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백제 고고학 (11) 고창 봉덕리 고분군 본문
원광대 마한ㆍ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는 2009년 6월부터 4개월간 봉덕리 고분군 중 1호분 발굴조사한 결과
이 무덤은 봉분 하나에 석실분 5기, 옹관묘 2기를 갖춘, 5세기 무렵 이른바 '벌집형 고분'으로 드러났다고 말했습니다.
이 중 4호 석실분에서는 금동신발과 중국제 청자 등을 비롯해
금동제 신발은 목 부분과 측판 2매, 바닥으로 이뤄졌으며, 이들은 각각 작은 못을 박아 결합했고, 측판과 바닥은 맞새김(투조. 透彫)으로 장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북 고창군 봉덕리에 소재한 백제시대 분구묘(墳丘墓.봉분을 갖춘 무덤)에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금동 신발 1켤레가 출토됐다.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의 징 18개를 붙였고 부착지점은 꽃무늬로 장식했다.
특히 바닥 중앙에는 용 1마리가 있으며, 발뒤꿈치 부분에는 고구려 장천1호분 고분벽화나 무령왕릉 허리띠 장식에 보이는 역사상(力士像)이 투조로 장식됐다.
여백의 공간에는 봉황이나 그 밖의 길상조(吉祥鳥)가 새겨졌다.
신발은 발치 쪽에서 약간 비스듬히 뉘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이중 우측 신발 내부에는 뼈가 남아있었고 좌측신발에선 직물류 흔적이 발견됐다.
최완규 마한ㆍ백제문화연구소장은 "이번에 나온 금동제 신발은 국내에서 출토된 것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이전까지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14켤레 정도가 알려졌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 3켤레, 익산 입점리 1켤레, 나주 신촌리 고분과 복암리 고분 각 1켤레, 고흥 길두리 고분 1켤레, 서산 부장리 고분 1켤레, 공주 무령왕릉 2켤레, 원주 법천리 1ㆍ4호 각각 1켤레는 출토품이며, 이 외에도 이화여대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에 1켤레씩 소장돼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나아가 작은 항아리형 토기를 장식하고, 몸통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으며, 아가리가 바깥을 향해 나팔처럼 벌어진 소호장식유공광구호(小壺裝飾有孔廣口壺)라는 토기가 국내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 토기는 일본 고분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인 스에키(須惠器) 계통 토기로 분류된다. 즉, 스에키 토기에서 장식호(子持壺)라 불리는 기종(器種)으로 평가된다고 최완규 소장은 전했다.
이 토기는 그릇받침과 함께 발견됐다.더불어 4호 석실분에서는 5세기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생각되는 청자가 동남쪽 모서리에서 발견됐다. 몸통 어깨를 돌아가며 4군데에 각각 2개씩의 귀(耳)를 장식한 이런 청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이번에 발굴조사가 이뤄진 봉덕리 1호분은 방대형(方臺形)으로 길이 72m, 너비 50m, 높이 7m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구릉 말단부를 장방형 형태로 다듬어 봉분을 조성하고 상부에다가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했다.
많은 유물을 출토한 4호석실분은 중앙 머리 부근에서 청동제 대나무잎 모양의 장식품이 발견되고, 머리와 가슴 부근에서는 귀걸이 2쌍과 곡옥 2점을 비롯한 다량의 옥이 발견돼 부부로 생각되는 두 사람을 합장했음을 알 수 있다고 최 소장은 덧붙였다.
나아가 팔 부근에선 칠기로 만든 화살통과 대도(大刀) 2점, 손칼(刀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결과는 지난 2003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공주 수촌리 유적 발굴성과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이 4호 석실분은 백제 고분 중에서는 최초로 천장은 기와를 얹은 무덤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090928093511144 연합뉴스. 2009. 9. 28.)
문화재청은 2015년 9월 24일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는 '고창 봉덕리 고분군'(高敞 鳳德里 古墳群)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1호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총 4기의 분구묘(墳丘墓)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은 발굴조사가 완료된 1호분과 정밀지표조사, 정밀실측이 이루어진 2호분입니다.
문화재청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는 '고창 봉덕리 고분군'(高敞 鳳德里 古墳群)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1호로 지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서로 맞닿아 있는 1호분과 2호분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육안으로도 그 형태가 뚜렷이 확인된다. 특히, 동서 약 70m, 남북 약 52m, 최고 높이 약 9m에 달하는 1호분은 전북 지역 최대 규모의 분구묘(墳丘墓, 미리 흙이나 돌을 이용하여 봉분과 같은 분구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양식으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분구묘는 평지 또는 구릉 위에 조성되나, 봉덕리 고분군은 자연구릉의 경사지를 깎아 땅을 고른 후 방대형(方臺形, 네모진 평면에 윗면이 평평한 형태)으로 기본 형태를 조성하고, 그 위에 석실(石室)을 만든 뒤 흙으로 봉분을 쌓았다.
그리고 1호분과 2호분의 경계지점은 대규모 자연구릉을 굴착하여 조성하였다. 이러한 고분 축조방법은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마한‧백제지역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적이 없는 매우 독특한 사례이다.
발굴조사 당시 1호분의 분구 내에서는 석실·옹관·석곽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발견되어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마한 분구묘의 전통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고분으로 평가된다.
특히, 4호 석실에서는 화려함이 돋보이는 금동 신발과 함께 중국제청자반구호, 소호장식유공광구호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봉덕리 고분군의 축조세력이 당시 고창지역의 최상위 계층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묘제(墓制)의 양상과 출토 유물 등로 판단할 때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5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백제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는 물론, 당시 중국·왜 등과의 대외 교류를 포함한 국제관계를 살펴볼 수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등과 협력하여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고창 봉덕리 고분군'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미지제공=문화재청>
(출처; https://v.daum.net/v/20150924140406421 머니S 2015. 9. 24.)
전북 고창군이 2021년 2월 17일 사적 제531호인 고창 봉덕리 고분군(高敞 鳳德里 古墳群)에서 출토됐던 ‘금동신발(金銅飾履)’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예고 됐다고 17일 밝혔습니다.
금동신발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요 무덤에서 출토돼 당시 장례문화를 알려주는 대표 유물이다.
화려한 문양과 크고 내구성이 매우 약해 부장품으로 특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신발’은 19점 정도가 출토됐으나 그동안 문화재로 지정된 바가 없어 이번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이 첫 사례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 출토 금동신발’은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위치한 4기의 대형 분구묘 중 규모가 큰 1호분의 4호 돌방무덤 내 양쪽 발 부분에서 출토됐다. 오른쪽 신발 내에서는 발뼈, 왼쪽 신발에는 직물류 흔적도 확인됐다.
전북 고창군이 사적 제531호인 고창 봉덕리 고분군(高敞 鳳德里 古墳群)에서 출토됐던 ‘금동신발(金銅飾履)’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예고 됐다고 17일 밝혔다.© 뉴스1
특히 4호 돌방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금동신발 한 쌍은 발목깃 부분까지 완벽한 형태이면서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해 중요 유물로 평가됐다.
금동신발의 전체 형태는 발목깃을 갖췄고 앞쪽은 뾰족하면서 약간 위로 들렸고, 중간 바닥면은 편평하며, 뒤쪽은 약간 좁아져 둥근 편으로 마치 배 모양을 띤다.
발등과 뒤꿈치를 2개의 옆판으로 결합했고, 바닥과 옆면 등 전체를 투조(透彫, 맞새김)로 만들었다.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으로 된 금동 못 18개를 부착했다. 부착된 곳에는 연꽃무늬로 장식하는 등 마한~백제지역 금동신발의 특징과 당시의 정교한 금속공예 기술수준을 잘 보여준다.
특히, 신발의 바닥 중앙에는 용(龍)이 새겨져 있고, 발뒤꿈치 부분에는 역사상(力士像), 전체적으로 거북이등껍질 무늬와 같은 육각문(六角紋) 내에 용과 봉황, 인면조신(人面鳥身, 얼굴은 사람이고 몸통은 새인 상상의 동물), 괴수(怪獸), 연꽃 등이 새겨져 있다.
하늘에서 본 고창 봉덕리 고분군© 뉴스1
고창 봉덕리 고분군의 금동신발은 함께 보물로 지정예고된 나주 정촌고분의 금동신발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제작됐고, 현재까지 출토된 금동신발 중 다양한 문양과 가장 완벽한 형태로, 고대의 전형적인 금속공예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화려한 유물들은 고창지역 마한(모로비리국)이 백제, 일본, 중국 등과 활발한 교류를 맺으며 성장한 중심세력이었음을 반증하고, ‘금동신발’은 제작기법과 문양 시문 등을 미루어 볼 때, 금동신발 제작기술의 최절정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https://v.daum.net/v/20210217095916472 뉴스1. 2021. 2. 17.)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13곳에서 총 20여점이 출토됐는데요,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듣는다고 합니다.
“이건 제사를 지냈던 흔적 같은데….” 2009년 9월 어느 날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을 발굴 중이던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단이 1호분의 정상부에서 심상치 않은 유구를 확인했다.
봉덕리 고분은 자연구릉을 깎아 시차를 두고 여러 기의 무덤을 조성한 이른바 분구묘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약한 지방세력의 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고창군은 2008년부터 3억원의 예산을 들여 봉덕리 1호분의 정비보존 방안을 마련하려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1호분 분구 내 1·2호 석실에서 중국제 청자편과 금동제 귀고리 등을 찾아냈다. 학술적으로 의미있는 성과였다. 그러나 뭔가 2% 부족한 느낌이었다.
■밀봉된 고분에서 출현한 금동신발
이에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팀이 추가조사를 벌였고, 급기야 1호분의 정상부의 남동쪽에서 기존과 다른 형태의 유구를 찾아낸 것이다. 발굴단은 처음에는 직사각형 형태로 정연하게 깔려있는 깬돌(할석)을 제사 유구로 판단했다. 백제인들이 무덤을 조성한 뒤에 이 평평한 돌 위에서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깬돌을 들어내자 2장의 대형 판석을 이용한 덮개돌이 노출됐다.
전북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한성백제 시대의 금동신발. 5세기 중후반 동아시아 최고의 ‘명품 구두’라 할만큼 빼어난 문양과 제작기법을 뽐내고 있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이 덮개돌 사이의 빈틈은 4개의 작은 돌과 진흙으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다.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이것은 제사유구가 아니라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싱싱한 고분이었다.
“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발굴단을 이끈 당시 최완규 연구소장(현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덮개돌 한 장을 살짝 들어올렸다. 살짝 틈이 생겼다. 최소장은 틈 사이로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넣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까맣게 찍혔지만 돌 틈 사이로 들어간 한줄기 희미한 빛이 어떤 물체에 부딪혀 흰색을 띄고 있었다.
최완규 소장이 발굴 실무자인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연구교수)을 불러 흥분을 가라앉힌 채 나지막히 말했다.
“저건, 금동제품이 틀림없어. 금동신발 같은데.”
발굴단으로서는 무덤뚜껑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꾹 참았다. 자칫 덮개돌을 열었다가는 1500년 이상 밀봉되어 있던 유물들이 외부 환경에 노출되어 급격하게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유물의 보존처리는 국가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고분의 뚜껑돌을 닫고,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에게 ‘금동신발이 포함된 도굴없는 고분의 발견’ 사실을 알렸습니다.”(최완규 소장)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은 구릉을 반으로 깎아 무덤을 계속 조성하는 그 지방 유력자 가문의 선산이었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4호석실(오른쪽 작은 사진)은 1호분의 정상부에서 확인됐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신발 안에는 사람의 발뼈가…
12월까지 계속된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금동신발은 물론이고, 피장자의 주변에서 ‘죽엽형(대나무잎 모양) 머리장신구’와 ‘청동탁잔(잔을 받치는 접시모양 그릇)’, ‘장식대도(장식이 있는 큰칼)’, ‘중국청자항아리’, ‘소호장식유공광구호(작은 항아리를 장식으로 붙인 넓은 입 구멍 단지)’, ‘성시구(화살통)’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5세기 2/4분기 말~3/4분기로 추정됐다. 즉 450~475년 사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분의 가치를 높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금동신발이었다.
사실 확인된 금동신발의 크기는 32.4(좌)~32.7(우)㎝ 정도였다. 게다가 바닥판에 최대 1.7㎝ 크기의 원추형 스파이크를 18개나 박았다. 따라서 실용성은 ‘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동신발의 오른쪽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극히 일부지만 주인공의 뼈가 확인됐다. 피장자의 발에 이 금동신발을 신겨서 안장한 것이 틀림없다.
금동신발은 바닥판과 양 옆판을 포함해서 3장의 금속판을 접어 못으로 결구하여 제작했다. 백제 고분에서 확인되는 다른 금동신발과 달리 윗부분에 2㎝ 가량의 목깃을 추가로 붙였다. 이 목깃은 결구한 금동판이 밖으로 벌어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총 4장의 금속판이 소요됐다.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의 문양. 양쪽 옆면은 하트 모양의 불꽃무늬를 배치했다. 가운데 육각형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용·인면조(사람얼굴의 새)·쌍조·길상조 등을 역동적이면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육각 무늬 바깥쪽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을 알맞게 배치했다. 구획 내부의 빈 공간에는 직경 2~4㎜ 내외의 사람 얼굴을 원형으로 표현했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명품 중 명품’인 한성백제 구두
이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을 자세히 바라보면 탄성이 절로 터진다. 목깃을 제외한 양쪽 옆판과 바닥판에 다양한 문양이 배치되어 있다.
양쪽 옆면은 하트 모양의 불꽃무늬를 배치했다. 가운데 육각형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용·인면조(사람얼굴의 새)·쌍조·길상조 등을 역동적·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육각 무늬 바깥쪽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을 알맞게 배치했다. 구획 내부의 빈 공간에는 직경 2~4㎜ 내외의 사람 얼굴을 원형으로 표현했다.
바닥판도 마찬가지다.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가운데)-쌍조-역사상의 순으로 배치했다. 특히 바닥판의 용무늬는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는 물론이고, 내부 비늘까지도 정(끌)을 이용해서 매우 섬세하면서 입체감있게 표현했다.
18개나 박은 스파이크는 직경 2.0㎜ 내외의 꽃잎(6엽) 중앙에 원추형 형태로 배치했다. 이밖에도 원형의 인면(사람얼굴) 문양 역시 바닥판 곳곳에 익살스럽게 표현해놓았다.
①바닥판에 최대 1.7㎝ 크기의 원추형 스파이크를 직경 2.0㎜ 내외의 꽃잎(6엽) 중앙에 원추형 형태로 배치했다.②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 순으로 배치했다.③원형의 인면(사람얼굴) 문양 역시 바닥판 곳곳에 익살스럽게 표현해놓았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물론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13곳에서 총 20여점이 출토됐다. 기존 제품 중에도 凸자문과 능형문(마름모 무늬) 같은 단순 무늬에서 벗어나 거치문(톱니무늬), 화염문, 용문 등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즉 정(끌)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법으로 구획을 만들어 그 내부에 다채로운 문양을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즉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
금동신발의 제작기법은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 |권향아의 논문에서
이 기법을 쓰면 쐐기형의 삼각형 점들이 연결되는 선으로 보인다. 당연히 입체감과 생동감이 생긴다. 기존의 점선조 기법은 문양대의 구획선이나 경계선 같은 보조 문양을 새기는데 활용된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점점 다양해진 공예기법이 봉덕리 금동신발에 와서 절정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일본 고분에서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전했다.
바닥판에 보이는 용무늬.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는 물론이고, 내부 비늘까지도 정(끌)을 이용해서 매우 섬세하면서 입체감있게 표현했다. |국립전주박물관
■경주 식리총에서 발견된 백제의 명품구두
이문형 연구교수는 “이미 한성백제 시기에 이렇듯 정교하고 화려한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기술자(공인) 집단이 존재했다는 얘기”라고 분석했다.
또하나 한가지 의미있는 시사점이 있다. 봉덕리 금동신발이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과 제작기법 및 문양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신발 양쪽의 판을 하나씩 제작해서 결합시키는 제작기법은 완전히 백제식이다.
이한상·이문형 교수는 “육각형 구획 안에 괴수와 인면조 등 무늬의 구성도 비슷하다”면서 “백제가 신라에 보낸 선물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한상 교수에 따르면 식리총은 5세기 4/4분기, 즉 475~500년 사이에 조성된 무덤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신라인들은 금속공예기술의 꽃을 피운 백제의 명품신발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 백제와 신라를 통틀어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명품으로 꼽힌다. ①전남 고흥 길두리 금동신발 ②충남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비 금동신발 ③무령왕 금동신발 ④ 공주 수촌리 1호분 금동신발 ⑤ 익산 입점리 금동신발 ⑥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중국을 괴롭힌 전성기 백제
도굴되지 않은채 현현한 이 고분에는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렇다면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고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금동신발과 같은 유물을 백제 중앙정부가 봉덕리 근방을 다스리던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하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룬 나라는 백제이다. 특히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태자(근구수왕·375~384)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파하고(369년) 황제를 의미하는 황색깃발을 휘날리며 대대적인 열병식을 열었다. 2년 뒤(371년)에는 급기야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원정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331~371)까지 죽였다.
<송서>와 <양직공도> 등 중국 사서에 ‘요서경략’ 기사가 등장하고 <양서>에는 “요서에 근거를 둔 백제가 근구수왕, 전지왕(405~420), 비유왕(427~455)이 백성을 파견했다”는 대목까지 보인다.
이 기록을 부인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혔다”(<삼국사기>)는 편지를 보냈다. 백제가 중국을 괴롭힐만큼 강성했다는 얘기다.
369년(근초고왕 24년) 무렵에는 왜왕에 칠지도를 하사했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도록 했다.
왼쪽 사진은 중국 지린성(吉林省)지안(集安)의 고구려 고분인 마선묘구(麻線墓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왼쪽 사진)과 일본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에서 확인된 금동신발(오른쪽 사진).|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지방분권을 추구한 백제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마한의 50여개 소국을 통합해서 세운 왕국이다. 태생부터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을 지향한 왕국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백제가 성(城)과 촌 단위로 조직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침략 이후 국세가 위축됐다. 하지만 한성 함락-웅진(공주) 천도(475년)까지는 여전히 전성기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백제 중앙정부는 지방 소재 거점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고 있던 유력자에게 이른바 ‘위세품’을 사여한 것이다. ‘위세품’은 지방세력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면서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하사하는 귀중품을 의미한다.
백제 중앙정부는 이 위세품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방 세력의 이탈을 막는 한편 그들을 매개로 거점 지역을 간접 지배했다. 지방 유력자들은 물론 기득권을 일부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인정을 받고 나름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을 것이다.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왼쪽 사진)과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오른쪽 사진). 5세기 말~6세기 초 조성된 경주 식리총은 귀족무덤으로 추정된다. 제작기법과 문양 등을 미뤄볼 때 식리총 금동신발은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덕리 고분 출토품과 흡사하다. 신라에서도 백제산 금동신발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조잡한 무덤에 웬 금동신발?
이한상 교수는 “위세품의 사여는 왕실의 복속의례 혹은 충성서약의 형태로 표현됐다”고 해석한다. 그중에서도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최고급이었다.
“머리에 쓰는 관모는 관직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죠. 또한 신발은 실용품이 아니지만 사후세계와 관련된 장송의례의 전용품이죠. 백제 중앙정부와의 강한 유대감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겠죠.”(이한상 교수)
이문형 연구교수는 “그 중에서도 명품 중의 명품을 하사받은 봉덕리 고분 주인공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하나의 시사점이 있다. 백제산인 금동신발 외에 왜와 중국제 제품이 한꺼번에 안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는 일본제 스에키(須惠器)인 ‘소호장식유공광구호’와 ‘기대형 고배(그릇받침형 굽다리접시)’, 그리고 중국제 청자가 완형으로 출토됐다. 스에키는 5세기 후반 일본 고훈(古墳) 시대에 제작된 도질토기이다. 봉덕리 출토 중국 청자는 동진(317~420) 혹은 유송(420∼479) 시기에 만든 자기이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왜-중국 제품을 모두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봉덕리 고분에서는 일본제 스에키(須惠器)인 ‘소호장식유공광구호’(사진 오른쪽)와 중국제 청자(왼쪽)가 완형으로 출토됐다. 스에키는 5세기 후반 일본 고훈(古墳) 시대에 제작된 도질토기이다. 봉덕리 출토 중국 청자는 4~5세기 중국 남조에서 만든 자기이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왜-중국 제품을 모두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최완규 이사장은 “물론 백제 중앙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왜나 중국제 제품을 배당 받았을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봉덕리 고분 주인공이 무역 등 통해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주목할만한 사항이 또 있다. 이 4호 석실이 매우 화급하게 축조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호분 분구 내에는 5기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중 이 (금동신발이 출토된) 4호 석실은 무덤방의 석재나 축조기법 등을 비교할 때 매우 조잡하고 거칠어서 급조된 것 같아요.”(이문형 연구교수)
즉 벽에 사용된 석재가 정연하지도 않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며, 벽석과 벽석 사이를 메운 작은 깬돌들도 대충 채워 넣었다는 인상이 짙다. 조금만 손을 대도 금방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있다. 이 무덤이 부부합장묘가 아니라 홀로 묻힌 단장이라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이 미혼 남성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을 시사하는 대목일까. 이문형 연구교수는 여기서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한성이 475년(개로왕 21년)에 함락됐고, 이 무덤이 조성된 때가 5세기 중후반(450~475년)이라는 점이 눈에 밟힌다.
그렇다면 한성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후 격심해진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인물이 전사한 뒤에 급하게 만든 무덤이 아닐까. 그렇게 죽은 봉덕리 출신의 젊은 장수를 위해 백제 국왕(개로왕?)이 최고의 장례품인 명품 신발을 하사한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봉덕리 1호분 4호석실에서는 장식대도와 ‘죽엽형(대나무잎 모양) 장신구’와 ‘청동잔탁(잔을 받치는 접시모양 그릇)’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한성백제 멸망과 금동신발 기술의 단절
화려한 금동신발은 한성 함락과 웅진천도(475년)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지방 세력에 내려준 금동신발(익산 입점리·나주 신촌리 9호 을관) 등은 봉덕리 출토품과 사뭇 다르다. 화려하고 섬세한 제작기법 대신 점을 연속으로 찍어 선을 나타내는 ‘점선조 기법’으로 회귀한다.
이한상·이문형 두 교수는 “이것은 고구려의 침입과 웅진천도 이후 금속기술이 단절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랬을 것이다. 한성백제 시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에 전성기를 이룬 백제는 고구려 침입과 개로왕의 전사, 그리고 웅진 천도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고, 국력 또한 급전직하했다.
금동신발 같은 명품 신발을 안장한 4호석실이지만 급조된 인상이 짙다. 벽에 사용된 석재가 정연하지도 않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며, 벽석과 벽석 사이를 메운 작은 깬돌들도 대충 채워 넣었다는 인상이 짙다. 조금만 손을 대도 금방 떨어진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금속기술 역시 단절되었다가 40여년이 지난 6세기 전반기에 겨우 회복되었다. 523년에 조성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동신발이 그것이다. 이 두 짝의 금동신발은 봉덕리 출토품과는 사뭇 다르다. 금속판을 오리고 뚫어서 무늬를 만드는 이른바 ‘투조기법’을 사용한 것은 같다. 그러나 기법도, 문양도 정제되고 세련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물론 이한상 교수는 “이것이 우열의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들은 신발 안쪽에 금속판, 즉 은판(무령왕)과 금동판(왕비)을 덧대었습니다. 그래서 무령왕의 신발은 배경은 하얀색, 무늬는 금색이 나게 돼죠.”
말하자면 제작기법과 문양 새김의 차이일 뿐이며, 이는 한성 시기와 웅진 천도 이후의 트렌드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백제의 명품 신발이 한성 함락 이후에 사라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봉덕리 1호분 4호석실 인근에서는 4호석실보다 시기도 빠르고 지위도 높은 석실이 확인됐다. 그 무덤에서는 또하나의 금동신발편도 출토됐다. 그러나 이 고분은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였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5호석실 도굴이 없었다면…
최근 문화재청은 이 고창 봉덕리와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등 2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사실 삼국시대 고분의 출토 유물 중에서 귀걸이·목걸이·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됐다. 그러나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무령왕릉 출토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조차 지정문화재가 아니다.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5세기 중후반 한성 백제가 제작한 명품 신발(‘봉덕리 고분 출토품’)이 ‘보물’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 ‘보물 금동신발’이 출토된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호 석실에서도 금동신발의 바닥편과 금동허리띠 꾸미개, 철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출토된 철도끼 등을 보면 완형의 금동신발이 나온 4호 석실의 철도끼보다 컸다”면서 “5호 석실의 주인공이 4호 피장자보다 시기도 앞섰고 지위도 높았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다. 아마 5호 석실과 4호 석실의 주인공들은 같은 가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5호 석실은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였다. 만약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다면 한성백제 시대의 찬란한 금동신발, 아니 그보다 더 나은 금동제 유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누군가 그렇게 도굴해간 5호석실의 금동신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참고자료>
이문형, 유수화, ‘분석 및 조사보고문:고창 봉덕리1호분 출토 금동신발의 제작방법과 문양 -4호석실 출토품을 중심으로’, <마한백제문화> 25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이문형, ‘고창 봉덕리고분군 축조세력 연구’, 공주대 박사논문, 2020
이한상,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2009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고창 봉덕리 1호분 종합보고서>(유적조사보고 제80집), 2016
권향아, ‘삼국시대 금속유물의 선조기법양상-축조기법을 중심으로’, <문물연구> 제4호, 동아시아문물연구 학술재단, 2000
(출처; 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21. 5. 4.)
<자료출처>
https://v.daum.net/v/20090928093511144 연합뉴스. 2009. 9. 28.
https://v.daum.net/v/20150924140406421 머니S 2015. 9. 24.
https://v.daum.net/v/20210217095916472 뉴스1. 2021. 2. 17.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090928230543862 한국일보. 2009. 9. 28.
https://v.daum.net/v/20241031102014753 연합뉴스. 2024. 10. 31.
https://v.daum.net/v/20240208050007064 경향신문. 2024. 2. 8.
https://v.daum.net/v/20220404060006475 경향신문. 2022.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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