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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8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본문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8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고려 태조 신성태왕(神聖太王), 16세 예종 문효대왕(文孝大王), 23세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 25세 충렬왕 경효대왕(景孝大王), 28세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 31세 공민왕 경효대왕(敬孝大王), 32세 강릉왕 우왕의 기사와 서희장군, 윤관의 여진정벌, 윤언이, 이존비, 이암, 정지상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태봉국(泰封國) 왕 궁예(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인으로 본래 보덕왕(報德王) 고안승의 먼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강(剛)이 술가의 말을 듣고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하여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유민을 모아 안승을 후고구려 왕으로 받들고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가 후에 고쳐서 보덕왕이라 하였다.
신문왕이 즉위하자 보덕왕을 불러들여 소판으로 삼았다. 그의 조카뻘인 대문이 금마저에 남아 반란을 꾀하고 왕이라 일컫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웅거하여 다시 모반하였으나 신라에게 평정을 당했다. 그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 주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泰封國王弓裔, 其先平壤人, 本報德王安勝之遠裔也. 其父剛, 從術家言, 從母姓爲弓氏. 先是,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奉安勝, 爲後高句麗王. 請援於新羅, 新羅王, 處之國西金馬渚, 後改爲報德王. 神文王立. 徵報德王, 爲蘇判, 其族子大文留金馬渚, 謀叛稱王, 被誅, 餘衆殺官吏, 據報德城, 又叛, 爲新羅所平, 徙其人於國南州郡.』
『대진국 명종 경황제 천복 9년(단기 3211, 878) 5월 5일에 궁예가 외가에서 출생했다. 이때 지붕 위에 흰 빛이 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쳐 있었다. 신라 일관(日官)이 이것을 바라보고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이 꺼려서 사람을 그 집에 보내 아기를 죽이려 하였다. 그 어미가 진귀한 보물을 주며 아기를 안고 도망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후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식을 길렀다. 궁예 나이 10여 세에 머리 깎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장성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대로 거리낌없이 행동하였고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담력이 있었다.
大震國明宗景皇帝, 天福九年五月五日, 弓裔生於外家, 其屋上, 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新羅日官望之, 以爲將不利於國家, 以聞, 王嫌之, 使人抵其家, 殺之.
其母賂珍寶, 請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祝髮爲僧, 號善宗, 及壯, 放逸如故,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일찍이 궁예(弓裔)가 바리때를 들고 재를 드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입에 물고 있던 상아 점대를 바리때 속에 떨어드렸다. 살펴보니 왕이란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앞서 고안승 때부터 임금을 모시는 일에 공로가 있었으나 신라는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땅과 백성을 모두 빼앗았다. 다만 왕의 누이동생으로 아내를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 유민이 이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원망이 쌓여 앙심을 품고 여러 차례 변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궁예는 국가가 쇠약하고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기회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종(祖宗)의 옛 땅을 회복하고 여러 대의 원한을 씻고자 죽주(竹州)의 도적 기훤(箕萱)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나 기훤은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예로써 대우해 주지 않았다.
궁예는 속이 답답하고 마음이 편치 못하여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 신훤 등과 몰래 결탁하여 친구로 삼아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고 일을 맡겼다. 군사 100기를 나누어주고 동쪽 지방의 주와 군을 치게 하니 모든 고을이 항복하였다.
궁예는 또 아슬나를 공격하였다. 무리가 600명에 이르자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군사와 고락을 함께하고 주는 일과 빼앗는 일을 사사로이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경외하였다.
嘗持鉢赴齋, 有烏啣牙籤, 落鉢中, 視之, 有王字, 秘不言, 頗自負. 先自安勝, 有勞王事, 而新羅不報, 反收其土地人民而盡奪, 只以王妹, 妻之而已. 高句麗遺民, 以故累世積怨, 怏怏起變而屢敗.
至弓裔, 見國家衰亂, 乘欲聚衆, 復祖宗之舊土, 洗積世之仇, 乃投竹州賊箕萱. 萱侮慢不禮. 弓裔鬱悒不自安, 潛結萱麾下元會·申烜等爲友,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之以事, 分兵百騎, 使東略州郡, 皆降之. 又, 攻阿瑟那, 衆至六百, 自稱將軍, 與士卒, 同甘苦, 予奪不以私, 衆心皆畏之.』
『천복 27년(단기 3229, 896)에 태수 왕륭(王隆)이 궁예에게 송악군을 바치고 귀순하여 이렇게 설득하였다.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 땅에서 왕 노릇을 하고자 하시면 먼저 송악을 차지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저의 장자 건(建)을 그곳의 주인으로 삼으소소.”
궁예가 이 말을 좇았다. 이때 이훤이 무진주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여 밝혔다.
“내가 삼국이 시작한 근원을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자 변한이 뒤따라 일어났다. 백제가 나라를 열어 6백 년을 전해 오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의자왕의 분을 풀어 드리겠노라.” 드디어 완산(完山)에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天福二十七年, 太守王隆, 以松岳郡, 歸弓裔, 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占松岳, 以吾長子建, 爲其主, 從之. 時, 李萱起兵武珍州, 乃聲言於衆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赫居世後興, 弁韓從之, 百濟開國, 傳世六百, 新羅與唐, 合攻滅之, 今, 予雖不德, 欲雪義慈之憤, 遂都完山, 稱王, 國號曰後百濟.』
『궁예 또한 이듬해(901)에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말했다.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는데 이것은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해 그 원수를 갚으리라.”
이에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일찍이 남으로 순행하여 흥주사에 이르러 신라 전왕의 화상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내리쳤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 버리려는 뜻을 품고 도읍을 멸하리라 부르짖으며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스스로 경문 20권을 지어 때로 정좌하여 강설하기도 하였다. 이에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설괴담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 된다”라고 하니 궁예가 노하여 철추로 때려 죽였다.
弓裔亦以明年稱王, 謂曰, 新羅請兵於唐, 滅高句麗, 是可恥也. 吾必爲高句麗報讐, 立國號曰後高句麗. 建元曰武泰. 嘗南行至興州寺, 見壁掛新羅前王畵像, 拔劒擊之. 弓裔意欲幷呑新羅, 呼爲滅都, 自新羅歸附者, 幷皆殺之. 自是, 弓裔自稱彌勒佛, 頭戴金幘, 又自述經二十卷, 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弓裔怒, 以鐵椎, 打殺之.』
1세 고려 태조 신성태왕(神聖太王), 918년 - 943년
『천수 원년(단기 3251, 918) 여름 6월에 왕건이 홍유 · 배현경 · 신숭겸 · 복지겸 등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날이 밝을 무렵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이때 달려와 따르는 자가 무리를 이루었다. 궁문에 이르니 먼저 와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만여 명이었다. 드디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이때 태봉 왕 궁예가 변란 소식을 듣고 미복으로 갈아입고 궁문을 빠져 나가 도망치다가 얼마 못가서 부양 백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天授元年戊寅夏六月, 王建爲洪儒·裵玄慶·申崇謙·卜智謙等, 諸將軍之所推戴, 黎明, 坐於積穀之上, 行君臣之禮, 令人馳且呼曰, 王公已擧義旗矣. 奔走來赴者
衆, 先至宮門, 鼓譟以待者亦萬餘人, 遂卽位於布政殿, 建元天授. 於是, 泰封王弓裔聞變, 以微服出門亡去, 尋爲斧壤民所害.』
태조의 훈요십조
『태조 신성태왕(神聖太王) 天授2년(단기 3252년, 919년)에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했다. 26년(단기 3276, 943)에 태왕께서 훈요를 지으셨는데 대략 이러하다.
“생각건대 우리 동방이 예로부터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을 따랐다. 그러나 방위가 다르고 풍토가 달라 사람 성품이 제각기 다르니 진실로 반드시 동화되어서는 안 되리라.”
太祖神聖太王天授二年, 定都于松岳之陽. 二十六年, 御製訓要, 其略曰, 惟我東方, 舊慕唐風, 文物禮樂, 悉遵其制, 殊方異土, 人性各異, 苟必不同.』
6세 성종(成宗) 문의대왕(文懿大王), 981년 – 997년
서희장군
『거란의 성종이 장수 소손녕을 보내어(성종 12, 단기 3326, 993년) 봉산(蓬山)을 함락시키고 우리 선봉을 물리쳤다. 성종(成宗) 문의대왕(文懿大王)이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할 때 어떤 사람은 항복하자 하고 어떤 사람은 땅을 떼어 주자고 하였다.
중군 서희(徐熙)가 홀로 아뢰었다.
“지금 적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을 떼어 넘겨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다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당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이옵니다.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가시어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싸우게 한 뒤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서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 진영에 들어가 상견의 예를 물었다.
소손녕이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마땅히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희가 “양국의 대신으로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라고 하니
손녕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다. 너희가 이를 침략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전쟁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당을 데어 바치고 조빙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희가 말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 땅이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 옛 땅을 돌려준다면 어찌 감히 수빙하지 않겠는가?”
말과 얼굴빛이 강개하므로 손녕이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병력을 거두기로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한 뒤에 서희를 전송하였다.
契丹聖宗, 遣將蕭遜寧, 侵破蓬山, 獲我先鋒. 成宗文懿大王, 會群臣議, 或言乞降, 或言割地與之. 中軍徐熙, 獨曰, 今見其勢大盛, 遽割西京以北, 與之, 非計也. 且三角山以北, 亦高句麗舊址也. 彼以谿壑之慾, 責之無厭, 可盡與乎. 況今割地, 則誠萬古之恥也. 願駕還都城, 使臣等, 一與之戰然後, 議之, 未晩也.
熙奉國書, 赴契丹營, 問相見之禮. 遜寧曰, 我大朝貴人宜拜於庭. 熙曰, 兩國大臣何得如是. 遜寧謂熙曰, 汝國興新羅地, 高句麗之地我所有也. 而汝侵蝕之. 又與我連壤, 而越海事宋故, 有今日之師, 若割地以獻而修朝聘, 可無事矣.
熙曰, 非也. 我國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則貴國之東京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若逐女眞, 還我舊地則敢不修聘, 辭氣慷慨. 遜寧知不可强, 遂決罷兵, 宴慰以送.』
16세 예종 문효대왕(文孝大王), 1105년 - 1122년
예종의 영토회복의지
『《고려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종 11년(단기 3449, 1116) 3월 을미 초하루에 임금께서 요나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당해 성중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시켜 쌀 1천석을 보내셨다. 그러나 내원성의 통군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살갈이 요나라의 내원과 포주 두 성을 쳐서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자 그곳 통군 야율녕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임금께서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보내어 야율녕을 불러 효유하게 하셨는데 야율녕이 임금의 전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교여가 급히 보고하자 임금께서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箚子)를 갖추어 보내려 하셨다. 재신과 간관이 아뢰기를, “저들이 임금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을 알기 어려우니 그만두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포주는 본래 우리 옛 땅인즉 돌려주기를 원하노라”라고 청하셨다. 금나라 임금이 아국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직접 빼앗으라.”라고 하였다.
高麗史曰, 睿宗十一年三月乙未朔, 上聞遼, 來遠·抱州二城, 爲女眞所攻, 城中食盡, 遣都兵馬錄事邵億, 送米一千石, 來遠統軍, 辭不受.
八月庚辰, 金將撤喝, 攻遼來遠抱州二城, 幾陷, 其統軍耶律寧, 欲帥衆而逃. 上遣樞密院知奏事韓噭如, 招諭, 寧以無王旨, 辭. 噭如馳奏, 上欲令樞密院, 具箚子送之, 宰臣諫官奏曰, 彼求王旨, 其意難測, 請止之. 上乃遣使如金, 請曰抱州本吾舊地, 願以見遼. 金主謂使者曰, 爾其自取之.』
윤관의 여진 정벌
『도원수 윤관(尹瓘)이 여진을 쳐서 무찌르고 선춘령(先春嶺)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임금에게 보내어 표(表)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그런데 평장사 최홍사 · 김경용과 참지정사 임의와 추밀원사 이위 등이 선정전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윤관, 오연총, 임언 등은 망령되이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 이재 등도 역시 계속 탄핵하였다.
“임금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기르고자 함인데 지금 성을 다투며 싸워 사람들 죽였으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함만 못하옵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생길 것입니다.”
임금이 물었다. “무엇 때문인가?”
김연이 아뢰었다.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을 때 거란에 고하는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다. 그 거주민 또한 우리 백성인데 근래에 도적들이 변방을 끊임없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다시 수복해서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문의 내용이 이러하나, 궁한리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이니 거란은 우리 주장을 망언이라 책망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만약 동쪽으로 여진을 방비하고, 북쪽으로 거란을 방비한다면 신은 9성이 우리 삼한(三韓)에 복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옵니다.”
都元帥尹瓘, 攻罷女眞, 立碑于先春嶺以爲界, 遣子彦頤奉表賀, 平章事崔弘嗣·金景庸, 參知政事任懿, 樞密院事李瑋等, 入對宣政殿, 極論尹瓘·吳延寵·林彦等, 妄興無名之兵, 敗軍害國, 罪不可赦. 諫官金緣·李載等, 亦相繼劾之曰, 人主之取土地. 本欲育民也. 今爭城而殺人, 莫如還其地而息民. 今不與必與契丹生釁.
上曰, 何也. 緣曰, 國家初築九城, 使告契丹, 表稱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亦我編氓. 近來寇邊不已故, 收復而築其城, 表辭如是, 而弓漢里酋長, 多受契丹官職者, 契丹以我爲妄言, 以加責讓, 我若東備女眞, 北備契丹, 臣恐九城, 非三韓之福也.』
『간의대부 김인존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유시하였다.
“두 원수가 여진을 친 것은 선제의 유지를 받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행한 것이니라. 몸소 적의 칼끝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진에 깊이 들어가서 베고 포로로 잡은 자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천 리 땅을 개척하고 9주에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씻었으니 그 공은 가히 크다 하리로다.
그러나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그 변덕이 심하다. 그 남은 무리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추장이 항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해 오니 신하들이 모두 편하게 여기고 짐 또한 차마 하지 못 하겠도다.
유사가 법을 따져서 자못 탄핵하는 말이 많으므로 급히 그들의 직책을 박탈하려 하나 짐은 끝까지 이를 허물로 삼지 아니할 것이다. 맹명시가 다시 황하를 건너 공을 세운 것과 같이 하기를 바라노라.”
諫議大夫金仁存, 亦請還舊地. 上宣諭曰, 兩元帥之伐女眞, 受先帝之遺志, 體朕躬之述事, 身冒鋒鏑, 深入賊壘, 斬馘俘虜, 不可勝計, 而闢千里之地, 築九州之城, 以雪國家之恥, 則其功可謂多矣. 然, 女眞人面獸心, 反復無常, 厥有餘醜, 無所依處故, 酋長納降請和, 群臣皆以爲便, 朕亦不忍, 有司守法, 頗有論劾, 遽奪其職, 朕終不以此, 爲咎, 庶幾有孟明之復濟也.』
『예종 문효대왕 4년(단기 3442년, 1109년)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 사현 등을 보내 조종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께서도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이르러 궁한촌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조에서는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호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에 태사가 저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주실 것을 청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재추, 어사대 판사와 중서문하성 성재, 지제고, 시신, 도병마판관과 문무 3품 이상을 소집하여 다시 9성을 돌려주는 것에 대하여 가부를 물으니 모두 돌려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옛 사서에 “두 장군이 선춘령(先春嶺)에 비를 세우고 ‘이곳이 고려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선춘령은 두만강에서 700 리 밖, 송화강 근처 땅에 있다.” 라고 하였다.
睿宗文孝大王四年秋, 撤九城, 還女眞舊地. 先是, 女眞使褭弗·史顯等, 入朝奏曰, 昔, 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 出自大邦, 至于子孫, 義當歸附可也. 今太師烏雅束, 亦以大邦, 爲父母之國, 至甲午年間, 弓漢村人, 自作不靖, 本非太師之指揮. 國朝鳴罪討之, 復許修好故, 我信之, 不絶朝貢, 去年大擧, 殺我耄倪, 築置九城, 使孑遺之民, 靡所止歸, 太師遣我, 來請還地云云. 又會宰樞·臺省·知製誥·侍臣·都兵馬判官, 及文武三品以上更議, 還九城可否, 皆曰可. 舊史云, 兩將軍, 立碑於先春嶺曰, 至此爲高麗之境, 先春嶺在豆滿江七百里外, 松花江近地云.』
윤언이
『광주목 윤언이(尹彦頤)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글을 올려서 이렇게 주장했다.
“중군이 아뢴 바를 보면 ‘언이가 정지상(鄭知常)과 결탁하여 사당(死黨)을 지어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하였다’하고, ‘임자(1132)년에 임금께서 서경으로 순행하셨을 때 아국이 독자적으로 건원칭제하기를 청하였다’하며, 또 ‘국학생을 넌지시 꾀어 앞의 일을 상주하게 하였는데, 대개 그 의도는 대국인 금나라를 격노시켜 일을 일으키고 틈을 타서 자의로 제거한 후 외인과 붕당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이는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글을 두세 번 거듭하여 일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신이 건원칭제(建元稱帝)를 청한 것은 임금을 받드는 충정에 근본을 둔 것이옵니다. 본조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고, 옛 기록을 상고해 보면 신라와 발해가 비록 연호를 만들어 썼으나 주변 대국이 일찍이 이를 문제 삼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나라는 감히 그 과실을 따져 의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지금의 성세에 이것이 도리어 참람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이 일찍이 이 문제를 의논한 바 있으니 죄라면 이것이 죄일 것입니다. 사당(死黨)을 지었다거나 대금(大金)을 격노시키려 했다는 말은 비록 엄청나나 본말이 서로 맞지 않사옵니다.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막아 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서 일을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그 붕당이라 지목한 자는 누구이며 제거하고자 한 자는 어떤 인물이옵니까?
무리가 만약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우더라도 곧 패하여 몸 둘 곳조차 없을 터인데 어찌 방자한 뜻을 품어 그런 일을 꾀하겠습니까?
임금님의 명철하심을 믿고 거듭 생각하건대 신은 지극히 나약한 자질로써 서경 정벌의 전역(戰役)에 종사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사옵니다. 이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서경 정벌의 성사는 모두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니 이제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족히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廣州牧使尹彦灑, 自解表云, 及睹中軍所奏曰, 彦灑與鄭知常, 結爲死黨, 大小之事, 實同商議, 在壬子年西幸時, 請立元稱號. 又諷誘國學生, 奏前件事, 蓋欲激大金, 生事乘間, 恣意處置, 朋黨外人, 謀爲不軌, 非人臣意. 臣讀過再三然後, 心乃安繄.
是立元之請, 本乎尊主之誠, 在我本朝, 有太祖光宗之故事, 稽其往牒, 雖新羅渤海, 以得爲之, 大國未嘗加兵, 小國無敢議其失, 奈何聖世, 反爲僭行. 臣嘗議之,
罪則然矣. 若夫結爲死黨, 激怒大金, 語言雖甚大焉, 本末不相坐, 何則, 假使强敵, 來侵我疆, 夫惟禦之未遑, 安得乘間而用事, 其指朋黨者誰氏, 其欲處置者何人.
衆若不和, 戰之則敗, 且容身之無地, 何恣意以爲謀, 有賴聖知, 重念, 臣以至弱之質, 從西征之役, 忘身以衛其國, 乃義分之當然, 成事皆因於人, 何勤勞之足道.』
조위총
『《금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세종 대정(大定) 15년(단기 3508, 1175) 9월에 고려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서언(徐彦)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 땅을 가지고 내부하려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金史曰, 世宗大定十五年九月, 高麗西京留守趙位寵, 遣徐彦等進表, 欲以慈悲嶺以西, 鴨綠江以東內附, 不許.』
23세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 1213년 – 1259년
문대(文大)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단기 3564, 1231)에 낭장으로서 서창현에 머물다가 몽골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몽골 군사가 철산성 아래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고을 사람들에게 ‘진짜 몽골군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그러나 문대가 소리 높여, “가짜 몽골군이니 항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몽골 사람이 문대를 참수하고자 하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다. 다시 전과 같이 하므로 드디어 죽였다.
몽골군이 성을 몹시 급하게 공격하니, 성중에 양식이 떨어져 더 지킬 수가 없었다. 곧 함락되려 하므로 판관 이희적이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모아 창고 속에 들어가게 한 후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文大, 高宗安孝大王十八年, 以郞將在瑞昌縣, 爲蒙古兵所虜, 蒙古兵至鐵山城下, 令文大, 呼喩州人曰, 眞蒙古兵來矣, 可速出降. 文大乃呼曰, 假蒙古兵也, 且勿降. 蒙古人欲斬之, 使更呼. 復如前遂斬之. 蒙古攻城甚急, 城中糧盡, 不克守, 將陷, 判官李希績, 聚城中婦女小兒, 納倉中, 火之, 率丁壯, 自刎而死.』
25세 충렬왕 경효대왕(景孝大王), 1274년 - 1298년 복위 1298년 - 1308년
『임금께서 연경에 계실 때 연녀에게 매혹되셨다. 이별할 때 연녀가 손수 연꽃 한 송이를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만약 이 꽃이 시든 것을 보시면 이 목숨이 장차 다할 것이옵니다.”
며칠 뒤에 꽃을 보니 초췌해지고 있었다. 임금은 연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으로 돌아가려 하셨다. 존비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자청하여 연녀를 찾아갔다. 연녀가 울며 시를 바치니 이러하였다.
연꽃 향기를 서로 주고받으니, 처음에는 붉은 빛 아리따웠네.
꽃을 드린 지 며칠 지나니, 시든 모습 님과 같사옵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시면 연녀를 더욱 그리워할 것을 우려하여 연녀 대신 시를 지어 올렸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추지 마오. 수레를 멈추지 마오.
이 몸은 연잎에 맺힌 이슬 같나니
저쪽 이쪽 둥글게 굴러다닌다오.
임금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환국하셨다.
上在燕京, 惑於蓮女, 臨別, 手贈蓮花一朶曰, 上歸路, 視此花若凋, 此命將盡. 數日後, 視花, 花欲憔悴. 上恐蓮女死, 復欲如燕. 尊庇請往探而回, 蓮女泣而獻詩曰,
相贈蓮花香, 初來綽約紅,
移叢問幾日, 憔悴與君同.
尊庇恐上見詩增懷, 代蓮女而製進曰,
這癡漢這癡漢, 勿留輦勿留輦,
此身便如蓮葉珠, 彼邊轉處此邊圓.
上見詩大怒, 遂還國.』
이존비(李尊庇)(1233~1287년)
『후암 이존비는 고려 경효왕 때 사람이다. 일찍이 서연(書筵)에서 자주와 부강의 정책을 논하고 또 이렇게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환단 · 조선 · 북부여 · 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사대의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군신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옵니까? 또한 왜와 더불어 원한을 쌓고 있으니 만약 원나라 왕실에 변고가 생긴다면 장차 무엇을 믿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황제라 칭하는 일을 이 시대에 꺼리고 기피하여 갑자기 회복하기는 진실로 곤란하나 자강의 계책은 강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상주한 것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들은 자마다 옳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뒤에 왜(倭)에 대비하는 다섯 가지 계책을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 백성을 병사로 만들 일,
둘째, 병 농 일치의 제도를 만들고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킬 일,
셋째, 군량을 저장하고 전함을 만들 일,
넷째, 수군을 확장하고 육조도 겸하여 익힐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알아 두고 인화(人和)를 확보할 일이라 하였다.
厚庵李尊庇, 高麗景孝王時人也. 嘗在書筵, 論自主富强之策. 仍奏曰, 本國自桓檀朝鮮·北夫餘·高句麗以來皆富强自主. 且建元稱帝之事, 至我太祖初, 亦嘗行之, 而今則事大之論, 定爲國是, 君臣上下, 甘受屈辱, 不圖所以自新, 其畏天保國則誠美矣. 奈天下後世之笑, 何, 且與倭搆怨, 萬一元室, 有變, 將焉所恃而爲國, 稱帝之事, 爲時忌諱, 則固難卒復, 而自强之策, 不可不講也.
奏雖寢, 聞者莫不韙之. 後, 又陳備倭五事, 一曰詳備戶口, 悉民爲兵, 二曰兵農一作, 水陸共守, 三曰積置兵糧, 修造戰艦, 四曰擴張水軍, 兼習陸操, 五曰詳悉地理, 確保人和.』
『뒤에 임금이 연녀에 대한 원망을 그치지 않으시므로 존비가 아뢰었다.
“신이 그때 모시고 돌아오기를 급히 서두르려고 부득이 거짓으로 시를 지어 올렸으니 바라옵건대 임금을 속인 죄에 벌을 내려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임금이 노하여 관직을 빼앗고 문의로 귀양을 보내셨다.
태자와 조정 대신들이 풀어주시기를 반복해서 주청하였다. 임금 역시 후회하여 다시 복직시켜 소환하셨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존비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 임금은 부음을 전해 듣고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셨다.
태자가 장례에 임하여 말하였다.
“이존비는 정직한 나라의 직신인데 어찌 이같이 요절한단 말인가?”
이에 임금께서 왕례(王禮)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셨다. 마침내 형강(荊江) 가에 있는 산 4 리를 둘러서 봉하니, 지금까지 동(洞)을 왕묘동(王墓洞)이라 부르고 마을를 산사리라 부른다.
後, 上恨蓮女不已. 尊庇乃奏曰, 臣於伊時, 急於奉還, 不得已權辭, 請伏欺罔之誅. 上怒, 削官謫文義. 太子及朝臣, 反復啓解之. 上亦悔悟, 復官召還, 使者未至, 尊庇卒. 訃聞, 上震悼輟朝. 太子臨喪曰, 李尊庇正直, 邦家司直, 何夭如是乎. 仍命葬用王禮, 遂以荊江之上, 環其山四里封之, 至今洞曰王墓, 里曰山四.』
28세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 1330년 - 1332년 복위 1339년 - 1344년)
이암(1297~1364년)
『일찍이 시중 행촌 이암이 상소하여 권신 무리가 국호를 폐하고 행성을 세우고자 하는 의논을 저지하였다. 그 상소문은 대략 이러하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섞이게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뿌리가 같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정신과 육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신시개천과 삼한관경이 천하 만세에 대국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천수 태조께서는 창업의 자질을 갖추시고 고구려의 건국이념인 다물 정신을 계승하여 세상을 평정하시어 국가의 명성을 크게 떨치셨습니다. 간혹 이웃에 강적이 생겨 승세를 타고 횡포를 부려서 유주(幽州)와 영주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와 부강의 계책을 꾀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오잠과 류청신 같은 간악한 무리가 감히 멋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어찌 고려라는 국호를 폐할 수 있으며 임금의 힘이 비록 약하나 위호를 어찌 낮출 수 있겠사옵니까?
이제 이러한 거론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가 죄를 감추고 도망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나라 사람들의 공언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옵니다.
杏村李侍中嵒, 嘗疏沮權臣輩, 欲廢國號而請立行省之議, 其疏略曰, 天下之人, 各以其國爲國, 各以其俗爲俗, 國界不可破也. 民俗亦不可混也. 況我國, 自桓檀以來, 皆稱天帝之子, 行祭天之事, 自與分封諸侯, 元不相同. 今雖一時爲人轅下, 旣有魂精血肉, 而得一源之祖. 是乃神市開天, 三韓管境之爲大名邦於天下萬世者也. 我天授太祖, 以創業之資, 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平定宇內, 國聲大振也. 間有强隣, 乘以作暴, 幽營以東, 尙未歸我, 則此君臣, 日夜奮振, 謀所以自主富强之策. 敢有潛淸輩之大姦慝, 逞能陰謀, 我國雖小, 國號不可廢 也. 主勢雖弱, 位號何其降也. 今此之擧, 皆奸小之輩之出於逋逃, 而非國人之公言也. 宜請都堂, 嚴治其罪.』
『행촌 시중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를 지어 시원 국가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훈》을 지어 환·단 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과 심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 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문정공 목은 이색이 서문을 붙였다.
“무릇 입을 거리와 먹을거리를 넉넉하게 하고 재물을 풍족하게 하며, 씨 뿌리고 모종하고 싹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분야별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묶어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이 비추는 것처럼 명료하게 기록하였다. 진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좋은 책이 되리라.” 杏村侍中, 有著書三種, 其著檀君世紀, 以明原始國家之體統, 又著太白眞訓, 紹述桓檀相傳之道學心法, 農桑輯要, 乃經世實務之學也. 文靖公李牧隱穡, 序之曰, 凡衣食之所由足, 貲財之所由豊, 種蒔孼息之所由周備者, 莫不分門類聚, 縷析燭照, 實理生之良書也.』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서 유람을 하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 소전이라 하는 한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모두 환·단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의 진결이었다.
세속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고사에 박식한 행촌의 학문은 그 뛰어남이 칭찬 받을 만하였다. 그 참전의 계율을 닦는 법도는 삼신으로부터 받은 성품을 응결시켜 지혜를 이루고, 삼신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응결시켜 덕을 이루며, 삼신으로부터 받은 정기를 응결시켜 힘을 이루는 것이다.
우주에 삼신이 영원히 존재하시고 인물에 삼진이 불멸하는 것은 마땅히 하늘아래 영원한 대정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생성과 변화가 무궁하기 때문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도가 하늘에 있으면 삼신이 되고, 도가 사람에게 있으면 삼진이 된다. 그 근본을 말하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오직 하나인 것이 도요, 둘이 아닌 것이 법이다.
위대하도다. 환웅천황이시여! 뭇 사람 중에 먼저 나와 천도의 근원을 체득하시고 대광명의 가르침을 세우시니, 신시개천의 의미가 비로소 세상에 크게 밝아졌도다.
지금 우리는 글을 통해 도를 구하고 전(佺)에 참여하여 계(戒)를 받아 우리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나 아직도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온갖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나니 늙어감이 한스럽도다!”
선생은 시중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 흥행촌에 들어가 스스로 호를 흥행촌수라 하고 마침내 행촌 삼서를 저술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다.
杏村先生嘗遊於天寶山, 夜宿太素庵, 有一居士曰素佺, 多藏奇古之書, 乃與李茗·范樟, 同得神書, 皆古桓檀傳授之眞訣也. 其通脫博古之學, 卓然有所可稱, 而其參佺修戒之法, 蓋凝性作慧, 凝命作德, 凝精作力, 其在宇宙而三神長存, 其在人物而三眞不滅者, 當與天下萬世之大精神, 混然同其體而生化無窮也.
先生曰, 道在天也, 是爲三神. 道在人也, 是爲三眞. 言其本則爲一而已. 惟一之爲道, 不二之爲法也. 大哉! 桓雄, 首出庶物, 得道天源, 立敎太白, 神市開天之義, 始大明於世矣. 今吾輩因文求道, 參佺受戒, 尊吾敎而未發, 又聞百途而難會, 老將及矣, 可恨哉! 先生以侍中致仕, 退居江都之紅杏村, 自號爲紅杏村叟, 遂著杏村三書藏于家.』
『헌효왕 복위 5년(단기 3677, 1344년) 3월에 행촌 이암이 어명을 받아 참성단에서 천제를 드릴 때 백문보(白文寶)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덕으로 신을 수호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있고, 영재를 길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 공이 서원을 세우는 데 있느니라.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 역시 신에게 의지하여야 백성과 국가가 길이 편안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 드리는 정성은 결국 근본에 보은하는 정신으로 돌아감이니 인긴 세상에서 찾음에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獻孝王後五年三月, 杏村李嵒, 以命祭天于塹城壇, 謂白文寶曰, 賴德護神, 一存信念, 養英衛國, 功在發願. 乃神依人, 人亦依神, 而民而國, 永得安康, 祭天之誠, 竟歸報本, 其求人世, 敢可忽諸.』
31세 공민왕 경효대왕(敬孝大王), 1351년 – 1374년
경효왕(공민왕) 5년(천수 기원 439년, 단기 3689, 1356년)
여름 4월 정유(丁酉)에 대사도 기철(奇轍), 태감 권겸(權謙), 경양부원군 노책(盧頙)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으로 임명하고, 정동행성이문소를 철폐하였다.
이때에 원나라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져 오(吳)왕 장사성이 강소(江蘇)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일이 많았다.
최영(崔瑩) 등이 고우에서 돌아오자, 임금이 비로소 최영 등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서북 땅을 회복할 계책을 정하셨다. 먼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계속해서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를 보내시어 압록강 서쪽 8참(站)을 깨뜨렸다. 또 류인우, 공천보,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시어 쌍성(雙城) 등 옛 땅을 되찾게 하셨다.
경효왕 10년(단기 3694, 1361년)
겨울 10월에 홍두적(紅頭賊) 반성(潘誠), 사류(沙劉), 주원장(朱元璋) 등 무리 십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범하였다.
11월에 도적이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李蔭), 조천주(趙天柱)가 전투에서 죽었다.
12월에 임금이 복주에 이르러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으셨다.
『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임금이 파천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소임으로 여기므로 임금이 또한 믿고 의지하셨다.
세운은 애통하게 여기는 조서를 속히 내려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신을 모든 도에 보내어 징병을 독려하시도록 임금에게 여러 번 청원하였다.
임금께서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이 세운에게 전하여 말하였다.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에게 기울이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듯을 장수에게 기울이는 법이다. 나는 문신이라 나약하여 능히 군사를 부리지 못하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세운이 도당에 나아가 분연히 소리 높여 류숙에게 군사를 징집하면서 기한이 늦은 일을 책망하였다.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이암이 세운에게 말했다.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의 치욕이로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고 부월을 들고 출정하니, 사직이 다시 편안해지고 왕업이 중흥함이 이번 한 판 싸움에 달려 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는 밤낮으로 공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로다.”
권면하고 깨우쳐 전송한 뒤에 매일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독려하고 묘략을 내어 전해주었다. 안우(安祐), 이순(李珣), 한방신(韓方信) 등 어려 장수가 모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世雲性忠淸, 自播遷以來, 日夜憂憤, 以掃盪紅賊, 恢復京城, 爲己任, 上亦倚信. 世雲屢請, 亟下哀痛之詔, 以慰民心, 遣使諸道, 以督徵兵. 上遂下詔, 守門下侍中李嵒, 傳曰, 天下安, 注意相, 天下亂, 注意將. 余文臣, 懦不能軍, 子其勉之. 世雲詣都堂, 憤言揚聲, 謂柳淑以簽軍後期, 爲責, 將行, 嵒謂世雲曰, 今强寇猝至, 皇城失守, 乘輿播遷, 爲天下之笑, 三韓之恥, 而公首唱大義, 仗鉞行師, 社稷之再安, 王業之中興, 在此一擧. 吾君臣, 日夜望公之凱旋也. 獎諭遣之, 每日督勵諸將倡義, 出謀授計, 安祐·李珣改名希泌李嵒從侄·韓方信等諸將, 皆從之有功.』
경효왕 12년(단기 3696, 1363년)
『3월에 밀직사 이강이 어명을 받들고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렸다. 이어서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는데 시는 이러하다.
봄바람 속에 만물 정취 짙어 가는데
왕명 받들고 떠나온 길 멀기도 하여라.
이른 새벽 말을 달려 구중궁궐 떠났는데
노 젓는 저녁 무렵, 흰 갈매기는 파도 위를 날아오르네.
하늘 복판에 솟은 산은 푸른 빛깔 뽐내고
골짜기엔 봄기운 완연해 풀이 절로 꽃을 피우네.
묻노니 신선 사는 봉래산 그 어드메뇨.
사람들은 이곳이 바로 선가(仙家)라 하네.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로워 체골조차 신선이 되려 하네.
멀리 인간사 생각해 보니 참으로 아득하구나.
자리 깔고 약소한 제물이나마 올리는 것은 홍건적 물리친 뒤이지만
돌로 쌓은 영기 서린 제단은 태곳적 것이라네.
눈앞에 천리 강산 훤히 보이고
이내 몸 구중 하늘에 오른 것 같아라.
이번 길에 서로 의탁할 짝은 없지만
적을 물리치고 환도한 첫 해를 기억이나 하자꾸나.
敬孝王十二年癸卯三月, 密直使李岡, 以命祭塹城壇. 仍刻板題詩. 其詩曰,
春風景物富年華, 承命來遊道里賖,
鞭馹朝辭丹鳳闕, 棹舟暮趁白鷗波,
半空蒼翠山浮色, 滿壑氛氳草自花,
借問蓬萊何處是, 人言此地卽仙家,
心靜身閒骨欲仙, 遙思人事正茫然,
薦蘋秘席中興後, 累石靈壇太古前,
已得眼看千里地, 況疑身在九重天,
此行無耦如相托, 須値還都第一年.』
경효왕 20년(단기 3704, 1371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 천호(千戶) 이두란(李豆蘭) 첩목아가 백호 보개를 보내어 백 호를 거느리고 투항해왔다.
윤3월 기미에 북원(北元)의 요양성 평장사 유익, 왕우승 등이 요양은 본래 고구려 땅이라 하여 우리나라에 귀순하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화를 청했다. 이때 조정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국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임금이 정몽주를 명나라에 보내시어 촉(蜀)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게 하셨다.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하자 조야가 시끄러워 이 일에 대해 말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회신을 하지 않자, 유익 등이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성(海城), 용양(遼陽) 등의 땅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붙었다.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들던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편안함을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
二十年辛亥二月甲戌, 女眞千戶李豆蘭帖木兒, 遣百戶甫介, 以一百戶來投. 閏三月己未, 北元遼陽省平章事劉益·王右丞等, 以遼陽本高麗地, 欲歸附我國, 遣人來請. 時, 廷議不一, 國事多難. 然, 上遣鄭夢周, 如明, 賀平蜀, 金義殺明使蔡斌, 朝野騷然, 其欲言事者, 幾希, 以故, 未卽回報, 劉益等遂以金州·復州·蓋平·海城·遼陽等地, 歸附于明. 嗚呼, 當時淸論, 徒因循是務, 自失好機, 竟不恢收舊疆, 志士之恨, 於斯爲深矣.』
정지상(鄭之祥)
『정지상은 하동 사람이다. 누이동생으로 인해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대궐에 들어가 수종 들며 공로가 있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곧바로 뽑혀서 감찰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가 되어 경내에 들어가,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매질하고 문초하여 모든 군에 알리니 온 도 사람의 마음이 섬뜩하였다.
야사불화란 자는 본국 사람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 형 서신계는 육재가 되었고, 아우 응려는 상호군이 되어 세력을 믿고 위세가 당당하게 복을 누리던 터라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불화가 강향사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존무사와 안렴사가 많은 치욕을 당하고 욕을 먹었지만 감히 거슬러서 어길 수 없었다.
전주에 이르자 지상이 기다렸다가 공손하게 맞이하였으나 불화는 심히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 홍원철이 지상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여 불화에게 “지상이 천자의 사신을 업신여긴다.”라고 하자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였다.
지상이 분노하여 크게 소리 지르고 주의 관리를 속여 이렇게 말했다.
“국가에서는 이미 기씨(奇氏)를 모두 주멸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런 정도의 사자를 제압하기는 쉽거늘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나를 구하지 않느냐? 장차 너희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게 되리라.”
이에 읍리가 소리를 치며 달려 들어와 결박을 풀고 부축하여 나갔다. 지상이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불화 원철 등을 잡아 가두고, 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를 빼앗아 가지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올 때, 공주를 지나다가 응려를 잡아 철추로 때리자 며칠 만에 죽었다. 지상이 와서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임금이 깜짝 놀라 순군부에 내려 하옥시키시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시여 전주목사 최영기와 읍리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또 차포온을 보내시어 어주를 하사하여 불화를 위로하게 하시고 금패를 돌려주셨다.
원나라에서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어 지상을 국문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기씨를 모두 죽이고 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으셨다. 이후 다시 옮겨 호부시랑, 어사중승이 되었고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엄격하여 모든 육사죄에는 반드시 지상을 파견하였다.
지상의 아내는 홀로 담양에 거주하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아들 종(從)은 박위(朴葳)를 다라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다.
鄭之祥河東人也. 因其妹, 往來于元, 値敬孝王入侍, 隨從有勞, 及王卽位, 驟選至監察持平, 不諎事理. 嘗爲全羅道按廉使, 入境, 遇勢家所使, 輒搒掠徇示諸郡, 一道寒心.
埜思不花本國人也. 在元, 有寵於順帝. 其兄徐臣桂爲六宰, 弟應呂爲上護軍, 依勢作威福, 國人畏之. 不花降香至本國, 所至縱暴, 存撫按廉, 多被辱罵, 莫不違忤. 至全州, 之祥迎候恭謹, 不花待遇甚倨, 伴接使洪元哲, 有求於之祥, 之祥不聽. 元哲激怒不花曰, 之祥慢天使, 不花縶縛之. 之祥忿恚大叫, 紿州吏曰, 國家已誅諸奇, 不復事元, 命宰相金敬直, 爲元帥, 守鴨綠江. 此使易制耳, 若等何畏而不我救, 將見爾州, 降爲小縣也. 邑吏呼譟而入, 解縛扶出. 之祥遂率衆, 執不花元哲等, 囚之奪不花所佩之金牌, 馳還京, 過公州, 執應呂以鐵椎撾之, 數日而死. 之祥來白于王, 王驚愕, 下巡軍, 命行省員外鄭暉, 捕全州牧使崔英起, 及邑吏等, 又遣車蒲溫, 齎內醞慰不花, 還其牌.
元遣斷事官買住, 來鞠之祥. 王誅諸奇, 釋之祥, 爲巡軍提控, 再轉戶部侍郞·御史中丞, 官至判事, 卒, 性嚴, 凡戮死罪, 必遣之. 之祥妻, 寡居潭陽, 爲倭所害, 子從隨朴葳, 擊對馬島.』
32세 강릉왕(우왕) 1374년 – 1388년
강릉왕(우왕) 원년(단기 3707년, 1374년)
『강릉왕이 선제의 명으로 즉위(단기 3707, 1374년)하셨다. 이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써 붙이고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開元)에 속하던 땅이니 거기서 관할하던 군인, 한인(漢人), 여진(女眞), 달달(達達), 고려(高麗)는 여전히 요동에 속한다.”운운하였다.
조정의 중론이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싸울 것을 결정하고, 나라 안의 병마를 크게 일으키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셨다.
江陵王以先帝命卽位. 時, 遼東都司, 遣承差李思敬等, 到鴨綠江, 張榜曰,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元, 所管軍人 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云云. 朝議紛紛不一, 竟以督戰決定, 大發中外兵馬, 以崔瑩爲八道都統使.』
강릉왕 우(禑) 5년(단기 3712, 1379)
『3월 신미에 사자를 보내어 첨성단에서 천제 드릴 것을 명하셨다. 대제학(大提學) 권근(權近)이 서고문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초헌(初獻):
바다 가운데에 산이 높으니 인간 세상의 번뇌와 시끄러움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제단 중앙은 하늘에 닿을 듯하니 신선의 수레를 타고 강림하시는 삼신님을 맞이하옵니다. 조촐한 음식을 올리오니 밝으신 삼신께서 계시는 듯하옵니다.
이헌(二獻):
삼신께서 미혹됨이 없이 들어 주시나니 이 사람을 감싸 안고 베풀어 주십니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덮으시고 인간 세상을 굽어보십니다. 예를 극진히 하여 섬기나니 삼신께서 감응하시어 성신이 통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
곰곰이 헤아려 보건대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옵니다. 성조 이래로 백성을 위해 법도를 세우고, 옛 법통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드리우셨습니다. 고종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해 도읍을 옮기고 또한 이곳에 의지하여 국본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국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소자가 이를 계승하여 더욱 공경하옵나이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구(外寇)가 개같이 좀도둑질하여 우리 백성을 어란(魚爛)의 지경에 이르게 하시옵니까? 비록 변방이 침략을 받았으나 오히려 표문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그 고을이 침략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시옵니까? 어찌 밝은 위엄의 징험이 없으시겠습니까만 실로 저의 부덕한 소치이니 진실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오직 자책할 뿐이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그 하는 일을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면 삼신께서도 장차 돌아가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옛 법을 좇아 감히 지금의 환란을 고하오니 조촐한 저의 정성이지만 기꺼이 받으시고 밝게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지 않게 하시어 배를 타고 멀리서도 몰려들게 하소서. 하늘이시여! 천명을 내려 주시어 사직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江陵王, 禑五年三月辛未, 命遣使致祭于塹城壇, 大提學權近, 製誓告文以進, 其文曰, 初獻, 海上山高, 逈隔人寰之煩擾. 壇中天近, 可邀仙馭之降臨. 薄奠斯陳, 明神如在. 二獻, 神聽不惑, 庇貺斯人. 天覆無私, 照臨下土. 事之以禮, 感而遂通. 竊念, 摩利山, 檀君攸祀. 自聖祖爲民立極, 俾纘舊而垂休, 曁後王, 避狄遷都, 亦賴玆而保本. 故, 我家守之不墜, 而朕小子承之益虔. 天何外寇之狗偸, 而以致我民之魚爛, 雖遠疆之受侮, 尙許表聞, 況厥邑之被侵, 胡然忍視, 其明威之不驗, 寔否德之無良. 實難求他, 惟在自責. 然, 人若不安其業, 則神將無所於歸, 玆因舊典之遵, 敢告當時之患, 卑忱款款, 寶鑑明明, 致令海不揚波, 丕亨梯航之幅湊, 天其申命, 光膺社稷之安磐.』
고려의 서북국경은 요하이고, 동북국경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는 것을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입증하였다.
2017년 5월 23일자 〈“중국 철령까지 우리땅”…일제왜곡 극복, 고려국경 찾았다〉는 뉴시스 기사이다.
『“중국 철령까지 우리땅”…일제왜곡 극복, 고려국경 찾았다
등록 2017.05.23 10:46:23수정 2017.05.23 10:46:24
【서울=뉴시스】한국 역사학계는 고려의 국경을 <왼쪽>처럼 인식하고 있다. <오른쪽>은 일본의 의도적 왜곡을 거둬내고 ‘고려사’, ‘요사’ 등 사서에 기반해 고증한 고려의 국경선이다.
인하대 고조선硏 "고려 천리장성, 中랴오허 유역에 위치“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중국 랴오닝성 톄링(鐵嶺)시 일대까지가 고려(918~1392)의 땅이었다. 윤관(?~1111)이 설치한 동북 9성의 현 위치는 지린성 옌볜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음모 탓에 우리나라 영토는 축소됐고, 결국 반도가 되고 말았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입증한 새로운 사실들이다.
구체적으로, ‘고려사-지리지’는 ‘고려는 서북으로 당 이래 압록을 경계로 했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대개 서북으로는 고구려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동북으로는 그것을 넘어섰다’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고려의 서북 국경은 압록강에서 시작해 동으로 함경도 원산만이라는 것이 정설인양 굳어졌다. 조선 초 성리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대·모화주의 학자들 일부와 훗날 조선총독부 주관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가 야합하면서 기정사실화했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일제가 이렇게 왜곡한 한국사가 바탕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과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했다는 설의 근거이기도 하다.
‘고려사-지리지’의 압록(鴨淥)을 일제는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획정, 압록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만 고려의 땅이라고 봤다. 하지만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맞댄 요나라의 역사책 ‘요사’와 대조하면 압록은 압록강이 아니라 랴오허(遼河)의 지류다.
복기대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는 “국회와 교육부의 지원을 받은 한국 고대사의 쟁점 사항에 관한 연구, 특히 한국의 기본 틀이 되고 있는 1945년 이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번역하고 원문대조 정밀해제하면서 파악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으로 추정되는 천리장성, 동북지역 국경으로 윤관이 축성한 9성의 위치도 찾았다. 복 교수는 “고려 국경선이 현재 인식하는 국경선으로 비정되다 보니 이와 연동된 발해, 조선의 국경선 문제도 자연히 왜곡된 고려 국경선을 기준으로 정해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윤한택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압록강(鴨淥江)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을 관통해 흐르는 랴오허, 압록강(鴨綠江)은 북한과 중국 국경선인 압록강”이라고 못 박았다.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압록강이 둘 있었다.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淥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이다. 압록강(鴨淥江)은 보주(保州),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가 거점도시였다. 보주는 의주방어사가 관할했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은 고려 전체시기를 통해 변함없이 압록강(鴨淥江)이었다.”
건국 초 고려는 유소(?~1038)에게 천리장성 축조 책임을 맡겼다. 변방 방어체계인 천리장성의 탄생이다. 압록강 하구~원산만에 있었으려니 한다. 그러나, 이 선상에서는 천리장성으로 볼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담은 일부 남아있지만 성이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윤 교수는 압록강(鴨淥江)으로 추정되는 현 랴오허 유역에 천리장성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1084년 시점 압록강(鴨淥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부, 1주, 2성, 70보, 8영에 합계 정병 2만2000명이었다’는 고려의 기록이다. 남쪽은 요나라의 동경성에서 시작해 서북으로 황룡부에 이른다. 이 지명들을 보면 요나라의 동경성은 현 랴오닝성 랴오량(遼陽)시, 황룡부는 지린성 중북부다. 즉, 천리장성은 현 압록강변이 아니라 랴오허 유역에 있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 사료를 읽지 않은 중국 고고학계는 고려 천리장성을 고구려의 장성으로 오판했다. 윤 교수는 “기본 사서를 근거로 해 고려 국경사를 연구하면 기존의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으로 비정돼 온 강동 6주, 북경장성(천리장성), 서경 등은 현 랴오허 유역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짚었다.
한편 윤관의 동북9성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직 정설이 없다. 막연히 함경도 남부에 위치했으리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함흥평야 일대’설은 일제 관학자들이 주장했다.
이인철 교수(경복대학교 기획처장)는 “우리나라와 만주를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조작한 식민사관 중 반도사관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판단했다. 진실은 조선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담겨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협정에서 명나라는 공험진(公嶮鎭) 이남부터는 조선의 관할이므로 해당 지역을 조선으로 귀속하는 데 동의했다. 공험진이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선이 된 것이다.
이 교수는 “동북9성 위치를 비정하는 주요 지명인 공험진과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다. 오늘날 지린성 옌볜 자치주 북단 어디로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 초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들도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700 리에 위치했다고 서술했다”고 제시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김세연 의원(바른정당)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26일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여는 ‘일본에 의해 왜곡된 고려 국경선의 실체는? -조선사 해제사업 결과를 중심으로’ 학술회의에서 공개된다. 윤한택 교수, 이인철 교수와 더불어 윤은숙 교수(강원대 사학)가 ‘13~14세기 고려의 요동인식–요·심 지역을 중심으로’, 남의현 교수(강원대 사학과)가 ‘명대 한·중 국경선은 어디였는가’, 박시현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송나라의 고려 국경선 인식’을 발표한다.
연구를 총괄한 복기대 교수는 “중국이나 일본도 반박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새롭게 비정된 압록강의 위치나 고려의 천리장성 위치는 그동안 한국역사학계의 고려사 인식체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출처; 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0522_0014911619&cID=10701&pID=10700)
그런데 압록강이 둘 있었다는 사실은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현재 요하는 서압록이다.
『고우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유(환기 7078,신시개천 3778, 단기2214, bce120)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하셨는데~』《북부여기상》
『가을 8월에 한나라 도적과 여려 번 서압록하 강가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셨다.』《북부여기하》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고구려국본기》
『개화 27년(단기 3001,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대진국본기》
『이 달 16일에 서압록하 상류에서 삼신일체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셨다. 서압록은 옛 고리국의 땅이다.』《대진국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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