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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 고고학 (7)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서울 방이동 고분군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3. 백제 고고학 (7)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서울 방이동 고분군

대야발 2024. 12. 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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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석촌동 고분군

 

 

 
 

 

  

‘한국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돌무지무덤으로 한 변이 길이가 50m에 이르는 한반도 최대 크기다. 서울 송파구의 석촌동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에만 해도 300여기의 무덤이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5기만 존재한다. 특히 3호분은 크기 등으로 미루어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백제 13대 왕인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은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4세기대 고대백제국가의 기반을 확립했다.

(출처; '한반도의 피라미드' 서울 송파구 석촌동고분군은 백제왕 근초고왕의 무덤일까? (daum.net) 서울신문. 2016.06.03)

 

 

 

 

 

 

2016년 11월 29일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 중인 백제 한성기 왕릉지구인 사적 제243호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초대형 적석총과 금제귀걸이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고 밝혔습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 발굴현장(문화재청 제공)

 

 

 

 

이번 조사는 지난 해 5월 석촌동 고분군 내 1호분과 2호분 사이에 발생한 구덩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실시된 긴급 시굴조사에서 기단 석렬과 유물이 확인됨에 따라 지난 해 10월에 착수되었다.

 

 

조사 결과 지금까지 광범위하게 연결된 다수의 적석구조와 함께 토광목관묘, 상장의례(喪葬儀禮) 시설로 보이는 유구가 마련된 백제 한성기 초대형 적석총을 확인하였다.

 

 

 

적석총은 사각의 적석 단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데, 가장 큰 북쪽의 적석 단위에서 시작하여 동, 서, 남쪽으로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적석 연접구조는 석촌동 1호분에서도 알려진 바 있지만, 10개 이상의 적석 단위가 연접된 구조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연접분은 마한의 흙무지무덤이나 고구려의 적석총에서도 확인되는 구조로 그 관련성이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까지 확인된 적석총의 전체 규모는 사방 40m가 넘는 크기로 기존의 석촌동 고분군 내에 복원되어 있는 석촌동 3호분이나 만주의 고구려 장군총과도 비교되는 초대형급으로 추정된다.

 

 

한편, 유물은 적석총 동남쪽 외곽에서 집중되어 나왔는데, 유구는 적석총 기단에 맞붙여 사각으로 석축을 둘러쌓고 내부에 다진 흙을 다시 파내어 목곽을 설치한 시설이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 발굴현장에서 나온 금 장신구(문화재청 제공)

 

 

 

 

이곳에서 토기 항아리, 철제 낫 등의 유물을 비롯하여 기와류, 각종 토기, 금제 귀걸이와 달개장식, 유리구슬, 다량의 동물뼈 등 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이 집중된 유구의 성격은 상장례와 관련한 제의 공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석촌동 고분군이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도성 유적과 짝을 이루는 백제 한성기의 왕릉지구로서 그 위상과 면모를 재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학계의 논란이 되어왔던 백제 적석총의 구조와 성격, 연대 문제 등 백제 중앙의 고분문화의 계통과 성립, 발전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출처;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백제 한성기 초대형 적석총 확인 (daum.net) 뉴스1. 2016. 11. 29.)

 

 

 

 

 

 

2019년 10월 24일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무게 4.3kg의 화장된 인골이 발굴됐습니다.

 
 

 

 

 

【 앵커멘트 】 한성 백제 왕실묘역인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무게 4.3kg의 화장된 인골이 발굴됐습니다. 백제왕실에서 화장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여서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김현 기자의 보도입니다.

 

 

【 기자 】 백제시대 왕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석촌동 고분군입니다.

최근 이곳에서 화장된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백제 고분에서 화장 유골이 대거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람 1명을 화장하면 2~3㎏의 뼈가 나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여러 명의 뼈로 추정됩니다.

금귀걸이와 중국 청자, 유리구슬 등 유물 5천여 점도 나왔습니다.

 

 

▶ 인터뷰 : 정치영 /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팀장 - "(백제시대에) 화장이 적극적으로 이뤄졌었는가 하는 학계의 많은 의문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 던져주는 게 이번에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온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번 발굴에서는 여러 돌무지무덤이 100m 길이로 이어진 초대형 '연접식 적석총'도 처음 확인됐습니다.

중소단위 적석묘와 이를 이어주는 연접부에 화장된 인골을 묻은 매장의례부를 맞붙여 무덤규모를 확대시킨 특이한 형태입니다.

석촌동 고분군 유적은 1970년대 잠실 개발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시작됐습니다.

특히 한 변의 길이가 50m에 달하는 3호분은 백제 전성기를 이뤘던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출처; 석촌동 고분군에서 유골 발굴..백제 '화장문화' 첫 확인 (daum.net) MBN. 2019. 10. 24.)

 

 

 

https://tv.kakao.com/v/403204597

(출처; https://v.daum.net/v/20191024150315415. YTN. 2019. 10. 24.)

 

 

 

 

 

 

2021년 11월 24일 한성백제박물관은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2015년 이후 발견된 유물 2000여점 중 일부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연접식 적석총 8호 적석묘와 하부에서 드러난 목관묘. [사진=한성백제박물관]

 

 

 

수십 기의 적석총(돌무지무덤)이 연결된 형태인 길이 125m, 폭 60m의 초대형 ‘연접식 적석총’의 발굴 현장과 백제 토기, 금제 귀걸이, 수막새 등 출토 유물이 현장에서 공개된다.

 

 

 

9호 목관묘 유물 출토 현장. [사진=한성백제박물관]

 
 
 
 
 


연접식 적석총은 석촌동에서만 발견된 국내 유일무이한 고분 형태다. 이전까지는 개별 돌무덤으로만 알려졌던 적석총이 이번 발굴 과정에서 수십 기 연결된 형태로 드러났다.

 

 

또한 이곳에서는 백제 고분 중 최초로 여러 사람을 화장한 다량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해 백제 장례문화를 밝힐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토기, 금제 장신구, 기와 등 2000여점의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박물관 측은 이 중 50여점을 골라 이번 설명회를 통해 공개한다.

 
 
 
 
 
 
금귀걸이와 달개 장식. [사진=한성백제박물관]

 

 

 

 

이번에 공개하는 유적과 유물은 한성백제박물관이 2015년부터 7년째 진행 중인 연차 발굴조사의 결과물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1987년 마지막 발굴 조사 이후 유적 공원으로 조성됐다. 2015년 1호분 북쪽에서 발생한 직경 1m의 함몰 구덩이 원인을 밝히기 위해 송파구가 의뢰한 긴급 조사를 통해 적석총으로 추정되는 시설과 다량의 백제 유물을 발견했다.

 

 

 

고분군 1호분 복원을 마쳐보니 연접식 적석총이 1호분과 연결됐을 뿐 아니라 주변 무덤으로 연장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져 향후 추가 발굴 조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또한 발굴 과정에서 적석총 하부에 다수의 움무덤이 발견돼 백제 왕실 묘역의 변화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학계는 기대하고 있다.

(출처; https://v.daum.net/v/20211124075607031 헤럴드경제. 2021. 11. 24.)

 

 

 

 

2022년 11월 15일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하고 주요 발굴조사 성과를 시민에게 공개하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사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했습니다.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자들이 널무덤 무리를 살피고 있다. 2022.11.15. kch0523@newsis.com

 

 

 

 

널무덤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유해를 묻은 무덤으로 '토광묘'로 불리기도 한다.

이번 발굴 성과는 8호 적석묘 아래에서 무리 지어 발견된 널무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백제 한성 왕실 묘역의 경관 변화를 증명하는 다양한 자료를 추가 확보한 것이다.

 

 

 

8호 적석묘 아래에서 조사된 12호 널무덤의 주인은 금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로 치장했고 껴묻거리로는 중국제 흑유계수호(흑유 닭 모양 항아리), 백제 토기 항아리를 갖추고 있다. 특히 금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는 착장된 상태이며 흑유계수호는 제 위치에서 온전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는 백제 지배층의 장례문화와 묘제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12호 움무덤의 주인은 백제 왕실에 소속된 지배계층으로서 유리구슬 목걸이와 금귀걸이로 치장하고 당시 중국에서 수입된 청자를 소유할 수 있었다. 백제 왕릉 묘역에 무덤을 만들어 사후에도 생전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는 유리구슬 목걸이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과 유적의 조사 과정이 공개됐다.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공개된 금귀걸이와 유리장식품. 2022.11.15. kch0523@newsis.com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자들이 널무덤 무리를 살피고 있다. 2022.11.15. kch0523@newsis.com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자가 널무덤 무리를 살피고 있다. 2022.11.15. kch0523@newsis.com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자들이 발굴된 목관묘를 살피고 있다. 2022.11.15. kch0523@newsis.com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자들이 발굴된 목관묘를 살피고 있다. 2022.11.15. kch0523@newsis.com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 왕릉 지구 '석촌동 고분군'에서 완전한 구조의 널무덤 무리를 발견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공개된 널무덤. 2022.11.15. kch0523@newsis.com
 

 

 

 

 

https://tv.kakao.com/v/433544570

(출처;https://v.daum.net/v/20221116093648273 MBN.2022. 11. 16.)

 

 

 

 

 

 

백제사에서 근초고왕은 탁월한 군주로 손꼽힙니다. 동진, 신라, 왜와의 외교로 고구려 남진을 저지한 데 이어 몸소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으며 각지로 땅을 넓혀 백제 최대 판도를 이루었습니다.

 

 

생전 뭇사람들의 존숭을 한 몸에 받았을 그가 세상을 뜨자 상주인 근구수왕은 거대 무덤을 만들고 수묘인(守墓人)을 배치하여 그곳을 관리하였을 것입니다.

 

 

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인데 왕족 무덤을 다른 귀족들의 무덤과 차별화하기 위해 외래 양식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그러나 무덤을 쓴 지 한 세기 만인 475년 근초고왕의 능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고 다시 551년에는 신라 땅에 편입된다. 그에 따라 왕릉은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퇴락하거나 약탈 대상으로 전락했고 또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전승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지금도 발굴 중인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에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어느 무덤이고 또 그 일대의 옛 무덤 발굴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백제사의 비밀은 무엇일까.

 

 

 

 

용두사미로 끝난 일제강점기 발굴

 

한성기 백제 무덤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초반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이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현 서울 송파구 석촌동) 일대의 백제 무덤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1916년 그 내용을 간략히 공개했지만, 석촌리 일대의 무덤을 왕릉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1917년 하반기, 조선총독부는 백제의 왕릉급 무덤을 집중적으로 발굴하여 유물을 확보하기로 하고 실행에 나섰다. 실무를 담당한 야쓰이 세이이쓰 일행은 9월 21일 경성을 출발해 12월 27일 복귀할 때까지 경기(현 서울 포함), 충청, 전라 지역 유적을 발굴했다.

 

 

특히 그들은 백제의 왕릉급 무덤을 ‘빛의 속도’로 파헤쳤다. 그때 발굴된 석촌리 1호분(현 석촌동 3호분)은 근초고왕, 부여 능산리 동하총은 위덕왕, 익산 쌍릉은 무왕 부부, 나주 신촌리 9호분은 영산강 유역 유력자 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이다.

 

 

그 무렵 석촌리 일대에 분포한 무덤은 293기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석촌리 1호분이 가장 큰 무덤이었다. 야쓰이 일행은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의 구조 및 발굴 방법을 몰랐기에 좁고 깊은 도랑 하나를 팠다가 무덤방이나 제대로 된 유물이 드러나지 않자 서둘러 발굴을 끝냈다. 그 후 이 일대의 백제 무덤들은 총독부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공주나 부여의 백제 무덤들과 달리 보존 조치가 추진되지 않았다.

 

 

 

 

백제 왕릉이 왜 고구려식 적석총?

석촌동 일대에서 출토된 ①금제 달개 ② 1호분 북쪽 적석총에서 나온 기와류 ③ 12호 목곽묘에서 나온 흑유계수호(닭 머리 모양 검은 항아리). 한성백제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광복 후 30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에 우리 손으로 석촌동 고분군 발굴을 실시했다. 잠실지구 개발사업에 부수하여 서울대박물관이 1974년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석촌동 고분군을 발굴하였는데, 그 무렵 지표조사를 진행한 결과 잔존 무덤은 5기에 불과했다.

 

 

 

기대를 품었던 대형 적석총의 경우 훼손이 심하고 무덤 주인공의 유해를 안치한 무덤방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실망하였지만, 지표상에 봉분이 남아 있지 않았던 곳에서 무덤 하부가 잘 남아 있는 사례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에 더하여 대형 무덤의 경우는 주변에서, 작은 무덤의 경우는 내부에서 전형적인 백제 토기와 기와, 황금 장신구, 중국 청자 등이 쏟아짐에 따라 이곳이 한성기 백제 사람들의 핵심 묘역임이 확인됐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3호분이었다. 이 무덤은 돌로 3층의 단을 쌓은 고구려식 적석총이고 길이가 자그마치 50.8m나 되는 대형분이어서 일약 백제 왕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조사자는 근초고왕릉으로 특정했다.

 

 

 

 

석촌동 일대에 고구려식 적석총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고구려 혹은 부여에서 유력한 세력들이 이주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았고 극단적으로 4세기 무렵 백제 왕실이 북방계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백제 왕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이 여타 귀족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외래의 무덤 양식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아졌다.

 

 

 

 

싱크홀이 불러낸 한성 백제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1987년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됐다. 그 무렵 대형 묘 발굴이 종료됨에 따라 추가 발굴은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5년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해 석촌동 고분군 내 1호분 북쪽 잔디밭에서 싱크홀이 발생한 것이었다. 조사를 벌인 결과 나무로 만든 현대 지하 구조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구덩이였음이 밝혀졌다.

 

 

이 조사에서 구덩이 주변으로 돌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이 실시해 온 이 발굴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많이 확인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십 기의 적석총이 연접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인데 길이가 자그마치 100m를 넘어선다.

 

 

무덤 상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무덤이 빼곡히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아마도 혈연적으로 가까운 인물들이 오랫동안 무덤을 이어 붙여 가면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접 적석총의 하부에는 더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목관묘와 목곽묘가 분포하며, 연접된 무덤들 중간중간에서는 장송 의례를 거행하던 터가 확인됐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분의 화장된 인골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다량의 기와와 함께 화려한 금제 장식품이 출토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석촌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기와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도 확보했다. 기왕에는 고구려처럼 적석총 상부에 세운 건물의 지붕에 올려졌던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근래의 발굴 결과로 보면 적석총 주변에 마련된 의례용 건축물 지붕에 올렸을 공산이 커졌다.

 

 

이처럼 석촌동 고분군은 한성기 백제사 해명의 ‘일급 사료’이지만 절대다수의 무덤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채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다만 지난 반세기 동안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었기에 그러한 자료를 통해 장차 더 한층 정밀한 연구가 진행되어 여전히 애매하기 그지없는 백제 초기의 역사가 머지않은 장래에 제대로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최강 백제’ 이끈 근초고왕, 어디 묻혔나[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daum.net) 동아일보 2024. 2. 5.

 

 

 
 
 

■ 서울 방이동 고분군

 

 
 
 
 

 

 

한성백제 시대의 고분군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송파구의 석촌동ㆍ방이동ㆍ가락동 3군데다. 이중 형태나마 남아 있는 것은 석촌동과 방이동뿐이다. 가락동 고분군은 도굴 등으로 훼손된 뒤 도시개발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방이동 고분군은 인근 석촌동과 차이를 보인다. 석촌동에는 흙무덤도 있지만 돌무덤(적석총)이 주인공이다. 이에 비해 방이동 고분 8기는 모두 흙무덤이다. 대개 고구려식 돌무덤에서 토착 삼한식 흙무덤으로 바뀌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방이동 고분군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곳은 1979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방이동 백제고분군'으로 이름붙었다. 하지만 일부 무덤에서 전형적인 신라토기가 출토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현재 5세기 전후 한성백제 시대 무덤 자리에 이곳을 점령한 신라인 무덤이 보태졌다는 주장에 대해, 아예 6세기 이후 신라시대 무덤들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결국 문화재청은 2011년 7월 명칭을 '서울 방이동 고분군'으로 바꿨다. 당국의 무심함은 지나칠 정도다. 현재 고분군 내 안내판에는 '시대:통일신라'로 표기하면서도 '방이동 백제고분군'이라는 과거 이름은 바꾸지 않고 있다.

(출처; https://v.daum.net/v/20130612171315710 서울경제. 2013. 6. 12.)

 

 

 

 

2017년 3월 28일 한성백제박물관은 40년 만에 ‘신라냐 백제냐’ 국적논란이 있는 방이동 고분 발굴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산 47-4번지에 있는 방이동고분군의 일부. 1970년대 이후 강남개발로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여 섬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맨 왼쪽에 입구가 보이는 고분이 1호분
 
 
 
 

이 옛 무덤떼는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해진다. 1500여년 전 무덤 잡은 자리는 옛 백제 도읍터 코앞인데, 나온 토기들은 죄다 신라의 유물이다. 그래서 30여년째 학자들 사이에 신라 무덤인지 백제 무덤인지를 놓고 국적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지금은 아파트숲에 둘러싸여 8기의 무덤 공원이 된 서울 방이동고분군의 내력이다.

이 무덤떼는 70년대 초 한 주민이 자기 집 축대와 인접한 1호분 무덤의 돌방과 널길을 발견해 신고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뒤이어 75년 잠실 택지개발을 앞두고 문화재관리국이 1, 4, 5, 6호분 무덤을 발굴한 결과 백제, 신라 공통의 굴식돌방무덤(석실분)들이 대부분 나왔다.

 

 

조사단은 4~5세기 한성(서울)에 도읍한 초기 백제 무덤으로 점찍었다. 하지만 대부분 도굴된 상태에서 빈약하게 나온 굽다리접시, 직구호 항아리 따위의 토기 유물들이 나중에 학계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학계는 출토품도 한성백제 유물로 봤는데, 아니었다. 80년대 초까지 진행된 경주의 신라고찰 황룡사터 발굴 현장에서 방이동 출토품과 똑같은 굽다리접시, 항아리들이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방이동고분군 주인이 6세기 한강 유역에 진출한 신라인들이란 학설(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이 제시됐고, 결국 신라계 무덤이라는 통설이 힘을 얻게 됐다.

79년 사적 지정 당시 고분군 정식 명칭이 ‘방이동백제고분군’이었다가 2011년 명칭에서 백제가 빠진 건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제설이 그냥 가라앉은 건 아니다. 최근 부근의 우면동과 하남시 감일동 등에서 한성백제의 정교한 석실무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방이동고분군 국적은 백제가 맞다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일부 학자들은 백제인들의 석실무덤을 나중에 들어온 신라인들이 재활용했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5~6세기 백제·신라 무덤 변천사에서 수수께끼의 고리가 되는 방이동고분군이 70년대 이래 40년 만에 처음 발굴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4월 첫주부터 전문가들 자문 아래 고분군의 3호분을 발굴하는 학술조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최근 3호분 한쪽 면 봉토가 쓸려 내려가는 이상현상이 나타나 관리자 쪽인 송파구청이 정비를 위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3호분은 70년대 발굴되지 않았다. 봉토, 내부 무덤방 얼개, 유물 등을 확인할 것으로 보이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40년 가까이 풀리지 않은 신라, 백제 국적 논란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인지 학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최병현 교수는 “70년대엔 신라와 백제 고분의 얼개, 토기의 차이점에 대한 지식이 매우 빈약한 상태로 발굴했던 만큼 이번 조사를 통해 국적 논란에 좀더 분명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출처; [단독] ‘신라냐 백제냐’ 국적논란 방이동 고분 40여년 만에 발굴한다 :  한겨레 (hani.co.kr)2017-03-28 )

 

 

 

 

 

■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사적 243호) 전경. 백제가 서울을 도읍지로 한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의 지배층 무덤군으로 ‘왕릉지구’로 불리기도 한다. 1910년대만 해도 이 일대에는 290여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도시개발 등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복원한 8기 고분을 중심으로 도심 속 공원으로 정비돼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석촌동 3호분은 ‘고구려식’ 계단형 돌무지무덤으로 한성백제의 전성기 이끈 근초고왕 능으로 추정 493년 이어진 한성백제는 백제사의 핵심이지만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백제역사지구’에서 빠져 석촌동 고분 발굴 진행…문헌·고고학 등 통합적 연구로 한성백제 공백 메워 온전한 백제사 되찾아야

 

 

 

옛 무덤인 고분은 고대사 연구에서 ‘보물창고’라 할 만하다. 문헌기록이 귀한 상황에서 무덤 조성 당시의 물질문화는 물론 정신문화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정보를 품고 있어서다. 고분은 조성 주체자의 가치관, 특히 사후관을 보여준다. 혼례와 더불어 보수성이 강한 매장의례는 지속성이 유지되면서 주체세력에 따라 시대별·지역별로 뚜렷한 특성도 드러낸다.

 

 

특히 다양한 껴묻거리는 문헌자료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고구려 벽화고분들, 무령왕릉 같은 백제 고분들, 천마총 같은 신라 고분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삼국시대를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거대한 현대도시 서울에도 고분들이 남아 있다. 1600여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역사문화의 생생한 현장이자, 시민들에겐 도심 속 쉼터이기도 하다.

 

 

 

■ 한성백제의 또 다른 상징

지난 11일 찾은 ‘석촌동 고분군’ 내 발굴조사 현장에서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윤정현 학예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백제시대 토기를 살펴보고 있다. 권도현 기자

 

 

 

백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삼았다. 수도 위치에 따라 백제는 흔히 세 시기로 나누는데, 서울의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와 고구려에 밀려 내려간 공주의 웅진시대(475~538), 부여의 사비시대(538~660)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온조 세력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게 기원전 18년이니 한성시대는 백제사에서 절반을 넘는 493년간 이어졌다. 21명의 왕이 거쳐간 한성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전라도·강원도 일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고대국가로 자리매김했다.

 

 

한성백제는 백제사의 핵심적 시대이지만 고구려·신라와는 달리 역사문화상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문헌자료 부족과 함께 유적들이 훼손돼서다.

 

 

 

현재 서울의 한성백제 유적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한강 이남, 주로 송파구 일대에 모여 있다. 왕궁터로 보이는 풍납토성(사적 11호)과 몽촌토성(297호), 석촌동 고분군(243호), 방이동 고분군(270호)이 대표적이다.

 

 

한성백제의 수많은 의문점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되는 풍납토성은 도심이라 전면적 발굴조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나마 몽촌토성·석촌동 고분군 일부가 발굴 중이고, 최근 경기도 하남·양평 등에서 새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다행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한성백제 지배층 무덤이 모인 곳으로 왕릉지구로 불리기도 한다. 풍납·몽촌토성과 3㎞ 내외 떨어진 석촌동 일대에는 1910년대만 해도 290여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17년 간행한 <조선고적도보>의 ‘석촌부근 백제고분군 분포도’에는 흙무덤 23기와 돌무지무덤 66기 등 89기의 고분이 기록돼있다. 경작지, 주택지로 파괴되던 고분군은 1970~80년대 도시정비사업에 따라 발굴도 이뤄졌다.

 

 

조사결과 움무덤(토광묘), 돌무지무덤(적석총), 독무덤(옹관묘), 돌로 흙을 덮은 흙무지무덤(즙석봉토분), 굴식돌방무덤(횡형실석실분) 등 다양한 무덤이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조사는 학술발굴이 아니라 도시정비를 위한 발굴이었고, 유적가치보다 개발논리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급하게 진행되는 등 부실했다. 고분군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지하차도가 당시의 의식수준을 잘 보여준다.

 

 

석촌동 고분군은 현재 8기가 복원·재현돼 있다. 외형상 돌무지무덤 4기, 움무덤 2기, 즙석봉토분 1기, 돌을 쌓은 석열이 안쪽은 무덤 테두리를 따라 원형이고 바깥은 사각형인 내원외방분 1기 등이다.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고분군에서 가장 북쪽의 고분이 3호분이다. 가장 크고 주목받는 고분으로 동서 길이 50.8m, 남북 길이 48.4m의 네모난 3단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3단으로 복원됐지만 원래 7단 정도로 추정된다. 주검은 3단이나 5단 정도에 안치됐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사 당시 이미 훼손돼 발견하지 못했다. 무덤 안팎에선 중국 동진시대(317~419) 도자기편과 백제 토기편, 금제 장식류 일부가 나왔다. 4~5세기에 조성된 3호분은 고구려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3호분 남쪽으로 4호분·2호분이 같은 형식의 돌무지무덤으로 복원됐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이 세 고분의 내부구조는 조금씩 다르다. 3호분은 내부도 돌이지만 4·2호분은 흙이어서 외형만 돌무지무덤 형태였다. 3호분을 고구려식, 4·2호분을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복원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석촌동 고분군’의 고분 안팎에서 그동안 발굴된 금제 장신구(오른쪽)와 토기·와당 등 각종 유물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이 고분군이 주목받은 것은 백제 지배층 무덤이 고구려의 태왕릉·장군총과 같은 고구려계 묘제여서다. 이는 백제 건국세력이 고구려계임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엔 백제 건국세력을 ‘고구려 유민세력’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이른바 ‘고구려 출자설’로 규정하지 않고 고구려처럼 부여와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분군 내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연결된 쌍분이자 남성·여성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1호분 인근의 최근 조사에서 여러 무덤이 연접돼 나타나고 있어 1호분도 연접된 무덤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고분군 가장 남쪽에는 즙석봉토분인 5호분이 있다. 내부조사는 하지 않고 흙 쌓는 방식만 조사한 결과 흙을 다져 봉분을 쌓고 그 위에 돌을 한겹 덮고 다시 흙으로 덮은 독특한 형식이다. 즙석봉토분은 가락동 등에서도 발견됐는데, 한 봉분 속에 여러 개의 나무널 등이 자리했다. 즙석봉토분을 놓고 학계에서는 고구려적 요소가 반영됐다는 학설과 토착민이던 마한의 전통이라는 학설이 엇갈리고 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몽촌토성 쪽으로 더 올라오면 역시 공원으로 조성된 ‘방이동 고분군’이 있다. 능선을 따라 굴식돌방무덤, 돌덧널무덤(석곽묘) 등 수십기의 고분이 존재한 곳이다. 방이동 고분군은 1973년 김모씨의 집 뒷산 언덕이 무너지면서 굴식돌방무덤(현재 복원돼 있는 1호분)이 드러나 발굴 계기가 됐다.

 

 

현재 정비된 고분은 8기로, 정문에 들어서서 왼쪽의 서쪽 언덕에 1·2·3·6호분 4기가,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 8·7·9·10호분 4기가 자리한다. 조사가 이뤄진 무덤은 1·4·5·6호분이며, 4·5호분은 복원되지 않았다.

 

 

3호분은 2016년 봉분 일부가 흘러내리면서 현재 한성백제박물관이 조사를 진행 중이다. 한성백제의 무덤으로 여겨지던 방이동 고분군은 정작 조사에서 신라 토기들이 나와 화제와 논란을 불렀다.

 

 

학계에선 지금도 백제냐, 신라냐를 놓고 견해가 부딪히고 있지만, 최근 3호분 조사결과 등에 따라 백제가 일부를 조성하고 이후 신라가 광범위하게 재활용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백제의 ‘잃어버린 절반’ 되찾아야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사적 270호) 전경. 권도현 기자

 

 

 

고구려·신라도 건국 초기 연구는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한성백제는 ‘지금도 논쟁 중’이라 할 만큼 유독 견해들이 엇갈린다. 고고학적 자료 부족과 더불어 그나마 있는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놓고 해석이 달라서다. 교과서 등 대중적으론 주류 학설 중심으로 정리가 됐지만 학술적으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상황은 다르다.

 

 

지난 2017년에 백제사 쟁점을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살펴보는 ‘한성백제사 다시 보기’란 콘퍼런스가 열렸다. 하루종일 진행된 콘퍼런스의 1주제가 ‘백제, 누가 언제 세웠나’일 정도다. 시조를 놓고 온조라는 견해부터 온조가 가공인물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건국세력의 고구려계 여부, 한성백제 왕궁이 어디인가 등이 대표적이다. 앞에서 살짝 언급했지만 석촌동 고분군의 돌무지무덤, 당시 굴식돌방무덤의 전개과정을 둘러싸고 조성 배경과 주체세력, 시기, 순서 등에 대한 주장도 부딪힌다. 한 원로학자의 말처럼 ‘결정적 한 방’이 나오지 않으면 쉽게 끝나지 않을 논쟁이다.

 

 

 

그래서 관련 유적의 장기적·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중요하고, 현재 진행 중인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가 주목받는다. 한성백제박물관은 2015년부터 산하 백제학연구소 학예사들을 중심으로 고분군 내 1호분 옆 지역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 11일 석촌동 고분군을 찾았을 때도 뙤약볕 아래 조사가 이어졌다.

 

 

때마침 백제 토기와 중국 자기편이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치영 발굴조사팀장, 최진석·윤정현 학예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발굴조사에서는 한성백제 연구활성화를 자극하는 새 자료들이 속속 나와 학계 안팎의 관심을 받는다. 남북 100m, 동서 40m 규모의 발굴현장에서는 지금까지 연접되는 돌무지무덤이 무려 20여기 발견됐고, 더 확장되는 상황이다.

 

 

또 금제 귀걸이 등 각종 유물도 출토되고 있다. 정치영 팀장은 “표토를 50㎝ 정도 긁어내면 새 돌무지무덤의 석열과 점토부 등이 노출될 정도여서 향후 더 많은 자료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전문가들은 물론 지역 주민, 서울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낀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지구’에 한성백제 유적을 추가로 등재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2015년 등재된 ‘백제역사지구’는 공주·부여·익산의 유적 8곳으로만 구성됐다.

 

 

백제사의 절반을 넘는 한성백제시대가 통째로 빠진 ‘반쪽 등재’다. 보다 온전한 백제역사지구를 위해 한성백제 유적의 추가 등재를 추진 중인 문화재청과 서울시, 송파구가 발굴조사 등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

(출처; https://v.daum.net/v/20190615060205093 경향신문. 2019. 6. 15.)

 

 

 

 

 

<자료출처>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백제 한성기 초대형 적석총 확인 (daum.net) 뉴스1. 2016. 11. 29.

 

 

 

석촌동 고분군에서 유골 발굴..백제 '화장문화' 첫 확인 (daum.net) MBN. 2019. 10. 24.

 

 

 

https://v.daum.net/v/20191024150315415. YTN. 2019. 10. 24.

 

 

 

https://v.daum.net/v/20211124075607031 헤럴드경제. 2021. 11. 24.

 

 

 

 

https://v.daum.net/v/20221116093648273 MBN.2022. 11. 16.

 

 

 

 

 

 

 

 

 

 

 

https://v.daum.net/v/20190615060205093 경향신문. 2019. 6. 15.

 

 

 

 

 

<참고자료>

 

 

'한반도의 피라미드' 서울 송파구 석촌동고분군은 백제왕 근초고왕의 무덤일까? (daum.net) 서울신문. 2016.06.03

 

 

 

https://v.daum.net/v/20161129104050075 이데일리. 2016. 11. 29.

 

 

 

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 '백제 한성' 고분군 보고서 4권 발간 (daum.net)2023. 3. 7.

 

 

 

https://v.daum.net/v/20221115050006657 경향신문.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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