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유형을 통하여 한문화의 뿌리를 발해연안에서 찾을 수 있었고, 한민족의 주요 무대가 발해연안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고대 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고고학 편년으로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시기가 역사상의 고조선 시기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가 곧, 고고학편년으로 철기시대가 되는데 이 시기는 비교적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지는 때로 위만(滿) 시기 내지 한사군 시기로 편년되기도 한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부여시대로 대치하고 있다.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사기』에 처음 나오지만 부여라고 하는 민족 내지 국가는 대개 서한(西) 이전 시기[기원전 3세기 초]에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복속될때까지 존재하였다.

부여국은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가 사서()에 비교적 잘 알려진 시기인데, 이 시기의 강역은 남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접하였고, 동쪽으로 읍루()와 북만주 지역의 장광재령()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선비()와 서요하 유역에서 경계하고, 북으로 흑룡강에서 끝난다. 대체로 부여의 중심 지역은 오늘날의 부여()·농안()·길림() 등 삼각지대로 농업에 적합한 평원이다.

길림성 동단산성(東團山城)과 남성자토성(南城子土城) 평면도

 

남북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부여의 역사에 대해서만 주로 연구해왔으나, 저자는 1949년 중공 정부가 성립된 이후 만주 지방에서 이뤄진 고고학적 성과를 부여국의 문화와 연계시켜 우리나라 고대 문화의 한 시대를 복원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1980년 초 길림시 동쪽 교외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 줄기의 동단산성()에서 동남쪽으로 연이어 펼쳐진 속칭 남성자()라는 곳에서 원형의 토성()이 발견되었는데, 이 남성자토성()을 중국 고고학자 무국훈()은 「부여왕성신고()」에서 ‘전기 부여왕성’이라고 하였다.1) 이와 같은 원형 토성은 바로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이는 “성책을 만들었는데 모두 원형이다[]”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후에 고구려가 이곳을 장악하면서 용담산성()을 쌓았다.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西岔溝)출토 금 귀고리 각종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유적의 부여 전기 고분에서 출토된 매우 소박한 원시형태의 금 귀고리, 삼국시대의 행엽형(杏葉形) 금 귀고리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동단산()·서단산(西)·모아산()·포대산() 등지에서 전기 부여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부여 전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요녕성 서풍현(西) 서차구(西)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모두 63기의 장방형 토광 목곽묘가 발굴되었는데, 이들 무덤에서는 순마()를 비롯하여 마구·무기·복식·기물·공구·장식품 등 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는 철제 무기·금동 패식·금·은제 귀고리·옥제 목걸이·청동거울 등이 있다.

보고자인 손수도()에 의하면 이 서차구 유적은 한대 중기 즉, 기원전 150년~기원후 50년 사이 약 200년간에 걸쳐 매장된 ‘흉노문화()’라고 했다.2) 그러나 요녕성박물관 전운()에 의하면, “서차구 유적은 흉노문화도 아니고 선비문화도 아니며 더군다나 한()문화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부여 초기 유적”이라고 하였다.3)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이전복(殿) 역시 이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4)

부여 중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 유적이 있다.5) 이 유적은 1981~82년, 2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는데 유적의 맨 아래층에서는 송화강 유역에서 유행한 청동기문화인 선() 부여문화 단계의 이른바 서단산(西)문화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 위층인 중층 유적에서는 부여 시기의 무덤 129기가 발굴되었다.

부여의 황금 귀고리부여에서는 황금이 많이 산출되었으며, 부여족들은 금과 은으로 관식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老河深) 고분에서 출토된 금 귀고리.

 

부여 시기의 노하심무덤은 장방형 토광 목곽묘로서 여기에서 토기를 비롯하여 동제 거마구·철제 무기·갑주()·농기구 그리고 금은제 귀고리·마노 구슬·유리제 구슬·금은제 팔지·반지·금동제 패식 등 많은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노하심 유적의 발굴 보고자는 이 유적을 서한 말기 - 동한 초기[기원 전후 시기]에 ‘선비족()’이 남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비족은 요녕성 백성()·통유()·창도()를 경계로 서요하와 곽림하() 사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선비족이 이 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류경문()은 “노하심 유적의 출토 유물의 문화내용과 무덤의 지리적인 위치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당연히 부여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그 주인공은 마땅히 부여족의 일원이다”라고 하였다.6)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금 귀고리가 출토되었다. 부여문화의 귀고리는 고리 모양의 귀고리, 걸개와 드리개 장식으로 된 귀고리 그리고 걸개·중간 장식·드리개 3부분으로 구성된 귀고리 등 3종류의 귀고리가 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귀고리에 전승된다.

길림 노하심묘() 출토 금 귀고리 각종길림성 유수현 노하심묘에서 출토된 부여시대의 황금 귀고리. 이곳은 부여 왕성이 있는 길림시 동단산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다.

길림 노하심묘 출토 동장식[오른쪽]과 은 귀고리[왼쪽]길림성 유수현 노하심묘에서 출토된 부여시대 동장식에는 누름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은 귀고리는 은실 꼬기가 특징이다.

 

노하심 유적의 묘제와 출토 유물의 문화내용은 앞의 서차구 유적과 같은 계통의 문화로서 그 시기만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와 문화내용은 다음과 같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 나라[부여]에서는 가축을 잘 기르며, 좋은 말과 붉은 구슬[적옥(赤玉)]·담비·아름다운 구슬[미주(美珠)]이 산출되는데, 구슬은 대추만하다. 그리고 활·화살·칼·창 등 병기를 사용하며 집집마다 각자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계속해서 “부여는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왔다[]”라고 한 점을 미루어보아 부여에서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은 부여의 관식이나 귀고리가 화려한 황금으로 장식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고고학적 성과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국 학자들은 부여사()를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볼 뿐 결코 한국사의 부여국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부여 비마형 금구(金具) 1쌍노하심묘에서 출토된 금동제 신수문(神獸紋)금구. 머리를 치켜세우고 갈기를 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매우 동적인 금동조각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부여에서는 명마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바로이 비마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는 7.2×11.5cm.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학문 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나라 고대사 중에서 고조선사와 부여사에 대한 연구가 매우 저조하였다. 1975년에 이병도()의 「부여고()」7) 가 나온 이후로 별로 진전이 없으나 북한 학계에서는 『조선전사』 2[1979] 고대편에 모두 50페이지 분량으로 「부여사」를 서술하였다. 근래에 우리 학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북한의 고고학이나 역사학의 지식은 다소 침체되어 있던 고대사 연구에 큰 활력이 되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노태돈()교수의 부여에 대한 연구는 시의 적절했다.8)

이와 같은 일련의 노력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복원을 위해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부여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와 같은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는 본시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백제 시조 온조()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의 아들이다.

부여·고구려·백제가 같은 민족의 나라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은 『삼국지』·『위서』·『주서()』·『수서()』 등 중국 정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민족뿐만 아니라 언어·의복·음식 등이 동일하다고 실려 있다.

어떻게 보면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 중국의 학계가 부여의 역사와 문화를 그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대로 부여의 역사와 문화를 써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의 황금문화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부여국(扶餘國)의 유적지 분포도

 

부여(, 혹은 )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의 하나로서 발해연안북·동부 지구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제사·군사·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신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중국의 진()나라 진수(, 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     ]”고 하였다. 이는 군사 활동이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제골(, 굽뼈)로 점을 쳐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부여의 점복기사는 원래 위()나라 어환()이 편찬한 『위략()』에 실려 있는 기사이나 전문은 전하는 바가 없고, 그 일문()이 당초() 장초금()이 편찬한 『한원()』 번이부() 부여조에 “발굽으로 점을 쳐서 그 조짐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 ]”고 한 것을 옹공예()가 『위략』의 기사를 할주()로 “『왜략』에 이르기를 부여의 풍습 가운데 군사가 있을 때에는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굽뼈[제()]로 점을 보아 합할 때는 길하다[   ]”라고 인용하였다.

『한원(翰苑)』 부여조의 점복기사

 

그리고 『한원』 고려[고구려]조에는 “『왜략』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의 풍속 가운데, ······ 군사가 있을 때에는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굽뼈를 관찰하여 길하고 흉함을 판단한다[  ······   ]”고 하였다.

그리고 『한원』 이외에 『위략』의 일문을 중화 민국 초기[1925]의 장붕일()이 모아 편찬한 『위략집문()』이 있는데, 이 책의 부여조에는 점복기사를 따로 싣지는 않았으나, 당나라 은공로()의 『북호록()』의 『위략』을 인용하면서 고구려조의 점복기사 말미에 “부여국에서도 이와 같았다[]”라고 덧붙여 놓았다. 즉, “부여국의 점복습관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는 기사이다. 이는 사서에서 볼 수 없는 고구려와의 동질성을 잘 나타내주는 기사이다.

동진() 시기의 범엽(, 398~445)이 찬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에도 『삼국지』에 실린 기사와 같은 내용[  ]의 부여의 점복기사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위략』의 저작 연대에 대하여 전해종() 선생은 찬자인 어환이 진나라 초기[270년 전후]에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상당부분 『위략』을 근거로 삼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삼국지』보다 10여 년 이전에 저술되었다고 보고 있다.1) 그러므로 부여의 점복기사는 중국인에 의하여 3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때의 방현령()이 편찬한 『진서()』 열전 사이() 부여조에도 『위략』이나 『삼국지』 기사와 같은 내용[    ]이 실려 있다. 그리고 송대() 이방()이 편찬한 『태평어람()』 권783 사이() 동이전 부여조에는 “  ······   ”이라고 하여 『후한서』의 동이전 부여조를 인용하였다고 직접 밝히고 있다.

『한원()』 고려[고구려]조의 점복기사

『위략집문()』 고구려조 점복기사

 

지금까지 여러 사서를 통하여 부여의 점복 신앙을 확인하였다. 고대사회에서 국중대사()는 사(, 즉, 제사())와 융(, 즉, 군사())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동양의 고대사회에서는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희생물로 바친 소의 굽뼈[우제골()]를 이용해 점복을 하였다.

갑골신앙이 가장 유행한 은()나라에서는 국중대사를 비롯하여 왕이나 귀족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점복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제천()·제조()·정벌(, 군사)·년세(, 기풍())·천기()·복화()·전렵()·유력()·질병()·생육() 등을 대상으로 점복을 했다. 한편, 은대의 갑골문 중 제천과 군사에 관한 복사()가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제천과 군사가 있을 때마다 점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과 부여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갑골문화는 신석기시대에 발해연안에서 발생하였는데, 청동기시대에 발해연안에 살고 있던 은인()의 선인들이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황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살면서 은나라에서 갑골문화가 성행하였다고 생각된다. 발해연안의 초기 갑골문화에는 사슴·양·돼지 등 동물의 견갑골이나 늑골을 이용하여 점복을 하였고, 황하 하류 지역으로 내려와 살면서 주로 소의 견갑골()이나 거북의 뱃바닥[구복갑()]을 이용하여 점을 쳤다.2) 그래서 구복갑의 ‘’자와 견갑골의 ‘’을 합쳐서 ‘갑골()’이라 한다. 점복 결과를 기록한 것이 갑골문이다.

다시 말해서 갑골은 발해연안에 분포하여 생활하던 동이족들이 사용하던 생활습관인데, 그들이 이를 대동하고 황하 하류로 서남향하여 은왕조를 건설하고 살면서 갑골문화를 발전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 재료 중에 동물의 견갑골 이외에도 늑골, 두개골, 굽뼈[거골( 즉, 제골())] 등을 이용한 경우를 은나라 수도 은허의 발굴품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은허에서 ‘기사각사()’가 있는 소의 굽뼈[우제골]가 출토된 바 있는데,3) 이는 아마도 부여의 굽뼈[우제골]와 마찬가지로 제사와 점복을 마친 유류품이 아닌가 한다.

문헌상으로 기록되었던 부여의 갑골문화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상의 갑골[복골()과 복갑()] 자료가 만주 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즉, 1957년에 길림시 교외 송화강 연안의 용담산에서 청동기시대의 무자복골()이 출토되었고,4) 1961년에도 송화강 유역에서 신석기시대의 복골이 출토되었다고 한다.5) 이들 갑골이 발견된 지역은 바로 부여의 옛 수도인 남성자토성()이 있는 지역이다.

부여국의 왕성길림시 교외 송화강 철교를 건너면 바로 부여시대의 동단산성이 있고, 이어서 고구려시대의 용담산성이 있다. 동단산성 남쪽으로 낮은 구릉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바로 부여 왕성으로 추정되는 남성자 유적이다.

 

한편, 동부여의 옛 지역인 두만강 유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백초구() 유적과 함경북도 무산읍 범의구석[호곡동()] 집자리에서도 청동기시대 내지 철기시대의 무자복골이 출토된 바 있다.6)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백초구() 출토 복골

함경북도 무산 범의구석[호곡동] 출토 복골

 

부여의 갑골문화가 은의 갑골문화와 동일계열이란 점은 이미 논술하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갑골문화 이외에도 관습상 여러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중국 사서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전술한 것처럼 『후한서』가 『삼국지』보다 150년 이후에 편찬되었다고하므로 우선 『삼국지』 기사를 살펴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특별히 주의할 기사로 “”과 “ ” 및 “ ”라고 하는 내용이다.

먼저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낸다[]”고 하는 기사 중에서 “”이라고 함은 은대 역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으로 『춘추()』 은공() 원년조 공영달() 소()에 보면, “  ”이라 하여 ‘건축()’ 즉, 은의 달력은 태양년을 십이지()로 나누어 십이단의 월()을 만든 ‘천문월()’ 중에서 축월(, 하력() 12), 오늘날의 음력 12월을 정월로 정하여 ‘태음월()’을 만들었다고 하였다.7)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은대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에 제천한다는 뜻이다. 『백호통()』 삼정()조에, “ ”이라 한 것을 보면, 은의 정월은 계동월() 즉, 하력() 12월, 오늘날의 음력 12월을 세수()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ㆍ하()·은()·주() 세수() 비교표

ㆍ하(夏)·은(殷)·주(周) 세수(歲首) 비교표月曆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周曆殷曆夏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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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은대의 역법은 하()나라나 주()나라의 역법과는 다르게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의 옷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 천으로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은 도포를 만들어 입었다[ ]”라고 하는 기사에서 은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데, 『예기()』 단궁상()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대(夏代)에는 흑색을 숭상하여 상사(喪事)가 있을 때에는 황혼(黃昏)에 입렴(入斂)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흑마를 타며, 제사시에는 흑색의 희생물을 바친다. 은대에는 백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정오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백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백색을 바친다. 주대에는 적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일출시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적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적색을 바친다[夏后代尙黑 大事斂用昏 戎事乘驪 牲用玄 殷人尙白 大事斂用日中 牲事乘翰牲用白 周以尙赤 大事斂日出 戎事乘騵 牲用騂].”

이는 하나라에서는 흑색을 숭상하고, 은나라에서는 백색을 숭상하며, 주나라에서는 적색을 숭상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한편, “”에 대한 한()나라 정현()이 붙인 주에 보면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앞서 언급한 은정월()인 축월에 비친 달이 곧, 아백색이라고 한 것이다. 은나라에서 백색을 숭상한 것과 같이 부여 또한 상백()사상[숭백() 사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위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여의 순장()제도를 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사람을 죽여 순장하였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된다[ ]”고 하였다. 부여에서는 많을 경우 백 수십 명을 살순()하여 매장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이 백여 명을 순장한다고 할 때는 반드시 확고한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절대적인 통치자[즉, 군왕()]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은대의 수도인 은허에서 다수의 순인()을 묻은 고분이 발굴되고 있는데, 특히 제1001호 대묘에서는 무려 360명의 순인이 발견되었다.8) 이 대묘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며, 이 외에 이와 같은 규모를 갖춘 고분이 8기가 더 있는데 모두 이와 비슷한 수의 순인을 매장하고 있다.9) 그리고 이 밖에 중소형의 고분에서도 순인이 발견되고 있는데, 모두 은대의 귀족이나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물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같은 동양 고대사회의 순장 제도는 주로 동북아시아의 동이족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의 황전악()은 “사람을 죽여서 제사에 희생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하는 것은 야만적인 습속으로 이와 같은 습속은 은왕국의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은의 동방의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고 하였다.10)

황씨에 의하면 동이문화권()에서는 은나라와 마찬가지로 순장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부여와 혈족관계를 맺고 있는 고구려에서도 초기에는 순장이 실시되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2년[248]조에, “왕이 죽으므로 근신() 중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사왕()인 중천왕()이 이를 금지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장사일에 임해서는 순사하는 자가 많았다[       ]”고 하는 기사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순장이 유행했음을 알 수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3년[502]조에 “3월 순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전왕이 돌아가셨을 때 남녀 각 5인을 순장하였는데, 이와같은 관습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고 하는 기사를 보면, 신라에서도 지증왕 이전까지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순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가야 지역에서도 순장했던 사실이 경상북도 고령읍 지산동 가야 순장묘의 발굴을 통하여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11)

지금까지 우리는 부여의 점복신앙이나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 흰색을 숭상하는 풍속 그리고 순장 습관 등 여러 가지 관습이 은나라의 관습과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그것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의 갑골 습속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입력 2014.09.06. 11:20

"갸름하고, 찢어진 눈… 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chosun.com)

美 미네소타大 김민구 교수 "2~3세기 夫餘 얼굴상 2점 확인"
머리에 상투 튼 모양… 귓불엔 귀고리용 구멍 뚫려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높이 17.9㎝.

길고 갸름한 얼굴에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 머리엔 상투를 틀고 귓불을 뚫은 중년 남성.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한 뼘짜리 얼굴상이 고대 한국인 최고(最古)의 얼굴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민구(37) 미국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동양미술) 조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린성 지린시 동부 둥퇀산(東團山)과 마오얼산(帽兒山)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 얼굴상 2점은 한민족계 고대국가인 부여(夫餘) 2~3세기의 유물"이라고 밝혔다. 최근 발간된 '미술사논단' 제38호에 수록된 '부여의 얼굴: 둥퇀-마오얼산 출토의 금동면구(金銅面具)와 그 외연(外延)'이라는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둥퇀-마오얼산 일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 혹은 고구려계 유적일 것이라 막연히 추정했으나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부여의 왕성지(王城址)임이 확인됐다"며 "금동 얼굴 역시 후한 말기나 훨씬 늦은 시대의 거란계 유물로 추정돼왔으나 출토지가 부여 왕성지로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부여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선 금동 얼굴이 최소 6점 발견됐다. 4점은 일찍 자취를 감췄으나 2점은 중국 뤼순박물관(추정)과 지린성박물관에 각각 전한다. 그나마 국내 학계에선 광복 이후 잊힌 유물이다. 둘 다 얼굴은 갸름하고 인상은 강렬하다 못해 기괴하다.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이 중 둥퇀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얼굴상의 높이는 17.9㎝. 정수리 부분이 상투를 튼 것처럼 볼록 솟아있고, 귓불에 천공(穿孔·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시사하는 점 등이 고대 한민족 특유의 습속을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마의 주름, 벌어진 입, 살짝 내민 혀…. 이 얼굴은 관동청박물관(현 뤼순박물관)이 1926년 발간한 소장품 도록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한 점은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1903~1982)이 1934년 마오얼산 아래 밭에서 발굴했다. 높이 13.8㎝.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얼굴상의 용도는 뭘까. 김 교수는 "마구(馬具)나 무기 등에 장식용으로 장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부여(기원전 2세기 이전~기원후 346)는 철기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 최초로 고대국가를 성립한 세력이다. 이들의 문화가 이후 고구려·백제는 물론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정치·언어·이념·종교 등 다방면으로 계승됐다. 김 교수는 "따라서 이 얼굴상은 고대 한국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입체 조형 최고(最古)의 걸작"이라고 했다.

미술해부학 박사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부여족과 연관된 브리야트족의 얼굴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유사하다. 긴 얼굴에 광대뼈, 홀쭉한 뺨, 얇은 입술 등 북방계 얼굴"이라고 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5~6세기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얼굴과도 비슷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극동 퉁구스 계통 민족의 공통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전형적 북방계 얼굴"이라고 말했다.

 

 

[한국사의 안뜰] 부여문화 원형이 묻힌 무덤들… 中선 흉노가 주인이라 하지만 | 세계일보 (segye.com)

강구열 입력 2018.07.16. 21:16 

 

<80> 中 랴오닝성 시차거우 고분군의 비밀 / 1955년 마을주민들이 도굴한 고분군 / 中당국 뒤늦게 발굴 나서 유적 발굴 / 동병철검·황금제 귀걸이·토기 출토 / 漢·북방문화권에 없는 부여의 물건 / 쑹화강 인근 부여문화 유형과 유사 /中, 흉노족·오환문화론 내세워 주장 / 활동 연대·지역 맞지 않는 오류 범해 / 쑹화강 유역에서 발전 이룬 예맥족 / 무덤의 주인이 국가 성장 토대닦아

 

1955년 이른 봄날 랴오닝성 시펑(西豊)현 러산(樂善)향 즈중(執中)촌 장자제(姜家街)에 사는 몇 사람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이제 갓 겨울철이 지났고 아직 곡식을 심지도 않은 상태라 집집마다 식량이 충분치 않던 차에, 10여년 전 마을 노인들이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황금과 옥기를 파내어 한몫 단단히 챙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올라간 마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몇 해 전 기이한 물건을 파낸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의기투합하여 뒷산에 오른 마을 사람들이 예전에 황금이 나왔다고 하는 지점과 그 부근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과연 허리춤까지 파 내려간 한 지점에서 청동칼과 말·매·양 등 동물 문양이 있는 작은 장식품, 황금 귀고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장자제 마을 뒷산에서 유물을 파기 시작했고, 이 소문이 시펑현인민위원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시펑현인민위에서는 주민들이 파낸 물건들이 유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유물을 캐내는 일을 중단하라 명령한 뒤, 주민들로부터 회수한 유물 가운데 몇 점을 골라 랴오닝성문화국에 향후 처리 방향을 문의하였다. 그런데 랴오닝성문화국의 담당자가 실수로 오래전 유물이 아니므로 보존 가치가 없다고 회신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자제로부터 반경 30㎞ 내에 있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자제 뒷산으로 몰려와 유물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1955년 늦은 봄부터 겨울철까지 많을 때는 하루에 수백명씩 몰려와 땅을 파 순식간에 수백기의 고분이 파괴되었다.

 

다음해인 1956년 5월 중순까지 이러기를 반복했는데, 시펑현 국영 축목장의 한 지식인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둥베이(東北)박물관에 상황을 알렸고, 둥베이박물관에서도 도굴된 유물들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점을 느끼고는 같은 해 5월 29일부터 9월 7일까지 3개월여 동안 8000㎡를 발굴 조사하여 아직 파괴되지 않은 63기의 고분(전체의 5%가량)과 2247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아울러 고분군 범위 내에서 6264점의 유물을 수습하고, 민가에 흩어져 있던 5323점의 유물을 회수하였다. 시차거우(西?溝·서분구) 고분군은 이렇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랴오닝성 시펑현의 시차거우 고분군은 1950년 마을 주민들이 유물들을 내다팔기 위해 마구 파헤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중국 문화재 당국은 유물의 양과 가치에 주목해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시차거우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시차거우 고분군의 조사 경위는 당시 중국에서도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시차거우 고분군의 조사자이자 보고자인 쑨서우다오(孫守道)가 고고학자의 유적조사 보고치고는 이례적으로 ‘일대 사건’이라는 강한 표현과 어조를 쓰면서까지 고분군의 파괴·도굴 경위를 자세하게 밝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관내 유적 보존과 조사가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시차거우 고분군은 원래 450~500여기의 단순 움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차거우 고분군은 조사 경위부터 시끌벅적하였지만, 고고학계에서 더욱 놀라워한 것은 조사 결과였다. 시차거우 고분군에 다량의 동병철검과 철제 무기류뿐 아니라 북방 유목·목축문화권에서 널리 유행한 각종 북방계 청동패식류와 황금사를 꼬아 만든 귀고리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청동기시대 일반적인 석묘가 아닌 북방계 움무덤이나, 이 일대에서는 처음으로 말이빨을 무덤에 껴묻거나(부장하거나) 말뼈를 제물로 쓴 제의유구 등도 그러하다.

 

쑨서우다오는 이와 함께 고분군의 조성 연대가 기원전 2~1세기라는 점을 들어 시차거우 고분군이 흉노문화의 지역문화에 속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런데 정작 흉노는 기원전 105년(한나라 무제 36년) 한나라의 심각한 공격을 받아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된 상태였다. 이때 흉노좌부의 중심 또한 허베이성 화이라이(懷來)현에서 네이멍구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로 옮겨 갔으므로, 시차거우 고분군과 흉노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분군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오환문화론이다. 오환문화론은 한나라 무제가 흉노좌부를 격파한 다음 상곡군으로부터 요동군에 이르는 새외 지역에 오환족을 이주시켜 흉노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하였다가, 기원전 78년 요동오환의 반란이 제압된 직후 점차 쇠퇴하였다는 역사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서 흉노전’에 따르면,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는 요하 서쪽이 아닌 요동군에서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오환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오환문화론 또한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2~1세기 시차거우 고분군을 대표로 하는 물질문화를 남긴 족속은 누구일까. 

 

동병철검은 황금제 귀걸이, 토기와 함께 중국 시차거우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다.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다(위쪽 사진). 시차거우 고분군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


◆전기 부여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차거우 고분군

시차거우 고분군에 다량으로 부장되어 있는 동물문 중심의 청동패식은 당시 한나라 북쪽 북방문화권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러 족속과 정치체에 의해 공유되었던 유물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시차거우 고분군의 문화 정체와 족속을 파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차거우 고분군에 다량 부장되어 있는 한식 철제장검 등 또한 요동군과의 근접성을 생각할 때, 정치경제적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능력껏 수용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이에 반해 시차거우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병철검, 황금제 귀고리, 토기는 한나라는 물론 북방문화권의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군이다. 그런데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바로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포자연문화)이다. 동병철검과 황금 귀고리는 완전히 같고, 토기는 부여문화의 핵심 부장 토기 가운데 하나인 포자연형호(泡子沿型壺)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시차거우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둥랴오허(東遼河) 중상류역의 시차거우 유형과 라오허선(老河深·노하심)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제2쑹화강 중상류역의 파오쯔옌유형을 상징하는 대표 토기는 모두 그 기원이 제1쑹화강과 넌장강(嫩江) 유역의 한수문화(漢書文化)에 있는데, 파오쯔옌유형에는 제2쑹화강 유역의 토착적인 요소가 상당히 복합되어 있고, 시차거우유형에는 동병철검 외에는 토착적인 요소가 거의 복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차거우유형은 기원전 2~1세기에만 존속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시차거우유형은 파오쯔옌(泡子沿·포자연)유형과 함께 부여문화의 전기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유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수문화권에서 한 갈래는 제2쑹화강 유역으로, 다른 한 갈래는 둥랴오허 유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제2쑹화강 유역에 정착한 집단은 토착 집단과 적극적인 융합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 긴장을 완화한 반면, 둥랴오허 중상류역 집단은 정복자적인 입장에서 시종일관 군사 긴장만으로 집단을 유지하다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시차거우유형이 부여문화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연령병식(連鈴柄式) 동병철검(銅柄鐵劍)과 라오허선 고분군을 표지로 하여 설정되어 있는 황금제의 라오허선형 이식(老河深型耳飾) 등이 시차거우유형이 소멸된 뒤, 제2쑹화강 유역의 파오쯔옌유형으로 유입되어, 이후 부여문화의 핵심적인 유물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시차거우유형 집단이 같은 부여문화인 파오쯔옌유형에 적극적으로 용해된 것이다.

 

오강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제2쑹화강 유역의 파오쯔옌유형은 시차거우유형이 소멸된 직후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제2쑹화강 유역을 넘어 사방으로 확산되어 예맥족이 세운 여러 나라와 정치체 가운데 가장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비약적인 성장에 시차거우유형인들의 보탬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 흉노족이나 오환족, 그리고 부여와 관계가 없는 다른 족속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던 시차거우 고분군과 유형, 부여문화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 다시금 눈여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강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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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news.v.daum.net/v/20180716211700115

 

길림 노하심 고분군(吉林 老河深 古墳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중국 길림성 유수시(楡樹市) 대파진(大坡鎭) 노하심촌(老河深村) 부근에 있는 철기시대 집터와 널무덤 · 덧널무덤 관련 생활유적.
접기/펼치기정의
중국 길림성 유수시(楡樹市) 대파진(大坡鎭) 노하심촌(老河深村) 부근에 있는 철기시대 집터와 널무덤 · 덧널무덤 관련 생활유적.
접기/펼치기개설

부여문화로 규정되고 있는 포자연문화(泡子沿文化)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중기의 대표 유적이다.

접기/펼치기내용

1980년 7월 유수현 노하심촌의 마을 주민이 마을 남쪽에 있는 완만한 언덕의 서쪽 자락에서 모래를 파다가 무덤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자 유수현문화국이 길림시문물관리위원회와 길림성문물국에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길림성문물국과 길림성문물공작대 및 길림시문물관리위원회가 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1980년 8월 13일부터 9월 말까지 관개수로 서측의 12,000㎡를 발굴 조사하였다.

1차 조사를 통해 유적이 하층, 중층, 상층의 세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함은 물론 하층에서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서단산문화의 주거지 1기, 중층에서는 부여(扶餘)에 해당하는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고분 28기, 상층에서 발해(渤海) 조기에 해당하는 말갈 고분 3기를 조사하였다. 이후 1980년 겨울 관개수로 동측의 20,000㎡를 시굴 조사하였고, 1981년 4월에는 조양지구박물관에서 유적 전체를 세밀하게 실사하여 유적의 범위를 정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1981년 5월 2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 길림성문물공작대와 길림성고고훈련반이 공동으로 관개수로 동측의 3980㎡를 발굴 조사하였다. 2차 조사를 통해 하층에서 서단산문화 주거지 1기, 중층에서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고분 101기, 상층에서 말갈 고분 34기가 조사되었다.

접기/펼치기특징

길림노하심고분군은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초기 유적인 길림시(吉林市) 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과 후기 유적인 길림시 모아산(帽兒山) 고분군, 남성자(南城子) 성지의 중간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이 고분군의 조사를 통해 포자연문화의 전개 과정이 비교적 선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고분군에 부장되어 있는 화려한 금은 제품, 각종 철기, 한나라 유물 등을 통해 부여가 이 시기 중국 동북 지역의 최강자로서 군림하였음이 역사 기록 외에 물질 자료로도 입증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노하심 고분군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접기/펼치기의의와 평가

길림노하심고분군은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 중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은 길림시 포자연전산 유적을 표지로 하여 설정된 문화로서, 목관·목곽묘·포자연형호·갈색타날승석문단경호·단경호·모아산형(帽兒山型) 고병두(高柄豆)·한식(漢式) 완형토기(碗形土器)·천발(淺鉢)·연령병식검(連鈴柄式劍)·신수금동패식(神獸金銅牌飾)·인면형동식(人面形銅飾)·노하심형(老河深型) 금은제(金銀製) 이식(耳飾)·동복(銅鍑)·철모(鐵矛)·철부(鐵斧)·철착(鐵鑿)·각종 거마구(車馬具) 등이 주요한 유물 조합을 이루고 있다․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분포 범위는 납림하(拉林河) 남안(북쪽)으로부터 이통하(伊通河) 유역(남쪽)까지, 농안현(農安縣)의 왕문산(王文山)(서쪽)으로부터 위호령(威虎嶺) 서사면(동쪽)까지이고, 존속 기간은 기원전 2~기원후 3세기 초까지이다. 노하심 고분군은 이러한 포자연문화의 중기 포자연문화 북쪽 거점지에 형성되어 있는 군사 중진과 연관된 고분군으로 여겨진다. 고분에서는 각종 화려한 금은 제품과 함께 다종 다양한 철기류와 한경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기원후 1세기 무렵 부여와 서한과의 문화적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楡樹老河深』(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文物出版社, 1987)
「기원전 3~1세기 중국 동북과 서북한 지역의 물질문화와 연․진․한」(오강원,『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문집: 원사시대 사회문화 변동의 본질』, 한국상고사학회, 2016)
「중만지역의 초기철기문화 포자연식문화의 성립과 전개양상-문화배경 및 부여문제와 관련하여- 」(오강원, 『한국상고사학회 제24회 학술발표대회문집: 전환기의 고고학 III-역사시대의 여명』, 2000)

 

 

  • 문화일보
  • 입력 2020-07-15 10:49

가라 기병을 조각한 기마인물형 각배 가라토기(김해 고분 출토, 국보 275호, 경주 박물관 소장, 자료: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8)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고조선 해체 뒤 민족 대이동 … 기병대장 출신 수로, 김해에 도착 뒤 이진아시왕에 복속 않고 금관가라 건립
백제·신라엔 없는 철장검, 6가라 全지역 출토… 기마부대 야영용 구리솥도 부여족이 세운 국가임을 증명

고조선 연방제국이 해체되고 뒤이어 위만조선이 BC 108년 멸망하는 대폭발적 거대충격이 가해지자, 고조선 지배층 유민들은 이웃 후국들로 피란하거나 새 국가를 세우고자 해 민족대이동의 제1차 파동이 일어났고, 우선 한국 역사에도 ‘다국시대’가 시작됐다.

고조선 유민의 일단은 남하해 멀리 진한, 지금의 경주 지역에 6개 마을을 형성해서 정착했다가 고조선 왕족 청년이 말을 타고 찾아오자 그를 박혁거세 왕으로 추대해 고조선을 계승해서 BC 57년 신라(사로국)를 건국했다. 고조선 왕족의 한 가문은 북부여에 피란했다가 환영받지 못하자 주몽 집단이 말을 타고 압록강 중류 구려에 내려와서 BC 37년(일설 BC 277년)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왕위 계승에서 밀린 온조 세력은 한강 부근으로 남하해 BC 1세기 중엽 백제를 건국했다. AD 1세기에는 제주도에도 부여·고구려·양맥족 일부가 남하해 선주민 촌장들과 결합해서 탐라국을 건국했다.

변한 지역의 6가라는 어떻게 건국됐는가? 가라 출토유물들에는 이웃 신라와 백제에 없는 북방 ‘부여(扶餘)’의 선진 철기문화, 기마문화 유물과 동일한 것이 한반도 낙동강·섬진강 사이에서 많이 출토돼 있다. 변한 지역에서 이 정도 선진적 철기문화와 기마문화 유물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나오려면 성장 과정의 미숙한 초기 철기들과 초기 기마문화 출토유물이 반드시 이 지역에서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갑자기 부여의 최선진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변한지역에 쏟아져 나온 경우에 우리는 부여기마민족의 변한 정복에 의한 6가라 건국설을 일단 정립할 수 있다. 필자는 1995년 사회사연구회에서 단군 실재 발표 때 이 해석을 구두로 발표했으나(‘단군설화의 사회학적 해석’,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제47집, 1995), 단군 실재 논쟁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이를 글로 정리해 독자들의 새 패러다임 전환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대가야의 금동관(3C) (자료: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고문헌에는 2가지 설화가 남아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이정(李貞)으로부터 채록한 건국 설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政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 금관국(金官國)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이다”라고 수록돼 있다.

고령군은 변한 시대에 ‘미오야마나(국)(彌烏邪馬國)’이었다. 가야산 산신으로 표현된 미오야마국(고령) 모주(母主) 여성 족장이 천신(天神, 고조선·부여 왕족 상징)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라국 시조 ‘이진아시’왕(별칭 ‘붉은 해(朱日)’)과 금관국의 ‘수로’왕(별칭 푸른 후예(靑裔))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붉은 해’의 ‘해’(의역 朱日, 음역 解)는 부여 왕족의 성씨라는 사실이다. 부여 왕족 ‘해’ 씨 ‘이진아시’왕이 ‘대가라’(고령가라·임나)를 건국한 것이다. 한편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했는데 모두 천신의 아들이지만 ‘푸름의 후예(靑裔)’라 했다. 부여 왕실 ‘해’ 씨는 ‘태양’과 ‘새’ ‘사슴’을 토템으로 했다. 한편 고조선연방의 유목민들, 산융·실위·정령… 등은 ‘태양’과 함께 ‘푸른 이리’를 토템으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조선·부여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대가라의 이진아시왕이 부여왕족이고, 금관가라의 수로왕은 유목민의 자손 기마부대장이었음을 대학자 최치원이 시사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건국설화는 후에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라는 관직자가 고려 문종(1075∼1084) 때 기록했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다. 이것은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설화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18년) 3월에 구지봉에 함성이 들려 9간(9개 마을 촌장)이 모여 가 봤더니,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사내아이로 변했는데, 맨 처음 나온 아이의 이름을 수로(首露·처음 나타났다는 뜻)로 해 대가락(大駕洛)의 왕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도 각기 돌아가서 5가라의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구지봉 봉우리’의 ‘함성’을 통해 수로 등이 ‘육로’로 집단 이동해 왔으며, ‘붉은 줄’ ‘붉은 보자기’ ‘황금알’로 동일한 고조선·부여족을 상징하고, ‘가라’의 한자를 ‘駕洛’으로 써서, ‘말’(馬)위에 ‘가’(加)를 얹은 글자를 택해 부여의 ‘가’(장군, 대장)들이 말을 타고 내려왔으며, 6개 편대의 기마부대에 선봉대장은 ‘수로’였고, ‘대가라’를 건국했으며, 나머지 5개 기마부대장도 각각 주둔지에 돌아가서 각각의 가라를 건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은 기마부대의 정복이었지만 전투 없이 지방 촌장들이 합의해 수용·봉대한 무혈 정복 융합이었음이 잘 시사돼 있다.

유수노하심 부여 동복(제1형)

 
고문헌에서 ‘가라’ 관련 지명을 찾아 연결해 보면, 백두대간(태백산맥)의 서쪽 육로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남해안 김해 지역까지 ‘가라’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서기 42년 부여 기마족의 한 갈래가 기병부대를 나눠 황해도 수안 부근 멸악산맥 등성이를 거쳐서 충청도 죽령과 조령을 넘어 낙동강 상류에 도착했다고 본다. 왕족은 낙동강 상류에서 가장 농경과 기마 활동에 적합한 지금의 가야산 밑 고령(高靈)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용감하게 앞길을 개척한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는 남해안 끝 김해(金海)까지 도착했다고 본다.

이 두 개 건국설화를 종합해 보면, 처음 6개 기병부대가 하나의 통일 ‘가라국’을 건국하지 못하고, ‘6가라’를 각각 건국하게 된 요인을 알 수 있다. 고령 ‘대가라’ 이진아시왕은 부여 왕족이므로 신분상 전체 6개 부대 정복지의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족일 뿐 전투 실력은 부족했다. 반면 ‘수로’는 신분은 ‘가’이지만 가장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 대장이고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는 ‘해’ 씨가 아니라 청예(靑裔·유목민의 후예)였으므로 최강의 무력에 기초해서 독립 금관국을 건국했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6가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기록했다. ‘임나’와 ‘가라’를 분절시키면, 그 뜻은 ‘임나’는 ‘임금의 나라’이고, ‘가라’는 ‘가(장군·대장)의 나라’의 뜻이 된다.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신분은 부여 유목민 후예 ‘가’였으나 그의 역량은 가장 탁월했다. 그는 선봉부대로 서기 42년 김해 지방에 도착하자 고령의 이진아시왕에게 복속하지 않고 금관국을 건국했다. 부여족 기마군단이 남하해 6가라를 건국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 고고유물로는 특히 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된 철장검들은 부여 유적인 만주 요령성 서차구 유적과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BC 1세기∼AD 1세기)에서 다수 출토된 철장검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이다. 이 유형의 철장검은 황해도 이남 한반도(백제·신라 지역)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고, 탐라국(제주도) 용담동 유적(AD 1세기)에서만 2자루 출토돼 있다.

(2)고령 지산동 44호 및 45호 무덤을 비롯해 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되는 철제 말 자갈, 말 멈추개 등 철제 마구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출토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형이다.

(3)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의 철제 투구와 갑옷, 합천 옥전 M3호 무덤의 금동장식 투구, 부산 복천동 10호 무덤의 철제 단갑 등 가야 철제 갑옷과 투구는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2기(中기)층 56호, 67호, 97호 무덤 출토의 각종 갑옷과 투구, 길림성 대안현 어장토광묘 207호 출토 갑옷(편)과 동일한 유형으로 계승·발전한 것이다.

(4)가라 유적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 출토 동복(銅·구리솥)은 부여 유적인 길림성 동단산 유적과 요령성 서차구 유적 및 길림성 유수노하심 2기층 출토 동복 2점 가운데 제2형 동복과 완전히 동일하다. 부여 기마부대에서는 동복을 야영용 필수장비로 사용했다. 대성동 출토 가라 동복은 흉노의 동복이 아니라 부여 기병부대의 동복이라고 본다.

(5)가라 토기는 ‘경질’ 토기의 굳기와 높은 그릇받침대의 구멍(물, 바람구멍)과 다양한 도안으로 큰 특징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기는 섭씨 800도 이하로 구운 농경사회의 토기다. 필자는 가야에서 1200도 이상 고열로 ‘경질토기’를 구워낼 수 있게 된 것은 부여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철기문화가 철 생산 고열기술을 토기에 적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97호 무덤 출토 제1형 동복(銅)을 다시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동복은 본 동복(높이 25㎝, 구경 14㎝)에, 높이 4.2㎝의 받침대(器臺)가 붙어 있고, 받침대에는 가라 경질토기처럼 전후좌우에 구멍 4개가 뚫려 있다. 토기를 얇게 만들어 1200도의 고온으로 매우 단단하게 소성할 때 불길이 고르게 들어가 구워내도록 새 기술이 도입된 것이고, 그 기원이 부여의 동복 제조 기술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6가라는 북방에서 AD 42년에 부여족의 기마군단이 새 정착지를 찾아서 육로로 남하해 변한 12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해 세운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여 기마족의 정치적 지휘자인 부여 왕족은, 막강한 선봉 기마부대(김수로)가 앞길을 남해안 김해까지 안전하게 개척하자, ‘고령’에 도착해 여기에 정착했다. 고령에 부여 왕족은 ‘임나(任那)’를 건국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5개 기병부대장을 다 통솔하지 못했다. 선봉부대장 ‘수로’는 신분은 부여왕족이 아니라 가(加·아마 狗加인 듯)였지만, 능력은 가장 탁월했으므로, 역시 AD 42년에 정착지 김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세웠다. 나머지 4개 기병부대장도 각기 군립했다. 그 결과 1개 임나(任那·임금 신분의 나라)와 5개 가라(加羅·가 신분의 나라)가 수립됐다. 부여의 선진 철기 문화·기마 문화와 변한의 선진 농경 문화의 융합에 기초한 6가라 연맹국가가 수립된 것이었다. AD 4세기 말까지에는 가장 강성한 금관가라가 6가라 연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백제 아신왕이 399년 신라를 정복·병합하려고 백제·금관가라·왜의 3개국 동맹 연합군을 편성할 때 이에 참가한 것이 금관가라 실패의 변곡점이 됐다. 백제·금관가라·왜군이 연합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점령한 즈음에, 위기의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로의 신속(臣屬)을 결정하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명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부대 대군이 AD 400년 경주로 직행 남하해 백제·왜 연합군을 참패시키고 김해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때 백제군 4만 명 가운데 전사자는 셀 수도 없고, 포로가 된 백제군만도 8000명이었다니 얼마나 큰 참패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금관가라군과 바다를 건너온 왜군도 대패했다. 이에 1세기 이후 300여 년간 크게 번영했던 금관가라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고, 신라 연합공격에 불참했던 대가라(임나)가 5세기 초부터 6가라의 맹주가 된 후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래의 가라 건국사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 용어설명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 과정
금관국 건국은 6년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그는 ①건국(서기 42년) 이듬해 ‘수도’를 김해에 정하고 나성(羅城)을 쌓았으며, ‘궁궐’을 44년 2월에 완공했다. ②이해(44년) 탈해(脫解)가 지휘하는 군사들이 바닷길로 쳐들어오자 막강한 기병과 500척을 이끈 수군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 그들을 쫓아 보냈다. ③수로왕은 서기 48년 중국 상선 편으로 회계(會稽)에 망명한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16세) 허황옥(許黃玉)을 맞아 정식 왕비로 삼고 왕족 신분을 갖췄다. 수로의 부여 신분은 왕족이 아니라 그 아래의 ‘가(加)’였다. 이제는 아유타국왕의 공주와 결혼했으니, 부여의 제도로도 ‘고추가’가 되고, ‘왕족’이 된 것이다. ④수로왕은 대대적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농경과 제철수공업, 국제무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김수로왕의 금관국은 AD 1세기 중엽 고대국가 구성요를 다 갖춘 부강한 고대왕국을 건국했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입력 2018.12.12. 03:10
 
금 귀걸이, 김포 운양동 유적, 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8월 13일, 한강문화재연구원 김기옥 선임연구원은 이성진·민경산 연구원 등과 함께 경기 김포 운양동의 야트막한 산 위에서 며칠 전 윤곽을 확인한 무덤의 내부 조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무덤구덩이와 둘레를 따라가며 판 도랑이 남아 있었다.

무덤구덩이 중심부에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고 내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서북쪽 모서리를 조금 파들어 가자 창·괭이·낫·끌 등 철기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어 무덤 한가운데 바닥 가까이에서는 목관 안에 묻었던 길쭉한 철검과 화살촉이 가지런한 모습을 드러냈다.

둑을 제거하고 무덤 바닥면 전체를 드러내자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구슬이 쏟아졌다. 투명한 수정, 붉은색 마노, 푸른색 유리 등 1000점이 넘었다. 조사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슬 무더기 속에 끼어 있는 금제품이었다. 서로 10㎝가량 떨어진 채 출토된 2점의 금제품은 마치 손톱처럼 생겼고 길이는 2.8㎝였다.

김 연구원은 '마한 사람들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좋아한다'는 역사 기록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졌다. 발굴된 위치로 보면 귀걸이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귀걸이와는 형태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9월 16일 발굴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최병현 숭실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 금제품이 만주에 분포하는 부여 귀걸이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송화강 중류에 위치한 부여의 귀걸이가 멀리 한강 하류로 전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 달 후 또 다른 무덤에서 같은 모양의 금 귀걸이 1짝이 추가로 발굴됐다.

김 연구원은 발굴 성과를 종합해 운양동 주구묘(周溝墓·주변에 도랑을 두른 묘)가 '3세기경 만들어진 마한 유력자들의 무덤이고 금 귀걸이는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했다. 근래 한반도 중부 지역 여러 곳에서 부여계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해명할 단서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오송서 나온 부여의 칼, 새롭게 밝혀지는 북방기원론과 백제[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 ZUM 뉴스

 
 

[인문학 마주하다]

부여의 칼이 발견된 충북 청주 오송의 무덤. 부여 외에선 발견된 적이 없던 칼이 백제의 무덤에서 나온 것을 두고 현지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공존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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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한국 문화의 기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북방기원론을 많이 떠올린다. 해양을 통한 남방 지역과의 관련도 적지 않지만 유독 우리 기억에는 북방기원설이 더 친숙하다. 지형적으로 볼 때 한국은 북쪽으로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았으니 유라시아 각지의 다양한 문화와 선진기술은 한국의 북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고학 자료로 보아도 한국의 청동기와 쌀농사 등 수많은 문화는 한국의 북쪽을 통해서 들어왔다.》

 
이런 북방에 대한 기억은 삼국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북부여,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신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북부여계에서 기원한 하늘의 후손(天孫)이라고 보았다. 백제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 백제의 건국자 비류와 온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백제의 고고학 자료는 오로지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돌무덤(적석총)만 있었을 뿐 부여 관련 유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경기 김포시 운양동과 충북 청주시 오송읍에서 속속 부여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어렴풋하던 백제와 부여의 관계에 실마리가 잡히고 있다. 부여계 이주민들은 거대한 세력이 내려와 백제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규모로 다양하게 내려와 현지화하면서 백제로 성장했다. 이렇듯 북방지역과의 관련은 우리의 기원이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주하며 각 지리 환경에 적응한 것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백제시대 무덤서 의외의 발견

충북 청주 오송의 백제 무덤에서 발견된 칼(위 사진)과 중국 라오허선 유적에서 발견된 칼은 손잡이 모양이 비슷하다. 오송에서 발견된 칼은 200여 년 뒤의 유물이지만, 이를 통해 북방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백제에 정착해 어울려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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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청주 오송역 근처에 생명과학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760여 개나 되는 1800년 전 백제의 무덤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15지점의 17호라고 명명된 평범한 백제의 움무덤에서 손잡이가 특이한 칼이 발견됐다. 이런 손잡이는 남한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놀랍게도 중국 지린성에 위치한 라오허선이라고 하는 초원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여 유적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부여는 현재 중국의 지린시에 수도를 두었지만 윷놀이를 연상하는 사출도라는 조직을 두고 그 안에는 농사와 유목을 하는 다양한 집단이 지역을 달리하며 공존했다. 라오허선 유적은 부여 안에서도 유목문화가 발달하고 강력한 무기를 주로 사용하던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라오허선의 칼은 말 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돌기가 달린 손잡이를 붙였다. 부여 이외에는 전혀 발견된 적이 없던 이 부여의 칼이 뜬금없이 청주 오송의 백제(또는 마한)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오송의 무덤에서는 이 칼 이외에는 부여계통의 유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청주 오송의 부여 칼은 어쩌다가 백제의 무덤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쉽게 보이지 않는 유물의 디테일에서 답을 얻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역할이다. 그 실마리는 다름 아닌 유물 안에 있었다.

대대로 전해서 썼던 부여의 칼

오송의 부여 칼은 찬란한 명품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손잡이는 얼마나 썼는지 그 돌기는 반질반질하게 되어 있고 칼은 몇 번이나 바꾸어서 갈았다. 나중에는 손잡이 끝을 자르고 그 끝으로 칼을 휘어서 임시로 고정시켜 사용할 정도였다. 당시 이 칼을 그 오랫동안 수리를 반복하며 사용했다는 뜻이다. 청주 오송 무덤은 라오허선 유적보다 약 200년이 늦다. 그러니 어림잡아도 수세대에 걸쳐서 사용했던 것이다.

백제에서 부여계 유물이 나온 건 청주 오송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포시 운양동과 서울 풍납동 백제 왕성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부여 계통의 유물이 많이 출토된 김포 운양동은 바다와 맞닿은 곳이다. 역사 기록에도 백제의 초기 세력은 십제라고 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니 김포 지역에서 부여계통의 유물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백제에서 살았음을 청주 오송 유적이 다시 증명했다. 이렇듯 부여계통의 사람들은 백제 곳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부여계의 유물은 몇 점 안되고, 그나마 수백 년을 쓴 칼이나 작은 귀걸이들에 불과하다.

오송의 부여 칼이 주는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백제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데에 있다. 당시 백제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긴 칼은 무사들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그 오랜 기간 이 무덤의 주인이 부여의 칼을 사용하는 것을 당시 주변 백제 사람들이 어색하게 보지 않고 인정했다는 뜻도 된다. 이 칼 한 자루 이외에는 어떠한 부여계통의 유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방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토착사회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현지 사회에 정착하여 그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고구려와 부여에서 내려온 일파들은 현지에 동화되면서 자신들은 북쪽에서 내려왔음을 잊지 않고 살았다. 이후 그 이주민들이 중추세력 중 하나가 되면서 백제의 주요한 건국신화로 부여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기록된 백제의 북방기원 신화는 사실 다양한 북쪽에서 온 이주민들이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현지화하며 공존하는 과정이었다.

우리의 기원은 교류에 있다

우리는 흔히 한민족의 기원이라면 북쪽이건 남쪽이건 어느 한 지점에서 사람들이 밀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고고학이 증명하는 기원은 그렇게 일방적인 기원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송의 부여 칼은 부여와 고구려 계통이라고 기록된 삼국시대 건국 신화의 시작이 사실 북쪽에서 이주해온 작은 집단의 소속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여러 나라가 공통적으로 북방지역에서의 기원을 강조한 것은 당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와 통치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지, 한국인의 전체 문화가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경기 김포시 운양동에서 발굴된 부여의 금제 귀걸이. 강인욱 교수 제공

기원은 순수한 자신만의 고립된 혈통이나 문화가 아니다. ‘순수’한 기원을 어딘가에서 찾거나, 주변과의 교류를 무시하고 오로지 자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 한민족의 기원은 주변과 단절된 순수함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각자의 지리환경에 맞게 적응한 생존력에 있다. 수많은 문화와 인적 교류 중에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이라는 지리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결국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용광로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번성하는 그 과정이 우리가 그토록 찾는 한민족의 기원이 아니었을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청주서 동병철검 국내 첫 발견 < 전체 < 사회 < 기사본문 - 대전일보 (daejonilbo.com)

  • 입력 2016.09.01 05:44
  • 지면 5면
기자명오상우 
 

부여 - 마한 교류 학설 뒷받침 총 길이 1m·1-2세기 제작 추정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생명과학단지 마한계 토광묘에서 발굴된 동병철검. 사진=중앙문화재연구원 제공
 
[청주]청주 오송 생명과학단지에서 북방계 부여 유목문화의 유물인 '동병철검(銅柄鐵劍)'이 국내 최초로 발견됐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생명과학단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마한계 토광묘에서 동병철검을 찾아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중앙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이번 동병철검 발견은 부여와 마한의 교류, 부여 지배계층의 마한 이주 학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사료로 평가된다.

지난해 말 발견해 보존처리 중인 동병철검은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 길이 1m 가량의 동병철검은 15㎝ 길이의 손잡이에 수수 크기의 작은 돌기가 촘촘히 박혀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이렇게 긴 북방계 장검 발견은 처음"이라며 "보존처리를 마친 뒤 성분 분석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병철검은 중국 지린성 라오허션(老河深) 유적 등에서 나온 바 있으며 학계에서는 부여 유목문화의 유물로 보고 있다.

한편 중앙문화재연구원은 현재 오송읍 봉산리·정중리 일원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원삼국-삼국시대 토광묘 등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오상우 기자

 

 

입력 2016-04-28 03:00업데이트 2016-04-28 15:18

[단독]연해주서 기원전 3∼4세기 부여 銅劍 첫 발견|동아일보 (donga.com)

김상운 기자

고대 옥저 영토… 부여와 교역 증거, 中 위나라 희귀 동전도 출토돼
러시아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최근 발견된 ‘부여계 동검’ 조각들(아래 왼쪽 사진). 각 조각을 이어 붙인 뒤 빠진 부분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위 사진). 전형적인 안테나식 동검이다. 이 동검 근처에서 위나라 동전(아래 오른쪽 사진)도 발견됐다. 강인욱 교수 제공
 
 
고대 국가 옥저의 영토인 러시아 연해주에서 기원전 3∼4세기 부여계 동검(銅劍)이 처음 발견됐다. 이 동검은 옥저와 부여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위서동이전 등 문헌상 확인되는 부여와 옥저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2세기인데 이보다 앞선 유물이 발견돼 주목된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주(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과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화폐인 ‘칠원일근(桼垣一釿)’이 현지 사학자들에 의해 최근 발견됐다. 동검은 손잡이 끝부분의 장식이 양옆으로 돌출돼 마치 안테나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부여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강 교수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총길이 약 40cm인 이 동검은 4개로 조각 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칼날 조각의 두께는 0.5∼0.9cm, 최대 너비는 2.2cm다. 칼날의 형태가 길쭉하게 떨어지는 전형적인 세형동검이다. 특이하게 손잡이 아랫부분에 T자형 홈이 파여 있다. 홈 아래로 돌출된 안테나 장식이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새 두 마리가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검은 곳곳에 닳은 흔적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 교수는 “조각들의 부러진 모습 등을 감안할 때 장례용으로 동검을 땅에 묻으면서 일부러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검 근처에서 발견된 칠원일근은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직경 3.5cm의 동전. 기원전 3∼4세기에 통용된 이 화폐는 극히 적은 수량만 제작돼 지금껏 한반도나 주변 지역에선 출토된 전례가 없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동검과 동전을 함께 묻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강 교수는 “위나라 화폐는 당시 매우 귀했으며 중원∼요동반도∼연해주로 이어지는 모피 무역 과정에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검은 초기 옥저가 부여와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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