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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시대/부여

1. 부여 (1) 해부루의 동진과 해모수의 출현

대야발 2020. 9. 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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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의 건국과 위치

 

지금까지 필자는 고조선 말기부터 붕괴 이후까지의 부여 분열과 그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에 부여는 동부여 · 북부여 · 졸본부여 · 부여 등이 있었다. 고조선시대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하나의 부여만 존재하였으나 고조선이 붕괴된 뒤 그 지배귀족과 거주민들이 여러 곳으로 이주함에 따라 여러 곳에 부여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위에 언급된 여러 부여 가운데 맨 끝의 그냥 부여는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원래의 부여로서 그 위치는 지금의 난하 상류유역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뒤 이 부여는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다. 북부여는 부여의 지배세력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던 부여로서 원래의 부여보다는 다소 북쪽에 있었지만 그 위치도 난하 상류유역이었다.

 

 

동부여는 북부여의 지배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로서 지금의 길림성 북부와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일부지역 및 흑룡강성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부여의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해 간 뒤에 북부여 지역에는 새로운 통치세력이 등장했는데 이들도 고조선의 후계세력으로서 북부여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졸본부여는 부여의 거주민 일부가 일찍이 지금의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였는데 그곳에서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그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부여가 이와 같이 여러 갈래로 분여하게 된 것은 고조선 말기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는 거수국 가운데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여 지금의 난하 상류유역에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 서기 전 195년에 서한으로부터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난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한 위만은 그곳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여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그 후 위만은 서한의 외신이 되어 영토를 확장하여 대릉하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그 영토를 잃고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서기 전 108년에 서한 무제에게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지역은 서한의 영토가 되어 그곳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곳에 남아 있던 고조선의 주민들은 또 한 차례 동쪽으로 이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위만조선의 영토확장과 서한의 한사군 설치과정에서 부여는 피해를 입고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부여가 있었던 곳에는 부여라는 지명이 남아 있게 되었고 북쪽으로 이동한 부여를 북부여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대부분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북부여만 홀로 중국 영토 북쪽에 남아 있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북부여 왕 해부루는 서기 전 59년에 나라를 동쪽으로 옮겨 지금의 길림성 북부의 부여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부여가 동부여로서 그 영토는 길림성 북부와 내몽고자치구 동부 일부 및 흑룡강성 전지역이었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및 《삼국사기》에 보이는 부여는 바로 동부여인 것이다. 동부여는 서기 494년에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해부루왕이 동쪽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하자 이전의 북부여 지역에는 새로운 통치세력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나라 이름을 여전히 북부여라 했다. 새로 등장한 북부여 세력은 통치자를 해모수라 했던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후계세력이었던 것 같다. 해모수는 단군의 다른 칭호이기 때문이다. 북부여는 서기 346년에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 후 북부여 지역은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가 이동과 분열을 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부여 주민 가운데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요동 남부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워 졸본부여라 했는데 북부여에서 망명한 추모왕이 그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졸본부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부여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부여의 주민 가운데 일부는 연해주 밖까지 이동하여 지금의 오츠크해 연안에 두막루라는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했던 고아시아족의 일부를 형성했을 것이다.

 

 

부여가 분열 이동하여 새로운 거주지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곳의 토착인들이나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 이동해 온 고조선의 다른 거수국 주민들과 혼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부여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고 다른 거수국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강한 민족혼합을 가져왔다.

 

 

 

동부여의 패권 쇠퇴

동부여는 서기 전 59년에 지금의 난하 상류 북쪽의 북부여인들이 지금의 길림성 북부 부여현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로서, 고조선이 붕괴된 뒤 그 후계세력으로 일어난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정통성을 지닌 나라였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지금의 길림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구 동부 및 흑룡강성 전부를 차지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큰 나라로 등장하였는데, 서기 6년 이전에 이미 지금의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읍루까지 병합함으로써 더욱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동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한 여러 국가 가운데 패자임을 자처하였다. 

 

 

동부여는 다섯 개의 큰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에는 왕의 직할지역이 있었고 지방에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가加가 다스리는 사출도가 있었다. 가加들을 총칭하여 제가諸加라 하였다. 직할지역과 사출도에는 여러 개의 성이 있었고 성의 주변에는 마을들이 있었는데 성에 압로가 있어 주변의 마을들을 다스렸다. 하나의 성 아래는 약 20여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각 마을에는 촌장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부여의 통치조직은 왕 · 가 · 압로 · 촌장 등의 행정조직을 갖춘 중앙집권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에는 마가 · 우가 · 저가 · 구가 등 제가의 높은 관직이 있었고 그 아래 대사 · 대사자 · 사자 등의 관직이 있었다.

 

 

동부여에서는 초기부터 왕위세습제가 실시되었다. 이것은 고조선시대에 확립된 것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부여의 왕권은 절대적인 전제왕권은 아니었다. 흉년이 들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물어 왕을 바꾸거나 죽일 수도 있었고, 국가의 주요한 일은 제가평의회에서 결정하기도 하였다. 동부여의 왕권은 제한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동부여에는 크고 긴 강줄기들이 뻗어 있고 넓은 평야가 있어 농업과 목축이 발달하였고 자연물산도 풍부하였다.따라서 동부여인들의 생활수준은 비교적 높았다. 동부여인들은 복식도 청결하고 우아한 것을 즐겼는데, 국내에서는 흰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외국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이나 수 놓은 옷 또는 모직옷을 입고 고급 동물 가죽으로 만든 갓옷에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 이러한 사실은 동부여의 수공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동부여인들은 강인하고 용감하였으나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가 자신들을 침략하였을 때에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온 국민이 합심하여 막아내었다. 또 예의바르고 명랑하여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겸손해 하며 낮이나 밤이나 길을 다닐 때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동부여에서는 법과 형벌이 엄격하였다. 이러한 법과 형벌 체계는 고조선의 것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법의 집행이 결코 잔혹하지는 않았다. 경사스러운 날에는 형벌 집행를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어 재생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동부여 사회는 여러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신분에 따른 차별 대우는 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조선 이래의 홍익인간 정신이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에 반영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동부여인들은 하느님 숭배사상도 돈독하였는데 이것도 고조선의 종교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동부여인들은 조상 숭배나 부모에 대한 효도, 가족을 보호하는 정신도 지극했다.

 

 

동부여는 초기에 고구려는 물론 중국과도 화친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패자로 군림하였고, 중국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옛 땅인 지금의 요서 지역을 수복하기 위하여 때때로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력이 성장하고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영토확장에 들어가면서부터 동부여는 패자의 위치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결국 중국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때로는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에 중국을 돕기도 하였다. 서기 121년과 그 다음 해에 고구려가 현도성과 요동을 공격하자 동부여가 동한을 도운 것이라든가 서기 246년에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위나라에 군량을 공급한 것은 그러한 예이다.

 

 

동조의 국가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민족의 국가를 돕는 이러한 동부여의 정책은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가져왂고 주체위식의 약화를 가져와 동부여위 국력은 극도로 쇠퇴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기 285년에 모용선비의 침략으로 동부여 왕 의려가 자살하고 왕의 동생과 아들들은 동옥저로 피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동부여는 진나라의 도움으로 재건되었으나 국력이 약화되어 자주 모용선비의 침략을 받다가 서기 410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작은 나라로 전락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부여의 신하나라로 있던 읍루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동부여는 이를 진압할 능력조차 없었다.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던 동부여는 서기 494년에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552년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참고자료>

 
 
 
 
(3)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81-83쪽
 
 
 
(4)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293-296쪽
 
 
 
 
[네이버 지식백과] 동부여의 분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네이버 지식백과] 북부여의 멸망과 의려왕의 자살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부여(扶餘)의 역사와 문화 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krm.or.kr)송호정.2012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부여인 - Daum 백과

 

 

분자인류학논단 | 진[辰]...삼한..부여..만주족.. - Daum 카페

 

 
 
 

 

 

KBS 역사스페셜 – 2010 탐사보고, 동명루트를 찾아서

https://youtu.be/P6zBlykWQu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를 복원하다 1부ㅣ역사이다

 https://youtu.be/gU7PLlW5q3Q?list=PLRAmvpNm4pmmOBSvqEqONRHRqMaXiK7j1 

 

 

 

 

 

고구려와 백제의 모국 - 부여국 시리즈1 - 부여의 영토와 역사

 https://youtu.be/-4_vXJPesd8?list=PLRAmvpNm4pmmOBSvqEqONRHRqMaXiK7j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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