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0일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단법인 겨레문화유산연구원(원장 신창수)은 지난 5월18일 이후 추정 북문(北門)터 일대를 대상으로 올해 제4차 계양산성 학술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주부토'라는 명문(銘文) 기와를 무더기로 찾아냈다고 말했습니다.
길이 48㎝ 신라 대형기와도 출토(인천=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인천 계양구 진산이라 할 수 있는 계양산(해발 395m) 동쪽 기슭 능성을 따라 축조된 고대 성곽인 계양산성(桂陽山城)에서 이 일대를 지칭하던 고대 지명인 '주부토'(主夫吐)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 100여 점이 출토됐다.
'주부토' 명문기와는 지난 2005년 선문대 고고연구소가 동문지(옛 주민체육시설) 일원에 대해 실시한 제2차 계양산성 발굴조사에서도 한두 점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그런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이들 명문기와는 그 제작 기법이나 문양 등의 특징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초기까지 내려볼 수 있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장제군(長堤郡)은 본래 고구려 주부토군(主夫吐郡)으로 신라 경덕왕이 고친 이름이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인 고려 중기에는 수주(樹州)라고 한다고 했다. 수주는 지금의 인천 계양구 일대다.
그럼에도 통일신라 혹은 고려 초기까지 계양구 일대를 '주부토'라는 고구려 시대 지명으로 여전히 부르고 있는 것은 지명의 강한 보수성에서 비롯된다고 풀이된다.
나아가 올해 조사에서는 길이 48㎝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 대형 기와가 여러 점 발굴됐다.이런 크기는 토지박물관이 남한산성의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건물터에서 무더기로 수습한 현재까지 국내 최대 기와(길이 64㎝에 무게 20㎏)보다는 작지만, 그에 버금가는 대형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모은다.
나아가 이번 조사 결과 성벽을 관통하는 문터(동서 3.9m, 남북 8.2m)와 더불어, 이를 통과하자마자 성곽 내부로 향하는 통로가 확인됐다.
(출처; https://v.daum.net/v/20090830080105097 연합뉴스. 2009. 8. 30.)
2015년 8월 11일 계양구에 따르면 구는 지난 10일 조사지역인 방축동 49-3번지 '치 1·2 지역'에서 계양산성 7차 시굴·발굴 조사를 벌여 계양산성의 '치'가 구조와 건축 기법에서 다른 산성과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을 확인했는데요, 인천 계양산성이 국내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토심석축기법'으로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역사적 가치 높아…계양구 "국가사적 지정 신청할 것"
치는 산성에서 성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진압하는 시설이다.
대부분 석성의 치는 돌로 쌓고 토성의 치는 흙으로 쌓는 등 건축 자재를 통일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계양산성의 치는 바깥쪽을 돌로 쌓고 안쪽에는 흙을 쌓는 '토심석축기법'이 사용됐다.
또 일반적인 산성의 치는 상·하부의 너비가 같지만 계양산성은 하부에서 상부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로 축조된 것으로 조사됐다.
학술자문회의 위원으로 참석한 백종오 한국교통대학교 교수는 "아직 국내에서 이런 구조의 치를 발견한 적은 없다"며 "중국 북동부 지린성 인근의 발해 시대 산성에서 비슷한 구조가 발견됐지만 역시 똑같은 형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계양산성의 치에서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전기 유물로 추정되는 기와도 함께 발굴됐다.
(출처; https://v.daum.net/v/20150811105508841 연합뉴스. 2015. 8. 11.)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강유역의 성곽 '인천 계양산성'(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이 사적으로 지정됩니다.
2020년 3월 18일 문화재청은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는 인천 계양산성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오는 23일 지정 예고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인천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강유역의 교두보 성곽으로 삼국의 치열한 영토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곽이다.
[서울=뉴시스] 인천 계양산성 북문지 근경.(사진=문화재청 제공) 2020.3.18 photo@newsis.com
또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주로 사용됐지만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사용돼 오랜 시간에 걸친 축성기술의 변천을 알 수 있는 학술 가치가 뛰어난 유적이라는 게 문화재청의 평가다.
산성 둘레는 1184m 정도이며 능선 중간부분을 중심으로 축조돼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구조다. 사모(모자) 모양의 산봉우리에 축조됐으며 내·외부를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 산성으로 당시 군사적 거점과 함께 행정의 중심지로 꾸준히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뉴시스] 인천 계양산성 출토 대형토기.(사진=문화재청 제공) 2020.3.18 photo@newsis.com
10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해 한성백제 시기의 목간과 원저단경호(圓底短涇壺·둥근바닥 항아리),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인화문(印花紋·찍은 무늬) 토기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 화살촉·문확쇠(門確金·대문 문짝을 다는 홈에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씌운 접시 모양의 철물)·자물쇠·쇠솥·동곶(童串·대패의 덧날막이)·철정(덩이쇠) 등 다양한 금속유물들도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오는 23일 지정예고 이후 30일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서울=뉴시스] 인천 계양산성 출토 금속류 유물.(사진=문화재청 제공) 2020.3.18 photo@newsis.com
문화재청 관계자는 "인천 계양산성은 한강 하류와 서해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입지하고 있어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함께 시대 변화에 따른 성곽 양식 등을 비교·연구 할 수 있는 학술·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아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200318152824539 뉴시스. 2020. 3. 18.)
2005년 5월11일, 인천 계양산성 내부의 집수정(물을 모아 하류로 보내는 큰 우물)을 발굴중이던 이형구 당시 선문대 교수는 의미심장한 유물 한 점을 발견했다. 지름이 약 13m 정도 되는 우물의 흙과 돌을 걷어내고 바닥까지 발굴하던 중 맨 밑바닥에서 이른바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밑이 둥글고 목이 짧은 항아리)가 보였다. 그 항아리를 조심스레 다루던 이 교수의 손끝에서 수상한 목제 유물이 노출됐다.
계양산성 집수정 맨 밑바닥에서 목간과 함께 확인된 원저단경호. 4~5세기 한성백제 시기의 유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물이 차있는 이런 유구에서 목제가 발견되면 제일 먼저 묵서(墨書)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묵서가 이런 물 속이나 뻘 속에서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다. 물을 적셔가며 붓질로 목제(木製)를 부드럽게 다듬으니 과연 희미한 글씨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목제와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유물이 보였다. 그것은 예부터 이른바 동이문화권에서 점복(占卜)에 쓰였던 거북이 등, 즉 귀갑(龜甲)이었다. 이 교수는 사진을 찍고 실측을 한 다음 목제와 그 인근 흙층을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잘라 진공플라스틱에 밀폐시켰다. 이런 목제 유물이 공기중에 노출되었다가는 그대로 쪼그라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이 교수는 곧바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연락을 취해 긴급 보존처리를 부탁했다. 묵서가 새겨진 계양산성 목간과 귀갑을 태운 승용차는 그날 밤 자정을 넘어 새벽 2시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닿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 교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적외선 촬영결과 묵서가 확실하게 보인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잔존 길이 13.8㎝, 지름 1.87㎝ 정도인 명문목간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한성백제시대 논어목간과 원저단경호가 확인된 계양산성 집수정. |문화재청 제공
첫눈에 ‘자왈(子曰)’이라는 대목이 눈에 띄었고, 논어의 유명한 글귀인 ‘오사지미능신(吾斯之未能信·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이 보였다. 목제를 5면으로 깎아 만든 목주에는 면마다 <논어> 제5장인 ‘공야장(公冶長)’이 적혀있었다.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면서 사위였던 인물이다.
공자는 전과(前科)가 있던 공야장을 두고 “그에게는 죄가 없다”면서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정도였다. 목간 1면에는 ‘(子謂子)賤君子(哉若)人(魯無君者斯焉取斯)’, 즉 공자가 자천(子賤)이라는 사람을 두고 “그 같은 사람은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으면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했겠는가?” 하고 되묻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2면은 ‘(子使漆雕開仕對日)吾斯之未能信子說’, 즉 공자가 칠조개(제자)에게 벼슬을 주고자 하자 칠조개가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3면은 ‘(孟武伯問~求也~)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 즉 “맹무백(노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구(求·공자의 제자인 염유)에 대해 묻자 ‘그가 인자한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고, 맹무백은 ‘그렇다면 적(赤·공자의 문하생)은 어떠냐’고 물었다”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4면과 5면에도 공야장의 문구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계양산성 북측 성벽. 계양산성은 한성백제 시대에 축조된 이후 통일신라~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이 계양산성 출토 목간의 연대가 관심거리였다.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에 목간과 함께 노출된 목재를 시료로 AMS(가속기질량분석기) 연대측정을 의뢰했더니 400년과 480년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즉 이 유적이 4~5세기 때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4~5세기라면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 후기에 해당된다. 목간을 직접 보고 분석한 당시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이 목간의 서체는 ‘둔황문서(敦煌文書)’나 ‘러우란(樓蘭)잔지(殘紙)’에서 사용된 4~5세기 사경체(寫經體)와 관련이 깊다”고 밝혔다. 400~480년대 계양산성 논어 목간은 한자도입과 유교 수용을 입증해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실물자료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였다. 이형구 교수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논어>와 같은 책을 도포 소맷자락에 넣고 다녔듯 한성백제인들도 이 논어목간을 들고 다니며 암송하면서 인생의 좌표로 삼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오는 23일 바로 한성백제 시대 ‘논어목간’이 출토된 인천 계양산성을 사적으로 지정예고할 게획이다. 현재 인천시 기념물 제10호인 계양산성은 한강유역의 교두보 성곽으로, 삼국의 치열한 영토전쟁 과정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곽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최초로 축조된 이후 고려~조선 시대까지 사용됐다. 따라서 오랜 시간에 걸친 축성기술의 변천을 알 수 있는 학술 가치가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산성의 둘레는 1184m 정도이며, 능선 중간부분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구조다. 내외부를 모두 돌로 쌓았고, 모자 형태로 산봉우리에 축조됐다. 문화재청은 “계양산성은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함께 시대 변화에 따른 성곽 양식 등을 비교·연구 할 수 있는 학술·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아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은 23일 지정예고 이후 30일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출처; https://v.daum.net/v/20200318170510742 경향신문. 2020.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