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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여 고고학 (1) 부여의 황금문화 본문

여러나라시대/부여

3. 부여 고고학 (1) 부여의 황금문화

대야발 2024. 10. 2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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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교수는  1980년 초 길림시 동쪽 교외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龍潭山) 줄기의 동단산성(東團山城)에서 동남쪽으로 연이어 펼쳐진 속칭 남성자(南城子)라는 곳에서 원형의 토성(土城)이 발견되었는데,  ‘전기 부여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여 전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요녕성 서풍현(西豊縣) 서차구(西岔溝) 유적을 들 수 있고,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동단산(東團山)·서단산(西團山)·모아산(帽兒山)·포대산(炮臺山) 등지에서 전기 부여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부여 중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老河深) 유적이 있습니다.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금 귀고리가 출토되었습니다. 부여문화의 귀고리는 고리 모양의 귀고리, 걸개와 드리개 장식으로 된 귀고리 그리고 걸개·중간 장식·드리개 3부분으로 구성된 귀고리 등 3종류의 귀고리가 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귀고리에 전승되었다고 합니다.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사기』에 처음 나오지만 부여라고 하는 민족 내지 국가는 대개 서한(西) 이전 시기[기원전 3세기 초]에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복속될때까지 존재하였다.

부여국은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가 사서(史書)에 비교적 잘 알려진 시기인데, 이 시기의 강역은 남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접하였고, 동쪽으로 읍루(揖婁)와 북만주 지역의 장광재령(張廣才嶺)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서요하 유역에서 경계하고, 북으로 흑룡강에서 끝난다. 대체로 부여의 중심 지역은 오늘날의 부여(夫餘)·농안(農安)·길림(吉林) 등 삼각지대로 농업에 적합한 평원이다.

길림성 동단산성(東團山城)과 남성자토성(南城子土城) 평면도

 

 

남북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부여의 역사에 대해서만 주로 연구해왔으나, 저자는 1949년 중공 정부가 성립된 이후 만주 지방에서 이뤄진 고고학적 성과를 부여국의 문화와 연계시켜 우리나라 고대 문화의 한 시대를 복원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1980년 초 길림시 동쪽 교외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 줄기의 동단산성()에서 동남쪽으로 연이어 펼쳐진 속칭 남성자()라는 곳에서 원형의 토성()이 발견되었는데, 이 남성자토성(南城子土城)을 중국 고고학자 무국훈(武國勛)은 「부여왕성신고(夫餘王城新考)」에서 ‘전기 부여왕성’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원형 토성은 바로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이는 “성책을 만들었는데 모두 원형이다[]”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후에 고구려가 이곳을 장악하면서 용담산성()을 쌓았다.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西岔溝)출토 금 귀고리 각종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유적의 부여 전기 고분에서 출토된 매우 소박한 원시형태의 금 귀고리, 삼국시대의 행엽형(杏葉形) 금 귀고리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동단산(東團山)·서단산(西團山)·모아산(帽兒山)·포대산(炮臺山) 등지에서 전기 부여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부여 전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요녕성 서풍현(西豊縣) 서차구(西岔溝)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모두 63기의 장방형 토광 목곽묘가 발굴되었는데, 이들 무덤에서는 순마()를 비롯하여 마구·무기·복식·기물·공구·장식품 등 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는 철제 무기·금동 패식·금·은제 귀고리·옥제 목걸이·청동거울 등이 있다.

보고자인 손수도()에 의하면 이 서차구 유적은 한대 중기 즉, 기원전 150년~기원후 50년 사이 약 200년간에 걸쳐 매장된 ‘흉노문화()’라고 했다. 그러나 요녕성박물관 전운()에 의하면, “서차구 유적은 흉노문화도 아니고 선비문화도 아니며 더군다나 한()문화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부여 초기 유적”이라고 하였다.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이전복(殿) 역시 이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부여 중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老河深)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1981~82년, 2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는데 유적의 맨 아래층에서는 송화강 유역에서 유행한 청동기문화인 선() 부여문화 단계의 이른바 서단산(西)문화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 위층인 중층 유적에서는 부여 시기의 무덤 129기가 발굴되었다.

부여의 황금 귀고리부여에서는 황금이 많이 산출되었으며, 부여족들은 금과 은으로 관식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老河深) 고분에서 출토된 금 귀고리.

 

부여 시기의 노하심무덤은 장방형 토광 목곽묘로서 여기에서 토기를 비롯하여 동제 거마구·철제 무기·갑주()·농기구 그리고 금은제 귀고리·마노 구슬·유리제 구슬·금은제 팔지·반지·금동제 패식 등 많은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노하심 유적의 발굴 보고자는 이 유적을 서한 말기 - 동한 초기[기원 전후 시기]에 ‘선비족()’이 남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비족은 요녕성 백성()·통유()·창도()를 경계로 서요하와 곽림하() 사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선비족이 이 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류경문()은 “노하심 유적의 출토 유물의 문화내용과 무덤의 지리적인 위치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당연히 부여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그 주인공은 마땅히 부여족의 일원이다”라고 하였다.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금 귀고리가 출토되었다. 부여문화의 귀고리는 고리 모양의 귀고리, 걸개와 드리개 장식으로 된 귀고리 그리고 걸개·중간 장식·드리개 3부분으로 구성된 귀고리 등 3종류의 귀고리가 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귀고리에 전승된다.

길림 노하심묘() 출토 금 귀고리 각종길림성 유수현 노하심묘에서 출토된 부여시대의 황금 귀고리. 이곳은 부여 왕성이 있는 길림시 동단산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다.

길림 노하심묘 출토 동장식[오른쪽]과 은 귀고리[왼쪽]길림성 유수현 노하심묘에서 출토된 부여시대 동장식에는 누름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은 귀고리는 은실 꼬기가 특징이다.

 

노하심 유적의 묘제와 출토 유물의 문화내용은 앞의 서차구 유적과 같은 계통의 문화로서 그 시기만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와 문화내용은 다음과 같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 나라[부여]에서는 가축을 잘 기르며, 좋은 말과 붉은 구슬[적옥(赤玉)]·담비·아름다운 구슬[미주(美珠)]이 산출되는데, 구슬은 대추만하다. 그리고 활·화살·칼·창 등 병기를 사용하며 집집마다 각자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계속해서 “부여는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왔다[]”라고 한 점을 미루어보아 부여에서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은 부여의 관식이나 귀고리가 화려한 황금으로 장식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고고학적 성과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국 학자들은 부여사()를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볼 뿐 결코 한국사의 부여국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부여 비마형 금구(金具) 1쌍노하심묘에서 출토된 금동제 신수문(神獸紋)금구. 머리를 치켜세우고 갈기를 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매우 동적인 금동조각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부여에서는 명마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바로이 비마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는 7.2×11.5cm.』(1)

 

 

 

김포 운양동유적에서 투명한 수정, 붉은색 마노, 푸른색 유리 등 1000점, 마치 손톱처럼 생겼고 길이는 2.8㎝인 금귀걸이 등 부여계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근래 한반도 중부 지역 여러 곳에서 부여계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2009년 8월 13일, 한강문화재연구원 김기옥 선임연구원은 이성진·민경산 연구원 등과 함께 경기 김포 운양동의 야트막한 산 위에서 며칠 전 윤곽을 확인한 무덤의 내부 조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무덤구덩이와 둘레를 따라가며 판 도랑이 남아 있었다.

 

금 귀걸이, 김포 운양동 유적, 국립중앙박물관.

 

 

무덤구덩이 중심부에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고 내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서북쪽 모서리를 조금 파들어 가자 창·괭이·낫·끌 등 철기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어 무덤 한가운데 바닥 가까이에서는 목관 안에 묻었던 길쭉한 철검과 화살촉이 가지런한 모습을 드러냈다.

 

둑을 제거하고 무덤 바닥면 전체를 드러내자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구슬이 쏟아졌다. 투명한 수정, 붉은색 마노, 푸른색 유리 등 1000점이 넘었다. 조사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슬 무더기 속에 끼어 있는 금제품이었다. 서로 10㎝가량 떨어진 채 출토된 2점의 금제품은 마치 손톱처럼 생겼고 길이는 2.8㎝였다.

 

김 연구원은 '마한 사람들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좋아한다'는 역사 기록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졌다. 발굴된 위치로 보면 귀걸이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귀걸이와는 형태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9월 16일 발굴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최병현 숭실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 금제품이 만주에 분포하는 부여 귀걸이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송화강 중류에 위치한 부여의 귀걸이가 멀리 한강 하류로 전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 달 후 또 다른 무덤에서 같은 모양의 금 귀걸이 1짝이 추가로 발굴됐다.

 

김 연구원은 발굴 성과를 종합해 운양동 주구묘(周溝墓·주변에 도랑을 두른 묘)가 '3세기경 만들어진 마한 유력자들의 무덤이고 금 귀걸이는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했다. 근래 한반도 중부 지역 여러 곳에서 부여계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마한과 부여 사이의 교류를 해명할 단서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2)

 

 

 

신용하교수는 갑자기 부여의 최선진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변한지역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부여기마민족의 변한 정복에 의한 6가라 건국설을 일단 정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변한 지역의 6가라는 어떻게 건국됐는가? 가라 출토유물들에는 이웃 신라와 백제에 없는 북방 ‘부여(扶餘)’의 선진 철기문화, 기마문화 유물과 동일한 것이 한반도 낙동강·섬진강 사이에서 많이 출토돼 있다.
 
변한 지역에서 이 정도 선진적 철기문화와 기마문화 유물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나오려면 성장 과정의 미숙한 초기 철기들과 초기 기마문화 출토유물이 반드시 이 지역에서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갑자기 부여의 최선진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변한지역에 쏟아져 나온 경우에 우리는 부여기마민족의 변한 정복에 의한 6가라 건국설을 일단 정립할 수 있다.
 
필자는 1995년 사회사연구회에서 단군 실재 발표 때 이 해석을 구두로 발표했으나(‘단군설화의 사회학적 해석’,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제47집, 1995), 단군 실재 논쟁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이를 글로 정리해 독자들의 새 패러다임 전환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대가야의 금동관(3C) (자료: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고문헌에는 2가지 설화가 남아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이정(李貞)으로부터 채록한 건국 설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政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 금관국(金官國)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이다”라고 수록돼 있다.

고령군은 변한 시대에 ‘미오야마나(국)(彌烏邪馬國)’이었다. 가야산 산신으로 표현된 미오야마국(고령) 모주(母主) 여성 족장이 천신(天神, 고조선·부여 왕족 상징)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라국 시조 ‘이진아시’왕(별칭 ‘붉은 해(朱日)’)과 금관국의 ‘수로’왕(별칭 푸른 후예(靑裔))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붉은 해’의 ‘해’(의역 朱日, 음역 解)는 부여 왕족의 성씨라는 사실이다. 부여 왕족 ‘해’ 씨 ‘이진아시’왕이 ‘대가라’(고령가라·임나)를 건국한 것이다.
 
한편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했는데 모두 천신의 아들이지만 ‘푸름의 후예(靑裔)’라 했다. 부여 왕실 ‘해’ 씨는 ‘태양’과 ‘새’ ‘사슴’을 토템으로 했다.
 
한편 고조선연방의 유목민들, 산융·실위·정령… 등은 ‘태양’과 함께 ‘푸른 이리’를 토템으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조선·부여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대가라의 이진아시왕이 부여왕족이고, 금관가라의 수로왕은 유목민의 자손 기마부대장이었음을 대학자 최치원이 시사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건국설화는 후에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라는 관직자가 고려 문종(1075∼1084) 때 기록했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다. 이것은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설화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18년) 3월에 구지봉에 함성이 들려 9간(9개 마을 촌장)이 모여 가 봤더니,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사내아이로 변했는데, 맨 처음 나온 아이의 이름을 수로(首露·처음 나타났다는 뜻)로 해 대가락(大駕洛)의 왕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도 각기 돌아가서 5가라의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구지봉 봉우리’의 ‘함성’을 통해 수로 등이 ‘육로’로 집단 이동해 왔으며, ‘붉은 줄’ ‘붉은 보자기’ ‘황금알’로 동일한 고조선·부여족을 상징하고, ‘가라’의 한자를 ‘駕洛’으로 써서, ‘말’(馬)위에 ‘가’(加)를 얹은 글자를 택해 부여의 ‘가’(장군, 대장)들이 말을 타고 내려왔으며, 6개 편대의 기마부대에 선봉대장은 ‘수로’였고, ‘대가라’를 건국했으며, 나머지 5개 기마부대장도 각각 주둔지에 돌아가서 각각의 가라를 건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은 기마부대의 정복이었지만 전투 없이 지방 촌장들이 합의해 수용·봉대한 무혈 정복 융합이었음이 잘 시사돼 있다.

유수노하심 부여 동복(제1형)

 
고문헌에서 ‘가라’ 관련 지명을 찾아 연결해 보면, 백두대간(태백산맥)의 서쪽 육로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남해안 김해 지역까지 ‘가라’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서기 42년 부여 기마족의 한 갈래가 기병부대를 나눠 황해도 수안 부근 멸악산맥 등성이를 거쳐서 충청도 죽령과 조령을 넘어 낙동강 상류에 도착했다고 본다.
 
왕족은 낙동강 상류에서 가장 농경과 기마 활동에 적합한 지금의 가야산 밑 고령(高靈)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용감하게 앞길을 개척한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는 남해안 끝 김해(金海)까지 도착했다고 본다.

이 두 개 건국설화를 종합해 보면, 처음 6개 기병부대가 하나의 통일 ‘가라국’을 건국하지 못하고, ‘6가라’를 각각 건국하게 된 요인을 알 수 있다.
 
고령 ‘대가라’ 이진아시왕은 부여 왕족이므로 신분상 전체 6개 부대 정복지의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족일 뿐 전투 실력은 부족했다.
 
반면 ‘수로’는 신분은 ‘가’이지만 가장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 대장이고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는 ‘해’ 씨가 아니라 청예(靑裔·유목민의 후예)였으므로 최강의 무력에 기초해서 독립 금관국을 건국했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6가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기록했다. ‘임나’와 ‘가라’를 분절시키면, 그 뜻은 ‘임나’는 ‘임금의 나라’이고, ‘가라’는 ‘가(장군·대장)의 나라’의 뜻이 된다.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신분은 부여 유목민 후예 ‘가’였으나 그의 역량은 가장 탁월했다. 그는 선봉부대로 서기 42년 김해 지방에 도착하자 고령의 이진아시왕에게 복속하지 않고 금관국을 건국했다.
 
부여족 기마군단이 남하해 6가라를 건국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 고고유물로는 특히 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된 철장검들은 부여 유적인 만주 요령성 서차구 유적과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BC 1세기∼AD 1세기)에서 다수 출토된 철장검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이다. 이 유형의 철장검은 황해도 이남 한반도(백제·신라 지역)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고, 탐라국(제주도) 용담동 유적(AD 1세기)에서만 2자루 출토돼 있다.


(2)고령 지산동 44호 및 45호 무덤을 비롯해 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되는 철제 말 자갈, 말 멈추개 등 철제 마구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출토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형이다.


(3)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의 철제 투구와 갑옷, 합천 옥전 M3호 무덤의 금동장식 투구, 부산 복천동 10호 무덤의 철제 단갑 등 가야 철제 갑옷과 투구는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2기(中기)층 56호, 67호, 97호 무덤 출토의 각종 갑옷과 투구, 길림성 대안현 어장토광묘 207호 출토 갑옷(편)과 동일한 유형으로 계승·발전한 것이다.


(4)가라 유적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 출토 동복(銅·구리솥)은 부여 유적인 길림성 동단산 유적과 요령성 서차구 유적 및 길림성 유수노하심 2기층 출토 동복 2점 가운데 제2형 동복과 완전히 동일하다. 부여 기마부대에서는 동복을 야영용 필수장비로 사용했다. 대성동 출토 가라 동복은 흉노의 동복이 아니라 부여 기병부대의 동복이라고 본다.


(5)가라 토기는 ‘경질’ 토기의 굳기와 높은 그릇받침대의 구멍(물, 바람구멍)과 다양한 도안으로 큰 특징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기는 섭씨 800도 이하로 구운 농경사회의 토기다. 필자는 가야에서 1200도 이상 고열로 ‘경질토기’를 구워낼 수 있게 된 것은 부여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철기문화가 철 생산 고열기술을 토기에 적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97호 무덤 출토 제1형 동복(銅)을 다시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동복은 본 동복(높이 25㎝, 구경 14㎝)에, 높이 4.2㎝의 받침대(器臺)가 붙어 있고, 받침대에는 가라 경질토기처럼 전후좌우에 구멍 4개가 뚫려 있다.
 
토기를 얇게 만들어 1200도의 고온으로 매우 단단하게 소성할 때 불길이 고르게 들어가 구워내도록 새 기술이 도입된 것이고, 그 기원이 부여의 동복 제조 기술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6가라는 북방에서 AD 42년에 부여족의 기마군단이 새 정착지를 찾아서 육로로 남하해 변한 12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해 세운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여 기마족의 정치적 지휘자인 부여 왕족은, 막강한 선봉 기마부대(김수로)가 앞길을 남해안 김해까지 안전하게 개척하자, ‘고령’에 도착해 여기에 정착했다.
 
고령에 부여 왕족은 ‘임나(任那)’를 건국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5개 기병부대장을 다 통솔하지 못했다. 선봉부대장 ‘수로’는 신분은 부여왕족이 아니라 가(加·아마 狗加인 듯)였지만, 능력은 가장 탁월했으므로, 역시 AD 42년에 정착지 김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세웠다.
 
나머지 4개 기병부대장도 각기 군립했다. 그 결과 1개 임나(任那·임금 신분의 나라)와 5개 가라(加羅·가 신분의 나라)가 수립됐다. 부여의 선진 철기 문화·기마 문화와 변한의 선진 농경 문화의 융합에 기초한 6가라 연맹국가가 수립된 것이었다.
 
AD 4세기 말까지에는 가장 강성한 금관가라가 6가라 연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백제 아신왕이 399년 신라를 정복·병합하려고 백제·금관가라·왜의 3개국 동맹 연합군을 편성할 때 이에 참가한 것이 금관가라 실패의 변곡점이 됐다.
 
백제·금관가라·왜군이 연합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점령한 즈음에, 위기의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로의 신속(臣屬)을 결정하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명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부대 대군이 AD 400년 경주로 직행 남하해 백제·왜 연합군을 참패시키고 김해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때 백제군 4만 명 가운데 전사자는 셀 수도 없고, 포로가 된 백제군만도 8000명이었다니 얼마나 큰 참패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금관가라군과 바다를 건너온 왜군도 대패했다.
 
이에 1세기 이후 300여 년간 크게 번영했던 금관가라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고, 신라 연합공격에 불참했던 대가라(임나)가 5세기 초부터 6가라의 맹주가 된 후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래의 가라 건국사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3)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의 황금문화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2)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54] 김포까지 내려온 夫餘의 금 귀걸이 (chosun.com)2018.12.12

 

 

 

(3) <신용하의 지식카페>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 문화일보 munhwa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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