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3. 백제 고고학 (13)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 본문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현장을 지휘한 학예연구사 김종만이 향로를 처음 발견했다.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것이다.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기와 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다. 김종만의 보고를 받은 신광섭이 곧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인부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손수 기와를 하나씩 빼냈다. 웅덩이 안에서 솟구치는 물을 스펀지로 계속 닦아 내야 했다. “유물이 다칠까 봐 몇 시간 동안 맨손으로 파냈어요. 추운 겨울 저녁에 연신 손을 찬물에 담갔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집디다.”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다.
“여보, 간밤에 용꿈을 꿨지 뭐예요.”
“당신 늦둥이라도 낳으려는가. 하하.”
1993년 12월 12일 오후 8시 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 발굴 현장에 있던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65·현 울산박물관장)은 이날 아침 출근길에 아내와 나눈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거대한 용이 온몸을 비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용의 아가리 위로 연꽃이 피고 다시 그 위로 첩첩산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펼쳐졌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15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신선 세계 묘사한 백제의 특급 문화재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껏 발굴된 백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얼마나 귀한지 국외 반출 금지 문화재로 지정돼 지금껏 한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향로는 백제 후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높이 61.8cm, 무게 11.8kg에 이르는 이 대형 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예술성이나 규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꼭대기에 봉황이 달린 향로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다섯 겹에 걸쳐 이어져 있다.
봉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활을 쏘는 무사부터 머리를 감는 선인(仙人), 각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樂士)들까지 총 18명의 인물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뿐인가. 호랑이와 사슴, 사자, 반인반수(半人半獸) 등 65마리의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광섭이 꼽는 백미는 향로 전체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용이다. “역동적인 용틀임은 누가 봐도 힘이 넘쳐요. 특히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은 ‘연화화생(蓮華化生·연꽃에서 만물이 탄생한다는 세계관)’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1500년 깊은 어둠을 뚫고 다시 세상으로
향로가 출토된 과정은 용꿈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발굴팀은 당시 신광섭을 비롯해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김정완(현 국립대구박물관장), 학예연구사 김종만(현 국립공주박물관장) 등으로 구성됐다. 부여군이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 사이에 관람객을 위한 주차장을 짓기로 함에 따라 1993년 마지막 발굴이 시작됐다.
여건상 예산이 부족한 데다 시간에 쫓겨 자칫 능산리 절터는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부여 토박이인 신광섭은 예부터 이곳에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에 주목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왕릉(능산리 고분)과 나성에 인접한 곳이라면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을 것 같다는 감이 왔어요.”
신광섭은 박물관계에서 ‘불도저’로 통한다.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노태섭 기념물과장(전 문화재청장)을 만났다. 발굴 현장을 많이 다녀본 노태섭도 남다른 감을 갖고 있었다. 과장 전결로 2000만 원의 예산 지원이 즉시 이뤄졌다.
신광섭은 한발 더 나갔다. 당초 시굴(발굴에 앞서 유구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만 파보는 것)로만 발굴 허가가 났지만 과감히 절터 서쪽 건물터(나중에 공방 터로 밝혀짐)에 대한 전면 발굴에 나섰다. 발굴 성과가 제때 나오지 않으면 주차장 공사가 강행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왔어요. 여기서 향로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현장을 지휘한 학예연구사 김종만이 향로를 처음 발견했다.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것이다.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기와 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다. 김종만의 보고를 받은 신광섭이 곧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인부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손수 기와를 하나씩 빼냈다. 웅덩이 안에서 솟구치는 물을 스펀지로 계속 닦아 내야 했다. “유물이 다칠까 봐 몇 시간 동안 맨손으로 파냈어요. 추운 겨울 저녁에 연신 손을 찬물에 담갔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집디다.”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다.
고고학계는 백제 말기인 사비시대에도 문화예술이 고도로 융성한 사실을 금동대향로가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종래는 백제의 공예 기법이 무령왕릉이 조성된 웅진시대에 절정에 달한 뒤 사비시대부터 점차 쇠퇴한 것으로 봤다. 특히 금동대향로를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봤던 견해는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2007년과 2009년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각각 출토된 사리장엄(舍利莊嚴·사리를 봉안한 공예품)은 백제가 금동대향로와 같은 고도의 예술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췄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군 능산리에서 대한민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보물이 발굴됐다.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주변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끝판왕’ 유물이었다.
남은 기록이 많지 않아 한때 ‘잃어버린 왕국’이라 불리던 백제는 금동대향로의 발견 이후 고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최고의 문화적 성취를 이룬 국가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집념이 낳은 기적…백제 금동대향로의 발굴
국립부여박물관 입구
백제 예술 세계의 정수를 담은 금동대향로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보 중의 국보’로 대우받는 백제 금동대향로의 발굴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90년대 초, 부여군은 백제 왕릉이 모여 있는 능산리 고분군의 주차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분군 서쪽에 새로운 주차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사전 조사 중 주차장 후보지에서 건물 주춧돌이 발견됐고 깨진 기와, 토기 조각 등도 나왔다. 지하에 백제시대 유적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당시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현재보다 부족했던 시절이라 이 정도 수준의 유물만으로는 공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찜찜했던 조사단은 문화재관리국에 “한 번만 더 파보자”고 요청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웬걸, 허가가 떨어졌다.
1993년 12월 백제금동대향로 출토 당시 모습.
1993년 12월, 강추위 속에 발굴 작업이 한창이던 중 진흙 속에서 높이 61.8cm의 ‘커다란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10일간의 보존 처리를 거친 후, 정체가 밝혀지자 모두가 경악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금동대향로였다. 동아시아 전역을 통틀어 이만큼 정교한 예술성과 기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콘크리트에 파묻힐 뻔한 백제의 예술혼이 현대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세상은 난리가 났다. 언론은 일제히 ‘동북아 최고 걸작’, ‘초(超) 국보급’이라는 문구로 대서특필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6년에 국보 제287호로 지정됐고 지금까지 국외 반출이 허가된 적 없는 ‘귀하신 몸’이기도 하다.
백제 금속공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 금동대향로를 직접 보면 완벽한 보존 수준에 놀라게 된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워 기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현지 문화관광해설사는 “향로를 둘러싼 진흙이 공기를 차단해 진공 상태가 되면서 부식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교과서와 인터넷에서 사진을 여러 번 봤음에도 금동대향로의 실물을 보면 홀린 듯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아래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웅크린 용이 연꽃과 겹겹이 포개진 산을 떠받치는 형상이고 꼭대기에는 턱 밑에 여의주를 품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편 봉황이 서 있다. 융성했던 백제 문화의 진수를 직접 보니 입이 한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백제 금동대향로를 관람하는 방문객들
몸체에는 피리, 소비파, 현금, 북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를 비롯한 인물들과 봉황, 용, 호랑이, 사슴, 물고기, 학 등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 악사를 들여다보면 입가의 미소와 머리 모양, 옷의 선, 악기의 현까지 표현했는데 그 세밀한 기술력은 천 년이 훌쩍 넘은 지금 봐도 경이롭다.
금동대향로의 발굴로 백제의 이미지는 쇠락한 나라에서 순식간에 위대한 문화대국으로 격상됐다. 부여왕릉원에는 금동대향로가 발견됐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앞에 서면 자칫 주차장 콘크리트 아래 묻힐 뻔한 백제 최고의 유물이 세상에 나타났던 그 순간의 감동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백제예술의 정수’ 금동대향로에는 모두 10개의 향연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은 맨 위 봉황의 좌우 가슴팍에 2곳, 뚜껑 윗부분에 10곳이다. 뚜껑 윗부분 구멍은 윗줄에 5곳, 아랫줄에 5곳 뚫려있다. 그런데 구멍이 삐뚤빼뚤하다.
‘백제판 천존고(天尊庫)?’ 최근 국립부여박물관이 백제 국보관 설립을 위한 착공식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좀 객쩍은 비유이겠지만 신라 신문왕(681~692)이 만파식적(피리)과 거문고를 보관했다는 ‘보물창고’를 떠올렸다.
<삼국유사> ‘기이·만파식적’조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비가 오다가 개이고,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잔잔해졌다”면서 “이것을 월성(도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다”고 전했다.
‘신라 천존고와, 이제 세우겠다는 백제 국보관이 무슨 상관이냐, 웬 무리수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백제예술의 정수’ 금동대향로에는 모두 10개의 향연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은 맨 위 봉황의 좌우 가슴팍에 2곳, 뚜껑 윗부분에 10곳이다. 뚜껑 윗부분 구멍은 윗줄에 5곳, 아랫줄에 5곳 뚫려있다. 그런데 구멍이 삐뚤빼뚤하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러나 백제 국보관을 만들고 수백년, 수천년이 지나면 신라 천존고와 같은 전설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새로 조성될 국보관(1543평·지상 3층, 지하 1층)에 입주할 ‘국보 유물’은 무엇이 될까.
“‘백제 금동대향로’,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등 사비 백제 시대(538~660)의 대표 문화유산이 되겠죠.”(신영호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그러나 그중 ‘원톱’은 뭐니뭐니 해도 금동대향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롭게 들어설 국보관을 아예 ‘백제 금동대향로’ 위주로 구성해보면 어떠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만파식적’ 중심의 천존고처럼….
금동대향로가 발굴된지 30년이 지났지만 향로 속 향연 구멍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중국산이 아닌 이유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절터 공방의 목제 수조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볼수록 대단한 향로다. 뚜껑 꼭지에는 여의주를 턱 밑에 괸 봉황(추정)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뚜껑 윗부분에는 5명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뚜껑은 첩첩 산중의 자연세계를 표현했다. 다양한 사람과 온갖 진금기수(珍禽奇獸)가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해서 향로에는 사람 19명, 짐승 67마리 등 총 86개의 얼굴이 보인다. 향로를 친견한 연구자들의 첫마디는 ‘중국산 향로’라는 것이었다. 백제산이라면 이렇게 정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봉황의 양 가슴팍에 뚫은 두 구멍의 지름은 비슷했다. 향로를 주조할 때 뚫어놓은 것이 분명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러나 곧 ‘금동대향로=중국 향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우선 금동대향로 처럼 크고(61.8㎝), 무겁고(11.8㎏), 정교한 향로는 같은 시대(6~7세기)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 금동대향로에는 전형적인 백제 요소가 표현되어 있다.
금동대향로 뚜껑에 표현된 삼산형(三山形)의 산은 부여 외리 출토 ‘무늬전돌 세트’(보물) 중 ‘산수인물무늬 전돌’과 비슷하다. 분위기 또한 유사하다. 향로의 꼭대기에 표현된 ‘봉황’도 ‘봉황무늬 전돌’의 표현과 흡사하다. 금동대향로의 대좌(용받침) 문양 역시 ‘반룡무늬 전돌’의 평면구도와 일치한다. 그래서 금동대향로와 무늬전돌을 제작한 백제 장인이 동일인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온다.
향로 안에서 바라본 뚜껑. 윗줄 향연구멍 5개 중 2개는 비슷하다. 다른 구멍 3개의 크기는 부정형이거나 크다. 3개의 구멍은 크기를 인위적으로 넓힌 것이 분명했다. 아랫줄 구멍 5개는 모두 확장했다. 둘쭉날쭉 이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삐뚤빼뚤한 구멍의 정체
그러나 금동대향로가 발굴된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연구자들이 ‘쉬쉬~’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다.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부각시킬 필요도 없는…. 그것은 금동대향로의 사이에 존재하는 ‘선명한 흠결’, 즉 향로 몸체 사이사이에 뚫어놓은 향연 구멍이다. 즉 향로 구멍은 모두 12곳이다.
맨 위 봉황의 좌우 가슴에 2곳, 뚜껑 윗부분에 10곳 등이다. 뚜껑 윗부분 구멍의 10곳은 윗줄에 5곳, 아랫줄에 5곳 뚫려있다.
이 구멍들이 좀 이상하다. 일정하게 뚫린 게 아니라 크기가 들쭉날쭉하다. 또 어떤 것들은 일정한 원형의 형태로, 또 어떤 것들은 부정형으로 뚫려 있다. 기존의 구멍을 크게 확장시킨 흔적이 역력다. ‘보이지 않는 곳의 흠결’이다.
국립부여박물관 보존과학실이 아랫줄 구멍을 인위적으로 넓히지 않고 원래 크기대로(작게) 해놓고 분향 실험을 해보았더니 향불이 꺼졌다. 향불은 윗줄 구멍의 확장 여부와는 상관없었다. (출처:김선영·황현성, ‘분향실험을 통한 백제금동대향로 내부 대류특성 연구’, <보존과학지>35, 2019)
아니 ‘백제예술의 정수’라는 금동대향로에 어떻게 이런 투박하고 거친 구멍이 송송 뚫려있단 말인가.
마침 2023년 말 향로 발굴 30주년을 맞아 열린 당시 조사원들의 집담회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다.
“윤무병 선생(1993년 발굴 지도위원·당시 원광대 교수)은 이런 들쭉날쭉한 구멍의 모양새를 보고 ‘역시 백제산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여쭤봤죠. 그랬더니….”(신광섭 전 부여박물관장)
윤 교수의 해석은 기발했다. “백제인의 자유분방을 보여주기도 하고, ‘대충~대충’ 의식을 말해주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아니 뭐, 대충 대충 해유~’라는 충청인의 여유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분향실험 결과 1350년전 백제 장인의 고군분투가 그려졌다. 즉 백제 장인은 원활한 향불 태우기를 위해 향 구멍 12개를 뚫은 뒤 주조했다. 그러나 분향 실험을 했더니 향이 꺼졌다. 장인은 향로의 구멍을 확장한 뒤 향을 피워보았다. 향이 온전하게 피어올랐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12개 중 8개를 확장했다
거두절미 하고 어떻든간에 궁금증은 풀어야 한다. 절세의 명품인 금동대향로를 만든 백제 장인이 아닌가. 그런 분이 왜 기왕에 뚫어놓은 구멍을 그렇게 들쭉날쭉 넓혔을까.
조사보고서는 “작게 뚫어서 향이 원활하게 타지 않자 구멍을 인위적으로 넓힌 흔적”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실물 향로로 직접 향을 태워볼 수 없었으므로 그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금동대향로 자체가 미완성품이거나, 혹은 ‘심각한 결격 사유(향을 피울 수 없는) 때문에 사찰의 나무물통에 버려진 것’이라는 견해까지 등장했다.
2017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 보존과학실이 ‘향연 구멍의 비밀’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향로의 구멍 12개는 각각 제 역할이 있었다. 아래 구멍 5개가 산소를 공급하는 흡기공이라면 윗부분(5개)과 봉황 앞가슴의 구멍(2개)은 향을 불사르는 배연공이었다.
박물관 측은 CT(컴퓨터단층촬영)와, 3차원으로 스캔한 원본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금동대향로의 정밀 재현품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향연 구멍을 실측한 결과 봉황의 양 가슴에 뚫은 구멍의 지름은 약 3.88㎜와 3.8㎜로 비교적 같았다.
윗줄 향연구멍 5개 중 2개(지름 4.63㎜와 4.65㎜)도 비슷했다. 그러나 다른 구멍 3개의 크기는 부정형(4.67~5.5㎜)이거나 약 8.4㎜, 8.75㎜ 정도로 컸다. 어떻든 3개의 구멍은 크기를 인위적으로 넓힌 것이 분명하다.
아랫줄 구멍(5개)은 어떨까. 4.9~8.94㎜ 정도로 측정되었다. 이 5개의 구멍 역시 원래는 작은 크기로 뚫었지만 제작과정에서 확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향연 구멍 12개 중 4개는 원래 크기였고, 나머지 8개는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세부적으로 짚어보자. 꼭대기 봉황의 좌우 가슴팍(2개)과, 윗줄 구멍 중 정면 쪽(2개)은 본래 뚫었던 크기로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윗줄 구멍 5개 중 3개와 아래줄 구멍 5개 전부는 인위적으로 넓혔다.
봉황 가슴 구멍(2개)와 윗줄 구멍(5개)은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배출되는) 배연공이다. 배연공에서는 크기와 상관없이 연기가 배출되었다. 백제 장인은 왜 3개의 배연공만 확장시킨 것일까. 아랫줄 구멍(흡기공) 5개를 확장시키는 김에 윗줄 배연공도 넓히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굳이 배연공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중단한 것이 아닐까.|국립부여박물관 제공
■향이 꺼진 이유
왜 넓혔을까. 정밀 재현품을 두고 실시한 분향실험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다.
먼저 아랫줄 구멍을 인위적으로 넓히지 않고 원래 크기대로(작게) 해놓고 분향 실험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연기(향)가 꺼졌다. 향불은 윗줄 구멍의 확장 여부와는 상관없이 꺼졌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향로의 아랫 구멍(5개)이 산소를 공급하는 흡입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불이 꺼지는 원리와 같다. 이러한 분향 실험을 토대로 1350여 년 전 향로 제작 당시의 상황을 복원해볼 수 있다.
즉 밀랍으로 정성스레 향로를 빚어 향 구멍 12개를 뚫은 뒤 주조했다. 그런 뒤 분향 실험을 해봤더니 ‘아뿔사!’ 향이 꺼졌다. 그러나 이렇게 정교하게 만든 향로를 어찌 버린다는 말인가. 원활한 산소 공급을 위해 향로 밑부분의 구멍을 ‘사정없이’ 넓힌 뒤 향을 피워보았다. 그랬더니 향이 온전하게 피어올랐다.
금동대향로 향불 실험결과 향로 내부의 대류 현상도 읽을 수 있었다. 즉 향이 연소되면서 연기가 올라가 봉황(구멍 2개)과 윗줄 배연공(5개)으로 배출된다. 배출되지 않는 나머지 연기는 아래로 내려온다. 이때 아랫줄 흡기공에서 바깥 공기가 유입된다. 들어온 공기와 함께 연기가 향로 내부에서 순환한다. 열을 받은 공기가 다시 위로 솟으며 내부 순환을 계속한다.|김선영·황현성의 논문에서 국보 반가사유상(옛 78호)의 감마선 촬영 결과 불상의 등 부위에 반타원형 동판을 따로 붙인 흔적을 확인했다. 주조할 때 생긴 구멍을 동판으로 붙여 수리한 것이었다. 또 78호는 머리와 몸체, 발받침대 등을 따로 만들어 붙인 뒤 청동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배연공 3개는 왜 넓혔을까
이 대목에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아랫줄 구멍 5개가 공기(산소)를 공급하는 흡기공이라면 봉황 가슴 구멍(2개)과 윗줄 구멍 5개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리고 그 7개 중 왜 3개만 확장해놓았을까.
분향 실험 결과 봉황 가슴 및 윗줄 구멍 7개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배출되는) 배연공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7개의 배연공에서는 크기와 상관없이 연기가 배출되었다. 다만 구멍의 크기에 따라 연기의 양과 불완전 연소량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의 장인은 왜 7개의 배연공 중 3개만 확장시킨 것일까. 아마도 아랫줄 구멍(흡기공) 5개를 확장시키는 김에 혹시 몰라 윗줄 배연공도 넓히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굳이 배연공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중단한 것이 아닐까. 배연공이 커지면 불완전 연소량이 줄어(즉 완전 연소가 되어) 금방 타버릴 수 있으니까….
반가사유상(국보 78호)은 몸체와, 머리, 발받침대 등을 따로 만들어 붙였기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고, 그 사이 청동 쇳물이 흘러들어가니 거스러미가 생겼다. 몸체의 두께가 얇아서 생기는 결함도 나타났다. 두께가 얇아 청동 쇳물의 흐름이 몸체와 떨어질수록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출처:민병찬,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방법 연구-국보 78·83호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89, 국립중앙박물관, 2016)
■향로 속 대류현상의 원리
그럼 되도록 오래 피워야 할 향불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배연공의 ‘3(확장)+4(원 크기)’에는 향불의 연소 ‘황금비율’을 찾고자 한 백제 장인의 분투가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공기를 공급하는 흡기공의 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국립부여박물관의 분석결과 금동대향로 내부의 대류 현상도 읽을 수 있었다.
즉 향이 연소되면서 연기가 올라가 봉황(구멍 2개)과 윗줄 배연공(5개)으로 배출된다. 배출되지 않는 나머지 연기는 아래로 내려온다. 이때 아랫줄 흡기공에서 바깥 공기가 유입된다. 들어온 공기와 함께 연기가 향로 내부에서 순환한다. 열을 받은 공기가 다시 위로 솟으며 내부 순환을 계속한다.(황현성 국립박물관단지 통합운영지원센터 자료보존실장)
기원전 3~2세기 청동기·초기철기시대 대표유물인 고운무늬 청동거울은 초정밀 예술을 자랑하는 국보유물이다. 그래서 ‘국보경’으로 통한다.|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78호 반가사유상의 흠결
이렇게 과학적인 분석 결과를 인용하며 금동대향로의 묘미를 찾아봤다.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금동대향로의 명성 치고는 향로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흠결’이 좀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뭐 어떤가. 오히려 윤무병 교수의 언급대로 ‘자유분방함’과 ‘여유’, ‘유연함’이 녹아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뿐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 중 ‘흠결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이 한 둘이 아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옛 78호)을 꼽아보자.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78호 반가사유상 분석 결과 1500년 가까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흠결을 찾아냈다. 감마선 촬영 결과 78호의 등 부위에 반타원형 동판을 따로 붙인 흔적을 확인한 것이다. 주조할 때 생긴 구멍을 동판으로 붙여 수리한 것이었다.
78호는 점토와 밀랍을 빚어 머리와 몸체, 그리고 왼발의 연화좌(불상이 앉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붙인 뒤 청동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렇게 ‘몸체 따로’, ‘머리 따로’, ‘왼발 연화좌’ 따로 만들어 붙였기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고, 그 사이 청동 쇳물이 흘러들어가니 거스러미(까칠까칠한 부분)가 생겼다. 또 다른 결함도 보였다.
정교하고 완벽한 ‘국보경’에서도 몇가지 흠결이 발견됐다. 거울 주조 때 거푸집의 주물사에 수분이 너무 많았거나 점토분이 적어서 일어나는 결함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제공
■날씬미의 후유증
몸체와 머리, 왼발 연화좌 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쇳물이 흘러가지 않은 현상이 목격되었다. 이런 흠결의 이유도 있었다.
78호 반가사유상의 두께가 너무 얇았기 때문이었다. 분석결과 78호의 몸체 두께는 평균 4㎜에 불과했다. 또다른 반가사유상(옛 국보83호·평균 10㎜)의 40% 두께에 불과했다. 그러니 어찌되었겠는가. 밀납의 두께가 얇으니 청동 쇳물이 제대로 흘러 들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몸체와 떨어질수록 쇳물의 흐름 또한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78호의 장인은 왜 이렇게 제작 과정의 어려움을 자초했을까. 적은 쇳물로 큰 불상을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그 당시 그렇게 날씬한 불상을 선호했기 때문일까. 그러한 흠결이 제작 1500년만인 이제야, 그것도 첨단과학의 힘에 의해 들통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78호 반가사유상의 반전매력일 수 있다. 78호 장인이 육안은 물론 X선 등으로도 구별할 수 없는 절정의 완성도를 과시하며 정밀 수리해냈다는 뜻이 아닌가.
국보경에는 동심원을 그리면서 맨 마지막 원을 장인이 대충 손으로 슬쩍 그려넣은 흔적이 보인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제공
■손으로 대충 그린 국보경 동심원
기원전 3~2세기(청동기·초기철기)의 대표 유물인 ‘고운무늬 청동거울’은 어떤가.
흔히 ‘국보경’으로 통하는 이 청동거울에는 반복된 동심원과, 그 동심원 안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직선을 이리저리 규칙적으로 새긴 삼각문양 등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세어본 선만 1만3000개가 넘는다. 선의 간격은 0.3~0.34㎜, 원의 간격은 0.33~0.55㎜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정교하고 완벽한 ‘국보경’에서도 몇가지 흠결이 발견된다.
우선 거울 주조 때 거푸집의 주물사에 수분이 너무 많았거나 점토분이 적어서 일어나는 결함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와함께 눈길을 사로잡는 ‘착안점’이 따로 있으니, 그것은 동심원의 한 가운데를 장인의 손으로 대충 그린 흔적이다.
0.3㎜의 초정밀 문양까지 정교하게 그려낸 2300년전 장인이 왜 마무리 동심원은 대충 손으로 그렸을까.
그럴수밖에 없었다. 컴퍼스로 동심원을 그려보라. 한 가운데 동심원은 표시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가운데엔 컴퍼스를 그릴 때 생기는 자국(원점)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마도 청동기 장인은 그 자국을 주물사로 메우고 그 위에 화룡점정 하듯 마지막 동심원을 손으로 그려넣었을 것이다.
이 손그림을 국보경의 흠결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극초정밀의 예술을 보여주면서 일말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2300년 전 장인의 센스로 여길 수 있다.
가장 먼저(1921) 출토된 국보 ‘금관총 금관’의 관테에는 미리 만든 2줄 구멍은 방치해두고 새롭게 3줄 구멍을 뚫어 곡옥(굽은옥)과 달개를 단 흔적이 보인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실수 방치한 신라금관
신라 예술의 정수인 금관은 어떤가. 그처럼 화려한 외모의 문화유산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약하기 이를 데 없다. 관의 세움장식은 아주 얇은 금판을 길쭉하게 오려 만들었다. 특히 관테에도 2개의 금못으로만 고정하고 있다. 그러니 “실제로 금관을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장식이 꺾여 내려앉을 정도”(이한상 대전대 교수)라 한다.
그중 가장 먼저(1921) 출토된 국보 ‘금관총 금관’에서 ‘흠결’이 도드라진다.
즉 이 금관의 관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구멍이 상하 두 줄로 촘촘히 뚫려있다.
이 두줄 구멍은 무엇인가. 원래는 달개나 곡옥 등을 매달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금관 제작자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단순실수인지는 몰라도 미리 만든 2줄 구멍은 방치해두고 새롭게 3줄 구멍을 뚫어 곡옥과 달개를 달았다. 황남대총(북분) 금관(국보)에도 흠결이 보인다. 관테에 무늬를 잘못 새겨서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만들었다. 금령총 금관(보물)에도 잘못된 문양을 넣었다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망치 같은 것으로 두드려 새긴 자국이 역력하다.
황남대총(북분) 금관(국보)에도 흠결이 보인다. 관테에 새긴 점선 물결무늬의 폭을 줄여 다시 새겼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또다른 매력, 파격미
다시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 집담회 현장으로 가보자.
당시 발굴의 실무를 맡았던 김종만 충청문화재연구원장(당시 연구원)가 중국 학자의 언급을 들려준다.
“중국 베이징(北京大) 교수가 그러더라구요. ‘중국 박산로는 저렇게(구멍을 확장시켜서) 쓰지 않는다. 구멍이 잘못되었으면 버리고 다시 만든다’고요. ‘따라서 금동대향로는 백제것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시쳇말로 ‘멕이는’ 말로 들린다. 중국인들은 완벽을 추구하지, 그렇게 ‘대충’ ‘허투루’ 만들지 않는다는….
금령총 금관(보물)에도 잘못된 문양을 넣었다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망치로 두드려 새긴 자국이 보인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그러나 그것을 ‘여유있고, 실용적이며 융통성있다’는 식의 칭찬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 백제인 뿐인가. 신라의 장인도 다른 이도 아닌 임금(혹은 왕족)의 금관을 제작하면서 잘못된 금판을 재활용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만약 금관이 임금(혹은 왕족)이 실제로 썼던 실용관이었다면 어떨까. 실수의 흔적을 모를 리 없는 임금(혹은 왕족)도 “괜찮다”고 허락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한결같이 관용과 여유가 한껏 배어있는 대한민국 국보의 면면이다. 아 참, 이 기회에 부각하는 금동대향로의 매력 하나. 그것은 파격이다. “용의 이빨이 선명하죠. 자세히 보면 이빨로 지구를 받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둥근 지구를 물고 승천하는 용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신나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
아니 1300년전 백제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건가.
또 하나, 금동대향로의 받침대를 보라. 용의 다리 하나를 꼬아서 힘차게 들어올렸다. 중국 향로, 어디에도 없는 스타일이다. 얼마나 자유분방하고 재치있는 표현인가.(이 기사를 위해 국립부여박물관의 신영호 학예연구실장·신나현 학예연구사, 황현성 국립박물관단지 통합운영지원센터 자료보존실장, 신광섭 전 국립부여박물관장, 김종만 충청문화재연구원장, 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한용 전곡 선사박물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부여박물관, <향을 사르다>(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기념 특별전 도록), 2023
김선영·황현성, ‘분향실험을 통한 백제금동대향로 내부 대류특성 연구’, <보존과학지>35, 2019
국립부여박물관, <능사>(유적조사보고서 제8책), 2000
이한상, <황금의 나라 신라>, 김영사, 2004
민병찬,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방법 연구-국보 78·83호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89, 국립중앙박물관, 2016
박학수, ‘국보 141호 다뉴세문경 거푸집의 조각 도구와 방법’,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추계학술대회, 2019
(출처; https://v.daum.net/v/20240402143946794 경향신문.2024. 4. 2.)
<자료출처>
용꿈꾼 날 건져올린 백제 최후의 걸작 ‘금동대향로’|동아일보 (donga.com)
https://v.daum.net/v/20241025090500097 이데일리. 2024. 10. 25.
https://v.daum.net/v/20240402143946794 경향신문.2024. 4. 2.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231214053020363 이데일리. 2023. 12. 14.
https://v.daum.net/v/20231216070012986 이데일리. 2023. 12. 16.
https://v.daum.net/v/20230911233020238 동아일보. 2023. 9. 11.
https://v.daum.net/v/20231018073335225 주간경향. 202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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