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여러나라시대 문화유산 (2) '둔황' 최대벽화 오대산圖 등서 古代 한국 관련 그림 다수 확인 본문

2013년 7월 5~6일 경주시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둔황 석굴군(群) 중 40개에서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확인됐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한 리신(李新) 중국 둔황연구원 연구원은 둔황 지역의 한국 관련 자료에 정통한 중국인 학자이다.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은 종류와 수량도 많고 보존 상태도 좋습니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둔황학(學)의 범위를 넓히는 새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북사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92년 둔황연구원에 들어간 리 연구원이 둔황 석굴들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5년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경변도(經變圖) 연구를 시작하면서였다.
경변도에 그려진 각국 국왕과 사신의 복장을 살펴보던 그는 새 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는 외국인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흥미를 느꼈다. 조우관이 고대 한국인이 쓰던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한국어를 2년 동안 배운 뒤 본격적으로 이 주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리신 연구원은 막고굴(492개)과 인접한 유림굴(42개)·서천불동(17개) 등 500개가 넘는 둔황 석굴을 하나씩 조사했다.
그리고 막고굴 38개, 유림굴과 서천불동 각 1개 등 총 40개의 석굴에서 고대 한국인 인물상을 확인했다. 그는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에 들어있는 4점의 그림에 대해서는 2011년 논문을 발표했고, 나머지 가운데 일부를 이번에 공개했다.
막고굴 제138굴에서 확인된 고구려인
국제 학술회의에서는 리 연구원의 발표에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어떤 학자는 그가 조우관으로 분류한 그림 중 일부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학자는 그가 당·송 시대 둔황 일대에 적지 않은 고구려·백제 유민이 살고 있었다며 그 증거로 둔황 문서에 기록된 '고구려·백제 계통 성씨(姓氏)'를 제시한 데 대해 이견을 보였다.
리 연구원은 "인물상의 국적은 관모(冠帽)만 아니라 복식·외모 등을 종합해서 판단한 것이며, 둔황 문서의 기록은 분명하다"며 "앞으로 다른 고대 한국인 인물화도 논문으로 내용을 정리·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확인한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화 전체가 공개되기를 한국 학계가 기대하는 데 대해 리신 연구원은 "내가 답변할 성격이 아니다"며 말을 아꼈다. 이와 관련, 경상북도 관계자는 "경상북도와 간쑤성(甘肅省)이 우호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화를 DB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1)
동양 고대 문화의 보고(寶庫)인 중국 둔황 석굴에서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고대 한국인의 복식과 의관(衣冠), 생활상을 보여주는 인물상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깃털 네 개 조우관 쓴 고구려인, 말을 탄 신라 사신, 사신 따르는 고려 짐꾼… 둔황 석굴에서 확인된 고대 한국인 인물상. 왼쪽은 막고굴 제138굴의‘유마힐경변’에 들어 있는 고구려인으로 깃털을 네 개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썼다. 가운데는 막고굴 제61굴의‘오대산도’의 부분 그림인‘신라송공사’에서 말을 탄 사신이다. 오른쪽은 역시‘오대산도’의 일부인‘고려왕사’에서 사신을 따르는 짐꾼이다.
둔황연구원 리신(李新) 연구원은 5일 경주시 우양미술관에서 경상북도 주최,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주관으로 열린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막고굴·유림굴·서(西)천불동 등 둔황 석굴군(群)의 석굴 중 40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리 연구원은 "주로 불경(佛經)을 소재로 한 둔황 석굴 벽화에는 인접 각국의 왕과 사신, 불교 신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관모(冠帽)와 복식·외모 등으로 판단할 때 '열반경' 벽화 7개, '유마힐경' 벽화 29개, '범망경' 벽화 3개에서 고대 한국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둔황 석굴군에서도 가장 큰 벽화인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 안에서 확인된 '신라왕탑(新羅王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 '고려왕사(高麗王使)' '보리지암(菩提之庵)' 등 고대 한국과 관련 있는 그림 4점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둔황 석굴에서는 그동안 고대 한반도의 특징적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인물상과 장구를 치는 모습 등 고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간헐적으로 발견됐지만 전체적인 실태가 밝혀지기는 처음이다.(2)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1000년의 시간을 넘어… 中 둔황 석굴에서 만난 고구려·신라·고려인들, 2013.07.06.
['둔황' 최대벽화 오대산圖 등서 古代 한국 관련 그림 다수 확인]
古代 한국인 모습 왜 둔황에? -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 둔황으로 대거 이주 돼… 석굴 만들고 불교 활동 참여"
古代 한국 문화史 연구에 도움 - 당나라~송나라 시기의 그림, 한국 인물상 공백 메울 자료
둔황 막고굴 제237굴에서 확인된 백제인.
둔황 석굴군(群)에서 확인된 고대 한국인 인물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막고굴 제61굴의 주실(主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초대형 벽화인 '오대산도(五臺山圖)'에 들어있는 한국 관련 4점이다.
높이 3.5m, 길이 13.5m의 '오대산도'는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유명한 불교 성지 오대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중국 오대(五代)시대(907~960) 말기에 제작됐으며 둔황 벽화 중에서 가장 크고 세밀한 작품으로 꼽힌다.
'오대산도'에는 신라와 고려가 중국에 보낸 사절단이 함께 등장한다. 이는 밑그림이 만들어진 것이 신라(기원전 57~935)와 고려(918~1392)가 공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 사신)'라는 화제(畵題)의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관원, 마부 등 5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옷깃이 둥근 단령(團領)을 입고 있다.
그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둥근 옷깃의 짧은 상의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장포를 입었다. 신라 사절단과 고려 사절단은 관복은 다르지만 같은 양식의 흰색 긴 바지를 입고 있다.
'오대산도'의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는 '신라왕탑(新羅王塔)'은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오대산에서 수행한 승려'가 세운 탑이다. 리신 연구원은 탑의 주인공을, 신라 귀족으로 당나라에서 7년간 공부하며 오대산을 찾았던 자장(慈藏·590~658) 스님으로 추정했다.
'보리지암(菩提之庵)' 그림은 만년에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공부한 혜초(慧超·704~787) 스님의 거처였던 보리사 터에 다시 지은 암자를 그린 것이다.
다른 둔황 석굴에서도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많이 확인됐다. 고구려인은 조우관(鳥羽冠)에 깃털을 보통 두 개 꽂았지만 세 개 또는 네 개를 꽂은 경우도 있었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 목도리와 허리띠를 하는 일이 잦았다. 백제인은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날씨가 안 추워서 옷깃이 밖으로 접힌 번령(�領)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에 들어 있는 ‘신라송공사’의 전체 모습. 중앙에 신라에서 온 사신 행렬이 보이고 오른쪽에 두 명의 중국 관원이 이들을 맞고 있다.
둔황 석굴의 벽화에 고대 한국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로 리신 연구원은 불교 전파와 고구려·백제 유민(遺民)의 둔황 이주를 들었다. 둔황 벽화는 인접국들이 불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많이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구려·백제·신라인도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둔황 지역으로 적지 않은 유민이 이주됐고, 이들이 석굴 조성과 불교 신앙 활동에 참여하면서 석굴 벽화에도 표현됐다는 것이다.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확인된 둔황 석굴들의 조성 시기는 당나라 초기(618년)부터 송나라 초기(1035년)까지 걸쳐 있다. 국내에는 이 시기의 인물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국제 학술회의에서 리신 연구원의 발표를 들은 임영애 경주대 교수(중앙아시아학회 회장)는 "그동안 한국 학자들의 접근이 자유롭지 않았던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 관련 자료가 많이 공개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며 "하지만 조우관으로 분류된 일부 그림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등 학문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도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3)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 주최로 2015년 2월 2~6일 시안에서 돈황까지 중국 불교석굴을 순례했다. 옛날에는 꼬박 석 달이 걸렸다는 실크로드 2000㎞를 버스와 야간열차를 타고 따라갔다. 돈황의 석굴과 사막에는 목숨을 걸고서 법(法)을 구하려 했던 옛 수행자들의 간절함이 오롯이 녹아 있었다.
중국 시안(西安)과 란저우(蘭州)를 거쳐 12시간 동안 야간열차를 타고 4일 돈황에 도착했다. 새벽이라 아직 캄캄했다. 동행한 동국대 황순일(불교학부) 교수는 “돈황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돈황 역사(驛舍)도 새로 지었고, 시내의 거리도 엄청나게 넓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는 중국 불교의 힘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수년 전만 해도 돈황까지 오는 열차가 없었다고 한다. 근처 유연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130㎞를 더 들어가야 할 만큼 돈황은 오지였다.
돈황은 중국땅의 서쪽 끝이다. 돈황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타클라마칸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란 뜻이다. 실크로드의 상인들과 구법승들은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란저우, 돈황을 거쳐 사막을 건넌 뒤 멀리 인도와 로마까지 갔다. 그건 동·서양 문명을 잇는 거대한 징검다리였다. 불교 문명 역시 이 비단길을 따라 동서를 오갔다.
버스는 시내에서 20㎞ 떨어진 돈황의 막고굴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뺨을 때렸다. 현지인 가이드는 “여름에는 섭씨 44도, 겨울에는 영하 24도까지 떨어진다”고 했다. 막고굴 입구로 들어서자 사막의 모래와 자갈이 뭉쳐서 만든 높다란 절벽이 나타났다. 그곳에 492개의 동굴이 있었다. 1600년 전부터 하나씩 생겨난 거대한 석굴 사원이다. 동굴마다 문이 잠겨져 있었고, 막고굴 안내인이 열쇠를 들고 다니며 안내했다.
4세기 북위 시대에 만든 동굴에 들어섰다. 캄캄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마술처럼 벽화가 드러났다. 사방의 벽에도, 천장에도, 바닥에도 연꽃 무늬와 부처상, 비천상 등이 즐비했다. 정면에는 붉은색과 녹색으로 채색된 불상이 앉아 있었다. 동굴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미술관이었다. 북위 시대부터 수·당·송·원·명·청나라까지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성된 동굴들이 사막의 절벽에 펼쳐져 있었다.
동굴마다 고유 번호도 있었다. 335번 굴에 들어섰다. 당나라 때 조성했다는 벽화에는 머리에 깃을 꽂은 인물이 둘 그려져 있었다. 현지인 가이드는 “저 두 사람은 고구려 왕자들이다. 복장도 고구려 양식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동굴에는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똑 닮은 벽화가 있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인물, 그 역시 고구려인이라고 했다.
중국 최초의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가 막고굴에 조성한 대불(大佛)인 북대상(北大像·96호굴)은 놀랍게도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여성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문무왕 박사는 “측천무후가 33m 높이의 여성적인 불상을 세워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과 구법승들에게 돈황은 삶과 죽음의 땅이었다. 서쪽으로 가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야 했고, 서쪽에서 오는 이들은 “이제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이 돈황이었다. 동행한 원택 스님은 “당시 구법승들이 남긴 기록에는 사막을 건너다가 사람의 해골이 보이면 ‘내가 가는 길이 맞구나’ 하고 오히려 이정표로 삼았다고 한다. 현장 법사도 이 길을 따라 인도로 가 불교 경전을 가져왔다. 목숨을 걸고 법을 구하던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겠는가”라고 말했다.
17호굴에도 들어갔다. 『육조단경 돈황본』 등 5만여 권의 불교 경전과 유서가 발견돼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곳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신라 승려 혜초의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도 1900년에 이 동굴에서 나왔다.
막고굴에서 나와 월아천으로 갔다. 사막과 오아시스가 펼쳐졌다. 모래바람이 불었다. 끝없는 모래 언덕, 바람이 불면 모래가 운다 하여 붙은 이름이 명사산(鳴砂山)이다. 그 울음을 뚫고서 구법승들은 인도를 향해 발을 뗐다. 저 모래 어딘가 그들이 밟았던 발자국이 있으리라. 그곳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4)
중앙일보, 돈황=글·사진 백성호 기자, 삶과 죽음 경계에서 만났다, 1600년 전 구도자들 염원, 2015.02.10
<자료출처>
(1) "고대 한국인像 찾기 위해 500개 넘는 둔황 석굴 10여년 간 일일이 조사" (chosun.com)2013.07.08.
(2) 1000년의 시간을 넘어… 中 둔황 석굴에서 만난 고구려·신라·고려인들 (chosun.com)2013.07.06.
(3) [오늘의 세상] 백제인도 조우관(鳥羽冠) 써… 신라·고려인들은 같은 스타일 흰 바지 (chosun.com)2013.07.06.
(4) 삶과 죽음 경계에서 만났다, 1600년 전 구도자들 염원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15.02.10
'여러나라시대 > 여러나라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여러나라시대 문화유산 (1) 일본 왕실이 꼭꼭 숨긴 ‘쇼소인’ 백제·신라 보물 (8) | 2025.02.28 |
---|---|
3. 여러나라시대 고고학 (7) 함평 진양리 화동고분군 (28) | 2025.02.27 |
3. 여러나라시대 고고학 (6) 함평 금산리 방대형고분 (10) | 2025.02.27 |
3. 여러나라시대 고고학 (5) 함평 마산리 표산고분군 (18) | 2025.02.25 |
3. 여러나라시대 고고학 (4)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10) | 2025.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