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6-8)

1.5.7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1세 세조 진국열황제(668~699), 연호는 중광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개화 27(단기 3001, 668) 9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000명이었다. 함께 동쪽으로 돌아가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을 중광(重光)이라 하셨다.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았다.

오로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다가 중광 32(단기 3032, 699)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는 세조요 시호는 진국열황제이시다.

 

『《신당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붙어 있던 나라인데 건국자의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이란 인물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을 확보하고 오루하를 의지하였다.

중상이 죽자 아들 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다가 곧 비우의 무리를 합하고 땅이 거칠고 멀리 떨어진 것을 믿고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하였다. 부여·옥저·변한·해북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사씨는 말한다. 걸걸중상이 패망한 후 남은 무리를 모아 험한 곳으로 피신하여 스스로 보전한 것은 옛날에 태왕이 빈()을 떠난 것과 같다. 고왕(高王) 조영(祚榮)이 창업의 자질이 있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닦으신 것은 구천이 월나라를 일으킨 것과 같다. 영토가 확보되자 문덕으로써 이를 닦고 제도를 고치고 관작을 정비하시고 군현을 두어 큰 나라에 대항하셨다. 나라의 영역이 5천 리에 이르고 역사가 300년에 이르러 당시에 사방에 대진을 능가할 나라가 없었으니 역시 강성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新唐書曰, 渤海本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 乞乞仲象者與靺鞨酋長乞四比羽及高麗餘衆, 東走渡遼水, 保太白山東北, 阻奧婁河, 仲象死, 子祚榮, 引殘痍, 遁去. 卽幷比羽之衆, 恃荒遠, 乃建國, 自號震國王, 盡得夫餘·沃沮·弁韓·海北諸國.

史氏曰, 乞乞仲象以敗亡之餘, 走險自保, 同太王之去邠. 高王祚榮以創業之資, 剪棘開基, 類句踐之興越. 蓋幅巾員旣建, 乃以文德修之, 改制度, 建官爵, 列郡縣, 抗手大國, 方域至五千里, 國祚, 至三百年. 當時四方, 殆無逾之者亦云盛矣.

 

대진국 건국

2세 태조 성무고황제(699~ 719), 연호는 천통(天統)

 

태자 조영이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 계성에서 무리를 이끌고 와 제위에 오르셨다(신시개천 4596, 단기 3032, 699).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시고 10만 명의 군병을 모아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치셨다. 이에 정책을 정하고 제도를 세워 당을 적으로 삼고 항거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셨다.

말갈 장수 걸사비우,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군대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파하셨다.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군현을 두어 지키게 하시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불러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정착하게 하시니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나라의 모든 기상이 새로워졌다.

이에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시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셨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시고 6천 리 땅을 개척하셨다.

 

太子祚榮, 從訃使, 自營州葪城, 率衆至卽帝位, 築忽汗城, 遷都, 募軍十萬, 威聲大振. 乃定策立制, 抗唐爲敵, 復讐自誓, 與靺鞨將乞四比羽, 契丹將李盡榮, 握手聯兵, 大破唐將李楷固於天門嶺. 分諸將, 置守郡縣, 招撫流亡, 周護定着, 大得民望, 萬綱維新, 國號定爲大震, 年號曰天統, 據有高句麗舊疆, 拓地六千里.

 

3세 광종 무황제(719~ 737), 연호는 인안(仁安)

 

천통 21(신시개천 4616, 단기 3052, 719) 봄에 대안전에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태조요 시호는 성무고황제이시다.

태자 무예가 즉위(719)하여 연호를 인안으로 고치셨다. 서쪽으로 거란과 더불어 국경을 오주목으로 정하시니 그곳에서 동쪽 10 리에 황수(潢水)가 흐른다.

이 해(732)에 개마(蓋馬구다(句茶흑수(黑水)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라 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당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래(登萊)(산동성의 등주와 래주)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에 당나라 임금 이융기(6세 현종의 이름)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싸움에 이기지 못하였다.

 

天統二十一年(3052, AD719), 崩于大安殿. 廟號曰太祖, 諡號曰聖武高皇帝. 太子武藝立, 改元曰仁安, 西與契丹, 定界烏珠牧東十里, 臨潢水. 是歲(3065, AD732), 蓋馬·句茶·黑水諸國, 皆稱臣納貢. 又遣大將張文休, 殺刺史韋俊, 取登萊, 爲城邑. 唐主隆基, 怒遣兵來, 討不利.

 

 

·당 연합군의 침략 격퇴

 

다음 해(733) 수비 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遼西) 대산 남쪽에서 당 군사를 대파하였다. 이에 당은 신라와 밀약을 맺고 동남방의 여러 군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郡)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조서를 내리시고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어 이를 격파할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 군사 중에 얼어 죽는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경계를 정했는데 지금 강릉 북쪽 이천이 그곳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를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 옹진이다. 이때부터 신라가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임진강 이북 여러 성이 모두 우리 대진에 속하게 되었다.

또 다음 해(단기 3067, 734)에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왔으나 마침내 아무 공도 없이 물러갔다.

 

明年(3066, AD733), 守將淵忠麟與靺鞨, 大破唐奴於遼西帶山之陽. 唐密與新羅約, 急襲東南諸郡, 至泉井郡, 帝詔遣步騎二萬, 擊破之, , 大雪, 羅唐軍凍死者甚多. 於是, 追至河西泥河爲界. 今江陵北泥川, 是也. 海州岩淵縣, 東界新羅, 岩淵今瓮津, 是也. 自此, 新羅歲時入貢, 臨津江以北諸城 盡歸我. 又明年(3067, AD734), 唐與新羅, 聯兵來侵, 竟無功而退.

 

인안 16(단기 3067, 734)에 구다 개마 흑수 등 여러 나라가 나라를 바쳐 항복하므로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듬해(단기 3068, 735)에 송막¹12성을 쌓고 또 요서에 6성을 쌓으시어 드디어 5() 60() 1() 38()을 두셨다. 강역이 9천리나 되었으니 천하가 가히 강성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해에 당과 왜, 신라가 모두 산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가 모두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심지어 발해사람 셋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때 임금과 백성이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고 의로움을 즐겼다. 오곡이 픙등하고 온 세상이 평안하여 대진육덕의노래를 지어 당시의 모습을 찬미하였다.

이듬해(단기 3069, 736)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렸다. 예관이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원하므로 그 말을 따르셨다.

이 달 16일에 서압록하 상류에서 삼신이체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셨다. 서압록은 옛 고리국의 땅이다.

 

仁安十六年(3067, AD734), 句茶·蓋馬·黑水諸國, 以其國來降, 取爲城邑. 明年(3068, AD735), 築松漠十二城, 又築遼西六城, 遂有五京, 六十州, 一郡, 三十八縣, 圓幅九千餘里, 可云盛矣. 是歲, 唐倭及新羅, 幷遣使入貢. 天下稱爲海東盛國. 至有渤海三人當一虎之語. , 君民和樂, 論史樂義, 五穀豊登, 四海晏然, 有大震六德之歌, 以美之.

翌年三月(3069, AD736), 安民縣, 甘露降. 禮官啓請賀儀, 從之. 是月十六日, 祭三神一體上帝于西鴨綠河之上, 西鴨綠, 騎離古國地也.

 

4세 세종 광성문황제(737~ 793), 연호는 대흥(大興)

 

인안 19(신시개천 4634, 단기 3070, 737)에 임금께서 붕어하셨다. 묘호는 광종이고 시호는 무황제이시다.

태자 흠무가 즉위(신시개천 4634, 737)하였다. 연호를 대흥이라 고치고 도읍을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기셨다. 이듬해(738) 태학을 세워 천부경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환단의 옛 역사를 강론하시고, 또 학자들에게 국사125권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다.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위는 여러 주변 족속을 복종시켰다. 이에 동방 대광명의 현묘한 도가 백성들에게 흠뻑 젖어들고 홍익인간의 교화가 만방에 미쳤다.

 

十九年(3070, AD737), 帝崩. 廟號曰光宗. 諡號曰武皇帝. 太子欽武立. 改元曰大興. 自東京龍原府, 移都于上京龍泉府, 明年(AD738)立太學, 敎以天經神誥, 講以桓檀古史, 又命文士, 修國史一百二十五卷. 文治興禮樂, 武威服諸夷, 太白玄妙之道, 洽於百姓, 弘益人間之化, 賴及萬方.

 

치청절도사 이정기

 

대흥 45(781)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군사를 일으켜 당 군대에 항거하니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셨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으로 평로에서 태어났다.

대흥 22(단기 3091, 758)에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을 쫓아내고 정기를 세웠다. 이정기가 죽자(781) 아들 납()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렸다.

대흥 56(단기 3125, 792)에 납이 죽자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사고가 죽자 그 집 사람들이 발상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 땅에서 사도를 맞아들여 받들었다(806).

 

大興四十五年(3114, AD781), 淄靑節度使李正己, 擧兵拒唐軍, 帝遣將助戰. 李正己高句麗人也. 生於平盧. 二十二年(3091, AD758), 師衆逐軍帥李希逸, 立正己, (3114, AD781), 子納統父衆(3114, AD781), 五十六年(3125, AD792), 納卒. 子師古, 代其位(3125, AD792), 及卒(3139, AD806), 其家人不發喪, 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3139, AD806)

 

5세 대원의(大元義)

대흥 57(793) 임금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세종이요 시호는 광성문황제이시다. 나라 사람들이 그 친족아우 원의를 옹립하였으나 원의는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6세 인종 성황제(793~ 794), 연호는 중흥(中興)

 

794년 원의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흥을 맞이하여 옹립하였다. 연호를 고쳐 중흥이라 하였다. 이듬해(795) 붕어하시니 묘호는 인종이요 시호는 성황제이시다.

 

7세 목종 강황제(794~ 809), 연호는 정력(正曆)

 

임금의 숙부인 숭린이 즉위하니 이분이 목종 강황제이시다.

 

8세 의종 정황제 원유(809~ 812), 연호는 영덕(永德)

 

9세 강종 희황제 언의(812~ 817), 연호는 주작(朱雀)

 

10세 철종 간황제 명충(817~ 818), 연호는 태시(太始)

 

11세 성종 선황제 인수(818~ 830), 연호는 건흥(建興)

 

이분은 타고난 천품이 영명하시고 덕성과 기질이 신령스럽고 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시어 태조의 풍모가 있었다.

선황제께서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 일곱 주를 설치하고, 북쪽으로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과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여러 부를 설치하셨다.

장백(백두산)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 남쪽을 안원이라 하였다. 목단 동쪽을 철리(鐵利)라 하고, 흑수 위를 회원이라 하고, 난하 동쪽을 장령, 장령 동쪽을 동평이라 하였다. 우루는 북대개마 남북에 자리 잡고 있었다.

땅 넓이는 9천리로 영토가 크게 개척되고 문치를 잘 베풀어서, 위로 수도에서 아래로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가 있고 구서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외워 익혔다. 봄가을로 관리의 공적을 조사하고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어진 인재를 천거하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힘을 차차 쌓아 기르면서 집에서 인재로 쓰이기를 기다렸다.

이로부터 나라가 부강해지고 안팎이 편안하고 기쁨이 넘쳐 도둑질하거나 간사하게 모의하는 폐단이 저절로 사라졌다. 당과 왜, 신라, 거란이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 만방에서 모두 성인이 다스리는 해동성국이라 칭송하였다.

 

聖宗宣皇帝仁秀, 天資英明, 德氣如神, 才兼文武, 乃有太祖之風.

南定新羅, 置泥勿·鐵圓·沙弗·岩淵等七州, 北略鹽海·羅珊·曷思·藻那·錫赫, 及南北虞婁, 置諸部. 長白之東曰安邊, 鴨江之南曰安遠, 牧丹之東曰鐵利, 黑水之上曰懷遠, 灤河之東曰長嶺, 長嶺之東曰東平, 虞婁在北大蓋馬嶺之南北, 地廣九千里, 境宇大開, 文治熙洽, 上自國都, 下至州縣, 皆有學, 九誓五戒, 朝夕誦習, 春秋考績, 衆議薦貢, 人旣畜力, 家盡待用. 自是, 國勢富强, 內外安悅, 自無盜竊姦謀之端. 唐倭新羅及契丹, 莫不畏服, 天下萬邦, 皆以聖人興治之海東盛國, 欽頌之.

 

 

 

출처; 신시 배달국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민족의 영산(성산) 백두산 (tistory.com)

 

 

12세 장종 화황제 이진(831~ 857), 연호는 함화(咸和)

 

13세 순종 안황제 건황(857~ 871), 연호는 대정(大定)

 

14세 명종 경황제 현석(872~ 894?), 연호는 천복(天福)

 

15세 애제 인선(906? ~ 926), 연호는 청태(淸泰)

 

대진국의 멸망

 

5대의 흥망 시기(907~960)에 야율이 비록 여러 번 싸움을 걸어 왔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 애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당하였다.(926)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更五代, 耶律雖頻数()加兵, 終不能服也. , 經莊宗和皇帝彛震, 順宗安皇帝虔晃, 明宗景皇帝玄錫, 至哀帝諲譔, 爲契丹所滅, 自世祖, 傳十五世, 共二百五十九年.

 

대진국 애제 청태 26(단기 3259, 926) 봄 정월에 야율배가 아우 야율요골과 함께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애제가 나가 항복하시니 나라가 망하였다.

2월 병오에 요 태조가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 배()를 인황왕(人皇王)으로 봉하여 왕노릇하게 하였다. 연호를 감로하 하였다.

홀한성을 고쳐 천복이라 하고 천자의 관과 옷을 표준으로 삼아서 열두 줄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다. 대진국의 옛 제도를 이어받아 숙부 질랄을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늙은 재상을 우대상으로 삼고, 대진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형수를 제외한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 단과 말 천 필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조하였다.

감로 27(952) 겨울 12월 경진에 요나라가 동경 중대성을 폐지하자 동단국이 없어졌다.

 

大震國哀帝淸泰二十六年春正月, 耶律倍與弟堯骨, 爲前鋒, 夜圍忽汗城, 哀帝出降, 國亡. 二月丙午, 遼太祖建東丹國, 以長子倍, 爲人皇王, 王之, 建元甘露, 改忽汗城爲天福, 準用天子冠服, 被十二旒冕, 皆畵龍象, 仍用大震國舊制, 以叔迭剌爲左大相, 大震老相失名, 爲右大相, 大震司徒大素賢爲左次相, 耶律羽之爲右次相, 赦國內殊死以下, 約歲貢, 布十萬端, 馬千匹.

甘露二十七年冬十二月庚辰, 遼罷東京中臺省, 東丹國除.

 

대진국의 남경남해부는 본래 옛 남옥저 땅인데 지금 해성현(海城縣)이다. 서경압록부는 본래 옛 고리국 땅이고 지금 임황(臨潢)이다. 지금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서 말한 안민현은 동쪽에 있고, 그 서쪽은 임황현인데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임황부가 되었다. 바로 옛날의 서안평이다.

 

大震國南京南海府, 本南沃沮古國, 今海城縣, 是也. 西京鴨綠府, 本稁離古國, 今臨潢. 今西遼河, 卽古之西鴨綠河也. , 舊志, 安民縣在東, 而其西臨潢縣, 臨潢, 後爲遼上京臨潢府也. 乃古之西安平, 是也.

 

의려국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의려국 왕이 선비 모용외에게 패한 뒤 핍박당할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때 문득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리오?’ 라는 생각이 들어, 은밀히 아들 부라(의라)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²을 넘어 밤에 해구³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의 부명에 응한 것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하례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족에게 패하자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이 북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다. 이 뒤 모용외가 또다시 침략하여 아국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正州依慮國所都, 爲鮮卑慕容廆所敗, 憂迫欲自裁, 忽念, 我魂尙未滅, 則何往不成乎. 密囑于子扶羅, 踰白狼山, 夜渡海口, 從者數千, 遂渡, 定倭人爲王, 自以爲應三神符命, 使群臣獻賀儀. 或云, 依慮王爲鮮卑所敗, 逃入海而不還, 子弟走保北沃沮. 明年, 子依羅立. 自後慕容廆又復侵掠國人, 依羅率衆數千, 越海, 遂定倭人爲王.

 

 

일본

 

일본에는 옛적에 이국이 있었는데 이세라고도 불렀고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었는데 바로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고 그 남동쪽은 안라(安羅)에 속하였다. 안라는 본래 홀본(忽本)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阿蘇山)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했는데 거기에 시라군이 있었다.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다.

 

日本舊有伊國, 亦曰伊勢, 與倭同隣, 伊都國在筑紫, 亦卽日向國也. 自是以東屬於倭, 其南東屬於安羅, 安羅本忽本人也. 北有阿蘇山. 安羅後入任那, 與高句麗, 早已定親. 末盧國之南曰大隅國, 有始羅郡, 本南沃沮人所聚.

 

남만, 침미, 환하, 비자발 족속들이 모두 조공을 바쳤다. 남만은 구려의 후예로 산월에서 온 자들이고, 비자발은 변진·비사벌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읍락이고, 환하는 고구려에 예속된 자들이다.

이때 왜인은 산과 섬에 흩어져 살았는데 나라가 100여개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컸는데, 본래 구야의 본국 사람이 다스리던 곳이다. 바다에서 장사하는 배는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하였는데, (), (), (), ()의 무리들이 모두 통상하였다.

처음에 바다 건너 천 여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백리쯤 된다. 또 바다 건너 천 여리를 가면 일기국에 닿는데 사방이 3백 리쯤 되고 본래 사이기국이다. 자다의 여러 섬이 모두 조공을 바쳤다.

또 바다를 건너 천 여리를 더 가면 말로국에 이르는데 본래 읍루인이 모여 살던 곳이다. 동남쪽으로 육지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에 이르는데 곧 반여언의 옛 고을이다.

 

屠南蠻·泡彌·晥夏·比自火本之屬, 皆貢焉. 南蠻九黎遺種, 自山越來者也. 比自火本, 弁辰比斯伐人之聚落也. 晥夏, 高句麗屬奴也. , 倭人分據山島, 各有百有餘國. 其中, 狗邪韓國最大. 本狗邪本國人所治也.

海商船舶, 皆會於種島而交易, 吳魏蠻越之屬, 皆通焉. 始渡一海千餘里, 至對馬國, 方可四百餘里. 又渡一海千餘里, 至一歧國, 方可三百里, 本斯爾歧國也. 子多諸島皆貢焉. 又渡一海千餘里, 至末盧國, 本挹婁人所聚也. 東南陸行五百里, 至伊都國, 乃盤余彦古邑也.

 

대연림장군의 흥료국 건설

 

고려 현종 원문대왕 20(단기 3362, 1029)에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大延琳)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으로, 부마인 유수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가두고, 호부사 한소훈 등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국호를 흥료(興遼)라 하고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 고길덕을 고려에 파견하여 나라세운 일을 알리고 아울러 도움을 청하였다.

 

高麗顯宗元文大王二十年, 契丹東京將軍大延琳, 太祖高皇帝七世孫也. 囚留守附馬蕭孝元南陽公主, 殺戶部使韓紹勳等, 卽位曰興遼, 改元天慶, 遣高吉德, 來告建國, 兼求援.

 

고영창장군의 요동 50여주 장악

 

요동유수 소보선이 정치를 가혹하게 하자 고려 예종 문효대왕 11(단기 3449, 1116) 정월 초하루에, 동경 비장인 발해사람 고영창(高永昌)이 수십 명과 함께 술김에 용맹을 믿고 칼을 들고 담을 뛰어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대청에 올라가 유수(留守)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오니 대비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보선이 나오자 무리가 그를 죽였다.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청신이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서쪽 문으로 나가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창이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하고, 연호를 융기라 하고 요동 50여 주를 차지했다.

 

遼東留守蕭保先, 爲政酷虐, 高麗睿宗文孝大王十一年正月朔, 東京裨將渤海人高永昌與數十人, 乘酒恃勇, 持刀踰墻垣, 入府衛登廳, 問留守所在, 紿云, 外兵變, 請爲備, 保先出, 衆殺之. 假留守大公鼎, 副留守高淸臣, 戰不能勝, 奪西門, 出奔遼. 永昌自稱大渤海國皇帝, 改元隆基, 據遼東五十餘州.

 

발해 유민 압록강 일대에 정안국 건설

 

『《송사(宋史)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후예로서 요()에게 패하자 그 우두머리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해 스스로 나라 이름을 정안국(定安國)이라 하였다.”

개보 3(970)에 그 왕 열만화가 조공 바치러 온 여진을 통해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왕 오현명이 다시 여진을 통해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곳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종은 답서에서 대략 경이 마한 땅을 차지하고 큰 파도에 끼어 있다는 글을 올리니운운했다. 단공과 순화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글을 올리더니 그 뒤에는 올리지 아니하였다.

 

宋史曰, 定安國本馬韓之種, 爲遼所敗, 其酋帥, 糾合餘衆, 保其西鄙, 建國改元, 自號定安國. 開寶三年, 其王烈萬華, 因入貢女眞, 附表貢獻, 太宗時, 其王烏玄明, 復因女眞, 上表, 其略曰, 臣本以高麗舊壤, 渤海遺黎, 保此方隅, 太宗答勅略曰, 卿奄有馬韓之地, 介于鯨波之表云云. 端拱淳化間, 復因女眞, 奉表, 其後不至.

 

 

<주>

 

1. 송막; 지금의 하북성 위장현과 내몽고 자치구의 경붕현 즉 극십극등기 지방. 당나라 때 이곳에 송막도독부를 설치했다.

 

2. 대릉하 상류 부근인 요령성 객좌현에 있는 백록산이다.

 

3. 대릉하 하구

 

<참고자료>

 

계연수 편저,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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