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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 고고학 (12) 공주 공산성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3. 백제 고고학 (12) 공주 공산성

대야발 2024. 12. 1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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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의 백제 왕궁 부속시설 발굴조사는 2008년부터 매년 진행됐다. 

 

 

공주대학교박물관 발굴단은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공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60여동 이상 집중된 백제 시대 건물지를 확인했다. 공산성 내 왕궁관련시설의 확인은 물론이고 백제 왕성의 도시구조와 사회상을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15년에 성안마을이 있던 북서쪽 대지 1만 2000㎡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백제 시대 건물지 31동과 연못, 나무 사다리 등이 출토됐다. 특히 완전한 형태의 백제 시대 사다리는 이번이 최초 발견이다.

 

 

 
【서울=뉴시스】공산성 발굴지
【서울=뉴시스】대형 건물지
【서울=뉴시스】육각형 건물지
【서울=뉴시스】사다리
【서울=뉴시스】산 모양 무늬 기와편

 

 

 

 

 

발굴지는 동남향의 완만한 구릉 사면부로 5단의 계단식 축대를 쌓았는데, 180㎝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있다. 대지 중앙부는 마당을 중심으로 ‘Г(ㄱ을 엎은 꼴)’ 모양의 건물지가 분포돼 있다. 건물지 중 다른 건물보다 배 이상 큰 장방형(직사각형) 건물이 주목되는데, 3차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에서 상급의 관청건물군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육각형 건물지와 취사시설이 없는 대형건물, 별도의 전용 부엌 칸을 갖춘 건물지도 주목된다. 건물지 사이에서 6m 너비의 남북방향 도로와 3m 너비의 동서방향 도로가 확인됐다. 도로의 양 측면에는 측구(側溝; 길도랑)형의 배수로가 놓여 있는 것도 확인됐다.

 

 

건물지 북쪽에서는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 형태의 너비 10m, 바닥면 6m, 깊이 2.6m의 대형 연못이 확인됐다. 연못 바깥에는 1.5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물이 새는 걸 방지하고 있다.

 

 

연못 바닥에서는 백제 시대의 나무 사다리가 출토됐다. 길이 6m, 너비 70~80㎝이고, 발판은 50㎝간격으로 11개가 있다. 대전 월평동유적 내 목곽고에서 유사한 형태의 사다리 파형이 발견된 적은 있지만 완전한 형태의 백제 시대 사다리는 이번이 최초 발견이다. 연못 내 진흙 속에 놓여 있어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발판의 양쪽 끝 부분에 장방형의 촉을 내어 결합한 형태로 백제의 목재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수종(樹種) 분석을 통해 사다리 재질은 참나무인 것이 밝혀졌으며, 앞으로 정확한 연대측정을 위한 분석을 진행할 예정이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기와 조각, 벼루 등 매우 다양하다. 다수의 기와 조각에는 도장으로 무늬나 글자를 새긴 인장 기와가 있는데 ‘왕 王’, ‘고 古’, ‘구 久’, ‘ 구 口’, ‘공 工’ 등의 문자와 ‘※’, ‘격자’, ‘산(山) 모양’ 등 무늬가 찍혀 있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산 모양 무늬 기와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 내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과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산(山)모양과 유사한 형태로 완만한 능선의 산이 2개씩 중첩된 형태로 표현돼 당시 백제인의 인식과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출처; 백제 관청건물 31동 발굴했다, 공주 공산성 (daum.net)뉴시스.2015.12.11)

 

 

 

 

 

‘공노(孔奴)…’. 2011년 10월 공주 공산성을 발굴중이던 공주대박물관 조사단은 가죽에 옻칠한 갑옷(칠피갑옷) 미늘편과 함께 이 갑옷의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을 확인했다. 

 

 

 

 

복원과정에서 드러난 공노(孔奴) 명문. 고급스러운 갑옷에 장난스럽게 거친 글씨로 표현했다.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흰색으로 선명하게 작업한 명문내용) |이현숙 국립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발표문에서

 

 

 

특히 ‘행정관십(行貞觀十)’과 ‘구년사월이십이일(九年四月二十二日)’ 명문은 결정적이었다. ‘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627~649)이며, 정관 19년이면 645년, 즉 의자왕 5년에 해당된다. 이와함께 지금 막 쓴 것 같은 생생한 글자들이 잇달아 보였다.

 

 

왕무감(王武監), 대구전(大口典) 등의 문자가 나타났고, 참군사(參軍事), ‘○작배융부’(○作陪戎副), ‘○인이행좌’(○人二行左) ‘근조○’(近趙○)’ 등 20여자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국립공주대가 27~28일 공주대 국제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는 ‘백제 칠피갑옷의 비밀’ 국제학술대회에서 칠피갑옷(옻칠갑옷)의 보존복원을 맡은 송지애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팀 학예사는 “기존에 확인된 명문을 포함해서 총 60여자가 보였다”고 발표했다.

 

 

송학예사는 “명문은 한 개의 찰갑편에 주로 6자를 적었으며. 숫자의 경우 7자를 적은 것도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보존처리 과정에서 갑옷의 뒷면에 제작자가 낙서한 것 같은 명문도 나왔다.

 

 

이현숙 공주대 학예연구실장은 ‘공산성 출토 옻칠갑옷의 조사 성과와 향후 과제’ 발표에서 “갑옷 소찰의 한쪽 칠을 긁어서 ‘공노(孔奴)’라고 아주 거칠게 긁어 써넣은 글자가 특히 눈에 띈다”고 전했다.

 

 

이 실장은 “아주 고급스러운 이 갑옷의 조각에 새긴 백제 기술자(工人)의 글귀에서 백제인의 익살과 여유가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갑옷을 제작하던 기술자가 장난기 서린 낙서를 썼다는 추정이다.

 

 

출토당시의 칠피갑옷. 645년에 제작됐음을 알려주는 ‘정관 19년’ 명문이 새겨져 있다. |공주대박물관 제공

 

 

 

 

복원처리과정에서 수습된 백제 칠피갑옷의 전체 조각은 2500여편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고, 이중 완형은 10% 선인 230여편이었다. 갑옷 편은 형태에 따라 20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가 이런 칠피갑옷을 만들 능력이 되었을까. 이현숙 실장은 “북송시대의 백과사전인 <책부원구>를 보면 의문이 해소된다”고 밝혔다. “당 태종이 정관 19년(645년)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황칠)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보존처리한 갑옷 조각의 모습. |송지애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의 발표문에서

는데 갑옷의 광채가 빛났다”고 했다. 칠피기술을 포함한 백제의 갑옷 제작 기술이 당나라에서도 알아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11년에 출토된 이 갑옷을 의자왕이나 의자왕에 준하는 인물이 사용하다가 백제 패망 시점에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명문의 글씨체는 당나라 시기에 유행했고, 일반적인 기록문에 쓰여진 글씨체(구양순체)가 아니라, 구양순체가 다소 가미된 사경체(불경의 내용을 필사하는 서법) 위주”라면서 “이 글씨는 백제의 사경승이 쓴 것 같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갑옷의 주인이 당나라 장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백제가 6~7세기에 중국 연호를 사용한 흔적이 없으며, 갑옷에서 확인된 명문 중에는 백제에 없는 관서와 중국성인 이(李)씨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도학 교수는 “‘공노’ 명문도 당나라 장수의 갑옷을 노획한 백제군이 당나라 장수를 조롱하는 의미에서 새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현숙 실장은 “이 갑옷은 실전용으로 썼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향후 추가된 명문내용을 토대로 향후 치열한 학술토론을 벌어야 할 것 같다.

 

이현숙 실장은 “이 칠피갑옷은 아직까지는 1차적인 응급보존처리가 되었을 뿐”이라면서 “갑옷의 구체적인 형태를 복원하는 학제간의 융합논의와 함께 속속 드러내는 명문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공노(孔奴)'.. "백제인의 익살 담긴 공주 공산성 옻칠갑옷의 낙서였다" (daum.net) 경향신문. 2018.08.28.) 

 

 

 

 

 

 

2019년 4월 20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두 차례 발굴된 옻칠 갑옷의 보존 처리가 2017년 완료돼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60여 자(字)를 새로 판독했다"고 20일 열린 한국목간학회에서 발표했다.

 
 
 
 

2011년 충남 공주 공산성에서 백제 말기 옻칠한 가죽 갑옷이 출토됐다. 반짝이는 검은색 비늘 조각에 '정관 19년(貞觀 十九年)'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전문가들은 "당 태종 정관 19년, 즉 645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확실하다"며 환호했다. 2014년에도 글자가 적힌 옻칠 갑옷 조각이 출토됐다. 발굴 기관인 공주대박물관은 "나당 연합군과의 전쟁 직전 백제 장수들이 결의를 다지고자 의식용으로 묻었을 것"이라며 갑옷 제작지를 백제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후 학계에선 "글자를 분석하면 백제가 아닌 당나라 제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와 '갑옷 국적' 논란이 팽팽했다.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갑옷에서 최근 보존 처리 후 새로 확인된 글씨. 주로 인명, 관직명, 관청명 등이다.

 

 

 

명문이 있는 비늘 조각은 모두 17점. 이현숙 실장은 "갑옷 표면에 가로 36㎝, 세로 7㎝ 정도 범위에 명문을 썼다"며 "한쪽 가슴 부분을 글씨로 빼곡히 채운 걸 보면 실제로 입은 것이 아니라 견본품으로 보인다"고 했다.

 

 

명문은 대부분 직명과 인명, 관청 이름이다. '익주(益州)'라는 지명으로 시작해 '왕무감(王武監)'이라는 관청, '원문(元文)' '이조(李肇)' 등 사람 이름 4명과 관직명이 등장하며 '정관 19년 4월 21일'로 끝을 맺는다. 이 실장은 "645년 갑옷을 만든 조성기를 적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8년간 끌어온 국적 논란이 이걸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지난해 '고고학지'에 실은 논문에서 백제 제작설을 반박하며 "익주(益州)라는 지명은 오늘날 중국 쓰촨성 청두로 수나라 때 촉군"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현숙 실장은 "재판독 과정에서 명문에 이체자가 많은 것을 확인했다"며 "익주가 아니라 '개주(蓋州)'로도 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구당서(舊唐書)'에 645년 당의 요동성 공격 과정에서 '개주'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에도 "당 태종이 고구려 요동정벌에 나설 때 백제가 갑옷을 만들어 당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갑옷이 묻힌 정황을 살펴보면 마갑 위에 무기류, 그 위에 갑옷이 포개듯이 2세트 놓여 있었고, 그 위를 100㎝ 두께 볏짚으로 덮는 등 의식적으로 묻은 행위가 뚜렷하다"며 "전체 문자의 현황이 이제야 파악된 만큼 명문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출처; 백제인가… 당나라인가… 공산성 옻칠 갑옷 국적 논란 끝날까 (chosun.com)2019.04.22)

 

 

 

 

 

2019년 4월 20일 공주대 박물관에서는 갑옷 조각 공개 설명회가 열렸다. 갑옷의 국적 논란에 초점을 맞춘 목간학회 학술토론회에 앞서, 2011·2014년 발굴 뒤 6년여간 보존 처리를 한 칠피갑 명문조각 수십여편을 처음 공개한 자리였다.

 

 

그동안 출토된 뒤 판독문이 공개된 명문은 30여자였으나, 보존처리 과정에서 새로 판독된 문자가 60여자에 달한다고 이현숙 학예연구실장은 밝혔다.

 
 
 
지난달 20일 열린 목간학회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된 공주 공산성 출토 갑옷의 한자명문 조각들.

 

 

 

660년 7월18일은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의 발굽 아래 스러졌던 날이다. 백제 최후의 날이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은 어디였을까. 백제 마지막 도읍인 사비(부여)로 점찍는 이들이 적지않을 듯하다. 낙화암에 투신한 삼천궁녀 전설부터 떠올릴 터이니. 하지만 백제 의자왕이 항복한 곳은 두번째 도읍 웅진(공주)의 공산성이다.

 

 

 

지난달 20일 목간학회 학술대회 발표에 앞서 공주대박물관에서 열린 공산성 출토 갑옷조각 공개회의 모습이다. 이현숙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보관함에 담긴 칠피갑옷조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해 7월13일 의자왕은 함락된 사비성을 빠져나와 선왕들 거처였던 공산성에 들어가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왕은 대치만 하다 엿새만에 항복해버린다. 일부 신하가 왕을 속여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등의 모호한 기록과 추론이 나오지만, 투항의 구체적 배경은 안갯속이다. 공산성은 멸망의 비운과 항복의 미스터리가 서린 공간이 되었다.

 

 

1351년 세월이 흘러간 2011년. 옛 백제인의 저수조 터에서 한자 명문이 줄줄이 적힌 가죽찰갑옷(칠피갑옷) 조각들이 공주대 조사단에 의해 발굴된다. 가죽을 꿴 찰갑 조각들의 한자 명문(銘文) 일부엔 ‘정관(貞觀)19년4월21일’(645년)이란 당의 연호가 붉은 옻칠로 적혀 있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한 해다. <삼국사기>엔 그해 백제가 원정가는 당 태종에게 ‘금휴개’란 갑옷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2014년 추가발굴 결과 칠피갑 유물은 말갑옷(마갑)과 큰 칼 위에 정연하게 포개져 놓였고 그 윗부분은 볏짚단으로 덮어 묻은 얼개가 밝혀졌다. 갑옷 조각이 나온 지층 바로 위에는 백제 가옥터가 폐기된 흔적이 드러났다. 멸망 직전 의례성 행위를 하고 갑옷을 묻은 자취가 드러난 것이다. 학계에서는 곧 국적 논란이 벌어졌다. 갑옷 제작처가 백제냐, 당나라냐는 것이었다.

 

 

 

 

지난달 20일 열린 목간학회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된 공주 공산성 출토 갑옷의 한자명문 조각들.

 

 

 

공주대 박물관은 첫 발굴 당시 칠피 갑옷을 당 태종에게 선물한 백제의 이름난 갑옷 일종인 ‘명광개’(明光鎧)로 간주했다. 당시 발굴조사단장을 맡았던 고 이남석 교수는 의자왕이나 백제 왕족이 썼을 것이란 추정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문헌사학계 쪽에선 백제는 중국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당나라 장수 갑옷설을 제기했고, 중국 학자들도 당나라 제작설을 지지해왔다.

 

 

이날 공주대가 명문을 추가 공개한 것은 지난해 말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의 ‘공산성 출토 칠갑 명문 재고’란 논문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발굴 당시 일부 공개된 갑옷 명문들을 분석한 결과 명문 중 일부인 ‘익주(益州)’란 지명은 당나라 때 쓰촨성 청두를 일컫는 지명이며, ‘참군사(參軍事)’ ‘대부(大夫)’ 같은 명칭은 당대 관직임을 고증했다. 갑옷에 붉은 옻칠로 제작연도·제작지·제작 관청을 명기하는 것은 당 율령에 따른 격식임도 밝혔다. 쓰촨성에서 만들어진 갑옷이 알 수 없는 연유로 백제 땅에 묻히게 됐다는 논지였다. 백제설을 고수해온 공주대는 발끈했다. 유물을 공개할 테니 제대로 보고 토론하자며 학술대회를 연 것이다.

 

 

 

지난달 20일 열린 목간학회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된 공주 공산성 출토 갑옷의 한자명문 조각들.

 

 

 

유물 열람 뒤 이어진 발표·토론에선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현숙 실장은 출토된 칠피갑옷은 중국에 선물로 보낸 갑옷의 제작 경위를 적은 백제 견본이라고 주장했다.

 

 

6세기 중국 남조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명문에 있는 ‘장사’ ‘사마‘ ‘참군’ 등의 중국 관직명을 썼다는 점과 갑옷 상반신 넓은 부위에 장문의 명문을 적은 것은 의례용 성격에 가깝다는 점, 갑옷 명문 연호인 645년뿐 아니라 626·637·639년 등 백제가 중국에 여러 차례 황칠갑옷을 보낸 역사적 정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 등이 근거였다.

 

 

반면, 이태희 학예사는 공개된 새 명문들이 당나라산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한다고 풀이했다. 새 명문에 나타난 "사조참군사‘란 관직명의 경우 공장 공인을 총괄하는 고유직책으로 당 관직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명칭이라고 밝혔다.

 

 

 

공산성 갑옷은 7세기 동아시아권의 유일한 실물 갑옷이다. 6세기 이전 갑옷들은 무덤 부장품이라 출토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엔 불교 전래 영향으로 무덤에서 갑옷이 사라진다. 이처럼 공산성 갑옷은 희귀한 가치를 지녔음에도 비교할 만한 다른 실물이 없어 제작처 논란을 명확히 결론 짓기 어렵다.

 

 

토론회를 지켜본 고고학자 김길식 용인대 교수는 “저수조에 막대한 분량의 무기류만 묻은 건 전의를 다지는 의례 성격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중일 학자들의 학제간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갑옷 조각이 왜 공산성에 묻혔는지를 파악하게 된다면, 백제 최후의 날, 어떤 드라마가 있었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존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나 스티븐 런치만의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같은 역작이 백제사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공산성 갑옷'에 숨은 백제 멸망의 비밀은? (daum.net) 경향신문.[노형석의 시사문화재]2019.05.06.)

 

 

 

 

 

2020년 6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말, 갑옷을 입다’특별전을 공동 개최했다.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함안 마갑총 말 갑옷(1992년)과 경주쪽샘지구 C10호의 말 갑옷(2009년), 그리고 웅진 백제의 도읍인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말갑옷까지….

 

 

2011년 공주 공산성에서 확인된 옻칠 말갑옷. 보존처리를 마치고 이번 특별전에 전시된다.|공주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는 신라와 가야,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 그리고 고구려 고분 벽화 속 말 갑옷까지 고대 삼국의 말 갑옷 18점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이번에 첫 공개되는 공산성 출토 옻칠말갑옷.|공주대 박물관 제공

 

 

 


특히 2011년 공주 공산성 출토 옻칠가죽 말갑옷과, 첫공개되는 말 투구 등이 처음으로 출품된다. 말갑옷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경주 황남동에서 국내 최초로 확인된 이후 전국에서 여러 점 출토됐지만 온전한 형태로 확인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다가 1992년 함안 마갑총, 2009년 경주 쪽샘지구 C10호에서 나온 완전한 형태의 말 갑옷이 출토됨으로써 고대 삼국의 말 갑옷 연구가 본격화됐다.

 

 

 

 

2009년 경주 쪽샘지구 C10호에서 출토된 말갑옷. 신라시대 말갑옷이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번 특별전은 크게 3부로 구성됐다. 1부인 ‘신라 귀족들의 안식처, 쪽샘지구’에서는 쪽샘지구 C10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10년간의 보존처리를 마친 말 갑옷과 재현품을 전시했다. 또한 ‘신라의 말 갑옷’을 주제로 황남동 109호와 계림로 1호에서 출토된 말 갑옷도 각각 1934년과 1973년에 발굴된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2부 ‘가야·백제의 말 갑옷’에서는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말 갑옷과 함께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말 투구도 전시된다.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이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2011년 공산성에서 국내 최초로 옻칠을 한 가죽 말 갑옷이 출토된 바 있다. 이와함께 동아시아에서 최대 수량을 자랑하는 가야의 말 갑옷을 소개한다. 함안 마갑총에서 나온 말 투구와 좌·우측 말 갑옷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된다.

 

 

 

1992년 아라가야 본거지인 함안에서 확인된 말갑옷. 신문배달 학생이 공사현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국립김해박물관제공

 

 


또 부산·김해·합천 등에서 출토된 말 갑옷을 소개하여 신라와 다른 가야의 다양한 말 갑옷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리이다. 3부 ‘고구려 고분벽화 속 중장기병’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투영된 고대 중장기병(철기병)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고, 영상으로도 제작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출처; 공주 공산성 출토 백제 옻칠갑옷 등 삼국시대 말갑옷 총출동 (daum.net) 경향신문. 2020.06.11.)

 

 

 

 

2023년 9월 12일 문화재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왕도 핵심유적인 공주 공산성 추정왕궁지 일대 학술 발굴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은 "공주시와 함께 공주 공산성의 체계적 조사를 실시해 백제 웅진왕도의 실체를 복원할 수 있는 학술자료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적의 진정성 있는 정비와 관리방안을 수립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조사지역은 공주 공산성 내 쌍수정이 있는 추정왕궁지 일원이다. 조사기간은 이달부터 오는 12월까지다.

 
 
 
 
[서울=뉴시스] <공산성 추정왕궁지 일대 2023년 조사구역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09.1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공주 공산성 추정왕궁지는 넓고 평탄한 대지로 이뤄졌다. 해발 74m 내외로 공주 시가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다.

 

 

이 지역은 1985년 공주대 역사박물관이 처음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지와 연지 안에서 연꽃무늬 수막새가 집중적으로 발견돼 왕궁지로 추정됐다.

 

 

2019년 보완조사에서는 왕궁지 동쪽 출입시설이 새로 확인됐다. 특히 출입시설 주변으로 궐(闕)시설이 확인됐다. 궐은 왕이 머무는 궁궐 문 양옆에 높게 쌓아 설치한 대다.

 

 

이는 왕궁 구조 파악의 계기가 됐다. 지난 2020년 문화재청은 '백제왕도 핵심유적 공주지역 발굴조사 기본 계획'을 세웠다.

 

 

 

[서울=뉴시스] 공산성 추정왕궁지 장랑식건물의 공간구획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09.1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2022년 조사에서는 각 20m, 30m 길이의 장랑식건물(長廊式建物) 2동이 조사됐다. 장랑식건물은 궁전, 사찰에 중심건물과 주변을 둘러싸도록 길게 조성된 건물이다.

 

 

그 결과, 추정왕궁지 내부가 중심공간과 생활공간, 그리고 의례공간으로 구분하는 계획적 공간배치로 이뤄졌음이 밝혀졌다.

남쪽 연못 주변 골짜기를 메운 토목공사 흔적에서 현재 추정왕궁지 안에 사각형 평탄지가 백제 웅진기에 계획적으로 조성한 곳임이 확인됐다.

 

 

이번 발굴조사 목적은 공산성 내 백제 추정왕궁지의 정확한 규모 및 구조 파악과 복원을 위한 근거자료 확보다.

문화재청은 "(이번 조사를 통해) 그동안 부분적으로 확인됐던 추정왕궁지의 전체 범위와 외곽시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왕궁지 조성을 위한 백제 사람들의 토목기술을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230912095657653 뉴시스. 2023. 9. 12.)

 

 

 

 

 

<자료출처>

 

 

 

백제 관청건물 31동 발굴했다, 공주 공산성 (daum.net) 뉴시스2015.12.11

 

 

 

'공노(孔奴)'.. "백제인의 익살 담긴 공주 공산성 옻칠갑옷의 낙서였다" (daum.net)경향신문2018.08.28. 

 

 

 

백제인가… 당나라인가… 공산성 옻칠 갑옷 국적 논란 끝날까 (chosun.com)2019.04.22

 

 

 

'공산성 갑옷'에 숨은 백제 멸망의 비밀은? (daum.net) 경향신문.[노형석의 시사문화재]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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