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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0)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년)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0)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년)

대야발 2025. 3. 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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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은 일제강점기 『안중근전』, 『한국통사』, 『대동민족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1859년(철종 10)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했다. 젊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해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가로 변신했다.

 

국권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주장했고, 황성신문 등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는 데 주력했다. 한국인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통사』를 저술했고,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수습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통사』 등을 저술한 유학자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 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박용호(朴用浩)의 아들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政法上)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지게 되었다.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85년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혔다. 그 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 박은식의 성리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해 서북지방에서는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 유근(柳瑾) ·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한 후에는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는 『겸곡문고(謙谷文稿)』 『학규신론(學規新論)』를 저술하였다.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 T., 裵說)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제를 비판하였다.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정간시켰다.

 

 

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이 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주로 객원으로서 논설만 기고하였다.

 

 

1906년 이후의 박은식의 애국계몽운동은 광범위한 부문에서 정력적으로 전개되었다. 박은식은 이 시기부터는 완전히 변법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위정척사사상과 유림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국권 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계몽하였다.

 

 

1906년 3월 창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자신이 앞장서서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였다.

 

 

기관지인 『서우(西友)』의 주필을 맡아서 국민을 계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낸 후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낸 『서우(西友)』를 모두 직접 편집하고 지도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동휘(李東輝) · 이회영(李會榮)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 1908년 1월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되었다. 박은식은 실질적으로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로 적극 활동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이종호(李鍾浩)를 교장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종호가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기지의 창설을 목적으로 국외로 망명하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서북학회 담당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支校) 설립을 추진해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사이에 63개 지교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항해 장지연 · 이범규(李範圭) · 원영의(元泳儀)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였다.

 

 

박은식은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해 유교를 개혁해서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서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 유교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저술된 것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이다.

 

 

1905∼1910년 사이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해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실로 많은 논설을 썼다. 이로써 국권 회복의 실력 배양을 위한 신교육 구국사상 · 실업 구국사상 · 사회관습 개혁사상 · 애국사상 · 대동사상 등을 설파해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함으로써 한말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박은식의 애국계몽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애국계몽운동을 의병운동과 연계지을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박은식은 이것을 일제의 검열 하에서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고 표현했는데, 무장운동(의병운동)과 연계해 함께 나란히 전진한다는 의미이다. 박은식의 이러한 사상과 활동은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에 활동한 사상가들 중에서 전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최고의 애국계몽사상사로 후학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신문(皇城新聞)』 ·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를 비롯한 모든 신문과 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였다. 박은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되어 발행과 독서가 금지되었다.

 

 

박은식은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한국 민족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한국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하였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박은식은 마침내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해서 만주의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동지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독실한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윤세복의 영향으로 대종교 신도가 되었다.

 

 

당시 저술한 책들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이다.

 

 

1912년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중국어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康有爲] · 량치차오[梁啓超] · 탕사오이[唐紹儀] · 징메이주[景梅九] 등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혁명동지회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향강』을 통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에서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에 간행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일제 침략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로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함으로써 ①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② 대내적으로 국민들에게 ‘통(痛)’을 가르쳐 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며, ③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요 ‘국혼’은 남아 있으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도록 교육하고, ④ 자손만대에 일제에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의 교훈을 새기고 반성을 촉구하려고 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간행 직후 중국 · 연해주 · 미주의 한국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고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해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 1925년에 朝鮮史編修會로 개칭)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조선반도사』를 준비하다가 계획을 수정해 『조선사(朝鮮史)』 37책을 편찬하여 식민주의사관에 의한 한국 역사의 왜곡을 시도하였다.

 

 

편찬 동기를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와 같은 독립을 추구하는 역사서의 해독을 소멸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박은식은 상하이에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의 위탁을 받아 중국 신문인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다가, 이 신문이 얼마 뒤 정간되어 사임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상설(李相卨) · 신규식 · 유동열 등 동지들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團)]을 조직해 그 취지서를 쓰고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다시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18년 연해주 한국인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곧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를 강연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였다.

 

 

박은식은 1919년 3 · 1운동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가 6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해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강우규(姜宇奎)를 국내에 파견해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에 대한 폭탄투척의거를 일으켰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9월의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였다. 이때에도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뒤에서 지원하였다.

 

 

동시에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무장투쟁까지의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 · 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해 한국근대사 체계에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역작이었다.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3 · 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의 민족독립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본 제국주의가 반드시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 · 1운동을 전환점으로 한국 민족의 불굴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가 극도로 약화되고 독립운동계 전체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간행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에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 박은식은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수락하였다.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결단을 내려 수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을 혼란시켜 온 위임통치청원과 기타 실정의 책임을 물어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켜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뒤이어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튿날인 3월 24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박은식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다.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신헌법에 의거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하였다. 이상룡이 선출되자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박은식이 대통령을 사임하고 은퇴했을 때에는 인후염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박은식은 임종이 가까워오자 동포들에게 독립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간곡한 유촉을 남기고, 장엄한 애국적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앞에서 언급한 이외에 『대동민족사(大東民族史)』 · 『단조(檀祖)』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박은식이 우리나라 근대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1915년에 간행한 학술서. 역사서.

 

 

한문본. 1915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출판하였다.

1915년 상해에서 간행된 초판본은 현재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46년 삼호각(三乎閣)에서 출간한 책이 유포되고 있으며, 1975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동양학총서 제4집으로 간행한 『박은식전서』 3권 중 상권에 초판본이 그대로 영인, 수록되어 있다.

 

 

한국통사는 한 나라의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결코 망한 것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서술된 것이다.

 

 

체재는 범례 · 목록 · 서 · 서언 · 삽화 · 제1편 2장 · 제2편 51장 · 제3편 61장 · 결론 · 후서 · 발 등으로 되어 있다. 삽화는 모두 12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항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집자한 제사(題辭), 제2항은 백두산 천지, 제3항은 고적으로 신라태종묘비 등 12점, 제4항은 이순신(李舜臣)의 철갑구선(鐵甲龜船), 제5항은 금강산, 제6항은 궁전의 명소, 제7항은 서울의 명소, 제8항은 한국황실, 제9항은 순종, 제10항은 황실의장과 경내명소, 제11항은 을사조약 · 한일신협약 때의 한국대신 및 일본대표, 제12장은 을사조약 이후 순국한 인물 등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1편은 서설편으로 지리와 역사의 대강을 적었다. 제1장은 한반도의 위치와 산천, 각 지방의 중요도시와 명승지 및 특산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장은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고종 즉위 전까지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실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대원군의 섭정에서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제1∼10장에서는 대원군이 집정해 하야하기까지의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서술하였다.

 

 

즉, 대원군이 집정하게 된 경위와 경복궁 중건―서원 철폐―세제 개혁―국방대책과 풍속 교정―천주교 탄압―병인양요―신미양요―일본과의 통상교섭 거부―대원군의 하야 경위 등이 그 내용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대원군의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강화를 위한 내정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었다고 하면서 통사(痛史)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1∼13장에서는 민씨정권에 의한 문호개방과 그에 따르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문호개방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부강해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4∼17장에서는 임오군란과 그 결과로 일어난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 및 일본측과의 제물포조약 체결, 청일 양국의 군대주둔 문제에 관해, 제18장에서는 구미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관해 서술하였다.

 

 

제19∼25장에서는 갑신정변에서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신정변에서 일본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개화당이 성공해 계속 집권하면 한국이 지나치게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고 하였다.

 

 

제26∼44장은 동학혁명에서부터 청일전쟁 · 갑오개혁을 거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실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동학혁명의 책임은 정부에 있고, 갑오개혁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제45∼47장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의병운동을, 제48∼51장은 아관파천과 그 뒤에 일어난 열강의 이권쟁탈에 관한 내용이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1898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때부터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제1장은 대한제국 성립 때의 국내사정과 독립협회 활동상을, 제2∼13장은 열강의 이권쟁탈,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서술하였다.

 

 

제14∼32장에서는 일제의 통신기관 강점, 일본선박의 내해항해의 자유권, 황무지개간 요구와 이의 반대운동,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 각 지방 광산채굴권 등의 장악 및 정치적으로 경찰권을 빼앗고 고문정치를 실시하는 과정과 러일전쟁과 강화조약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제33∼44장은 일제의 침략 앞에 매국과 애국에 관계된 인물들을 서술하였으며, 을사조약 강제체결의 경위와 일본의 이권침탈 및 문화유산 약탈상 등을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기(李沂) · 나인영(羅寅永) · 오기호(吳基鎬) · 김인식(金寅植) 등의 일본천황에게 보낸 항의문, 『황성신문』의 폐간과 장지연(張志淵)의 언론활동, 이상설(李相卨) · 이유승(李裕承) · 안병찬(安秉瓚) · 조병세(趙秉世) · 민영환(閔泳煥) 등의 을사조약 반대운동과 민영환 · 조병세 · 홍만식(洪萬植) · 송병선(宋秉璿) · 이상철(李相哲) · 김봉학(金奉學) 등의 순국, 최익현(崔益鉉)의 격문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목적으로 이용한 한국인은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 영선군(永宣君)이준용(李埈鎔) 등 황족, 박영효(朴泳孝) 등 당시의 국사범, 송병준(宋秉濬) · 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一進會)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제45∼61장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국권상실,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내용을, 제45장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의 농토를 약탈한 사실을, 제46장에서는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제47장은 고종의 퇴위사실을, 제48장에서는 정미7조약의 진상을, 제49장에서는 군대해산과 박승환(朴勝煥)의 순국 사실, 제50장에서는 군대해산 후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51∼58장에서는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상, 장인환(張仁煥) · 전명운(田明雲)의 의거, 이재명(李在明)의 의거,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등을, 제59∼61장에서는 국권상실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2)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는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국무령제 만든 후 스스로 물러나
사이토 총독 제거 계획 추진
독립군의 독립투쟁사 밝힌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독립운동을 이루려면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뤄야한다”

 

 

박은식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박은식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민족사학자였다.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을 통해 일제를 규탄하고 동포들의 독립투쟁 정신을 고취했다. 선생은 한국통사 등 우리 역사를 쓰는 이유에 대해 나라는 형체로써 무너졌으나 역사는 정신이라며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역사가 보존되면 나라도 부활한다고 했다.

 

선생은 강우규 의사와 함께 사이토 총독 제거 계획을 추진했다. 또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했고 임시정부가 분열의 위기를 맞자 이를 추스렸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선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꾼 후 스스로 물러났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1915년 『한국통사』의 결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박은식 선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암·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무치생(無恥生)이다.

 

일제시기 송상도(宋相燾)가 쓴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따르면 선생의 인상은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너그럽고 후했으며 소탈한 성품이었다.

 

선생은 1880년 경기도 광주(廣州)로 가서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들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인이었다. 선생은 이들을 통해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개혁론을 익혔다. 또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 체계 아래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를 통해 선생은 개혁적 사고를 가지게 된 것 같다”며 “이 같은 사상적 배경이 선생을 양반 관료제 사회의 질서를 고집하는 보수적 성리학의 틀에만 매어 있지 않고 근대적인 변화와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개신 유학자로 거듭나게 한 것 같다”고 했다.

 

 

이처럼 선생은 다양한 수학 과정을 거치며 양명학과 실학에 토대를 둔 현실적이며 근대적인 사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척사적 민족주의를 키워 갔다.

 

 

◇일제 침략 맞서 황성신문 주필로 민족의식 일깨워···민족교육 실천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선생은 개화 지식인들과 서울 민중들이 중심이 돼 전개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운동에서 문교 분야의 간부급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 해 9월 선생은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해 ‘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로 활동하면서 민중 계몽운동을 했다.

 

 

박은식 선생은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영국인 배설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자 이 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당시 일제는 1905년 11월 이른 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어 국권을 빼앗았다.

 

선생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황성신문이 강제 폐간될 때까지 여러 애국적 논설을 발표해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또 이 시기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국권을 되찾고 민족과 국가 간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선생은 자강운동 단체로 1906년 4월 조직된 대한자강회에 참여했다. 선생은 대한자강회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 발행에 관여하면서 여러 애국적인 논설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고, 민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웠다.

 

선생은 언론 계몽운동과 함께 교육 계몽운동에도 집중했다. 우리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교육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1906년 10월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교육 계몽운동 단체로 서우학회를 만들었다. 선생은 이 학회의 기관지인 ‘서우’의 발행을 맡아 교육 진흥과 민족 교육기관의 역할을 할 사립학교의 설립을 촉구했다.

 

선생 등의 노력으로 1908년 1월 서북인 중심의 서우학회와 관북인 중심의 한북흥학회가 통합해 서북학회가 창립했다.

서북학회의 회장을 맡은 선생은 그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를 통해 사립학교의 설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개설됐다. 선생은 이 두 학교의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또 선생은 서북협성학교의 분교 설립을 적극 추진해 1908년부터 1909년 말까지 전국 각지에 63개 지교(支校)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민중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운동에 나섰다.

 

 

◇국권회복운동 단체 ‘신민회’ 활동···중국의 최초 한국 독립운동단체 ‘동제사’ 결성

 

선생은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신채호 등이 결성한 신민회는 전국적인 비밀결사로 계몽운동 단체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다.

 

신민회는 민주 공화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국채보상·산업진흥·교육계몽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이끌었다. 또 ‘대한매일신보’ 발행을 통해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박은식 선생은 주로 교육과 언론·출판 부문에서 활동하며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국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화했다. 일제는 무단정치를 시행하면서 신민회 등 민족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또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서북학회월보 등 애국적인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일제는 박은식 선생의 저작 등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의 발행과 열람을 금지시켰다.

 

이에 선생은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1년 5월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역사서 집필을 통해 민족혼을 드높일 목적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에 있는 동지 윤세복의 집에 1년 동안 머물면서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집중했다. 이를 재만 한인 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하게 했다.

 

이 때 선생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을 저술했다. 민족 영웅호걸들에 대한 것이 많았다.

 

이는 선생이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이들과 같은 영웅호걸이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912년 3월 북경·천진·상해·남경 등지를 순방하며 망명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했다. 동제사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단체다. 신규식의 주도로 선생과 신채호·조소앙 등이 조직했다.

 

선생은 동제사의 총재를 맡았다. 동제사는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상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선생은 원세개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썼다. 보훈처는 “이는 근대적 민주 공화주의를 수용하고 있던 선생이 중국 국민혁명을 외곽에서 지원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했다.

 

◇한국통사 저작···“혼이 보존되면 국가는 부활할 것”

 

이후 선생은 상해에서 ‘안의사중근전(安義士重根傳)’을 집필했다. 또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 간행했다.

선생은 한국통사 서문에서 집필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나라)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

 

선생에게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진력하면서도 우리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한 이유였다.

 

한국통사는 1864년 대원군 집정으로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뤘다. 구체적으로 일반 정치사와 일제 침략사,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기술했다.

 

특히 일제 침략사에 초점을 맞춰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대내적으로는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했다.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아픈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투쟁의 정신을 고취하려 했다.

 

◇ 독립운동 세력 통합한 임시정부 수립 제의···강우규 의사와 사이토 총독 처단 계획 실행

 

선생은 1915년 3월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했다. 또 상해에서 신규식과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해 중국 관내 및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를 추진했다.

 

선생은 1917년 7월 신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했다.

 

보훈처는 “3·1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담아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박은식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의 이러한 노력의 기반 위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온 겨레가 참여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지원했다. 65세의 노인동맹단원인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파견해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하세가와 총독의 후임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이후 선생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해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했다. 선생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임시정부의 통합을 도왔다.

 

또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하고, 임정사료편찬회를 주도하면서 독립운동사료의 편찬 작업을 했다.

 

◇“열 번 밟혀도 일어나면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작

 

특히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관련 자료를 모아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책으로 써서 간행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선생은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고발했다. 3·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 발전되어 온 민족 독립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의한 봉기임을 밝혔다.

 

또 선생은 역사의 대세와 국제 정세가 일제가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계기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선생은 “백번 꺾어도 회절(回折)하지 않고, 열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고 최후의 승리를 위한 독립투쟁을 끌어올렸다.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선출···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꾼 후 스스로 물러나

 

선생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와 이념의 대립, 주요 구성원 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파탄으로 임시정부가 무력화되자 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썼다.

 

당시 임시의정원도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제의 핵심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임시의정원은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 유고안’을 결의했다. 그리고 12월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 선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했다.

 

선생은 이를 수락하고 임시의정원과 협조해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추진했다. 당시 정상화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각종 폐단을 가져온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내각 책임제 정부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이 독립운동세력이 분열된 당시 상황에서 각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대통령 대리로서 이를 앞장서 수행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힘썼다.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후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선생은 곧 바로 국무령제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했다. 이것이 통과되자 선생은 그 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선생은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악화돼 1925년 11월 1일 66세에 상해에서 서거했다. 선생은 “우리가 귀중한 독립운동을 반드시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뤄야한다”고 뒷일을 부탁했다.

 

선생의 유해는 서거 68년만인 1993년 8월 신규식·노백린·안태국·김인전 선생 등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3)

 

시사저널e, 이준영기자, 2020.03.28

 

 

 

 

https://youtu.be/PcSXxn0uIxA

 

 

 

 

<자료출처>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025

 

 

(2) 한국통사(韓國痛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3) [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혼이 보존되면 국가는 부활”···한국통사 쓴 박은식 - 시사저널e(sisajournal-e.com)2020.03.28

 

 

 

 

<참고자료>

 

 

박은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박은식, 고별사에서 '이상룡 협조요망'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동아플래시100]‘역사는 민족의 정신’ 외치며 임정 추스른 백암 별세|동아일보 (donga.com)2021-09-10 

 

 

 

“백암 선생은 세계인이었고 그의 역사서는 세계사였죠” (hani.co.kr)2021-08-26 

 

 

 

대종교인 박은식의 역사인식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박은식 '한국통사' 1915년 초판본, 경매 출품 (daum.net) 2021. 5. 15. 

 

 

 

 

 

 

 

 

 

 

 

 

[신간] 백암 박은식 평전·신라왕조실록 | 연합뉴스 (yna.co.kr)2017-09-07

 
 
 
 
 

 

"약기편람은 박은식의 '한국통사 초고본' 맞다" (daum.net)2012. 6. 27. 

 

 

박은식 '양명학실기' 100년만에 완역 (naver.com2010.12.06.

 

 

주체적 역사관으로 민족혼 되살린 백암 박은식 선생  - 천지일보 (newscj.com)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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