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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여 고고학 (2) 청주 오송서 나온 부여의 칼 본문

여러나라시대/부여

3. 부여 고고학 (2) 청주 오송서 나온 부여의 칼

대야발 2024. 10. 2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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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원교수는 시차거우(서차구)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병철검, 황금제 귀고리, 토기는 한나라는 물론 북방문화권의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군이고,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바로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포자연문화)라고 합니다.

 

 

 

1955년 이른 봄날 랴오닝성 시펑(西豊)현 러산(樂善)향 즈중(執中)촌 장자제(姜家街)에 사는 몇 사람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이제 갓 겨울철이 지났고 아직 곡식을 심지도 않은 상태라 집집마다 식량이 충분치 않던 차에, 10여년 전 마을 노인들이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황금과 옥기를 파내어 한몫 단단히 챙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올라간 마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몇 해 전 기이한 물건을 파낸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의기투합하여 뒷산에 오른 마을 사람들이 예전에 황금이 나왔다고 하는 지점과 그 부근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과연 허리춤까지 파 내려간 한 지점에서 청동칼과 말·매·양 등 동물 문양이 있는 작은 장식품, 황금 귀고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장자제 마을 뒷산에서 유물을 파기 시작했고, 이 소문이 시펑현인민위원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시펑현인민위에서는 주민들이 파낸 물건들이 유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유물을 캐내는 일을 중단하라 명령한 뒤, 주민들로부터 회수한 유물 가운데 몇 점을 골라 랴오닝성문화국에 향후 처리 방향을 문의하였다. 그런데 랴오닝성문화국의 담당자가 실수로 오래전 유물이 아니므로 보존 가치가 없다고 회신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자제로부터 반경 30㎞ 내에 있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자제 뒷산으로 몰려와 유물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1955년 늦은 봄부터 겨울철까지 많을 때는 하루에 수백명씩 몰려와 땅을 파 순식간에 수백기의 고분이 파괴되었다.

 

다음해인 1956년 5월 중순까지 이러기를 반복했는데, 시펑현 국영 축목장의 한 지식인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둥베이(東北)박물관에 상황을 알렸고, 둥베이박물관에서도 도굴된 유물들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점을 느끼고는 같은 해 5월 29일부터 9월 7일까지 3개월여 동안 8000㎡를 발굴 조사하여 아직 파괴되지 않은 63기의 고분(전체의 5%가량)과 2247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아울러 고분군 범위 내에서 6264점의 유물을 수습하고, 민가에 흩어져 있던 5323점의 유물을 회수하였다. 시차거우(西?溝·서분구) 고분군은 이렇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랴오닝성 시펑현의 시차거우 고분군은 1950년 마을 주민들이 유물들을 내다팔기 위해 마구 파헤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중국 문화재 당국은 유물의 양과 가치에 주목해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시차거우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시차거우 고분군의 조사 경위는 당시 중국에서도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시차거우 고분군의 조사자이자 보고자인 쑨서우다오(孫守道)가 고고학자의 유적조사 보고치고는 이례적으로 ‘일대 사건’이라는 강한 표현과 어조를 쓰면서까지 고분군의 파괴·도굴 경위를 자세하게 밝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관내 유적 보존과 조사가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시차거우 고분군은 원래 450~500여기의 단순 움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차거우 고분군은 조사 경위부터 시끌벅적하였지만, 고고학계에서 더욱 놀라워한 것은 조사 결과였다. 시차거우 고분군에 다량의 동병철검과 철제 무기류뿐 아니라 북방 유목·목축문화권에서 널리 유행한 각종 북방계 청동패식류와 황금사를 꼬아 만든 귀고리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청동기시대 일반적인 석묘가 아닌 북방계 움무덤이나, 이 일대에서는 처음으로 말이빨을 무덤에 껴묻거나(부장하거나) 말뼈를 제물로 쓴 제의유구 등도 그러하다.

 

쑨서우다오는 이와 함께 고분군의 조성 연대가 기원전 2~1세기라는 점을 들어 시차거우 고분군이 흉노문화의 지역문화에 속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런데 정작 흉노는 기원전 105년(한나라 무제 36년) 한나라의 심각한 공격을 받아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된 상태였다. 이때 흉노좌부의 중심 또한 허베이성 화이라이(懷來)현에서 네이멍구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로 옮겨 갔으므로, 시차거우 고분군과 흉노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분군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오환문화론이다. 오환문화론은 한나라 무제가 흉노좌부를 격파한 다음 상곡군으로부터 요동군에 이르는 새외 지역에 오환족을 이주시켜 흉노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하였다가, 기원전 78년 요동오환의 반란이 제압된 직후 점차 쇠퇴하였다는 역사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서 흉노전’에 따르면,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는 요하 서쪽이 아닌 요동군에서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오환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오환문화론 또한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2~1세기 시차거우 고분군을 대표로 하는 물질문화를 남긴 족속은 누구일까. 

 

동병철검은 황금제 귀걸이, 토기와 함께 중국 시차거우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다.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다(위쪽 사진). 시차거우 고분군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


◆전기 부여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차거우 고분군

시차거우 고분군에 다량으로 부장되어 있는 동물문 중심의 청동패식은 당시 한나라 북쪽 북방문화권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러 족속과 정치체에 의해 공유되었던 유물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시차거우 고분군의 문화 정체와 족속을 파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차거우 고분군에 다량 부장되어 있는 한식 철제장검 등 또한 요동군과의 근접성을 생각할 때, 정치경제적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능력껏 수용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이에 반해 시차거우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병철검, 황금제 귀고리, 토기는 한나라는 물론 북방문화권의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군이다. 그런데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바로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포자연문화)이다. 동병철검과 황금 귀고리는 완전히 같고, 토기는 부여문화의 핵심 부장 토기 가운데 하나인 포자연형호(泡子沿型壺)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시차거우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둥랴오허(東遼河) 중상류역의 시차거우 유형과 라오허선(老河深·노하심)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제2쑹화강 중상류역의 파오쯔옌유형을 상징하는 대표 토기는 모두 그 기원이 제1쑹화강과 넌장강(嫩江) 유역의 한수문화(漢書文化)에 있는데, 파오쯔옌유형에는 제2쑹화강 유역의 토착적인 요소가 상당히 복합되어 있고, 시차거우유형에는 동병철검 외에는 토착적인 요소가 거의 복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차거우유형은 기원전 2~1세기에만 존속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시차거우유형은 파오쯔옌(泡子沿·포자연)유형과 함께 부여문화의 전기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유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수문화권에서 한 갈래는 제2쑹화강 유역으로, 다른 한 갈래는 둥랴오허 유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제2쑹화강 유역에 정착한 집단은 토착 집단과 적극적인 융합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 긴장을 완화한 반면, 둥랴오허 중상류역 집단은 정복자적인 입장에서 시종일관 군사 긴장만으로 집단을 유지하다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시차거우유형이 부여문화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연령병식(連鈴柄式) 동병철검(銅柄鐵劍)과 라오허선 고분군을 표지로 하여 설정되어 있는 황금제의 라오허선형 이식(老河深型耳飾) 등이 시차거우유형이 소멸된 뒤, 제2쑹화강 유역의 파오쯔옌유형으로 유입되어, 이후 부여문화의 핵심적인 유물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시차거우유형 집단이 같은 부여문화인 파오쯔옌유형에 적극적으로 용해된 것이다.


제2쑹화강 유역의 파오쯔옌유형은 시차거우유형이 소멸된 직후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제2쑹화강 유역을 넘어 사방으로 확산되어 예맥족이 세운 여러 나라와 정치체 가운데 가장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비약적인 성장에 시차거우유형인들의 보탬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 흉노족이나 오환족, 그리고 부여와 관계가 없는 다른 족속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던 시차거우 고분군과 유형, 부여문화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 다시금 눈여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1)

 

 

 

강인욱교수는  최근 경기 김포시 운양동과 충북 청주시 오송읍에서 속속 부여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어렴풋하던 백제와 부여의 관계에 실마리가 잡히고 있다고 합니다. 부여계 이주민들은 거대한 세력이 내려와 백제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소규모로 다양하게 내려와 현지화하면서 백제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한국 문화의 기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북방기원론을 많이 떠올린다. 해양을 통한 남방 지역과의 관련도 적지 않지만 유독 우리 기억에는 북방기원설이 더 친숙하다. 지형적으로 볼 때 한국은 북쪽으로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았으니 유라시아 각지의 다양한 문화와 선진기술은 한국의 북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고학 자료로 보아도 한국의 청동기와 쌀농사 등 수많은 문화는 한국의 북쪽을 통해서 들어왔다.》

 

부여의 칼이 발견된 충북 청주 오송의 무덤. 부여 외에선 발견된 적이 없던 칼이 백제의 무덤에서 나온 것을 두고 현지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공존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이런 북방에 대한 기억은 삼국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북부여,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신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북부여계에서 기원한 하늘의 후손(天孫)이라고 보았다. 백제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 백제의 건국자 비류와 온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백제의 고고학 자료는 오로지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돌무덤(적석총)만 있었을 뿐 부여 관련 유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경기 김포시 운양동과 충북 청주시 오송읍에서 속속 부여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어렴풋하던 백제와 부여의 관계에 실마리가 잡히고 있다. 부여계 이주민들은 거대한 세력이 내려와 백제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규모로 다양하게 내려와 현지화하면서 백제로 성장했다. 이렇듯 북방지역과의 관련은 우리의 기원이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주하며 각 지리 환경에 적응한 것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백제시대 무덤서 의외의 발견
충북 청주 오송의 백제 무덤에서 발견된 칼(위 사진)과 중국 라오허선 유적에서 발견된 칼은 손잡이 모양이 비슷하다. 오송에서 발견된 칼은 200여 년 뒤의 유물이지만, 이를 통해 북방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백제에 정착해 어울려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2016년 청주 오송역 근처에 생명과학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760여 개나 되는 1800년 전 백제의 무덤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15지점의 17호라고 명명된 평범한 백제의 움무덤에서 손잡이가 특이한 칼이 발견됐다. 이런 손잡이는 남한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놀랍게도 중국 지린성에 위치한 라오허선이라고 하는 초원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여 유적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부여는 현재 중국의 지린시에 수도를 두었지만 윷놀이를 연상하는 사출도라는 조직을 두고 그 안에는 농사와 유목을 하는 다양한 집단이 지역을 달리하며 공존했다. 라오허선(老河深)유적은 부여 안에서도 유목문화가 발달하고 강력한 무기를 주로 사용하던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라오허선의 칼은 말 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돌기가 달린 손잡이를 붙였다. 부여 이외에는 전혀 발견된 적이 없던 이 부여의 칼이 뜬금없이 청주 오송의 백제(또는 마한)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오송의 무덤에서는 이 칼 이외에는 부여계통의 유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청주 오송의 부여 칼은 어쩌다가 백제의 무덤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쉽게 보이지 않는 유물의 디테일에서 답을 얻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역할이다. 그 실마리는 다름 아닌 유물 안에 있었다.

 

대대로 전해서 썼던 부여의 칼

 

오송의 부여 칼은 찬란한 명품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손잡이는 얼마나 썼는지 그 돌기는 반질반질하게 되어 있고 칼은 몇 번이나 바꾸어서 갈았다. 나중에는 손잡이 끝을 자르고 그 끝으로 칼을 휘어서 임시로 고정시켜 사용할 정도였다. 당시 이 칼을 그 오랫동안 수리를 반복하며 사용했다는 뜻이다. 청주 오송 무덤은 라오허선 유적보다 약 200년이 늦다. 그러니 어림잡아도 수세대에 걸쳐서 사용했던 것이다.


백제에서 부여계 유물이 나온 건 청주 오송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포시 운양동과 서울 풍납동 백제 왕성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부여 계통의 유물이 많이 출토된 김포 운양동은 바다와 맞닿은 곳이다. 역사 기록에도 백제의 초기 세력은 십제라고 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니 김포 지역에서 부여계통의 유물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백제에서 살았음을 청주 오송 유적이 다시 증명했다. 이렇듯 부여계통의 사람들은 백제 곳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부여계의 유물은 몇 점 안되고, 그나마 수백 년을 쓴 칼이나 작은 귀걸이들에 불과하다.

 

오송의 부여 칼이 주는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백제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데에 있다. 당시 백제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긴 칼은 무사들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그 오랜 기간 이 무덤의 주인이 부여의 칼을 사용하는 것을 당시 주변 백제 사람들이 어색하게 보지 않고 인정했다는 뜻도 된다. 이 칼 한 자루 이외에는 어떠한 부여계통의 유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방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토착사회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현지 사회에 정착하여 그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고구려와 부여에서 내려온 일파들은 현지에 동화되면서 자신들은 북쪽에서 내려왔음을 잊지 않고 살았다. 이후 그 이주민들이 중추세력 중 하나가 되면서 백제의 주요한 건국신화로 부여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기록된 백제의 북방기원 신화는 사실 다양한 북쪽에서 온 이주민들이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현지화하며 공존하는 과정이었다.

 

경기 김포시 운양동에서 발굴된 부여의 금제 귀걸이. 강인욱 교수 제공
 

우리의 기원은 교류에 있다

 

우리는 흔히 한민족의 기원이라면 북쪽이건 남쪽이건 어느 한 지점에서 사람들이 밀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고고학이 증명하는 기원은 그렇게 일방적인 기원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송의 부여 칼은 부여와 고구려 계통이라고 기록된 삼국시대 건국 신화의 시작이 사실 북쪽에서 이주해온 작은 집단의 소속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여러 나라가 공통적으로 북방지역에서의 기원을 강조한 것은 당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와 통치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지, 한국인의 전체 문화가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2)

 

 

 

<주>

 

 

 

(1) [한국사의 안뜰] 부여문화 원형이 묻힌 무덤들… 中선 흉노가 주인이라 하지만 | 세계일보 (segye.com)2018.07.16

 

 

 

(2) 오송서 나온 부여의 칼, 새롭게 밝혀지는 북방기원론과 백제[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동아일보 (donga.com)2021.03.19

 

 

 

 

 

<참고자료>

 

 

 

청주서 동병철검 국내 첫 발견  - 대전일보 (daejonilbo.com)2016.09.01

 

 

 

[한국사의 안뜰] 부여문화 원형이 묻힌 무덤들.. 中선 흉노가 주인이라 하지만 (daum.net) 2018.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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