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백제 고고학 (14) 익산 왕궁리유적, 익산 왕릉원, 익산 미륵사지 본문
■ 익산 왕궁리유적
2012년 11월 26일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사적 제408호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북쪽의 후원(後苑) 공간으로, 보도(步道)시설이 잘 남은 북동쪽 성벽과 후원의 중심부를 경계 짓는 환수구(環水溝), 추정 원지(苑池), 곡수로(曲水路)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600~641) 시기에 조성된 왕궁성(王宮城)으로 지난 1989년부터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연차 발굴이 이뤄졌으며 이번 조사지역은 2009년부터 발굴하고 있는 유적 북쪽의 후원(後苑) 공간이다.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연못으로 추정되는 원지(苑池)와 수로 등이 발견됐다.
(출처; https://v.daum.net/v/20121126165007590 뉴시스. 2012. 11. 26.)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 600~641년) 때 조성된 왕궁성으로 지난 1989년부터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연차 발굴이 이뤄져 왔다. 그동안 궁성과 관련된 궁장(성벽), 전각건물, 정원, 공방 터 등이 조사되었고, 인장 기와, 중국제 자기, 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한 중요 유물 6600여 점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2014년 11월 21일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 대한 2014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오는 24일 오후 2시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고 밝혔다.
2015년 8월 20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월 24일부터 왕궁리 유적 서남쪽 일대 8천300㎡에서 진행한 제26차 발굴조사에서 사비기 왕궁 부엌으로 추정되는 동서 6.8m, 남북 11.3m 규모의 건물 유구(遺構)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부엌 건물지. 삼단 구덩이에서 철제솥과 토기 등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제공>>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나온 철제솥과 토기. <<문화재청 제공>>
익산 왕궁리 유적 제26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건물지와 가마터, 배수로. <<문화재청 제공>>
(출처; https://v.daum.net/v/20150820142934934 연합뉴스.2015. 8. 20.)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유적 백제 무왕(A.D.600~641)대 궁궐터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왕궁 건설의 원리와 기술을 활발하게 교류하고 공유한 점을 인정받아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특히 왕궁리유적의 후원은 우리나라 고대 궁성 내 후원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왕궁리유적의 후원은 구릉의 사면을 끼고 ‘U’자형태의 대형수로가 넓게 돌아가고, 후원의 남쪽과 서쪽에는 길고 짧은 6개의 곡수로(曲水路)와 4개의 집수시설(集水施設)이 설치돼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왕궁성의 효율적인 배수, 물의 저장, 왕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경시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익산=뉴시스】강명수 기자 = 11일 일반에 개방된 전북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의 남측 궁궐 담장을 익산시청 공무원이 블로그 기자단에게 설명하고 있다. 2017.07.11. smister@newsis.com
이 같은 왕궁리유적의 후원은 백제 궁성의 양식이 일본에 그대로 전파됐음을 증명하고 있다.
실제 6세기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왕궁성의 후원 양식은 일본 아스카시대의 비조경적원지(飛鳥京跡苑池)와 나라시대의 평성궁적 동원정원(平城宮跡 東院庭園)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이는 당시 백제인들이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를 통해 한층 발전시킨 이상화된 궁궐 정원의 모습을 일본에 전파한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론이다.
또 정전 건물 전면 좌우에 장랑 형식의 건물지가 확인되는 익산 왕궁성의 축조 방법은 7세기 일본에 축조된 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難波長炳豊碕宮), 아스카오카모도노미야(飛鳥岡本宮), 오우미오오쓰노미야(近江大津宮)에서 발견된 바 있어 백제 문명의 일본 전파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익산 왕궁성의 축조 방식이 유사한 시기에 일본 왕조에 적용되면서 세부적인 비교·검토, 역사적 재조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익산=뉴시스】강명수 기자 = 11일 전북 익산시와 문화재청은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을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은 왕궁리유적 내 5층 석탑의 모습이다. 2017.07.11. smister@newsis.com
시 관계자는 "익산 왕궁성의 축조 방식이 일본에 전파된 것은 학계에 알려진 정설"이라며 "익산의 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170711143152315 뉴시스. 2017. 7. 11.)
이 사리장엄구는 1965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보수를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됐다.
기단부 윗면에 品(품)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 광배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 1구와 불교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요령(靑銅搖鈴) 1개가 나왔고,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나왔다. 또 다른 구멍은 비어 있었다.
금제 사리내합·유리제 사리병·주칠 금동제사리외함(국립익산박물관 제공) /© News1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려 있는 2개의 구멍에서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마개가 덮여 있는 녹색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겨 책처럼 2개의 금줄로 묶은 도금 은제 금강경판(鍍金銀製金剛經板)이 각각 발견됐다.
사리장엄구는 이듬해인 1996년 7월에 국보 제123호로 지정됐다. 2000년대 이후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사리장엄구 중 녹색 유리병과 금제 연화문받침, 그것을 담고 있는 금제 사리내합은 사리를 봉안하는 장엄구 일괄품으로,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도금은제금강반야바라밀경판(국립익산박물관 제공) /© News1
특히 금강경판으로 불리는 유물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한 자료다. 발견 당시 "깨끗하고 눈부신 19매의 금판은 유례없이 정교한 타출(打出)기법을 보여줘 우리나라 공예사 연구에 새로운 기점이 되고, 인쇄 문화의 새로운 연구 자료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근 금강경판 복원 실험 결과 원판(原版)에 경전의 글자를 반대로 새긴 후 원판 위에 은판을 놓고 망치로 두드려 글자를 양출(陽出)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원판이 상하지 않는 한 여러 개의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금동제 경한내함·도금은제금강반야바라밀경판·주칠 금동제 경판외함(국립익산박물관) /© News1
이들 유물은 그동안 전국에 있는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가 국립익산박물관이 문을 열게 되면서 익산으로 돌아오게 됐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시회를 관람객들이 금강경판의 내용과 제작기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밝혔다.
국립익산박물관 개관식은 10일 정헌율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다.
신상효 관장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백제를 계승한 대표적인 사리장엄구이자 고대 인쇄 기술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문화재로서 국립익산박물관에서 꼭 봐야할 전시품"이라고 말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200106114904462 뉴스1. 2020. 1. 6.)
드넓은 왕궁의 윤곽과 함께 금과 유리를 생산한 공방, 대형 화장실과 배수로 그리고 기이한 돌들로 꾸민 정원 등이 발견된 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였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왕궁의 규모는 궁을 둘러싼 궁장(성벽)을 기준으로 동서 방향으로 약 240m에 남북 방향으로 약 490m입니다. 고대 왕궁이 이렇듯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 익산왕궁리유적의 모습. 왕궁리5층석탑의 모습이 보인다. |
ⓒ 국가유산청 |
▲ 옛 왕궁의 화장실과 배수로를 복원한 모습 |
ⓒ 윤찬영 |
▲ 수도를 가리키는 '수부(首部)'가 새겨진 기와조각들 |
ⓒ 국가유산청 |
2022년엔 백제왕궁박물관이 새 단장을 거쳐 문을 열었습니다. 전시실 맨 앞엔 '수부(首部)' 두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비도읍기 왕궁터로 알려진 부여 관북리유적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것으로,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또 2017년엔 같은 기와가 익산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익산토성'에서도 발견되면서 익산토성이 왕궁을 지키는 성곽임이 드러났습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은 다행히도 도시화의 거센 흐름으로부터 어느 정도 비껴서 있으면서 지금도 수천 년 전의 풍광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글에 "폐허"라고 쓰신 것도 그래서일 테죠. 30년 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들이 지금은 단정하게 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은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관북리유적 등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출처; https://v.daum.net/v/20240730112103010 오마이뉴스. 2024. 7. 30.)
■ 익산 왕릉원
향가 ‘서동요’는 7세기 초 신라·백제 사랑꾼들의 연애담이다.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청년 서동을 밤에 만났다는 야릇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래의 사연이 깃든 곳이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두 기의 무덤 ‘쌍릉’이다.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2기 묘가 나란히 있는 익산 쌍릉(사적 제97호)에서 전형적인 백제 사비기 굴식돌방무덤과 인골을 담은 나무상자가 발견됐다.
돌방으로 된 대왕릉의 내부 모습.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 무왕(?~641)이 쌍릉의 큰 무덤인 대왕릉에, 선화공주는 작은 소왕릉에 잠들었다고 전해져왔는데, 2017~19년 발굴조사 결과 이는 상당 부분 사실이라고 발표됐다. 대왕릉은 1917년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처음 조사해 치아와 목관의 관재, 토기 등을 발굴했고,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2017년 재발굴을 벌여 인골을 발견했다.
이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분석한 결과 인골의 정체는 620~659년 숨진 60~70대 남성 노인으로 드러났다. 이에 부합하는 백제 왕은 600년 즉위해 641년 숨진 무왕이 유일하다. 소왕릉도 2019년 발굴했으나 선화공주임을 입증할 만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최근 이와 관련해 한 소장 연구자가 파격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야쓰이의 발굴 유물과 조사 자료를 소장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2015년쌍릉 발굴 보고서를 펴낼 때 학예실장이었던 이주헌씨다. 그는 보고서에서 1917년 발굴 때 치아가 20~30대 여성의 것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선화공주 매장설’을 제기했었다.
그의 주장은 이후 인골 발견과 무왕의 신원 확인으로 이어진 쌍릉 발굴을 촉발했다. 이때 자신의 설을 사실상 논박당한 이씨는 지난 8일 동국대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학술발표회에서 ‘출토문자로 본 능산리형 석실의 역연대와 주인공’이란 논고를 내어 반박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2020년 12월18일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된 익산 쌍릉 석실 인골. 연구진은 당시 설명회에서 과학적으로 인골을 분석한 결과 7세기 초중반 숨진 60~70대 이상 노년층 남성의 것으로 드러났고, 이런 정황에 부합하는 당대 백제 왕은 600년 즉위해 641년 숨진 무왕이 유일하다고 밝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반박 논고의 요체는 지난 30여년간 공주·부여에서 숱하게 발견된 왕릉급 고분 발굴 과정에서의 고고학적 맥락과 출토품의 문자 기록 및 형태, 무왕 등 백제 왕들의 장례와 부장품에 대한 문헌기록 등을 도외시한 채 인골에 대한 과학적 분석 등에만 치중해 무왕 주인공설을 고착시켰다는 것이다. 쌍릉의 석실 단면은 6세기 말~7세기 초의 육각형을 띠고 있어서 7세기 중반 숨진 무왕보다 시기가 앞선 것이란 해석을 냈다. 이에 따르면 쌍릉의 두 무덤 주인은 무왕의 선대인 혜왕과 법왕이다.
쌍릉의 대왕묘 목관 안에서 1917년 출토된 금옥대 허리띠 장신구들도 무왕 주인설을 가로막는 유물로 지목된다. 북조~수나라 고급 관리들이 사용한 옥대 허리띠와 같은 계통으로 보이는데, 이씨는 이 허리띠는 당 현경 1년(656년)에 제정된 의복제도에서 처음 적용됐으므로, 641년 세상을 떠난 무왕이 재위했을 때나 장례 때 금옥대 허리띠를 입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왕설을 주장해온 이병호 동국대 교수와 쌍릉을 발굴한 이문형 원광대 연구원은 “사리감의 양식과 보수적인 무덤 석실 양식은 앞서가는 것과 오래된 것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는데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단계론적 가설로 쌍릉의 피장자 문제를 설명하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재반박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240314104509065 한겨레. 2024. 3. 14.)
2023년 10월 23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021년부터 최근까지 부여 왕릉원의 3·4호분을 조사해 입지 특성과 고분의 구조, 축조 과정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백제가 충남 부여에 도읍을 둔 사비기(538∼660) 왕릉급 무덤 떼인 '부여 왕릉원'의 일부 무덤 구조와 축조 과정이 밝혀졌다.
부여 왕릉원은 사비 도읍기 당시 123년간 재위한 백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3·4호 무덤은 일제강점기에 한 차례씩 조사가 이뤄졌으나 도굴 갱을 타고 돌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놓인 유물을 수습하고 사진과 실측 도면을 남기는 데 그쳤다.
부여 왕릉원 3·4호분 발굴조사 후 전경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조사 결과, 3·4호 무덤은 중앙에 모여 있는 무덤 중 서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덤은 돌로 된 방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출입구를 기준점으로 삼아 직경 20m 안팎의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든 부분)을 구획했고 경계 지점에 높이 40㎝, 너비 25㎝ 정도의 다듬은 돌(호석)을 세웠다.
호석을 따라 바깥 부분에는 약 1.4m 거리를 두고 돌을 깨 열을 지어 놓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제강점기 당시 4호분 조사 사진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돌방에는 한자 '철'(凸) 자 형태의 구덩이를 만들었는데, 능선 정상부 쪽이 돌방 뒷벽이고 경사면 아래쪽이 출입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는 "시신을 안치한 뒤 출입구에는 판석(板石·널판같이 뜬 돌)으로 막아뒀으며, 무덤 입구에서 시신을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은 흙으로 채워 바깥의 호석과 연결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3호와 4호 무덤은 만드는 방식은 거의 같지만, 일부 차이가 있었다.
연구소에 따르면 3호 무덤은 돌방 중심을 기준으로 봉분을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쌓았지만, 4호 무덤의 경우는 수평으로 쌓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부여 왕릉원 4호분 조사 과정에서 나온 대형 항아리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또, 3호 무덤에서는 돌방 출입구에 대형 석재를 덧대고 바닥에 널찍한 석재 2매를 겹쳐 만든 단과 최대 깊이가 100㎝에 이르는 널길 배수로 등이 추가로 확인되기도 했다.
연구소는 이번 조사 과정에서 관을 꾸민 장신구와 기와 등도 찾아냈다.
4호 무덤에서는 동에 금을 입혀 만든 불꽃 형태의 목관 장식금구(裝飾金具)가 확인됐는데, 이 유물은 전북 익산 쌍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왕릉원 4호분 도굴 갱에서 출토된 목관 장식금구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3호 무덤의 경우, 연꽃 문양이 찍혀있는 기와인 연화문 수막새 조각 등이 나왔다. 백제시대 절터 유적인 부여 능산리 사지(寺址)에서 일반적으로 쓴 기와로, 고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연구소 측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과는 1천500여 년 전 부여 왕릉원이 운영될 당시 경관 복원을 위한 중요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여 왕릉원 3호분 돌방과 봉분의 층위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출처; https://v.daum.net/v/20231023095655842 연합뉴스. 2023. 10. 23.)
■ 익산 미륵사지
▲ 미륵산을 배경으로 두 개의 석탑이 우뚝 서있는 미륵사지 풍경 |
ⓒ 윤찬영 |
▲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를 들이붓는 바람에 본래 모습을 잃었던 미륵사지석탑 |
ⓒ 국가유산청 |
▲ 20년간의 해체 수리를 거쳐 되살아난 미륵사지석탑. |
ⓒ 윤찬영 |
▲ 2009년 미륵사지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
ⓒ 국가유산청 |
사리장엄구가 발견되고 다시 10년이 지난 2019년 4월 30일, 마침내 미륵사지석탑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해체·수리 결정이 내려진 지 꼭 20년 만이었습니다. 이로써 미륵사지석탑은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오랫동안 보수작업을 거친 석탑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도 같은 해에 문을 열었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시설의 절반 이상이 땅 밑에 자리한, 이른바 '보이지 않는 박물관(invisible museum)'입니다. 미륵사지가 오랜 세월 간직해온 본연의 아름다움을 행여라도 박물관이 해치지 않도록 한 배려입니다. 이런 박물관은 우리나라에 하나뿐입니다.
2009년 1월 14일 오전에도 이곳은 해체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순간 배병선(당시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됐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황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장엄구였다. 통상 심주석 아래 심초석(心礎石)에 들어 있는 사리장엄구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솔직히 다보탑이나 석가탑 해체보수 때에도 느끼지 못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실수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보수 현장. 석탑 1층 기단 위에서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을 바라보던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6)은 떨리는 목소리로 7년 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발견 당시를 회고했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모시게 된 경과를 기록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 소장이 “여기서 희대의 유물이 나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다”며 옛 기억을 되짚는 동안 현장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목봉(木棒)을 내리쳐 상층 기단부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배병선은 유물 촬영 사진을 들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최맹식 당시 고고연구실장(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난영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규식 보존과학연구실장(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등 전문가 29명으로 ‘유물 수습팀’이 구성돼 현장에 급파됐다.
심주석 안 26.5cm 깊이의 구멍(사리공)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호가 온갖 구슬들에 파묻힌 상태였다. 첫눈에 봐도 지금껏 발굴된 백제 금속 유물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수습팀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유물을 꺼내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사리공에는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 청동합(靑銅盒),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안치된 순서와 반대로 유물을 꺼내야 손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워낙 좁은 공간에 유물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굴절거울 등을 동원해도 안치된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사리호와 사리봉영기 가운데 무엇을 먼저 꺼낼지 의견이 엇갈렸다. 배병선은 고민 끝에 사리호부터 꺼내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사리봉영기가 사리공 벽면에 걸쳐 있어서 밑이 살짝 뜬 상태였어요. 금판에 새긴 글자 위의 주칠(朱漆·붉은색 옻칠)이 떨어져 나갈까 봐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사리호랑 직접 붙어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금 구슬을 꺼낼 땐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하나씩 건져 올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외부 공기에 노출된 유물의 손상을 막으려면 신속한 수습이 필요했다. 이틀에 걸쳐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강행군을 벌였다. 배병선은 발견부터 수습 완료까지 사흘 동안 6시간만 자고 버텼다.
사리봉영기의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꿨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확인시켜 줬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백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출처; 석탑 해체 중 새어 나온 1370년前 황금빛에 모두가 ‘동작 그만’|동아일보 (donga.com))
<자료출처>
https://v.daum.net/v/20121126165007590 뉴시스. 2012. 11. 26.
https://v.daum.net/v/20141121100911639 파이낸셜뉴스. 201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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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40730112103010 오마이뉴스. 2024. 7. 30.
“백제 무왕이십니다”…뼛조각에 학자들 고개 숙이다 (hani.co.kr)
석탑 해체 중 새어 나온 1370년前 황금빛에 모두가 ‘동작 그만’|동아일보 (donga.com)
<참고자료>
익산(益山) 왕궁리 유적서 고대 성곽, 건물터 발굴 (daum.net)1995.11.17
https://v.daum.net/v/20150824125519252 아시아경제. 2015.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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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1807120844591372018.07.1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55년 만에 익산 품으로 (daum.net)2020. 1. 6.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성인 여성 치아 4점 출토 | 연합뉴스 (yna.co.kr)2016.01.26
익산 쌍릉, 발굴 뒤엔 어떻게 하나 | 연합뉴스 (yna.co.kr)2018/04/24
익산 쌍릉 소왕릉서 1m 넘는 백제 묘표석 2점 발견 | 연합뉴스 (yna.co.kr)2019.09.19.
익산 쌍릉 소왕릉 재정비…훼손 지형 복구·탐방로 개설해 공개 | 연합뉴스 (yna.co.kr)2021.04.01
https://v.daum.net/v/20240611193141276 한국일보. 2024. 6. 11.
https://v.daum.net/v/20240530132247845 경향신문.202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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