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부여 (2) 부여의 갑골 습속 본문
부여국(扶餘國)의 유적지 분포도
부여(扶餘, 혹은 夫餘)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의 하나로서 발해연안북·동부 지구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제사·군사·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신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史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중국의 진(晋)나라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有軍事 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고 하였다. 이는 군사 활동이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제골(蹄骨, 굽뼈)로 점을 쳐서 출진(出陣)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부여의 점복기사는 원래 위(魏)나라 어환(魚豢)이 편찬한 『위략(魏略)』에 실려 있는 기사이나 전문은 전하는 바가 없고, 그 일문(佚文)이 당초(唐初) 장초금(張楚金)이 편찬한 『한원(翰苑)』 번이부(藩夷部) 부여조에 “발굽으로 점을 쳐서 그 조짐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兆叶占蹄 吉凶之旨斯見]”고 한 것을 옹공예(雍公叡)가 『위략』의 기사를 할주(割註)로 “『왜략』에 이르기를 부여의 풍습 가운데 군사가 있을 때에는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굽뼈[제(蹄)]로 점을 보아 합할 때는 길하다[魏略曰 夫餘俗有軍事煞牛祭天 以牛蹄占凶 合者吉]”라고 인용하였다.
『한원(翰苑)』 부여조의 점복기사
그리고 『한원』 고려[고구려]조에는 “『왜략』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의 풍속 가운데, ······ 군사가 있을 때에는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굽뼈를 관찰하여 길하고 흉함을 판단한다[魏略曰 高麗俗 ······ 有軍事亦各祭天 煞牛觀蹄 以占吉凶]”고 하였다.
그리고 『한원』 이외에 『위략』의 일문을 중화 민국 초기[1925]의 장붕일(張鵬一)이 모아 편찬한 『위략집문(魏略輯文)』이 있는데, 이 책의 부여조에는 점복기사를 따로 싣지는 않았으나, 당나라 은공로(殷公路)의 『북호록(北戶錄)』의 『위략』을 인용하면서 고구려조의 점복기사 말미에 “부여국에서도 이와 같았다[扶餘國亦爾]”라고 덧붙여 놓았다. 즉, “부여국의 점복습관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는 기사이다. 이는 사서에서 볼 수 없는 고구려와의 동질성을 잘 나타내주는 기사이다.
동진(東晋) 시기의 범엽(范曄, 398~445)이 찬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부여조에도 『삼국지』에 실린 기사와 같은 내용[有軍事 亦祭天殺牛觀蹄 以蹏占吉凶]의 부여의 점복기사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위략』의 저작 연대에 대하여 전해종(全海宗) 선생은 찬자인 어환이 진나라 초기[270년 전후]에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상당부분 『위략』을 근거로 삼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삼국지』보다 10여 년 이전에 저술되었다고 보고 있다.1) 그러므로 부여의 점복기사는 중국인에 의하여 3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때의 방현령(房玄齡)이 편찬한 『진서(晋書)』 열전 사이(四夷) 부여조에도 『위략』이나 『삼국지』 기사와 같은 내용[若有軍事 殺牛祭天 以其蹄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이 실려 있다. 그리고 송대(宋代) 이방(李昉)이 편찬한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3 사이(四夷) 동이전 부여조에는 “後漢書曰 夫餘國 ······ 有軍事 亦祭天殺牛 以蹏占吉凶”이라고 하여 『후한서』의 동이전 부여조를 인용하였다고 직접 밝히고 있다.
『한원(翰苑)』 고려[고구려]조의 점복기사
『위략집문(魏略輯文)』 고구려조 점복기사
지금까지 여러 사서를 통하여 부여의 점복 신앙을 확인하였다. 고대사회에서 국중대사(國中大事)는 사(祀, 즉, 제사(祭祀))와 융(戎, 즉, 군사(軍事))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동양의 고대사회에서는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희생물로 바친 소의 굽뼈[우제골(牛蹄骨)]를 이용해 점복을 하였다.
갑골신앙이 가장 유행한 은(殷)나라에서는 국중대사를 비롯하여 왕이나 귀족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점복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제천(祭天)·제조(祭祖)·정벌(征伐, 군사)·년세(年歲, 기풍(祈豊))·천기(天氣)·복화(福禍)·전렵(田獵)·유력(遊歷)·질병(疾病)·생육(生育) 등을 대상으로 점복을 했다. 한편, 은대의 갑골문 중 제천과 군사에 관한 복사(卜辭)가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제천과 군사가 있을 때마다 점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과 부여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갑골문화는 신석기시대에 발해연안에서 발생하였는데, 청동기시대에 발해연안에 살고 있던 은인(殷人)의 선인들이 갑골문화를 대동(帶同)하고 황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살면서 은나라에서 갑골문화가 성행하였다고 생각된다. 발해연안의 초기 갑골문화에는 사슴·양·돼지 등 동물의 견갑골이나 늑골을 이용하여 점복을 하였고, 황하 하류 지역으로 내려와 살면서 주로 소의 견갑골(肩胛骨)이나 거북의 뱃바닥[구복갑(龜腹甲)]을 이용하여 점을 쳤다.2) 그래서 구복갑의 ‘甲’자와 견갑골의 ‘骨’을 합쳐서 ‘갑골(甲骨)’이라 한다. 점복 결과를 기록한 것이 갑골문이다.
다시 말해서 갑골은 발해연안에 분포하여 생활하던 동이족들이 사용하던 생활습관인데, 그들이 이를 대동하고 황하 하류로 서남향하여 은왕조를 건설하고 살면서 갑골문화를 발전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 재료 중에 동물의 견갑골 이외에도 늑골, 두개골, 굽뼈[거골(距骨 즉, 제골(蹄骨))] 등을 이용한 경우를 은나라 수도 은허의 발굴품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은허에서 ‘기사각사(記事刻辭)’가 있는 소의 굽뼈[우제골]가 출토된 바 있는데,3) 이는 아마도 부여의 굽뼈[우제골]와 마찬가지로 제사와 점복을 마친 유류품이 아닌가 한다.
문헌상으로 기록되었던 부여의 갑골문화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상의 갑골[복골(卜骨)과 복갑(卜甲)] 자료가 만주 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즉, 1957년에 길림시 교외 송화강 연안의 용담산에서 청동기시대의 무자복골(無字卜骨)이 출토되었고,4) 1961년에도 송화강 유역에서 신석기시대의 복골이 출토되었다고 한다.5) 이들 갑골이 발견된 지역은 바로 부여의 옛 수도인 남성자토성(南城子土城)이 있는 지역이다.
부여국의 왕성길림시 교외 송화강 철교를 건너면 바로 부여시대의 동단산성이 있고, 이어서 고구려시대의 용담산성이 있다. 동단산성 남쪽으로 낮은 구릉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바로 부여 왕성으로 추정되는 남성자 유적이다.
한편, 동부여의 옛 지역인 두만강 유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백초구(百草溝) 유적과 함경북도 무산읍 범의구석[호곡동(虎谷洞)] 집자리에서도 청동기시대 내지 철기시대의 무자복골이 출토된 바 있다.6)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백초구(百草溝) 출토 복골
함경북도 무산 범의구석[호곡동] 출토 복골
부여의 갑골문화가 은의 갑골문화와 동일계열이란 점은 이미 논술하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갑골문화 이외에도 관습상 여러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중국 사서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전술한 것처럼 『후한서』가 『삼국지』보다 150년 이후에 편찬되었다고하므로 우선 『삼국지』 기사를 살펴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특별히 주의할 기사로 “以殷正月祭天”과 “在國衣尙白 白布大袂袍袴” 및 “殺人殉葬 多者百數”라고 하는 내용이다.
먼저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낸다[以殷正月祭天]”고 하는 기사 중에서 “以殷正月”이라고 함은 은대 역법(曆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으로 『춘추(春秋)』 은공(隱公) 원년조 공영달(孔潁達) 소(疏)에 보면, “夏以建寅之月爲正 殷以建丑之月爲正 周以建子之月爲正”이라 하여 ‘건축(建丑)’ 즉, 은의 달력은 태양년을 십이지(十二支)로 나누어 십이단의 월(月)을 만든 ‘천문월(天文月)’ 중에서 축월(丑月, 하력(夏曆) 12月), 오늘날의 음력 12월을 정월로 정하여 ‘태음월(太陰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7)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은대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에 제천한다는 뜻이다. 『백호통(白虎通)』 삼정(三正)조에, “夏以孟春月爲正 殷以季冬月爲正周以仲冬月爲正”이라 한 것을 보면, 은의 정월은 계동월(季冬月) 즉, 하력(夏曆) 12월, 오늘날의 음력 12월을 세수(歲首)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ㆍ하(夏)·은(殷)·주(周) 세수(歲首) 비교표
ㆍ하(夏)·은(殷)·주(周) 세수(歲首) 비교표月曆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周曆殷曆夏曆正月 | 二月 (春) |
三月 | 四月 | 五月 (夏) |
六月 | 七月 | 八月 (秋) |
九月 | 十月 | 十一月 (冬) |
十二月 |
十二月 (冬) |
正月 | 二月 (春) |
三月 | 四月 | 五月 (夏) |
六月 | 七月 | 八月 (秋) |
九月 | 十月 | 十一月 (冬) |
十一月 (冬) |
十二月 | 正月 | 二月 (春) |
三月 | 四月 | 五月 (夏) |
六月 | 七月 | 八月 (秋) |
九月 | 十月 |
이와 같이 은대의 역법은 하(夏)나라나 주(周)나라의 역법과는 다르게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의 옷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 천으로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은 도포를 만들어 입었다[在國衣尙白 白布大袂袍袴]”라고 하는 기사에서 은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데,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대(夏代)에는 흑색을 숭상하여 상사(喪事)가 있을 때에는 황혼(黃昏)에 입렴(入斂)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흑마를 타며, 제사시에는 흑색의 희생물을 바친다. 은대에는 백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정오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백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백색을 바친다. 주대에는 적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일출시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적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적색을 바친다[夏后代尙黑 大事斂用昏 戎事乘驪 牲用玄 殷人尙白 大事斂用日中 牲事乘翰牲用白 周以尙赤 大事斂日出 戎事乘騵 牲用騂].”
이는 하나라에서는 흑색을 숭상하고, 은나라에서는 백색을 숭상하며, 주나라에서는 적색을 숭상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한편, “殷人尙白”에 대한 한(漢)나라 정현(鄭玄)이 붙인 주에 보면 “以建丑之月爲正物牙白色”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앞서 언급한 은정월(殷正月)인 축월에 비친 달이 곧, 아백색이라고 한 것이다. 은나라에서 백색을 숭상한 것과 같이 부여 또한 상백(尙白)사상[숭백(崇白) 사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위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여의 순장(殉葬)제도를 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사람을 죽여 순장하였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된다[殺人殉葬 多者百數]”고 하였다. 부여에서는 많을 경우 백 수십 명을 살순(殺殉)하여 매장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이 백여 명을 순장한다고 할 때는 반드시 확고한 전제적(專制的)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절대적인 통치자[즉, 군왕(君王)]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은대의 수도인 은허에서 다수의 순인(殉人)을 묻은 고분이 발굴되고 있는데, 특히 제1001호 대묘에서는 무려 360명의 순인이 발견되었다.8) 이 대묘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며, 이 외에 이와 같은 규모를 갖춘 고분이 8기가 더 있는데 모두 이와 비슷한 수의 순인을 매장하고 있다.9) 그리고 이 밖에 중소형의 고분에서도 순인이 발견되고 있는데, 모두 은대의 귀족이나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물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같은 동양 고대사회의 순장 제도는 주로 동북아시아의 동이족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의 황전악(黃展岳)은 “사람을 죽여서 제사에 희생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하는 것은 야만적인 습속으로 이와 같은 습속은 은왕국의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은의 동방의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였다[殺人祭祀和用人殉葬的野蠻的習俗 不僅盛行于殷王國的統治中心 在殷王直接統治區以及東方的淮夷·東夷地區廣爲流行]”고 하였다.10)
황씨에 의하면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에서는 은나라와 마찬가지로 순장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부여와 혈족관계를 맺고 있는 고구려에서도 초기에는 순장이 실시되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 동천왕(東川王) 22년[248]조에, “왕이 죽으므로 근신(近臣) 중에 순사(殉死)하는 자가 많아 사왕(嗣王)인 중천왕(中川王)이 이를 금지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장사일에 임해서는 순사하는 자가 많았다[王薨 國人懷基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 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고 하는 기사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순장이 유행했음을 알 수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3년[502]조에 “3월 순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전왕이 돌아가셨을 때 남녀 각 5인을 순장하였는데, 이와같은 관습을 금지하도록 하였다[三月下令禁殉葬 前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고 하는 기사를 보면, 신라에서도 지증왕 이전까지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순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가야 지역에서도 순장했던 사실이 경상북도 고령읍 지산동 가야 순장묘의 발굴을 통하여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11)
지금까지 우리는 부여의 점복신앙이나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 흰색을 숭상하는 풍속 그리고 순장 습관 등 여러 가지 관습이 은나라의 관습과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그것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2)
김민구
"갸름하고, 찢어진 눈… 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美 미네소타大 김민구 교수 "2~3세기 夫餘 얼굴상 2점 확인"
머리에 상투 튼 모양… 귓불엔 귀고리용 구멍 뚫려
길고 갸름한 얼굴에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 머리엔 상투를 틀고 귓불을 뚫은 중년 남성.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한 뼘짜리 얼굴상이 고대 한국인 최고(最古)의 얼굴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민구(37) 미국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동양미술) 조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린성 지린시 동부 둥퇀산(東團山)과 마오얼산(帽兒山)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 얼굴상 2점은 한민족계 고대국가인 부여(夫餘) 2~3세기의 유물"이라고 밝혔다. 최근 발간된 '미술사논단' 제38호에 수록된 '부여의 얼굴: 둥퇀-마오얼산 출토의 금동면구(金銅面具)와 그 외연(外延)'이라는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둥퇀-마오얼산 일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 혹은 고구려계 유적일 것이라 막연히 추정했으나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부여의 왕성지(王城址)임이 확인됐다"며 "금동 얼굴 역시 후한 말기나 훨씬 늦은 시대의 거란계 유물로 추정돼왔으나 출토지가 부여 왕성지로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부여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선 금동 얼굴이 최소 6점 발견됐다. 4점은 일찍 자취를 감췄으나 2점은 중국 뤼순박물관(추정)과 지린성박물관에 각각 전한다. 그나마 국내 학계에선 광복 이후 잊힌 유물이다. 둘 다 얼굴은 갸름하고 인상은 강렬하다 못해 기괴하다.
이 중 둥퇀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얼굴상의 높이는 17.9㎝. 정수리 부분이 상투를 튼 것처럼 볼록 솟아있고, 귓불에 천공(穿孔·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시사하는 점 등이 고대 한민족 특유의 습속을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마의 주름, 벌어진 입, 살짝 내민 혀…. 이 얼굴은 관동청박물관(현 뤼순박물관)이 1926년 발간한 소장품 도록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한 점은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1903~1982)이 1934년 마오얼산 아래 밭에서 발굴했다. 높이 13.8㎝.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얼굴상의 용도는 뭘까. 김 교수는 "마구(馬具)나 무기 등에 장식용으로 장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부여(기원전 2세기 이전~기원후 346)는 철기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 최초로 고대국가를 성립한 세력이다. 이들의 문화가 이후 고구려·백제는 물론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정치·언어·이념·종교 등 다방면으로 계승됐다. 김 교수는 "따라서 이 얼굴상은 고대 한국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입체 조형 최고(最古)의 걸작"이라고 했다.
미술해부학 박사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부여족과 연관된 브리야트족의 얼굴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유사하다. 긴 얼굴에 광대뼈, 홀쭉한 뺨, 얇은 입술 등 북방계 얼굴"이라고 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5~6세기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얼굴과도 비슷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극동 퉁구스 계통 민족의 공통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전형적 북방계 얼굴"이라고 말했다.(5)
[단독]연해주서 기원전 3∼4세기 부여 銅劍 첫 발견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4월 28일 15시 18분
고대 옥저 영토… 부여와 교역 증거, 中 위나라 희귀 동전도 출토돼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주(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과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화폐인 ‘칠원일근(桼垣一釿)’이 현지 사학자들에 의해 최근 발견됐다. 동검은 손잡이 끝부분의 장식이 양옆으로 돌출돼 마치 안테나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부여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강 교수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총길이 약 40cm인 이 동검은 4개로 조각 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칼날 조각의 두께는 0.5∼0.9cm, 최대 너비는 2.2cm다. 칼날의 형태가 길쭉하게 떨어지는 전형적인 세형동검이다. 특이하게 손잡이 아랫부분에 T자형 홈이 파여 있다. 홈 아래로 돌출된 안테나 장식이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새 두 마리가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검은 곳곳에 닳은 흔적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 교수는 “조각들의 부러진 모습 등을 감안할 때 장례용으로 동검을 땅에 묻으면서 일부러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검 근처에서 발견된 칠원일근은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직경 3.5cm의 동전. 기원전 3∼4세기에 통용된 이 화폐는 극히 적은 수량만 제작돼 지금껏 한반도나 주변 지역에선 출토된 전례가 없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동검과 동전을 함께 묻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강 교수는 “위나라 화폐는 당시 매우 귀했으며 중원∼요동반도∼연해주로 이어지는 모피 무역 과정에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검은 초기 옥저가 부여와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10)
<주>
(2)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의 갑골 습속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5) "갸름하고, 찢어진 눈… 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chosun.com)2014.09.06
(8)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95165.html
(10) [단독]연해주서 기원전 3∼4세기 부여 銅劍 첫 발견|동아일보 (donga.com)2016-04-28
<참고자료>
길림 노하심 고분군(吉林 老河深 古墳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부여(扶餘)의 역사와 문화 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krm.or.kr)송호정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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