘 작업 내내 물 한모금 못 마신 채 몽롱한 상태였지만. 아무도 졸음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만큼 혼미하고 급박했다.

“굵은 거, 크게 눈에 띄는 것만 차곡차곡 유물상자에 집어넣고, 나머지 것들은 광목으로 싸서 들어냈다. 자잘한 것들은 실측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공사용) 오삽으로 퍼서 포대 가마니에 담았다. 다 수습하는 데 12시간이나 걸렸나. 고고학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사실상 도굴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어지러운 무덤방 모습. 왼쪽에 왕비 베개가 반쯤 묻힌 게 보인다. 상면 봉황 장식은 따로 발견돼 이후 복원해 붙였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당시 1500년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난 무덤방 바닥에 풀뿌리가 뒤엉킨 왕의 금제 관식(관 꾸미개, 표시 부분)이 보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만약 오늘날 이와 같은 ‘노다지’ 고분이 발견된다면? “수습에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문화재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발굴조사단 구성부터 달라진다. 유재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장은 “지질학, 환경학, 금속·석재·목재 등 다양한 재질의 보존처리전문가와 생물학, 화학 등 전문가가 초기 단계부터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무덤 개방 시 미지의 미생물 등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방진복, 마스크 등 착용도 필수적이다. 입구를 전면 개방하기 전에 내시경을 넣어 관, 유물 등 위치를 파악하는 과정도 거친다. 수습할 때도 풀뿌리로 얽히고설킨 유물들은 잔가지 하나하나 가위로 잘라내며 층층이 촬영·기록·수습한다. 유물 전체를 흐트러짐 없이 확보하기 위해 모의 출토를 하거나 수십t 규모의 주변 흙더미 전체를 퍼올리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절차가 자리잡게 된 게 무령왕릉의 패착 때문이었다. 국보급 유물이 와르르 쏟아진 데 따른 환희가 가실 즈음, 학계와 언론에서 너도나도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발굴단 스스로 뼈저린 자책에 시달렸다.

“발굴 당시만 해도 잘못이라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지만, ‘유물 발굴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해야 된다’는 인식이 차츰 학계에 퍼져갔다. 나 역시 2년 뒤 책임자로 참여한 경주 천마총 땐 1년 가까이 신중을 기해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역사는 역사…후배들이 거울로 삼길”
왜냐하면 “아무리 잘 된 발굴이라도 결국 유산의 파괴행위이기 때문”(지건길)이다. 유적·유물은 결국 죽은 자의 흔적. 한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다. 게다가 무덤은 죽은 이를 안치한 곳이지만, 그걸 만든 이는 또 다른 사람이다. 발굴 과정에서 세세하게 기록한 것들이 먼 훗날 첨단 기술과 결합해 뜻밖의 정보를 더해 줄 수 있다. 제사 그릇에 들러붙은 찌꺼기가 당대 사람들의 식재료를 알려주는 것처럼.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유적·유물의 정보가 촘촘할 수록 더 많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지고, 이 모든 게 후손에겐 자산이고 자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요즘은 아예 문화유적이 가진 콘텐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십수년짜리 장기 발굴이 추진될 정도”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무령왕릉 땐 무방비 개방, 천마총 땐 엄격한 통제였다면 요즘 경주 쪽샘지구 44호분의 경우 개방형 전시관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발굴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발굴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우리 시대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무령왕릉 발굴 2년 후인 1973년 7월 경주 155호분(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단 일행. 왼쪽부터 남시진 지건길 최병현 박지명 김정기(단장) 소성옥 김동현 윤근일. [사진 지건길 제공]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역사는 역사다. 무령왕릉라는 거울이 있었기 때문에 2년 뒤 천마총 같은 성공적 발굴이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젊은 학예사들이 수장고 유물들을 새롭게 보존처리하고 연구해서 성과를 내고 있단 점이다. 윗세대의 과오가 거울이 돼 후배들이 잘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든 나쁘든 무령왕릉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꾸준히 하나의 거울 역할을 할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하나 더. 지 전 관장은 당시 발굴단 막내로서 현장 촬영 담당자였다. 급하게 호출 받아 최신식 카메라를 챙겨갔지만 사용법을 익히지 못한 탓에, 무덤 내부 사진을 인화했을 땐 쓸만한 게 절반도 되지 못했다. 그나마 각 언론사 기자들이 찍었던 게 이후 보고서·사진집 제작 때 결정적 근거가 됐다. 괴테가 말한대로 역사는 ‘신의 신비스러운 작업장’이 아닐 수 없다.(1)

 

〈3편에 계속〉
취재·글=강혜란 기자, 영상=심정보·이세영
theother@joongang.co.kr

※참고도서: 『직설 무령왕릉』(김태식 지음, 메디치), 『발굴 이야기』(조유전 지음,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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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무령왕릉” 한마디에 법석… 주위 독촉에 이틀만에 서둘러 발굴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12월 27일 09시 09분 

 

<39·끝> 무령왕릉의 교훈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무령왕릉을 열기 직전 아치 모양의 입구 앞에서 발굴단 관계자들이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벽돌을 쌓아올려 입구를 막은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22일 무령왕릉 앞에서 발굴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지건길 이사장 제공·공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에서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역사적 과오였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4·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자서전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학연문화사)에서 무령왕릉 발굴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한 당사자다. 고고학자가 자신의 발굴 성과를 비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그만큼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고 역사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22일 오랜만에 무령왕릉을 다시 찾은 노학자는 스마트폰으로 곳곳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자신의 청춘 한 자락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벌써 46년이 흘렀소.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들 넋이 나갔지….”
 
○ 희대의 발견과 폭우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사현장. 장마철 무덤에 물이 차는 걸 막기 위해 배수로를 놓는 작업 도중 6호분과 비슷한 재질의 벽돌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유구가 새로 발견됐다는 보고에 김원룡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구성돼 이틀 뒤 현장으로 출동했다. 조사원은 이호관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 학예연구사였다.
무령왕릉의 내부 전경.7일 오후 시작된 발굴로 아치 모양의 무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전인미답의 백제 왕릉이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그때까지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백제 왕릉은 전무했다. 그런데 저녁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발굴은 일시 중단됐다. 자칫 물이 고분 안으로 흘러넘칠 뻔했지만 발굴 구덩이에 배수로를 뚫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길에 놓인 ‘진묘수’. 문화재청 제공

○ 무덤 주인이 드러나다


어둠 속에서 뿔 달린 ‘그로테스크한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음 날 오후 4시경 발굴단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벽돌 몇 장을 빼내고 왕릉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취재진과 주민들조차 숨을 죽였다.

무덤을 연 직후 촬영한 진묘수와 지석.손전등으로 무덤길(연도)을 비추던 지건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입술이 붉게 물든 돌짐승,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였다. 이어 그 앞으로 동전 꾸러미가 놓인 돌판 2개가 보였다. 지건길의 회고. “무덤 벽이며 천장에서 나무뿌리가 삐져나와 길게 늘어져 있었어요. 마치 ‘유령의 집’ 같습디다. 으스스했지.”

무령왕 이름이 새겨진 지석.막음벽돌을 무릎 높이까지 들어낸 뒤 김원룡과 김영배(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2개의 돌판이 죽은 이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기록한 지석(誌石)임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백제사에 조예가 깊은 김영배는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문구를 보자마자 “이는 무령왕”이라고 외쳤다. 숱한 고대 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무덤 주인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왕이 무덤으로 쓸 땅을 지신(地神)에게 사들인다는 내용도 담겼다. 지석 위에 동전(오수전)이 놓인 이유였다.
 
무령왕의 금제 관 장식(첫번째 사진)과 금 귀고리.

○ 광란의 도가니

“이 무덤은 백제 제25대 무령왕 부부가 묻힌 왕릉이며,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습니다.”

30분 뒤 왕릉 밖으로 나온 김원룡의 말 한마디에 발굴단과 취재진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기자들의 성화에 발굴단은 아직 실측도 끝나지 않은 무덤 촬영을 허용했다. 유구와 유물 규모로 볼 때 최소 수개월의 발굴이 필요했지만, 발굴단은 다음 날(9일) 오전 9시까지 철야 발굴을 강행했다.

명문이 새겨진 무령왕비의 은팔찌.
 
이에 따라 지석과 진묘수, 관재(棺材) 등 주요 유물들이 대략적인 실측과 촬영만 거친 뒤 무명천에 둘둘 말려 서둘러 옮겨졌다. 구슬과 장신구 등 바닥에 흩어진 자잘한 유물들은 실측도 없이 삽으로 퍼 담았다. 왜 이리 급했을까. “엄청난 광경에 발굴단장부터 경황이 없던 데다 주민들과 기자들 독촉에 마음이 더 급해진 거지요.”

비록 발굴은 졸속이었지만 무령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4600여 점의 가치는 대단히 컸다. 이 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수준 높은 백제 공예기술이 세상에 드러났다. 특히 무령왕의 생몰연대가 분명한 만큼 출토 유물은 지금도 백제 고고학 연구에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일본학계에선 ‘무령왕릉계 유물’이라는 학술용어가 생겼을 정도. 중국 양나라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으로 지어지고, 관재 성분이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지는 등 백제의 활발한 대외 교류도 알 수 있게 됐다.

지난해 2월부터 연재된 본 시리즈를 마치며 노학자에게 제언을 부탁했다. “무령왕릉에서의 잘못을 통해 발굴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습니다. 긴급하게 이뤄지는 구제 발굴을 최소화하고, 공공기관이 발굴을 주도하는 ‘발굴 공영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입니다.”(2)

 

 

무령왕릉 앞 6호분은 요절한 순타태자인가, 원수였던 동성왕인가[이기환의 Hi-story](118)

2024. 1. 22. 05:32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 중에 행방이 묘연했던 29호분이 발굴되면서 무령왕릉을 중심으로 한 백제 왕릉의 전모가 드러났다. 왕릉원 윗부분은 공주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과 그 아들인 삼근왕계가, 밑에는 무령왕을 중심으로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 그리고 무령왕계 왕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실종된 29호분의 정체를 찾아라.’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역사적인 고고학 발견이 있었죠. 고분 속 지석에 ‘무덤 주인공이 나(무령왕)요’ 하고 새겨넣은 고분, 즉 ‘백제 무령왕릉’의 현현이었습니다.

이 무령왕릉 발견과 함께 기존의 1~6호분까지 7기의 무덤이 말끔히 보존·정비됐는데요. 그러나 ‘무령왕릉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거꾸로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고분 한 기가 있습니다. 무령왕릉-6호분의 앞쪽에 존재했던 29호분인데요. 1933년 우연히 발견된 고분입니다.

■아마추어 가루베의 무단 발굴

사실 첫 등장부터 팔자가 셌습니다. 발견자가 하필이면 도굴꾼이나 진배없는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었거든요. 일본어 교사였던 가루베는 고고학의 ‘고’ 자도 모르는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루베는 1927년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하면서 공주 일대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습니다.

가루베는 훗날 “1927~1932년 답사한 백제 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 송산리고분 등 100여 기(182기)는 실측 조사했고, 천장의 구조로 분류한 백제 고분이 738기에 이른다”고 떠벌렸습니다. 이를 두고 조선총독부 소속 학자들조차 “연구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유례없는 사굴(私掘)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송산리 6호분과 29호분의 ‘사굴’ 행위였습니다. 즉 가루베는 1933년 7월 배수구 일부가 확인된 6호분 무단 발굴을 자행하는데요. 무엇보다 현장을 보존하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조선총독부 촉탁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1897~1993)는 “6호분 무덤방 내부가 너무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면서 “유물이라고는 토기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발자국만 어지러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고 비판했답니다. 가루베는 서울에서 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무덤 안을 뒤진 뒤 “아무것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가루베의 도굴 본능

그런데 6호분을 발견한 직후(1933년 8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왕릉관람로~6호분을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하는 공사 중에 현장을 살피던 가루베가 또 하나의 돌방무덤(석실분)을 찾아낸 겁니다. 그것이 29호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가루베는 계속 미적거리다가 11월 초에야 발견 사실을 보고합니다.

뒤늦게 29호분 정식발굴에 참여한 총독부 촉탁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11~2011)는 ‘가루베가 정식보고 없이 사전에 도굴했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죠. 11월 15일 현장으로 내려간 아리미쓰는 1~5호분을 관리하는 묘지기 두 사람의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1927년 공주고보 일본어 교사로 부임한 가루베 지온은 공주 일대의 고분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그는 “1927~1932년에 답사한 백제 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 송산리 고분 등 100여 기(182기)는 실측 조사했고, 천장의 구조로 분류한 백제 고분이 738기에 이른다”고 떠벌렸다. 사진은 그가 번호를 찍어 표시해놓은 백제 고분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국립공주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자료


“8월 여름 (무덤의 천장 돌을 들어내고 석실을 파냈고) 지역의 유지 2~3인(가루베 등을 지칭)이 금제장신구와 철정, 칠기편 등을 가져갔다”는 겁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루베 등의 사굴(私掘)로 천장석은 죄다 반출된 상태… 남쪽은 무덤방의 바닥까지 노출돼….”

아리미쓰는 특히 “돌방의 내부에는 유물을 뒤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고, 관대에는 벽돌을 뜯어내 울타리처럼 돌려놓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상 가루베의 도굴 행위를 지적한 겁니다.

■발견부터 기구했던 팔자

이렇게 첫 등장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던 고분이 ‘29호분’입니다. 정식 조사에 들어간 조선총독부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식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않은 겁니다. 다만 발굴 전후와 무덤방 내부의 모습 등을 촬영한 사진 31장과 실측도면을 남겼는데요. 그나마도 1970~1980년대 대대적인 정비·보존 과정에서 위치를 잃어버렸답니다.

그러다가 1933년 발굴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 촉탁이던 아리미쓰가 발굴 69년 만인 2002년 정식 보고서를 펴내면서 정확한 지점을 특정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행방이 묘연해진 29호분’이 새삼 부각됐고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백제(475~538)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 번째로 이 29호분을 지목했습니다. 발굴조사는 2021년 3~7월 약 80일간 진행됐고요. 최근 조사보고서(<29호분 발굴조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파견된 중국인이 제작한 전돌’

이번 조사에서 행방불명된 29호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는 것도 나름의 성과였고요. 무덤방을 밀봉했던 전돌 140여 점도 수습했습니다. 특히 ‘이것은 건업 사람이 만들었다(造此是建業人也)’고 새겨넣은 전돌이 눈에 띕니다.

‘건업(난징·南京)’은 당대 중국 양나라(502~557)의 수도였습니다. 사실 인근 6호분에서도 양나라 기술자 이름이 새겨진 전돌이 확인된 바 있죠. “양나라 관아의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나 혹은 “양나라 사람인 선이 고분 축조를 감독했다(梁宣以爲師矣)”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6호분과 29호분 모두 왕릉급 고분의 축조에 멀리 양나라 기술자가 동원됐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자료입니다.

이 29호분은 관을 놓은 자리가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조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백제 왕족 부부를 순차적으로 묻은 합장묘로 추정됩니다. 여성이 먼저 서쪽에 묻히고, 남성이 나중에 동쪽에 안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동쪽 관대(남성 쪽) 바닥 면에서 관을 짤 때 쓰인 반원형 두정(머리가 큰 못) 4점을 추가로 확인했어요. 1933년 조사에서 19점의 관못이 보고된 바 있거든요. 이번 조사까지 합해 모두 23점을 수습한 겁니다.

■옹기종기 고분 4기의 관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가루베 지온 등이 1933년 11월 송산리 29호분에서 가루베 지온 등이 ‘사굴(개인 무단발굴)’로 유물(철정)을 수습한 사실이 적힌 유물카드가 남아 있다. 가루베의 도굴 행위를 확인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되찾은 29호분과 세트를 이루고 있는 무령왕릉, 6호분, 5호분의 관계는 어떨까요. 우선 무덤의 구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무령왕릉 및 6호분은 양나라에서 유행한 올(all) 전돌(벽돌) 무덤이고요.

반면 5호분은 전통적인 백제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입니다. 다만 관대(관을 놓은 장치) 등 일부에만 전돌을 놓았고요. 29호분은 ‘벽면=돌’로 쌓고, ‘바닥 면, 관대, 무덤방을 밀봉한 장치=전돌’로 깔아놓았습니다.

정리하면 5호(돌방+관대·무덤길 일부 전돌)-29호분(돌방+바닥면·관대·무덤방 밀봉석 등 전돌)-6호·무령왕릉(전체 전돌) 등으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고분의 선후 관계와 주인공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연구자마다 ‘백가쟁명’입니다.

이번에 나온 발굴보고서는 29호분이 무령왕릉과 6호분보다 늦다고 판단했습니다. 29호분에서 무령왕릉(주로 연꽃무늬 전돌)과 6호분(주로 동전무늬 전돌)에서 사용했던 전돌이 다 보이고요. 또한 6세기 중엽 이후 사비백제 시기에 쓰인 관못(머리가 반원형)이 출토되는 게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이런 형태의 관못은 29호분(합장묘) 중 나중에 조성된 동쪽 관대(남자로 추정) 바닥에서 확인됐거든요. 그래서 늦게 안장된 이 남성이 6세기 중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5호와 29호분은 거의 동시대로 보입니다.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공주 왕릉원 고분의 주인공을 판단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에는 최소 20여 기, 최대 60~80기에 이르는 고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백제 웅진시대 하면 만 63년을 가리키죠. 그때의 백제왕이라면 누굴까요.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재위 477~479)-동성왕(재위 479~501)-무령왕(재위 501~523)-성왕(재위 523~554·538년 사비 천도) 등 5명입니다. 이중 사비 천도를 감행한 성왕은 부여 왕릉원(옛 능산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중하총’에 안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공주 왕릉원에 묻힌 임금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등과 그 가계 왕족으로 좁혀집니다.

구체적으로 따져볼까요. 공주 천도와 함께 왕위에 오른 문주왕과 삼근왕은 같은 가계(부자)이고요.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477)의 아들이어서 다른 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삼국사기>)이거나 ‘이복형제’(<일본서기>)입니다. 그러니 공주 왕릉원의 가계는 문주왕-삼근왕계, 동성왕-무령왕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왕릉원의 입지상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구릉 윗부분, 즉 1~4호분은 한성기 백제의 전통을 잇는 돌방무덤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막 한성에서 천도한 문주왕-삼근왕계가 1~4호분을 차지한 거고요.

그렇다면 그 아래 5·6호와 29호분, 무령왕릉에는 동성왕-무령왕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령왕릉과 바로 붙어 있는 6호분의 주인공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88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29호분의 구조. 전형적인 백제식 돌방무덤의 형식이지만 바닥 면과 관대, 무덤방 밀봉석 등은 전돌로 구성돼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어색한 동성왕-무령왕 조합

그러나 이 동성왕-무령왕이 그렇게 사이좋게 누워 있을 수 있을까요. <삼국사기>는 “501년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한 뒤 무령왕이 즉위했다”고 하면서 심상찮은 여운을 남기죠.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는 겁니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무열’조·502)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백성들이 무도하고 포악한 동성왕을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같은 가계, 즉 부자간(<삼국사기>) 혹은 이복형제(<일본서기>)라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뭐가 좋다고 바로 곁에 무덤을 쓴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4호분 조사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장식이 경주 금관총 출토품과 같은 형태이거든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이 결혼동맹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4호분 출토 허리띠가 동성왕이 받은 혼인예물일 수도 있다는 거죠. 따라서 ‘4호분=동성왕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왕릉원의 남쪽에 조성된 교촌리 3호분이 있는데요. 역시 무령왕릉 및 6호분과 같은 전돌무덤입니다. 최근 들어 이 ‘교촌리 3호분=동성왕릉’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정변으로 죽임을 당한 동성왕을 무령왕릉에서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모셨다는 거죠.

뒤늦게 29호분 현장에 달려간 총독부 촉탁 아리미쓰 교이치는 묘지기 두 사람의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8월 여름 (무덤의 천장을 들어내고 석실을 파냈고) 지역의 유지 2~3인(가루베 등을 지칭)이 일부 유물들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아리미쓰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루베 등의 사굴(私掘)로 천장석은 죄다 반출된 상태이고 남쪽은 무덤방의 바닥까지 노출됐다”고 사실상 가루베의 도굴 행위를 지적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호분=순타태자?

그럼 무령왕계가 묻힌 무령왕릉-6호분-5·29호분을 꼼꼼히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무령왕릉과 버금가는 6호분의 주인공을 두고는 여러 설이 나왔는데요. 동성왕설은 이미 언급했고요. 무령왕의 전처설도 나왔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젊은 여성의 치아가 확인됐는데요.

이 여성의 나이로 미뤄보면 성왕의 생모일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무령왕에게 첫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의 무덤이 6호분이라는 겁니다. 이 첫 번째 부인이 무령왕보다 먼저 사망하자 6호분에 안치했고요. 정작 무령왕은 별도의 무덤(무령왕릉)을 조성해 훗날 죽은 젊은 후처와 묻혔다는 겁니다.

‘순타태자설’도 흥미롭습니다. 즉 <일본서기> ‘게테이(繼體)’조는 “513년(무령왕 13) 8월 26일 백제 태자 순타가 서거(薨)했다”고 전했습니다. 무령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겁니다. 276년 뒤인 789년 <속일본기> ‘간무(桓武)’조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입니다.

“12월 간무 천황의 생모인 황태후(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가 죽었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781~806년에 재위한 간무 일왕(재위 781~806)이 백제계 황태후의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황태후의 선조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였고요.

가루베는 왕릉관람로~6호분을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할 때 현장을 기웃거리다가 또 하나의 돌방무덤(석실분)을 찾아냈다. 그것이 29호분이다. 가루베는 계속 미적거리다가 11월 초가 돼서야 발견 사실을 보고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 무령왕의 후예’임을 밝힌 일왕

이와 관련해서 기억할 만한 일화가 있죠. 2001년 12월 당시 일왕인 아키히토(明仁)가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으므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깜짝 발언한 겁니다.

29호분에서는 ‘이것은 건업 사람이 만들었다(造此是建業人也)’고 새겨넣은 전돌이 한 점 확인됐다. ‘건업(난징·南京)’은 당시 양나라 도읍이었다. 1933년 발굴된 6호분에서도 ‘양나라 관아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나 혹은 ‘양나라 사람인 선이 총책임자로 고분 축조를 감독했다(梁宣以爲師矣)’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 발언의 의도를 두고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만…. 어떻든 6호분의 주인공은 아버지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의 무덤일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뒤에 조성된 5호분과 29호분 역시 무령왕의 혈족일 가능성이 짙고요.

29호분의 재발굴에서 확인된 유물들. 관을 장식한 못과 연꽃무늬·동전무늬 전돌이 보인다. 무령왕릉과 6호분 등 인근 고분 및 다른 지역 고분의 출토유물과 비교하면 29호분은 6세기 중엽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추론입니다. 워낙 다양한 견해가 난무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구릉 윗부분에 조성돼 있는 1~4호분을 한창 발굴조사 중이거든요. 이 조사에서 또 어떤 경천동지할 이야깃거리가 터져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차분히 지켜보죠.(3)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백제 정지산 유적 〓 빈전’ 무령왕릉 지석으로 풀었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8월 17일 10시 52분 

 

<14> 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11일 충남 공주시 정지산 백제 유적을 다시 찾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정지산 유적 내 중심 건물인 기와건물터로, 통나무 기둥들은 재현품이다. 이곳에 무령왕비의 시신이 2년 3개월 동안 안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초석(礎石·주춧돌)도 없는 건물에 연꽃무늬 기와라니….”

1996년 8월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 발굴 현장. 그해 발굴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한 이한상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49·현 대전대 교수)는 ‘대박’ 예감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연꽃무늬 기와가 출토되는 삼국시대 건물터는 십중팔구 궁궐 혹은 격이 높은 사찰. 당시 무거운 기와를 버티려면 기둥 아래 초석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을 놓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초석이나 적심이 전혀 나오지 않는 대신 바깥부터 안쪽까지 기둥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기둥이 너무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 불편할 정도였다. 궁금증은 갈수록 커졌다. ‘도대체 이 건물의 기능은 무엇인가….’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인근 무령왕릉 안에 있었다. 20년 만에 정지산에 오른 그는 “발굴 한 해 전 무령왕릉 내부를 실측한 경험이 중요한 힌트가 됐다”고 회고했다.

○ 무령왕릉 지석에 담긴 실마리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지석(가운데 사진)의 내용대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삼고 서쪽으로 선을 그어 정지산 유적이 백제시대 빈전임을 알아냈다(위). 이곳에서는 궁궐이나 거대 사찰에서 주로 발견되는 연화무늬 수막새 (아래)가 나왔다. 이한상 교수·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병오년(서기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무령왕비)께서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르고 기유년(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내며 기록한다(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太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됐다. 여기서 나온 지석 2개 중 한 면에 무령왕비가 죽은 해와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의 위치, 남편 무령왕과 합장된 날짜가 기록돼 있다. 백제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2년 3개월 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상례를 치른 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한상은 이 중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렀다(居喪在酉地)’는 문장에 주목했다. 다른 지석에 방위표가 그려진 걸 감안할 때 이것은 빈전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임에 틀림없었다. 기준점인 왕궁 위치는 지석 다른 면에 새겨진 매지권(買地券·죽은 사람이 땅 신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 문장을 통해 공산성(公山城)으로 추정했다. 이한상은 지도에 무령왕릉과 공산성(왕궁)을 직선으로 연결한 뒤 다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으로 직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정지산에 선이 닿았다. 정지산 유적이 백제 무령왕비의 빈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로써 초석이나 적심이 없는 연꽃무늬 기와 건물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이니만큼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 정도로 내부에 기둥이 빼곡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제기(祭器)로 주로 쓰이는 ‘장고형(長鼓形) 기대(器臺)’ 조각이 여럿 출토된 것도 빈전일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한상은 이듬해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일부 회의론도 있었지만 학계 다수는 이를 지지했고, 정지산 유적은 2006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특히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후쿠오카(福岡)대 교수 등 일본 학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정지산 유적에서 기와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대벽(大辟)건물터가 일본의 그것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대벽건물터는 사각형으로 도랑을 판 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을 세운 것이다. 이한상은 “정지산 유적의 대벽건물터는 시신이 안치된 기와건물터와 품(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다분히 기획성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 학계 “백제 3년상 고고 자료로 실증”


고고학계는 정지산 유적이 삼국시대 빈전을 확인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궁궐 안 빈전에서 5∼7일만 장례를 거행한 중국과 달리 3년상을 치른 고대 한반도의 장의 풍습을 고고 자료로 실증했다는 것이다. 3년상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조메이(舒明) 천황이 죽은 뒤 ‘백제대빈(百濟大殯·백제의 3년상)’을 따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와 일본 왕실이 상장의례를 공유한 것은 양국 문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정지산 유적 발굴은 대벽건물터가 일본으로 전파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설명했다.(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백제시대 최고급 옻칠 갑옷, 왜 저수지 한가운데 묻혔을까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6월 7일 09시 04분 

 

<34> 공주 공산성 발굴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산정 앞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이 위원이 손으로 가리키는 공북루 안쪽 공터가 백제시대 건물터가 발굴된 성안마을이다. 공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발아래 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백제 700년 역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꼭대기 정자(亭子)에 오르자, 공북루(拱北樓)로 뻗어 내린 성벽 옆으로 금강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기 660년 이곳에서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벌인 의자왕도 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까…. 475년 한성(현 서울)에서 천도한 이후 64년 동안 백제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은 백제 부활과 멸망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공북루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최근 발굴을 마친 공터가 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민가 7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성안마을’이다. 여기서 백제시대 건물 터를 비롯해 ‘옻칠 갑옷’ 등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단은 당초 견해를 바꿔 백제 왕궁 정전(正殿) 터가 성안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발굴단장)와 함께 오랫동안 공산성 발굴에 참여한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스승을 회고했다. “사람이 세상 떠날 때를 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30년 넘게 공산성 발굴에 매달린 분답게 마지막 9차 발굴까지 모두 마친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 당나라 연호 적힌 옻칠 갑옷 출토

‘○○行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행 정관 19년 4월 21일)이라는 명문이 적힌 백제시대 ‘옻칠 갑옷’.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발견됐다.
 
 
“아 행정관(行貞觀) 명문이다!”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지표로부터 6.5m 깊이 바닥에 깔린 풀을 대나무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던 이현숙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행여나 유물을 밟을까 오랜 시간 쪼그린 자세로 까치발을 한 탓에 그의 탄성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햇볕에 노출된 직후 감청색 빛깔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 위로 빨간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행정관’ 뒤로 ‘十九年四月卄一日’(19년 4월 21일) 글자도 있었다. 행정관이 무슨 뜻인가.

전화로 보고를 받은 이남석이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왔다. 명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스승이 제자를 슬쩍 나무랐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정관(貞觀)으로 읽어야지. 당나라 연호 아닌가.”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연대가 적힌 명문은 역사 해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자료다.

명문도 명문이지만 옻칠 갑옷 발굴도 대단한 성과였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옻을 덧바르는 갑옷은 삼국시대 최고 사치품으로 통한다. 더구나 옻칠 갑옷과 함께 쇠 갑옷, 마갑(馬甲), 대도(大刀), 장식칼 등 기마병의 화려한 말갖춤이 한 세트로 묻혀 있었다. 백제시대 공산성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1급 유물들이다.

주변 발굴을 끝낸 직후 발굴단은 갑옷 발견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게 됐다. 이현숙의 기억. “성안마을 주민들이 저수지에만 우물 5개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중 관정(管井) 하나가 옻칠 갑옷과 불과 20cm 떨어진 곳에 설치됐더라고요. 조금만 옆쪽으로 뚫고 지나갔다면 갑옷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 누가 왜 최고급 갑옷을 저수지에 묻었나

옻칠 갑옷과 함께 공산성 성안마을 안 저수지에서 발견된 ‘쇠 갑옷’. 공주대박물관 제공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관련 역사 기록과 연관성은 기본이고 때론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

이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백제는 간지(干支)를 사용했다”는 중국 역사서 한원(翰苑) 기록을 토대로 당나라 연호가 적힌 옻칠 갑옷은 중국에서 만든 거라는 견해가 있다. 당군이 웅진도독부에서 철수하면서 버린 갑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중국 연호가 새겨진 사실이 있으므로 백제가 외교용으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645년 5월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옻칠 갑옷에 적힌 645년 4월과 시기도 비슷하다. 발굴단의 해석을 이현숙이 정리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외교용으로 갑옷을 보내면서 국가기록물 차원에서 추가로 제작한 게 출토품인 걸로 보입니다.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갑옷을 저수지 아래 묻으며 승전을 기원한 의례를 올린 게 아닐까요.”(5)

 

 

<주>

 

 

(1) 귀신 홀린 듯 가마니에 퍼담았다..1박2일 아수라장 무령왕릉 (daum.net)2021. 2. 24.

 

 

(2)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무령왕릉” 한마디에 법석… 주위 독촉에 이틀만에 서둘러 발굴|동아일보 (donga.com)

 

 

(3) 무령왕릉 앞 6호분은 요절한 순타태자인가, 원수였던 동성왕인가[이기환의 Hi-story](118) (daum.net) 2024. 1. 22. 

 

 

(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 정지산 유적 〓 빈전’ 무령왕릉 지석으로 풀었다|동아일보 (donga.com)

 

 

(5)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시대 최고급 옻칠 갑옷, 왜 저수지 한가운데 묻혔을까|동아일보 (donga.com)

 

 

 

 

 

<참고자료>

 

 

 

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경향신문 선임기자 2021. 03. 23.

 

 

백제 무령왕릉 주변에 '고분 40여기' 더 있다 (edaily.co.kr)2019-07-17

 

 

백제 왕릉급 벽돌무덤, 80년만에 다시 출현(종합) | 연합뉴스 (yna.co.kr)2018-06-07 

 

 

문화재위원회, 공주 '대통'명 기와 출토지 보존키로(종합) | 연합뉴스 (yna.co.kr)2018-05-16

 

 

<무령왕 墓誌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naver.com)2007년 9월 6일 

 

 

 

 

공주 공산성 출토 백제 옻칠갑옷 등 삼국시대 말갑옷 총출동 (daum.net)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20.06.11.

 

 

 

'공산성 갑옷'에 숨은 백제 멸망의 비밀은? (daum.net)2019.05.06.[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백제인가… 당나라인가… 공산성 옻칠 갑옷 국적 논란 끝날까 (chosun.com)2019.04.22

 

 

 

'공노(孔奴)'.. "백제인의 익살 담긴 공주 공산성 옻칠갑옷의 낙서였다" (daum.net)이기환 선임기자2018.08.28. 06:02 

 

 

 

백제 관청건물 31동 발굴했다, 공주 공산성 (daum.net)뉴시스.신진아.2015.12.11

 

 

 

[사진] 1400년 전 백제 사다리 (daum.net)2015.12.11.

 

 

공산성 출토 백제 갑옷과 무기류 (daum.net)2014.09.23.

 

 

공산성서 백제 목곽창고 발견 (daum.net)2014.09.23.

 

 

공주 공산성 지하에서 백제가 깨어나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4/09/24

백제 시대 완전한 형태의 대형 목곽고와 깃대꽂이 최초로 발굴

 

 

공주 공산성의 백제 시대 판축성벽, 최초로 확인되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4/04/01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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