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3일 발굴팀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백제 금동관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동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덧널무덤인 1호분 내부를 十자형으로 팠는데 바닥에서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함께 나왔습니다.
공주 수촌리고분에서는 현존 最古 백제 금동관,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여성 시신에 걸치는 구슬 장식, 굵은고리 금귀고리, 대롱옥, 흑유닭모양항아리 등이 나왔습니다.
수촌리 4호 석실분 출토 금동관으로 높이는 19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한 마리 ‘금빛 봉황’을 보았다. 6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본 수촌리 고분 출토 금동관은 신라 금관과 또 다른 아취를 담고 있었다. 온몸에 달개를 매단 세 줄기 입식(立飾)은 정면에서 보면 꼿꼿이 세운 봉황 머리와 양옆으로 활짝 편 날개를 연상시켰다.
나뭇가지를 닮은 신라 금관의 입식과 확연히 다른 형태다. 특히 머리에 닿는 관테까지 날렵하게 이어진 곡선은 우아함을 더한다. 수촌리 고분에서 함께 나온 금동신발과 금귀고리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삼국시대 장신구 연구 권위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수촌리 금귀고리는 현미경으로 200배를 확대해 봐도 만듦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며 “백제 왕실에 소속된 최고 장인의 솜씨”라고 말했다.
그러나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수촌리는 백제 영토였지만 중앙과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이 1급 유물들이 왜 한성이 아닌 이곳에 묻혀 있을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2003∼2013년 수촌리를 발굴한 이훈 당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단장(55·현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현장을 찾았다.
○ 묘제(墓制) 세 번이나 바뀐 사연
충남 공주시 수촌리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자 정상에 봉분 6기가 원형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래로도 고분 10여 기가 늘어서 있는데 절벽 끄트머리에 제단(祭壇)을 이루는 돌무더기가 깔려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중 나란히 조성된 무덤 세 쌍은 부부 관계임이 확인됐다.
수촌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구슬과 대롱옥. 구슬 지름은 0.2-1.05cm 정도 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한쪽 무덤에서 남성 수장이 죽을 때 몸에 씌우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이 나온 반면
다른 쪽에서는 여성 시신에 걸치는 구슬 장식, 굵은고리 금귀고리 등이 나온 것.
이훈은 “수촌리는 4세기 말∼5세기 중엽까지 약 60년에 걸쳐 4세대가 묻힌 지방 지배층의 가족묘”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건 무덤들이 조성된 양식이 빠르게 변한 흔적이다. 시대순에 따라 덧널무덤(토광목곽묘)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모두 발견됐다. 유물로 보면 분명 같은 집단인데 불과 60년 동안 묘제가 세 번이나 바뀐 셈이다.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진 흑유닭모양항아리. 당시로선 최고급품에 속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훈은 “수촌리 지배집단이 백제 중앙과 교류하면서 돌무덤을 들여온 것”이라며 “최고 수준의 금동관, 금동신발, 중국 자기들이 부장된 걸 보면 이들이 백제 왕실과 돈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배경일 수도 있다.학계는 4∼5세기 백제 왕실이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지배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에게 금동관 등을 사여한 걸로 보고 있다.
이훈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6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수촌리 고분 금동관을 살펴보고 있다. 뒤쪽 금동관이 이 연구위원이 4호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앞쪽은 원형을 복원한 복제품이다. 공주=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1600년간 제자리 지킨 목관 꺾쇠·관못
수촌리 1호분 토광묘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높이는 약 18.7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2003년 11월 3일 발굴팀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백제 금동관을 발견했다.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동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덧널무덤인 1호분 내부를 十자형으로 팠는데 바닥에서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함께 나왔다.
이훈은 직접 만든 대나무칼로 푸르스름한 청동녹이 낀 금동관을 조금씩 땅 위에 노출시켰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바깥 공기에 취약한 청동유물 특성상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흙과 함께 통째로 수습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길이 35cm의 재갈.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말을 탈 때 쓰는 등자로 길이 25.0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쇠창으로 길이는 29.2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도 화려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더 중요했던 건 조성 당시 위치를 간직한 목관 꺾쇠와 관못이었다. 발굴팀은 3열에 걸쳐 목관을 두른 총 90여 개의 꺾쇠를 지표 20cm 아래서 찾아냈다. 통상 오랜 세월이 흘러 목관이 썩으면 물이 흘러들어가 꺾쇠나 관못의 위치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1호분은 물 대신 모래흙이 목관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부속품이 고정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발굴팀은 백제 지방 지배층이 사용한 목관의 형태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 내세에도 다시 만나리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첫번째 사진), 금동관(두번쨰 사진)과 대롱옥. 부부가 묻힌 4호분과 5호분에 각각 부장된 대롱옥을 맞춰보니 아귀가 딱 맞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야, 이게 정말로 딱 붙습니다!”
2004년 7월 발굴팀에서 사진을 담당한 이형주 연구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갑자기 외쳤다. 수촌리 고분 출토 유물들을 늘어놓고 촬영하던 이형주가 4호분과 5호분에서 각각 나온 대롱옥(관옥) 2점을 우연히 맞춰봤는데 거짓말처럼 아귀가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대롱옥을 두 개로 부러뜨린 뒤 남편과 아내 무덤에 각각 부장한 것이었다. 생전에 금실 좋던 부부가 내세에 가서도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쪼갠 게 아닐까.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떠올리는 역사의 내러티브는 때론 소설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2005년 4월 13일 수촌리 고분 출토품을 보존처리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3호분 금동신발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X-레이 촬영을 통해 금동신발(길이 30.5cm, 폭 12.8cm) 안에 인골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백제 고분 발굴성과로 기록된 공주 수촌리 고분군 중 횡구식 석곽묘인 3호분 출토 금동신발에서 인골이 확인됐다.
확인된 발뼈는 오른발과 왼발의 뼈로 발가락뼈를 제외한 발뼈(中足骨)와 뒤꿈치뼈(踵骨)가 금동신발 내부에 남아 있었다.
발가락뼈를 제외한 발뼈 길이는 19.08cm, 폭 7.05cm로, 발뼈에 대한 자세한 상태를 알기 위해 정형외과에서 방사선 촬영과 CT-촬영을 실시했다.
그 결과에 대해 "이영호 정형외과" 원장은 "오른발 발가락뼈는 잘 보이지 않으나 발뼈(中足骨과 足骨)와 뒤꿈치뼈는 선명하게 보이며, 첫 번째 중족골에 손상이 조금 있으며 칼슘 성분이 빠져 있다"면서 "왼발은 족부의 뒤꿈치뼈가 선명히 보이며 발뼈가 회전된 양상이다"는 소견을 보였다.
또 부여중앙병원 정형외과 박준용 과장은 "족부의 뼈로 우측은 뒤꿈치뼈와 발뼈가 명확하게 보이며, 퇴행성 변화(퇴행성관절염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인의 뼈이며, 40세 이상 되는 남성으로 추정된다"면서 "좌측은 뒤꿈치뼈만 명확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금동신발은 측면에 凸 무늬가 연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화여대 소장 백제 금동신발과 유사한 형태로 생각되며, 바닥면에 투조된 문양은 원주 법천리 1호분 출토 신발에서 추정되는 용 무늬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연구소는 관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탄소연대측정, DNA분석, 인골분석 등을 실시할 예정이다.
금동신발에서 인골이 확인됨으로써 이 신발이 실제 시신을 매장하면서 사자(死者)가 착용했음이 명백해졌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금동신발은 백제와 신라고분을 중심으로 여러 점이 발굴됐으나 헝겊과 같은 직물조각 정도만 확인되었을 뿐, 인골이 확인된 경우는 없었다.
3호분에서는 이 외에도 환두대도와 마구류 일종이 호등 등의 5세기 중후반 무렵 백제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2005년 10월 11일 수촌리 고분군 발굴조사단인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 의뢰로 이 유적 출토유물을 보존처리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토광목곽(土壙木槨) 구조인 수촌리 Ⅱ-1호분 출토 직물을 공개했습니다.
길이 140㎝, 김해 대성동.日 출토품과 같은 메이커
4-5세기 무렵에 축조된 공주 수촌리 고분군 출토품 중 창자루를 감싸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형 가죽 직물이 공개됐다.
이 가죽 직물은 경남 김해 대성동 14호분은 물론 1989년 발굴조사된 일본 시가현(滋賀縣) 요카시(八日市) 소재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인 유키노야마(雪野山) 고분 출토품과 같은 메이커를 방불할 만큼 똑같은 제품으로 추측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직물은 현존 길이만 140.5㎝에 이르고 있으며, 폭은 2.5-3㎝에 달한다.
언뜻 보기에 뱀이나 악어 가죽을 방불하는 이 직물은 마름모꼴 문양을 상하 좌우로 연결한 듯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검은 옻칠 흔적이 완연하다.
삼국시대 유적 출토품 중 직물류로는 기록적인 대형으로 기록된 이 가죽 직물은 날을 세 개를 만든 창의 일종의 삼지창(三枝槍), 농기구 일종으로 삽 같이 생긴 살포와 나란한 상태로 발견됐다.
발굴단 일원인 이훈 충남역사문화원 연구부장은 "언뜻 보면 삼지창이나 살포를 싼 직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쇠창 자루를 감싸고 있으며 원래 길이는 2m 정도에 달했다고 추정된다"고 말했다.
실물을 본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이것과 똑같은 직물이 대성동 13호분에서는 화살통을 감싼 채 발견되었으며, 일본 유키노야마 고분에서도 화살대를 감싸고 있었다"면서 "자세한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육안 관찰만으로도 같은 메이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유키노야마 고분 출토품은 길이 70㎝에 폭은 상단이 15㎝이며 하단이 20㎝였으며, 능형문(菱形文), 즉, 마름모꼴 문양을 박았으며 옻칠 위에 붉은색 안료를 바르고 있다. 대성동 13호분 또한 이와 거의 똑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학계에서 유키노야마 고분은 축조연대를 4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학계에서 대성동 14호분은 4세기 중후반 무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수촌리 1호분 축조연대 또한 4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이와 관련,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지난 7일 국립공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충남역사문화원 주최 '4-5세기 금강유역의 백제문화와 공주 수촌리 유적' 학술대회에서 1호분에서 출토된 청자 유개 사이호(靑瓷有蓋四耳壺. 덮개가 있고 네 귀가 달린 항아리형 청자)라는 청자가 중국에서는 4세기 중엽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음을 근거로 이 1호분 축조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금동신발과 금동관, 환두대도가 쏟아진 수촌리 2지점 1호 토광묘의 현장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 금동유물 품고 있던 백제 무덤 6기
조유전은 이훈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12월4일자로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터졌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300평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구릉 한쪽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 각광 받지 못한 청동세트
“야, 전망이 좋네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이훈씨(오른쪽)가 조유전 관장에게 말끔히 정비된 수촌리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땐 여기보다는 저쪽에서 청동검(한국형 세형동검), 청동꺾창(靑銅戈)과 청동창(靑銅矛·끝을 뾰족하게 하여 찌르는 창의 일종), 청동도끼, 청동 조각도 등 청동기 세트가 한꺼번에 먼저 출토됐잖아? 이런 청동기 세트가 한자리에 출토된 것도 획기적인데….”(조유전)
“그랬죠. 실은 우리가 이 중요한 청동기 세트를 발견하고 나서 ‘어떻게 언론에 터뜨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에 여기서 더 엄청난 대형발굴이 터진 겁니다.”(이훈)
■ 아! 금동신발, 어! 금동관
1호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금동신발.
“부장님(당시 이훈의 직책). 지금 1호 토광묘에서 이상한 것이 잡혔어요. 금동관 하고, 환두대도(둥근 고리 칼)가 나왔어요.”
“금동관?”
머리가 띵 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며칠 전 본 청동기 세트도 처음인데, 이번엔 금동관이라니. 급거 현장으로 달려간 이훈의 앞에 희미한 금동관 같은 범상치 않은 흔적과 환두대도가 보였다.
“제 기억 속에 희미하게 각인된 신라금관의 T자형 형태였어요. 이 금동관은 환두대도의 칼날 끝부분 바로 아래 놓여있었고…. 일단 흥분을 가라 앉히고 내일(4일) 다시 정밀하게 조사하자고 하고 돌아왔어요”
이훈은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낮에 보았던 1호 무덤의 장면이 파노마라처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머리에 쓰는 금동관이 환두대도의 칼 끝에 있을까. 칼이 거꾸로 놓였단 말인가. 순간 이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왜 금동관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금동신발…. 맞다. 금동신발이다.’
백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 즉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최상격의 유물이 아닌가.다음날 이훈은 이 무덤에 ‘요주의’란 딱지를 붙인 뒤 맨 마지막으로 돌려버렸다. 보통 중요한 무덤이 아니므로 철저한 계획을 세운 뒤 조사를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5기의 무덤을 먼저 조사하기로 결정내렸다. 먼저 조사하기 쉬운 석실분(3호)부터….
그러나 절대 쉬운 조사는 없었다.
“아! 여기서도 또 한 켤레의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항아리 등이 줄줄이 엮여 나오잖아요.”
조사단의 눈과 귀가 다 멎었다.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 다음엔 4호 무덤. 여기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금동고리칼, 금동허리띠 등 지역의 수장층이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필수품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색다른 유물이 걸렸다.
“살포(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와 등자, 재갈, 그리고 계수호(鷄首壺·닭머리 달린 항아리) 등 도자기들이 쏟아졌어요. 6기의 무덤 가운데 최고의 부장품을 자랑하고 있었죠. 흙 속에서 검은색 닭머리(계수호)가 삐죽 삐져 나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가장 중요한 무덤이라 여겨 뒤로 미뤘던 1호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와 비슷한 청자유개사이호(뚜껑 있는 귀 네개 달린 항아리) 등 중요 유물이 더 나왔다.
이 무슨 소린가? 안경너머로 보니 이형주 연구원이 자색 관옥 2점을 들고 있었다. 4호분과 5호분에서 한 점씩 출토된 것이었다.
그런데 출토유물을 정리하다가 유물의 형태가 비슷한 것 같아 서로 맞춰보니 딱 맞는 게 아닌가. “그래, 부부묘다”라고 외치며 뛰어온 것이었다.
“아, 부절(符節, 돌·대나무·옥 따위를 잘라 신표로 삼던 것)이다. 살아생전 부부의 도타운 정을 죽어서도 간직하고픈 것이었겠지.”(이훈)
아니면 먼저 간 사랑하는 남편(혹은 아내)의 머리맡에 옥을 부러뜨려 고이 넣고는 자식들에게 말했으리라. “나 죽으면 나머지 부러진 옥을 내 머리맡에 놓아주거라”라고…. 죽은 뒤 하늘에서 만나 맞춰보려면…. 결국 4~5호분도 애틋한 부부의 정을 담고 있는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아버지의 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고고학의 묘미다. 바로 묘제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수촌리 유적은 한 집안의 무덤들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일정한 시차를 둔 다양한 묘제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틱해. 하나의 고분군에서 이렇게 시기별로 나타난 것은 드물지.”(조 관장)
중요한 것은 흙무덤과 돌무덤의 차이.
충청도나 전라도의 토착세력들, 즉 마한사람들은 흙무덤(토광묘·土鑛墓)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성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키면서 점차 돌무덤이 전파되었다. 돌무덤은 발해연안에서 선진문물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후예, 즉 백제인이 BC 18년 남하하면서 가져온 고급 묘제이다.
그런데 이 수촌리 1~2호분의 주인공은 마한의 전통이 남은 토광목곽묘를 썼다.
반면 3호분은 백제 묘제인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앞트기식 돌방무덤),
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이다.
토광목곽묘는 위에서 구덩이를 판 뒤 목곽을 짜맞춰 놓고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묘제인데,
1~2호분은 목곽 안에 목관을 조성했다.
3호묘인 횡구식석곽묘는 돌방무덤을 만든 뒤 앞에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했다.
4~5호묘인 횡혈식석실분은 무덤 앞에 안팎으로 통하는 무덤길(연도)을 만든 뒤 무덤방, 즉 돌방무덤을 조성했다.
■ 수촌리 가문
“고대 묘제는 토광목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실분의 순서로 발전합니다.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지체높은 분들이었으니까 첨단 묘제를 쓰기 시작했겠죠.”(이훈)
1~2호(토광목곽묘)는 AD 380~390년,
3호(횡구식석곽묘)는 AD 400~410년,
4~5호(횡혈식석실분)는 AD 420~440년으로 추정된다.
즉, 5세기 중반에 살았던 수촌리 어떤 가문의 증조 할아버지 부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한상교수는 2003년에 발굴된 공주 수촌리고분군에서는 백제왕릉 출토품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품격을 지닌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고, 이 유물들은 한성기 백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간 학계에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웅진(현 공주) 천도의 배경을 밝히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됐다고 보았습니다.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군 1호분과 4호분에서 각각 출토된 금동관.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백제 금동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깔 모양에 용무늬와 불꽃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서울은 수백 년간 백제의 왕도였지만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백제 유적 다수가 사라졌다. 지금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일부만 남아 있다. 그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실시했지만 최고급 물품의 출토 사례는 극히 적다. 다만 백제왕이 지방 유력자들에게 준 물품들이 여러 유적에서 간간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 건국 초기인 한성기 백제 문화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 농공단지 만들려다 발견한 유적
수촌리 4호분과 5호분에서 출토된 유리제 대롱옥. 불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대롱옥의 일부가 남성 무덤인 4호분에서 먼저 발견됐고, 이어 여성 무덤인 5호분에서 나머지 조각이 발견됐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부인이 자신의 애장품을 잘라 일부를 묻어준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유적은 때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우연히 발견되곤 한다. 무령왕릉이 그러했듯 공주 수촌리고분군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고분군이 위치한 충남 공주 의당면은 공주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정안천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논이 있고 야트막한 능선마다 밤나무가 심어진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2000년대 초반 공주시는 의당면 수촌리 일대에 농공단지를 만들기로 하고 공사 대상 부지에 유적이 분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조사를 맡겼다. 공주시나 발굴기관 모두 공사 대상 부지에 중요 유적이 분포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지표상에서 토기 조각이 약간 수습됐지만 봉분 흔적 등 중요 유적 분포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3년 발굴에 착수한 다음 조사원들이 일부 구역의 표토를 제거하자 백제 목곽묘와 석실묘가 군집돼 있음이 드러났다. 특히 ‘Ⅱ구역’이라 명명한 곳에서는 무덤 5기가 둥근 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 백제왕이 준 신임의 징표
4호분의 금동관 역시 비슷한 무늬가 표현돼 있지만 무늬가 덜 정교하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덤 5기에 차례로 번호를 매긴 다음 1호분부터 파고 들어갔다. 1호분은 장방형 구덩이 안에 목곽을 시설한 무덤이며 5세기 초 축조된 것이다. 무덤 내부에 매몰된 흙을 제거하자 가장자리 쪽에서 마구(馬具), 무기 등 철기와 함께 중국 동진에서 들여온 청자가 출토됐다. 이어 무덤 주인공의 유해 부위에서 화려한 금동관이 드러났다.
금동관 외형은 고깔 모양이고 불꽃무늬와 용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된 명품이었다. 서울에서 출토됐다면 백제 왕관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했다. 금동관 주변을 노출하니 금 귀걸이 한 쌍이 있었고 조금 아래쪽에서 짐승 머리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 용무늬가 상감기법으로 표현된 장식대도가 차례로 발견됐다. 무덤 주인공 발치에는 금동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는데 발굴 후 엑스선 촬영 결과 발 뼈가 들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발굴된 4호분은 1호분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석실묘로 1호분에 버금가는 화려한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에도 불꽃무늬와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수촌리고분군 발굴이 기폭제가 됐는지, 그 이후 백제 지방이었던 경기 화성, 충남 서산, 전북 고창, 전남 나주, 고흥에서 5세기 백제의 화려한 황금 유물이 연이어 발굴됐다. 이 유물들은 고구려나 신라의 것과 다른 백제만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 백제왕의 사여품(賜與品)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아마도 당시 백제왕이 지방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현지 세력들을 활용했고 그들에게 신임의 징표로 왕과 그 일족들이 전유했던 귀중품 일부를 나누어준 것 같다.
○ 1500년 만에 짝 찾은 대롱옥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장식.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4호분 발굴이 끝나갈 무렵 짙은 갈색조의 대롱옥(구멍 뚫은 짧은 대롱 모양 구슬) 1점이 수습됐다. 잘 만들어졌지만 한쪽 끝이 파손된 모습이었다. 조사원들은 혹시나 남은 파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의문이 남았으나 4호분 발굴은 그대로 종료됐다.
이어 5호분 내부에 대한 세밀한 발굴이 시작됐다. 5호분은 4호분에 버금가는 규모의 석실분이었지만 화려한 황금 장식이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된 토기로 보아 4호분보다 조금 늦은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 바닥에도 4호분과 마찬가지로 짙은 갈색 대롱옥 한 점이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수습해 세척하니 이 역시 한쪽 끝이 파손된 모습이었다.
조사원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 이미 수습한 4호분 대롱옥과 파손 부위를 맞추어 봤다. 예상대로 한 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이빨이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절반으로 잘려 두 무덤에 각기 묻힌 것이다. 남성 무덤인 4호분이 먼저 축조되고 여성 무덤인 5호분이 나중에 축조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부인이 자신의 애장품을 반으로 잘라 남편 무덤에 묻어준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저세상에서도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징표, 즉 재회의 부절(符節)은 아니었을까.
수촌리고분군은 발굴 후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공주시는 농공단지 신축 계획을 포기했다.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이 최근까지 이어져 무덤 수십 기가 추가로 조사됐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동관을 비롯해 화려한 장신구들은 한성기 백제의 공예 기술이나 복식 제도를 밝히는 데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더해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475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수촌리고분군에 묻힌 인물들처럼 가장 믿을 수 있는 세력이 그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와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아직 모든 것이 온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수촌리고분군이 이와 같은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이 됐으며 백제사 속 여백을 메우려는 학자들에게는 어두운 하늘 ‘한 줄기 빛’처럼 새로운 희망을 던져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