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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 고고학 (8) 하남 감일동 고분군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3. 백제 고고학 (8) 하남 감일동 고분군

대야발 2024. 12. 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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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2일 하남시와 하남역사박물관에 따르면 고려문화재연구원(이사장 김병모)이 2015년 11월부터 진행 중인 하남감일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부지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 돌방무덤) 50기가 발견됐다고 밝혔습니다.

 

 

 

 

하남 감일동에서 나온 백제 횡혈식 석실분. [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이 확실시되는 서울 풍납토성(사적 제11호)과 약 4㎞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 최고위층 무덤 수십 기가 나왔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은 모두 70여 기로, 서울 인근에서 이처럼 많은 백제 석실분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고분들은 학계에서 한성도읍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과 가락동, 그리고 방이동 일대 고분군이 도시 개발로 대부분 파괴된 상황에서 당시 백제 건축 문화와 생활상, 국제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 중심부에서 상상도 못 한 유적이 나온 것"이라며 "한성도읍기 백제는 고분은 망가지고 기록은 소략했는데, 감일동 고분군은 백제사를 구명하고 복원할 수 있는 핵심 자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남 감일동 횡혈식 석실분. 벽에 회가 남아 있다.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감일동에서 확인한 횡혈식 석실분은 크게 네 곳에 무리를 이루었다. 경사면에 땅을 파서 직사각형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만들고, 바닥을 다진 뒤 길쭉하고 평평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구조다.

 

 

묘광과 돌 사이는 판축기법(흙을 얇은 판 모양으로 켜켜이 다져 올리는 방법)을 썼고, 천장은 점차 오므라드는 소위 궁륭식이다. 일부 무덤은 벽을 마감한 회가 남았고,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연도는 대부분 오른쪽에 마련됐다.

 

 

무덤 크기는 묘광이 세로 330∼670㎝, 가로 230∼420㎝이고, 석실은 세로 240∼300㎝, 세로 170∼220㎝다. 높이는 180㎝ 내외다. 무덤 간 거리는 약 10∼20m다.

 

 

문재범 하남역사박물관장은 "일부 무덤은 두 번 이상 사용한 흔적이 있다"며 "시신과 껴묻거리를 안치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 안쪽으로 밀어 넣고 또다시 장례를 치른 것 같다"고 말했다.

 

 

 

 

감일동 횡혈식 석실분에서 나온 부뚜막형 토기.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부장품으로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토기와 매우 흡사한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아가리가 곧고 어깨가 넓은 항아리)를 비롯해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 계수호(鷄首壺·닭머리가 달린 항아리)와 부뚜막형 토기 2점이 출토됐다.

 

 

문 관장은 "백제 무덤은 신라 무덤과 비교하면 껴묻거리가 많지 않다"며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흑유(흑색 유약) 계수호가 나온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청자 계수호가 발굴되기는 최초다. 사각뿔에 동그란 구멍을 뚫은 것 같은 부뚜막형 토기도 처음 출토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청자는 당시 중국에서만 만들 수 있었고, 부뚜막형 토기를 무덤에 묻는 풍습도 중국에 있었다"며 "백제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지금으로 치면 감일동 고분군에는 글로벌화한 사람들이 묻혔다고 볼 수 있다"며 "일본 오사카, 나라에서 나오는 5세기 후반 백제계 석실분의 원형이라는 생각도 든다"는 의견을 내놨다.

 

 

 

 

청자 계수호.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하남시는 석실분 28기가 밀집한 지역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공원 한편에는 이전·복원할 석실분 15기와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이 들어선다.

 

 

문 관장은 "감일동 고분군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이어지는 백제 고분 유적"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가 웅진과 사비를 도읍으로 삼았을 때 유적을 아우르는데, 세계유산을 한성도읍기 백제 유적으로 확장 등재한다면 감일동 고분군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하남 감일동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 연합뉴스 (yna.co.kr)2018-04-22)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초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석실분이 무더기로 발견된 하남 감일동 고분군은 왕족과 귀족이 묻힌 백제의 북망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은 문재범 하남역사박물관장은 22일 한성도읍기 백제(기원전 18∼475년)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 돌방무덤) 50기가 밀집한 경기 하남 감일동을 북망산(北邙山)에 비유했습니다.

 

 

 

 

 

 
하남 감일동 석실분에서 나온 부뚜막형 토기.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중국 허난성 뤄양(洛陽) 북쪽에 있는 북망산에는 한나라 이후 제왕과 귀인, 명사 무덤이 만들어졌다. 사람이 죽으면 묻힌다는 '북망산천'(北邙山川)은 북망산에서 유래했다.

 

 

 

하남 감일동에서 나온 백제 횡혈식 석실분. [고려문화재연구소 제공]

 

 

 

하남감일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 과정에서 나온 백제 고분군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건축한 석실분을 제외한 다른 무덤이 없고, 중국에서 제작한 뒤 백제로 건너온 것으로 짐작되는 '청자 계수호(鷄首壺·닭머리가 달린 항아리)'와 '부뚜막형 토기'가 국내 최초로 출토됐다는 점에서 최고위층 집단 묘지라고 할 수 있다.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이다. 직사각형으로 땅을 파서 바닥을 다진 뒤 길쭉하고 평평한 돌을 차곡차곡 쌓고, 한쪽에 무덤방에 드나들 길을 만든 구조다.

 

 

감일동 고분군 조성 시기는 백제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이후와 겹친다. 학계가 이 고분군을 "상상도 못 한 유적" 혹은 "복권 당첨"이라고 표현하며 한성도읍기 백제사 비밀을 풀 열쇠로 보는 이유는 한 곳에서 50기에 달하는 한성시대 석실분이 나온 적이 없고, 이 시기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횡혈식 석실분은 모두 70여 기로 알려졌다. 경기도에서는 성남 판교 유적에서 약 10기가 나왔고, 감일동 고분군에서 동쪽으로 2㎞ 남짓 떨어진 하남 광암동 고분군과 화성 마하리 고분군에서 한두 기가 확인됐다. 그런 희소성이 두드러진 석실분이 50기나 한꺼번에 발견됐으니 흥분할 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따르면 한성도읍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방이동·가락동 일대 고분은 대략 300기에 달했으나, 급격한 도시 개발로 대부분 조사도 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감일동 고분군은 풍납토성과 4㎞, 몽촌토성이나 방이동 고분군에서는 약 3㎞ 떨어져 있다. 백제가 초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축조 주체가 백제인지 신라인지 논란이 많은 하남 이성산성은 3㎞ 거리에 있다. 사비도읍기 백제 왕성 자리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능산리 고분군 사이 거리가 대략 3㎞다.

 

 

 

감일동 고분군과 다른 유적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 붉은색 화살표가 감일동 고분군이다. [고려문화재연구소 제공]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고고학 연구자들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동쪽 강동구 둔촌동과 하남 능선에 백제 석실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감일동 고분군 같은 유적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감일동 고분군은 상태가 매우 양호한 데다 백제 유물밖에 나오지 않았고 100년 안팎 기간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는 점에서 순수성이 있다"며 "무덤을 조성한 시기와 나라에 대한 논란이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왕성과 가까운 곳에서 대규모 고분군이 나왔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크다"며 "문헌 사료가 부족한 한성도읍기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감일동 고분군은 백제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만들었는지에 관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방이동 고분군 성격을 구명하는 기준점 역할도 할 것으로 보인다.

 

 

신 교수는 "감일동에 있는 무덤은 향후 한성도읍기 백제 석실분의 전형이자 잣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 관장은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과 달리 하남은 오랫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제한된 탓에 석실분이 잘 보존됐다"며 "논쟁거리인 백제 석실분 봉분 형태가 원형인지, 직사각형인지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180422060106119 연합뉴스. 2018. 4. 22.)

 

 

 

 

 

이 유물은 2016년부터 현재까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해온 하남시 감일, 감이동 일대의 공공주택조성터의 백제 고분군에서 출토됐습니다. 조사 구역은 2016년 연말 이래로 4~5세기 한성백제 시대 귀족층 무덤인 구덩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52기가 역대 최대규모로 발견되면서 고고학계의 시선이 집중됐던 곳입니다.

 

 

 

호랑이 머리장식이 물을 따르는 주구에 달린 4~5세기의 청자호수호. 하남 감일동 백제 고분군에서 국내 처음 출토된 동진시대의 중국 도자기다.

호랑이 머리상이 달린 1600여년전 중국제 청자항아리(청자호수호)가 경기도 하남 백제 고분군에서 국내 최초로 나왔다.

 

 

 

 

다른 쪽에서 바라본 하남 고분군 출토 청자 호수호의 모습.

 

 

 

청자호수호는 잔존높이 21cm, 최대 직경 22cm의 크기이며, 4~5세기 중국 남북조시대 동진에서 만든 것으로 보고있다. 국내 고대 유적에서는 처음 확인되는 당대의 최고급 도자기로, 고분군과 다른 출토 유물들의 연대를 가늠하는 기준 유물로 평가된다.

 

 

청자호수호는 물을 담는 용도로 추정되는 병모양 항아리다. 물을 따르는 부위(주구)를 작은 호랑이 머리상으로 빚어 장식한 것이 눈길을 끈다. 발굴된 무덤에서는 비슷한 모양의 청자항아리 주구에 닭머리를 놓은 계수호(잔존높이 24cm, 최대직경 25cm)도 함께 발견됐다.

 

 

계수호의 경우 공주 수촌리 등 충청권 백제고분군에서 흑색유약을 입힌 항아리(흑유호) 형식으로 간간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감일동 고분군처럼 청자로 된 호수호와 계수호가 출토된 것은 전례가 없다.

 

 

물과 술 등을 담는 도자용기 표면에 동물상을 장식하는 것은 중국 후한대와 남북조시대 길상적 사고가 반영된 특유의 조형적 스타일로 꼽힌다.

 

 

한성백제와 교류가 활발했던 4~5세기 남북조 시대의 이런 동물상 장식 청자는 백제 왕실, 귀족한테 각광받은 수입품으로 백제무덤 등에서 종종 부장품으로 나오곤 한다. 제작시기가 특정되어 있어 학계에서는 유적들의 시기를 가늠하는 잣대 구실을 해왔다.

 

 

 

한성백제기 서울, 경기권 일대 유적에서는 처음 확인된 누금기법의 금제구슬.

 

 

한편 이 고분군에서는 그동안 신라 고분에서 주로 나왔던 누금기법(금알갱이를 붙이는 장식공예술)으로 꾸민 고급 금제구슬 1점도 함께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누금기법으로 장식한 이 금제구슬은 크기가 매우 작은 초소형으로 서울, 경기지역 한성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처음 확인되는 희귀유물이다. 위 아래 반구를 맞붙인 뒤 미세한 금알갱이를 정교하게 붙여 장식했다.

 

누금기법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고도의 공예술로 꼽힌다. 그동안 신라권 고분의 부장품에서 주로 나타났던 유물이어서 한성백제시대 공예문화의 국제성을 새롭게 엿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출처; https://v.daum.net/v/20180715183605251 한겨레. 2018. 7. 15.)

 

 

 

 

 

【하남=뉴시스】 문영일 기자 = 1일 하남시와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기도 하남시 감일공공주택개발지구에서 발견된 백제의 최고위층 석실묘 50여 기를 중심으로 역사공원과 전시관으로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2019.04.01. (사진=뉴시스DB)photo@newsis.com

(출처; https://v.daum.net/v/20190401102645692 뉴시스. 2019. 4. 1.)

 

 

 

 

 

2022년 1월 올림픽 콤플렉스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잠실 신천동 진주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 68기, 구덩이 363기, 도랑 34기, 도로 1기 등 총 472기를 발굴했습니다.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1600년전 한성백제판 도심재개발 및 재건축의 증거들. 다양한 주거지와 창고 등으로 쓰인 각종 구덩이, 도로 등이 중첩되어 출토됐다. 이와 같은 한성백제판 도심재개발·재건축의 증거들은 기존에 서있던 아파트 건물들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1600년전 한성백제인들이 살았던 바로 그곳에서 요즘 사람들도 거주하고 있다는 단적인 예다. |서길덕 도원문화재연구원장 제공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대대적인 침공에 백제 수도 한성이 함락된다.

 

 

개로왕(455~475)은 아들(문주·475~477)에게 “반드시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라”는 유언을 남긴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기원전 18~기원후 475)는 그렇게 종막을 고한다.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 주거지와 주거지, 주거지와 구덩이 등이 중첩되어 있다.|도원문화재연구원 제공

 

 

 

비운의 왕국이어서 그런가. ‘패배자’라는 낙인 속에 1500년 이상 꽁꽁 묻혀있던 한성백제의 역사는 그야말로 우연히, 극적으로 발견된다. 1996년 말 풍납동 현대 아파트 터파기 공사장에 잠입한 이형구 교수(당시 선문대)가 무수히 박힌 한성백제 문화층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이 이후 발굴조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이다.

 

 

그렇게 발견된 ‘풍납토성=한성백제 왕성’이라는 데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한다. 축조시기를 두고 아직 논쟁 중이지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관계는 어느 정도 정리된 듯 하다.

 

 

<삼국사기> ‘개로왕’조의 “고구려군이 ‘북성(北城)’을 7일 만에 빼앗고 (개로왕이 몸을 피한) ‘남성(南城)’을 공격해서…”라는 표현에 착안한 것이다. ‘북성=풍납토성’, ‘남성=몽촌토성’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보존상태가 완벽한 21호와 22호 주거지. 넓이가 대략 68평(21호·23.08m×9.76m)과 62평(22호·18.55m×11m) 정도였다. 21호는 가장 넓은 주거지라는 점에서, 22호는 바닥면 다진 흔적과 부뚜막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로 꼽힌다.

 

 

 

■백제 귀족들의 공동묘지 출현

여기서 20년 이상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한성백제 시대의 도성은 왕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한정된 개념이었을까.

왕성의 밖에는 한성백제 시대의 유적 유구가 과연 없는 것인가. 지금은 석촌동·방이동·가락동 고분군 등 일부만 노출됐지만 일제강점기까지 300기가 넘는 고분이 존재했다고 하지 않던가. 두 왕성의 밖에서도 분명 한성백제인들이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풍납토성 발견 이후 지금까지는 토성의 내부 발굴에만 주로 신경을 썼을 뿐이었다. 왕성 내부의 발굴·보존에도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난항을 겪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지하철 및 아파트 공사 등 각종 대규모 개발이 이뤄지는 왕성 밖까지 눈길을 돌릴 여유가 있었을까. 바로 이런 변명 때문에 왕성 밖의 한성백제는 도시개발의 소용돌이 속에 간과됐다.

 

 

 

주거지 3~4채가 재개발 재건축 등으로 중첩 조성된 한성백제 시대 도시 흔적이 나타난 잠실 진주 아파트 재건축 부지.|도원문화재연구원 제공

 

 

 

그러던 2016년이었다. 풍납토성과 4㎞ 정도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택지개발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한성백제 시대의 유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릉지역(해발 40~50m)이었고, 고려시대 청동인장이 수습되었으며, 조선시대 민묘가 다수 존재했기에 사전 발굴조사는 불가피했다.

 

 

 

그런데 막상 조사에 들어가자 깜짝 놀랄만한 반전의 상황이 연출됐다. 한성백제 시대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줄줄이 엮여나왔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굴식돌방무덤은 52기에 달했다. 현재까지 조사된 한성백제 시기의 굴식돌방무덤이 100기 정도인데, 그것의 반이 넘는 대규모 고분이 감일동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확인되는 한성백제 시대 재건축·재개발의 흔적.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재위 무렵인 4세기 중반부터 한성백제의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는 5세기말(475년)까지 백제 도성이 급격하게 팽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자료이다.|도원문화재연구원 제공

 

 

 

■백제 왕후 세력인 진씨 가문의 무덤?

출토된 중국계 청자(‘호랑이 머리 장식 항아리’ 및 ‘닭머리 장식 항아리’)의 연대를 가늠한 결과 4세기 중반~5세기 사이로 추정됐다.

 

 

‘닭머리 장식 항아리’는 중국 동진 후기(396~421)로 파악되지만, ‘호랑이 머리 장식 항아리’는 동진 중기(약 341~395년)로 편년된다.

 

 

일부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엉덩이뼈)과 나무관재의 연대 측정결과 ‘4세기 중반 정도’로 판정됐다.

따라서 감일동 고분군은 안정적으로 4세기 중반~5세기 사이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석촌동 고분군이 한성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왕릉)이라면 그보다 동쪽 외곽으로 4.5㎞ 떨어진 감일동 고분군은 그 시대를 귀족의 묘지로 판단했다. 그 고분에 묻혔을 귀족은 누구였을까.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확인된 1600년전 한성백제 시대의 주택들. 기존 아파트 사이사이의 지표 아래서 기적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도원문화재연구원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에 등장하는 ‘진정(眞淨·생몰년 미상)’이 우선 떠오른다. 진정은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로 한성백제 시대에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347년 진씨 가문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왕후의 친척인 진정을 조정좌평(법무부장관)으로 기용했다. <삼국사기>는 “왕후의 친척인 진정은…제 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 사람들이 미워했다”고 악평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 시대에 가장 유력한 외척세력이었던 진씨 가문의 무덤이 감일동 고분군 중에 존재하지 않을까.

땅 속에 꽁꽁 숨어있던 한성백제의 역사는 또한번 택지개발, 즉 아파트 공사 과정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방이동 올림픽콤플렉스 부지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들. 역시 여러 주거지와 창고 등의 구덩이, 도로 유구가 2중3중으로 중첩된채 확인됐다. |경상문화재연구원 제공

 

 

 

■한성백제판 재개발·재건축

그것은 말 그대로 ‘또한번의 시작’에 불과했다. 2019년부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외곽에서 벌어진 각종 공사현장에서 심상치않은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왕성(풍납토성·몽촌토성) 외부에 한성백제 주민들이 살았던 흔적이었다.

 

 

첫 테이프는 2019년 풍납토성에서 북동쪽 90m 떨어진 ‘천호역 역세권 청년주택 사업부지 공사현장’이 끊었다. 노출된 유구와 유물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주거지 6기와, 다양한 용도의 구덩이 10기, 도로유구 1기 등이 확인됐다. 그러나 유구의 양상이 심상치 않았다. 1차로 주거지와 구덩이 등이 조성된 위에 2차로 다시 주거지와 구덩이 등의 유구가 만들어졌다.

 

 

2개의 문화층이 중첩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리에 있던 주거지와 구덩이 위에 재개발, 혹은 재건축 건물 등을 올렸다는 얘기다. 또 풍납토성과 연결되는 도로(폭 160㎝, 길이 22m)의 흔적이 보였다. 도로에서는 수레바퀴 및 사람의 발자국 흔적도 나타났다. 이 취락이 4세기 중반부터 100년 정도 존속한 것으로 추정됐다.

 

 

 

방이동 서울올림픽콤플렉스 부지에서 확인된 중첩 주거지들. 요즘처럼 재건축 및 재개발을 통해 한정된 공간을 계속 사용한 흔적이다.|경상문화재연구원 제공

 

 

 

 

2021년 풍납토성 동성벽 외곽에서 벌어진 풍납동 복합청사 신축공사장에서도 심상치않은 유구가 터져나왔다.

18평(880㎝×664㎝) 규모의 주거지와 함께 구덩이, 경작·도로·도랑 등 91기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이번에는 3개의 생활면이 중복 노출됐다. 한번 조성된 주거지와 구덩이 등의 생활공간 위에 재차, 3차에 걸쳐 각종 건물이나 시설물을 올린 것이다. 또 창고 등의 용도로 쓰인 대형 구덩이(잔존 810㎝×364㎝)의 경우 조성-폐기-조성-폐기 등 시차를 두고 다양한 공간이 여러 차례 중복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역시 여러차례 재개발 및 재건축이 이뤄졌던 흔적이었다.

 

 

 

 

서울올림픽 콤플렉스에서 확인된 부뚜막과 고래의 흔적.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도 비슷한 시설물이 보인다.|경상문화재연구원 제공

 

 

 

■68평 건물 위에 23평, 21평 건물이…

2020년부터 방이동 서울 올림픽 스포츠 콤플렉스 조성사업 부지에서는 더 극적인 유구가 나타났다.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가 38동이 확인되었고, 다양한 용도의 구덩이 231기, 도랑 모양의 유구 38기, 도로 유구 1기 등이 노출됐다. 화재로 폭삭 내려앉은 건물 2동도 보였다.

 

 

어떤 주거지에서 화덕자리와 부뚜막이 보였고, 고래(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나가는 길)가 확인됐다. 역시 사각형·오각형·육각형 주거지와 구덩이가 촘촘하게 조성되어 있었고, 일부는 2중, 3중 중첩되어 있었다.

 

 

 

 

 

풍납토성 발굴 이후 토성 내부의 조사에만 매달렸다. 성 외곽에서 한성백제 취락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9년부터 토성 외부인 풍납동 외곽에서 한성백제 시대 도시 유적이 속속 발굴됐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하이라이트는 이 올림픽 콤플렉스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잠실 신천동 진주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연출됐다.

 

 

이곳은 저습지에 자리잡은 입지였던 데다, 설령 유적이 존재했다 해도 기존의 아파트 단지 때문에 훼손 가능성이 많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올해(2022년) 1월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존 아파트 건물 사이 사이의 땅 밑에서 기적적으로 한성백제 시대 마을 유적이 보이지 시작했다. 기존 아파트 건물을 아슬아슬 피해 드러난 한성백제 시대 유구는 주거지 68기, 구덩이 363기, 도랑 34기, 도로 1기 등 총 472기에 달했다.

 

 

 

 

2019년 풍납토성 외곽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시대 중첩 유구.|비전문화재연구원 제공

 

 

 

이 중 보존상태가 완벽한 21호와 22호 주거지는 넓이가 대략 68평(21호·23.08m×9.76m)과 62평(22호·18.55m×11m) 정도였다. 21호는 가장 넓은 주거지라는 점에서, 22호는 바닥면을 다진 흔적과 부뚜막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로 꼽힌다. 주거지 뿐 아니라 창고 혹은 폐기물 공간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 구덩이 또한 363기가 확인됐다.

 

 

또 최대폭 8m 가량의 도로가 98m 정도 뚫려있었다. 백제시대 수레바퀴 자국과, 근현대의 운송수단인 경운기 및 트럭 바퀴자국이 같은 방향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 유적 역시 주거지와 주거지, 주거지와 구덩이, 구덩이와 구덩이, 주거지와 도로 등이 여러차례 중첩되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가장 규모가 크다는 68평 주거지(21호) 위에 재차 23평(10.4m×7.36m) 짜리 건물이 들어섰고, 다시 그 위에 31평(12.3m×7.54m)짜리 건물이 조성됐다. 2차례의 재개발·재건축이 이뤄진 것이다. 어떤 주거지는 무려 4번이나 재개발·재건축된 사례도 보였다.

 

 

 

풍납토성에서 4㎞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에서 한성백제 시대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줄줄이 엮여나왔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굴식돌방무덤은 52기에 달했다. 감일동 고분군은 한성백제 귀족들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황제국을 자처한 근초고왕의 위용

비단 천호동(청년주택)-풍납동(복합청사)-방이동(올림픽 콤플렉스)-신천동(잠실 진주아파트) 뿐이 아니다.

현재 공사 중인 방이2동 청사와 방이동 48번지와 그 주변 등에서도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가 계속 확인 되고 있다.

 

 

이와같은 유적들의 연대는 안정적으로 보면 4세기 중반~5세기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백제의 최전성기라는 근초고왕 재위(346~375) 시절과 중첩된다.

 

 

근초고왕이 누구인가. 369년(근초고왕 24) 고국원왕(331~371)이 이끄는 고구려 침략군을 무찌른 뒤 한강 남쪽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벌인 바 있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군대 사열 때 황색깃발을 사용했다”고 했다. 황제의 색깔로 통하는 황색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백제=황제국’임을 뽐낸 것이다.

 

 

 

 

감일동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계 청자. 중국 동진 시대의 청자로 보인다. ‘호랑이 머리 장식 항아리’는 4세기 중반~후반, ‘닭머리 장식 항아리’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려문화재연구원·하남역사박물관 제공

 

 

 

2년 뒤(371년)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의 반격을 패하(예성강 지류)에서 막아낸 뒤 내친 김에 평양 정벌에 나선다.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당시 백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당대 중국 사서의 ‘백제의 요서 경략’ 기사가 웅변해주고 있다.

<송서>와 <양직공도>, <양서> 등은 “고구려가 요동을,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믿지 않은 이들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에게 올린 편지를 보라.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 남으로는 (백제가)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고구려가)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굳이 ‘요서경략’ 논쟁을 제기할 필요는 없겠다.

 

 

 

감일동 고분에서 출토된 부뚜막형 모형토기. 죽은 이가 황천에서도 좋은 음식을 취하기를 바라는 한편, 저승에서 취사와 식사가 행해져 이승과의 인연이 단절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다만 근초고왕 시절의 한성백제가 삼국 가운데 첫번째로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어떤 연구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정벌을 마친 뒤(371년) “도읍을 한산 옮겼다(移都漢山)”는 <삼국사기> 기록에 주목한다.

 

즉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몽촌토성 발굴에서 4세기 중반 이전의 유구·유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도한산(移都漢山)=몽촌토성 축조’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외곽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사이 중첩되어 조성된 마을(취락) 유적과 감일동 고분군 등의 출현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최전성기를 이룬 백제의 도성(한성)에 엄청난 인구가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대단위 도시개발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지금도 서울 시민들이 금싸라기 땅에 살면서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요즘 잇달아 발견되고 있는 유적은 가히 ‘한성백제판 도심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증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외곽에서 한성백제인들의 취락유적이 잇달아 확인되고 감일동 고분군까지 발견되면서 한성백제 시대의 도성인 ‘한성’의 공간개념이 재정립되고 있다. 왕성 밖 주민들의 생활 및 생산·물류 공간, 그리고 석촌동(왕과 왕족) 및 감일동(귀족 등 지배층) 고분 같은 묘역까지 도성의 범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허의행 수원대 학술연구 교수 제공

 

 

 

■왕성 밖 한성백제인의 삶은?

최근에는 그간의 발굴성과와 고지형 분석 등을 토대로 1600~1700년 전 한성백제의 도성(한성) 경관을 복원하는 작업을 펼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왕성(풍납토성·몽촌토성)은 도성이라는 틀 속의 중심 구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왕성 밖은 어떨까.

 

이제는 왕성 밖 주민들의 생활 및 생산·물류 공간, 그리고 석촌동(왕과 왕족) 및 감일동(귀족) 고분 같은 묘역까지 도성의 범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풍납토성 발견 이후 토성 내에서만 맴돌던 한성백제의 개념이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넓혀지고 있다. 지금 왕성 외곽에서 속속 발견되는 1600~1700년전 도시, 즉 한성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한성백제인들이 살았던 바로 그 공간 위에서 현대인들이 터전을 잡고 살고 있다는 예가 아닌가.(이 기사를 위해 권오영 서울대·김낙중 전북대·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허의행 수원대 학술연구교수, 한성백제박물관의 정치영·박중균·최진석·이혁희·이홍주 선생, 김아관 고려문화재연구원장, 도원문화재연구원·경상문화재연구원·비전문화재연구원, 김진성 하남역사박물관 학예실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허의행·박중균·이혁희·이홍주·지민주·김범철·서길덕 외, <백제왕도 한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개관 10주년 특별전시 연계 학술대회 발표집), 한성백제박물관, 2022년 10월28일

고려문화재연구원, <하남감일동 유적Ⅰ-총론>(학술조사보고서 92집), 2022

고려문화재연구원, <하남감일동 유적 Ⅲ-백제고분군 사진>(학술조사보고서 94집), 2022

하남 역사박물관, <교류와 융합의 타임캡슐-감일 백제 석실분>(특별전 도록), 2021

(출처; https://v.daum.net/v/20221115050006657 경향신문. 2022. 11. 15.)

 

 

 

 

 

<자료출처>

 

 

 

하남 감일동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 연합뉴스 (yna.co.kr)2018-04-22 

 

 

https://v.daum.net/v/20180422060106119 연합뉴스. 2018. 4. 22.

 

 

https://v.daum.net/v/20180715183605251 한겨레. 2018. 7. 15.

 

 

https://v.daum.net/v/20190401102645692 뉴시스. 2019. 4. 1.

 

 

https://v.daum.net/v/20221115050006657 경향신문. 2022. 11. 15.

 

 

 

 

<참고자료>

 

 

 

한성 백제시대 거대 고분 발견|동아일보 (donga.com)2007-11-10 

 

 

 

한성 백제시대 대형 주거지 발굴 (daum.net)2016. 12. 1. 

 

 

 

파주 운정지구서 백제 초기 토기가마 단지 발견 | 연합뉴스 (yna.co.kr)2016-08-03

 

 

 

청주 신봉동 고분군서 석곽묘 3기 첫 발굴 (daum.net)2013.12.24.

 

 

 

 

 

충주에서 4세기 백제 철 생산했다 (hankookilbo.com) 2016.06.01 

 

 

 


예산군, 예산산성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유적 발견 (daum.net)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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