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6-7)

1.5.6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는 황제국임을 보여주고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세 고주몽성제, 연호는 평락,

2세 유리명제,

3세 대무신열제,

6세 태조무열제, 연호는 융무,

10세 산상제,

11세 동천제,

19세 광개토경호태황, 연호는 영락,

20세 장수홍제호태열제, 연호는 건흥,

21세 문자호태열제, 연호는 명치,

25세 평강상호태열제, 연호는 대덕,

26세 영양무원호태열제, 연호는 홍무,

27세 영류제,

28세 보장제, 연호는 개화 등 황제라 칭하였으며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타발, 소서노, 을파소, 을지문덕, 연개소문, 을밀이 나오고, 백제, 신라, 왜의 력사도 나온다.

 

고구려의 천도과정을 보면 고주몽성제가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 BCE 27)10월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에서 눌견(눌견은 상춘 주가성자이다)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2세 유리명제 21(단기2335, CE 2)에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으로 옮기셨다.

3세 대무신열제 20(단기2370. 37)에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10세 산상제 원년(단기 2530, 197)에 아우 계수를 보내어 공손탁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삼한비기구지에 요서에 창료현이 있는데 당 때 요주로 고쳤다. 그곳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아래가 곧 백암성이다. 당 때 암주라 부른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 경계 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인데 일명 개평이라 하였으니 당 때 개주는 이곳이다.

자치통감에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에 마수산이 유성 서남에 있는데 당 때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책성(연해주)에 태조무열제(6)의 공덕을 새긴 기동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고 한다.

 

환국시대에 오훈이 있었고, 신시시대에 오사, 고조선시대에 오행육정, 부여에 구서가 있었다. 또한 삼한의 공통된 풍속에 오계가 있었으니 곧 효도·충성·신의·용맹·어짊이다 모두 백성을 공명정대하고 평등하게 가르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도 해마다 한맹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천제를 단군이라고도 하였다. 해마다 한맹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은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삼신상제님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은 처음 동굴에서 행해졌다. 거기에 구제궁 조천석이 있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조의선인은 도무 선발된 사람인데 사람들이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에게 영광을 더하여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朝代記曰, 東川帝亦稱檀君, 每當寒盟, 祭迎三神于平壤. 今箕林窟, 卽其祭所也. 大迎祭典, 始行隧穴, 有九梯宮朝天石, 行路之人, 皆可指點也. 又有三輪九德之歌, 以獎之. 皂衣仙人皆其選也. 國人所矜式者也. 不然, 何以加榮, 與之爲等於王使者乎.

 

고구려의 선조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이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에서 사셨다. 부여의 옛 도읍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셨다. 이분이 부여의 시조이시다.

머리에 오우관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을 차고 오룡거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고 저물면 하늘에 오르셨다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 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도 태평세월을 누렸다. 해모수단군께서 처음 내려온 때는 임술(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고열가단군 57, BCE 239)48일로 진()나라 왕 영정 8년이다.”

 

1세 고주몽성제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55일이요, 한나라 왕 불릉 원봉 2년이었다.

불리지가 세상을 뜨자 유화부인이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 서란이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가섭원을 택해 살면서 관가에서 말 기르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마침 부여 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시니(단기 2276, BCE 58)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고주몽성제의 조칙

 

『《대변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신이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의 아들이 아니더냐!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배달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 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 교화를 이루느니라.

 

大辯經曰, 高朱蒙聖帝詔曰, 天神造萬人一像, 均賦三眞. 於是, 人其代天而能立於世也. 況我國之先, 出自北夫餘, 爲天帝之子乎. 哲人虛靜戒律, 永絶邪氣, 其心安泰, 自與衆人, 事事得宜. 用兵所以緩侵伐, 行刑所以期無罪惡. , 虛極靜生, 靜極知滿, 知極德隆也. , 虛以聽敎, 靜以絜矩, 知以理物, 德以濟人. 此乃神市之開物敎化, 爲天神通性, 爲衆生立法, 爲先王完功, 爲天下萬世, 成智生雙修之化也.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 BCE 27)10월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에서 눌견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눌견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이다.

 

고구려의 개국공신 연타발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 갈사를 오가면서 이재를 잘하여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았는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으로 도읍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나니 때는 평락 13(단기 2309, BCE 25) 병신년 봄 3월이었다.

 

延豹渤, 卒本人. 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 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 , 率衆,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 納穀五千石, 移都訥見, 而先自願納. 招撫流亡, 以勤王事, 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歿. , 平樂十三年丙申春三月也.

 

2세 유리명제

21(단기2335,CE 2)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

 

3세 대무신열제

20(단기2370. 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6세 태조무열제(53~146)

북경 아정문 바깥60리쯤에 있는 고려진, 평부 동북쪽 70 리에 있는 안시성(지금 탕지보), 하간현 서북쪽 12 리에 있는 고려성을 모두 쌓았다.

 

태조 융무 3(단기 2388,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하였다.

안시성(安市城)-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석성(石城)-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건안성(建安城)은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건흥성(建興城)은 난하의 서쪽에 있다.

요동성(遼東城)은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다.

풍성(豐城)은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성(韓城)은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옥전보(玉田堡)는 옛날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택성(澤城)은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요택성(遼澤城)은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57)봄 정월에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9세 고국천열제

 

을파소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10세 산상제

원년(단기 2530, 197) 아우 계수를 보내어 공손탁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19세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天樂)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때도 천악(天樂)을 쓰셨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 백제·신라·가락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이국·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절정을 이루었다.

 

廣開土境好太皇, 隆功聖德, 卓越百王. 四海之內, 咸稱烈帝. 年十八, 登極于光明殿, 禮陳天樂, 每於臨陣, 使士卒, 歌此於阿之歌, 以助士氣, 巡騎至摩利山, 登塹城壇, 親祭三神, 亦用天樂.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 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而還. 時則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 皆平服. 任那··倭之屬, 莫不稱臣. 海東之盛, 於斯爲最矣.

 

영락 10(단기 2733, 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20세 장수홍제호태열제(단기 2746~2824, 413~491)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웅진강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북연, 실위 등 여러 나라가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에 편입되었다. 또 신라 매금과 백제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에서 만나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다.

 

長壽弘濟好太烈帝, 改元建興, 仁義治國, 恢拓疆宇, 熊津江以北, 屬我. 北燕室韋諸國, 皆入敍族焉. 又與新羅寐錦·百濟於瑕羅, 會于南平壤, 約定納貢戍兵之數.

 

21세 문자호태열제(491~519)

연호를 명치로 고치셨다. 11년에 제, , , 월의 땅이 우리에게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영토는 점점 넓어졌다.

 

文咨好太烈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 至是, 國疆漸大.

 

 

22세 안장열제(519~531)

 

을밀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조의선인으로 뽑혀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을밀은 집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받아들여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이름난 조의(皂衣)가 되었고 따르는 무리가 3천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함께 다물흥방가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의를 다하는 기풍을 고취하였다. ~

을밀선인이 일찍이 을밀대에 거주하며 오직 하늘에 천제 올리고 수련하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다. 대개 신선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율을 삼고 그 이름을 더욱 굳세게 지켜 서로 영광되게 하고, 나의 마음을 비워 만물을 살리고 몸을 던져 정의로움을 온전하게 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었으니, 천추만세에 추앙을 받아 능히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인존(人尊)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 대를 을밀대라 불렀으니 금수강산의 한 명승이다.

 

又曰, 平壤有乙密臺, 世傳乙密仙人所建也. 乙密, 安臧帝時, 選爲皂衣, 有功於國, 本乙素之後也. 居家讀書習射, 歌詠三神, 納徒修鍊, 義勇奉公. 一世皂衣其徒三千. 所到雲集, 齊唱多勿興邦之歌. 因此, 可鼓其捨身全義之風者耳, ~

乙密仙人嘗居臺, 專以祭天修鍊爲務. 蓋仙人修鍊之法, 參佺爲戒, 健名相榮, 空我存物, 捨身全義, 爲國人式, 風仰千秋, 足以起感, 亦爲人尊之象徵也. 後人, 稱其臺曰乙密, 乃錦繡江山之一勝也.

 

25세 평강상호태열제(559~590)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시어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연호를 대덕(大德)으로 바꾸었고 정치와 교화가 매우 밝아졌다. 대덕 18년 병신년(단기 2909, 576)에 열제께서 대장 온달(溫達)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碣石山)과 배찰산(拜察山)을 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깨뜨리셨다. 이로써 유림진(楡林鎭)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山西) 경계이다.

 

平岡上好太烈帝, 有膽力, 善騎射, 乃有朱蒙之風, 改元大德, 治敎休明. 大德十八年丙申, 帝率大將溫達, 往討碣石山, 拜察山, 追至楡林關, 大破北周. 楡林鎭以東悉平. 楡林, 今山西境.

 

26세 영양무원호태열제(590~618)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嬰陽武元好太烈帝時, 天下大理, 國富民殷. 隋主楊廣本鮮卑遺種, 統合南北之域, 以其餘勢, 侮我高句麗, 以爲小虜, 侮慢上國, 頻加大兵, 我旣有備, 而未嘗一敗也.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 9(598)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이셨다고 옛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명치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권익 집행을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의 구획을 짓고 문무관리를 두었다.

그 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니 사해 안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은 속으로 앙심을 품고 감히 원수를 갚겠다고 군사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보내 총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파괴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을 보내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시니 산동 지역이 평정되고 해성이 평온해졌다.

이해(단기 2931, 598)에 양견이 또다시 양량, 왕세적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요택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가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舊史曰, 嬰陽武元好太烈帝, 弘武九年, 帝遣西部大人淵太祚, 往討登州, 擒殺摠管韋態. 先是, 百濟以兵, 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戍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 衰頹不振, 權益執行, 盡歸聖朝, 劃定城邑, 文武置吏, 及隋作兵, 有事南北, 騷擾四起, 害及生民, 帝威赫怒, 恭行天討, 四海之內, 莫不聽命也.

, 隋主楊堅, 陰藏禍心, 敢出讐兵, 密遣韋冲, 摠管爲名, 潰破官家, 焚掠邑落, 乃遣將兵, 擒殺賊魁, 山東平服, 海城謐然. 是歲, 堅又遣楊諒, 王世績等三十萬, 來與戰, 纔發定州, 未至遼澤, 値水亂而饋轉杜絶, 癘疫幷熾, 周羅緱以兵據登州, 徵集戰艦數百, 自東萊泛船, 趣平壤, 爲我所覺, 殿而拒之以進. 忽遭大風, 而全軍漂沒. , 百濟請隋爲軍導, 受我密諭而未果.

 

을지문덕장군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16일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7백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물아 붙여 한 갈래는 현도길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길로 유주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안·건창·백암·창려 등 여러 진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탁성·신창·용도 등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평곡·조양·루성·사구을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분주·환주·풍성·압록은 임황(臨潢)에 속하게 되어 모두 옛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었다. 이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乙支文德, 高句麗國石多山人也. 嘗入山修道, 得夢天神而大悟. 每當三月十六日, 則馳往摩利山, 供物敬拜而歸. 十月三日則登白頭山祭天. 祭天乃神市古俗也.

弘武二十三年, 隋軍一百三十餘萬, 幷水陸而來攻, 文德能以奇計, 出兵鈔擊之, 追至薩水, 遂大破之. 隋軍, 水陸俱潰, 生歸遼東城今昌黎者, 僅二千七百人. 廣遣使乞和, 文德不聽, 帝亦嚴命追之. 文德與諸將, 乘勝直驅, 一自玄菟道, 至太原, 一自樂浪道, 至幽州, 入其州縣而治之, 招其流民而安之. 於是, 建安·建昌·白岩·昌黎諸鎭, 屬於安市, 昌平·涿城·新昌·桶道諸鎭, 屬於如祈, 孤奴·平谷·造陽·樓城·沙溝乙, 屬於上谷, 和龍·汾州·桓州·豊城·鴨綠, 屬於臨潢, 皆仍舊而置吏. 至是, 强兵百萬, 境土益大.

 

양광이 임신(단기 2945, 612)년에 쳐들어올 때 전에 없이 많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우리는 조의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 같은 사람은 한 시대의 흐름을 지어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다.

위에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 축맹과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楊廣壬申之寇也,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以我皂衣二十萬, 滅其軍幾盡. 此非乙支文德將軍一人之力乎. 若乙支公者, 乃萬古造時勢之一聖傑也哉. 文忠公趙浚, 與明使祝孟, 共登百祥樓, 賦詩曰,

薩水湯湯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哂餘.

 

홍무 25(단기 2947, 614)에 양광이 또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습격하려 하거늘 열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一仁)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므로 함께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를 올렸다.

양광이 배 안에서 표를 손에 들고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뇌를 꺼내 쏘아 가슴을 맞혔다. 양광이 놀라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상 양명이 양광을 업게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물러나서 회원진으로 철병하기를 명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빛이 검게 변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嬰陽武元好太烈帝時, 天下大理, 國富民殷. 隋主楊廣本鮮卑遺種, 統合南北之域, 以其餘勢, 侮我高句麗, 以爲小虜, 侮慢上國, 頻加大兵, 我旣有備, 而未嘗一敗也.

弘武二十五年, 廣又復東侵, 先遣將兵, 重圍卑奢城, 官兵戰不利, 將襲平壤, 帝聞之, 欲圖緩兵, 執遣斛斯政, 適有皂衣一仁者, 自願請從而偕到, 獻表於楊廣, 廣於舡中, 手表而讀未半, 遽發袖中小弩, 中其胸, 廣驚倒失神. 右相羊皿, 使負之, 急移於小船而退, 命懷遠鎭撤兵. 廣謂左右曰, 予爲天下主, 親伐小國而不利, 是非萬世之所嗤乎. 羊皿等面黑無答.

 

27세 영류제

고구려 좌장 고성이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막리지의 북벌 계획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가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말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노자상을 구해 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 강론을 듣게 하였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는데 부여현에서 남해부까지 그 거리가 천 여리였다.

이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수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신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멸하려고 의논하셨다.

연개소문이 이 일을 먼저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하고, 휘하 군사를 모두 모아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열병식을 보자고 하니 모두 참석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임금이 변고를 전해 듣고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였다.

 

左將高成, 密有親隋之心, 陰壞莫離支北伐之計. 至是, 屢請遣師, 攻破百濟, 有功. 獨莫離支, 力排衆議, 强執以南守北伐之策, 屢陳利害以從. 及高成卽位, 盡棄前帝之遺法, 遣唐求老子像, 使國人聽講道德經, 又動衆數十萬, 築長城, 自扶餘縣, 至南海府, 千有餘里. , 西部大人淵蓋蘇文, 請罷講道敎, 又以停長城之役, 極陳利害, 帝甚不悅, 奪蘇文之兵, 命監築長城之役, 密與諸大人, 議誅滅之.

蘇文先得聞知, 乃嘆曰, 豈有身死而國全之理乎. 事急矣. 時不可失也. 悉集部兵, 若將閱武者, 盛陳酒饌, 召諸大臣, 共臨視之, 皆至. 蘇文勵聲曰, 門近虎狼而不救, 反欲殺我乎, 遂除之. 帝聞變而微服潛逃, 至松壤而下詔, 招募. 國人無一人至者, 自不勝愧汗, 遂自殞碎而崩.

 

 

 

출처;  신시 배달국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민족의 영산(성산) 백두산 (tistory.com)

 

28세 보장제(단기 2975, 642~단기 3001, 668)

 

연개소문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선조는 봉성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이고,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연개소문은 홍무 14(26세 영양제, 단기 2936, 603) 510일에 태어났고 아홉 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다. ~

연개소문이 고성제를 내쫒고 무리와 함께 고장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보장제(28, 단기 2975, 642~단기 3001, 668)이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 되었다. 또한 세 마을에 전()을 두고 조의선인(皂衣仙人)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朝代記曰, 淵蓋蘇文一云蓋金. 姓淵氏. 其先鳳城人也. 父曰太祚, 祖曰子遊, 曾祖曰廣, 幷爲莫離支. 弘武十四年五月十日生, 年九歲, 選爲皂衣仙人. 儀表雄偉, 意氣豪逸, 每與軍伍, 列薪而臥, 手瓠而飮, 群焉而盡己, 混焉而辨微, 賞賜必分給, 誠信周護, 有推心置腹之雅量, 至有緯地經天之才. 人皆感服, 無一人異懷者也. , 用法嚴明, 貴賤一律, 若有犯者, 一無假借, 雖當大難, 少不驚心, 與唐使酬言, 亦不屈志, 常以自族陰害, 爲小人, 能敵唐人, 爲英雄, 喜焉而下賤可近, 怒焉而權貴俱𢤟, 眞一世之快傑也. 自言生於水中, 能潛泳竟日, 尤健不疲, 衆咸驚伏地, 羅拜曰, 滄海龍神, 復爲化身矣. 蘇文旣放高成帝, 與衆共迎高臧, 是爲寶臧帝. 蘇文旣得志, 行萬法爲公之道, 成己自由, 開物平等, 三忽爲佺, 皂衣有律.

 

개화 4(단기 2978, 645)에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이에 세민이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 정명진 등 수십만을 거느리고 요택에 이르렀다. 진창이 200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채찍으로 말을 치며 돌진하여 맞붙어 싸웠고 행군총관 장군차가 대패하니 이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세민이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세적과 합세하여 백암성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 손대음이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옥살 고혜진이 관병과 말갈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주저 없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중의 곡식을 먹으면서 군사를 풀어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돌아가려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괴로워하며 패할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지하여 안시성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대로 고정의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처리에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대답하였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연수가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기습 부대를 보내어 군량을 불태우고 빼앗았다. 세민이 온갖 계략으로 뇌물까지 쓰며 꾀었으나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 거부하여 자주 군사를 내어 몰래 습격하고 함락시켜 흩어지게 하니 적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함께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펴다가 어느날 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국의 힘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기로 이렇게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다. 이제 귀국에 들어와 전쟁을 하는데 말 먹일 꼴과 식량을 공급할 수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다.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이에 연수가 말하였다. “좋다. 그대들 군사가 30 리를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주석(柱石)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너희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아우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죄를 물을 만하다. 이대로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어 수비에 더욱 힘쓰게 하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아도 아무 방법이 없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막리지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은 적봉에서 하간현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로 역수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 창려이고,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하여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莫離支率數百騎, 巡駐灤坡, 詳問情形, 遣命摠攻四擊, 延壽等與靺鞨夾攻, 楊萬春登城督戰, 士氣益奮, 無不一當百矣. 世民憤不自勝, 敢出決戰. 楊萬春乃呼聲張弓, 世民出陣, 矢浮半空, 遂爲所中, 左目沒焉. 世民, 窮無所措, 從間道遁, 命世勣道宗, 將步騎數萬, 爲殿, 遼澤泥淖, 軍馬難行, 命無忌, 將萬人, 剪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世民自繫薪於馬鞘以助役. 冬十月, 至蒲吾渠, 駐馬, 督塡道, 諸軍渡渤錯水, 暴風雪, 占濕士卒, 多死者. 使燃火於道, 以待之. , 莫離支淵蓋蘇文, 乘勝長驅, 追之甚急, 鄒定國, 自赤峰至河間縣, 楊萬春, 直向新城, 軍勢大振. 唐奴多棄甲兵而走, 方渡易水時, 莫離支命延壽, 改築桶道城, 今高麗鎭也. 又分遣諸軍, 一軍守遼東城, 今昌黎也. 一軍跟隨世民, 一軍守上谷, 今大同府也. 於是, 世民窮無所措, 乃遣人乞降. 莫離支率定國萬春等數萬騎, 盛陳儀仗, 鼓吹前導, 入城長安, 與世民約. 山西·河北·山東·江左, 悉屬於我.

 

왕개보가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한 데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꺾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때는 개화 16(28세 보장제, 단기 2990, 657) 107일이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王介甫曰, 淵蓋蘇文非常人也. 果然, 莫離支在則高句麗與百濟俱在, 莫離支去則百濟與高句麗俱亾. 莫離支亦人傑也哉. 莫離支, 臨終, 顧謂男生男建曰, 爾兄弟, 愛之如水, 束箭則强, 分箭則折, 須無忘此將死之言. 貽笑於天下隣國之人. 時則開化十六年十月七日也. 墓在雲山之九峰山也.

 

 

백제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백제는 요서에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遼西진평(晋平)이고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명치 11(21세 문자제, 단기 2835,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松江회계(會稽오성(吳城좌월·산월·천주라 하였다.

명치 12(502)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 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先是, 高句麗與百濟, 外競俱存, 遼西地有百濟所領曰, 遼西晉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署郡縣曰, 松江·會稽·吳城·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 百濟郡廢.

 

소서노

 

고주몽성제가 재위하실 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서논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년(단기 2292, BCE 42) 3월에 사람들에게서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 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 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렸다. 13년 임인(단기 2315, BCE 19)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高朱蒙在位時, 嘗言曰, 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 歲庚寅三月,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 而居之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南至帶水, 東濱大海, 半千里之土境, 皆其有也. 遣人致書于朱蒙帝, 願以內附, 帝甚悅而獎之. 冊號召西弩, 爲於瑕羅. 及至十三年壬寅而薨. 太子沸流立. 四境不附.

 

온조

 

이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 오간 등 신하 열 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 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백 사람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於是, 馬黎等謂溫祚曰, 臣聞馬韓, 衰敗立至, 乃可往立都之時也. 溫祚曰, , 乃編舟渡海, 而始抵馬韓彌鄒忽, 行至四野, 空無居人. 久而得到漢山, 登負兒岳, 而望可居之地. 馬黎烏干等十臣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開沃澤, 西阻大海, 此天險地利難得之勢. 宜可都於此, 更不可他求也. 溫祚從十臣議, 遂定都于河南慰支城, 仍稱百濟, 以百濟來故, 得號也. , 沸流薨. 其臣民, 以其地歸附.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함께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고 한다.

 

신라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斯盧始王, 仙桃山聖母之子也. , 有夫餘帝室之女婆蘇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 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 , 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年十三, 歧嶷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 爲居西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함께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지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렇게 두 번, 세 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注力國防, 備唐甚盛, 先與百濟上佐平, 俱存立義, 又請新羅使金春秋, 館於私邸曰, 唐人多悖逆, 近於禽獸, 請吾子須忘私仇, 自今三國, 敍族合力, 直屠長安, 唐醜其可擒也. 戰勝之後, 仍舊地而聯政, 仁義共治, 而約相勿侵, 爲永久遵守之計, 何如, 勸再三, 春秋終不聽, 惜哉!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큐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 10(단기 2733, 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任那者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 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 任那乃對馬全稱也. 自古, 仇州對馬, 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任那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首邑之稱也. 自是, 三汗相爭, 歲久不解. 佐護加羅屬新羅, 仁位加羅屬高句麗, 鷄知加羅屬百濟, 是也.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倭, 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

 

협보가 남한으로 달아나 마한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덜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海浦)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의 시조이다. 후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워 다스렸다. 이때 세 나라는 바다에 있고 일곱 나라는 육지에 있었다.

처음에 변진구야국 사람이 먼저 들어와서 모여 살았는데 이것을 구야한국이라 하였다. 다파라를 일명 다라(多羅)한국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에서 이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늘 고구려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安羅)국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 이곳에 웅습성이 있었는데 지금 큐슈 구마모토(熊本)성이 바로 그곳이다.

왜는 회계군(會稽郡) 동쪽에 있는 동야현 동쪽에 있었다. 뱃길로 바다 건너 9천 리를 가면 나패(나하)에 이르고, 또 일천리를 가면 근도(네시마)에 이른다. 근도를 저도(도시마)라고도 부른다.

당시에 구노 사람이 여왕과 서로 다퉈 찾아가는 길을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구야한국으로 가려는 사람은 대개 진도(津島)(쓰시마), 가라산(加羅山), 지가도를 거쳐야 비로소 말로호자(말로국) 땅에 이를 수 있었다. 그 동쪽 경계가 구야한국 땅이다.

 

先是, 陜父奔南韓, 居馬韓山中, 從而出居者, 數百餘家. 未幾, 歲連大歉, 流離遍路. 陜父, 乃知將革, 誘衆裹糧, 舟從浿水而下, 由海浦而潛航, 直到狗邪韓國, 乃加羅海北岸也. 居數月, 轉徙于阿蘇山而居之. 是爲, 多婆羅國之始祖也. , 倂于任那, 聯政以治, 三國在海, 七國在陸.

, 弁辰狗邪國人, 先在團聚. 是爲狗邪韓國. 多婆羅, 一稱多羅韓國. 自忽本而來, 與高句麗, 早已定親故, 常爲烈帝所制. 多羅國與安羅國, 同隣而同姓. 舊有熊襲城, 今九州熊本城, 是也. 倭在會稽郡東, 東冶縣之東, 舟渡九千里, 至那覇, 而又渡一千里, 至根島, 根島亦曰量島. , 狗奴人與女王相爭, 索路甚嚴, 其欲往狗邪韓者, 蓋由津島, 加羅山, 志加島, 始得到末盧戶資之境, 其東界, 則乃狗邪韓國地也.

 

회계산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이 소장되어 있던 곳이다. 사공 우()가 석 달 동안 재계하고 이 책을 얻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우가 돌을 채취하여 부루태자의 은공을 새겨 산 높은 곳에 세웠다고 한다. (()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고, 산월·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갈라져 옮겨 살던 땅이다. 늘 왜와 더불어 왕래하고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진나라 때 서불(徐市)이 동야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고, 종도(다네시마)를 거쳐 뇌호내해(세도나이카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도착하였다. 이세에는 옛적에 서복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어떤 이는 단주를 서복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會稽山, 本神市中經所藏處. 而司空禹, 齋戒三月而得. 乃有功於治水故, 禹伐石, 刻扶婁功於山之高處云. 則吳越, 本九黎舊邑, 山越左越, 皆其遺裔分遷之地也. 常與倭往來貿販, 得利者漸多. 秦時, 徐市自東冶海上, 直至那覇, 經種島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 舊有徐福墓祠, 或曰亶洲, 徐福所居云.

 

아유타국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이라 하였으나 이제 모든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暹羅)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아유타인이 혹시 대식국의 침입을 받고 쫓겨나서 이곳에 이르러 살게 되었던 것일까?

이명의 진역유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바다로 아유타에 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싣고 돌아올 때, 그곳 사람도 백제 사람을 따라 왕래하여 날로 교류가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 풍속이 겁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남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阿踰佗, 三國遺事以爲西域云, 而今考諸古記則, 阿踰佗今暹羅云. 然則阿踰佗人, 或爲大寔所侵逐, 到此而居歟. 李茗留記云, 古有百濟商, 海往阿踰豹, 多得財寶而歸, 其人從我而來往, 日尤交密也. , 其俗, 懦不慣兵, 多爲人所制.

 

<참고자료>

 

계연수 편저,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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